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회사의 계약이 하나 성사 안 된 게 있어서 오빠한테 도와달라고 온 거래.”박지연은 고은서가 말한 이유도 그럴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곽승재와 관련된 것 같았다.“아무튼 이혼 못 했으니까 내 말이 맞는 거야!”“상상력이 그렇게 풍부하면 간호사 말고 소설가를 하지 그래?”“그것도 괜찮은 것 같아. 이라는 소설 쓸까 하는데 어때?”“그런 노골적인 글 쓸 거면 그냥 계속 간호사 해.”박지연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내까지 들어와 있었다.어둠이 깃든 시내를 보던 고은서는 주인혁에게 오늘 헬스장을 가겠다고 약속한 일이 떠올랐다.그래서 고은서는 기사더러 헬스장 근처의 식당에 차를 세우게 하고 간단히 배를 채우고는 바로 헬스장으로 갔다.헬스장 대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바로 전에 운동을 도와줬던 피티쌤을 끌어다 그녀에게 사과했다.이미 다 지난 일이라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던 고은서가 그들을 보며 손사래를 쳤다.“괜찮아요. 앞으로 주인혁 씨 난처하게 만들지만 않으면 돼요.”“주인혁 씨는 당분간 우리 헬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게 됐어요. 사모님이 원하시면 담당 직원을 바꾸던지 환불을 하던지 전부 가능합니다.”“왜 아르바이트를 못하는데요?”어제 밥을 같이 먹을 때도 못 들은 말이었기에 고은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곽승재가 그 정도로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닐 텐데.“본인이 오늘 저한테 직접 한 말입니다. 오디션에 나가야 한다고 하더군요.”대표의 말을 듣고 보니 미래에 있을 오디션이 떠올랐다.고은서는 그 오디션에서 주인혁이 많은 주목을 받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오디션이 정확히 언제 시작하는지는 몰랐었다.“은서 씨.”저 앞에서 주인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은서는 바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오늘은 일찍 왔네요.”주인혁은 고은서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시작했다.“운동 끝나면 같이 나가서 뭐라도 마실래요? 저 할 말 있어요.”그에 고은서는 웃으며 대답했다.“대표
고은서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주인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귀 끝까지 빨개진 주인혁은 다급하게 부인했다.“저기요! 그런 게 아니라 여자가 호신술 많이 배워두면 좋으니까 하는 말이거든요. 위험할 때 본인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죠.”주인혁의 반응을 본 고은서는 예상대로라는 듯 웃고는 말했다.“장난인데 뭘 그렇게 긴장해요.”주인혁은 여전히 빨개진 귓볼을 하고 물었다.“제가 혹시 은서 씨 귀찮게 했어요?”“귀찮게 한 건 아니고요.”고은서는 이참에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그냥 내가 저번에 도와준 일로 나를 너무 좋게 볼까 봐요. 내 모든 게 다 좋아 보여서 생겨서는 안 될 생각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래요.”“그런 건 걱정 마세요. 저도 제 신분을 아는데 어떻게 감히 은서 씨 같은 사람을 넘봐요.”“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절대 아니에요.”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상황은 그냥 잠시뿐이에요. 곧 엄청난 성공을 이룰 거고 많은 사람들이 주인혁 씨한테 관심 가져주고 주인혁 씨를 좋아할 거에요.”“그리고 나를 넘본다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인혁 씨보다 나이도 많고 이미 결혼도 했잖아요. 인혁 씨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울려요.”고은서의 말에 긴장이 조금 풀린 주인혁은 고은서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그러니까 컨디션 조절 잘해서 하고 싶은 일만 잘해요, 힘내요!”그렇게 응원을 마친 고은서는 헬스장을 나와서 택시를 부르려고 하는데 마침 원지훈에게서 온 문자 두 개를 보게 되었다.[누나, 시간 좀 있어요? 은혜 씨 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누나 시간 괜찮나 해서요.][미안해요, 귀찮게 해서. 은혜 씨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7시에 첫 번째 문자를 보내고 한 시간 뒤에 온 두 번째 문자였다.고은서가 답장하지 않으니 귀찮은 거로 여긴 것 같았다.고은서는 조금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아까는 운동 중이어서 핸드폰 보관함에 넣어뒀었어. 물어볼
원지훈은 “낚시”하는 법을 잘 알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말 대신 사리에 맞는 말을 먼저 꺼냈다. “사촌누나, 저한테 보내주세요. 제가 다른 보통의 헬스장과 비교 해볼게요.” 그의 말에 고은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전화를 끊고 그녀는 복싱관의 이름을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와 조은혜 사이가 어느 정도로 진전이 있는지는 그와 많이 접촉해야봐야만 알 수 있다. ‘꼬투리 하나라도 잡는다면 더 좋을 텐데.’ [감사합니다. 사촌누나.] 원지훈이 고은서에게 감사의 말을 담은 문자를 보내왔다. [괜찮아. 너랑 은혜 사이가 아직 확실하지 않다면 사촌누나라고 부르지 말아줘. 그냥 은서 씨라고 해.] [네. 은서 씨 일찍 쉬세요.] ... 어느 한 병원 안, 백유미는 이마와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어두운 안색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유미야, 병실이 너무 좋은데? 곽씨 일가의 도련님께서 꽤나 잘해 주나봐?” 범가온은 그녀의 병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백유미는 그의 말을 못들은 척 무시하며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나를 찾아온 거예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말했었는데 잊었나요?” “네가 다쳤다기에 얼른 와서 너 괜찮은지 보려고 했지.” 범가온은 냉랭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유미 너는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다행히 그 등이 살짝 빗나가서 망정이지, 제대로 떨어져 네 머리에 부딪혔다면 큰 구멍 정도는 남았겠다.” 백유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왜 통화할 때 안 말하고 꼭 나한테 직접 온 거죠?” 범가온은 두 손을 비비적거리며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 말을 했다. “요즘 원지훈 그 놈이 조 씨 그 여자를 쫓아다니는 바람에 이것저것 다 사재기 하고 있어. 하루는 밥을 산다고 나가고 다른 하루는 같이 놀러간다고 나가고해서 돈을 거의 다 썼지 뭐야.” 백유미는 범가온에 손목에 있는 금팔찌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또 한 가지, 제발 신경 좀 많이 쓰라고 전해주세요. 보통의 방법이 안 통한다면 다른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서라도 꼭 성공하라고 하시구요. 전 제 돈이 물처럼 새어나가면서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하는건 싫어서요.” 범가온은 은행 카드를 손에 꼭 쥐고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걱정하지마, 지훈이가 힘을 낼 거야. 어제 원래 지훈이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등장해 그 여자를 구해줄 계획이었는데 조 씨 그 여자가 일이 생겼다고 미리 가버린거 있지? 다른 방법 좀 생각해봐서 꼭 성공하겠다고 말했으니까 기다려보자!” 백유미는 더 물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범가온에게 당부의 말들만 했다. “나중에 일이 생기면 제가 찾아 갈게요.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대로 저한테 오지 말아주세요.” 전에 고은서와 곽승재는 범가온이 백유미 앞에 몇 번이나 나타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은 친척 관계라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는 않겠지만 원지훈이 목적을 가지고 조은헤에게 다가가고 있기에 조심해야만 했다. 만약 들킨다면 뒤에서 몰래 도와준 백유미까지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범가온은 카드를 가방 안에 소중히 잘 넣어두고는 백유미에게 말했다. “유미야, 난 오늘 원래 네 상황이 어떤지 보고 가려고 했어. 혼자 입원한 것도 모자라 가족도 없이 병 치료를 해야 하는 네가 너무 안쓰러워서 말이야.” 백유미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며 범가온에게 말했다. “조금 잇다가 간호사에게 말하세요. 제가 쓰러졌다고. 그러면 알아서 처리 해줄 거예요.” 범가온은 순식간에 백유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알겠어. 곽 대표님이 나보다는 더 잘 챙겨줄 테니까! 내가 지금 당장 가서 간호사 불러 올게.” ... 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별장 안에 누구의 인기척도 없어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문을 여는 순간, 고은서는 방 안에 조금 변화가 생긴 사실을 알아차렸다. ‘승재 오빠의 물건이 많아졌네?’ 원래 고은서가 쓰는
“곽 선생님, 백유미 씨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빨리 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곽승재는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는 고은서를 슥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잠옷을 갈아입고는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곽승재와 가까운 거리에 서있던 고은서는 당연하게도 수화기 너머 간병인의 목소리를 들었고 곽승재가 지금 어디로 향할지도 알아차렸다. 할아버지는 늘 고은서에게 곽승재도 그녀에게 애정이 꽤 있는 것 같으니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잘 지내보라는 말을 했었다. ‘다른 여자가 쓰러졌다는 전화만 받고 달려 나가는 남자한테 내가 왜?’ 그 시각, 병원. 백유미는 넘어져서 퍼렇게 멍이든 자신의 팔을 어루만지며 곽승재에게 말했다. “승재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 침대에서 내려가서 조금이라도 걷고 싶었는데 머리가 휭 해나면서 어지러워지는거 있지? 살짝 넘어졌는데 간병인이 깜짝 놀라서는 너한테 전화 했나봐.”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여기 간병인 있잖아? 근데 왜 혼자 침대에서 내려오는 거야?” 백유미가 대답했다. “난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해서 퇴원하고 싶었어. 그래야 명운의 항목을 다시 가져올 것 같아서.” “그 일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고작 명운 하나 없다고 판주가 안 돌아가지는 않으니까.” 곽승재가 백유미의 말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백유미는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백승재의 말에 반박을 했다. “다른 사람이 투자했다면 상관도 안 하겠지만 민시후 씨가 너랑 겨뤄보겠다는 의도가 너무 선명하잖아. 그래서 난 그 사람이 널 이기게 하고 싶지 않아.” “들어보니까 오후에 부하 직원까지 불러서 회의까지 하려고 했다면서?” 백승재가 입을 열었다. “민 대표가 나랑 그러는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항목에 투자를 한다 해도 나를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 “회사일은 부하 직원에게 잘 부탁하고 넌 치료에
다음날 아침, 고은서는 어떤 것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눈이 저절로 떠질 때까지 잠을 잤다. 어제 주인혁과 함께 호신술을 열심히 연습한 탓에 집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샤워를 마친 후 바로 침대에 누워 쓰러지듯 잠에 들어버렸다. 상쾌한 컨디션으로 아침을 맞은 고은서는 기지개를 쫙 편 뒤, 핸드폰으로 새로 나온 뉴스를 확인하려고 했다. 핸드폰을 가지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고은서는 침대 맡의 서랍 위에 못 보던 와인 색상의 선물 상자가 놓아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선물 상자를 살짝 열어본 고은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반짝이고 예쁜 한 쌍의 귀걸이였다. 빛나는 보석들이 가득 박혀있는 귀걸이였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이라 하나도 과해보이지 않아 일상용으로 착용하기에 아주 좋아보였다. 이런 귀걸이를 지금까지 산 적이 없던 고은서는 자신의 침대 맡에 있었으니 당연히 누군가 선물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재오빠가 놓은 건가?’‘어젯밤에 돌아 왔었나?’너무도 깊은 잠에 빠져있던 고은서는 곽승재가 집으로 돌아온 줄도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곽승재는 일부로 그녀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선물 상자를 잘 배치해두었다. 아마 그는 어젯밤 나가서 백유미를 만나고 온 것에 미안한 감정을 느껴 고은서에게 작은 보상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전에 곽승재는 고은서가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날에 선물을 사달라고 졸랐어도 늘 시간이 없어서 혹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니 혼자 가서 고르라는 말로 거절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곽승재는 마치 늘 하던 일 인 냥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고은서는 귀걸이를 먼저 내려놓고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 돌아온 그녀는 그 귀걸이를 손에 들어 자신의 귀에 가져다대며 예쁜지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문득 손에 들려있는 귀걸이가 묘하게 눈에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하던 고은서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래!’전생에 고은서는 백유미가 이 귀걸이를 낀 채 인스타에 사진을 찍어 올렸
쓰레기통에 처참히 버려진 귀걸이를 본 곽승재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은서, 너 지금 이게 아침부터 뭐 하는 짓거리야?”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빠잖아!” 고은서는 냉랭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선물 사주고 싶지 않으면 아예 사주지 마. 내가 무슨 쓰레기통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지 않는 물건은 나도 필요 없다고!” “고은서 너는 꼭 이렇게 막무가내로 화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곽승재는 행여나 고은서가 귀걸이를 선물한 사람이 백유미라는 것을 알아차릴까 봐 마음이 급해졌다. “이게 어딜 봐서 다른 사람이 버린 물건인데? 이렇게 태그도 달려 있잖아. 새것이라고!” “태그 하나 걸려있으면 새 물건인 거야?” 고은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갔다. “오빠, 공평공정하게 대하고 싶은 거라면 내가 좋아하는게 무엇인지부터 잘 물어봤어야지. 전처럼 내 의견 따위를 무시하지 말고!” 고은서의 날카로운 지적의 말들을 들은 곽승재는 인내심이 바닥이 나버렸다. “그럼 내가 그냥 쓸데없는 일 하나 했다고 생각해! 누가 네 의견 따위에 관심을 해주는데?” 곽승재는 화가 나 씩씩대다가 바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고은서 또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귀걸이가 있던 선물 상자마저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졌다. ‘곽승재 진짜 나쁜 놈이야!’ ‘원래 백유미한테 줬어야 할 물건을 나한테 주다니, 내가 그렇게 하찮은 사람 같아 보이나? 자기가 준 거면 내가 다 기뻐할 줄 아는 거야? 그게 똥이라도 나는 향기롭다고 말할 것 같았나 보네?’ 생각하면 할수록 미친 듯이 화가 나는 고은서는 홧김에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툭 차버렸다. 그러는 바람에 귀걸이는 쓰레기통 안에서 굴러 나왔고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은 고은서의 눈에 무척이나 거슬렸다. 고은서는 화를 못 이겨 귀걸이를 몇 번이고 밟아 망가뜨린 다음 변기에 내려 보내려고 생각했지만 정교한 모양과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곽승재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육현석이 제 말이 지나쳤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몸을 움츠리며 웃었다.“아니, 형 마음은 좋은데 그냥 방법이 잘못됐다는 거지.”“입장 바꿔 생각해봐, 형수님이 밤에 다른 남자 병문안 갔다가 다른 사람 주려던 거 선물이라면서 형한테 주면 형은 기분 좋겠어?”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듯 말했다.“전에도 나한테 선물 달라고 한 적 있어. 그래서 이번에 가져다주면 나 좀 그만 귀찮게 할까 해서 그랬던 거지.”“그래도 이렇게 대충 넘기는 건 아니지. 형수님이 다른 남자가 사준 물건을 형한테 선물이라고 주면 형은 화 안 나?”“말 할 줄 모르면 그냥 입을 다물어.”육현석의 말에 곽승재는 짜증 난다는 듯 대꾸했다.“걔가 어디서 남자를 만난다고 다른 남자가 있어!”조심한다는 게 그만 또 말을 직설적으로 해버린 육현석은 제 입을 손으로 때리며 말했다.“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봐, 형은 비유하는 것만 들어도 이렇게 기분 나빠하는데 형수님은 어떻겠어.”“백유미랑 나 사이를 은서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유미가 쓰러졌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곽승재는 갑자기 회를 내며 말했다.“걔가 평소에 몇 번씩이나 유미를 못살게 굴지만 않았어도 유미가 나한테 선물을 전해달라고는 하지 않았을 거야.”육현석은 여전히 곽승재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아직도 짚어주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렇게 화를 내는 곽승재를 보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대충 맞춰주며 말했다.“그러게 형, 형수님도 뭘 참 모르신다. 형이 유미 씨랑 만났으면 형수님이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걔가 뭘 알든 모르든 그걸 왜 네가 평가해.”곽승재는 육현석의 기획안을 내팽개치며 말했다.“가서 다시 해와!”육현석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어떻게 매번 곽승재가 기분이 나쁠 때만 골라서 기획안을 전달하는지, 저의 지지리도 없는 운에 눈물까지 나올 지경이었다.“형, 아니면 형이 나 좀 가르쳐줘. 나 이거 진짜 최선을 다한 거란 말이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