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 어머니, 서연정 여사였다.고은서와 서연정은 영상통화로만 한두 번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그러나 서연정과 곽현수는 정식으로 이혼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 이혼한 사이와 별다른 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별거 중이었고 전미자 생일에도 해성으로 돌아오지 않은 걸 보아서는 아마 결혼생활에 대해 이미 마음을 접은 게 분명했다.고은서는 서연정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 믿고 그녀에게 이혼하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었다.잠시 후, 서연정이 전화를 받았다.고은서는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부터 했다.“어머니, 저 고은서입니다.”서연정은 약간 의아했다.“안녕하세요. 저한텐 무슨 일로 연락한 거죠?”“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겨서 이렇게 연락하게 되었습니다.”고은서의 허약한 목소리로부터 간절함이 느껴졌다.“저 곽승재와 이혼하고 싶습니다.”서연정은 또 한 번 의아했다.“무슨 일 있었나요? 정서가 약간 불안정한 것 같은데.”서연정이 온화한 목소리로 나긋하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교양이 있는 지적인 여자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방금전까지 애써 정서를 억누르고 있던 고은서는 자신을 관심해주는 서연정의 말을 듣자마자 약간 울컥했다.“저...”서연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렸다.“사정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곽승재랑 이혼하려고요.”고은서는 쉰 목소리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전에 곽승재가 할머니 생신이 지나면 이혼서류에 사인해준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사인해주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이젠 저를 협박하면서까지 이혼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리고 할머니가 저를 무척 아끼는 건 사실인데 저랑 곽승재 사이에 오해만 존재할 뿐 이혼할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세요. 게다가 할머니도 연세가 있으셔서 이런 일로 할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어요.”서연정은 그녀의 말을
서연정의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온종일 병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녀의 몸이 너무 허약한 탓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 박지연은 그녀의 곁을 계속 지켰다.이튿날, 의사가 회진을 돌면서 그녀에게 주의할 점을 전달하고 떠난 후 고은서는 돌아가 쉬라고 박지연을 달랬다.“나 혼자 누워있어도 돼. 일이 있으면 간병인 부르면 되는 거고.”“나 절대 안 가.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지금 괜찮은 척하지만 어제저녁 내내 자지 못했잖아.”고은서의 눈빛에는 아직도 원망이 남아있었다. 이를 알아본 박지연이 그녀를 달랬다.“날 보내고 백유미 찾으러 가려고 그러는 거지?”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저녁 그녀는 눈을 감을 때마다 핏덩어리가 되어 사라진 자신의 아이와 백유미의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아른거려 차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녀는 백유미를 향한 원망과 증오를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은서, 잘 생각해 봐. 백유미가 전에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다 모르는 척하면서 억울한 척 연기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이 한 짓을 인정하면서 비아냥거렸겠어.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박지연은 어제저녁 힘겹게 고은서의 입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캐냈다. 그녀는 고은서가 유산한 게 다 백유미 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뒤로 쓰러질 뻔했다.박지연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백유미가 겁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병원에서 고은서를 직접적으로 해치려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백유미가 전에 썼던 수단으로는 더는 널 해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야. 그래서 지금 방법을 바꿔 네 멘탈을 뒤흔들려고 하는 거라고. 고은서, 비통함에 깊이 빠져있어서는 안 돼. 몸 회복 잘하는 게 우선이야. 백유미 같은 악독한 사람도 언젠간 벌을 받게 될 거야.”박지연이 말을 보태었다.“하늘이 벌을 내리지 않으면 내가 직접 벌을 줘야지.”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은서야...”“됐
백승엽의 말을 들은 사람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고은서를 향해 들이밀었다.고은서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허약한 몸을 일으키면서 박지연에게 물었다.“지연아, 괜찮아?”“괜찮아.”병상 옆에 놓인 테이블에 부딪힌 박지연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으며 애써 고은서 옆으로 다가갔다.“봐봐요. 이 여자가 그런 악독한 일을 저질러 놓고도 나를 무시하면서 사과할 마음도 없어 보이잖아요.”백승엽은 울컥거리면서 말했다.“우리 유미가 어릴 때부터 개미 한 마리조차 밟지 않을 정도로 착했는데 이 악독한 여자 때문에 여러 번이고 죽음의 고비에 처했었다고요. 어제도 마찬가지로 우리 딸이 운이 좋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미 익사했을 거예요.”백승엽의 말을 들은 기자들과 매체인들은 카메라를 더 가까이 들이댔다.“다 저리 꺼지지 못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분명히 당신 딸이 먼저 우리 은서를 유산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당신들도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요. 그렇지 않으면 신고할 거예요!”박지연이 고은서 앞에 막아서면서 그들을 향해 호통쳤다.“신고해!”백승엽은 무서워하기는커녕 큰소리로 울부짖었다.“어제 우리 딸이 호수에 빠질 때 엄청 많은 목격자들이 있었어. 나도 어제부터 신고하고 싶었거든. 우리 딸을 다치게 해놓고 책임은 져야지! 고의상해죄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고의상해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기자들과 매체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야망으로 가득찬 눈길로 고은서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간단한 사랑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기사에 몇 마디만 추가하면 여론을 더 크게 몰고 갈 수도 있었다박지연도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생각했다.현재 백유미가 고은서를 유산하게 만들었다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투약한 간호사도 찾지 못한 상황이었고 또 그 간호사를 찾았다고 해도 백유미와 꼭 연관이 있다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이 일이 기사로 퍼지게 되면 여론이 고은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쏠리게 될 것이다.“이봐요.
백승엽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그냥 답하면 될 것을 나한테 물어볼 것이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죠? 혹시 다른 속셈이라도 품고 있는 건 아니죠? 그렇지 않으면 이런 수단으로 우리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그러는 거예요?”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어떤 태도로 그쪽의 물음에 대답할지를 결정할 만큼 아주 중요한 물음이라서요. 따님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제 물음 하나쯤 대답해주는 건 괜찮지 않나요?”백승엽은 고은서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는 기자들과 매체인들을 보며 순간 그까짓 물음 하나쯤을 대답해준다고 큰일이 나겠냐는 자신감이 생겼다.“대답 못 해줄 게 뭐가 있겠어요. 내가 당신처럼 물음 하나에 쩔쩔맬 줄 알아?”고은서는 기세등등한 백승엽의 모습을 보며 화내기는커녕 태연하게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백승엽 씨, 방금전에 착한 따님분께서 마음씨 좋게 저를 구해줬는데 제가 은혜도 모르고 따님을 해치려 했다고 했죠?”“그래요! 목격자랑 다른 증거들도 다 있으니까 순순히 인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제가 대체 왜 그랬을까요?”고은서가 되물었다.“거참, 어이없는 질문이네. 제가 그쪽 생각을 어떻게 알아요.”백승엽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다른 분들은 알고 계시나요?”고은서는 병실에 있는 기자들에게 물었다.그들은 서로 마주 보면서 어리둥절해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은서만 빤히 바라보았다.박지연도 고은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은서가 이미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기에 이렇게 담담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할 말이 뭔지나 얘기해!”백승엽이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고은서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다 모르시나 보네요. 그러면 확실히 제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마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죽이려 하는 게 아니
기자들은 더 몰두해서 두 사람의 표정을 촬영했다.“승재가 네 남편인 게 뭐가 어때서. 유미랑 승재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사이가 좋은 게 정상이 아니야? 너 하나 때문에 인연을 끊기라고 해야 한다는 거야?”백승엽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당연히 불가능하죠. 사이가 좋을 뿐만 아니라 서로 좋은 사업 파트너이기도 하잖아요. 백유미 씨를 위해 GS 그룹 슬하에 있는 판주 투자은행을 직접 수매할 정도로 친한 사이인데 제가 어떻게 인연을 끊으라고 하겠어요.”백승엽은 고은서의 말 속에 있는 함정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나불거렸다.“우리 딸이 그럴 만한 능력과 가치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 유미를 데려가겠다는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승재가 유미를 자기 회사에 남기려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야?”“백승엽 씨, 곽승재 씨가 조건도 훌륭하고 또 백유미 씨한테 이토록 잘해주는데 두 사람 혹시 오래전부터 눈이 맞은 사이는 아닌가요? 저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곽승재 씨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닌가요?”고은서는 백승엽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이런 상황에서 백유미 씨가 저를 처리해버리고 싶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제가 봤을 땐 충분히 가능해요. 본인이 제삼자이면서도 조강지처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제삼자라고 여길 수도 있죠.”박지연이 이내 말을 보태었다.고은서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백승엽을 유도해 백유미와 곽승재 두 사람 사이의 부정당한 관계를 인정하게끔 만들 생각이었다.모든 걸 깨달은 박지연은 옆에서 자연스레 고은서를 도왔다.제삼자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백승엽은 순간 당황해하며 변명했다.“누가 제삼자라는 거야! 입을 삐뚤어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지. 명예훼손으로 신고할 줄 알아. 유미랑 승재는 그냥 친구 사이라고!”“그냥 친구 사이라면서 방금전에는 왜 은서가 당신 딸을 질투한다고 한 거죠? 모순되지 않나요?”박지연이 물었다.“백승엽 씨, 백유미 씨께서 곽승재 씨가
고은서의 뜻을 알아차린 박지연은 백승엽의 밀치는 힘을 따라 자연스레 옆에 있는 테이블을 향해 넘어지더니 허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소리를 냈다.고은서도 따라 겁먹은 듯 뒤로 피하는 바람에 백승엽은 허탕을 쳤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백승엽은 고은서가 피하려고 하자 더 악을 쓰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아악!”“그만 하세요!”고은서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병실 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병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 수제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심상치 않은 기품을 내뿜고 있는 곽승재였다.“승재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백승엽은 이내 고은서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곽승재를 향해 미소 지으며 물었다.기자들은 다급하게 카메라를 곽승재를 향해 돌렸다.곽승재는 그들을 무시한 채 고은서를 향해 재빨리 다가갔다.얼굴이 창백해진 고은서는 두려운 눈길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심지어 입고 있던 환자복마저도 꾸깃꾸깃 해졌다.“괜찮아...”곽승재 입을 열자마자 고은서는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대화를 거절하는 듯 그를 등졌다.“승재야, 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다 고은서가 날 모함하려고 이러는 거야.”백승엽이 변명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백승엽을 째려보고는 병실 안에 있는 기자들과 땅에 넘어진 채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박지연을 둘러보았다.“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죠?곽승재의 말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백승엽도 그가 화났음을 감지했다.아무리 어릴 때부터 자라는 걸 봐온 아이라고 해도 백승엽은 곽승재를 볼 때마다 무언의 위압감을 느꼈다.“내가 다 설명해줄게.”백승엽은 말하고는 뒤돌아 기자들을 내쫓으려 했다.“나가, 나가. 다 나가라고. 찍을 게 뭐가 더 있다고 그러는 거야!”“수고비를 따로 준다고 했잖아요. 돈은 주셔야죠.”쫓겨난 기자 한 명이 불만을
곽승재는 백승엽을 노려보면서 물었다.“아저씨, 지금 뭘 걱정하시는 거죠?”“그냥 호기심일 뿐이야.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니.”백승엽은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 허리를 곧게 펴고 말했다.“승재야, 난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내가 찾아온 게 맞아. 그런데 이 또한 다 유미를 위해서야.”곽승재는 그의 말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기자들을 향해 담담하게 경고했다.“거짓 기사가 나오는 일이 없도록 처신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언성이 높지 않았지만 기자들은 무언의 위압감을 느꼈다. 그들은 아쉬움만 품은 채 더는 망설이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그런데 병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비서와 경호원들이 그들 앞에 막아서며 방금전에 촬영했던 내용을 전부 삭제하라고 할 줄은 미처 생각도 못 했다.속으로는 불만이 많았지만 곽승재의 요구라니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 장면을 보고 있던 백승엽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일을 크게 만들어 고은서를 엿먹이려 했었는데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땅에서 일어선 박지연은 곽승재를 무시한 채 병상 옆으로 다가가 고은서의 상태를 확인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길로 백승엽을 바라보며 물었다.“아저씨,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저 사람들을 고은서 병실로 데려온 이유가 뭐죠? 그리고 제가 들어왔을 때 왜 고은서를 잡아끌려고 했던 거예요?”백씨 집안 회사가 곽승재의 도움 없이 유지해나갈 수 없었던 이유로 그의 비난하는 듯한 태도에도 백승엽은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유미가 어렵게 정신을 차렸는데 신고도 하지 말고 고은서를 찾아가지도 말라고 하는데 아버지로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사람들 찾아서 유미를 더는 못 건드리게 고은서에게 경고 주려고 했던 거야.”백승엽은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그런데 고은서가 반성하기는커녕 유미를 제삼자라고 모욕을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사과하라고 하려던 중이었어. 하필 그때 네가 마침 들어온 거고. 승재야, 난 그저 경고만 주려 했을 뿐이야. 아무래도 네 아
“승재야, 그럼 난 먼저 유미 병실로 돌아갈게. 잠시 후에 시간 되면 너도 유미 보러 한 번 와. 요즘 한 번도 보러 간 적이 없다며. 유미가...”백승엽이 곽승재에게 말했다.“잠시 후에 들를게요. 먼저 가보세요.”곽승재가 백승엽의 말을 끊고 말했다.백승엽은 더는 말하지 않고 고은서를 힐끗 째려보고는 병실을 나갔다.그가 나간 후, 곽승재가 고은서 곁에 있던 박지연에게 말했다.“박지연 씨도 잠시 나가 있으세요. 고은서한테 단독으로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박지연은 의심하는 눈길로 곽승재를 보며 말했다.“곽 대표님, 금방 수술하고 몸이 허약한 애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방금전 백유미 아버지한테 시달림까지 받아서 그냥 쉬도록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박지연은 고은서의 현재 상태를 말하면서 은근슬쩍 방금전 백승엽이 한 짓을 비난했다.곽승재도 그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어제 투약한 간호사를 찾았는데 그냥 쉴래? 아니면 결과라도 들을래?”이 물은 선택제가 아니었다. 고은서는 필연코 결과를 들을 것이다. 그녀는 곽승재의 말을 듣자마자 박지연을 달랬다.“지연아, 먼저 돌아가서 쉬다가 나중에 와도 돼.”박지연은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아니. 나 안 돌아갈 거야. 밖에서 기다릴게.”박지연이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녀가 자신이 유산하게 된데 관해 은근히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박지연은 자신이 일을 동료에게 맡기지 않았더라면 고은서가 그 간호사를 믿었을 리도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가 전에 몇 번이고 자신이 경각심이 없이 소홀한 탓이라고, 박지연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그녀를 달래긴 했으나 그녀는 죄책감을 털어버리지 못했다.밖에서 기다린다고 고집부리는 박지연을 더는 막진 않은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박지연이 나간 후, 고은서는 웃음 거두고 낯선 사람을 보듯 차가운 눈길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 간호사가 누가 시킨 일이라는 건 말했어?”
고은서의 제안에 여시은이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바쁩니다.”여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곽 대표님, 한가해도 저랑 가지 않을 거잖아요! 곽 대표님 안목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말을 마친 여시은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곽 대표님이 고양이 돌보게 두고 넌 나랑 같이 가자. 다른 고양이한테 정신 팔려서 쿠아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결국 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삼색 고양이를 보러 갔다.고양이는 귀여웠지만 쿠아는 그 고양이를 경계하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겁을 먹은 듯 보였다.“삼색 고양이는 고양이 세계의 미녀라 누구든 보면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쿠아는 싫어하는 거지?”여시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쿠아가 아직 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그러네. 그럼 그냥 쿠아를 혼자 두는 게 낫겠다. 괜히 다른 고양이를 들여서 외롭다고 느끼게 만들면 안 되잖아.”여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쿠아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녀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문득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졌다.‘여시은이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까?’일부러 SNS에 사진을 올려 곽승재를 현장으로 불러내 그 앞에서 친밀하게 행동했지만 정작 여시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정말 곽승재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연기력이 뛰어난 걸까?’고은서는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오후가 되어서야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여시은은 곽승재에게 고은서를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며 그녀는 쿠아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퀸은 한없이 애교를 부렸다.고은서가 안고 있으면 자꾸만 얼굴에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탓에 마음이 무너져내린 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차를 타기로 했다.가는 길에 고은서는 무심하게 곽승연의 근황을 물었다.‘호원 저택에 가 있긴 하지만 어머니가 자주 본가로 데리고 나와. 게다가 심리 상담도 받고 아로마 테라피도 병행하는 중이라 상태는 나쁘지 않아.’
고은서는 어릴 적 드럼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멋진 별명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퀸이었다.예전에 곽승재를 쫓아다닐 때 재미 삼아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당시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갑자기 그 얘기를 꺼낸 걸 보면 기억하는 걸까?’그가 기억하든 말든 고은서는 굳이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마음대로 해.”어차피 그 별명은 중2병 시절에 장난으로 붙인 거였고 이제는 고양이 이름으로 써도 나쁘지 않았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려다 뜻밖에도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연정이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곽승연을 데리고 나오는 대신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무테안경을 쓴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남자는 세련되게 차려입었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차분함이 느껴졌다.우연히 마주친 건지 일부러 약속을 잡은 건지 남자의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서연정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이 그 남자는 서연정의 구애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왜 그래?”곽승재는 한참 동안 반응 없는 고은서를 보며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궁금해했다.“곽승재!”곽승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고은서가 그를 불러 세웠다.곽승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두어 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얼른 핑계를 지어냈다.“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좀 봐줄래?”그러면서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곽승재에게 다가섰다.“어느 쪽?”“오른쪽!”곽승재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그 안에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고 햇빛이 비치는 그녀의 하얀 얼굴은 가느다란 솜털까지 선명하게 드러냈다.연분홍빛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곽승재는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고은서는 깜짝 놀라 곽승재를
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품에 안고 있던 아기 고양이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놀란 척하며 곽승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곽승재는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그녀의 팔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걸 신경 쓰는 듯 먼저 팔을 지탱했다가 곧 허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코끝에는 익숙한 삼나무 향이 은은하게 스쳤다.고은서는 불쾌감을 참아내며 그릴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쿠아에게만 신경을 쓰며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뿐 두 사람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아, 망했다. 괜히 연기했네. 완전 헛수고잖아.”그 순간 곽승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손은 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올리며 상태를 확인했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괜찮아. 아기 고양이라 이가 아직 덜 자라서 가볍게 물렸을 뿐이야.”그렇게 말한 뒤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손끝을 살짝 문지르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무대 쪽에는 행사 주최 측뿐만 아니라 고양이 사육 전문가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인지라 이런 자리에서도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한편 고은서는 사육 전문가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쿠아가 심하게 낯을 가리는 문제가 떠올라 전문가에게 문의했다.전문가는 차분히 설명했다.“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쳤다면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럴 땐 장난감과 간식을 준비해 주고 주인이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 서서히 나아질 겁니다.”장난감과 간식은 여시은이 충분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 보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다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깜짝 놀라거나 털을 세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