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강유형이 한 발 더 다가오며 말했다.“지원아...”“강유형,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너무 뻔뻔하지 않아?”나의 차가운 태도에 강유형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얼굴이 붉어졌고 그 표정에는 당혹감과 자책이 뒤섞여 있었다.“그래. 나도 알아. 내가 한심하다는 거.”그는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내 친구에게 상처를 줬고 이제는 네가 날 구하기 위해 진정우랑 다투기까지 했지. 그런데도 내가 뻔뻔하게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사람이 아닌 것 같아.”그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나는 그럴 자격도 없어.”그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섰다. 나와 강진혁과 함께 병실을 나설 때, 강유형은 배웅하지 않았다.공항에 도착해서 강진혁이 수속을 밟으러 간 동안, 나는 그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몸은 여기 있지만 영혼은 어디론가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언니, 혼자 여행 가는 거예요?”이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니 작은 금발 소녀가 내 옆에 앉아 해맑게 물었다.그녀는 금발과 뽀얀 피부를 가진 외국 아이였지만 동양인의 짙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또박또박한 한국어를 구사했다.아이들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는 이 작은 아이의 눈빛이 내 떠다니던 영혼을 단번에 붙잡아 주었다. 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언니는 여행이 아니라 집에 가는 거야.”“집에 가서 엄마, 아빠 찾는 거예요?”아이의 질문은 끝없는 궁금증으로 가득했다.나는 부모님을 찾고 싶었지만 그분들은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이런 슬픈 이야기를 어린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언니, 남자 친구 있어요?”소녀는 방긋 웃으며 귀엽게 얼굴을 붉혔다.“왜 웃어?”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요.”소녀는 신비로운
남자가 다가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아이가 폐를 끼쳤네요.”“네? 하윤이가 이렇게 귀여운데...”하윤이는 아빠의 말을 듣자마자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고 나는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하윤이는 정말 사랑스러워요. 저도 하윤이가 좋아요.”“하윤도 언니 좋아해요.”하윤이의 발음이 약간 어눌했지만 귀여웠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빠를 향해 말했다.“솔직히 부모님 두 분 다 외국분인 줄 알았어요.”남자의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실례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사과했다.“아, 죄송합니다...”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딸에게 손을 내밀었다.“가자, 아빠랑 탑승하러 가야지.”“언니, 우리랑 같이 가요. 안 돼요?”하윤이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같은 비행기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강진혁이 다가왔다. 그는 손에 탑승권을 쥐고 강진혁은 부녀를 바라보며 아빠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언니, 우리 같이 가요!”하윤이는 어른들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내 손을 다시 끌어당겼다.“하윤아, 언니는 우리랑 같은 비행기가 아니야.”아빠가 강진혁과 악수를 나눈 뒤,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그럼 언니가 비행기 바꾸면 되잖아요!”하윤이는 비행기를 자주 타본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서양식 이목구비를 보며, 나는 그녀가 혼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윤아, 이제 그만하자.”아빠가 부드럽게 말렸지만 하윤은 기죽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하윤이는 언니랑 같이 비행기 타고 싶어요.”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고 아빠는 하윤을 안아 들며 다시 사과했다.“아이가 고집이 세서 죄송합니다.”그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하윤을 안은 채 떠났고 하윤은 아빠 품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언니, 언니... 하윤이는 언니가 보고 싶을 거예요.”나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강진혁과는 비행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별다른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비행기가 착륙하고 나서야 내가 입을 열었다.“오빠, 저는 택시를 타고 진정우를 찾으러 갈 거예요.”강진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우리 부모님이 오셨어.”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오빠가 말씀드린 거예요?”“그래.” 강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부모님께서 네 상태를 정말 많이 걱정하셨어. 네가 혼수상태였을 때 열 번도 넘게 전화해서 네 상태를 물어보셨거든.”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 잠시 후에 삼촌과 아줌마가 걱정하지 않게 좋은 모습으로 인사할게요.”우리는 함께 입국장으로 걸어갔고 멀리서 강유형의 부모님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분 모두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나를 찾고 있었다.“지원아!” 아줌마가 나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자 나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강진혁과 함께 서둘러 두 분 앞으로 다가갔다.아줌마는 내 손을 잡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시더니 눈가가 빨개졌다.“지원아, 너... 도대체 내가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그녀는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나를 나무라고 싶었겠지만 내가 그들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구한 것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결국 그녀는 나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우리 지원이는 정말 복덩이야. 우리 가족의 구세주야.”“됐어, 됐어. 애가 다행히 괜찮으니 이제 울지 마.” 강유형의 아버지가 그녀를 다독였다.“맞아요. 지원이도 무사하고 유형이도 무사하니, 이건 정말 하늘이 우리를 도운 거예요. 기뻐해야죠.” 아줌마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지원아, 고생 많았어.” 삼촌은 내 어깨를 잡고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두 분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맞아, 지원아.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너희가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거였어.”강진혁이 말을 이어받았다.“지원아, 우리가 너와 유형이를 함께 있게 하고 싶었던 건 너희 둘 사이에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야.”아줌마는 다시 한번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온 시간 동안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해준 설명을 듣고 보니, 딱히 의심할 만한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그들 말처럼, 만약 내가 내 혈액형에 대해 일찍 알았다면 분명 불안해하며 조심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살았다면 지금처럼 다양한 경험을 쌓고 나다운 삶을 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삼촌, 아줌마.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예전에 저와 강유형의 혼약을 정할 때, 혹시 우리의 혈액형과 관련이 있었던 건가요?”내 질문에 아줌마는 삼촌을 바라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가 너와 유형이가 같은 혈액형이고 그중에서도 희귀한 혈액형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정말 기뻤어. 그건 너희 둘 중 누구든 위험에 처했을 때, 다른 한 사람이 서로를 구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너희가 자라서 각자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면 너희는 더 이상 상황에 따라 서로를 돕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농담처럼 너희 둘이 결혼하면 좋겠다고 말한 거야. 부부는 하나니까, 서로를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을 테니까.”삼촌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을 마쳤다.“지원아, 너와 유형이를 생각하면서 매일 마음을 졸이며 살고 있어. 혹시라도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 말이야.”“우리 부모님이 예전에 유명한 스님께 부탁드려 너희 둘을 위해 기도의 등불을 켜뒀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어.”강진혁이 조용히 말을 보탰다.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묵직해졌다. 나는 단순히 삼촌과 아줌마가 가족 모두를 위해
차 안에서 나는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그가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디야?”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진정우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돌아왔네.”짧은 말이었지만 나는 목이 메는 것 같았다. 내가 돌아온 건 결국 그가 만든 상황 때문이었다.“그래. 어디냐고. 너랑 이야기해야겠어.”내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네 집으로 갈게.”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진정우, 내가 지금 네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내가 말했잖아. 할 말 있다고.”진정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답했다.“집에 있어. 소영이도 같이 있어.”그의 말에서 나는 그가 내가 집에 오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그는 소영이와의 충돌이나 언쟁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영이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그게 옳은 판단이긴 했다.“알았어. 그럼 집에서 기다릴게.”나는 대답을 짧게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치는 풍경들을 보았다. 한 장면씩 스쳐 가는 그 모습들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마침 조나연과 마주쳤다.화장을 한 그녀는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 출산 후 회복한 듯했지만 조산으로 태어난 아이는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보러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조나연은 내 손에 들린 짐을 흘끗 보더니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윤지원, 너 그렇게 도도한 척하더니 결국엔 진정우랑 엮이고 강유형이랑도 질긴 관계를 이어가는구나.”그녀는 여전히 강유형에 미련이 남아있는 듯했다.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건 물론이고 내 행보까지 확인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는 분명 우리 사이를 경계하고 있었다.“지금 네 말에 신경 쓸 기분 아니야. 그러니까 입 닫고 꺼져.”나는 단호하게 경고했다.다행히 그녀도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우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가 왜 나를 오해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헛소문으로 퍼진 기사 때문이었지만 물론 이 일에는 내 잘못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단 한 번도 나에게 확인하지 않고 단지 기사 하나만으로 나를 판단했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내가 불편하다고 하면 지금 바로 돌아갈 거야?”“그래.” 그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이를 악물며 화를 삭였다. “진정우, 네가 이렇게 못된 놈일 줄은 정말 몰랐어.”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태도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내가 더 독한 말을 하려던 것도 막혀버렸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았다. 진정우는 나를 따라 들어왔지만 예전처럼 나와 가까이 앉지 않고 한 걸음 떨어진 거리를 유지했다.과거에는 내가 그와 조금만 거리를 두려고 해도 그는 나를 끌어안으며 무릎 위에 앉히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의 거리감이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의 이런 태도에 내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진짜로 나랑 헤어질 생각이야?”“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깊은 울림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건 화가 나서 한 말이야. 네가 나를 보러 오지 않아서.” 나는 억울함이 밀려와 목소리가 떨렸다.“나 보러 갔었어.” 그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근데 나는 몰랐잖아. 내가 깨어 있을 때 봤어야지.”나는 말을 이어가다 목이 메어 잠시 멈췄다.“진정우, 내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사람은 너야.”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정말 내가 맞아?” 그의 질문에 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기사가 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의심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내가 강유형을 구한 건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그는 그냥 한 생명이었을 뿐이야. 그날 그 자리에 강유형이
진정우는 늘 솔직한 사람이어서 감정을 숨기거나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진심 그대로였고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방금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단언한 것은 단순히 한두 번의 오해 때문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쌓여온 불안과 의심이 결국 이렇게 표출된 것이다.나는 진정우와 함께한 이후로, 강유형과의 과거가 우리 관계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항상 강유형과 거리를 두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우는 여전히 내가 강유형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감정은 단지 수혈 때문만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된 상황 속에서 점점 커져 온 것이 분명했다.“진정우, 결국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널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널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네.”“정말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겠지.” 진정우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상처가 담겨 있었다.나는 무력하게 눈을 감았다. “그건 화가 나서 한 말이었잖아. 내가 설명했잖아.”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넌 그걸 바로 받아들였어. 진정우, 나도 이제 네가 처음부터 날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야?”‘억지로 죄를 만들려면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상대를 비난하려는 의도만 있으면 어떤 이유든 만들 수 있는 법이었다.이때 진정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네.”그의 말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까지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반응하다니 정말 화가 났다. 나는 그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 헤어지는 게 맞다? 결국 네가 그렇게 원했던 거구나.”진정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이 움직이는 걸 보니 무언가 말하고 싶어도 멈춘 듯했다. 나는 그의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진정우의 뒷모습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수없이 봐왔던 그 뒷모습이 이제는 나와 완전히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눈물은 금세 마르고 슬픔 대신 분노가 차올랐다. 진정우가 단순한 오해로 나를 버렸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도 결국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자신이 성공한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을 하찮게 여긴다는 점에서 말이다.진정우가 나를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다면 나 역시 그에게 미련을 두고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강진혁과 강유형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내가 목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때였다. 둘 다 진정우와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메시지였지만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한들 위로와 자책의 말만 돌아올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나는 일부러 메시지를 보지 않은 척하며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리영의 메시지에는 답했다. 그녀는 요 며칠간 구 교수를 만나러 간다고 연락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처음 메시지를 보냈다.[드디어 구 교수님의 품에서 깨어난 거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기억은 하는 거지?] 나는 은근한 불만과 조롱을 담아 답장을 보냈고 곧바로 그녀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 그녀의 행복 가득한 얼굴이 나타났다.“내가 네 연애를 방해할까 봐 일부러 연락 안 한 거지.”“거짓말하지 마. 너 구 교수님이랑 달콤하게 지내느라 나를 까맣게 잊은 거겠지.” 나는 그녀를 놀리며 말했다. 안리영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하는 제스처를 했다.“너도 알잖아. 그런데 너 요 며칠 어떻게 지냈어? 정우 씨랑 달달하게 지내면서 벌써 아기라도 계획한 거야?”이 여자는 정말 의사답게 한마디로 핵심을 찌른다. 하지만 그녀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진정우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내가 말이 없자 안리영은 바로 눈치를 챘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나 진정우랑 헤어졌어.”“뭐?” 그녀의 표정이
“콜록!”전화기 너머에서 배성재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내 갑작스러운 애교 섞인 목소리가 꽤 당황스러웠나 보다.그는 곧바로 물었다.“무슨 부탁이죠?”나는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드래곤킹에는 남자 모델뿐만 아니라 여자 모델도 있죠? 혹시 그쪽이랑 친하세요?”이제 내가 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 확신한 이상, 굳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도 없었다.생각해 보면 참 우습다. 그동안 그렇게 떠보고 시험해 보려고 온갖 수를 썼지만 결국 미트볼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갑자기 왜 그런 걸 묻죠?”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 조심스럽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팔짱을 끼고 일부러 더 장난스러운 톤으로 말했다.“저도 한 번 여자 모델이 되어 보고 싶어서요.”“뭐라고요?”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높아졌다.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했다.“드래곤킹에서 여자 모델로 일해 보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성재 씨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그건 안 됩니다.”이번엔 단칼에 잘라 말했다. 거절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왜요? 제가 못생겨서? 아니면 몸매가 별로라서?”“그런 문제가 아닙니다.”그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곧이어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그곳은 당신이 갈 만한 곳이 아닙니다.”‘좋아, 바로 이 반응. 이제야 진짜 진정우다운 모습이 나오는군.’“왜요? 성재 씨도 거기서 일하셨잖아요?”내가 일부러 짓궂게 되묻자, 그는 순간 말을 잃었다.그리고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낮게 말했다.“나는 당신이 그곳에 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도 없어요.”나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그래, 바로 이거야. 이 반응이야.’분명 그는 자신이 진정우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를 통제하려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그럼 내 방법대로 알아서 갈게요.”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가 날 불러 세웠다.“잠깐. 진짜 이유
내 아버지를 언급하자 강진혁은 순간 굳어졌다.표정이 단단하게 굳은 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연한 반응이었다.내 부모님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가 직접 만든 비극이었으니까.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배성재가 만든 완자를 바라보았다.나는 차분한 척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제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그 맛은 다시 없을 거야.”하지만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었고 나는 이미 확신했다.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그런데도 그가 계속 자신을 배성재라고 주장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괜히 흔들리지 말고 그의 계획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었다.강진혁은 한숨을 내쉬듯 낮게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 일은 정말 미안해.”하지만 그 말은 더럽게도 위선적으로 들렸다.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애써 눌러가며 나는 덤덤하게 받아쳤다.“그 일은 오빠랑 상관없잖아요.”강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넌 참 착한 애야.”‘착해? 아니, 바보였겠지.’한때는 용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내가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단 1%도 없다는 걸 말이다.나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조용히 단호박 수프를 떠먹었다.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솔직히 말해 배성재의 요리 실력은 꽤 수준급이었다.심지어 예전 진정우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그동안 숨어서 요리 연습이라도 했나? 나중에 진짜 정체를 밝히면 꼭 물어봐야겠네.’“이거 맛있네요. 잘 만들었어요.”내가 무심하게 던진 칭찬에 강진혁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저녁 약속 있어?”그는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없어요. 그냥 한 말이에요.”나는 무심히 단호박 수프를 한 모금 마셨고 그 순간 강진혁의 시선은 더욱 깊어졌다.그러더니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그럼 오늘 저녁에는 나랑 같
배성재는 정말 겁도 없었다.강진혁이 나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도전장을 내밀다니...나는 그의 이런 태도가 예상 밖이었지만 지금 내게 더 중요한 건 이소희였다.그녀가 정말 드래곤킹에 있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나는 고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요.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요.”배성재는 별다른 아쉬운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섰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료들을 마주쳤는지 다시 한 번 진 팀장님이라 불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던 강진혁이 문득 내게 물었다.“저 사람... 진정우랑 정말 많이 닮지 않았어?”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만약 이 자리에서 안 닮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그래서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답했다.“모르겠어요. 그래서 더 시험해 봐야죠.”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항상 나한테 맛있는 걸 챙겨줬어요. 그래서 저도 한 번 성재 씨의 요리를 경험해 보려고요.”이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강진혁에게 보내는 신호였다.내가 배성재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는 신호였다.나는 아직 강진혁이 배성재를 위험 요소로 인식하지 않길 바랐다.적어도 지금은 배성재가 그의 타겟이 되어서는 안 된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그럼 결과는 나왔어?”우리는 이미 사무실로 들어와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락을 열었다.그 안에는 예상했던 두 가지 요리 외에도 만두와 호박죽까지 곁들여져 있었다.솔직히 말해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당길 정도였다.강진혁도 한마디 덧붙였다.“보아하니 요리 실력이 제법인데. 드래곤킹에서 남자 모델로 있기엔 아까운 재능이네. 그냥 식당을 차리는 게 낫겠어.”나는 의미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았을 뿐이에요.”나는 강진혁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그런 태도조차 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관심과 걱정이라기보다 그저 나를 붙잡기 위한 수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사랑이 식으면 그의 모든 행동이 불편하게만 보인다더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그래도 물이라도 좀 마셔.”강진혁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권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그렇게 화장실을 나와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그리고 곧, 회사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어? 진 팀장님!”“오랜만이에요! 드디어 복귀하신 거예요?”“우린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요!”여러 직원이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반가워하는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 배성재라는 것이었다.배성재는 아무런 반응 없이 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그렇게 조용히 걸어오더니 나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그 순간, 내 옆에 있던 강진혁의 기운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나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나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그가 진정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계속 착각하도록 놔두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괜한 오해가 쌓이면 나중에 정리하기가 더 골치 아파진다.배성재는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하게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상자를 내게 건넸다.“점심 가져왔어요.”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사실 나는 아침도 못 먹고 나와서 속이 비어 있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책임감이 꽤 강하네요?”그러면서 슬쩍 강진혁을 향해 돌아보며 덧붙였다.“오빠, 성재 씨 요리 실력 한 번도 안 맛봤죠? 진 팀장님보다는 아주 약간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꽤 괜찮아요.”내 말이 끝나기가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강진혁은 집요하게 내 반응을 살폈다.나는 짧게 웃으며 허진호에게 집중하듯 말했다.“전 허 대표님이 빨리 회복해서 출근하셨으면 좋겠어요. 출근 도장 찍는 모습 못 보니 너무 심심하네요.”그렇게 나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전화를 끊었다.강진혁은 이미 내 자리까지 들어와 있었고 가져온 꽃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오랜만에 그렇게 밝게 웃는 거 본 것 같은데.” 나는 자연스럽게 이유를 만들어냈다.“허 대표님이 여자 친구한테 얼굴 할퀴었다고 투덜대는데 그게 너무 웃겨서요.”강진혁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혹시 유흥업소 간 거 때문에 그런 거야?”그 말에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강진혁이 허진호를 봤고 허진호가 본 사람이 정말 이소희라면 강진혁도 그녀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리고 이소희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이 바로 강진혁이었다는 내 의심이 맞다면...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역시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네요. 그런 곳은 꼭 가봐야 속이 시원해요?”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난 일 때문에 갔어.”“허 팀장님도 똑같이 말하던데요. 근데 여자 친구가 안 믿고 난리를 쳤대요.”나는 꽃을 들어 올려 코끝에 가져가 향을 맡으며 시선을 피했다.향은 좋았지만 지금 내 기분과는 정반대였다.그러다 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어제 드래곤킹에서 좀 난처한 일 겪었다며?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그 말을 듣자마자 등골이 싸늘해졌다.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묻는 걸까?그가 배후에 숨어져 있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면 정말 그의 걱정 어린 태도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주범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가 연기를 한다면 나도 맞춰줘야 했다.아직은 그를 자극할 때가 아니니까.그래서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직접 해결했어요. 굳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나는
나는 준비실에서 차를 따르다가 무심코 동료들에게 물었다.“허 대표님은 오늘 안 나오셨나요?”내 말에 몇몇이 입을 꾹 다물고 킥킥거리며 웃었다.나는 그 반응이 이상해서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뭐예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그러자 한 명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얼굴이 엉망이 됐다네요!”“아무래도 여자 친구한테 할퀸 모양이에요.”“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허 대표님 여자 친구가 그렇게 사나운 줄은...”“근데 솔직히 허 대표님이 유흥업소라도 갔다면 나 같아도 가만 안 뒀을걸요.”순식간에 사무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고 다들 각자 한마디씩 보태며 떠들어댔다.그제야 나는 허진호가 오늘 회사에 안 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얼굴이 엉망이 돼서 창피해서 못 나온 거겠지.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때리는 건 그렇다 쳐도 얼굴은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솔직히 나는 그냥 궁금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허진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지원 씨,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다 헛소문입니다. 그런 일 없었어요.”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고 나는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되물었다.“네? 무슨 일인데요? 제가 뭘 들었다는 거죠?”허진호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회사 갔다면서요? 아무도 얘기 안 해줬어요?”나는 일부러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아침부터 바빠서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그제야 허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아, 됐습니다.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그리고 내가 들은 내용은 사무실 사람들이 떠들던 소문과 거의 똑같았다.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제가 지금 제일 후회하는 건 도대체 왜 여자한테 빠졌냐는 겁니다.”나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의 한탄이 어이없기도 했고 뭔가 귀엽기도 했다.그래서 나는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남자를 좋아해 보시려고요?”그러자 허진호도 장단을
나는 놀란 채로 그를 바라봤다.“강유형, 너...”그는 천천히 입가를 닦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나는 순간 따라가야 하나 망설였지만 끝내 발을 떼지 않았다.그냥... 이대로 두는 게 맞을 것 같았다.그래야 그도 이제 완전히 포기할 테니까.“저를 원망하진 않겠죠?”강유형이 떠난 후 뒤에서 배성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천천히 돌아봤다.배성재는 문가에 서 있었고 그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강유형이 토한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얼룩져 있었다.“저 사람이 계속 지원 씨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었어요.”나는 짧게 대꾸하며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옷 갈아입고 이제 가세요.”배성재는 말없이 옷을 받았다.그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손에 작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그 안에는 그가 입었던 더러워진 옷이 담겨 있었다.그는 그대로 나가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더니 현관 앞 바닥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마침내 문이 닫히고 그가 떠났고 나는 그제야 소파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았다.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결국 지쳐서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고 나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그런데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봤다.강유형이 내 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그 붉은 피가 마치 내 가슴 한복판에 떨어지는 듯한 느낌.그 꿈에 시달리며 나는 밤새 뒤척였다.그리고 다음 날 내가 눈을 뜨자마자 창문으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향했다.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그리고 옷 위에 묻어 있는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나는 조용히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하나하나 천천히 핏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마치 그것이 내 삶에서 강유형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내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용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들었어. 어제 우리 쪽에서 사고 났다며?”내가 찾기도 전에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강유형, 네가 어떻게 내가 사고 난 걸 알았지?”그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문기둥에 기대섰다.“당연히 알지. 왜냐하면...”그는 말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내가 사람을 붙여서 널 지켜주게 했거든.”지켜준다고? 이건 지켜주는 게 아니라 감시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의 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자 나는 이유 모를 불쾌감이 몰려왔다.그래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네가 붙인 사람이 그렇게 실력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는 어디 있었던 거야?”“그 부분은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놈은 잘랐어.”강유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는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덧붙였다.“그리고 지금 누가 널 해치려 했는지 조사 중이야.”“잘됐네.”나는 짧게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그럼 네가 그걸 알아내면 나한테도 알려줘.”강유형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피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하지만 나는 그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더군다나 지금 내 집 안에는 또 다른 손님이 있었으니까 말이다.“강유형, 늦었어. 인제 그만 돌아가.”나는 단호하게 말했으나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집에 가고 싶지 않아.”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네가 떠난 이후로... 난 집에 들어가는 게 너무 싫어졌어.”그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은 가슴 한구석을 묘하게 찌르는 기분이었다.“네가 있을 때는 몰랐어. 네가 없는 집이 이렇게 공허한 곳일 줄은... 집에 들어가면 온통 적막하고 부모님도 서로 말이 없고 예전처럼 따뜻한 느낌이 하나도 안 남았어.”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렇게 만든 게 누구 때문인데?“사실, 예전엔 이런 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몰랐어.”그는 허탈하게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뜨거워졌다.조금 전까지 내가 그를 떠보려 했는데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그는 겉으로 보기엔 진지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은근슬쩍 던지는 말은 전혀 초보자가 아니었다.이 남자,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데?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하지 마세요.”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TV가 켜진 거실로 향했다.그는 여유롭게 식탁을 정리한 뒤 내가 뿜어낸 죽이 튄 옷을 간단히 닦고 설거지를 시작했다.그러고 부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걸어왔다.“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무심하게 손짓했다.“맘대로 쓰세요.”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샤워도 좀 해야겠네요.”나는 즉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마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보았다.아직도 죽이 튀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그제야 나는 생각을 바꿨다.‘아... 샤우할만 하네.’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갈아입을 옷 있나요?”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순간적으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내 결정을 흔들어 놓았다.“헌 옷이라도 괜찮아요.”그는 진정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내 집에 남자의 옷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진정우의 것일 테니까.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이건 완벽한 연기였다.그러니까 내가 괜한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억지로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찾아볼게요.”나는 옷장을 열어 진정우의 옷을 손에 들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