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밤. 번화하면서도 차가운 도시.찬바람이 휘몰아치고 함박눈이 흩날리며, 세상이 온통 은빛으로 뒤덮였다.쏟아지는 눈이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춰주었다.너무 추운 날씨 탓에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모처럼 고요한 밤이었다.완벽하고도 매끄러운 선을 가진 롱 블랙 벤틀리가 마치 유연한 황새치처럼 눈 속을 누비며 빠르게 달렸다.어두운 골목길.몸집이 크고 해진 옷을 입은 채 손에 흉기를 든 건달들이 아름다운 외모의 한국계 젊은 여자 둘을 보고는 침을 삼켰다.눈송이가 여자들 위로 떨어지며 머리카락을 적셨다.두꺼운 패딩점
T그룹.원아는 새 건축사업에 ‘그리움·그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녀는 한 남자를 그리워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그녀 마음의 소원과도 같은 사람이었다.어떤 작가가 ‘비를 기다리는 것은 우산의 숙명’이라고 말했다.원아는 자신이 바로 그 우산이 되어 메마른 마음을 적셔 줄 비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리움·그린’ 사업이 마무리되면, 틀림없이 비가 내릴 것이라고 믿었다.……‘그리움·그린’ 건축사업 공사는 비록 시작은 호기로웠지만, 곧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이전에 VIVA 그룹과의 합작에 문제가
그녀는 지금 실행 가능한 방법이 이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민간에서 자금 조달로 인한 법률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람들이 경계하고 있는 터라 자금 조달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잘못하면, 경제사건에 해당하는 분쟁으로 번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금융위원회의 감독과 조사도 이뤄질 수 있어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릅니다.”동준은 꽤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분석을 내놓았다.“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해요. 우리가 민간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잖아요.
임문정은 주희진의 말에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설사 아내가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회를 봐서 원아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을 더는 늦추지 말자고 말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사실 나도 우리 딸을 빨리 데리고 오고 싶어. 며칠 전 산수마을에서 원아를 만났는데, 친딸이 내 눈앞에 있는데도 알려줄 수 없다는 게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 부쩍 여위고 초췌한 모습을 보니 아버지인…… 내 마음이 무척 아팠어.”주희진은 붓을 내려놓고 손을 씻은 뒤, 등나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목을 어루만졌다.“여보
주희진도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우리 딸이 최고는 아니더라도 실력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왜 갑자기 문씨 집안에 가서 우리 딸을 데려올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임문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남편을 잃은 데다 문씨 집안에서 구박을 받을까 봐 걱정돼서겠지.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우리가 그 아이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싶었던 것 아니야?” 그녀는 남편의 손을 잡고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당신이 말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긴 해요. 장인숙 그 여자는 원래가 제멋대로예요
딸의 잠꼬대를 들은 원아는 손을 내밀어 원원의 작은 손을 잡았다.그녀는 딸의 손이 차가운 것 같아 자신의 손으로 꼬옥 감싸주었다.그때 원원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엄마를 발견한 원원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엄마?”원아는 이불을 걷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딸 깼어? 시간이 아직 이르니 좀 더 자.”원원은 눈을 비비며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아빠는 돌아왔어요? 나 방금 아빠 꿈꿨어요. 아빠가 나와 오빠한테 장난감을 많이 사주셨어요. 디즈니랜드에도 놀러 가자고 했는데…… 엄마, 아빠 출장 간 지
문 노인이 원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원아야, 문정 아저씨와 희진 이모는 전에 본 적이 있으니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되겠지? 오늘 이들 부부가 이곳에 온 것은 바로 너 때문이란다.”“저 때문에요?” 원아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임문정과 주희진을 바라보았다.“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뭐지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주희진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하나를 원아에게 내밀었다.가정부는 자연스럽게 원아의 품에 있는 아기를 데려가 안았다.원아는 서류를 받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DNA 유전자검사 결과지였다. 그녀는 그것을
만약 임영은의 음모를 경험하고 뱀과 전갈과 같은 그녀의 마음을 느껴보지 않았다면, 원아는 정말 그녀의 ‘순진한 웃음’에 속았을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원아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 임영은의 눈웃음 속에 서린 그 매서운 기운을 말이었다.임영은은 주희진의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마치 원아를 향해 시위라도 하는 듯.‘설령 엄마가 너를 친딸로 인정하더라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우리 모녀의 좋은 관계는 20년 동안 잃어버렸던 ‘친딸’로 인해 깨질 만큼 약하지 않아!’임영은
소남의 앞에서 원아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었다.“출근하기 싫은 거예요?”소남은 그녀의 말을 겉으로는 믿는 척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원아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날부터 출근 준비를 했던 그녀가, 단순히 출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을 리 없었다.‘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아. 하지만 아침부터 무슨 일이 생긴 거지?’소남은 속으로 궁금해하면서도 원아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원아는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굳이 진실을 캐
“이건 장기적인 투자예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거고, 게다가 당신이 진행 중인 연구도 이제 상용화될 때가 됐어요.” 소남은 원아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살짝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원아가 진행한 연구는 몇 차례의 임상 실험을 통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었다. 그 후 회사의 마케팅팀이 시장 조사를 했고, 적절한 가격 조건만 맞으면 대부분의 의료 기관이 그 약품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시장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원아는 소남의 가까운 존재감에 살짝 혼란스러워하며 나지막이
소남은 설계 도면을 디스크에 저장한 후, 모든 자료를 서류 봉투에 넣었다. 모든 작업을 마친 그는 원아도 샤워를 끝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고, 원아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서 꼼꼼하게 스킨케어를 하고 있었다.원아가 고개를 돌려 소남을 보며 말했다. “다 출력했어요?”“다 출력했어요.” 소남이 대답하며 다가 갔고 원아가 일어서자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아까 에런한테서 전화가 왔어요.”“무슨 일이죠...” 원아는 갑작스러운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시간에 에런이 전화를
원아는 설계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ML그룹의 입찰 이후, 소남이 이렇게 공들여 건축 설계도를 완성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설계도의 세부 사항 하나하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이 설계도 정말 멋져요!” 원아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원아는 생물제약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지금은 소남의 건축 설계도에 감탄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소남 씨가 방금 내가 한 말을 듣고, 내가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안 그러면
눈이 녹으면서 날씨는 평소보다 더 쌀쌀해졌지만, 이연의 마음은 따뜻했다.예전에는 이연이 감히 송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고, 이런 일들을 처리할 결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욱의 사랑이 이연의 결심을 굳건하게 해주었다. 즉,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현욱 씨...” 이연이 나지막이 말했다.“난 항상 여기 있어.” 현욱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혹시 내가 도울 일이 생기면 꼭 말해줘요.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똑똑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울 거예요.” 이연은 결심하
현욱이 그런 표정을 짓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원아는 그가 무언가 중요한 일에 직면해 있음을 직감했다.“그렇겠죠.” 비비안도 원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2층.현욱은 소남을 찾아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소남은 현욱의 계획을 듣고 나서 얼굴이 굳어졌다.“알겠어. 앞으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이번에는 형님의 도움이 정말 필요해요. 저도 이번만큼은 절대로 사양하지 않을 거예요. 형님은 제 편에 단단히 서주기만 하면 돼요.” 현욱은 말했다.소남의 지지가 있다면, SJ그룹은 쉽게 무너지지 않
막 앉았을 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는 윤수정에게서 온 것이었다. 재훈은 전화를 받지 않고, 대신 윤수정에게 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형이 확실히 모든 개인 서류들을 전부 다시 발급한 것 같아요. 그 시기가 꽤 이른 편이었는데, 그때는 우리가 이연을 경계하지 않았을 때였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이 문제를 잘 처리하실 거예요.]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재훈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송현욱과 이연... 너희 둘이 결혼을 했다고 해도, 내가 너희들을 행복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할아버지, 지금 금고에 있는 형의 모든 개인 서류를 가지고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아마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서류들뿐일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형한테 정략결혼을 추진하실 때, 형은 이미 그때 모든 개인 서류를 다시 재발급 신청을 해서 새롭게 발급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재훈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하게 송상철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송상철의 얼굴은 화가 난 나머지 핏발이 부풀어 올랐고, 유 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욱이 이 녀석 당장 데려와.”“예, 어르신.” 유 집사는 이번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재훈이 지난번 T그룹의 입찰사업계획서를 훔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고, 그는 그 책임을 부하에게 돌렸지만, 송상철은 여전히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재훈은 지금 자신이 직접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네 엄마는 깨어나긴 한 거야?” 송상철이 다시 물었다.“예, 깨어나셨어요.” 재훈은 거실에서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서 있었다. 송상철이 모든 질문을 끝내야만 재훈이 서재로 가서 금고를 열 수 있기 때문이었다.송재훈은 송상철의 모든 질문이 끝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