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할머니가 다른 도시에 흉터 없애주는데 능한 의사 선생님 한 분 계신다면서 나 대신 예약해줬어. 며칠 후에 실을 뽑으면 그때 시간 내서 나랑 같이 가줘.”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왜 같이 가줘야 하는데? 비서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없다고 해도 새 사람 청할 능력은 충분하잖아.”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난 네가 직접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또 시작이야. 어쩌면 날이 갈수록 더 뻔뻔해지는 거지?’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미안하지만 당신이랑 같이 가줄 시간 없어.”곽승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면서 다리에 담요까지 덮었다.“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회복될 때까지 날 간병해준다고 했으면 응당히 약속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너무 억지 부린다는 생각 안 들어?”“내가 언제 억지를 부렸다고 그래? 나 너 때문에 다친 거야. 게다가 날 간병해준다고 약속한 사람도 너야. 그런데 자꾸 네가 병원에 오는 걸 거부하니까 난 그저 내 발로 찾아왔을 뿐이야.”‘진짜 그까짓 상처 하나로 날 쫓아다니면서 피곤하게 만들 생각인 거야?’위장염 때문인지 곽승재는 평소보다 무기력해 보였고 얼굴도 약간 초췌해졌다. 눈살을 찌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걸 보아서는 어깨 쪽의 상처가 계속 아파 나는 듯했다.그날 곽승재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구하다가 다친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전미자를 보아서도 차마 신고하면서 그를 내쫓을 수가 없었다.“호텔에 남아있는 건 막지 않을게. 그런데 계속 똑같은 이유로 자꾸 나한테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고은서가 말했다.“좋아.”곽승재도 흔쾌히 승낙했다.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그를 보며 약간 불안해졌다. 그녀는 폰을 꺼내 들고 카메라를 켜면서 말했다.“촬영해서 기록 좀 남기게 다
고은서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곽승재를 보면서 말을 보태었다.“거실 바닥에서 자기 싫으면 다시 맞은 켠 방으로 돌아가. 아직 체크아웃 안 한 거로 알고 있는데.”곽승재는 예전부터 생활 퀄리티에 관해 요구가 높았는데 호텔도 오성급이 아니면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옷도 맞춤 제작이 아니면 입지 않았기에 그녀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고은서는 이 점을 이용해 일부러 그더러 바닥에서 자라고 제기했던 것이다.‘아무튼 난 호텔에 남아도 된다고만 했지 내 방에 남아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소파에서 일어섰다.고은서는 손을 털면서 이내 입을 열었다.“웨이터한테 방키를 가져다 달라고 연락해줄까?”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득의양양해 하고 있을 때 곽승재는 땅에 있는 이불과 베개를 주어 다시 방으로 가져오면서 말했다.“거실은 그냥 맨땅이어서 불편해. 차라리 카펫을 깐 방바닥이 나아.”고은서는 이 상황을 상상조차 못 했다.‘미친 거 아니야? 진짜 바닥에서 자려는 거야?’“당신 몸을 생각해서라도 폭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이 있는 맞은 켠 스위트룸에 가서 자는 게 더 좋지 않을까?”고은서가 애써 그를 설득해 자신의 방에서 내쫓으려고 했다.“방금전에는 바닥에서 자는 게 더 좋다며?”‘아무리 좋다고 해도 네 스위트룸에 있는 침대보다 더 좋겠니?’이미 그녀의 방에 남으려고 마음을 먹은 듯한 곽승재를 보면서 고은서는 순간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여기서 자는 것까진 허용해줄게. 그런데 밤중에 몰래 내 침대에 올라오거든 환자라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땐 진짜 밖으로 내쫓을 거니까 알아서 주의하도록 해.”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베개를 이불 위에 던지고 아까 소파에서 덮고 있던 담요를 가져오더니 이내 이불 위에 누워버렸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무시한 채 방금전에 하고 있던 스킨케어를 이어했다.곽승재는 땅에 누워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가녀린 몸매를 가진 그녀는 화장대
비록 그저 영상을 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곽승재에게 외도를 들킨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이젠 곽승재랑 부부 사이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일로 죄책감을 느껴야 해?’고은서는 영상 정지 버튼을 누르고 곽승재를 보며 말했다.“가까이 와서 볼래? 그러면 더 잘 보일 텐데.”곽승재는 진짜 그녀의 말대로 바닥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아이패드를 보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런 애들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 뚫어지라 쳐다보는 거야?”“볼 곳이 얼마나 많은데. 저 매끈한 몸선과 멋진 춤사위, 당신보다 훨씬 낫거든.”고은서는 일부러 아이패드를 들고 곽승재를 약 올렸다. 그녀는 곽승재가 화를 내면서 아이패드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이 일을 핑계로 그를 방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곽승재는 화를 내는 대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고은서, 내가 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몸 관리하면 예전처럼 나한테 관심 가져줄 수 있어?”고은서는 순간 멈칫했다.‘약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정장을 입고 춤을 추는 곽승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본 고은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일 것 같았다.“아니.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나 때문에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건 삼가줬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한테 감동 받을 일은 더는 없을 테니까.”그녀의 말을 들은 곽승재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바닥에 누웠다.‘인내심이 날이 갈수록 느는 것 같네.’고은서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영상을 끝까지 다 보고서야 잠에 들었다.이튿날, 잠에서 깬 고은서는 곽승재가 방 안에 없는 걸 발견했다.자신의 옆자리와 옆에 놓은 베개를 확인해 보았는데 누운 흔적 하나 없이 어젯밤 그대로였다.고은서는 화장실로 들어가 몸에 이상한 흔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시
고은서는 김치찌개를 반 그릇 정도 먹고 옆에 놓인 육전도 한 점 맛보았는데 육즙이 주르륵 흐르는 바람에 황급히 손을 턱 아래 받쳤다.바로 이때,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고은서 손이 기름 범벅이 된 탓에 곽승재가 그녀 대신 폰을 가져다주었다.화면에 뜬 도아름의 전화번호를 확인하자마자 고은서는 어제 그녀에게 부탁한 일을 떠올렸다.그녀는 손을 닦고 폰을 가지고 발코니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좋은 아침이에요, 아름 언니.”“내가 자는 걸 깨운 건 아니죠?”“아니에요, 방금 아침 먹고 있었어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답했다.도아름도 따라 웃으면서 그녀에게 대원에 있는 친구에게 비밀리에 고은혜를 보호할 사람을 대신 안배해달라고 이미 부탁했다고 전했다.그리고 그 친구의 연락처를 카톡으로 보냈으니 수시로 연락하면 된다고 말을 보태었다.“진짜 너무 고마워요, 언니.”고은서가 좋아하면서 도아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별로 큰일도 아닌데 괜찮아요.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얼마든지 연락해요.”“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도아름 친구의 카톡을 추가했다. 그리고 고은혜에게도 그 친구의 연락처를 보내주면서 그와 연락하라고 당부했다.거실로 돌아갔을 때 곽승재는 이미 아침 식사를 다 마쳤다.“무슨 일 있어?”“아무것도 아니야.”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침 식사 후 고은서는 곽승재를 병원으로 돌아가라고 방에서 쫓아내고는 이내 원지훈에게 연락했다.원지훈은 오후에 고은혜가 있는 대원으로 가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별일이 없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비록 도아름 친구에게도 연락해놓은 상황이지만 고은혜의 안전이 달린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차마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백유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직접 대원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그저 고은혜에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밖에 할 수 없었다.손에 있던 일을 다 처리한 후, 고은서는 웨이터에게 방 청소를 맡기고 제인 제약에 들렀다가 다시 ZY 그룹으로 갔다.사무실
‘어제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별다른 소리 없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한 거지?’“민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고은서는 아주 공식적인 말투로 물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그녀를 좋아하는 가능성이 아주 작긴 하나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별일 없으면 연락하면 안 돼?”“그러니까 볼 일이 없다는 거지?”고은서가 되물었다.“같이 밥 먹으러 가자.”“나 할 일이 있어...”“고은서,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해. 내가 널 좋아하거든 너한테 도망칠 기회를 줄 것 같아?”민시후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민 대표님, 이런 장난은 안 쳤으면 좋겠는데요...”“알았어. 그저 널 놀리려고 장난친 것 가지고 성가시게 구네. 설마 내가 진짜 널 좋아하겠니? 내려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그의 사무실은 투자 은행과 다른 층에 있었는데 내려온다고 해도 이삼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은서가 준비하고 가려고 할 때 계속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송민아를 발견했다.“송민아 씨, 아직도 퇴근 안 했어요?”고은서의 목소리에 송민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짜증과 피곤함으로 가득했다.“상관 마세요. 이 서류들 다 보고 갈 예정이니까요.”“일할 땐 수량보다 질이 우선이에요.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서류를 다 본다고 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퇴근하세요. 내일 시간 되는 대로 어떻게 하는지 제가 알려줄게요.”그러나 송민아는 약간 불쾌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회사에 당신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당신한테서 배워야 해요? 당신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관심해줘도 불만이 그렇게 많아.”바로 이때 민시후가 걸어오면서 차가운 눈길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가 싫으면 굳이 이곳에서 일할 필요 없어. 다른 편한 자리로 안배해 줄게. 그러면 서로 마주 보며 불쾌해할 일도 없고 좋잖아?”“시후 오빠, 지금 저 무시하는 거예요?”
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다.그러나 송민아를 볼 때마다 전생의 자신이 떠오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나도 오빠 없이 못 살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뒤에서 갑자기 송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견고한 눈빛을 하고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민시후,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이 계속 네가 내 남편이 될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않았으면 나도 널 이렇게까지 좋아하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거든!”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송민아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지금까지 들은 소식 중에서 제일 좋은 소식인 것 같네. 얼른 돌아가서 약혼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가족들한테 전해.”“너!”송민아는 화가 난 탓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를 악문 채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고은서는 송민아가 민시후를 향한 사랑을 거두어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직접 민시후를 향해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스타트였다.“쉽게 가질 수 있는 걸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건 모든 남자들의 본성인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그것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다르지. 글쎄 너라면 이유가 뭐든 상관없이 나랑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소중히 여길 것 같은데.”민시후가 껄렁껄렁한 말투로 답했다.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그를 힐끗 쏘아보고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민시후와 저녁을 먹은 후 그녀는 호텔로 돌아갔다.그녀가 고은혜에게 연락해 현재 상황에 관해 물으려고 할 때 갑자기 원지훈한테서 문자가 왔다.무슨 원인인지 모르겠지만 백유미가 갑자기 계획을 미루자고 한다는 내용이었다.이 문자를 확인한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혹시 우리 계획을 알아차린 건 아니지?][모르겠어요. 원래도 신중한 편이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부분이 있으면 계획을 뒤로 미루곤 했었어요.][요즘 어머니께서 백유미
가끔 고은서와 쇼핑하는 것 외에는 가정에만 집중했었다. 매일 집안일로 바삐 돌아 채야 했고 또 수많은 온씨 집안 규칙으로 골치 아파했다.전에 고은서가 그녀를 남편밖에 모른다고 하면서 모든 시간을 가정에 몰 붓는다고 장난치곤 했었는데 사실 온승준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아주 드물었다. 심지어 휴식날에도 그는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외출하는 걸 꺼려했다.운호 산장에 갔던 때도 그녀가 한참 타일러서야 함께 나선 것이었다.박지연은 코미디 영화 한 편을 선택한 후 팝콘과 콜라까지 챙기고 영화관 입장 시간을 기다렸다. 비록 모든 게 온승준이 평소에 싫어하는 것들이지만 지금은 혼자였기에 별 상관이 없었다.“지연 씨?”박지연이 영화관에 입장하려고 할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육현석이었다.그의 곁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친구들이 북적북적했는데 그의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박지연한테로 쏠렸다.“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현석 씨도 영화 보러 온 거예요?”박지연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네, 룸 하나를 전세 내고 맡았는데 우리 이쁜 아가씨도 함께 볼래요?”육현석 옆에 있던 친구 한 명이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박지연은 손에 있는 영화표를 그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기회 되면 다음에 같이 봐요. 오늘은 이미 표까지 다 구매해서 안 될 것 같네요.”“괜찮아요. 무슨 영화 보는데요? 룸 하나 더 맡으면 되죠.”육현석의 또 다른 친구가 말을 보태었다.“창피하게 굴지 말고 입 다물고 저리 가.”육현석이 보다 못해 그들을 쫓았다. 그는 희희덕거리며 VIP룸으로 들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박지연을 향해 설명했다.“원래 저런 성격이에요. 나쁜 애들은 아니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별일도 아닌데 제가 왜 기분 나빠하겠어요. 얼른 가보세요. 저도 곧 방영 시간이라 들어가야 해요.”박지연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육현석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박지연이 룸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육현석이 따라 들어왔다
육현석은 눈치 있게 더는 묻지 않았다.“스트레스 다 풀리게 한 잔 더 마셔.”두 사람은 너무 늦게까지 마시지 않았다. 육현석의 친구들도 영화 관람을 마치고 그를 찾으러 칵테일바로 왔다.박지연은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먼저 가기로 했다.육현석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놓을게.”박지연이 그의 호의를 거절하려고 할 때 그가 말을 보태었다.“이 늦은 시간에 여자애 혼자 집 가는 게 위험해 보여서 그러는 거야. 내 말 듣고 안전하게 집으로 가.”박지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육현석은 그녀를 차에 태워주고 칵테일바로 다시 돌아갔는데 친구들은 그를 보자마자 장난치기 시작했다.“어머, 보내주기 싫은 거 보내는 거 아니야? 직접 차에 태워주기까지 하고 말이야.”그러나 육현석이 엄숙한 목소리로 반박했다.“닥쳐! 이미 가정이 있는 사람이야.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그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하나둘씩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육현석의 심각한 표정 때문에 더는 장난치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간 박지연은 집 안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슬리퍼로 갈아신고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는 조수연을 보았다.조수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어디 갔다 오는 거야? 전화는 왜 또 안 받아?”박지연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답했다.“영화 보러 갔다 왔어요.”“집안일도 하지 않고 내 전화도 받지 않으면서 지금 영화 보러 갔다 왔다는 거야?”“무음모드로 해놓아서 받지 못했어요. 무슨 일이세요?”박지연은 서재 쪽을 힐끔 보았는데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말인즉슨 온승준도 집에 있다는 것이다.“내가 무슨 일로 왔는지 뻔히 알면서 뭘 물어? 대체 넌 뭐 하고 사는 거니? 승준이 아침도 챙겨주지 않고 집안이 이 정도로 어지럽혀졌는데도 청소할 줄도 모르고 심지어 그릇도 이틀째 씻지 않았다며? 아내 노릇을 할 것이면 제대로 해야지!”박지연은 조수연의 잔소리에 응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어루만지
고은서의 제안에 여시은이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바쁩니다.”여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곽 대표님, 한가해도 저랑 가지 않을 거잖아요! 곽 대표님 안목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말을 마친 여시은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곽 대표님이 고양이 돌보게 두고 넌 나랑 같이 가자. 다른 고양이한테 정신 팔려서 쿠아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결국 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삼색 고양이를 보러 갔다.고양이는 귀여웠지만 쿠아는 그 고양이를 경계하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겁을 먹은 듯 보였다.“삼색 고양이는 고양이 세계의 미녀라 누구든 보면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쿠아는 싫어하는 거지?”여시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쿠아가 아직 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그러네. 그럼 그냥 쿠아를 혼자 두는 게 낫겠다. 괜히 다른 고양이를 들여서 외롭다고 느끼게 만들면 안 되잖아.”여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쿠아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녀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문득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졌다.‘여시은이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까?’일부러 SNS에 사진을 올려 곽승재를 현장으로 불러내 그 앞에서 친밀하게 행동했지만 정작 여시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정말 곽승재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연기력이 뛰어난 걸까?’고은서는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오후가 되어서야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여시은은 곽승재에게 고은서를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며 그녀는 쿠아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퀸은 한없이 애교를 부렸다.고은서가 안고 있으면 자꾸만 얼굴에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탓에 마음이 무너져내린 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차를 타기로 했다.가는 길에 고은서는 무심하게 곽승연의 근황을 물었다.‘호원 저택에 가 있긴 하지만 어머니가 자주 본가로 데리고 나와. 게다가 심리 상담도 받고 아로마 테라피도 병행하는 중이라 상태는 나쁘지 않아.’
고은서는 어릴 적 드럼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멋진 별명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퀸이었다.예전에 곽승재를 쫓아다닐 때 재미 삼아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당시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갑자기 그 얘기를 꺼낸 걸 보면 기억하는 걸까?’그가 기억하든 말든 고은서는 굳이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마음대로 해.”어차피 그 별명은 중2병 시절에 장난으로 붙인 거였고 이제는 고양이 이름으로 써도 나쁘지 않았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려다 뜻밖에도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연정이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곽승연을 데리고 나오는 대신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무테안경을 쓴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남자는 세련되게 차려입었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차분함이 느껴졌다.우연히 마주친 건지 일부러 약속을 잡은 건지 남자의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서연정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이 그 남자는 서연정의 구애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왜 그래?”곽승재는 한참 동안 반응 없는 고은서를 보며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궁금해했다.“곽승재!”곽승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고은서가 그를 불러 세웠다.곽승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두어 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얼른 핑계를 지어냈다.“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좀 봐줄래?”그러면서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곽승재에게 다가섰다.“어느 쪽?”“오른쪽!”곽승재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그 안에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고 햇빛이 비치는 그녀의 하얀 얼굴은 가느다란 솜털까지 선명하게 드러냈다.연분홍빛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곽승재는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고은서는 깜짝 놀라 곽승재를
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품에 안고 있던 아기 고양이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놀란 척하며 곽승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곽승재는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그녀의 팔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걸 신경 쓰는 듯 먼저 팔을 지탱했다가 곧 허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코끝에는 익숙한 삼나무 향이 은은하게 스쳤다.고은서는 불쾌감을 참아내며 그릴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쿠아에게만 신경을 쓰며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뿐 두 사람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아, 망했다. 괜히 연기했네. 완전 헛수고잖아.”그 순간 곽승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손은 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올리며 상태를 확인했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괜찮아. 아기 고양이라 이가 아직 덜 자라서 가볍게 물렸을 뿐이야.”그렇게 말한 뒤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손끝을 살짝 문지르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무대 쪽에는 행사 주최 측뿐만 아니라 고양이 사육 전문가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인지라 이런 자리에서도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한편 고은서는 사육 전문가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쿠아가 심하게 낯을 가리는 문제가 떠올라 전문가에게 문의했다.전문가는 차분히 설명했다.“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쳤다면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럴 땐 장난감과 간식을 준비해 주고 주인이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 서서히 나아질 겁니다.”장난감과 간식은 여시은이 충분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 보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다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깜짝 놀라거나 털을 세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