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바로 고개를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녀는 바로 다시 고개를 들며 의심스럽게 물었다.“송민아도 없는데 왜 여기서 연기해?”민시후는 말없이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고은서가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나려 했지만 민시후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차 쪽에 몰아붙였다.“고은서, 내가 단순히 연기하는 것 같아?”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민시후의 뜬금없는 행동에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고개를 들어 보니 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장난기 섞인 표정이 서려 있었다.평소에는 유혹적인 눈빛이었지만 지금은 얼마간의 온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민시후, 너...”고은서가 이제 장난은 그만치라고 하려는 찰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곽승재가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곽승재의 운전기사도 운전석에 올라타 차에 시동을 걸었다.차가 고은서와 민시후의 옆을 지나가는 순간 고은서는 차 뒷좌석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정히 앉아 있는 곽승재의 차가운 옆모습을 보았다.“쯧. 내려서 날 상대하지도 않다니. 곽승재한테 넌 그냥 그 정도밖에 안 되나 보네.”민시후가 약간 실망한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비켜!”민시후가 일부러 곽승재를 자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고은서가 짜증 내며 그의 팔을 밀쳤다.“한가해서 이러는 거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한가하기는? 곽승재가 제 멋대로 먼저 가버린 거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고은서가 그에게 눈을 흘기며 곧바로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가자. 태워준다며?”“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병원까지 꼭 가야겠어?”민시후가 옷과 손에 흰색 가루가 묻은 고은서를 불만스럽게 쳐다봤다.“지금 네 꼴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알기나 해?”‘엉망이 아닌 게 이상하지. 두 남자에게 끌려다니고 두 층이나 되는 계단을 기어오르고 소화기로 공격까지 했으니 몸이 성한 게 더 이상하지. 곽승재가 아니었다면 엉망이 아니라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지.’“됐어.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직접
“민시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비꼬는 거야?”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럼 너는 정상이야?”민시후가 비웃으며 말했다.“곽승재랑 이혼도 했으면서 이렇게 다급하게 따라가고 있잖아. 사람들에게 너희 사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 아니야?”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너는 너 때문에 다친 사람을 두고도 편히 잠들 수 있겠어?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신경 쓰는데?”고은서가 민시후를 한 번 훑어보며 물었다.“너 설마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그 말에 민시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맞아. 널 너무 깊이 사랑해서 헤어 나올 수 없어. 너 아니면 안 되겠어.”낮고 차가운 그의 목소리는 끝부분이 살짝 올라가면서 묘하게 매력적으로 들렸다.고은서는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끼며 팔을 문질렀다.“민 도련님. 그만하지?”민시후는 그녀를 한번 쓱 보고는 하찮다는 듯이 말했다.“누가 너 같은 바보를 좋아해? 날 너무 모욕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이내 민시후의 차도 가까운 병원에 도착했다.예상대로 눈에 잘 띄는 위치에 곽승재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됐어. 내 임무는 끝났으니 얼른 올라가서 곽승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봐. 죽었으면 좋은 소식이니 꼭 나한테 제때 알려 주고.”고은서는 민시후의 쓸데없는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차가운 밤공기에 고은서는 자신을 감쌌다.“잠깐만.”민시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또 곽승재에 대해 뭐라 하려는 줄 알고 고은서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민시후, 그렇게 곽승재가 걱정되면 같이 올라가. 비웃지 않을게.”“웩!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민시후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하고는 차창을 통해 외투를 고은서에게 던졌다.“입어. 한밤에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어디서 도망친 난민인 줄 알아. 주머니에 내 다른 폰도 있어. 번호는 저장해 뒀으니까 문제 생기면 연락해.”말을 마친 민시후가 멋지게 자리를 떴
기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고은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기사가 떠난 후, 그녀는 홀로 복도에 앉아 곽승재를 기다렸다.방금전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공포감이 들었다.곽승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녀를 찾으러 계단 쪽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어떤 후과가 있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대체 누가 날 해치려는 거지? 주민기와 민시후가 이미 조사하러 갔으니까 내일쯤이면 누가 보낸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얼마나 지났을까,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곽승재가 걸어 나왔다.그는 외투를 벗고 흰 셔츠 하나만 입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왔는데 어깨 쪽의 핏자국이 유독에 눈에 띄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척 처참해 보였겠지만 곽승재만은 남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병원 복도 불빛 때문에 얼굴과 오관이 더 각져 보였고 차가운 눈빛까지 더하니 마치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듯한 귀족 같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차갑던 눈빛이 약간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쓰고 있는 흰색 외투를 보자마자 이내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어깨 괜찮아?”고은서가 일어나서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환자분 가족 되시나요? 어깨가 심하게 다쳐서 상처를 꿰맸어요.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는데 혹시 상처에 감염되어서 염증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병원에서 이틀 동안은 관찰해 봐야 할 것 같아요.”곽승재와 함께 나온 의사가 고은서에게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병실.곽승재는 링거를 맞으면서 병상에 누워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고은서는 이런 분위기가 약간 어색했는지 그의 피 묻은 셔츠를 보며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차에 갈아입을 옷 있지? 내가 가져다줄게.”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런 곽승재의 모습은 그녀도 오랜만이었다. 전에도 지금처럼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냉담하게 대했었다.오늘 일은 확실히 고은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곽승재가 그녀를 구해준
불빛 아래, 곽승재의 피부가 여느 때보다 더 하얘 보였고 넓은 어깨와 튼튼해 보이는 근육, 그리고 매끈한 몸선이 유독 눈에 띄었다.마치 명장이 직접 조각해낸 작품처럼 매혹적인 몸매였다.그는 어깨에 붕대를 두른 채 허리에는 흰 이불을 덮고 병상에 앉아 있었는데 허약한 모습이지만 나름 매력적이었다.허약함은 그의 매력을 한 층 더 가할 뿐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이런 모습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언제까지 쳐다볼 생각이야?”곽승재가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말투가 여전히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방금전처럼 차갑지는 않았다.고은서는 덤덤하게 눈길을 돌리며 애써 어색함을 감추려고 했다.‘내 탓은 아니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고.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걸 어떡해.’고은서는 곽승재 옆에 다가가서야 그가 셔츠를 완전히 벗은 게 아니라 주삿바늘을 꽂은 오른손 밑에 깔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아직도 링거를 꽤 맞아야 해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는데 셔츠는 왜 벗은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피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계속 입고 있어.”곽승재가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깨끗한 옷을 건네주었다.“먼저 걸치고 있지 그래?”곽승재는 반박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왼쪽 팔을 내뻗었다.튼튼한 팔이 그녀의 눈 가까이 확 들어오면서 피부결까지 선명히 보였다.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하다는 듯 물었다.“어쩌라는 거야?”“입혀주지 않고 나 혼자 어떻게 입어?”“벗는 건 혼자 할 수 있고 입는 건 혼자 할 수 없다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네가 계속 보고 싶거든 안 입어도 괜찮아.”곽승재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내가 언제 계속 더 보고 싶다고 했는데? 스스로 옷을 벗
고은서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왜 혼자야? 병원에 의사 선생님들도 있고 간호사 선생님들도 있잖아. 게다가 기사님이 계속 아래에서 대기 중이기도 하고. 아니면 주민기 씨한테 간병인 두 명 정도 모셔달라고 하든가.”“그러니까 네 마음속에서 난 주민기보다도 못하다는 거야?”곽승재가 갑자기 엉뚱한 물음을 제기하는 바람에 고은서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되물었다.“주민기 씨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언제 당신을 주민기 씨랑 비겼어?”‘난 그저 간병인을 모셔달라고 주민기한테 부탁하라고 말했을 뿐인데.’“전에 바에서 술병을 대신 막아준 거 나한테 주민기였어도 막아줬을 거라고 했잖아.”곽승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널 구하기 위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넌 날 간병해주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잖아.”‘기억력은 좋은데 대체 저 이상한 결론은 뭘까? 너무 어이없는데.’전에 대신 술병을 막아준 건 진짜 무의식인 반응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곽승재 앞에 막아선 후였다. 행여나 곽승재가 그 일로 그녀에게 집착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주민기 같은 다른 사람이었어도 대신 막아줬을 거라고 말했는데 지금까지 그 일로 트집을 잡을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곽승재, 잘 들어. 사람은 계속 변하는 거야. 전에는 당신의 안전이 항상 최우선이었던 건 맞아. 당신이 다치면 내 마음도 함께 아파왔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당신보다 내가 우선이야. 더는 당신을 위해 칼이나 술병을 막아줄 용기가 없다고. 그러니까 더는 이런 일로 날 시험하려고 하지마.”그때 이름 모를 남자가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을 때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주의를 주었었다. 사실 곽승재의 실력으로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다치게 했다.곽승재가 다쳤을 때의 반응과 방금전 그가 한 말들을 돌이켜본 고은서는 그가 자신이 전처럼 그를 관심하는지 안 하는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무표정한 얼굴과 덤덤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속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마치 그녀가 달갑지 않아 한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말한 대로 약속 지켜야 해. 얼버무리며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고은서는 약간 기가 막혔다.‘왜 전에는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 걸 몰랐을까?’“나 목말라. 물 따라줘.”곽승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고은서에게 지시를 내렸다.고은서는 화를 꾹 참고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수기에서 미온수를 받아 그에게 건네주었다.곽승재는 물컵을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곽승재가 물을 먹여달라면서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순간 그가 정신 차리게끔 그의 얼굴에 물을 뿌릴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물컵을 받아들었다.물을 마신 후 그는 더는 다른 요구를 제기하지 않고 병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고은서도 병상 옆에 의자에 앉아서 그를 지켰다. 종일 새로운 일을 인계받고 유성준을 만나고 또 방금전과 같은 사고를 당하고 나니 피곤함이 물살처럼 밀려왔다.눈을 감고 휴식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고은서도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따뜻한 보일러 때문에 잠이 솔솔 몰려왔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따뜻한 무언가가 자신의 입가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전에 이름 모를 남자가 입에 붙인 테이프를 떼내면서 다친 입가를 어루만져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에 고은서는 눈을 뜨기 더 싫어졌다.그러나 그 따뜻한 촉감이 입가에서부터 볼살로 이어지더니 이내 이마에서까지 느껴졌다.고은서는 약간 불편했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이마를 어루만지던 동작은 이내 멈추고 그저 따뜻한 온기만 남았다.고은서가 깊이 잠들려고 할 때 그녀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이내 입가로부터 촉촉한 감각이 느껴졌다.너무 피곤한 탓에 그냥 무시하고 계속 자려고 했으나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호텔이 아닌 곽승재의 병실에 있다는 걸 감지하고 번쩍 눈을
주민기가 공손하게 답했다.“이미 성씨 집안 성아연이 지시한 일이라고 다 자백했습니다. 그리고 성아연도 이미 경찰 측에 넘겨졌고요.”고은서는 성아연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멈칫했다.전에 성아연이 고준석한테 잘 보이려고 고씨 가문 저택에 찾아갔다가 쫓겨난 후로 고은서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서로 연락한 적도 없었다.‘왜 날 해치려 하는 거지?’고은서의 의문을 알아본 주민기가 입을 열었다.“사모님도 성아연 씨가 MQ 세금 문제와 큰 연관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습니다.”‘연관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성아연이 한 짓이 확실한 거겠지. 그저 증거가 없을 뿐이지.’“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성아연이 저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죠?”고은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일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숙모님께서 성씨 집안까지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 성아연 씨는 아마 사모님께서 시킨 일이라고 오해하고 사모님께 원망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람 시켜서 사모님을 혼쭐을 내주려 했던 거고요.”단은숙이 성씨 집안까지 찾아가 난동을 부린 일은 이미 유성준한테서 전해 들었는데 성아연이 그 일을 고은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할 줄은 그녀 또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민기 씨, 성아연을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성아연이 고은서를 해치려고 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숨까지 위협하는 일까지 꾸밀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라 그녀는 성아연을 찾아가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주민기는 곽승재의 표정을 힐끔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됩니다, 사모님. 피해자로서 자초지종을 알 권리는 항상 있는 법이니까요.”“그럼 바로 출발하죠?”“나도 같이 가.”곽승재가 갑자기 병상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필요 없어.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는데 움직이지 말고 누워서 쉬어.”그러나 고은서는 거절했다.“상처가 심해져서 날 지금보다 더 오래 간병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확실히 이 부분을 고려했었던 그녀는 입을
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찔렸다.그러나 민시후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했다.“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회사에서 봐.”그녀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이미 병실 밖으로 나갔고 주민기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어제 호텔 블랙박스를 확인해 봤는데 폰을 방에 두고 오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가져오라고 할까요?”“네, 수고해주세요. 그리고 저 이젠 그쪽 대표님 아내가 아니니까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주민기는 입을 꾹 다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이 이혼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칭을 바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못하면 곽승재 눈 밖에 나면서 다음 달 보너스까지 잃게 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정말 먹고 살기 힘드네.’곽승재의 비서 자리가 겉으로는 엄청 훌륭한 직위 같아 보이지만 사실 시시각각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주민기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었다.고은서와 주민기가 병원에서 나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차 안에 앉아있었다.주민기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는 바람에 고은서 어쩔 수 없이 곽승재와 함께 뒷좌석에 앉게 되었다.곽승재는 아이패드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의사 선생님이 전에 다쳐서 푹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 왜 따라가려고 그래?”곽승재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며. 왜 갑자기 날 관심하는 건데?”‘내가 걱정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혹시 더 심하게 다치면서 내 책임이라고 트집이라도 잡을까 봐 무서워 그래.”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경찰서.곽승재가 경찰서까지 찾아온 이유를 전해 들은 책임자가 직접 마중하러 나왔다.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는 피해자로서 규정대로 경찰 조사에 협조했다.그녀가 조사를 끝마치고 나올 때 마침 강인한 태도로 심문을 거부하는 성아연을 보았다.“변호사가 오기 전까지 당신들의 물음에 한
“뻔뻔한 건 너지.”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용서한다고 해?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었잖아. 그냥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내니 갑자기 사랑에 빠진 척 후회하는 척하면서 나를 붙잡고 늘어진 거잖아. 네가 그렇게 끝까지 매달리지 않았으면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했겠어!”“너...”“곽 대표님, 은서야.”곽승재가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할 때 갑자기 밖에서 여시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시선을 돌리자 서류를 품에 안은 여시은이 차 밖에 서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단아하고 사랑스러운 복장 대신 정장에 가까운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고 여전히 검은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었다.고은서가 바라보자 여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야, 아빠가 나를 판주 투자은행 쪽에 보내서 곽 대표님 비서를 하게 됐어. 보고 배우라고 보내신 거지. 오늘도 회의가 있어서 내려와서 일정 조율하려고 곽 대표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할 얘기가 남았으면 먼저 올라가서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릴게.”여시은은 배려 깊은 척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일이 우선이죠. 좌천된 몸인데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죠.”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곽승재가 판주 투자은행으로 온 건가?’판주 투자은행은 GS 그룹에서 인수한 투자은행에 불과했다.그룹 대표였던 그가 여기로 왔다는 건 단순한 강등이 아니라 사실상 유배당한 거나 다름없었다.방금까지 곽승재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가라앉고 죄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GS 그룹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그런데 이제 본사에 남을 수도 없게 됐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곽승재는 이미 차에서 내려 로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여시은은 바로 따라가지 않고 고은서를 향해 미안한 듯 미소 지었다.“은서야, 우리도 오래 못 봤네. 요즘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오늘은 일이 있어
사람을 부르려던 곽승재가 고은서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곽승재의 새까만 눈동자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고 날렵한 얼굴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고은서는 갑자기 사과할 용기가 사라졌다.“못 들은...”“판주 투자은행.”못 들은 걸로 하라던 고은서의 말에 목구멍에서 맴도는 사이 곽승재는 무심한 어조로 목적지를 말했다.이미 태워주겠다고 말한 이상 고은서도 이제 와서 무를 수 없었다.“타.”고은서는 운전석에 탔고 곽승재는 뒷좌석에 탔다.‘날 대놓고 기사 취급하네?’고은서는 앵두 같은 입술을 꼭 다물고 차를 출발시켰다.차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고은서는 운전에 집중했고 곽승재는 핸드폰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뀐 순간 고은서는 무심코 백미러를 바라보았다가 마침 곽승재의 시선과 맞닥뜨렸다.그의 눈동자 속에는 뭔가 반짝이고 있는 듯했지만 차 안이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흐린 조명 덕분에 그의 이목구비가 더욱 깊고 뚜렷하게 드러났고 그의 모습은 마치 신이 직접 조각한 완벽한 작품 같았다.그런 곽승재를 오래 봤던 탓에 고은서는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볼 때마다 신의 불공평함을 새삼 느끼곤 했다.빵!신호등이 바뀌었고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고은서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액셀을 밟았다.“회사 일은 지연에게서 들었어. 미안해.”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고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곽승재는 코웃음을 흘리듯 낮고 냉소적인 소리를 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차 안의 공기는 다시 싸늘해졌다.그렇게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판주 투자은행 빌딩 앞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차를 건물 앞에 세웠다.“재경이가 비록 인플루언서이긴 하지만 계략 있는 애는 아니야. 생각하는 대로 내뱉는 것뿐이니 지연 씨한테 괜히 건드리지 말라고 해줘.”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고은서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곽승재를 돌아보았다.“지연이가 왜 재경 씨를 곤란하게 해?”곽
도아름은 씩 웃으며 말했다.“그만큼 진지해졌다는 뜻이겠지. 지연이 육현석 부모님 만나본 적 있어?”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현석이는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지연이가 자꾸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안 가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지연이가 육현석 부모님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아요.”도아름은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생각이 많은가 보네. 이럴 때는 누가 설득해도 소용없을 거야.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자신감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야.”고은서는 도아름의 말에 공감했다.박지연은 이미 한 번 시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결혼을 경험한 적이 있어 육현석이 아무리 안심시켜도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확실히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은서야, 곽 대표랑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뭔가 평소랑 다르네.”도아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잠시 침묵하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아름 언니, 이유는 말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곽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난 건 나 때문이에요.”곽승재와 관련된 일은 도아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너무 자책하지 마. 곽 대표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나름의 계획이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걸 믿어.”도아름의 말에 고은서는 오히려 더 죄책감을 느꼈다.사실 고국성의 일은 그리 급한 상황이 아니었다.하지만 하루라도 미루면 더 큰 문제가 생길까 봐 곽현수의 계획을 따른 것이었다.결론적으로 곽승재에게 가장 큰 죄를 지은 건 그녀였다.“물론 마음이 정 불편하면 곽 대표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며 오해 풀어.”고은서는 고민스러웠다.사과는 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녀가 직접 함정을 만들고 약까지 먹인 후 여자를 들여보냈으니 오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박지연이 육현석에게 연락했던 탓인지 자리를 마칠 때쯤 육현석이 데리러 왔다.고은서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박지연과 육현석만 남겨두고 떠났다.도아름도 기사가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알죠. 곽 대표님 전 부인이 아주 아름답다는 소문은 늘 들었는데 오늘 직접 뵈니 그 말이 헛되지 않았네요.”고은서는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마재경은 말을 마친 후 조금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조금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곽 대표님의 습관과 취향을 좀 더 알고 싶어서요. 은서 씨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고은서는 여자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이고 적극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곽승재가 가만히 놔두니까 자신감을 얻은 걸까?’“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네요.”고은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저도 곽 대표님의 습관이나 취향을 잘 모르거든요.”여자는 난처한 기색을 표했고 곽승재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돼.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곽승재의 말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시 생기가 되살아났다.“정말요? 곽 대표님, 저한테 너무 다정하신 거 아니에요?”그녀의 목소리는 애교가 넘쳤고 딱 적당한 정도의 달콤함이 섞여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곽승재도 예외는 아니듯 그의 시선이 마재경을 향했다.“넌 착하고 얌전하잖아.”여자는 더욱 부끄러워하며 웃었다.반면 고은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진짜 구역질 나네.”박지연이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여긴 여성 요가 회원 클럽인데 저 역겨운 남자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박지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마재경은 바로 곽승재를 감싸며 말했다.“곽 대표님은 저 때문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게다가 예약할 때 이미 물어봤고 남성 동반도 가능하다고 했어요.”박지연이 반박하려 하자 고은서가 급히 그녀를 말렸다.“지연아, 우리 그냥 가자.”도아름도 적절한 타이밍에 곽승재에게 실례할게요라고 한 마디 남긴 후 세 사람은 화단 근처 테이블로 이동했다.곽승재는 마재경을 데리고
송민아에게 회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고은서는 책상에 앉아 진형서가 준 자료를 펼쳤다.대충 훑어보니 그 안에는 여시은의 기본 정보가 담겨 있었다.여시은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이후 그녀의 아버지인 여재훈이 그녀를 데리고 귀국해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여시은은 오랜 시간 강성에서 생활했으며 가끔 여재훈과 Y 국에 머물기도 했다.생활 반경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고 친구나 동료들 외에도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한 여성이 자주 찾아와 돌봐주곤 했다.여시은과 곽승재가 처음 만난 건 한 사교회 자리였으나 이후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재훈과 곽현수가 Y 국에서 사업적 거래가 있어 여시은은 이미 오래전부터 곽현수를 알고 있었다.자료에서 보면 여시은은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다.대학 시절 가볍게 만난 두 사람이 있었지만 성격 차이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헤어졌다.‘그렇다면 여시은이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핑계였던 걸까? 그녀가 곽승재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곽현수 때문일까?’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송민아가 와서 재촉했고 그녀는 자료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궜다....저녁 무렵 고은서는 업무를 마치고 박지연을 픽업해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오늘은 세 여자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명운 주류가 상장된 이후 도아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비워 나온 만큼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세 사람은 함께 여성 전용 요가 센터로 향했다.센터에서는 요가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거나 꽃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었다.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명상 요가를 한 세션 진행했다.몸을 충분히 이완시킨 후 개방형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시려던 차에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곽승재와 최근 그와 열애설이 난 인플루언서였다.곽승재는 검은색 캐주얼 셔츠를 입고 있었고 외투는 한쪽 팔에 무심하게 걸쳐 있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덕분에
진형서가 말했다.“민 대표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전 여시은이 해성에 오기 전의 상황을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현재 대표님은 해외에 계시고 여시은이 누군지 기억도 못 하고 계십니다. 해성의 일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이 조사 결과를 전해드리지 않았습니다. 고 대표님, 비록 저희 대표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이 자료는 고 대표님을 위해 조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 서류를 고대표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고은서는 기억을 되살렸다.두 사람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민시후는 정말로 여시은을 계속 조사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다음날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고은서는 민시후가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최근에 다른 머리 아픈 일들로 인해 여시은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그녀는 민시후가 조사를 시작하고 진형서가 그 자료를 그녀에게 가져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대표님, 이렇게 오래 끌어서 죄송합니다.”진형서가 사과의 말을 전했다.“제 처지도 좀 곤란한 상황이라서...”고은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형서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진형서는 파일을 그녀에게 건네고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떴다.사무실로 올라가려던 고은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민아를 만났다.“너 출장 가지 않았어? 오늘 돌아온 거야?”송민아는 대답 대신 고은서의 팔을 잡고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닫은 송민아는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야? 곽 대표님이 인플루언서와 밤을 보내고 이제는 결혼하려고 한다던데?”곽승재와 인플루언서의 스캔들이 알려진 후 그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고 GS 그룹에서도 소문을 막지 않았다.네티즌들은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에게 반해 연인 관계로 발전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최근 인터넷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이미 여러 날 된 소식인데 이제야 물어보는 거야?”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까지 나왔겠어
“은서야, 지금 곽승재 편을 든 거야?”박지연은 뒤늦게 반응하며 물었다.“육현석 말로는 엊그제 같이 곽승재를 만나러 갔었다며? 걔는 네가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하더라. 아니다.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와 호텔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니 미련은 없겠다.”박지연은 바로 스스로 부정했다.박지연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볼일 봐. 퇴근 후에 다시 얘기하자.”박지연은 알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고은서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지연아.”“왜?”고은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기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했다.“아니야. 그냥 밖에 나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이제 시간 나면 우리 같이 놀러 가자.”“그게 다야? 깜짝 놀랐잖아.”박지연이 투덜댔다.“됐어. 가서 일해.”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동네 약국에서 긴급 피임약을 주문했다.비록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전을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라고 해도 놓치는 것보다는 낫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한 번으로 충분해.’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른 약품들도 몇 가지 골랐다.약을 고르던 중 이미숙이 노크했다.“사모님, 배 안 고프세요? 뭐 좀 만들어 드릴까요?”고은서는 승낙했다.세수하고 간단히 식사를 마치니 고국성에게서 연락이 왔다.“오미나가 수술비와 위자료를 요구하며 돈만 주면 수술을 받을 거라고 하더구나.”‘그래도 약속은 지키네.’“은서야, 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났다던데 사실이야?”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를 좋아하던 고국성은 곽승재의 상황을 알고 걱정했다.고은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삼촌, 사실이든 아니든 저랑 다시는 곽승재를 찾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 어기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예요.”고국성은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고국성은 고은서가 능력도 갖추고 오미나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해결했으니 이제 그녀의
곽승재의 손아귀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고 그의 표정도 매우 차가웠다.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인지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에는 뚜렷한 핏발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잠시 멍해졌다.어젯밤의 희미한 장면들 속에서 그녀의 눈앞을 스쳤던 것도 이렇게 광적이고 핏빛이 감도는 눈이었던 것 같다“왜 말이 없어?”곽승재는 맹수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고은서는 턱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알고 싶은 건 다 알았잖아. 내가 뭘 더 말해야 해?”“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저녁을 먹자고 한 게 날 함정에 빠뜨리고 여자를 침대에 보내려고 그랬던 거야?”곽승재는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턱 통증은 완화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맞아.”“그래서 내가 다른 여자랑 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고은서는 마음을 다잡고 냉소를 지었다.“아니면?”그녀의 대답에 곽승재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그의 눈가에는 실망으로 가득 찼다.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쓸쓸함이 차올랐다.곽현수에게 이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녀는 이미 곽승재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었다.만약 곽승재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비슷한 일을 꾸몄다면 그녀 역시 충격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을 것이었다.“곽승재, 여러 번 말했잖아. 난 이미 너를 내려놓았다고. 이쯤이면 그만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다시 한번 기름을 부었다.‘끝내려면 완전히 끝내야 해. 이러면 곽현수도 더 안심하겠지.’곽승재는 싸늘하게 웃었고 눈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고은서까지 태워버릴 듯했다.“알았어. 고은서, 후회하지 마.”말을 마친 곽승재는 그녀를 내팽개친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떴다.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제자리에 멈춰선 고은서는 머릿속도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은서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혹시 누군가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직원은 그녀의 객실 문은 밤새 열리지 않았다고 확답했다.‘곽승재는 취한 상태에서 약까지 먹었으니 이 방에 올 리가 없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물에다 약을 너무 많이 타서 약효가 강해서 그런 꿈을 꾼 건가? 목에 남은 자국은 병 자국에 눌린 흔적일까? 사지의 뻐근함은 단순한 숙취의 후유증?’충분히 말이 되는 설명이긴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기분이 찝찝했다.고은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때도 몸의 감각은 확실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정말 꿈이라고? 아니면... 그 남자는 곽승재였을까?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거지? 갈 때는 어떻게 나가고? 줄곧 날 잡고 싶다고 말했으니 우리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면 계속 남아있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머리가 복잡해진 고은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때 갑자기 방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순간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떠올린 고은서는 재빨리 옷을 걸쳐 입고 문 쪽으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아니나 다를까 복도에는 수많은 연예부 기자가 곽승재의 객실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그들은 사진을 찍고 질문을 퍼부으며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주민기가 경호원들과 함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끈질긴 기자들은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그 혼란 속에서 어두운 표정을 한 곽승재가 고은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그가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곽승재는 이미 어젯밤 일이 그녀의 계획이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그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고은서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 곽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원하시는 대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세요.]답장은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어떻게 곽승재를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