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지원아.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너희가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거였어.”강진혁이 말을 이어받았다.“지원아, 우리가 너와 유형이를 함께 있게 하고 싶었던 건 너희 둘 사이에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야.”아줌마는 다시 한번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온 시간 동안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해준 설명을 듣고 보니, 딱히 의심할 만한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그들 말처럼, 만약 내가 내 혈액형에 대해 일찍 알았다면 분명 불안해하며 조심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살았다면 지금처럼 다양한 경험을 쌓고 나다운 삶을 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삼촌, 아줌마.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예전에 저와 강유형의 혼약을 정할 때, 혹시 우리의 혈액형과 관련이 있었던 건가요?”내 질문에 아줌마는 삼촌을 바라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가 너와 유형이가 같은 혈액형이고 그중에서도 희귀한 혈액형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정말 기뻤어. 그건 너희 둘 중 누구든 위험에 처했을 때, 다른 한 사람이 서로를 구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너희가 자라서 각자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면 너희는 더 이상 상황에 따라 서로를 돕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농담처럼 너희 둘이 결혼하면 좋겠다고 말한 거야. 부부는 하나니까, 서로를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을 테니까.”삼촌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을 마쳤다.“지원아, 너와 유형이를 생각하면서 매일 마음을 졸이며 살고 있어. 혹시라도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 말이야.”“우리 부모님이 예전에 유명한 스님께 부탁드려 너희 둘을 위해 기도의 등불을 켜뒀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어.”강진혁이 조용히 말을 보탰다.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묵직해졌다. 나는 단순히 삼촌과 아줌마가 가족 모두를 위해
차 안에서 나는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그가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디야?”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진정우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돌아왔네.”짧은 말이었지만 나는 목이 메는 것 같았다. 내가 돌아온 건 결국 그가 만든 상황 때문이었다.“그래. 어디냐고. 너랑 이야기해야겠어.”내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네 집으로 갈게.”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진정우, 내가 지금 네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내가 말했잖아. 할 말 있다고.”진정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답했다.“집에 있어. 소영이도 같이 있어.”그의 말에서 나는 그가 내가 집에 오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그는 소영이와의 충돌이나 언쟁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영이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그게 옳은 판단이긴 했다.“알았어. 그럼 집에서 기다릴게.”나는 대답을 짧게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치는 풍경들을 보았다. 한 장면씩 스쳐 가는 그 모습들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마침 조나연과 마주쳤다.화장을 한 그녀는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 출산 후 회복한 듯했지만 조산으로 태어난 아이는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보러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조나연은 내 손에 들린 짐을 흘끗 보더니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윤지원, 너 그렇게 도도한 척하더니 결국엔 진정우랑 엮이고 강유형이랑도 질긴 관계를 이어가는구나.”그녀는 여전히 강유형에 미련이 남아있는 듯했다.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건 물론이고 내 행보까지 확인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는 분명 우리 사이를 경계하고 있었다.“지금 네 말에 신경 쓸 기분 아니야. 그러니까 입 닫고 꺼져.”나는 단호하게 경고했다.다행히 그녀도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우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가 왜 나를 오해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헛소문으로 퍼진 기사 때문이었지만 물론 이 일에는 내 잘못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단 한 번도 나에게 확인하지 않고 단지 기사 하나만으로 나를 판단했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내가 불편하다고 하면 지금 바로 돌아갈 거야?”“그래.” 그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이를 악물며 화를 삭였다. “진정우, 네가 이렇게 못된 놈일 줄은 정말 몰랐어.”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태도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내가 더 독한 말을 하려던 것도 막혀버렸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았다. 진정우는 나를 따라 들어왔지만 예전처럼 나와 가까이 앉지 않고 한 걸음 떨어진 거리를 유지했다.과거에는 내가 그와 조금만 거리를 두려고 해도 그는 나를 끌어안으며 무릎 위에 앉히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의 거리감이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의 이런 태도에 내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진짜로 나랑 헤어질 생각이야?”“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깊은 울림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건 화가 나서 한 말이야. 네가 나를 보러 오지 않아서.” 나는 억울함이 밀려와 목소리가 떨렸다.“나 보러 갔었어.” 그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근데 나는 몰랐잖아. 내가 깨어 있을 때 봤어야지.”나는 말을 이어가다 목이 메어 잠시 멈췄다.“진정우, 내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사람은 너야.”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정말 내가 맞아?” 그의 질문에 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기사가 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의심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내가 강유형을 구한 건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그는 그냥 한 생명이었을 뿐이야. 그날 그 자리에 강유형이
진정우는 늘 솔직한 사람이어서 감정을 숨기거나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진심 그대로였고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방금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단언한 것은 단순히 한두 번의 오해 때문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쌓여온 불안과 의심이 결국 이렇게 표출된 것이다.나는 진정우와 함께한 이후로, 강유형과의 과거가 우리 관계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항상 강유형과 거리를 두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우는 여전히 내가 강유형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감정은 단지 수혈 때문만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된 상황 속에서 점점 커져 온 것이 분명했다.“진정우, 결국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널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널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네.”“정말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겠지.” 진정우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상처가 담겨 있었다.나는 무력하게 눈을 감았다. “그건 화가 나서 한 말이었잖아. 내가 설명했잖아.”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넌 그걸 바로 받아들였어. 진정우, 나도 이제 네가 처음부터 날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야?”‘억지로 죄를 만들려면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상대를 비난하려는 의도만 있으면 어떤 이유든 만들 수 있는 법이었다.이때 진정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네.”그의 말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까지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반응하다니 정말 화가 났다. 나는 그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 헤어지는 게 맞다? 결국 네가 그렇게 원했던 거구나.”진정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이 움직이는 걸 보니 무언가 말하고 싶어도 멈춘 듯했다. 나는 그의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진정우의 뒷모습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수없이 봐왔던 그 뒷모습이 이제는 나와 완전히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눈물은 금세 마르고 슬픔 대신 분노가 차올랐다. 진정우가 단순한 오해로 나를 버렸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도 결국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자신이 성공한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을 하찮게 여긴다는 점에서 말이다.진정우가 나를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다면 나 역시 그에게 미련을 두고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강진혁과 강유형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내가 목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때였다. 둘 다 진정우와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메시지였지만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한들 위로와 자책의 말만 돌아올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나는 일부러 메시지를 보지 않은 척하며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리영의 메시지에는 답했다. 그녀는 요 며칠간 구 교수를 만나러 간다고 연락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처음 메시지를 보냈다.[드디어 구 교수님의 품에서 깨어난 거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기억은 하는 거지?] 나는 은근한 불만과 조롱을 담아 답장을 보냈고 곧바로 그녀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 그녀의 행복 가득한 얼굴이 나타났다.“내가 네 연애를 방해할까 봐 일부러 연락 안 한 거지.”“거짓말하지 마. 너 구 교수님이랑 달콤하게 지내느라 나를 까맣게 잊은 거겠지.” 나는 그녀를 놀리며 말했다. 안리영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하는 제스처를 했다.“너도 알잖아. 그런데 너 요 며칠 어떻게 지냈어? 정우 씨랑 달달하게 지내면서 벌써 아기라도 계획한 거야?”이 여자는 정말 의사답게 한마디로 핵심을 찌른다. 하지만 그녀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진정우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내가 말이 없자 안리영은 바로 눈치를 챘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나 진정우랑 헤어졌어.”“뭐?” 그녀의 표정이
진정우가 정말로 후회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의 단호했던 뒷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픔은 점점 커져서, 결국 그날 밤 나는 뒤척이며 한숨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강유형과 헤어졌을 때조차 이렇게 괴롭진 않았던 것 같았다. 밤새도록 마음을 다잡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준비를 마친 뒤, 나는 회사를 향했다. 회사에 가면 진정우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나와 달리 평온한 얼굴로 있을까 궁금했다.잠 못 잔 흔적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공들여 화장을 하고 회사로 갔다. 그리고 마침 로비에서 허진호와 마주쳤다. 그는 늘 그렇듯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오늘 아침도 빛나시네요!”그의 넘치는 열정이 내게 닿자, 마음 한구석에서 묵직한 피로가 밀려왔다. 꼭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도 된 듯 반갑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살짝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허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런데 혼자 오셨네요? 가족분은 안 보이는데요?”그가 툭 던진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찔렀다. 어젯밤부터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가족이요? 허 대표님이 새로 만들어 주시는 건가요?”내 말에 허진호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허허 웃으며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가리켰다.“저기 오시네요. 정우 씨 바로 오고 있잖아요.”진정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간단한 티셔츠와 작업복 차림이었다. 비록 그는 이제 진가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은 변함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 회사도 그의 소유였다.그를 바라보며 왜 나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는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를 믿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그의 부를 탐낼까 걱정돼서? 아니면 나를 그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생각이 꼬리를 물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허진호는 사람을 꾸짖거나 대놓고 나무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신 돌려서 넌지시 지적하면서 상대가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덜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그는 항상 느긋하고 농담을 섞어가며 회사를 운영했지만 직원들은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의 밑에서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일을 조금이라도 늦게 하면 허 대표님께 죄송한 기분이 들어서요.”나도 일부러 분위기를 맞추며 말했다. 그러자 허진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제가 언제 압박을 줬다고 그래요. 일은 매일 쌓이고 또 쌓이는 건데 굳이 서두를 필요 없잖아요.”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상사는 허진호가 처음이었다.그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나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앞으로는 조금 더 느긋하게 해볼게요.”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요즘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프세요?”솔직히 말하면 허진호와 나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를 대했고 나는 그와의 거리감을 유지하려 애썼다.“괜찮습니다. 몸 상태는 좋아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좋기는 무슨. 얼굴이 창백해서 뱀파이어한테 피 다 빨린 사람 같아요.”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옆 서랍을 열어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며칠 전에 고객이 준 건 영양제예요. 이거 드시고 몸 좀 챙기세요.”나는 상자를 받아서 들며 살펴봤다.“이거 여성 영양제 같은데요? 허 대표님한테 왜 이런 걸 준 거죠?”허진호는 난처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하하, 그러게요. 아마 제가 여자 친구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 같아요. 근데 알다시피 저는 외로운 솔로잖아요.”그의 너스레에 웃음이 났지만 그가 진심으로 챙겨주는 것이 고마워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감사합니다, 허 대표님. 나중에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허진호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약
정말 나쁜 남자! 나를 떠나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이런 행동이라니. 속마음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안리영의 말처럼 나도 한 번 그를 제대로 흔들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허 대표님,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내일 저녁 먹어요.”나는 일부러 허진호에게 내일 저녁 약속을 제안했다. 허진호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좋아요! 정우 씨도 같이하시죠?”하지만 진정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저는 바빠서 어렵습니다.”허진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찰나, 내가 먼저 끊었다.“허 대표님, 내일 제가 정말 특별한 곳으로 모실게요. 아마 허 대표님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일 거예요.”허진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정말요? 제가 못 가본 곳이라니. 그런데 정우 씨는 가보셨나요?”그가 굳이 진정우를 언급하는 이유는 뻔했다. 허진호는 이미 진정우가 진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자신이 불똥을 맞을까 두려운 눈치였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진정우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 발짝에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허진호는 진정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윤 부장님, 내일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요?”그는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진정우를 따라갔다.나는 피식 웃었고 아침부터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지태와 영상 통화를 했다. 하지만 화면이 켜지자마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태야, 그만 통화해. 우리 다 기다리고 있잖아.”“지원이야.”신지태가 내 이름을 말하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뚝 끊겼고 신지태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네 얘기 들었어.”나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 괜찮아.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서도 잘 지냈고.”“정말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고생했구나.”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안함이 가득했다.“그렇게 말하면 내가 남이 되는 것
유정철은 물을 내려놓고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을 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건 우리 가족 사진인데 이제 그 사진 속 사람 중엔 나밖에 남지 않았어.” 유정철은 조용히 말하며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가족 사진?” 나는 중얼거리며 빨간 옷을 입은 작은 소녀를 가리켰다. “이 소녀도 아저씨 가족분인가요?”“응, 맞아. 저건 내 여동생이야. 그때 그녀는 겨우 두 살이었지.” 유정철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다.“이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나는 숨이 갑자기 가빠졌다. 마음속에서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유정철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이때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아저씨...”“그날 여동생은 사라졌어. 바로 그 사진을 찍은 날이었지.” 유정철의 말에 내 심장이 급격히 빨라졌다.“어떻게 사라졌나요?” 나는 본능적으로 유정철의 옷자락을 잡았다.유정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날을 되새겼고 사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은 그날 사진을 찍고 굉장히 기뻐했지. 그들은 사진관에서 만든 키링를 목걸이로 바꿔 여동생에게 선물했어. 그리고 우리를 놀이공원에 데려갔고... 여동생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데려갔는데 엄마가 화장실에서 기절하고 나니 여동생은 사라졌어...” 유정철의 말이 끝날 때, 내 가슴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막히는 기분이었다.“그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나요?” 나는 목이 타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찾았지. 우리 가족은 미친 듯이 찾았어. 부모님은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지키고 그 후엔 도시 전역을 찾았지. 그리고 나서는 전국을 찾아다녔어. 그러다 엄마는 여동생을 찾지 못한 탓에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했어. 아빠는 엄마 장례를 치르고도 계속해서 찾았는데 그 과정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지...”그 말에 나는 몸이 얼어붙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결국 내 엄마의 실종이 행복한 가정을 이렇게 산산이 부서지게 만든 것이었다.“그럼 더 이상 찾지 않으셨나요?” 나는
“어?” 유정철은 잠시 멈칫하며 신희선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지원아.”“전혀 번거롭지 않아요. 사실 전에 한번 뵈러 가고 싶었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내 핸드폰에는 소지훈이 준 그들의 연락처와 주소가 있었지만 계속해서 가지 못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조금 더 일찍 찾아갔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랬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두려움에 떨며 경찰에 신고하기까지는 안 갔을 것이다.차를 몰고 그들을 집으로 데려다주었고 도중에 그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신희선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그녀는 나를 통해 그들의 딸을 보고 있겠지.그들을 집 앞에 데려다주고 안전을 위해 나는 그들이 집으로 올라갈 때까지 함께 있었다.유정철은 집 입구 구석에 있는 담배꽁초를 가리키며 말했다. “봐, 이 담배꽁초도 그 사람이 피운 거야.”“아저씨, 이건 손대지 마세요. 경찰이 오면 증거로 가져갈 거예요.”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유정철은 문을 열고 내가 들어가도록 했다. 나는 예의상 그렇게 들어갔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라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조금 미안했다.“지원아, 앉아. 내가 마실 거 준비해 줄게.” 유정철이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아저씨, 괜찮아요. 그냥 잠깐 얘기 좀 나눠요.” “안 돼, 기다려. 내가 너에게 직접 꿀 자몽차를 끓여줄게. 희연이가 정말 좋아했었거든. 내가 계속 끓여줬는데 아쉽게도 이제 마실 수 없게 됐네.” 유정철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유정철은 차를 준비하면서 신희선도 함께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마 신희선이 내게 무언가 말하는 걸 막으려 했던 것 같았다.그들이 부엌으로 들어간 후, 유정철이 말했다. “여보, 그 아이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 걔가 무서워할 거야. 진짜 우리 딸 아니야.”“그런데 왜 우리 딸이랑 그렇게 닮았지?” 신희선은 작은 목소리로 중
고개를 들자 손을 맞잡은 한 쌍의 노인 부부가 긴장과 불안이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경찰서 직원 일어나려던 순간 내가 먼저 일어나며 인사했다.“아저씨, 아줌마.”두사람은 유희연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신희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희연아...”“희연이가 아니야.” 유정철은 급히 아내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러자 신희선 얼굴에 있던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저씨, 아줌마, 뭘 신고하시려고요?”이때 사건 담당자가 다가왔다.“두 분, 신고하시려면 저를 따라오세요.”유정철과 신희선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며칠 전부터 계속 누군가가 우리 집 문을 부수고 다니며 우리가 순순히 하지 않으면 우리의 피를 뽑겠다고 위협했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사건 담당자를 향해 눈길을 돌렸고 그도 미간을 찌푸렸다.“그 사람이 누구죠? 아시나요? 혹시 오래된 앙숙이라도 있나요?”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고 유정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우리는 그 사람을 전혀 모릅니다.”“그 사람이 며칠 동안 괴롭혔나요?” “3, 4일 됐어요” 유정철이 신희선을 바라보았고 신희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형사님,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보호해 드릴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사를 위해 조금 협조해 주세요. 세부 사항을 확실히 알려주세요,” 사건 담당자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저와 함께 갑시다.”유정철은 나를 바라보며 마치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아저씨, 아줌마 먼저 가세요. 제가 다 처리하고 곧 가서 찾아뵐게요.”“그래. 그래.”유정철은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고 그는 분명히 내가 함께 가기를 원했다.사건 담당자는 그들을 다른 방으로 안내하며 동료에게 넘겼고 나는 나머지 서류를 처리한 후 그들을 만나러 갔다. 그들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반복해서 그들을 위협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조나연이 이 직책을 맡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박수를 치자 모두 따라 박수를 쳤다.조나연은 내 옆에 서서 사람들의 환호와 놀라운 시선 속에서 점점 더 자신감을 얻어가는 것이 느껴졌다.그녀는 오랫동안 억눌려 왔고 무수히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이제 드디어 정상에 오른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그녀가 느끼는 이 감정이 내가 원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숨겨왔던 분노를 발산하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 감정을 잘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녀가 그 분노를 뚫고 나오도록 해야만 나는 그녀를 내 수단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이제 조 매니저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앞에 세우며 그녀가 받을 경배와 존경을 모두 누리게 만들었다.조나연은 분명히 긴장했지만 야망이 컸고 내가 이미 그녀에게 해준 조언을 따라 차근차근 잘 해냈다.작은 인수인계 의식이 끝난 후, 나는 그녀를 매니저실로 안내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표 자리에 앉았고 그녀는 내 맞은편에 서 있었다.나는 조나연에게 짜릿함도 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그녀를 반복해서 자극하며 결국 그녀가 나를 미워할 정도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녀가 나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조나연, 이제 이 술집을 전적으로 너에게 맡길 거야. 할 수 있겠어? 안 되면 말해, 다른 사람을 찾아서 바꿀 수도 있어.” 나는 내 방식대로 그녀에게 압박을 주었다. 그녀는 이미 사람들 앞에서 말했으니 이제 물러설 수 없을 것이다.“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야? 내가 말을 취소하고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조나연이 내게 반문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지 않아. 네가 맡기로 했으니 내 원칙을 설명할게.”조나연은 꼿꼿이 내 앞에 서서, 마치 말을 잘 듣는 학생처럼 보였다. 예전의 그녀는 이렇게 겸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세상에서, 돈이야말로 사람에게 자신감을 주는 법이
‘조시언과 안리영 사이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네. 이런 건 놓칠 수 없지.’안리영은 나에게 숨김없이 자신과 구안석이 조시언에게 들킨 일에 대해 털어놨다.“오빠가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것도 삼촌 때문이야.”“하하.” 나는 웃으며 말했다.“구 교수님은 조시언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겠지? 그 사람은 네 작은삼촌인데.”“누가 알겠어, 남자들의 이기심과 소유욕이 강해서 내 주변에서 날아다니는 모기 한 마리도 신경 쓰는 경우가 많거든.”안리영은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그럼 그건 선배가 널 정말 사랑한다는 거지. 엄청 사랑한다는 증거야.”나는 안리영과 구안석이 공항에서 나눈 키스 장면을 떠올리며 말했다.사랑에서의 고통은 죽음으로 인한 이별만 있는 게 아니라, 살아서 서로를 떠나는 이별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안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또 그녀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그나저나, 우리 회사에서 바디 라이트 쇼를 준비 중인데 내가 찾은 남자 모델들이 해동에서 국내 최고 수준이라 연예인보다 훨씬 멋지거든. 눈이 확 트일 거야. 혹시 구경하러 올래?”“바디 라이트 쇼?”안리영이 내게 물었다.“그거, 벌거벗은 거야?”나는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그렇게 하고 싶긴 한데 정부에서 허락 안 해줄걸?”“윤지원, 너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안리영은 장난스럽게 나를 놀렸다.“짧은 인생 먹고 싶은거 먹고 놀고 싶은 걸 놀아야지. 남자는 쓰레기처럼 놀아도 되고 여자는 안돼?”내 말을 듣자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말 맞는 것 같아.”그러더니 웃으면서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윤지원, 이제 너 본색을 드러내는구나.”“내가 예전엔 그렇게 얌전했어?”안리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예전엔 강씨 가문에서 길러진 모범생 같았어. 지금 진짜 너 자신이 된 것 같아.”만약 내가 꽃이라면 예전에는 사람의 손길로 잘 다듬어진 꽃이었다면 지금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자란 야생화가 된 것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도 한동안 잡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래도 조금 나아진 후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간단히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공항으로 향했다.허진호가 시간이 촉박하다고 했는데 정말 딱 맞아떨어졌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는 이미 착륙해 있었다.나는 그가 보낸 정보와 사진을 확인하다가 곧바로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키는 180cm가 넘고 검은색 셔츠를 풀어 헤친 채 그 위에 같은 색의 조끼를 걸쳤으며 동일한 컬러의 슬랙스를 입었다. 게다가 거의 연예인 수준의 외모였다.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조시언 씨. 저는 해다 그룹의 윤지원입니다. 허 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생기셔서 제가 대신 마중을 나왔어요.”그는 내 시선을 마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시언입니다.”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내 손과 가볍게 악수했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수화물 찾아야 해서요.”“같이 가죠.”나는 그와 함께 수화물 찾는 곳으로 걸어갔고 그곳에서 안리영과 구안석을 마주쳤다.바닥에는 하나의 캐리어가 놓여 있었고 그걸 보자마자 나는 깨달았다.‘구 선배가 떠나는구나...’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손을 맞잡고 묵묵히 수화물 찾는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그 아련한 분위기만으로도 내 가슴이 괜스레 시큰거렸다.수화물 찾는 곳을 1미터 남겨두고 그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마침내, 구안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수화물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안리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구안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걸 알기에 굳이 말을 붙이지 않는 듯했다.“짐 부치고 올게.”구안석이 손을 놓으려는 순간 안리영이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까치발을 들더니 그에게 입을 맞췄다.구지호는 순간 놀랐지만 곧 캐리어를 손에서 놓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공항 한
“남자 모델? 아니, 윤지원 씨, 요즘 무슨 일 꾸미고 계신 거예요? 술집을 사더니 이제는 남자 모델 쇼까지 연다고요?”허진호는 내 말을 듣고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냥 재미로요.”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파악하려는 듯했다.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내가 구상한 계획을 설명했다.“우리 회사에서 조명 음악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잖아요. 거기에‘바디 라이트 쇼’ 를 추가하려고 해요. 남자 모델들이 조명을 의상처럼 입고 런웨이를 걷는 형식으로요.”“바디 라이트 쇼?”허진호는 말을 되풀이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와, 윤지원 씨 아이디어 하나는 기가 막히네요.”그 반응을 보자 나는 빙긋 웃으며 바로 응수했다.“허 대표님도 괜찮다고 보시는 거죠? 그럼 바로 진행해 주세요.”하지만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이게 시장에서 옷 한 벌 사 오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디자인도 해야 하고 제작 과정도 필요한데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나는 아무렇지 않게 두 손을 모아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허 대표님이 필요한 거잖아요?”그는 피식 웃으며 단칼에 거절했다.“그렇게 애교 부려도 안 돼요. 이건 현실적으로 힘들어요. 솔직히 진정우 씨가 여기 있었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네요.‘지금 내 심장을 후벼 파겠다는 건가?’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나가버렸다.“지원 씨! 잠깐만요!”허진호가 다급히 뒤에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헐레벌떡 따라와 내 앞을 막아섰다.“죄송해요. 괜히 농담했네요. 기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지원 씨가 진짜 하겠다면 제가 도울게요.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가능한 방향으로 알아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허진호가 진심으로 사과하자 나도 웃으며 말했다.“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허 대표님.”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쌓인 업무를 처리하려 했지만 책상 앞에 앉은 지 얼
강진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지원아, 네가 아직 진정우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이렇게 망가뜨리지는 마. 정말 외롭고 힘들다면 날 찾아오면 되잖아.”그의 눈빛은 깊고 표정은 진지했다. 그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조용히 말했다.“진혁 오빠, 저는 오빠랑 강유형이 갈등을 빚는 걸 원하지 않아요. 유형이가 저를 찾아왔어요...”“그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그는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손을 빼내려 했지만 억지로 참아내며 불안한 눈빛을 띄웠다.“오빠도 알잖아요. 부모님도 반대하실 거예요. 그분들도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하지만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난 이미 한 번 널 놓쳤어.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진 않을 거야. 설령 온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넌 내 사람이 될 거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집착과 고집은 너무나도 명확했다.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나는 손을 빼내어 테이블 아래에서 옷에 슬쩍 문질렀다.“하지만 나는 원하지 않아요.”그러자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정말 원하지 않는 거야? 아니면 그냥 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야?”나는 그를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가장 명확한 답변이 된다.강진혁은 몇 초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그래... 내가 너무 조급했나 보네. 네가 날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게.”그는 차분하게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내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지원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난 오랫동안 기다렸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모든 걸 내려놓고 날 온전히 받아들이는 날까지.”그가 말하는 '기다림' 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그가 내게 주는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감정이 불안과 공포로 변하는
조나연이 내 덫에 걸려들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차례였다. 하지만 술집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이곳은 정상 영업을 하고 있고 매출도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런 곳을 누가 쉽게 넘기겠는가?즉,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강씨 가문의 힘을 빌린다면 그럼 이 일은 아주 간단할 것이지만 지금 나는 강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고민 끝에, 나는 허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원 씨가 사장이 되고 싶으면 제 자리 넘겨줄까요?”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허진호가 얼마나 속세에 무심한 사람인지 다시금 실감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저 한테 사장 자리는 필요 없어요. 그냥 술 마실 때 돈 안 내고 마시고 싶을 뿐이에요.”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 돈으로 술을 사 마시면 다음 생까지 마셔도 못 마실걸요?”그는 농담을 던지면서도 진지하게 충고했다.“지원 씨, 충동하지 마세요. 술집을 사는 건 장난이 아니에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장난이 아닌데요. 술집 주인과 연락이 닿을 수 있는지만 알려줘요. 안 되면 다른 사람을 찾을 테니까.”내가 술집을 사려는 건 단순한 충동이 아니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하지만 허진호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용씨 가문을 조사하는 일은 알면 알수록 위험해지는 일이니까.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았어요. 제가 한 번 시도해 볼게요.”“고마워요, 허 대표님.”그는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잠이 오지 않는 두 번째 날이다. 사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심각한 불면증을 겪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불면증을 앓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그렇게 잠들지 못한 채, 나는 많은 생각을 했고 해야 할 일들도 정리했다.그중 하나는 강진혁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우아한 분위기의 레스토랑.강진혁은 내가 건넨 넥타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오늘이 내 생일도 아니고 특별한 날도 아닌데?”나는 그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