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주인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귀 끝까지 빨개진 주인혁은 다급하게 부인했다.“저기요! 그런 게 아니라 여자가 호신술 많이 배워두면 좋으니까 하는 말이거든요. 위험할 때 본인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죠.”주인혁의 반응을 본 고은서는 예상대로라는 듯 웃고는 말했다.“장난인데 뭘 그렇게 긴장해요.”주인혁은 여전히 빨개진 귓볼을 하고 물었다.“제가 혹시 은서 씨 귀찮게 했어요?”“귀찮게 한 건 아니고요.”고은서는 이참에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그냥 내가 저번에 도와준 일로 나를 너무 좋게 볼까 봐요. 내 모든 게 다 좋아 보여서 생겨서는 안 될 생각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래요.”“그런 건 걱정 마세요. 저도 제 신분을 아는데 어떻게 감히 은서 씨 같은 사람을 넘봐요.”“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절대 아니에요.”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상황은 그냥 잠시뿐이에요. 곧 엄청난 성공을 이룰 거고 많은 사람들이 주인혁 씨한테 관심 가져주고 주인혁 씨를 좋아할 거에요.”“그리고 나를 넘본다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인혁 씨보다 나이도 많고 이미 결혼도 했잖아요. 인혁 씨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울려요.”고은서의 말에 긴장이 조금 풀린 주인혁은 고은서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그러니까 컨디션 조절 잘해서 하고 싶은 일만 잘해요, 힘내요!”그렇게 응원을 마친 고은서는 헬스장을 나와서 택시를 부르려고 하는데 마침 원지훈에게서 온 문자 두 개를 보게 되었다.[누나, 시간 좀 있어요? 은혜 씨 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누나 시간 괜찮나 해서요.][미안해요, 귀찮게 해서. 은혜 씨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7시에 첫 번째 문자를 보내고 한 시간 뒤에 온 두 번째 문자였다.고은서가 답장하지 않으니 귀찮은 거로 여긴 것 같았다.고은서는 조금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아까는 운동 중이어서 핸드폰 보관함에 넣어뒀었어. 물어볼
원지훈은 “낚시”하는 법을 잘 알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말 대신 사리에 맞는 말을 먼저 꺼냈다. “사촌누나, 저한테 보내주세요. 제가 다른 보통의 헬스장과 비교 해볼게요.” 그의 말에 고은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전화를 끊고 그녀는 복싱관의 이름을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와 조은혜 사이가 어느 정도로 진전이 있는지는 그와 많이 접촉해야봐야만 알 수 있다. ‘꼬투리 하나라도 잡는다면 더 좋을 텐데.’ [감사합니다. 사촌누나.] 원지훈이 고은서에게 감사의 말을 담은 문자를 보내왔다. [괜찮아. 너랑 은혜 사이가 아직 확실하지 않다면 사촌누나라고 부르지 말아줘. 그냥 은서 씨라고 해.] [네. 은서 씨 일찍 쉬세요.] ... 어느 한 병원 안, 백유미는 이마와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어두운 안색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유미야, 병실이 너무 좋은데? 곽씨 일가의 도련님께서 꽤나 잘해 주나봐?” 범가온은 그녀의 병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백유미는 그의 말을 못들은 척 무시하며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나를 찾아온 거예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말했었는데 잊었나요?” “네가 다쳤다기에 얼른 와서 너 괜찮은지 보려고 했지.” 범가온은 냉랭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유미 너는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다행히 그 등이 살짝 빗나가서 망정이지, 제대로 떨어져 네 머리에 부딪혔다면 큰 구멍 정도는 남았겠다.” 백유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왜 통화할 때 안 말하고 꼭 나한테 직접 온 거죠?” 범가온은 두 손을 비비적거리며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 말을 했다. “요즘 원지훈 그 놈이 조 씨 그 여자를 쫓아다니는 바람에 이것저것 다 사재기 하고 있어. 하루는 밥을 산다고 나가고 다른 하루는 같이 놀러간다고 나가고해서 돈을 거의 다 썼지 뭐야.” 백유미는 범가온에 손목에 있는 금팔찌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또 한 가지, 제발 신경 좀 많이 쓰라고 전해주세요. 보통의 방법이 안 통한다면 다른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서라도 꼭 성공하라고 하시구요. 전 제 돈이 물처럼 새어나가면서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하는건 싫어서요.” 범가온은 은행 카드를 손에 꼭 쥐고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걱정하지마, 지훈이가 힘을 낼 거야. 어제 원래 지훈이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등장해 그 여자를 구해줄 계획이었는데 조 씨 그 여자가 일이 생겼다고 미리 가버린거 있지? 다른 방법 좀 생각해봐서 꼭 성공하겠다고 말했으니까 기다려보자!” 백유미는 더 물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범가온에게 당부의 말들만 했다. “나중에 일이 생기면 제가 찾아 갈게요.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대로 저한테 오지 말아주세요.” 전에 고은서와 곽승재는 범가온이 백유미 앞에 몇 번이나 나타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은 친척 관계라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는 않겠지만 원지훈이 목적을 가지고 조은헤에게 다가가고 있기에 조심해야만 했다. 만약 들킨다면 뒤에서 몰래 도와준 백유미까지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범가온은 카드를 가방 안에 소중히 잘 넣어두고는 백유미에게 말했다. “유미야, 난 오늘 원래 네 상황이 어떤지 보고 가려고 했어. 혼자 입원한 것도 모자라 가족도 없이 병 치료를 해야 하는 네가 너무 안쓰러워서 말이야.” 백유미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며 범가온에게 말했다. “조금 잇다가 간호사에게 말하세요. 제가 쓰러졌다고. 그러면 알아서 처리 해줄 거예요.” 범가온은 순식간에 백유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알겠어. 곽 대표님이 나보다는 더 잘 챙겨줄 테니까! 내가 지금 당장 가서 간호사 불러 올게.” ... 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별장 안에 누구의 인기척도 없어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문을 여는 순간, 고은서는 방 안에 조금 변화가 생긴 사실을 알아차렸다. ‘승재 오빠의 물건이 많아졌네?’ 원래 고은서가 쓰는
“곽 선생님, 백유미 씨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빨리 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곽승재는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는 고은서를 슥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잠옷을 갈아입고는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곽승재와 가까운 거리에 서있던 고은서는 당연하게도 수화기 너머 간병인의 목소리를 들었고 곽승재가 지금 어디로 향할지도 알아차렸다. 할아버지는 늘 고은서에게 곽승재도 그녀에게 애정이 꽤 있는 것 같으니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잘 지내보라는 말을 했었다. ‘다른 여자가 쓰러졌다는 전화만 받고 달려 나가는 남자한테 내가 왜?’ 그 시각, 병원. 백유미는 넘어져서 퍼렇게 멍이든 자신의 팔을 어루만지며 곽승재에게 말했다. “승재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 침대에서 내려가서 조금이라도 걷고 싶었는데 머리가 휭 해나면서 어지러워지는거 있지? 살짝 넘어졌는데 간병인이 깜짝 놀라서는 너한테 전화 했나봐.”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여기 간병인 있잖아? 근데 왜 혼자 침대에서 내려오는 거야?” 백유미가 대답했다. “난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해서 퇴원하고 싶었어. 그래야 명운의 항목을 다시 가져올 것 같아서.” “그 일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고작 명운 하나 없다고 판주가 안 돌아가지는 않으니까.” 곽승재가 백유미의 말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백유미는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백승재의 말에 반박을 했다. “다른 사람이 투자했다면 상관도 안 하겠지만 민시후 씨가 너랑 겨뤄보겠다는 의도가 너무 선명하잖아. 그래서 난 그 사람이 널 이기게 하고 싶지 않아.” “들어보니까 오후에 부하 직원까지 불러서 회의까지 하려고 했다면서?” 백승재가 입을 열었다. “민 대표가 나랑 그러는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항목에 투자를 한다 해도 나를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 “회사일은 부하 직원에게 잘 부탁하고 넌 치료에
다음날 아침, 고은서는 어떤 것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눈이 저절로 떠질 때까지 잠을 잤다. 어제 주인혁과 함께 호신술을 열심히 연습한 탓에 집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샤워를 마친 후 바로 침대에 누워 쓰러지듯 잠에 들어버렸다. 상쾌한 컨디션으로 아침을 맞은 고은서는 기지개를 쫙 편 뒤, 핸드폰으로 새로 나온 뉴스를 확인하려고 했다. 핸드폰을 가지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고은서는 침대 맡의 서랍 위에 못 보던 와인 색상의 선물 상자가 놓아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선물 상자를 살짝 열어본 고은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반짝이고 예쁜 한 쌍의 귀걸이였다. 빛나는 보석들이 가득 박혀있는 귀걸이였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이라 하나도 과해보이지 않아 일상용으로 착용하기에 아주 좋아보였다. 이런 귀걸이를 지금까지 산 적이 없던 고은서는 자신의 침대 맡에 있었으니 당연히 누군가 선물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재오빠가 놓은 건가?’‘어젯밤에 돌아 왔었나?’너무도 깊은 잠에 빠져있던 고은서는 곽승재가 집으로 돌아온 줄도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곽승재는 일부로 그녀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선물 상자를 잘 배치해두었다. 아마 그는 어젯밤 나가서 백유미를 만나고 온 것에 미안한 감정을 느껴 고은서에게 작은 보상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전에 곽승재는 고은서가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날에 선물을 사달라고 졸랐어도 늘 시간이 없어서 혹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니 혼자 가서 고르라는 말로 거절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곽승재는 마치 늘 하던 일 인 냥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고은서는 귀걸이를 먼저 내려놓고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 돌아온 그녀는 그 귀걸이를 손에 들어 자신의 귀에 가져다대며 예쁜지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문득 손에 들려있는 귀걸이가 묘하게 눈에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하던 고은서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래!’전생에 고은서는 백유미가 이 귀걸이를 낀 채 인스타에 사진을 찍어 올렸
쓰레기통에 처참히 버려진 귀걸이를 본 곽승재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은서, 너 지금 이게 아침부터 뭐 하는 짓거리야?”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빠잖아!” 고은서는 냉랭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선물 사주고 싶지 않으면 아예 사주지 마. 내가 무슨 쓰레기통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지 않는 물건은 나도 필요 없다고!” “고은서 너는 꼭 이렇게 막무가내로 화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곽승재는 행여나 고은서가 귀걸이를 선물한 사람이 백유미라는 것을 알아차릴까 봐 마음이 급해졌다. “이게 어딜 봐서 다른 사람이 버린 물건인데? 이렇게 태그도 달려 있잖아. 새것이라고!” “태그 하나 걸려있으면 새 물건인 거야?” 고은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갔다. “오빠, 공평공정하게 대하고 싶은 거라면 내가 좋아하는게 무엇인지부터 잘 물어봤어야지. 전처럼 내 의견 따위를 무시하지 말고!” 고은서의 날카로운 지적의 말들을 들은 곽승재는 인내심이 바닥이 나버렸다. “그럼 내가 그냥 쓸데없는 일 하나 했다고 생각해! 누가 네 의견 따위에 관심을 해주는데?” 곽승재는 화가 나 씩씩대다가 바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고은서 또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귀걸이가 있던 선물 상자마저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졌다. ‘곽승재 진짜 나쁜 놈이야!’ ‘원래 백유미한테 줬어야 할 물건을 나한테 주다니, 내가 그렇게 하찮은 사람 같아 보이나? 자기가 준 거면 내가 다 기뻐할 줄 아는 거야? 그게 똥이라도 나는 향기롭다고 말할 것 같았나 보네?’ 생각하면 할수록 미친 듯이 화가 나는 고은서는 홧김에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툭 차버렸다. 그러는 바람에 귀걸이는 쓰레기통 안에서 굴러 나왔고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은 고은서의 눈에 무척이나 거슬렸다. 고은서는 화를 못 이겨 귀걸이를 몇 번이고 밟아 망가뜨린 다음 변기에 내려 보내려고 생각했지만 정교한 모양과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곽승재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육현석이 제 말이 지나쳤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몸을 움츠리며 웃었다.“아니, 형 마음은 좋은데 그냥 방법이 잘못됐다는 거지.”“입장 바꿔 생각해봐, 형수님이 밤에 다른 남자 병문안 갔다가 다른 사람 주려던 거 선물이라면서 형한테 주면 형은 기분 좋겠어?”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듯 말했다.“전에도 나한테 선물 달라고 한 적 있어. 그래서 이번에 가져다주면 나 좀 그만 귀찮게 할까 해서 그랬던 거지.”“그래도 이렇게 대충 넘기는 건 아니지. 형수님이 다른 남자가 사준 물건을 형한테 선물이라고 주면 형은 화 안 나?”“말 할 줄 모르면 그냥 입을 다물어.”육현석의 말에 곽승재는 짜증 난다는 듯 대꾸했다.“걔가 어디서 남자를 만난다고 다른 남자가 있어!”조심한다는 게 그만 또 말을 직설적으로 해버린 육현석은 제 입을 손으로 때리며 말했다.“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봐, 형은 비유하는 것만 들어도 이렇게 기분 나빠하는데 형수님은 어떻겠어.”“백유미랑 나 사이를 은서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유미가 쓰러졌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곽승재는 갑자기 회를 내며 말했다.“걔가 평소에 몇 번씩이나 유미를 못살게 굴지만 않았어도 유미가 나한테 선물을 전해달라고는 하지 않았을 거야.”육현석은 여전히 곽승재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아직도 짚어주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렇게 화를 내는 곽승재를 보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대충 맞춰주며 말했다.“그러게 형, 형수님도 뭘 참 모르신다. 형이 유미 씨랑 만났으면 형수님이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걔가 뭘 알든 모르든 그걸 왜 네가 평가해.”곽승재는 육현석의 기획안을 내팽개치며 말했다.“가서 다시 해와!”육현석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어떻게 매번 곽승재가 기분이 나쁠 때만 골라서 기획안을 전달하는지, 저의 지지리도 없는 운에 눈물까지 나올 지경이었다.“형, 아니면 형이 나 좀 가르쳐줘. 나 이거 진짜 최선을 다한 거란 말이
기사회생한 명운이 이런 시기에 식품안전에 관한 검사는 몇 번이나 진행했을 테니 이번 일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꾸민 일임이 틀림없었다.도아름은 눈을 치켜뜨며 차갑게 말했다.“찾을 필요 없어, 서인수 짓이야.”“헤어질 때도 개쓰레기 짓을 하더니, 기술만 빼가면 내가 명운을 못 이끌 줄 알고 그때 본인이 헐값에 사 가려고 했겠지.”“출품 전 제작, 마케팅 쪽은 다 우리 아버지 때부터 같이 일해오시던 믿음직한 분들이라 거기서 손을 못 쓰니까 허위사실을 퍼뜨린 거야.”“중독이라는 그 사람 상태는 어때요? 사람은 보내봤어요?”도아름은 사람을 보내봤으나 환자가 만나기를 거절하고 적반하장으로 2억의 배상금을 주지 않으면 일을 계속 키우겠다고 협박했다고 전했다.“배상은 절대 하면 안 돼요, 얼마가 됐든 간에 배상하면 명운의 술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잖아요.”“나도 알지, 그래서 거절을 하긴 했는데 이 상태로 계속 시비하다가 재판까지 가게 되면 명운 이미지도 안 좋아지잖아.”서인수도 이런 사실들을 뻔히 다 알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음모를 꾸밀 수 있었던 것이다.도아름이 이 알코올중독이라 우기는 환자를 잘 설득해서 해결한다 쳐도 서인수는 다른 알코올 중독자들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그래서 도아름은 이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민 대표는 좋은 방법 있어?”고은서는 말없이 듣기만 하던 민시후를 향해 물었다.“명운에 투자하기로 한 사람으로서 이미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는데, 뭐 좋은 방법 없어?”고은서의 질문에 민시후는 전형적인 자본가의 대답을 내놓았다.“은서 씨, 당신 말대로 우린 그냥 투자할 의향이 있다고만 했지, 투자한다고는 안 했어. 명운이 이 정도 일도 해결 못 하면 내가 어떻게 투자를 하지?”민시후의 말은 직설적이었지만 투자자로서 할법한 말이었다.그래서 자리에 있던 명운 관계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도아름이 나서서 말했다.“걱정 마세요, 민 대표님. 저희가 책임지고 이번 일 해결해서 거래에는 절대
옆에서 손을 거들던 장정들도 그 모습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백유미를 희롱하는 행렬에 끼어들었다.이내 백유미의 입에 물려있던 수건이 떨어졌지만 그녀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다른 것으로 입이 가득 차 버렸다.남자들의 음탕한 신음과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순식간에 창고를 채웠다.모든 일든 불과 일이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고은서는 구석에 숨어서 원지훈이 차버린 쇠막대기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떨리는 심장은 평온을 되찾을 수 없었다.몇 명의 남자들이 각 방향에서 백유미를 희롱하고 있었다.고은서는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내가 원지훈을 회유하지 않았더라면 저기에 누워있는 건 나였겠지.’백유미는 동정받을 처지가 아니었다.고은서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비록 돈으로 매수했다고는 하나 약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그녀에게 돌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또한 밖에 백유미가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뭔가 이상함이라도 눈치채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고은서는 자신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고은서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백유미의 핸드폰을 켜려고 했지만 땅에 부딪히며 떨어질 때 전원이 나가버렸다.그녀는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겨우 핸드폰을 켤 수 있었지만 비밀번호에 막혀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백유미의 생일, 곽승재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비밀번호는 맞지 않았다.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남자들이었기에 고은서는 소리를 내어 그들의 시선을 끌 수조차 없었고 백유미에게 비밀번호를 물을 수조차 없었다.고은서는 긴급버튼을 눌렀지만 백유미는 긴급 연락망을 따로 작성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의 비상 번호는 해외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어떡하지?’고은서가 원지훈을 불러 도박하려고 할 때 백유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핸드폰에는 알파벳 C만 떠 있을 뿐이었다.잠시 생각한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핸드폰을 움켜쥐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
“끈은 혼자서 칼로 푼 것 같아요. 제가 얼른 다시 묶을게요! 이번에는 절대 풀 수 없을 거예요.”말을 마친 원지훈이 밧줄을 챙겨 고은서에게 다가가려 했다.“됐어!”백유미가 원지훈을 제지했다.“누나, 왜 그래요?”백유미는 쇠막대기를 거두며 얼굴에 음험한 미소를 떠올렸다.“챙겨온 술은 다 마셨어?”원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고마워요. 누나.”“뭔가 치밀어 오르는 충동이거나 특별한 감각은 없고?”백유미가 물었다.그 말을 들은 원지훈은 바로 백유미가 술에 최음제를 탔음을 눈치챘고 달아오르는 몸을 느꼈다.“안 그래도 조금 덥네요.”“그렇다면 뭘 기다리고 있어? 저기 해소할 만한 사람 하나 있잖아?”원지훈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누나, 후에 데려온 두 사람 먼저 들여보낼까요? 하지만 두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은 것 같던데요.”“그 사람들은 놔두고 먼저 온 사람들만 들여보내.”백유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30분 줄게. 죽이지만 않으면 되니까 원하는 대로 해.”원지훈은 고은서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렀다.백유미는 원망과 경멸 섞인 시선으로 칼을 손에 쥔 채 구석에서 떨고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밖에 있는 남자들은 네가 유흥가로 가기 전에 적응하는 단계라고 생각해.”고은서가 경악하며 물었다.“백유미,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아니면?”백유미의 얼굴에 서린 경멸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고은서, 어차피 곽승재랑도 많이 잤잖아. 유산까지 해본 사람이면 닳을 대로 닳은 여자잖아. 여기까지 와서 왜 성녀라도 되는 것처럼 하고 있어? 있는 대로 즐겨.”그때 밖에서 남자들이 걸어들어왔다.그들의 벨트는 이미 풀려있었고 흉한 뱃살과 속옷도 내놓고 있었다.원지훈은 밖에 있던 두 사람과 말을 나눈 후 이내 창고 문을 닫았다.“그래, 이참에 너도 잘 즐겨야지.”고은서는 작은 틈을 이용해 침대 위에 있던 낡은 수건을 재빨리 백유미의 입에 쑤셔넣었다.
백유미가 입을 열었다.“고은서, 여기서는 사람을 가축처럼 팔아버릴 수도 있다는 걸 몰랐어?”백유미는 마치 애완동물을 파는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말했다.“운이 좋으면 유흥가로 팔려 가겠지. 네 몸매와 얼굴로 부잣집 딸이라는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손님을 받기는 쉬울 거야. 운이 나쁘면 손발이 잘리고 신장이나 간이 적출되어 거지가 되거나 장난감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지. 결과는 네 운명에 달렸어.”백유미의 부드러운 말투는 고은서에게 오히려 독을 품은 뱀이 주는 온기로 느껴졌다.그녀는 가식적인 백유미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며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미쳤어? 내가 무슨 일을 당하면 너라고 무사할 줄 알아?”백유미는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쇠막대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한 단씩 늘려 고정한 뒤 고은서의 가느다란 목에 겨눴다.“고은서, 곽승재를 언급했지? 그 사람이 널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차가운 쇠막대가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몸을 움찔했다.백유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곽승재가 소식을 들을 때쯤이면 넌 이미 팔려 가고 난 후일 거야. 설령 널 찾더라도 너는 이미 망가진 상태일 텐데 그 남자가 여전히 널 원하겠어?”고은서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곽승재가 날 원하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이런 짓을 한 걸 알게 되면 분명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내가 뭘 했는데?”백유미는 마치 작은 강아지를 놀리듯 쇠막대로 고은서의 목을 쿡 찌르며 물었다.“나는 T 국에 사업차 온 거야.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어. 네가 무슨 일을 당했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고은서는 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쇠막대기를 뿌리치고 백유미를 제압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백유미가 새로 데려온 두 사람이 바로 문밖에 있었고 그들은 무기도 소지한 듯해 보였다.혹시라도 백유미를 단번에 제압하지 못한다면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다행히 백유미는 아직 고은서가 반격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뜨리지는 않았다.고은서는 고통
원지훈도 백유미를 증오하고 있었기에 고은서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동의했다.“알았어. 그때는 내가 제일 먼저 나설게.”‘역시 원지훈은 믿지 못할 놈이야. 백유미가 먼 친척 누나라는 자각은 있나? 이런 생각을 품는다는 게 놀랍네. 아니지. 지금은 이럴 생각할 시간이 없어.’고은서는 속에서 올라오는 혐오감을 참으며 말했다.“시간 없어. 얼른 내 가방에 들어있는 호신용 무기 가져와 줘.”백유미가 다른 사람을 더 데리고 올지, 앞으로 어떤 계획으로 움직일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래서 밖에 있는 몇몇 사람들을 매수했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원지훈도 곧 도착할 백유미를 두려워하며 고은서의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고 그녀에게 호신용 도구를 건넸다.밖으로 나가기 전 원지훈은 고은서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너도 알아서 살아남아. 상황이 안 좋으면 약속했던 건 나도 못 지켜.”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고은서도 단지 원지훈을 이용해 백유미의 시간을 더 끌어보려 했을 뿐이었다.그렇게 하면 민시후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해 사람을 데리고 그녀를 구하러 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니 말이다.돈으로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했던가, 돈의 힘으로 원지훈은 손쉽게 밖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매수했다.바로 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백유미가 도착했나 보네.’손에 묶인 밧줄은 느슨하게 풀어졌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손발이 묶인 척하며 침대 한구석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누나, 드디어 오셨네요! 고은서도 이제 깨어났어요. 방금 들어가서 살짝 경고 줬는데 정말 입에 독침이라도 품었는지 험한 말을 서슴지 않더라고요.”원지훈은 아첨하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누나 기분 상하게 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제가 대신 혼내줄게요!”“수고했어. 차에 먹을 것과 마실 것 준비해 놓았으니 가서 가져와. 조금 있다 너희 도움이 필요할 거야.”“고마워요, 누나.”곧 창고 문이 열리고 백유미가 하이힐을 신은 채
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핵심을 찔렀다는 것을 눈치챈 고은서는 계속 차분한 말로 설득했다.“같이 해외로 나왔으니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겠어? 우리 둘을 같이 제거하면 백유미는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여전히 평온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백유미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백씨 가문 산업이 있지만 너는 애꿎은 목숨 하나 날리는 거지.”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정말 백 보 물러나서 백유미가 너를 살려준다고 해도 너는 평생 숨어지내야 할 텐데 어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너도 그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겠어?”원지훈은 사색에 잠겼다.전에 내비치던 우월감과 경멸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로운 척하며 말했다.“백유미가 곧 도착할 거야. 그러니 얼른 결정을 내려야 해.”마침내 고개를 든 원지훈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백유미 말을 따르지 않고도 살아남을 길이 있다고? 내가 너를 이런 곳에 데려왔는데 네가 날 용서해 줄 리가 있겠어?”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네가 나를 배신한 건 정말 화가 나. 앞으로도 널 신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건 이해해. 그리고 나는 뻔뻔하게 널 괴롭힐 생각은 없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큰돈을 줄게. 그 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비록 영광스러운 귀향은 아니겠지만 풍족하고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지금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고은서는 이어 원지훈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고향은 너에게 익숙한 곳이고 백씨 가문과는 어쨌든 친척 관계잖아.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백유미도 굳이 너희를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마음은 기울기 시작했다.백유미의 잔혹함으로 보건대 고은서가 말한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이번에 백유미를 배신한다면 죽을 길밖에 없겠지만 배신하지 않아도 좋은 날을 없을 거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은
“백유미가 제가 누나한테 돈을 받고 누나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시켜서 저를 한바탕 때렸어요. 갈비뼈 두 대가 부러져서 지금도 기침하면 아파요. 그리고 엄마도 매일 개장 안에 갇혀 몇 시간 동안 무릎 꿇는 자세를 강요받고 있어요. 시간을 못 채우면 풀어주지도 않는데 제가 백유미 말을 안 들을 수 있겠어요?”고은서는 많이 놀랐다.‘역시 백유미는 원지훈이 나한테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하지만 고은서는 백유미가 원지훈 모자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한 수를 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원지훈에게 반박할 힘이 없다는 사실도, 그녀에게 이 사실을 전혀 티 내지 않은 것도 충격적이었다.“전에 고은혜에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 것도 백유미가 시킨 거야?”고은서가 묻자 원지훈은 음흉하게 웃으며 자신의 의도를 솔직히 얘기했다.“그건 제 생각이었죠. 지난번 대원에서 발생해야 했던 일을 현실화시킨다면 백유미가 저를 그냥 놔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정말 짐승만도 못한 놈이야.’지금 이 일로 화를 낼 겨를도 없었던 고은서가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이렇게 큰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왜 나한테 말해서 함께 해결할 방법을 찾지 않았어?”“절 위해 해결책을 찾는다고요? 누나가 원하는 건 제가 더 망가지는 거 아니에요?”원지훈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제가 모를 것 같아요? 누나는 속으로 저를 무시하며 저를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잖아요.”원지훈이 말하는 무시는 고은혜와 관련된 일을 지적하는 것이 분명했다.고은서가 답했다.“네가 은혜랑 잘되길 원하지 않았던 건 맞아. 우리 사이도 결국 이익 관계니까. 하지만 이익으로 묶여 있기에 넌 더 나를 믿어야 했어!”원지훈이 갑자기 폭발하며 소리쳤다.“믿지 않아! 그 누구도 믿지 않아! 너희 중 누구도 좋은 사람은 없어! 고은서! 내가 들어 온 것도 너에게 백유미가 곧 도착할 거라고 알려주기 위해서야. 오늘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 그리고 누구도 널 구해줄 거란 기대는 하지
“괜한 힘 빼지 마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원지훈이 냉소적으로 말했다.“아까 물 줬는데 안 마신 건 누나 탓이죠.”온몸에 힘이 빠진 고은서는 머리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가 보면 알겠죠.”원지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자신이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차 뒷좌석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채 마지막 힘을 다해 가방 속 핸드폰을 더듬어 찾았다.그리고 그녀는 힘껏 옆면에 있는 긴급 전화 버튼을 눌렀다.이는 경호원들과 미리 문제가 생기면 즉시 연락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고은서는 어지럽고 무기력한 상태에서도 원지훈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그녀는 혀를 꽉 깨물며 간신히 의식을 유지했다.희미해진 시야로 화면을 바라보며 SOS 번호를 누르려 했으나 제대로 눌렀는지 통화가 연결됐는지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차는 계속 질주했고 고은서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혀를 깨물 힘마저 사라진 그녀는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고은서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허름한 창고의 방 안에 누워 있었다.주위는 매우 더러웠고 악취마저 풍겼다.고은서는 손과 발이 꽁꽁 묶인 채로 나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밖에서는 몇몇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현지어를 사용하는 것 같았는데 간혹 한국어가 섞여 있기도 했다.‘원지훈 혼자서 T 국 사람들과 이런 일을 꾸밀 수는 없어. 백유미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게 분명해. 온갖 방법으로 해외로 데려온 이유는 국내에서는 쉽게 구해질 것 같아서인가? 의식을 잃은 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경호원들은 위험을 눈치챘나? 민시후도 T 국에 온다고 했는데 호텔에 도착하지 않은 걸 알게 되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채겠지?’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얼마간 안심이 되었다.몸을 움직여보니 체력이 조금 돌아왔음을 느꼈지만 손발이 꽉 묶여 있던 터라 뼛속까지 욱신거리며 통증이 심했다.겨우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려던 순간 침대 옆의 낡은 서랍장을 건드렸다
원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에요. 비즈니스석이 처음이라서 조금 어색하네요.”비행기에서 내리니 시차 때문에 T 국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고은서가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민시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원지훈에게 먼저 가서 차를 잡으라고 한 뒤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고은서, 어디 갔어? 송민아 말로는 이틀 동안 회사에 안 나온다던데?”고은서는 T 국에서 볼일이 있다고 솔직히 알렸다.“백씨 가문과 관련된 그 프로젝트?”민시후는 바로 눈치챘다.고은서는 부정하지 않았다.“담당자랑 만나서 얘기 나누기로 했어.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갈게.”“호텔 위치 보내. 조금 있다 갈게.”“네가 와서 뭐 하게?”“다른 나라에서 너랑 나 둘뿐인데 내가 뭘 하고 싶을 것 같아?”“그럼 주소는 안 보낼래.”“고은서, 지금 누구를 경계하는 거야? T 국에서 가서 특색 요리 좀 먹으려고 그런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십중팔구 그녀가 혼자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해서 오는 것임을 알았다.게다가 그가 오기로 결심했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민시후의 끈질긴 전화 공세를 막기 위해 고은서는 결국 호텔 이름을 그에게 보냈다.[방 하나 더 예약해 줄게.][고은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속으로는 나랑 같은 방 쓰고 싶었던 거야?][자꾸 그러면 차단할 거야.][알았어. 알았어. 내가 졌어.]“은서 누나. 우리 차례예요. 가시죠.”원지훈이 앞쪽의 택시를 가리키며 말했다.경호원들이 고은서에게 비행기에서 내려 몰래 뒤따라오고 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고은서는 문자를 확인한 후 핸드폰을 넣고 원지훈과 함께 택시에 탔다.운전기사는 현지인인 듯했다. 그는 서툰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했다.고은서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원지훈은 비행기에서의 긴장이 사라진 듯 몇 가지 지역 특산품에 관해 물어봤다.“누나, 목마르지 않아요? 물 좀 마실래요?”원지훈은 말하며 개봉하지 않은 생수병을 건넸지만 고은서는 받지 않았다.“괜찮아.”원지훈은
고준석이 입을 열었다.“우리 집에 와서 잠깐 바둑을 둘 때 네가 할머니 보러 가서 브로치를 놓고 왔다면서 마침 전해주더라구나.”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곽승재 정말 대단하네. 오전에 할머니 댁에 보낸 브로치를 오후에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져오다니. 조금 전 골동품 가게에서 마주쳤을 때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으면서...’“은서야, 왜 말이 없어? 또 할아버지가 승재랑 만났다고 화내는 거야?”고준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에도 말했지만 너희가 이혼했다 뿐이지 원수가 된 건 아니잖니. 날 보러 왔다는데 그냥 내쫓을 수는 없잖아.”고준석이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고은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애교 몇 마디로 웃어넘기고는 전화를 끊었다.잠시 고민한 고은서는 굳이 곽승재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브로치를 가져갈 생각이 없다면 다시 경매에 올려서 돈으로 송금해 주면 되지 뭐.’...다음 날, 고은서는 원지훈의 연락을 받았다.원지훈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상대방이 최후통첩했어요. 이틀 안에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네요.”상대방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려면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어제 민시후는 원지훈에게서 특별히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백유미는 최근 판주 투자은행에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고 있어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고은서는 원지훈과 함께 T 국에 있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은서 누나, 조금 전에 알아봤는데 점심 항공편이 있대요. 그걸로 가면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원지훈이 말했다.“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건 어려울 것 같네. 신분증 보내주면 다 처리하고 나서 항공편 알려줄게.”‘원지훈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혹시 클라이언트랑 음모라도 꾸며서 나한테 사기 치는 거라면 미리 충분한 대비를 해야 해. 출장 일정도 완전히 맡길 수는 없어. 안 그래도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비행기 티켓까지 나한테 맡기지 않는 건 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