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원지훈이 돈을 요구하고 있음을 한 번에 알아차렸다.‘역시 욕심이 많네. 두 번이나 줬는데 또 요구하다니...’고은서가 답했다.“돈은 부족하지 않게 줄 테니 일이나 제대로 처리해. 모든 과정을 보고하고 백유미의 신임을 얻은 후엔 즉시 내가 말한 일을 처리해야 해.”원지훈의 얼굴에는 다시금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떠올랐다.“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지훈 씨 어머니 쪽은 어때? 무슨 이유로 백유미네 가정부로 들어가게?”고은서가 물었다.원지훈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백유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라고 했어요. 백유미가 매일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 걸 보고 음식 해주고 청소 해주면서 도와주겠다고 하면 돼요. 안 그래도 백유미는 엄마로 저를 통제하고 싶어 했으니 분명 동의할 거예요.”원지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좋네. 백유미가 월급을 주지 않으면 내가 줄게. 두 사람이 헛수고하게 할 수는 없잖아.”그 말을 들은 원지훈은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역시 누나! 시원시원하네요. 백유미는 돈도 짜게 주면서 줄 때마다 생색내거든요. 가끔은 우리가 무릎 꿇고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분위기에요.”원지훈의 아첨에도 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럼 난 먼저 갈게. 바로 은혜한테 연락할 테니 시시각각 보고해 줘.”말을 마친 고은혜가 카페를 나섰다.차에 올라탄 고은서는 먼저 박지연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고은혜의 번호를 눌렀다.“무슨 일이야?”고은혜가 물었다.“며칠이나 있었는데 전시는 아직도 안 끝난 거야?”“거의 끝났어. 여기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고 몇몇 디자이너들과 연락처도 주고받아서 조금 더 교류하고 배우고 싶어서.”고은서가 계속 물었다.“아직도 밤마다 술집 가서 놀아?”잠시 멈칫하며 당황한 고은혜가 곧 화를 냈다.“고은서! 무슨 뜻이야? 나한테 사람이라도 붙인 거야?”고은서는 고은혜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원지훈을 통해 알게 된 일과 그가 계획 중인 일을 설명했다.
고은서는 지금 당장 고은혜에게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는 고은혜를 설득할 수 없었다.‘은혜도 이제 스무 살이니 가문에 대한 책임도 얼마간 져야지.’그래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원지훈을 이용해 고씨 가문에 침투해 가문을 몰락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고은혜에게 털어놓았다.성아연이 백유미의 협력자라는 사실도 함께 말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혜는 충격에 휩싸였다.그녀를 놀라게 한 건 성아연이 아니었다. 성아연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단은숙에게서 들은 적이 있던 터라 인성에 문제 있는 사람이 매수당하는 일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오히려 고은혜를 충격에 빠뜨린 건 백유미의 계획이었다.고은서가 몇 번이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적 있다 보니 고은혜도 자연스럽게 백유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고은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곽승재 같은 고고한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을 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설마 백유미가 곽승재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까지 손을 뻗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고은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이미 이혼 했잖아. 그런데 왜 백유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고은서가 답했다.“나도 그 점이 이해가 안 돼. 곽승재가 여전히 나에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 가문을 무너뜨려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르지. 어쨌든 너는 이 일만 미리 알고 있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원지훈한테도 경계심은 늦추지 말고. 절대 원지훈이 하는 말에 넘어가서는 안 돼. 그놈은 인성만 나쁜 게 아니라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범죄 기록까지 있어.”고은서는 전생에 고은혜가 원지훈의 말에 속아 넘어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이번 생에서는 조금 더 경계심을 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원지훈이 또 다른 수를 쓰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고은서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불쾌한 듯 말했다.“그런 사람한테 속아 넘어갈 리가 있겠어? 네가 한 얘기만 들어도 역겹고 무
금빛 찬란한 로비 아래 직원들은 모두 고대의 궁녀와 호위병들이 입고 있던 의상을 입고 있었다. 얇은 비단 치마를 입은 무희들이 춤을 추는 모습도 군데군데 보였다.안에 들어서자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은서가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도아름과 박지연은 이미 도착해서 의복을 다 갈아입은 상태였다.도아름은 짙은 붉은색이 가미된 황후 의상을 입고 있었고 박지연은 짙은 자주색의 귀비 의상을 입고 있었다.화장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보면 꽤 그럴듯했다.“은서 씨, 왔어요? 빨리 가서 옷부터 골라요.”고은서를 보자 도아름이 웃으며 말했다.“가장 예쁜 옷으로 입혀줘요. 애첩들이 입는 그런 스타일로요.”박지연이 덧붙였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겼다.직원은 고은서에게 연분홍색 의상을 골라줬는데 그녀의 안색과 잘 어울렸다.룸에 들어서자 도아름과 박지연은 그녀를 보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감사합니다. 황후마마, 귀비마마.”고은서는 진지하게 예를 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요즘 폐하께서 자주 제 처소에 머무시는데 정말 피곤해 죽겠어요. 황후마마, 차라리 여제가 되세요. 우리 모두 해방되게요.”“하하, 좋은 생각이네요.”도아름과 박지연이 박장대소하며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세 사람은 한참이나 장난을 치며 담소를 나눴다. 박지연은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린 후 그녀들에게 좋아요를 누르라고 했다.이내 궁녀 복장을 한 직원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음식을 담은 그릇과 플레이팅은 매우 정교했는데 마치 황실 연회를 연상케 했다.박지연이 감탄하며 말했다.“아름 언니, 여기 정말 좋은데요? 명운이 상장되면 저희 여기 자주 데려오셔야 해요?”“당연하죠.”도아름이 호쾌하게 답했다.“상장 안 하더라도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요.”“은서 씨, 이 보양탕 좀 많이 먹어요. 특별히 주문한 거예요. 몸을 따뜻하게 해줄 거예요.”도아름이 고은서에게 말했다.고은서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감사해요, 아름 언니.”박지연에게서 그녀의
고은서는 서인수에게 납치된 일만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서인수가 곧 판결을 받게 된다니 이제는 보복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어 마음이 조금 놓였다.“서인수가 사람을 통해 저를 만나고 싶다고 전해왔어요.”도아름이 말을 이었다.“아마도 곽 대표님께 선처를 부탁해달라고 할 것 같은 데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만나지 않으려고요. 굳이 가치 없는 말 들을 필요 없잖아요.”“아름 언니, 저는 언니의 그 용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서인수랑 몇 년 동안 부부로 살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어요?”박지연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는 진정한 여장부야. 잡을 땐 잡고 놓을 땐 놓을 줄 아는 여자지. 안 맞는 걸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랑은 달라. 하지만 이제 나도 용기 내서 내려놓았어. 지연아, 싱글 클럽의 문은 항상 널 향해 열려있어.”고은서는 박지연을 웃기려고 건넨 말이었지만 박지연은 반박하지 않고 진지하게 답했다.“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 온 닥터는 제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예요. 한 번 선택한 이상 끝까지 지키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요. 그런데 가끔은 제 그 고집이 우스워 보일 때도 있어요.”“지연 씨,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두 사람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나요?”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큰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문제에요. 큰 문제가 아니라서 말하면 사소하고 치졸해 보이고 그냥 넘기려니 또 마음이 답답해요.”도아름이 답했다.“감정적인 문제는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아야 해요. 그 안에 답이 다 있으니까요. 지연 씨가 진정 원하는 게 사랑인지 안정감인지 한 번 들여다봐요. 저도 인수 씨랑 몇십 년간 부부로 살아왔어요. 인수 씨가 선을 넘는 일만 하지 않았다면 저도 여전히 그와 함께 살고 있겠죠.”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지자 고은서가 잔을 들었다.“이제 이 얘기는 그만 해요! 오늘 맛있는 음식 먹으며 즐겁게 보내려고 모인 거잖
박지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가니 유혜린이 바로 해명하더라. 자기가 먹고 싶어서 시켰는데 온 닥터한테 자신이 직접 한 건강식이라고 거짓말해서 속아서 먹게된 거라고 말이야.”박지연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음식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더니 집 밥이 먹고 싶었다며 자기도 한입 얻어먹을 수 있냐고 묻더라.”“그래서 어떻게 했어?”고은서가 물었다.“준비한 양이 한 사람 몫밖에 안 된다고 정중히 거절했어. 그랬더니 유혜린이 자기는 원래 입이 짧다며 남편한테 조금만 나눠줄 수 없냐고 묻더라.”“온 선생님께서 허락했어?”“응. 안 그래도 저녁을 적게 먹는 사람이라 햄버거 몇 입 먹고 배부르다면서 내가 준비한 음식을 유혜린에게 넘기더라.”고은서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며 외쳤다.“온 선생님 진짜 너그럽네! 유혜린은 생각보다 더 뻔뻔하고! 세상에 왜 이렇게 뻔뻔한 사람들이 많지?”그녀는 속으로 백유미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백유미도! 유혜린도 다 똑같아!’“난 기분이 상했지. 하지만 남편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아무것도 모르더라고. 바로 서재에 가서 학술 보고지를 보는데 화가 나서 샤워하러 간 사이에 학술 보고서에 차를 엎질렀어.”고은서는 이를 듣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잘했어! 온 선생님이 뭐라고 안 했어?”“실수로 그랬다고 하니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매일 밤 서재에서 뭘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다음 날 아침 러닝 다녀오면서 남편에게 주려고 아침 사 왔는데 마침 시어머니가 방문하셨어. 왜 아침을 차려주지 않냐면서 뭐라 하시더라고. 온 닥터는 외부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그때 마침 아름 언니한테서 전화 와서 무시하고 옷 갈아입고 나왔지.”“잘했어! 진작부터 그래야 했어!”고은서가 열정적으로 맞장구를 쳤다.“평소 온 선생님이 집에 있을 땐 정성스레 음식을 차려주는데 아침 한 끼 안 챙겼다고 잔소리라니... 정말 아들이 황태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지연아, 이렇게 억울하고 불행하게 살 거면
더 매력적인 사실은 집안에 가전제품과 가구가 모두 갖춰져 있어서 몸만 오면 바로 입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아름 언니, 인테리어가 정말 새것처럼 보이네요. 친구가 정말 판대요?”고은서가 물었다.도아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원래는 본인이 살려고 했는데 가족이 해외로 이민 가게 돼서 그 친구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대요. 굳이 국내에 집을 남겨둘 필요는 없죠.”도아름이 중간에서 연결해 준 덕분에 고은서는 빠르게 집을 결정할 수 있었다.계약서를 작성하고 돈을 이체하는 과정이 너무 매끄러워서 고은서는 옷 한 벌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사 끝내면 다 같이 와서 집들이 제대로 해요.”도아름이 말했다.고은서도 흔쾌히 동의했다.집을 사게 되어 기쁜 세 사람은 저녁 식사까지 함께했다.박지연은 도아름과 함께 소량의 술도 곁들였다.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 술을 마시지 않은 고은서가 박지연을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마음이 힘들어 술로 달래고 싶어 하는 박지연을 이해하기에 고은서는 박지연이 내리기 전에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지연아, 이혼하기 싫으면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사랑했던 사람에게서 완전히 마음을 떼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박지연은 고은서처럼 이전 생의 비극을 겪은 것도 아니기에 고은서처럼 단호하게 결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이 언니 괜찮아!”박지연은 머리를 한 번 흩날리고는 호기롭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집으로 돌아온 박지연이 문을 열었을 때 집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오늘은 온 닥터가 쉬는 날이었다.그는 보통 집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박지연은 가방을 내려놓고 물 한 잔 따라 마시려 했으나 물병에 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오늘 물을 받아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부엌에는 설거짓거리가 쌓여있었다.‘시어머니가 도우미를 불러 음식은 준비했지만 청소할 시간이 없어 먼저 돌아갔나 보네. 자기 아들이 배고플까 봐 끔찍이 걱정하면서도 내가 설거지로 힘들어할지는
박지연의 말을 들은 온 닥터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말 좀 잘할 수는 없어?”“내가 무슨 말을 제대로 안 했는데?”박지연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부터 순순히 참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남편을 위해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했었다.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성깔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당신이 그렇게 말을 잘하면 당신이 해보든지!”온 닥터는 안경 너머로 그녀를 보며 놀라움을 드러냈다.항상 밝고 유쾌했던 아내에게 이런 날카로운 면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다.“술 마셨어?”온 닥터가 술 냄새를 맡고 물었다.“그래! 마셨어!”박지연이 당당히 답했다.“하지만 취하지는 않았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알아.”온 닥터는 그녀가 취했는지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물었다.“왜 스스로 가정부라고 생각해?”박지연이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삼시 세끼는 전부 내가 하고 집안일도 내가 다 하잖아. 당신의 그 결벽증 때문에 난 매일 집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닦아야 해. 집안일뿐만 아니라 당신 어머니도 무슨 일만 생기면 꼭 나를 불러. 심지어 지난번에 당신 첫사랑이 집에 갔을 때도 나를 요란하게 불러댔잖아. 고작 음식 준비하라고. 이게 가정부가 아니면 뭐야?”온 닥터가 태연하게 말했다.“하기 싫으면 가사 도우미 불러. 난 상관없어.”“당신은 상관없다 치고 당신 어머니도 상관없을까?”박지연이 참다못해 소리 질렀다.“결혼하고 나서 바로 말했잖아. 나도 직장이 있어 바쁘니 가사 도우미를 부르자고. 그런데 당신 어머니는 내 월급으로 도우미 고용 비용도 못 낸다고 차라리 직장 그만두고 당신만 돌보라고 했어. 내가 왜 직장을 그만두고 당신 뒷바라지를 해야 해? 내 커리어는 커리어가 아니야?”박지연의 말투와 표현에 온 닥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직접 부르면 되잖아. 내 월급도 다 당신한테 맡겼잖아.”그 말이 박지연의 화를 더 돋웠다.“그 말은 꺼내지도 마. 그 월급 카드 당신 어머니가 가져갔어.
오전 내내 고은서는 병원에서 전미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그녀는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원지훈을 만나러 갔다.그 후에도 하루 종일 도아름, 박지연과 시간을 보내느라 곽승재가 입원 중이라는 사실은 이미 잊어버렸다.잊어버린 김에 굳이 곽승재의 메시지에 답할 필요를 못 느낀 고은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샤워하러 갔다.향긋하게 목욕을 마치고 나온 고은서가 스킨케어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며칠 전 위험했던 일이 떠오르자 그녀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핸드폰을 들고 경찰에 신고하려던 찰나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안에 있어?”곽승재의 목소리에 고은서는 안심했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왜 호텔에 있는 거야? 내 방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고은서가 곽승재를 불러 따지려 한 순간 곽승재가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긴장했던 곽승재는 그녀를 본 순간 안도했다.“너...”고은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괜한 기우였네요. 제 아내는 괜찮습니다.”그제야 고은서는 거실에 호텔 직원 몇 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직원들도 고은서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중 한 직원이 설명했다.“사모님, 원재 규정상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드리지 않지만 남편분께서 사모님과 연락이 안 된다며 몹시 걱정하셨어요. 게다가 며칠 전 일도 있었던 터라 저희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호텔에도 보안 요원이 있긴 했지만 복잡한 환경에서 모든 돌발 상황을 완벽히 대처하기란 어려웠다.며칠 전 사건도 있었으니 호텔 측에서도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우려되었다.“괜찮으니 이제 나가 보셔도 됩니다.”고은서가 말했다.“네, 사모님. 편히 쉬십시오.”직원들이 나간 뒤 고은서가 곽승재를 노려보며 말했다.“당신도 나가.”“호텔에 있으면서 왜 문자에 답도 없고 전화도 안 받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