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의 분노와 발버둥을 느낀 곽승재는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수건이 곳곳에 걸려 있었고 고은서는 화가 난 것도 잊고 수건 하나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수건을 둘러매고는 수영장 주변의 작은 길을 따라 박지연을 찾으러 도망치듯 떠났다.곽승재는 물에 흠뻑 젖은 고은서를 지켜보았다. 보수적인 수영복은 여전히 그녀의 가는 다리와 곡선미를 가릴 수 없었고 그는 그녀를 놓아준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형, 듣고 있어?”육현석이 또 한 번 부르며 말했다.곽승재는 그제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고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무슨 일이야?”“왜 이렇게 화가 났어? 욕구불만이야?”육현석이 장난치며 말했다.육현석은 자신이 무심코 한 농담이 마침 곽승재의 신경을 건드렸다는 것을 몰랐다.“앞으로는 일이 있으면 주민기에게 직접 전화해.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상황 파악이 안 된 육현석을 혼자 남겨둔 채 곽승재는 버럭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육현석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고 왜 갑자기 연락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찾아왔다.박지연은 그녀가 올 거라고 미리 알고 있었는지 동료들더러 다 나가보라고 했다. 그리고 손에 휴대폰을 들고 로즈꽃 온천에 앉아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웃어? 지금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할 뻔했다고!”고은서는 온천에 들어가며 화를 냈다.“내가 뭘 했는데? 그냥 너를 온천에 데려온 것뿐이야. 난 너와 승재 씨가 달콤하게 안고 있으라고 시키진 않았어.” 박지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냥 딱 한 번 가볍게 안을 줄 알았는데 떨어지기 아쉬웠나 봐? 네 주변 사람들은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알고 있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아직 신혼부부인 줄 알겠네.”방금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고은서의 얼굴이 다시 뜨거워 났다.사실은 박지연이 생각하는 로맨틱한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곽승재의 몸이 반응을 일으켜 그에게 맞춰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건 GS 그룹의 내부 직원 단톡방 아니야? 네가 왜 거기 있어?”고은서가 박지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박지연은 떳떳하게 휴대폰을 돌려받고 댓글을 계속 읽으며 말했다.“이건 업무 단톡방이 아니고 그들이 따로 만든 뒷담화용 단톡방이야. 현석 씨가 나를 초대했어.”고은서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너 인맥 꽤 넓어졌다? 현석 씨와 친해진 것도 모자라 이렇게 빨리 GS 그룹 내부에까지 들어갔어?”박지연이 말했다.“그냥 그들의 뒷담화가 궁금해서 들어간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 둘 사이는 아무도 몰라.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다 진심으로 얘기하는 거야.”고은서는 말이 없었다.산장의 객실에서, 백유미는 문서들을 검토하고 있었고 단톡방의 메시지 소음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물을 다칠 수 없었다. 습식 사우나도 당연히 금지되어 있어 그녀는 놀이에 참여하지 않고 원지훈에게 줄 프로젝트를 연구하고 있었다.단톡방에서 이렇게 시끄럽길래 백유미는 휴대폰을 들고 무슨 재밌는 가십거리가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사진을 보자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사진은 여러 장이었고 모든 사진 속 곽승재와 고은서는 친밀하게 안고 있었으며, 곽승재의 눈빛에는 고은서를 향한 무의식적인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백유미는 휴대폰을 꽉 쥐며 부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오기 전에 그녀는 분명히 비서에게 확인했었고 곽승재가 혼자라고 했다. 그런데 왜 고은서가 이곳에 나타나 곽승재와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백유미는 자신을 진정시키며 성아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아연 씨, 고은서랑 관계를 어떻게 좀 해보라고 했잖아요, 왜 아직도 소식이 없죠?”아무도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주지 않아 그녀는 항상 일을 수동적으로 해야 했다.성아연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백유미씨, 고은서는 저를 매우 경계하고 있어서 제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아요. 그래서 서두를 수 없어요.”“그럼 계속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건가요?”
“할 말 다 했어? 그럼 가도 돼.”곽승재가 사람을 쫓아내며 말했다.그러자 육현석은 당당하게 대답했다.“형, 아직 시간도 남았고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이 최상급 천연 온천에 안 들어가면 좀 아깝잖아, 그치?”곽승재는 그의 말을 예상했지만 전혀 신경 쓸 에너지가 없어서 그냥 명령했다.“나에게서 떨어져 있어.”그가 너무 눈에 띄어서 창피했다.“형, 형수님은 어디에 있어?”육현석은 곽승재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장난스럽게 물었다.“방금 형과 형수님이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했다는 소문이 진짜야?”“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형, 어떻게 사람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어? 형수님이 있으면 나는 버리는 거야?”육현석은 서운하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먼저 박지연 씨를 설득해 형수님을 데려오게 했는데 형은 벌써 은혜를 잊었어? 이렇게 기쁜 일도 나와 공유하지 않으려 하면 어떡해!”“좀 조용히 해.”곽승재는 육현석이 시끄럽다고 느끼며 앞을 바라보았다.고은서와 박지연은 온천에서 나와 식사 구역으로 가고 있었다. 곽승재의 시선은 고은서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약간 젖어 있었고 매끈한 몸매에 우유처럼 흰 피부는 햇볕에 더욱 투명하게 빛났다.마치 물에서 막 나온 인어처럼 보였다.이전에 곽승재는 고은서가 이렇게 놀라운 미모인 줄 몰랐는데 왜 지금은 훨씬 더 예뻐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다른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 때도 곽승재는 매우 불쾌했다.육현석도 곽승재의 시선을 따라 고은서와 박지연을 보았다.두 사람은 가운을 두르고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었다.“형, 아직도 앉아서 뭐 해? 배 안 고파? 뭐라도 먹고 싶은 거 없어?”육현석이 일부러 묻자 곽승재는 검은 눈을 들며 되물었다.“너 배고프냐?”육현석은 형이 자존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고개를 끄덕였다.“배고파, 형. 나 아직 형이 아끼는 동생 맞지? 같이 식사 좀 해줘.”곽승재는 마지못해 일어났다.“가자.”“...”육현
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살펴보니 곽승재의 옆구리 부분에 깊은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것은 술집에서 그녀를 안고 나올 때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혀서 생긴 것 같았다.이전에 육현석에게서 들었을 때는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곽승재의 흰 피부에 비치는 검푸른 멍을 보니 그때 얼마나 아프고 심하게 부딪혔을지 상상이 갔다.“혹시 미안하면 저녁에 직접 약 발라줄래?”곽승재가 일부러 말했다.방금까지 분명히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던 고은서는 대놓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웃기지 마.”“...”뷔페 코너는 셀프였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고집에 못 이겨 그가 접시를 들고 음식을 골라 담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의 애정 넘치는 행동은 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모두가 대표님과 사모님의 찐득한 부부애에 대해 알게 될 것 같았다.고은서와 곽승재가 음식을 다 챙겨서 식탁에 앉았을 때 박지연과 육현석도 마침 많은 양의 구운 해산물들을 가지고 돌아왔다.“저 지금 배고파 죽을 것 같아요. 물에 오래 있을수록 특히 배가 고프더라고요!”박지연이 말하며 고은서에게 두 손 크기의 구운 랍스터를 건넸다.“이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서 특별히 가져왔어. 어때? 나 착하지?”고은서는 박지연이 방금 친 사고를 만회하려고 의도적으로 이러는 것을 알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래, 고마워. 어쩜 이렇게 배려가 깊을까?”“헤헤, 아니야. 빨리 먹어!”박지연은 신경 쓰지 않고 닭 다리 살을 입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랍스터는 껍질을 벗겨야 하는 게 좀 귀찮았다. 그러자 고은서도 군침이 돌면서 껍질을 벗길 필요 없는 맛있는 닭 다리 살을 한입 베어 물었다.“형수님, 박지연 씨가 구운 랍스터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는데, 왜 안 먹어요?”육현석이 물었다.고은서는 닭 다리 한 입을 베어 물면서 오물오물 씹으며 대답했다.“껍질 벗기기 귀찮아서요.”박지연은 웃으며 말했다.“스스로는 귀찮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을 위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행동 같지만 분명히 그만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마음속의 감정을 억누르며 백유미는 장난치며 웃고 있는 사람들 앞에 다가갔다.“승재 오빠, 은서 씨, 현석 씨, 모두 계시네요. 제가 여기 앉아도 괜찮으신가요?”고은서는 얇은 옷과 연한 화장으로 꼬리치는 백유미를 보며 표정이 확연히 어두워졌고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육현석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이사님, 정말 죄송한데 사모님의 친구분도 여기 계셔서 합석은 좀...”백유미는 그제야 박지연을 보며 말했다.“이분이 은서 씨의 친구군요. 업무 처리하느라 바빠서 아까 인사를 못 드렸네요. 진심으로 사과드려요.”박지연은 전에 백유미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여우 같은 행동과 고은서의 반응을 보고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이사님? 그렇다면 그쪽은 대표님의 아래 사람이군요. 그런데 방금 대표님을 뭐라고 불렀어요? 고은서는 은서 씨라고 부르면서 대표님의 이름은 직접 불러요?”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이 곽승재를 불쾌하게 만들 것임을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고 박지연을 말리려 하지도 않았다. “지연 씨가 모를 수도 있는데 이사님과 승재 형은 십 대 초반부터 아는 사이여서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부르는 게 습관이죠.”육현석이 나서서 설명했다.백유미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고 여전히 온화한 모습이었다.“박지연 씨, 조언 감사해요. 제 실수였어요. 다음에는 주의하도록 할게요.”“대표님, 지금 괜찮으신가요? 급한 공사가 있어서 보고 드려야 할 텐데요.”백유미가 평온하게 앉아 있는 곽승재를 향해 물었다.백유미의 얼굴에 피로감이 엿보이자 곽승재는 그녀가 최근에 힘들어했던 이유를 알았고 그녀를 쫓아내지 않았다.“앉아, 먹으면서 얘기하자.”백유미는 무표정한 고은서를 한 눈 보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서서 얘기할게요. 다들 식사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이것만 말씀만 드리고 나갈게요.”“다른 사람에게 방해될 걸 알고 있다면 차라리 오지 마시던가요.”
“내가 힘들게 줄 서서 가져온 걸 왜 걔가 공짜로 먹어야 해!”박지연이 말하며 그쪽으로 가서 음식을 가져오려 했다.그러자 고은서가 그녀를 막았다.“그만해, 그런 유치한 짓 하지 마.”“뭐가 유치해? 당연한 거 아니야? 배고프면 스스로 가지러 가던지, 다른 사람이 가져다준 걸 저렇게 앉아서 편하게 먹고 있는 게 말이 돼?”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앉아서 편하게 먹다’라는 표현이 백유미에게 정말 딱 맞았다. 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그녀와 직접 싸운 적이 없었지만 곽승재와의 감정만으로 그녀를 쉽게 밀어내고 예비 곽 씨 사모님이 되었으니, 정말 앉아서 편하게 먹은 셈이다.“지연 씨, 방금 것들이 더 먹고 싶으세요? 제가 가져다줄게요!” 육현석이 자진해서 말했다.박지연은 저쪽 테이블의 음식을 뺏으려던 행동을 포기했다.“고마워요, 그럼 부탁할게요.”“별말씀을요. 어차피 별로 힘들지 않았으니.”육현석이 자리를 떠난 후 박지연이 말했다.“은서야, 그래서 네가 전에 백유미를 그렇게 싫어했던 거구나. 정말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인물이야.”“넌 이게 첫 만남 아냐? 벌써 이렇게 싫어해도 돼?”고은서가 웃으며 묻자 박지연이 대답했다. “제일 짜증 나는 건, 걔가 분명히 여우짓을 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그녀가 억울한 처지에서도 여전히 착한 줄로 알잖아.”고은서는 그 말에 두 손 들고 찬성했다. 백유미는 항상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모두에게 점잖고 온화한 모습만 보이도록 한다.“너 오늘 웬일이야? 백유미가 승재 씨와 함께 앉아 있는 걸 보고도 무감각하게 넘어가고, 내가 가서 시비 걸려는 것도 하지 말라고 하고.”박지연이 농담하며 말했다.“예전이라면 백유미와 승재 씨가 함께 밥 먹는 것만 보고도 테이블을 뒤엎었겠지?”고은서는 생각했다. 아니, 밥을 먹기도 전, 백유미가 나타나자마자 그녀는 이미 참지 못하고 사람을 내쫓았을 것이다.“됐어, 이 말 그만하자. 그녀가 어떻게 하든 나와는 상관없어. 어제 온 닥터가
육현석은 곽승재의 상황을 설명하고는 또 말했다.“형수님, 지연 씨, 저도 아버지랑 밥 먹기로 해서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다시 모여요.”“그래요.”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 뒤로 고은서와 박지연은 여러 가지 특색이 있는 온천탕을 체험하고 예쁜 사진도 많이 찍으면서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냈다.저녁 시간 때 박지연은 밖에 나가 온 닥터와 통화하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먼저 레스토랑에 갔다.저녁 식사의 장소는 산장에 있는 호화로운 레스토랑이었다.비록 이 레스토랑도 뷔페 형식이지만 음식은 온천 구역의 스낵과 바비큐보다 훨씬 좋았고 회, 성게, 호주 랍스터 등이 있었다.종일 물놀이 하느라 배가 많이 고팠던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일부 젊은 친구들은 수저를 사용하는 게 귀찮아서 맨손으로 랍스터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그들의 털털함과 맘껏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배가 고파졌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많은 굶주림을 당해서인지, 이번 생에 고은서는 음식에 대한 애착이 훨씬 강해졌다.집에 있을 때 고은서는 혼자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설사 곽승재가 집에 있다고 해도 너무 우아하게 밥을 먹어서 고은서는 그가 밥을 먹는 게 아니라 광고를 찍는 것처럼 느꼈고 전혀 입맛을 돋우지 못했다.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이 팔을 걷어 올리고 마음껏 먹는 모습을 보니 고은서도 식욕이 폭증했다.고은서는 이것저것 많이 챙겨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렇게 급하게 먹어?”고은서가 흐뭇하게 먹고 있을 때 곽승재가 갑자기 나타났다.그는 이미 자주 입는 셔츠로 갈아입었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가슴팍의 두세 개 단추를 풀어놓아 건장한 가슴을 드러냈다.“왜 넋이 나갔어? 일단 입에 있는 것부터 삼키고 봐.”곽승재는 두 볼이 빵빵한 고은서가 햄스터 같아 보였고 그녀의 이마 끝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생겨났다.고은서는 경계하듯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고은서와 마주쳤다.“그때 당시 상황이 그 물음을 대답하기 적합한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해?”고은서는 아무 이유 없이 과일로 백유미를 내리쳤고, 또 백유미의 목을 졸라 죽일 기세였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미친 행동에 충격을 받아 그녀의 생트집 잡는 질문을 상대할 여지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그윽한 눈동자가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말했다.“당신이 백유미 씨와 결혼하든 말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은서야...”“지연아, 이쪽!”곽승재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고은서는 그의 말을 끊고 입구에 나타난 박지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박지연은 두 사람 앞에 걸어와서 말했다.“승재 씨, 일 다 보셨어요?”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둘이 얘기 나누세요. 저는 저쪽에 다녀올게요.”“무슨 일 있었어? 너와 승재 씨의 분위기가 이상해 보이는데?”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조금 전에 곽승재가 자신한테 했던 말들을 숨기지 않고 박지연에게 말해주었다.“승재 씨는 네가 삐졌을까 봐 백유미 씨를 내쫓지 않는 이유를 특별히 설명한 거네.”박지연이 말했다.“내가 승재 씨가 너에게 감정이 있고, 너와 이혼하기 싫어한다고 계속 말했잖아. 이제는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눈총을 쏘아붙이며 말했다.“난 그게 나한테 감정이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어. 설사 그 사람이 나에게 감정이 있다고 해도 난 이혼할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은서야, 네가 승재 씨를 그렇게 오래 사랑했는데, 이제 겨우 희망이 보이는데, 왜 인제 와서 물러서는 거야? 얼마나 많은 여자가 승재 씨 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데, 너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고은서는 확고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후회하지 않을 거야.”전생에 고은서는 곽승재에게만 너무 집착하여 많은 아쉬움을 남겼었다.그녀는 외할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고, MQ를 지키지 못했고,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했으며, 인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
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또 우리 형 들먹이네? 곽승재, 너도 이 수밖에 안 되냐? 설마 나만 쫓아내면 은서 씨가 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민시후의 말은 곽승재의 정곡을 찔렀고 그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곽승재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마침 손을 씻고 다가온 고은서는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저 곽승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안 먹을 거면 아주머니한테 국만 싸달라고 해서 가져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으며 대답했다.“먹고 갈 거야.”고은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미숙은 주방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세 사람은 어색하지 않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피곤한 모습의 고은서를 본 민시후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나가기 전에 곽승재까지 데리고 떠났다.다음 날 오전, 고은서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어젯밤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던 두 노숙자의 혈액 검사 결과, 불법 약물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그 약물은 뇌를 자극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은서를 덮치려 한 것이었다.문제는 그 약물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였다. 조사 결과, 노숙자들이 먹은 음식과 술에서 검출되었고 누군가 일부러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고은서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회의실에는 송민아가 있었고 접견실 소파에는 송민준이 앉아 있었다.그날 개업식 이후, 고은서는 송민준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개업식에서 송민준의 정장을 엉망으로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린 고은서는 송민아에게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얼마였는지 물어봤었다. 그러나 송민아는 단칼에 보상을 거절했다.“겨우 정장 한 벌일 뿐인데 무슨 보상이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오빠도
“나 마침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려던 참이야.”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국을 끓였다고 하더라. 나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했어.”원래 기분이 좋지 않던 민시후는 곽승재가 고은서네 가정부를 핑계 삼아 온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그래도 곽 대표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그리고 이어 고은서를 향해 투정 부렸다.“나도 배고픈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뜨끈한 국 한 그릇 먹어도 될까?”민시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 해.”그리하여 곽승재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고은서는 민시후의 차에 올랐다.민시후의 차가 점점 멀어져갔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주민기는 밤바람 속에서 쓸쓸해 보이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안쓰러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애써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곽승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하아... 대표님의 아내 되찾기 여정은 끝도 없이 험난하구나.’주민기가 속으로 한탄하던 중, 갑자기 곽승재의 시선이 그를 스쳤다.주민기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대표님, 그래도 가시겠습니까?”곽승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고가 났던 골목에 CCTV 설치해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실력 좋은 운전사를 붙이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주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막 올라가려는데 저쪽에서 막 도착한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접 운전해서 온 듯했고, 비서는 곁에 없었다.민시후는 그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고은서는 곽승재를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사모님, 곽 대표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안 오셨나요?”
고은서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후 씨,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재벌가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시후 씨가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 아버님과 형도 그냥 이성 친구라 생각하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그녀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포기하기를 원하는 거야?”고은서는 다소 수척해진 민시후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사실 시후 씨도 잘 알잖아. 1년이 지나도 가족분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민씨 가문에선 나와 곽 씨 집안의 혼인 관계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만약 고은서가 예전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민씨 가문에서도 그걸 덮을 수 있었겠지만 곽승재의 전처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큰 문제였다.민씨 가문 같은 재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기에 그녀가 며느리가 되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은서 씨, 아직도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야?”민시후의 눈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아니, 시후 씨 마음을 알아. 문제는 나야.”고은서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내가 정말 시후 씨를 사랑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시후 씨 가족의 태도나 외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만큼 시후 씨에 대한 감정이 부족해. 그래서 시후 씨 가족분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부적인 이유도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는...”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급하게 말했다.“그러지 마,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잖아.”고은서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살며시 민시후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걸 시후 씨도 알 거야. 그러니 그런 고집은 의미가 없어.”민시후는 여전히 고은서를 끌어안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