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가 왜 나를 오해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헛소문으로 퍼진 기사 때문이었지만 물론 이 일에는 내 잘못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단 한 번도 나에게 확인하지 않고 단지 기사 하나만으로 나를 판단했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내가 불편하다고 하면 지금 바로 돌아갈 거야?”“그래.” 그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이를 악물며 화를 삭였다. “진정우, 네가 이렇게 못된 놈일 줄은 정말 몰랐어.”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태도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내가 더 독한 말을 하려던 것도 막혀버렸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았다. 진정우는 나를 따라 들어왔지만 예전처럼 나와 가까이 앉지 않고 한 걸음 떨어진 거리를 유지했다.과거에는 내가 그와 조금만 거리를 두려고 해도 그는 나를 끌어안으며 무릎 위에 앉히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의 거리감이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의 이런 태도에 내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진짜로 나랑 헤어질 생각이야?”“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깊은 울림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건 화가 나서 한 말이야. 네가 나를 보러 오지 않아서.” 나는 억울함이 밀려와 목소리가 떨렸다.“나 보러 갔었어.” 그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근데 나는 몰랐잖아. 내가 깨어 있을 때 봤어야지.”나는 말을 이어가다 목이 메어 잠시 멈췄다.“진정우, 내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사람은 너야.”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정말 내가 맞아?” 그의 질문에 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기사가 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의심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내가 강유형을 구한 건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그는 그냥 한 생명이었을 뿐이야. 그날 그 자리에 강유형이
진정우는 늘 솔직한 사람이어서 감정을 숨기거나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진심 그대로였고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방금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단언한 것은 단순히 한두 번의 오해 때문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쌓여온 불안과 의심이 결국 이렇게 표출된 것이다.나는 진정우와 함께한 이후로, 강유형과의 과거가 우리 관계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항상 강유형과 거리를 두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우는 여전히 내가 강유형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감정은 단지 수혈 때문만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된 상황 속에서 점점 커져 온 것이 분명했다.“진정우, 결국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널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널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네.”“정말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겠지.” 진정우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상처가 담겨 있었다.나는 무력하게 눈을 감았다. “그건 화가 나서 한 말이었잖아. 내가 설명했잖아.”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넌 그걸 바로 받아들였어. 진정우, 나도 이제 네가 처음부터 날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야?”‘억지로 죄를 만들려면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상대를 비난하려는 의도만 있으면 어떤 이유든 만들 수 있는 법이었다.이때 진정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네.”그의 말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까지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반응하다니 정말 화가 났다. 나는 그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 헤어지는 게 맞다? 결국 네가 그렇게 원했던 거구나.”진정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이 움직이는 걸 보니 무언가 말하고 싶어도 멈춘 듯했다. 나는 그의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진정우의 뒷모습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수없이 봐왔던 그 뒷모습이 이제는 나와 완전히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눈물은 금세 마르고 슬픔 대신 분노가 차올랐다. 진정우가 단순한 오해로 나를 버렸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도 결국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자신이 성공한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을 하찮게 여긴다는 점에서 말이다.진정우가 나를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다면 나 역시 그에게 미련을 두고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강진혁과 강유형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내가 목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때였다. 둘 다 진정우와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메시지였지만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한들 위로와 자책의 말만 돌아올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나는 일부러 메시지를 보지 않은 척하며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리영의 메시지에는 답했다. 그녀는 요 며칠간 구 교수를 만나러 간다고 연락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처음 메시지를 보냈다.[드디어 구 교수님의 품에서 깨어난 거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기억은 하는 거지?] 나는 은근한 불만과 조롱을 담아 답장을 보냈고 곧바로 그녀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 그녀의 행복 가득한 얼굴이 나타났다.“내가 네 연애를 방해할까 봐 일부러 연락 안 한 거지.”“거짓말하지 마. 너 구 교수님이랑 달콤하게 지내느라 나를 까맣게 잊은 거겠지.” 나는 그녀를 놀리며 말했다. 안리영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하는 제스처를 했다.“너도 알잖아. 그런데 너 요 며칠 어떻게 지냈어? 정우 씨랑 달달하게 지내면서 벌써 아기라도 계획한 거야?”이 여자는 정말 의사답게 한마디로 핵심을 찌른다. 하지만 그녀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진정우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내가 말이 없자 안리영은 바로 눈치를 챘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나 진정우랑 헤어졌어.”“뭐?” 그녀의 표정이
진정우가 정말로 후회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의 단호했던 뒷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픔은 점점 커져서, 결국 그날 밤 나는 뒤척이며 한숨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강유형과 헤어졌을 때조차 이렇게 괴롭진 않았던 것 같았다. 밤새도록 마음을 다잡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준비를 마친 뒤, 나는 회사를 향했다. 회사에 가면 진정우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나와 달리 평온한 얼굴로 있을까 궁금했다.잠 못 잔 흔적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공들여 화장을 하고 회사로 갔다. 그리고 마침 로비에서 허진호와 마주쳤다. 그는 늘 그렇듯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오늘 아침도 빛나시네요!”그의 넘치는 열정이 내게 닿자, 마음 한구석에서 묵직한 피로가 밀려왔다. 꼭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도 된 듯 반갑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살짝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허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런데 혼자 오셨네요? 가족분은 안 보이는데요?”그가 툭 던진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찔렀다. 어젯밤부터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가족이요? 허 대표님이 새로 만들어 주시는 건가요?”내 말에 허진호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허허 웃으며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가리켰다.“저기 오시네요. 정우 씨 바로 오고 있잖아요.”진정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간단한 티셔츠와 작업복 차림이었다. 비록 그는 이제 진가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은 변함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 회사도 그의 소유였다.그를 바라보며 왜 나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는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를 믿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그의 부를 탐낼까 걱정돼서? 아니면 나를 그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생각이 꼬리를 물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허진호는 사람을 꾸짖거나 대놓고 나무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신 돌려서 넌지시 지적하면서 상대가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덜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그는 항상 느긋하고 농담을 섞어가며 회사를 운영했지만 직원들은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의 밑에서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일을 조금이라도 늦게 하면 허 대표님께 죄송한 기분이 들어서요.”나도 일부러 분위기를 맞추며 말했다. 그러자 허진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제가 언제 압박을 줬다고 그래요. 일은 매일 쌓이고 또 쌓이는 건데 굳이 서두를 필요 없잖아요.”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상사는 허진호가 처음이었다.그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나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앞으로는 조금 더 느긋하게 해볼게요.”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요즘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프세요?”솔직히 말하면 허진호와 나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를 대했고 나는 그와의 거리감을 유지하려 애썼다.“괜찮습니다. 몸 상태는 좋아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좋기는 무슨. 얼굴이 창백해서 뱀파이어한테 피 다 빨린 사람 같아요.”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옆 서랍을 열어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며칠 전에 고객이 준 건 영양제예요. 이거 드시고 몸 좀 챙기세요.”나는 상자를 받아서 들며 살펴봤다.“이거 여성 영양제 같은데요? 허 대표님한테 왜 이런 걸 준 거죠?”허진호는 난처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하하, 그러게요. 아마 제가 여자 친구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 같아요. 근데 알다시피 저는 외로운 솔로잖아요.”그의 너스레에 웃음이 났지만 그가 진심으로 챙겨주는 것이 고마워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감사합니다, 허 대표님. 나중에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허진호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약
정말 나쁜 남자! 나를 떠나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이런 행동이라니. 속마음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안리영의 말처럼 나도 한 번 그를 제대로 흔들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허 대표님,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내일 저녁 먹어요.”나는 일부러 허진호에게 내일 저녁 약속을 제안했다. 허진호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좋아요! 정우 씨도 같이하시죠?”하지만 진정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저는 바빠서 어렵습니다.”허진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찰나, 내가 먼저 끊었다.“허 대표님, 내일 제가 정말 특별한 곳으로 모실게요. 아마 허 대표님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일 거예요.”허진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정말요? 제가 못 가본 곳이라니. 그런데 정우 씨는 가보셨나요?”그가 굳이 진정우를 언급하는 이유는 뻔했다. 허진호는 이미 진정우가 진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자신이 불똥을 맞을까 두려운 눈치였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진정우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 발짝에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허진호는 진정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윤 부장님, 내일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요?”그는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진정우를 따라갔다.나는 피식 웃었고 아침부터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지태와 영상 통화를 했다. 하지만 화면이 켜지자마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태야, 그만 통화해. 우리 다 기다리고 있잖아.”“지원이야.”신지태가 내 이름을 말하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뚝 끊겼고 신지태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네 얘기 들었어.”나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 괜찮아.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서도 잘 지냈고.”“정말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고생했구나.”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안함이 가득했다.“그렇게 말하면 내가 남이 되는 것
지난번 신지태의 경기를 진정우가 녹화해 보여주긴 했지만 현장에서 직접 본 적은 없었다.“좋아, 이번엔 제일 좋은 자리로 준비해 둘게.”신지태가 웃으며 말했다.“응원할게, 오빠. 힘내.”나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그를 응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너도 건강 잘 챙겨.”“알았어. 이제 바로 밥 먹고 푹 잘 거야.”나도 졸음이 밀려와 하품을 참으며 대답했다. 어젯밤 한숨도 제대로 못 잤던 터라 몸이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이제야 겨우 눈이 감기려는 찰나였다.“어서 쉬어. 그리고 진정우한테 맛있는 거 좀 해달라고 해.”신지태는 이렇게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옆으로 던지고 부엌 쪽을 슬쩍 바라봤더니 어둠 속에 고요함만이 감돌았다.솔직히 진정우가 음식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그가 다시 내게 돌아와야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언제까지 고집을 부리며 버틸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잡념에 빠진 채 잠에 들었고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잤다.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들었던 나는 눈 부신 햇살에 눈을 떴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이 여전히 피곤했고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자마자 온몸이 쑤시는 통증에 “아야!” 하고 외쳤다.“정우야, 나 아파. 좀 주물러 줘.”무심코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내 상황을 깨달은 나는 다시 그를 불렀다.“정우...”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멍해졌다. 진정우는 이미 내 곁에 없는데 그를 부르는 내가 참 우스웠다.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 예전에 강유형에게 익숙했던 내가 이제는 진정우에게 익숙해졌다. 그들이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시간이 지나, 이제는 그들이 없는 현실을 또다시 받아들여야 했다.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전화를 받으니 강진혁이었다.그의 문자에 답하지 않자 아예 전화를 건 것이었다. 안 받으면 직접 찾아올 것 같아서 나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
“윤 부장님! 오셨네요! 오늘은 안 올 줄 알았어요.”회사에 도착해 아침 식사가 혹시 쓰레기통에 버려졌는지 확인하려던 참에 허진호가 봉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여기요, 아침 식사!”그의 말에 모든 상황이 이해됐고 아침 식사가 내 책상에 없는 이유는 이제 분명했다.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허진호가 이유 없이 나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늘 새벽 다섯 시에 정우 씨가 불러서 회사에 와서 일했거든요. 너무 배가 고파서 윤 부장님 책상 위에 있던 아침을 먹었어요. 그래서 이건 대신 사 온 거예요.”그의 거짓말은 너무 어설펐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 일로 힘을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먹었어요.”사실 그날 아침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요즘은 음식을 보면 식욕이 전혀 생기지 않고 억지로 먹으려고 하면 오히려 속이 메스꺼웠다.“에이, 그럴 리가요. 설마 제가 산 음식이 맛없어서 그런 건 아니겠죠? 이건 믿을 만해요. 직접 맞춤 제작한 거라니까요.”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요? 그럼 한번 볼게요. 입맛에 맞으면 조금 먹어볼게요.”나는 포장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야채와 새우가 든 계란찜, 홍삼이 들어간 대추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샐러드가 담겨 있었다.이 조합은 분명 누군가가 내 취향을 잘 알고 만든 것이었다.“어때요?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구성이라니까요.”허진호가 말을 이으며 식기를 꺼내려 하자, 나는 포장을 탁 닫으며 말했다.“별로네요. 보기만 해도 입맛이 없어지는걸요.”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이거 다 윤 부장님이 좋아하는 음식들 아닌가요? 왜 오늘은...”“허 대표님은 제가 이걸 좋아한다고 어떻게 아세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허진호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그게, 그, 전에 부장님이 말했잖아요..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어붙었고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하려 했다.하지만 상대는 강진혁이었고 그가 원하면 내가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지원아, 왜 다른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돼? 나도 그들만큼 널 사랑하는데.”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고 마치 집착과 분노가 뒤섞인 듯한 말투였다.나는 힘을 다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단단하게 붙잡힌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그의 입술이 내 이마를 스치고 뺨을 따라 내려왔다.그리고 내 목덜미로 파고들려는 순간 갑자기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팔이 강하게 밀려났다.“강진혁 씨, 남녀 사이의 일은 서로의 동의가 있어야 즐거운 법이죠. 억지로 하면 재미없지 않겠어요?”배성재의 목소리는 진정우와 정말 달랐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더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배성재의 옷깃을 붙잡았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래도 놓지 않았다.배성재는 나와 강진혁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강진혁이 마셨던 술이 그의 정신을 흐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선을 넘은 건 단순한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강진혁은 강유형이 떠난 후, 자신에게 기회가 생길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그런데 뜻밖에도 진정우를 닮은 남자가 나타났다.강진혁은 한 번 죽였다고 생각한 진정우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자, 분명 더 초조해졌을 터였다.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넌 뭔데 나한테 훈계질이야?”분노로 가득 찬 시선이 배성재를 향했다. 하지만 배성재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명망 있는 집안 자제라도, 강요하는 건 좀 치사한 거 아닌가요?”배성재는 가볍게 웃으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그러나 그의 눈빛 속에는 싸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그렇지 않나요, 강진혁 씨?”강진혁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눈빛이 서서히 위험하게 변해갔다.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극단적으로 치닫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소매를 꼭
강진혁이 나에게 가졌던 인내심이야 지난 10년 동안 충분히 증명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더 흔들어 보는 게 나쁠 건 없었다.“미안해요, 오빠. 좀 일이 있어서 늦었어요.”나는 자리에 앉으며 적당히 가식적인 사과를 건넸다.“괜찮아. 네가 와준다면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그는 망설임 없이 이런 말을 내뱉는 사람이었다.솔직히 듣고 있자니 어색해서 나는 괜히 테이블 위의 식기를 정리하며 시선을 피했다.그가 직원을 불러 내게 메뉴를 고르라고 했지만 이미 배 속에는 배성재가 해준 미트볼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솔직히 한 입도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으니 적당히 간단한 메뉴만 골랐다.그런데 막상 음식이 나오고 보니 내가 시킨 것 외에도 다양한 요리가 가득 깔려 있었다.“오빠, 그냥 간단히 먹으면 되잖아요. 배만 채우면 되는 건데 이렇게 많이 시키면 남는 게 더 많을걸요?”나는 테이블 위의 요리를 가리키며 덧붙였다.“음식 하나하나 다 소중한 거예요.”“이건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조금씩만 맛봐. 못 먹으면 싸 가면 되니까.”그의 말이 현실적이라 딱히 반박할 수 없어 그저 수긍하며 젓가락을 들었다.“와인 한잔할래?”나는 순간, 저번에 술에 취한 척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때 나는 끝까지 취한 척을 밀어붙였고 모든 걸 모른 척할 수 있었다.그의 의도를 알기에, 더욱 태연한 척하며 답했다.“좋아요. 근데 저 또 취하면 오빠가 집까지 바래다줘야 해요.”“당연하지.”그는 웨이터를 불러 우리에게 와인을 따르게 했다.솔직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는 예상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끌었다.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나와 강유형이 항상 그를 뒷전으로 두었다는 이야기까지.그러다가 강유형의 이름이 나오자,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그가 피를 토하던 모습이 떠올랐다.그 피가 단순한 감정적인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몸 상태가 심각한 건지 모르겠지만.“오빠, 요즘 강유형 만난 적 있어요?”“아니.
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도깨비야? 어쩜 이렇게 소리 없이 다가올 수 있지?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혹시 내가 보내려던 메시지를 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이곳의 주인이기에 사진을 찍는 게 이상할 이유도 없고 보고 싶으면 볼 수도 있는 거다.나는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돌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늘 그랬듯,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응시했다.“조용히 오고 싶었어요.”조나연은 내 맞은편에 앉으며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바 분위기를 조금 바꿨어요. 손님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주고 싶어서요.”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좋네요. 확실히 신선한 느낌이에요. 대표님이 마음에 들어 한다면 다행이죠.”그녀는 손짓해 직원에게 음료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당연히 만족해야죠. 내가 직접 뽑은 사람이니까. 역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네요. 역시 능력 있어요.”말을 마치고 나는 그녀의 차림을 살폈다. 다른 직원들과 달리 정장이 아닌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반짝이는 시스루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술집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려 묘하게 옛 상하이 영화 속 여주인공 같은 느낌이었다.문득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그때는 하얗고 단정한 인상의 여자였는데 이렇게까지 변할 줄이야.나는 시선을 그녀의 몸매 위아래로 훑으며 피식 웃었다.“내가 말하는 ‘능력’은 그쪽이 아니라 머릿속 능력이요.”진심으로 칭찬하는 말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아마 비꼬는 걸로 들었는지 그녀는 바로 반격했다.“저도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에요. 만약 지원 씨가 직접 운영했다면 똑같이 했을걸요?”그녀의 말투는 단호했다. 이건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나였다면 이렇게 하진 않았을 거다. 다만 조나연은 이미 내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굳이 반박할 이유도 없다.그런데 마치 본인이 주도권을 쥔 듯 행동하는 모습이 마음에 안
“그래서 결국 뭘 하려는 거예요?”한참을 빙빙 돌리던 내 말을 끊고 배성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나는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 더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내 친구가 드래곤킹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고 가능하면 안전하게 보호해 줄 사람도 필요해요.”잠시 말을 멈추고 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덧붙였다.“이름은... 이소희예요.”배성재는 놀란 건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드래곤킹에서 몇 개월이나 있었고 그렇다면 그곳에서 누가 출입하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리 없었다.“좋아요. 도와줄게요. 하지만 당신은 직접 나서지 마요. 위험한 곳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요.”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면 위험하다? 그렇다면 이미 이소희는 그 위험 속에 있다는 뜻 아닌가?’그녀가 이미 어떤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들었어요?”내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배성재가 다시 한번 물었다.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되물었다.“성재 씨,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예요?”사실 내가 정말로 듣고 싶은 대답은 따로 있었다.“나는 진정우니까. 널 사랑하니까.”하지만 그는 침묵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저녁에 강진혁이랑 저녁 먹기로 했어요.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연락할 테니까, 바로 데리러 와 줄 수 있죠?”강진혁이 이상한 짓을 할까 봐 배성재에게 미리 알리는 거였다. 저번에는 취한척하며 위험한 상황을 모면했는데 이번에는 다른 상황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왜 그런 자리에 가려는 건데요?”“왜긴요, 생각 좀 해봐요.”저녁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소희에게 보낸 연락은 여전히 닿지 않았고 어떤 답장도 없었다.만약 그녀가 드래곤킹에 있다면 집에는 아무도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때, 강진혁에게서 저녁 장소가 문자로 도착했다.그런데 우연인지 아닌지 호텔 레스토랑이
“콜록!”전화기 너머에서 배성재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내 갑작스러운 애교 섞인 목소리가 꽤 당황스러웠나 보다.그는 곧바로 물었다.“무슨 부탁이죠?”나는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드래곤킹에는 남자 모델뿐만 아니라 여자 모델도 있죠? 혹시 그쪽이랑 친하세요?”이제 내가 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 확신한 이상, 굳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도 없었다.생각해 보면 참 우습다. 그동안 그렇게 떠보고 시험해 보려고 온갖 수를 썼지만 결국 미트볼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갑자기 왜 그런 걸 묻죠?”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 조심스럽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팔짱을 끼고 일부러 더 장난스러운 톤으로 말했다.“저도 한 번 여자 모델이 되어 보고 싶어서요.”“뭐라고요?”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높아졌다.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했다.“드래곤킹에서 여자 모델로 일해 보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성재 씨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그건 안 됩니다.”이번엔 단칼에 잘라 말했다. 거절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왜요? 제가 못생겨서? 아니면 몸매가 별로라서?”“그런 문제가 아닙니다.”그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곧이어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그곳은 당신이 갈 만한 곳이 아닙니다.”‘좋아, 바로 이 반응. 이제야 진짜 진정우다운 모습이 나오는군.’“왜요? 성재 씨도 거기서 일하셨잖아요?”내가 일부러 짓궂게 되묻자, 그는 순간 말을 잃었다.그리고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낮게 말했다.“나는 당신이 그곳에 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도 없어요.”나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그래, 바로 이거야. 이 반응이야.’분명 그는 자신이 진정우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를 통제하려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그럼 내 방법대로 알아서 갈게요.”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가 날 불러 세웠다.“잠깐. 진짜 이유
내 아버지를 언급하자 강진혁은 순간 굳어졌다.표정이 단단하게 굳은 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연한 반응이었다.내 부모님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가 직접 만든 비극이었으니까.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배성재가 만든 완자를 바라보았다.나는 차분한 척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제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그 맛은 다시 없을 거야.”하지만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었고 나는 이미 확신했다.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그런데도 그가 계속 자신을 배성재라고 주장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괜히 흔들리지 말고 그의 계획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었다.강진혁은 한숨을 내쉬듯 낮게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 일은 정말 미안해.”하지만 그 말은 더럽게도 위선적으로 들렸다.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애써 눌러가며 나는 덤덤하게 받아쳤다.“그 일은 오빠랑 상관없잖아요.”강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넌 참 착한 애야.”‘착해? 아니, 바보였겠지.’한때는 용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내가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단 1%도 없다는 걸 말이다.나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조용히 단호박 수프를 떠먹었다.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솔직히 말해 배성재의 요리 실력은 꽤 수준급이었다.심지어 예전 진정우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그동안 숨어서 요리 연습이라도 했나? 나중에 진짜 정체를 밝히면 꼭 물어봐야겠네.’“이거 맛있네요. 잘 만들었어요.”내가 무심하게 던진 칭찬에 강진혁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저녁 약속 있어?”그는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없어요. 그냥 한 말이에요.”나는 무심히 단호박 수프를 한 모금 마셨고 그 순간 강진혁의 시선은 더욱 깊어졌다.그러더니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그럼 오늘 저녁에는 나랑 같
배성재는 정말 겁도 없었다.강진혁이 나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도전장을 내밀다니...나는 그의 이런 태도가 예상 밖이었지만 지금 내게 더 중요한 건 이소희였다.그녀가 정말 드래곤킹에 있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나는 고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요.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요.”배성재는 별다른 아쉬운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섰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료들을 마주쳤는지 다시 한 번 진 팀장님이라 불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던 강진혁이 문득 내게 물었다.“저 사람... 진정우랑 정말 많이 닮지 않았어?”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만약 이 자리에서 안 닮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그래서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답했다.“모르겠어요. 그래서 더 시험해 봐야죠.”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항상 나한테 맛있는 걸 챙겨줬어요. 그래서 저도 한 번 성재 씨의 요리를 경험해 보려고요.”이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강진혁에게 보내는 신호였다.내가 배성재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는 신호였다.나는 아직 강진혁이 배성재를 위험 요소로 인식하지 않길 바랐다.적어도 지금은 배성재가 그의 타겟이 되어서는 안 된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그럼 결과는 나왔어?”우리는 이미 사무실로 들어와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락을 열었다.그 안에는 예상했던 두 가지 요리 외에도 만두와 호박죽까지 곁들여져 있었다.솔직히 말해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당길 정도였다.강진혁도 한마디 덧붙였다.“보아하니 요리 실력이 제법인데. 드래곤킹에서 남자 모델로 있기엔 아까운 재능이네. 그냥 식당을 차리는 게 낫겠어.”나는 의미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았을 뿐이에요.”나는 강진혁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그런 태도조차 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관심과 걱정이라기보다 그저 나를 붙잡기 위한 수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사랑이 식으면 그의 모든 행동이 불편하게만 보인다더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그래도 물이라도 좀 마셔.”강진혁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권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그렇게 화장실을 나와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그리고 곧, 회사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어? 진 팀장님!”“오랜만이에요! 드디어 복귀하신 거예요?”“우린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요!”여러 직원이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반가워하는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 배성재라는 것이었다.배성재는 아무런 반응 없이 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그렇게 조용히 걸어오더니 나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그 순간, 내 옆에 있던 강진혁의 기운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나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나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그가 진정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계속 착각하도록 놔두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괜한 오해가 쌓이면 나중에 정리하기가 더 골치 아파진다.배성재는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하게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상자를 내게 건넸다.“점심 가져왔어요.”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사실 나는 아침도 못 먹고 나와서 속이 비어 있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책임감이 꽤 강하네요?”그러면서 슬쩍 강진혁을 향해 돌아보며 덧붙였다.“오빠, 성재 씨 요리 실력 한 번도 안 맛봤죠? 진 팀장님보다는 아주 약간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꽤 괜찮아요.”내 말이 끝나기가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강진혁은 집요하게 내 반응을 살폈다.나는 짧게 웃으며 허진호에게 집중하듯 말했다.“전 허 대표님이 빨리 회복해서 출근하셨으면 좋겠어요. 출근 도장 찍는 모습 못 보니 너무 심심하네요.”그렇게 나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전화를 끊었다.강진혁은 이미 내 자리까지 들어와 있었고 가져온 꽃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오랜만에 그렇게 밝게 웃는 거 본 것 같은데.” 나는 자연스럽게 이유를 만들어냈다.“허 대표님이 여자 친구한테 얼굴 할퀴었다고 투덜대는데 그게 너무 웃겨서요.”강진혁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혹시 유흥업소 간 거 때문에 그런 거야?”그 말에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강진혁이 허진호를 봤고 허진호가 본 사람이 정말 이소희라면 강진혁도 그녀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리고 이소희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이 바로 강진혁이었다는 내 의심이 맞다면...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역시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네요. 그런 곳은 꼭 가봐야 속이 시원해요?”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난 일 때문에 갔어.”“허 팀장님도 똑같이 말하던데요. 근데 여자 친구가 안 믿고 난리를 쳤대요.”나는 꽃을 들어 올려 코끝에 가져가 향을 맡으며 시선을 피했다.향은 좋았지만 지금 내 기분과는 정반대였다.그러다 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어제 드래곤킹에서 좀 난처한 일 겪었다며?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그 말을 듣자마자 등골이 싸늘해졌다.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묻는 걸까?그가 배후에 숨어져 있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면 정말 그의 걱정 어린 태도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주범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가 연기를 한다면 나도 맞춰줘야 했다.아직은 그를 자극할 때가 아니니까.그래서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직접 해결했어요. 굳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