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들어서자 송연희는 곧장 문경천이 다리 위에 덮고 있던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그녀는 손가락을 구부려 문경천의 다리를 톡톡 두드리며 눈을 들어 물었다.“느낌이 있으십니까?”문경천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고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송연희는 안색 변화 없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다시 문경천의 다리를 한 치 한 치 눌러보았다.“대감, 만약 어느 부위를 눌렀을 때 느낌이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시지요.”하지만 문경천의 두 다리를 모두 눌러보았지만 문경천은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보아하니 문경천의 다리는 정말로 조금의 감각도 없는 듯했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바로 약상자를 열었다.그 약상자는 자그마한 자단목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네 단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각 층마다 은침과 각종 진귀한 약재들, 지혈용 사포 그리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매미 날개처럼 얇고 날카로운 칼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송연희는 그중 은침을 꺼내 문경천의 다리 경맥에 찔러넣었다.그러자 그녀의 정교한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대감의 뼈를 이어준 자는 지금 어디에 있사옵니까?”낮에는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문경천의 다리 부상에 다른 이상한 점이 있었다.문경천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죽었소, 지난달 가을 사냥 때 잘못하여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 시신조차 온전치 못하게 죽었지.”송연희가 담담하게 말했다.“네, 죽어 마땅하옵니다.”문경천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방 안은 고요함만이 감돌았다.송연희는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한 듯 마음속으로 정리했다.문경천 역시, 그 자가 치료 중에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송연희는 조용히 문경천의 양다리를 검사한 후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대감의 다리 부상은 시일이 꽤 지났기에 저도 전부 회복시킬 자신이 있다고 단언하긴 어렵습니다.”문경천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나의 다리는 이미 오랫동안 망가졌소. 고칠 수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고치지
송연희는 어린 여자아이의 그 모습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이 규율이 삼엄한 저택 안에서 저 아이는 도대체 어디서 저런 흉내를 배운 것이란 말인가.그런 생각을 채 굳히기도 전에 연분홍처럼 곱게 단장한 어린 아이가 총총히 밖으로 달아났고 정신을 차린 그녀는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이 꼬마 아가씨가 경천군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세간에 떠도는 소문 속, 경천군의 외실 소생 아이들 중 한 명일 것이다.듣자 하니, 그들의 생모는 경천군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며 경천군이 전장에 있을 적에도 줄곧 그의 곁을 지켰다 한다. 허나 요절의 운명을 타고난 여인이었는지 막내딸을 낳고는 세상을 떠났다 하였다.몇몇 아이들은 모두 경천군 혼자서 아비 노릇 어미 노릇 하며 힘들게 키웠고 이 막내딸은 더욱이 저택 전체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로 몹시 귀하게 자랐다.아이는 울음소리도 크고 달리는 것도 빨랐다.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치며 눈 깜짝할 사이에 긴 복도를 돌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송연희가 황급히 뒤쫓아갔고 막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자취가 사라졌고 달빛 아래 연못 위로 겹겹의 잔물결만 일었다.‘큰일이다! 아이가 빠졌구나!’송연희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단호하게 뛰어내렸다.차가운 연못물은 사방에서 몰려와 마치 심연의 괴수처럼 그녀를 삼키려 들었다.그녀는 한숨 깊이 들이쉰 뒤, 작디작은 그 몸짓을 찾아 물속으로 파고들었다.멀지 않은 기둥 뒤에선 머리에 두 개의 둥근 떡 모양을 얹은 또 다른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아이는 물가를 손가락질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빠, 빠졌어! 나쁜 아줌마가 빠졌어!”그제야 두려움을 깨달은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저택 안으로 달려갔다.그리고 달리며 외쳤다. “아버지, 아버지! 사람 살려요!”굴레 의자에 앉아 있던 문경천은 막 겉옷을 걸쳤는데 이 말을 듣고 즉시 안색이 변하며 두 손으로 빠르게 바퀴를 밀어 밖으로 나갔다.
송연희가 옷을 갈아입고 저택을 나설 때 하늘은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마차는 덜컹이며 나아가고, 그녀는 부드러운 비단 이불을 켜켜이 덮은 작은 평상에 반쯤 기대듯 누워있었다.겉으로는 단잠을 취하는 듯 보였지만, 마음은 문경천의 다리 병환으로 인해 내내 무거웠다.약탕 뒤엔 본디 찬바람을 맞아선 아니 될 몸인데 그녀를 구하려 달려온 탓에 은침이 제자리를 벗어났고 비록 그녀가 서둘러 응급조치를 하였으나 며칠은 고생을 면치 못할 터였다.그때, 귓가로 가벼운 한숨이 들려오자 그녀는 눈을 떴다.“아씨, 혹시 제가 시끄럽게 한 건 아니지요?”초희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송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창가에 비친 찬란한 금빛에 시선을 두었다.초희 또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감탄을 터뜨렸다.“경천군께서 참으로 손이 크십니다. 저리도 귀한 비단을 창살 장막으로 쓰시다니요.”이 천하에 아씨 외조부보다 더한 부자가 또 있겠냐만, 그조차도 세상천지를 뒤져 얻은 조각만 한 비단으로 속갑 하나 지어, 아씨의 계례 예물로 내렸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저 창가에 드리운 천은 실로 가치를 따질 수조차 없는 보물이었다.검에 찔려도 뚫리지 않는 내피였다. 그런 물건을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인지.경천군은 참으로 아씨에게 통이 컸다. 만약 아씨가 처음에 경천군과 혼인했더라면...이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초희는 황급히 고개를 젓고 속으로 연신 퉤퉤 침을 뱉었다.경천군이 비록 품행이 뛰어난 좋은 사람이나 몸에 장애가 있고 마음속에는 잊지 못하는 정인이 있으니 실로 좋은 배필은 아니었다.아씨처럼 좋은 분은 설령 재혼하더라도 마땅히 온 마음과 눈에 아씨만을 담는 좋은 낭군을 찾아야 한다.이처럼 낭군의 총애도 받지 못하고 의붓자식까지 돌봐야 하는 집안은 설령 왕족이라 할지라도 안 된다.이때 평온하게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고 마부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감히 누구가 우리 주인님의 마차를 가로막느냐.”선두에 선 자가 손을 들었다.“하나도 남기지 마라.”마차 발 틈
오래도록 아무 소식이 들리지 않자, 임씨 노부인은 점차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손에 쥔 찻잔을 번쩍 들어 바닥에 사정없이 내던졌다.문틀에 기대 졸고 있던 장 상여가 벌떡 놀라 깨어 외쳤다.“돌아왔사옵니까?”“개소리 말거라.”임씨 노부인은 어두운 얼굴로 벌떡 일어섰고 명했다.“주씨 댁을 불러라, 나를 따라 영서각으로 가자꾸나.”“이 계집이 과연 아홉 개의 목숨이라도 지녔는지 두고 보자!”앞뒤로 자그마치 두 무리의 사람을 보냈으니 설령 경천군의 사람이 호송한다 해도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어제 아들이 막 무덤으로 들어갔는데 그날 밤 바로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 사내와 놀아나다니, 이토록 음탕하고 천박한 것은 입을 틀어막고 끌어내려 때려죽여야 마땅했다.집안의 며느리가 이런 풍기 문란한 일을 저질렀으니 예물을 달라고 입을 열기는커녕 영천후 댁에 따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야 했다.임씨 노부인은 한창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다.제 분에 겨워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그녀는 막 문을 나서다 송연희를 마주 본 순간, 웃음을 거두고 굳어버렸다.“이 이른 아침부터 방에 머물지 않고 어딜 싸돌아다니느냐?”송연희는 몸을 비켜 초희가 들고 있는 쟁반을 노임씨 노부인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했다. “어머님께서 밤새 통잠 못 이루시고 근심이 깊으시다 하여 아침부터 제가 부엌에서 몸에 좋은 미음 한 그릇을 정성껏 끓였습니다. 부디 기력을 보존하시고 건강을 잃지 마시옵소서”임씨 노부인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미심쩍은 듯 물었다.“그 미음이 네가 끓였다는 것이냐?”송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히 말했다.“어머님께서 요 며칠 서방님의 일로 상심하시어 음식도 제대로 드시지 못하여 수척해 지셨사옵니다. 아무쪼록 기력 회복을 먼저 하셔야지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초희가 사려 깊게 쟁반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미음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담긴 사발은 겉보기엔 참으로 수수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임씨 노부인은 어이가
임씨 노부인은 정말 병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깊고 심하게.송연희는 문안을 핑계로 맥을 짚었다. 한순간의 분노가 가슴에 응어리로 맺혀 기운이 온몸에 막히고 겨우 약탕 하나에 의지하여 숨을 붙이고 있는 형국이었다.하물며 장 상여가 매질로 중상을 입고 자리에 눕고 말았으며 남은 시중들은 몸을 사리기에 바빠 봉양이라 할 것도 없는 지경이었다. 의사 몇을 번갈아 불러 보았으나 차도는커녕 병세만 깊어질 뿐이었다.초운의 말에 따르면 이러했다.“노비도 사람입니다. 수년을 곁에서 모신 장 상여를 가차 없이 내치시니 복수당 사람들 모두가 다음은 자기 차례가 아닐까 두려워 몸을 움츠리고 있다지요.”복수당이 뒤죽박죽이 된 것은 물론, 임정현의 난헌원 또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하인들은 날마다 꾸중과 매질에 시달려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송연희는 밤에는 경천군 댁에 가서 문경천의 병을 치료해야 했고 낮에는 부족한 잠을 보충해야 했다.겨우 틈을 내어 의서를 뒤적이며 오래된 처방을 찾았고 결국 병든 척 문을 굳게 닫고 사람을 받지 않았다.그리하여 열흘 내내 영희각의 문은 오직 새벽과 해 질 무렵, 장보러 나갈 때에만 잠깐씩 열렸다.주씨가 열흘간 집안 살림을 맡아 관리했는데 삼백 냥을 보태고도 원망을 들어야 했던 터라 끝내 참지 못하고 말았다.그녀는 병석에 반쯤 기대 앉은 송연희 곁에 걸상을 끌어와 앉았다. 바람만 스쳐도 날아갈 듯 창백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얼굴이 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송연희는 기운 없는 웃음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형님께서 집안일로 힘드실 텐데 이렇게 저를 보러 와 주시기까지 하시니, 저는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 헛기침이 두어 차례 터져 나왔고 핏기 없는 낯빛은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그 모양을 보고서야 주씨는 차마 다시 가사 일을 맡아달라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다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다 한 식구인데 뭘 그리 서먹하게 구세요, 몸이 좋지 않으니 제때 약 드시는 것 잊지
장군댁 문밖에서 문지기는 말에서 뛰어내리는 임정훈을 보며 감격하여 눈시울을 붉히더니 몸을 돌려 안뜰을 향해 소리쳤다.“어서, 어서 노부인께 아뢰오... 우리 댁 장군나리께서 돌아오셨소!”임정훈은 등을 꼿꼿이 폈는데 잘생긴 얼굴에는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동년배들이 아직 독서와 과거 시험에 바쁜 나이에 천재인 그는 이미 일군 통수의 자리에 앉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에 당연히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젊은 장군은 부드러운 눈빛을 지은 채 몸을 돌려 말 위에 앉은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부인, 말에서 내리오.”정시현은 두 뺨이 붉어지더니 수줍은 듯 그를 흘겨본 후 스스럼없이 그의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임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긴 팔을 휘둘러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말에서 내려주었다.“앗!”정시현은 놀라 소리치며 급히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껴안으며 떨어질까 두려워했다.두 사람의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눈빛 속의 깊은 애정은 마치 꿀이라도 떨어질 듯했는데 그 모습은 한 쌍의 선남선녀가 다름없었다.“대장군께서 저 여인을 부인이라 부르시는데 그럼 원래 마님은 어찌 되는 건가요?”때아닌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이름다운 분위기를 깨뜨렸다.얼굴을 잔뜩 굳힌 임정훈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이 좋은 날에 그 재수 없는 죽은 이를 뭐 하러 들먹인단 말인가.정시현의 안색 역시 좋지 않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정훈 오라버님, 우선 저를 내려주십시오. 이건... 이건 예에 어긋납니다.”그녀는 눈가가 살짝 붉어졌고 눈에는 이미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꿋꿋이 참아냈다.사랑하는 사람이 억울해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임정훈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주위로 갑자기 살기가 감돌았고 목소리마저 싸늘해졌다.“부인과 나는 천지신명께 절을 올린 부부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이오? 이의가 있는 자가 있다면 먼저 내 손에 들린 장검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주위에 몰렸던 사람들은 모
송연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고 임정훈은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그의 예상대로라면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이미 그와 함께 임씨 가문의 선산에 묻혀 있어야 했다.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송연희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가볍게 두어 번 기침했으나 하얗고 깨끗한 작은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장군께서 무사히 돌아오신 것은 기쁜 일입니다.”그녀의 고개를 숙여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시현을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밖에서 바람이 크게 붑니다. 어머님께서 아직 장군님을 기다리고 계시니 우선 이 아가씨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한 여자는 서 있고 다른 여자는 안겨 있으니 임정훈의 마음속에서 누가 더 중요한지는 뻔한 일이었다.정시현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눈치채고 임정훈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황 눈빛으로 송연희를 바라보는 그녀의 살구처럼 예쁜 두 눈에는 후회하는 눈빛이 스쳤는데 마치 사전에 알지 못했고 또 그녀와 일부러 남자를 빼앗은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송연희의 화려하고 단아한 외모와 달리 정시현은 영특한 모습을 보였다.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간단히 묶고 그곳에 서 있는 그녀는 시원스럽고 늠름한 자태를 드러냈다. 송연희는 물론, 경성의 명문가 아가씨와도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멋있고 깔끔해 보이는 그녀는 미간에 교만이 서려 있어 마치 이 세상 만물이 그녀 앞에서 빛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소탈한 성격에 과감한 행동까지 갖추어 대안국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만약 정시현이 정말로 언행이 일치한 여자라면 송연희도 그녀의 품격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시현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전생에 그녀는 한편으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외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어릴 때부터 각종 규율에 얽매인 명문가 아가씨를 은근히 무시했다.화양 장공주의 꽃구경 잔치에서 정시현은 방금 혼약을 맺은 아가씨를 대놓고 고리타분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정시현은 그때 이미 장군 부인이었고
파혼서라는 말에 송연희의 양쪽에 서 있던 초희와 초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 사람은 하마터면 화를 참지 못하고 임정훈에게 달려들 뻔했다.인간이 어찌 그런 파렴치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구경하던 사람들은 수군댔다.평범한 집안이라 할지라도 아내가 칠거지악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절대 쫓아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송연희는 혼례 당일 남편이 출정하여 무려 2년간 홀로 집안 살림을 돌봐야 했고 심지어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사품과 집안의 모든 재물을 내놓고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이토록 의롭고 현명하며 지고지순한 여인이 냉대를 받는 상황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주먹을 꽉 쥐었다.배은망덕하고 박정한 자는 보았어도 이토록 뻔뻔하고 후안무치한 자는 임정훈이 처음이었다.송연희 또한 임정훈의 파렴치함에 놀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녀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장군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군요. 장군님과 저는 혼례를 치르긴 했으나 진짜 부부라고 할 수는 없지요. 장군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셨다고 하니 저와 장군님은 갈라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갈라선 이후엔 서로의 일에 절대 간섭하지 않고 사는 게 맞지요.”“꿈도 꾸지 마십시오!”임정훈은 고민할 틈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는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진 송연희를 빤히 노려보았다. 마치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시현의 짐작대로 송연희는 2년이란 긴 시간 동안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내와 사통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만나자마자 서둘러 나와 갈라서려고 하는 거겠지.’저택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연희와 사통한 자가 고용한 자들일지도 몰랐다.‘감히 남몰래 다른 사내와 사통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로군!’송연희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뭐라고 말하려는데 문 앞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훈아, 절대 연희를 쫓아내면 안 된다!”“어머니,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임정훈은 안색이 좋지 않은
송연희는 약을 섞던 손을 잠시 멈추고 담담하게 말했다.“저와 임정훈이 갈라서는 것은 시간문제이오나 지금 당장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문경천이 이런 일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녀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애초에 이혼 후 그에게 의탁할 생각이었기에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문경천의 눈빛이 깊어졌다.“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이혼이든 무엇이든 내가 돕겠소.”송연희는 정중히 거절했다.“대감께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괜찮소.”문경천의 진지한 말투에 송연희는 그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대감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와 장군의 이혼 문제에는 당분간 관여하지 말아 주십시오. 때가 되면 제가 대감께 도움을 청하겠습니다.”그녀와 임정훈 사이에는 피맺힌 원한이 있었기에 과거의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청산해야 했다. 하씨와 임정현 모녀 또한 마찬가지였다.전생과 이번 생의 원한을 몇 배로 되갚아 주지 않고서는 이 분을 풀 수 없었다.그러니 지금 이혼하면 그들에게 너무 쉽게 벗어날 길을 주는 꼴이었다.문경천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그녀의 눈을 잠시 응시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웃으며 말했다.“알겠소.”착각인지는 몰라도 송연희는 그의 말에서 진한 아쉬움과 함께 어른이 아이에게 말하듯 다정함이 느껴졌다.신분의 차이만 아니라면 그녀는 정말로 경천군한테 한마디 일깨워 주고 싶었다.촌수를 따지자면 그는 그녀를 고모님이라 불러야 마땅했기 때문이다....정국공 댁.정시현은 문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돌아가세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한 시진 동안 밖에서 기다리던 임정훈은 드디어 마음속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는 뛸 듯이 기뻤다.그는 문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말했다.“시현아, 일단 문을 열고 나를 들여보내시오. 할 말이 있소.”“무슨 할 말이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정시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정훈 오라버님, 변방에 있을 때 저에게 무슨 약조를 했는지 잊으셨습니까?”임정훈은
송연희의 행동을 본 문경천은 그녀의 말에 느꼈던 당혹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녀는 의원이었고 그저 할 일을 할 뿐이었다.문경천은 경직된 동작으로 손난로를 집어 들어 책상 한쪽 구석에 놓고는 천천히 옷자락을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송연희가 흘끗 보며 물었다.“많이 아프십니까? 도와드릴까요?”“필요 없소.”문경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마의 핏줄이 분노로 솟아올랐다. 그는 옷을 벗는 속도를 높였다.‘이 여자는 자신을 정상적인 남자로 보지 않는 것인가?’이 정도 힘도 남아 있지 않다면, 설령 병이 나아도 그저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었다.그가 무엇인가 오해했음을 깨닫고 송연희가 설명했다.“오늘 밤 비가 많이 오니 대감의 몇몇 혈 자리를 빨리 막아야만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문경천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마디 했다.“알겠소.”서재의 촛불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끝없이 길게 늘어뜨렸다.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마치 원앙이 목을 교차하는 듯 다정해 보였다.저 멀리 복도에서 한 손으로는 여동생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난로를 안고 있던 소년의 얼굴이 순간 새빨개졌다.여동생이 소리를 내기 전에 그는 재빨리 손난로를 던지고 그녀의 입을 막았다.“읍 읍!”총아가 눈을 깜빡이며 소리를 냈다.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를 데리고 돌아서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께 방해가 되면 안 돼.”총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문 너머로 비치는 그림자를 흘끗 보더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대감, 오늘 통증이 예전보다 더 심한 것이 확실하십니까?”송연희의 눈동자에 긴장감이 어렸다.그녀의 기대에 찬 작은 얼굴을 보며 문경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낮에 입궁할 때부터 몸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껴 일부러 진통제를 먹고 나섰다.그러나 평소 효험이 좋던 약이 오늘따라 빨리 약효가 사라진 것이었다.송연희는 설렘을 억누르고 몸을 굽혀 문경천의 다
“모든 상을 다 내주고 두 번째 정실부인을 얻었다고?”임 씨 노부인은 눈빛이 멍해졌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그녀는 원래 이번에 임정훈이 큰 공을 세웠으니 적어도 공신 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금은보화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임 씨 노부인은 심지어 두 달 후의 마흔 살 생신을 얼마나 화려하고 성대하게 열어 그동안 자신들과 교류하기 꺼리던 관리들의 가족들에게 이제 자신들이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줄 계획이었다.그런데 지금 갑자기 사람이 와서 그 모든 부귀영화가 물거품이 되었다고 말하다니.임 씨 노부인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결국 친절한 지 내관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경천군 댁.한일은 전서구를 날려 보내고 몸을 돌려 공손히 아뢰었다.“대감의 예상대로 궁에서 이미 암위를 보내 임씨 집안을 감시하고 있사옵니다.”서안 뒤에서 붓글씨를 쓰던 문경천이 촛불 아래 비친 창백한 얼굴로 나지막이 대답했다.한일이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대감, 소인이 가서 장군댁 마님을 모셔 올까요?”“아니다.”문경천이 차갑게 거절했다.이 시각이면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을 터였다.그런데 지금 사람을 보내 그녀를 찾는다면 오히려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빌미를 임 씨 모자에게 주는 꼴이었다.어차피 며칠 아픈 것뿐이었다. 그는 이미 익숙해진 고통이었다.“하지만 대감의 다리가...”한일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말끝을 흐렸다.대감께서는 장군댁 마님을 돕기 위해 다리의 고통을 참으며 입궁했고 심지어 전하의 의심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엄씨 가문을 위해 변호까지 했다.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장군댁 마님도 알아야 마땅했다.문경천은 한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빛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한일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번개가 치며 주변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문경천의 본래
지 내관임을 보자 임정훈의 얼굴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임정훈이 물었다.“내관께서 이리 행차하신 것은 전하께서 제 안사람한테 하실 분부라도 있으신 것입니까?”사실 그도 속으로 궁에서 사람을 보낸 것은 송연희를 꾸짖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폐하의 말은 천금과 같으니 상을 내린 직후에 질책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하지만 그는 그래도 선덕제가 송연희에게 상을 더 내리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지 내관은 비교적 공손한 말투로 답했다.“소인은 옹주마마께 상을 전하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다만 장군께서는 며칠간 먼 길을 오가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을 테니 굳이 알리지 않았습니다.”까놓고 말해 그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임정훈은 비록 무관이었으나 아버지를 닮아 눈치가 빨랐기에 이것이 빈말임을 모를 리 없었다.그는 분노를 억누르고 한 가닥 희망을 품으며 물었다.“내관께서 가져오신 것이 궁중 어느 마마의 하사품인지요?”지 내관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직접적으로 물었다.“소인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사옵니다?”궁궐에는 각자 맡은 직분이 있어 중전마마라 할지라도 선덕제의 측근을 함부로 부릴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임정훈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그가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며 해명하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어머니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임 씨 노부인은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한 손으로는 예복의 두툼한 치맛자락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면서 소리치고 있었다.“귀하신 분께 죄송합니다. 저희 집 하녀가 어리석어 길을 잘못 안내했습니다.”그녀는 마음속 깊이 송연희를 멸시했기에 폐하께서 오늘 그녀에게 봉토를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전해지는 상이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작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적녀 주제에, 아비와 오라비의 사랑도 받지 못하면서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아들이 엄 씨 그 영감탱이의 연줄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송연희처럼 행실이 헤픈
복수당.임 씨 노부인은 아들을 보자마자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임정훈은 본래 심란했던 터라 그 모습을 보자 얼굴색이 더욱 좋지 않았다.“우는 것이 소용이 있다면 차라리 어머니께서 저를 따라 입궐하시어 전하 앞에서 실컷 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임 씨 노부인은 말문이 막혔고 감히 반박하지도 못한 채 그저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훈아, 이제 그 천한 것이 죽지 않았으니 시현 옹주 쪽은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임정훈이 비웃으며 되물었다.“어머니께서는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임정훈의 말 속에 담긴 원망의 뜻을 알아차리고 임 씨 노부인은 억울함을 느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송연희의 소행을 자세히 그에게 이야기했다.“나쁜 년!”임정훈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쩍 하는 소리와 함께 최상급의 홍목 탁자가 가운데를 중심으로 둘로 쪼개졌다.임 씨 노부인은 급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걱정스레 말했다.“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손은 아프지 않고? 어서 이리 와서 어미에게 보여다오!”“괜찮습니다.”임정훈이 침울한 얼굴로 막 무슨 말을 꺼내려는데 문 쪽에서 하녀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허둥지둥 들어오는 것이 얼핏 보였다.“임씨 노부인, 장군나리, 궁에서 또 사람이 왔습니다!”임 씨 노부인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 화색이 돌며 서둘러 말했다.“분명 궁에서 내 아들에게 내리는 큰 상이 도착했을 것이다! 어서 내 임씨 노부인의 예복을 가져...”“그러실 필요 없습니다.”임정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어찌 필요 없다는 게냐? 이 녀석이... 조서를 받는 것은 하늘같이 큰일인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말하며 임 씨 노부인은 서둘러 하녀에게 명했다.“어서 향안을 준비하고 온 집안 사람들을 불러 모아 조서를 받들도록 하여라!”이렇게 가문을 빛내는 순간을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보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그래야 송연희 그 천한 것이 눈을 크게 뜨고 볼 것이고 경천군과 비교해도 그녀의 아들이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가능
그 말을 듣고 문경천의 눈에는 숨김없는 감탄이 서려 있었다.그가 칭찬하며 말했다.“남서의 지형과 정세는 너무 복잡하여 수년간 전쟁을 치른 장군들조차 언급하기를 꺼리옵니다.”“그렇다면 임 장군은 실로 보기 드문 장수라 할 수 있군요.”선덕제의 눈빛이 미묘해졌다.“경천아, 짐이 잘못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면 네가 짐 앞에서 조정의 무장을 칭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로구나.”“아바마마께서 잘못 기억하신 것이옵니다.”문경천이 담담히 대답했다.“그러냐?”선덕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웃으며 추억에 잠긴 듯 말했다.“엄기찬 그 늙은이가 왕년에 붉은 술 달린 창 하나로 천하를 누볐다고 할 수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뒤 세대에는 그의 기술을 이을 자가 아무도 없구나.”그가 바둑돌 하나를 놓자 문경천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엄씨 가문의 사내들은 그해 절반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 어르신의 장남과 차남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사옵니다.”“소자가 전에 듣기로 천하가 막 안정되었던 그해에 엄씨 노부인께서 목숨을 걸고어르신에게 독한 맹세를 하도록 강요하였는바, 삼대 안에 다시 군문에 나아가는 자가 있다면 엄씨는 대를 이을 수 없게 하겠다는 내용이옵니다.”그 맹세의 독함을 문경천은 말하는 지금조차 마음이 편치 않았다.만일 그 이야기를 며칠 전 송연희가 치료 중 직접 들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끝내 믿지 않았을 터였다.큰 공을 세우고 황제의 목숨을 몇 차례나 구한 충장이라 일컬어진 이조차 그런 방식으로 충심을 증명해야 했다니.선덕제의 안색 역시 좋지 않았다.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그런 일이 있었구나, 부인께서...”“아바마마께서 두실 차례십니다.”문경천이 바둑돌 하나를 놓으며 적시에 입을 열었다.선덕제는 정신을 차렸고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처음에 엄기찬이 문경천과 송연희의 항렬 차이를 이유로 혼인을 거절했을 때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짐이 살아있는 한, 장차 그 아이에게 좋은 부군을 찾
“원치 않는 것이냐?”선덕제는 그녀의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고 눈빛에 뜻을 담았다.송연희는 평온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폐하께 아뢰옵니다.”“저는 그저 저택에 묻혀 지내는 여인일 뿐이고 나라와 백성에게 이로운 일을 한 적이 없사오니, 폐하의 후한 하사는 실로 감히 받을 수 없사옵니다.”이 한마디 말을 듣고 나니 선덕제는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염려하여 감히 받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 명확히 깨달았다!누구를 염려하는지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선덕제의 얼굴에서 미소가 눈에 띄게 옅어졌는데 하필 이때 임정훈이 참지 못하고 또다시 강조했다.“폐하, 제 부인은 일개 여인에 불과하옵니다. 시야도 좁고 아는 바도 없어 폐하의 후한 은혜를 감당할 그릇이 못 되옵니다.”도성에 봉지를 가진 황족은 단 두 명뿐이었다.공주 중에서는 장신후에게 시집간 장공주만이 봉지를 누릴 뿐이었고 이미 출가한 나머지 공주들 중 가장 총애받는 이조차 식읍 만 호를 누리는 데 그쳤다.유주는 인구가 거의 삼만 호에 달하는데 송연희가 무슨 공덕으로 그런 큰 봉지를 감당한단 말인가.정시현이라는 보배 같은 여인이 눈앞에 있으니 임정훈은 속마음으로 어릴 때부터 규방에서 자란 자신의 부인을 깔보았고 말하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경멸감이 묻어났다.송연희 스스로의 입에서 나왔더라면 그저 겸손이라 둘러댈 여지도 있었겠지만 임정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황제의 뜻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엿밟은 것이나 다름없었다.도대체 그 따위가 무엇이길래 감히 황제의 결정을 거스르는가?선덕제는 드물게 얼굴을 굳히고 담담하게 말했다.“짐이 연희에게 자격이 있다 하면 자격이 있는 것이오.”송연희는 더는 머뭇거림 없이 공손히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이윽고 두 사람이 물러나려 하자 선덕제는 임정훈에게 한 마디 일깨워주었다.“임 장군, 좌우로 미인을 감싸는 복은 그리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부디 소중하게 여겨 짐의 좋은 뜻을 저버리지 말게.”사람들이 떠나고 선덕제는 일어나 편전으로
선덕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임 장군이 혼례를 치르던 날 바로 출정길에 올았고, 이 2년간 너도 장군댁에서 지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만약 네가 원치 않는다면 오늘은 짝을 갈라놓는 못된 임금이 되더라도 기꺼이 그리 하겠다.”이 말이 나오자 임정훈은 즉시 송연희를 돌아보았고 그의 눈빛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송연희는 그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았는데 그는 그녀가 선덕제의 비호를 등에 업고 자신을 압박하여 정시현을 포기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다. 더 나아가, 지금 이 자리에서 황제 앞에 나서 이혼을 청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막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그가, 두 해 동안 궂은일을 도맡으며 안팎으로 명망을 얻은 부인과 곧장 결별한다고 하면 조정의 신료들과 백성들이 어찌 그를 보겠는가? 그가 아끼는 명성과 평판은 한순간에 무너지리라.하지만 그녀 또한 선덕제가 임정훈과 정시현의 일을 성사시켜 줄 뜻이 있음을 알아차렸다.하물며 애당초 송연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혼을 청할 생각이 없었다. 설령 그러한 뜻이 있었더라도, 지금은 아니다.황제의 은혜는 쓸수록 줄어드는 법이기에 그녀가 분수를 모르고 행동할 수는 없었다.송연희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마치 무언가 사정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선덕제의 음성은 저도 모르게 차가워졌다. “연희야, 오늘 짐이 여기 있으니 다른 이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말고 네 생각대로 말해 보거라.”만약 이 말을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었다면 송연희는 필시 즉시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의 억울함을 속 시원히 털어놓아 시비를 가려 달라고 했을 터.하지만 이 말을 꺼낸 사람은 나라의 임금이었다. 제왕의 술수에 능한 분이므로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무조건 그녀를 지지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경고의 뜻도 내포하고 있었다.송연희가 무릎을 꿇고 황제를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맑았으나 힘이 있었다.“폐하, 시현 옹주께서는 신분이 존귀하시옵니다.”“저는 기꺼이 첩이 되어 두 분의
“오?”“무슨 일로 짐을 속였는지 말해 보시오.”넌지시 물음을 던지는 선덕제의 시선에는 그윽하고 깊은 빛이 담겨 있었다.송연희 역시 임정훈이 무슨 속임수를 쓰려는 것인지 약간 궁금했지만, 매우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그처럼 이기적인 자는 자신의 화려한 앞날을 걸고 황제 앞에서 정시현이 이미 자기 부인이라는 식의 망언을 할 리가 절대로 없다는 것이었다.임정훈은 과연 송연희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그는 정시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오직 이렇게만 말했다.“신은 장수로서 본디 군중 장병들과 변경의 안위를 우선해야 마땅하오나 잠시 판단이 흐려 적군의 본진까지 깊숙이 추격하고 말았사옵니다.”“비록 성공적으로 적장의 수급을 취하였으나 군의 장수들이 신이 이미 전사한 것으로 오인하여 잘못된 군보를 올리게 만들었으니 신은 죽어 마땅하옵니다!”선덕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주장으로서 공을 탐하여 경솔하게 나아가는 것은 병가의 큰 금기 사항이 아닐 수 없지.”단 한마디에 임정훈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가 예상한 반응과는 전혀 딴판이었던 것이다.송연희는 고개를 숙인 채 그 뒤에 서 있었으나, 속으론 실소를 금치 못했다.그와 함께 적진 깊숙이 들어가 그가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을 엄호하고 또 그를 호위하며 후퇴하다가 결국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삼백 명의 장병들에 대해서는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는구나!입으로는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과연 끼리끼리 만나는 법이라더니 그와 정시현 두 사람은 실로 천생연분이었다.임정훈이 두 다리를 벌벌 떨며 책임을 떠넘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선덕제는 갑자기 웃었다. “우리 조정에 경과 같은 젊고도 패기 있는 무장이 있음은 실로 대안국의 복일세. 짐이 상을 내려야 마땅한 일인데 어찌 벌을 논하겠는가?”“과찬이시옵니다, 이번 전란이 평정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군중 각처가 협력하여 일치단결한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