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는 물조리개로 베란다의 꽃에 물을 골고루 주었다.물주기를 마친 그녀는 소남이 고른 영화 제목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갑자기 왠 공포영화예요? 당신 SF나 전쟁영화 좋아하지 않아요?”사실, 그녀는 그에게 공포영화를 보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기가 민망했다. 자신이 공포영화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소남은 아무 말없이 웃으며 방안의 불을 전부 껐다. “오늘은 다른 장르도 한번 봐보려고. 무서울까 봐 그래? 내가 있는데 무서울 것 없어.”그는 원아에게 자신의 품에 안기라며 손짓했다.원아는 잠시
임씨 저택.정원 안은 흐릿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빽빽한 푸른 나무 아래, 흰색 철제 테이블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차 향기가 풍겨 났다. 옆 테이블 위에 놓인 꽃바구니에는 다과가 담겨 있었다.임문정은 아내가 우아한 모습으로 흰 등나무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이렇게 크고 고요한 공간 전체가 그들 둘만의 것이었다.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젊었을 때 모습이 생각났다. 마치 시간이 그때로 다시 돌아가 멈춘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이 매우 편안했다. 더는 정치계의 음모를 신경 쓰지 않아도
임영은은 이 공포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녀는 정말 자신이 임신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유명한 사립병원을 찾아 갔다.그녀는 속으로 임신 테스트기가 잘못된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혹시 임신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그녀는 급한 마음에 속도를 내어 차를 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커다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영은은 병원 내에 있는 VIP 서비스 담당 구역으로 곧장 달려가 소변검사를 하고 채혈 후 HCG 검사를 받았다.약 30분 후, 산부인과 교수가 진지한 얼굴로 검사 결과지를 들고 왔다.그녀는 영은을
임영은은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급히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를 몰고 떠났다.그녀는 아버지의 부름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서두르다 안전띠를 매고 나서야 검사 결과지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됐다.조금 전 복도에서 여자애와 부딪쳤을 때 잃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영은은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며, 다시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원에 사람이 많아 이미 누군가 발견하고 주워 갔을지도 몰랐다. 또, 만약 장정안이 주웠다면 이미 내용을 확인했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세상에 이름이 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기에 설사 그가 봤다고 하더라
임문정은 불쌍한 얼굴의 영은을 보며 기가 막혔다.“이제 와서 부인하고 싶은 거냐? 영은아, 네가 처음부터 솔직했다면 나도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너는 이렇게 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변명만 하고 있구나. 너는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니?”그는 적나라하게 밝혀진 사건 앞에 할말을 잃었다. 처음 이 자료들을 봤을 때는 믿기지 않아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얌전하던 딸이 이런 짓을 저질렀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영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빠, 제가 여쭤볼게요. 아빠는
임문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주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영은이 사인하고 손도장을 찍은 서류들을 서랍을 넣고 잠궜다.그가 이 모든 일을 마치자마자 주희진이 들어왔다.영은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임문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서재 안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주희진이 돌아왔으니 더는 임문정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일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안도했다.주희진은 영은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그녀는 깜짝 놀라 얼른 영은에게 다가가 일
T그룹 대표인 문소남은 붕괴사고로 인한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주는 것은 물론, 가족을 잃고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조사를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고 홀로 되신 노인에게는 노후를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이 같은 조건은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했고, 모두들 문소남을 두고 부처님이 환생한 것 아니냐며 고마워했다.이로써 T그룹의 경제위기는 완전히 해결되었고 회사 주식도 올라가기 시작했다.한편, T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 외면했던 회사들은 땅을 치며 후회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하지만 TS백화점
원민지는 결국 보수적인 치료방법을 선택했다. 그녀는 매일 씁쓸한 한약을 마셨고 다행히도 치료 효과가 좋아 몸이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그녀는 가슴을 제거하지 않아도 되어 기분이 좋아 원 노인을 뵈러 원아의 집으로 왔다. 화실 안은 대부분 유화와 한국화로 채워져 있었다. 원아가 한가할 때 그린 것들이었다.원아는 붓에 물감을 묻히며 원민지에게 말했다. “고모, 한국화와 서양 유화는 서로 달라요.”“한국화는 여백과 정취를 중시해요. 때로는 잎사귀와 꽃술이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이뤄 내기도 하죠. 어쨌든 여백을 남기는 것이 꼭 필요
소남의 앞에서 원아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었다.“출근하기 싫은 거예요?”소남은 그녀의 말을 겉으로는 믿는 척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원아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날부터 출근 준비를 했던 그녀가, 단순히 출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을 리 없었다.‘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아. 하지만 아침부터 무슨 일이 생긴 거지?’소남은 속으로 궁금해하면서도 원아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원아는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굳이 진실을 캐
“이건 장기적인 투자예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거고, 게다가 당신이 진행 중인 연구도 이제 상용화될 때가 됐어요.” 소남은 원아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살짝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원아가 진행한 연구는 몇 차례의 임상 실험을 통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었다. 그 후 회사의 마케팅팀이 시장 조사를 했고, 적절한 가격 조건만 맞으면 대부분의 의료 기관이 그 약품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시장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원아는 소남의 가까운 존재감에 살짝 혼란스러워하며 나지막이
소남은 설계 도면을 디스크에 저장한 후, 모든 자료를 서류 봉투에 넣었다. 모든 작업을 마친 그는 원아도 샤워를 끝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고, 원아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서 꼼꼼하게 스킨케어를 하고 있었다.원아가 고개를 돌려 소남을 보며 말했다. “다 출력했어요?”“다 출력했어요.” 소남이 대답하며 다가 갔고 원아가 일어서자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아까 에런한테서 전화가 왔어요.”“무슨 일이죠...” 원아는 갑작스러운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시간에 에런이 전화를
원아는 설계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ML그룹의 입찰 이후, 소남이 이렇게 공들여 건축 설계도를 완성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설계도의 세부 사항 하나하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이 설계도 정말 멋져요!” 원아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원아는 생물제약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지금은 소남의 건축 설계도에 감탄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소남 씨가 방금 내가 한 말을 듣고, 내가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안 그러면
눈이 녹으면서 날씨는 평소보다 더 쌀쌀해졌지만, 이연의 마음은 따뜻했다.예전에는 이연이 감히 송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고, 이런 일들을 처리할 결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욱의 사랑이 이연의 결심을 굳건하게 해주었다. 즉,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현욱 씨...” 이연이 나지막이 말했다.“난 항상 여기 있어.” 현욱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혹시 내가 도울 일이 생기면 꼭 말해줘요.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똑똑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울 거예요.” 이연은 결심하
현욱이 그런 표정을 짓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원아는 그가 무언가 중요한 일에 직면해 있음을 직감했다.“그렇겠죠.” 비비안도 원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2층.현욱은 소남을 찾아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소남은 현욱의 계획을 듣고 나서 얼굴이 굳어졌다.“알겠어. 앞으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이번에는 형님의 도움이 정말 필요해요. 저도 이번만큼은 절대로 사양하지 않을 거예요. 형님은 제 편에 단단히 서주기만 하면 돼요.” 현욱은 말했다.소남의 지지가 있다면, SJ그룹은 쉽게 무너지지 않
막 앉았을 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는 윤수정에게서 온 것이었다. 재훈은 전화를 받지 않고, 대신 윤수정에게 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형이 확실히 모든 개인 서류들을 전부 다시 발급한 것 같아요. 그 시기가 꽤 이른 편이었는데, 그때는 우리가 이연을 경계하지 않았을 때였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이 문제를 잘 처리하실 거예요.]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재훈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송현욱과 이연... 너희 둘이 결혼을 했다고 해도, 내가 너희들을 행복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할아버지, 지금 금고에 있는 형의 모든 개인 서류를 가지고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아마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서류들뿐일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형한테 정략결혼을 추진하실 때, 형은 이미 그때 모든 개인 서류를 다시 재발급 신청을 해서 새롭게 발급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재훈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하게 송상철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송상철의 얼굴은 화가 난 나머지 핏발이 부풀어 올랐고, 유 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욱이 이 녀석 당장 데려와.”“예, 어르신.” 유 집사는 이번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재훈이 지난번 T그룹의 입찰사업계획서를 훔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고, 그는 그 책임을 부하에게 돌렸지만, 송상철은 여전히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재훈은 지금 자신이 직접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네 엄마는 깨어나긴 한 거야?” 송상철이 다시 물었다.“예, 깨어나셨어요.” 재훈은 거실에서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서 있었다. 송상철이 모든 질문을 끝내야만 재훈이 서재로 가서 금고를 열 수 있기 때문이었다.송재훈은 송상철의 모든 질문이 끝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