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할머니가 다른 도시에 흉터 없애주는데 능한 의사 선생님 한 분 계신다면서 나 대신 예약해줬어. 며칠 후에 실을 뽑으면 그때 시간 내서 나랑 같이 가줘.”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왜 같이 가줘야 하는데? 비서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없다고 해도 새 사람 청할 능력은 충분하잖아.”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난 네가 직접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또 시작이야. 어쩌면 날이 갈수록 더 뻔뻔해지는 거지?’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미안하지만 당신이랑 같이 가줄 시간 없어.”곽승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면서 다리에 담요까지 덮었다.“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회복될 때까지 날 간병해준다고 했으면 응당히 약속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너무 억지 부린다는 생각 안 들어?”“내가 언제 억지를 부렸다고 그래? 나 너 때문에 다친 거야. 게다가 날 간병해준다고 약속한 사람도 너야. 그런데 자꾸 네가 병원에 오는 걸 거부하니까 난 그저 내 발로 찾아왔을 뿐이야.”‘진짜 그까짓 상처 하나로 날 쫓아다니면서 피곤하게 만들 생각인 거야?’위장염 때문인지 곽승재는 평소보다 무기력해 보였고 얼굴도 약간 초췌해졌다. 눈살을 찌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걸 보아서는 어깨 쪽의 상처가 계속 아파 나는 듯했다.그날 곽승재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구하다가 다친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전미자를 보아서도 차마 신고하면서 그를 내쫓을 수가 없었다.“호텔에 남아있는 건 막지 않을게. 그런데 계속 똑같은 이유로 자꾸 나한테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고은서가 말했다.“좋아.”곽승재도 흔쾌히 승낙했다.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그를 보며 약간 불안해졌다. 그녀는 폰을 꺼내 들고 카메라를 켜면서 말했다.“촬영해서 기록 좀 남기게 다
고은서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곽승재를 보면서 말을 보태었다.“거실 바닥에서 자기 싫으면 다시 맞은 켠 방으로 돌아가. 아직 체크아웃 안 한 거로 알고 있는데.”곽승재는 예전부터 생활 퀄리티에 관해 요구가 높았는데 호텔도 오성급이 아니면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옷도 맞춤 제작이 아니면 입지 않았기에 그녀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고은서는 이 점을 이용해 일부러 그더러 바닥에서 자라고 제기했던 것이다.‘아무튼 난 호텔에 남아도 된다고만 했지 내 방에 남아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소파에서 일어섰다.고은서는 손을 털면서 이내 입을 열었다.“웨이터한테 방키를 가져다 달라고 연락해줄까?”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득의양양해 하고 있을 때 곽승재는 땅에 있는 이불과 베개를 주어 다시 방으로 가져오면서 말했다.“거실은 그냥 맨땅이어서 불편해. 차라리 카펫을 깐 방바닥이 나아.”고은서는 이 상황을 상상조차 못 했다.‘미친 거 아니야? 진짜 바닥에서 자려는 거야?’“당신 몸을 생각해서라도 폭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이 있는 맞은 켠 스위트룸에 가서 자는 게 더 좋지 않을까?”고은서가 애써 그를 설득해 자신의 방에서 내쫓으려고 했다.“방금전에는 바닥에서 자는 게 더 좋다며?”‘아무리 좋다고 해도 네 스위트룸에 있는 침대보다 더 좋겠니?’이미 그녀의 방에 남으려고 마음을 먹은 듯한 곽승재를 보면서 고은서는 순간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여기서 자는 것까진 허용해줄게. 그런데 밤중에 몰래 내 침대에 올라오거든 환자라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땐 진짜 밖으로 내쫓을 거니까 알아서 주의하도록 해.”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베개를 이불 위에 던지고 아까 소파에서 덮고 있던 담요를 가져오더니 이내 이불 위에 누워버렸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무시한 채 방금전에 하고 있던 스킨케어를 이어했다.곽승재는 땅에 누워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가녀린 몸매를 가진 그녀는 화장대
비록 그저 영상을 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곽승재에게 외도를 들킨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이젠 곽승재랑 부부 사이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일로 죄책감을 느껴야 해?’고은서는 영상 정지 버튼을 누르고 곽승재를 보며 말했다.“가까이 와서 볼래? 그러면 더 잘 보일 텐데.”곽승재는 진짜 그녀의 말대로 바닥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아이패드를 보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런 애들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 뚫어지라 쳐다보는 거야?”“볼 곳이 얼마나 많은데. 저 매끈한 몸선과 멋진 춤사위, 당신보다 훨씬 낫거든.”고은서는 일부러 아이패드를 들고 곽승재를 약 올렸다. 그녀는 곽승재가 화를 내면서 아이패드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이 일을 핑계로 그를 방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곽승재는 화를 내는 대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고은서, 내가 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몸 관리하면 예전처럼 나한테 관심 가져줄 수 있어?”고은서는 순간 멈칫했다.‘약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정장을 입고 춤을 추는 곽승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본 고은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일 것 같았다.“아니.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나 때문에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건 삼가줬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한테 감동 받을 일은 더는 없을 테니까.”그녀의 말을 들은 곽승재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바닥에 누웠다.‘인내심이 날이 갈수록 느는 것 같네.’고은서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영상을 끝까지 다 보고서야 잠에 들었다.이튿날, 잠에서 깬 고은서는 곽승재가 방 안에 없는 걸 발견했다.자신의 옆자리와 옆에 놓은 베개를 확인해 보았는데 누운 흔적 하나 없이 어젯밤 그대로였다.고은서는 화장실로 들어가 몸에 이상한 흔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시
고은서는 김치찌개를 반 그릇 정도 먹고 옆에 놓인 육전도 한 점 맛보았는데 육즙이 주르륵 흐르는 바람에 황급히 손을 턱 아래 받쳤다.바로 이때,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고은서 손이 기름 범벅이 된 탓에 곽승재가 그녀 대신 폰을 가져다주었다.화면에 뜬 도아름의 전화번호를 확인하자마자 고은서는 어제 그녀에게 부탁한 일을 떠올렸다.그녀는 손을 닦고 폰을 가지고 발코니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좋은 아침이에요, 아름 언니.”“내가 자는 걸 깨운 건 아니죠?”“아니에요, 방금 아침 먹고 있었어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답했다.도아름도 따라 웃으면서 그녀에게 대원에 있는 친구에게 비밀리에 고은혜를 보호할 사람을 대신 안배해달라고 이미 부탁했다고 전했다.그리고 그 친구의 연락처를 카톡으로 보냈으니 수시로 연락하면 된다고 말을 보태었다.“진짜 너무 고마워요, 언니.”고은서가 좋아하면서 도아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별로 큰일도 아닌데 괜찮아요.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얼마든지 연락해요.”“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도아름 친구의 카톡을 추가했다. 그리고 고은혜에게도 그 친구의 연락처를 보내주면서 그와 연락하라고 당부했다.거실로 돌아갔을 때 곽승재는 이미 아침 식사를 다 마쳤다.“무슨 일 있어?”“아무것도 아니야.”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침 식사 후 고은서는 곽승재를 병원으로 돌아가라고 방에서 쫓아내고는 이내 원지훈에게 연락했다.원지훈은 오후에 고은혜가 있는 대원으로 가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별일이 없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비록 도아름 친구에게도 연락해놓은 상황이지만 고은혜의 안전이 달린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차마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백유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직접 대원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그저 고은혜에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밖에 할 수 없었다.손에 있던 일을 다 처리한 후, 고은서는 웨이터에게 방 청소를 맡기고 제인 제약에 들렀다가 다시 ZY 그룹으로 갔다.사무실
‘어제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별다른 소리 없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한 거지?’“민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고은서는 아주 공식적인 말투로 물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그녀를 좋아하는 가능성이 아주 작긴 하나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별일 없으면 연락하면 안 돼?”“그러니까 볼 일이 없다는 거지?”고은서가 되물었다.“같이 밥 먹으러 가자.”“나 할 일이 있어...”“고은서,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해. 내가 널 좋아하거든 너한테 도망칠 기회를 줄 것 같아?”민시후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민 대표님, 이런 장난은 안 쳤으면 좋겠는데요...”“알았어. 그저 널 놀리려고 장난친 것 가지고 성가시게 구네. 설마 내가 진짜 널 좋아하겠니? 내려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그의 사무실은 투자 은행과 다른 층에 있었는데 내려온다고 해도 이삼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은서가 준비하고 가려고 할 때 계속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송민아를 발견했다.“송민아 씨, 아직도 퇴근 안 했어요?”고은서의 목소리에 송민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짜증과 피곤함으로 가득했다.“상관 마세요. 이 서류들 다 보고 갈 예정이니까요.”“일할 땐 수량보다 질이 우선이에요.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서류를 다 본다고 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퇴근하세요. 내일 시간 되는 대로 어떻게 하는지 제가 알려줄게요.”그러나 송민아는 약간 불쾌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회사에 당신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당신한테서 배워야 해요? 당신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관심해줘도 불만이 그렇게 많아.”바로 이때 민시후가 걸어오면서 차가운 눈길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가 싫으면 굳이 이곳에서 일할 필요 없어. 다른 편한 자리로 안배해 줄게. 그러면 서로 마주 보며 불쾌해할 일도 없고 좋잖아?”“시후 오빠, 지금 저 무시하는 거예요?”
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다.그러나 송민아를 볼 때마다 전생의 자신이 떠오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나도 오빠 없이 못 살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뒤에서 갑자기 송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견고한 눈빛을 하고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민시후,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이 계속 네가 내 남편이 될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않았으면 나도 널 이렇게까지 좋아하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거든!”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송민아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지금까지 들은 소식 중에서 제일 좋은 소식인 것 같네. 얼른 돌아가서 약혼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가족들한테 전해.”“너!”송민아는 화가 난 탓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를 악문 채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고은서는 송민아가 민시후를 향한 사랑을 거두어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직접 민시후를 향해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스타트였다.“쉽게 가질 수 있는 걸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건 모든 남자들의 본성인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그것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다르지. 글쎄 너라면 이유가 뭐든 상관없이 나랑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소중히 여길 것 같은데.”민시후가 껄렁껄렁한 말투로 답했다.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그를 힐끗 쏘아보고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민시후와 저녁을 먹은 후 그녀는 호텔로 돌아갔다.그녀가 고은혜에게 연락해 현재 상황에 관해 물으려고 할 때 갑자기 원지훈한테서 문자가 왔다.무슨 원인인지 모르겠지만 백유미가 갑자기 계획을 미루자고 한다는 내용이었다.이 문자를 확인한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혹시 우리 계획을 알아차린 건 아니지?][모르겠어요. 원래도 신중한 편이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부분이 있으면 계획을 뒤로 미루곤 했었어요.][요즘 어머니께서 백유미
가끔 고은서와 쇼핑하는 것 외에는 가정에만 집중했었다. 매일 집안일로 바삐 돌아 채야 했고 또 수많은 온씨 집안 규칙으로 골치 아파했다.전에 고은서가 그녀를 남편밖에 모른다고 하면서 모든 시간을 가정에 몰 붓는다고 장난치곤 했었는데 사실 온승준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아주 드물었다. 심지어 휴식날에도 그는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외출하는 걸 꺼려했다.운호 산장에 갔던 때도 그녀가 한참 타일러서야 함께 나선 것이었다.박지연은 코미디 영화 한 편을 선택한 후 팝콘과 콜라까지 챙기고 영화관 입장 시간을 기다렸다. 비록 모든 게 온승준이 평소에 싫어하는 것들이지만 지금은 혼자였기에 별 상관이 없었다.“지연 씨?”박지연이 영화관에 입장하려고 할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육현석이었다.그의 곁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친구들이 북적북적했는데 그의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박지연한테로 쏠렸다.“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현석 씨도 영화 보러 온 거예요?”박지연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네, 룸 하나를 전세 내고 맡았는데 우리 이쁜 아가씨도 함께 볼래요?”육현석 옆에 있던 친구 한 명이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박지연은 손에 있는 영화표를 그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기회 되면 다음에 같이 봐요. 오늘은 이미 표까지 다 구매해서 안 될 것 같네요.”“괜찮아요. 무슨 영화 보는데요? 룸 하나 더 맡으면 되죠.”육현석의 또 다른 친구가 말을 보태었다.“창피하게 굴지 말고 입 다물고 저리 가.”육현석이 보다 못해 그들을 쫓았다. 그는 희희덕거리며 VIP룸으로 들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박지연을 향해 설명했다.“원래 저런 성격이에요. 나쁜 애들은 아니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별일도 아닌데 제가 왜 기분 나빠하겠어요. 얼른 가보세요. 저도 곧 방영 시간이라 들어가야 해요.”박지연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육현석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박지연이 룸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육현석이 따라 들어왔다
육현석은 눈치 있게 더는 묻지 않았다.“스트레스 다 풀리게 한 잔 더 마셔.”두 사람은 너무 늦게까지 마시지 않았다. 육현석의 친구들도 영화 관람을 마치고 그를 찾으러 칵테일바로 왔다.박지연은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먼저 가기로 했다.육현석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놓을게.”박지연이 그의 호의를 거절하려고 할 때 그가 말을 보태었다.“이 늦은 시간에 여자애 혼자 집 가는 게 위험해 보여서 그러는 거야. 내 말 듣고 안전하게 집으로 가.”박지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육현석은 그녀를 차에 태워주고 칵테일바로 다시 돌아갔는데 친구들은 그를 보자마자 장난치기 시작했다.“어머, 보내주기 싫은 거 보내는 거 아니야? 직접 차에 태워주기까지 하고 말이야.”그러나 육현석이 엄숙한 목소리로 반박했다.“닥쳐! 이미 가정이 있는 사람이야.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그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하나둘씩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육현석의 심각한 표정 때문에 더는 장난치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간 박지연은 집 안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슬리퍼로 갈아신고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는 조수연을 보았다.조수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어디 갔다 오는 거야? 전화는 왜 또 안 받아?”박지연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답했다.“영화 보러 갔다 왔어요.”“집안일도 하지 않고 내 전화도 받지 않으면서 지금 영화 보러 갔다 왔다는 거야?”“무음모드로 해놓아서 받지 못했어요. 무슨 일이세요?”박지연은 서재 쪽을 힐끔 보았는데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말인즉슨 온승준도 집에 있다는 것이다.“내가 무슨 일로 왔는지 뻔히 알면서 뭘 물어? 대체 넌 뭐 하고 사는 거니? 승준이 아침도 챙겨주지 않고 집안이 이 정도로 어지럽혀졌는데도 청소할 줄도 모르고 심지어 그릇도 이틀째 씻지 않았다며? 아내 노릇을 할 것이면 제대로 해야지!”박지연은 조수연의 잔소리에 응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어루만지
고은서가 여시은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며 미소를 지었다.“시은 씨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네요.”여시은은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곽 대표님은 저보다 은서 씨를 더 보고 싶어 할 걸요? 같이 가면 제가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어때요?”여시은은 고은서의 팔을 붙잡고 병실로 이끌었다.여시은의 비서는 문을 두드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예기치 않게 곽승재의 병실에 들어섰다.곽승재는 VIP 스위트룸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실과 오픈형 주방 작은 재활실이 있었으며 병상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주민기에게 업무 보고를 듣고 있었다.소리를 들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고은서를 바라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은서의 방문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사모님, 시은 씨.”주민기는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네고 한쪽으로 물러났다.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시은은 상냥하게 말했다.“주 비서님께서도 계셨네요.”여시은은 곧장 곽승재에게 말을 건넸다.“곽 대표님,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대신 제가 왔어요. 마침 은서 씨를 마주쳐서 같이 왔지 뭐예요?”여시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귀여웠다.“곽 대표님, 너무 감사하죠?”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갖춰 말했다.“감사합니다. 여시은 씨. 아저씨한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그럼요.”여시은은 눈빛으로 비서에게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라고 지시했다.“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과일 좀 준비했어요. 성의 없어 보인다고 하진 말아주세요.”곽승재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눈길은 여전히 고은서에게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수중에 들린 도시락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은서도 곽승재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에게 말하는 대신 여시은에게 말을 건넸다.“시은 씨. 얘기 나눠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떤 여시은이 작은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부탁했다.“은서 씨, 저도 대표님이랑 친하지
이메일 알림 소리가 울리자 온승준이 압축 파일을 열고 비디오를 재생했다.어머니의 말은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않았지만 박지연이 독신으로 살아도 다시는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은 온승준의 마음을 깊게 찔렀다.그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며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고은서는 조수연이 온 일로 인해 벌어진 소동을 들었다.고은서는 화내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낯으로 와서 너한테 난리 치는지 모르겠네? 다음에는 그냥 신고해 버려.”박지연은 이미 화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응. 다음엔 바로 신고할게.”고은서는 박지연을 몇 번 쳐다보며 물었다.“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박지연은 고은서를 향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지금 나 얕보는 거야? 그런 사람 주위에 많아. 더 심한 사람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지내고 있다고. 전에는 시어머니니까, 중간에 낀 온승준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좀 존중하려고 했지. 하지만 이제 상관없어. 욕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고은서는 박지연의 태도에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좋네. 제대로 정신 차린 거 맞네. 응원해.”박지연은 그 칭찬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점점 더 감탄했다. 이혼 이후 박지연은 한 번도 온승준이나 그와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이혼한 날 밤 잠시 울고 소리 지른 후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걱정하거나 마음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박지연의 말에 따르면 전에 발생한 일은 모두 허상으로 그 누구도 허상을 위해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그날 밤, 박지연은 온승준에게서 온 사과 문자를 받았다.[어머니 대신 사과할게. 앞으로는 다시 너를 찾는 일은 없을 거야.]박지연은 문자를 확인하고는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거뒀다.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고은서는 먼저 ZY 그룹에 들러 송민아와 몇 가지 업무를 마친 뒤 민시후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은서는 우연히 여시은을 마주쳤다.여시은은 비서
온승준이 급히 자신의 어머니를 막아섰다.“뭐 하시려는 거예요?”조수연이 분노하며 말했다.“쟤 상사한테 가서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욕보일 수 있냐고 따지려고.”“어머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온승준이 목소리를 높이자 조수연은 더 화를 내며 말했다.“승준아, 엄마한테 무슨 말투야? 박지연 때문에 나랑 또 싸우려고? 너 그 여자가 우리를 어떻게 협박했는지 잊은 거야? 박지연이 우리를 얼마나 하찮게 얘기했는지 기억 안 나? 굳이 이혼하겠다고 난리 쳐서 이혼했으면서 왜 또 뒤꽁무니 쫓아온 거야!”온승준이 짜증 내며 말했다.“지연이도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요. 우리도 지연이에게 잘해준 거 없어요.”“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조수연은 분노로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뭘 못해 줬는데? 네 아내로서 널 돌보고 시부모 돌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을 왜 못 하겠다는 건데? 게다가 그런 학력과 직업으로 우리 집에 시집온 걸 감사해야지!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성격은 왜 그 모양이야? 몇 마디 했다고 바로 말대꾸하고. 미리 얘기하는데 나랑 네 아버지는 박지연이 다시 우리 집안에 들어오는 거 절대로 반대다.”온승준이 싸늘한 말투도 답했다.“지연이도 우리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아 해요. 이제는 저랑 말도 잘 안 한다고요.”“마침 잘됐네. 이제 박지연한테 그만 굽신거리고 얼른 이전에 있던 병원으로 돌아가. 혜린이도 싫으면 엄마가 성격 좋고 집안 좋은 여자들 소개해 줄게.”“어머니!”온승준이 조수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다른 여자는 싫어요. 직장도 그만두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정말 저를 위한다면 아버지랑 같이 와서 지연이한테 사과해 주세요.”“우리가 사과하라고?”조수연은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그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사과를 받아!”온승준은 더 이상 조수연과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그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박지연은 간호사실에서 동료들에게 일을 맡기고 옷을 갈아입은
박지연도 온승준을 발견하고는 고은서에게 말했다.“병실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그래.”그때 온승준이 박지연을 불렀다.“지연아.”“두 사람이 얘기해. 난 먼저 들어갈게.”“은서 씨.”온승준이 고은서를 부르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평소 불필요한 교류는 하지 않는 온승준이 이렇게 먼저 나한테 말을 건넨다고?’“지연이 동료들에게서 들었는데 은서 씨 친구가 다쳤다면서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온승준이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고은서는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방으로 향했고 박지연은 온승준을 차분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심장외과 쪽에서 환자를 보고 있었는데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잠깐 들러봤어.”온승준은 박지연이 기분 나빠 할까 봐 해명했다.“그럴 필요 없는데. 온 선생님 업무도 바쁜 데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마.”온승준은 말문이 막혔지만 다시 한번 물었다.“그동안 병원에 없던데 괜찮아?”“무슨 일 있었으면 출근도 못 했겠지?”박지연은 약간 짜증이 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온 선생님, 다른 일 없으면 가. 난 아직 할 일이 많아서.”온승준은 잠시 묵묵히 서 있었다.병원에서 근무한 지 반달이 넘었지만 그는 박지연을 자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겨우 마주쳤지만 박지연이 낯선 사람을 대하듯 그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요 며칠 박지연이 연차를 냈다는 사실도 그녀의 동료에게서 우연히 들은 것이었다.이전의 박지연은 어디를 가든, 뭘 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모두 그에게 공유했었다.하지만 박지연은 이제 그녀의 세상에서 온승준이라는 사람을 지우기라도 한 듯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온승준이 먼저 연락하려 했지만 번호도 차단당한 듯했다.온승준은 겨우 만난 박지연과 이렇게 빨리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친구랑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식사 한 끼 대접할게.”온승준은 겨우 타당한 이유 하나를 찾았다.이혼 전날 밤
고은서가 갑자기 경계의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하루 세 통 이상은 안 돼.”“세 통은 너무 적어. 다섯 통.”“네 통. 더는 안돼. 그게 한계야.”민시후도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았다.마침 두 사람의 협상 장면을 마주한 박지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은서야, 잠깐만 나와 줄래? 할 말이 있어.”고은서는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앉았다.“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박지연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고은서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수간호사님, 그렇게 한가하시면 차라리 가십 팀 팀장 하나 맡으세요.”“오, 괜찮네. 좋은 팀 있으면 소개해 줄래?”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자, 이제 얘기해 봐. 왜 불러낸 거야?”박지연이 비로소 본론을 말했다.“곽승재가 우리 병원에 와서 치료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병원 측에서는 곽승재를 위해 제일 좋은 병실과 의사를 준비한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조금 전 곽씨 일가 본가에서 마주쳤을 때 곽승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이 병원에 오기로 했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을 거고 네가 자주 여기 올 거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일부러 우리 병원을 선택한 거야. 곽승재도 참 재밌어. 한 편으로는 널 놓지 못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백유미에게 너그럽잖아. 하지만 육현석이 말하길 백유미는 아직 T 국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대. 범가온이 백유미를 죽도록 때려서 이제는 호흡기까지 달아야 한대.”박지연은 오후에 육현석과 통화하며 들은 내용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은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T 국 병원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았다.따라서 그녀는 백유미에게 한 폭력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범가온은 굉장히 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다.‘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
“얼른 와서 은서랑 인사하지 않고 거기서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전미자가 말했다.장순이 과일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갔다.곽승재는 느린 걸음으로 그녀들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고은서를 어두운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본 뒤 입술을 약간 움직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요 며칠 뭐하면서 지낸 거야? 왜 이렇게 병든 고양이처럼 힘이 없어 보여?”전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할머니, 제가 T 국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승재는 저를 도와주려다가 다쳤어요.”고은서가 솔직하게 말했다.“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너무 다그치지 말아 주세요.”‘은서를 도와주고도 은서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니. 내가 모르는 일들이 더 많이 있었겠네.’전미자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몰래 한숨을 쉰 후 더 이상 곽승재를 질책하지 않았다.“할머니, 저 친구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저녁은 가서 먹을게요.”곽승재가 돌아오지 않은 줄 알고 저녁을 함께 먹겠다고 했던 고은서였지만 그가 돌아오자 고은서는 그와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전미자는 다시 한번 나서 고은서를 잡으려 했다.“주방에도 다 준비했는데 먹고 가. 급한 거 아니잖아.”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제안은 감사하지만 먼저 가볼게요.”전미자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은서야, 시간 나면 자주 와.”“네. 할머니, 다음에 봬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곽승재가 말하자 고은서는 싸늘한 어조가 아닌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괜찮아. 넌 좀 쉬어.”곽승재는 그 말에 다시 한층 더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그저 고은서가 밖으로 나갈 때 뒤따라 나갔다.고은서가 차키를 누르자 곽승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어깨는 이제 괜찮아졌어?”고은서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평온하게 답했다.“응, 괜찮아.”말을 마친 고은서가 운전석에 앉으려 했다.“민시후를 돌보려고 병원에 급하
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재랑 이혼할 때 급해서 제때 돌려드리지 못했어요.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가져왔어요.”“은서야, 이건 할머니가 너한테 준 선물이야. 그걸 돌려주면 이 할머니가 섭섭하잖니?”전미자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말했다.“할머니 마음은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이건 원래 미래 손자며느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잖아요. 그런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요.”고은서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담긴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이것도 저 대신 곽승재한테 전해 주세요.”지난번 곽승재가 가져갔던 브로치를 다시 돌려주려 하자 전미자는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은서야, 할머니는 너와 승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승재가 또 너를 실망하게 했겠지. 너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날 너무 어려워하지 말렴. 이 목걸이는 손자며느리를 위한 게 아니라 너에게 준 선물이야.”전미자가 말을 이었다.“너처럼 똑똑하고 착한 아이가 승재와의 결혼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지. 할머니도 다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네가 승재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한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네가 힘들 걸 알면서도 네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고은서는 전미자의 따뜻한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곽승재랑 결혼한 건 제 고집이지 할머니랑 상관없는 일이었잖아요. 목걸이를 돌려드리는 것도 할머니랑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목걸이가 할머니에게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서예요.”“뭐가 부적절하다는 거야? 너도 1년 넘게 내 손자며느리로 살았잖니. 내가 준 선물을 돌려주면 내가 얼마나 속상하겠니?”그 말에 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느끼고 말했다.“할머니께서 제가 주시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그래야지.”전미자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보며 말했다.“이건 승재가 네가 좋아한다고
유성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에게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아.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다만 내가 항상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고은서는 유성준이 몇 년 동안 자신을 좋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기 뜻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 기다릴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미안해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성준 오빠. 이미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했어요.”고은서의 솔직한 말에 유성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살짝 쓸쓸하게 변했다.“네 마음에 든 사람이라면 분명히 아주 훌륭한 사람이겠지.”...오후, 고은서는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전미자가 생일에 선물해 준 에메랄드 펜던트 목걸이, 그리고 그녀가 전미자를 위해 직접 조향한 캔들을 챙겨 곽씨 일가 본가로 향했다.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차 속도를 늦췄다.저택의 정원 입구에는 인공 폭포와 연못이 있는 조형물이 있었고 연못에는 녹색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그때 연못 가장자리에서 한 가냘픈 소녀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서는 가정부가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아가씨, 이제 들어가세요. 바람이 차요. 감기라도 걸리실까 봐 걱정됩니다.”가정부의 호칭을 듣고 고은서는 그녀가 곽승재의 여동생 곽승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곽승재가 전에 말하길 그녀는 어떤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재발했고 약간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고 했다.‘어머니께서 귀국하셔서 전문의를 찾으러 오신 걸까?’연못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곽승연은 가정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연못 속의 초록색 잎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가정부는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고은서는 차를 세우고 걸어 내려갔다.“사모님.”가정부는 고은서를 보자 예전과 같은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저는 이제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이제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네요.”고은서가 곽승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저러는 거예요?”가정부는 그녀가 산책하러 나왔다
이때 민시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고은서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을 내세우며 곽승재와 대립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단순히 오빠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유성준과 달리 민시후의 진심 어린 고백은 고은서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켰다.하지만 고은서는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민시후, 시간을 좀 줘.”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고은서, 그 말을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지?”고은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이제 국 마실 거야?”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물론이지.”박지연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폭죽이라도 터뜨릴 기세로 기뻐했다.“은서야, 드디어 마음을 정리했구나.”박지연이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안 되겠어. 이 소식을 육현석에게 알려서 곽승재와 너를 다시 만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말라고 해야겠어.”“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아 줄래?”고은서가 박지연을 말렸다.“내가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들이든 들이지 않든 그건 육현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굳이 그 사람한테 알릴 필요 없어.”육현석에게 알리는 것은 곽승재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백유미 일 때문에 그와 감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비록 박지연은 당장 육현석에게 이 소식을 알려 곽승재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알았어. 말 안 할게. 어차피 사귀게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 날 고은서는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유성준도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왔다.“은서야, 너 요즘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