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가 왜 나를 오해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헛소문으로 퍼진 기사 때문이었지만 물론 이 일에는 내 잘못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단 한 번도 나에게 확인하지 않고 단지 기사 하나만으로 나를 판단했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내가 불편하다고 하면 지금 바로 돌아갈 거야?”“그래.” 그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이를 악물며 화를 삭였다. “진정우, 네가 이렇게 못된 놈일 줄은 정말 몰랐어.”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태도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내가 더 독한 말을 하려던 것도 막혀버렸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았다. 진정우는 나를 따라 들어왔지만 예전처럼 나와 가까이 앉지 않고 한 걸음 떨어진 거리를 유지했다.과거에는 내가 그와 조금만 거리를 두려고 해도 그는 나를 끌어안으며 무릎 위에 앉히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의 거리감이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의 이런 태도에 내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진짜로 나랑 헤어질 생각이야?”“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깊은 울림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건 화가 나서 한 말이야. 네가 나를 보러 오지 않아서.” 나는 억울함이 밀려와 목소리가 떨렸다.“나 보러 갔었어.” 그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근데 나는 몰랐잖아. 내가 깨어 있을 때 봤어야지.”나는 말을 이어가다 목이 메어 잠시 멈췄다.“진정우, 내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사람은 너야.”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정말 내가 맞아?” 그의 질문에 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기사가 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의심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내가 강유형을 구한 건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그는 그냥 한 생명이었을 뿐이야. 그날 그 자리에 강유형이
진정우는 늘 솔직한 사람이어서 감정을 숨기거나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진심 그대로였고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방금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단언한 것은 단순히 한두 번의 오해 때문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쌓여온 불안과 의심이 결국 이렇게 표출된 것이다.나는 진정우와 함께한 이후로, 강유형과의 과거가 우리 관계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항상 강유형과 거리를 두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우는 여전히 내가 강유형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감정은 단지 수혈 때문만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된 상황 속에서 점점 커져 온 것이 분명했다.“진정우, 결국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널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널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네.”“정말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겠지.” 진정우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상처가 담겨 있었다.나는 무력하게 눈을 감았다. “그건 화가 나서 한 말이었잖아. 내가 설명했잖아.”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넌 그걸 바로 받아들였어. 진정우, 나도 이제 네가 처음부터 날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야?”‘억지로 죄를 만들려면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상대를 비난하려는 의도만 있으면 어떤 이유든 만들 수 있는 법이었다.이때 진정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네.”그의 말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까지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반응하다니 정말 화가 났다. 나는 그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 헤어지는 게 맞다? 결국 네가 그렇게 원했던 거구나.”진정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이 움직이는 걸 보니 무언가 말하고 싶어도 멈춘 듯했다. 나는 그의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진정우의 뒷모습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수없이 봐왔던 그 뒷모습이 이제는 나와 완전히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눈물은 금세 마르고 슬픔 대신 분노가 차올랐다. 진정우가 단순한 오해로 나를 버렸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도 결국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자신이 성공한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을 하찮게 여긴다는 점에서 말이다.진정우가 나를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다면 나 역시 그에게 미련을 두고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강진혁과 강유형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내가 목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때였다. 둘 다 진정우와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메시지였지만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한들 위로와 자책의 말만 돌아올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나는 일부러 메시지를 보지 않은 척하며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리영의 메시지에는 답했다. 그녀는 요 며칠간 구 교수를 만나러 간다고 연락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처음 메시지를 보냈다.[드디어 구 교수님의 품에서 깨어난 거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기억은 하는 거지?] 나는 은근한 불만과 조롱을 담아 답장을 보냈고 곧바로 그녀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 그녀의 행복 가득한 얼굴이 나타났다.“내가 네 연애를 방해할까 봐 일부러 연락 안 한 거지.”“거짓말하지 마. 너 구 교수님이랑 달콤하게 지내느라 나를 까맣게 잊은 거겠지.” 나는 그녀를 놀리며 말했다. 안리영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하는 제스처를 했다.“너도 알잖아. 그런데 너 요 며칠 어떻게 지냈어? 정우 씨랑 달달하게 지내면서 벌써 아기라도 계획한 거야?”이 여자는 정말 의사답게 한마디로 핵심을 찌른다. 하지만 그녀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진정우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내가 말이 없자 안리영은 바로 눈치를 챘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나 진정우랑 헤어졌어.”“뭐?” 그녀의 표정이
진정우가 정말로 후회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의 단호했던 뒷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픔은 점점 커져서, 결국 그날 밤 나는 뒤척이며 한숨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강유형과 헤어졌을 때조차 이렇게 괴롭진 않았던 것 같았다. 밤새도록 마음을 다잡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준비를 마친 뒤, 나는 회사를 향했다. 회사에 가면 진정우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나와 달리 평온한 얼굴로 있을까 궁금했다.잠 못 잔 흔적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공들여 화장을 하고 회사로 갔다. 그리고 마침 로비에서 허진호와 마주쳤다. 그는 늘 그렇듯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오늘 아침도 빛나시네요!”그의 넘치는 열정이 내게 닿자, 마음 한구석에서 묵직한 피로가 밀려왔다. 꼭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도 된 듯 반갑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살짝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허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런데 혼자 오셨네요? 가족분은 안 보이는데요?”그가 툭 던진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찔렀다. 어젯밤부터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가족이요? 허 대표님이 새로 만들어 주시는 건가요?”내 말에 허진호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허허 웃으며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가리켰다.“저기 오시네요. 정우 씨 바로 오고 있잖아요.”진정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간단한 티셔츠와 작업복 차림이었다. 비록 그는 이제 진가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은 변함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 회사도 그의 소유였다.그를 바라보며 왜 나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는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를 믿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그의 부를 탐낼까 걱정돼서? 아니면 나를 그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생각이 꼬리를 물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허진호는 사람을 꾸짖거나 대놓고 나무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신 돌려서 넌지시 지적하면서 상대가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덜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그는 항상 느긋하고 농담을 섞어가며 회사를 운영했지만 직원들은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의 밑에서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일을 조금이라도 늦게 하면 허 대표님께 죄송한 기분이 들어서요.”나도 일부러 분위기를 맞추며 말했다. 그러자 허진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제가 언제 압박을 줬다고 그래요. 일은 매일 쌓이고 또 쌓이는 건데 굳이 서두를 필요 없잖아요.”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상사는 허진호가 처음이었다.그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나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앞으로는 조금 더 느긋하게 해볼게요.”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요즘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프세요?”솔직히 말하면 허진호와 나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를 대했고 나는 그와의 거리감을 유지하려 애썼다.“괜찮습니다. 몸 상태는 좋아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좋기는 무슨. 얼굴이 창백해서 뱀파이어한테 피 다 빨린 사람 같아요.”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옆 서랍을 열어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며칠 전에 고객이 준 건 영양제예요. 이거 드시고 몸 좀 챙기세요.”나는 상자를 받아서 들며 살펴봤다.“이거 여성 영양제 같은데요? 허 대표님한테 왜 이런 걸 준 거죠?”허진호는 난처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하하, 그러게요. 아마 제가 여자 친구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 같아요. 근데 알다시피 저는 외로운 솔로잖아요.”그의 너스레에 웃음이 났지만 그가 진심으로 챙겨주는 것이 고마워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감사합니다, 허 대표님. 나중에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허진호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약
정말 나쁜 남자! 나를 떠나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이런 행동이라니. 속마음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안리영의 말처럼 나도 한 번 그를 제대로 흔들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허 대표님,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내일 저녁 먹어요.”나는 일부러 허진호에게 내일 저녁 약속을 제안했다. 허진호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좋아요! 정우 씨도 같이하시죠?”하지만 진정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저는 바빠서 어렵습니다.”허진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찰나, 내가 먼저 끊었다.“허 대표님, 내일 제가 정말 특별한 곳으로 모실게요. 아마 허 대표님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일 거예요.”허진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정말요? 제가 못 가본 곳이라니. 그런데 정우 씨는 가보셨나요?”그가 굳이 진정우를 언급하는 이유는 뻔했다. 허진호는 이미 진정우가 진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자신이 불똥을 맞을까 두려운 눈치였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진정우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 발짝에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허진호는 진정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윤 부장님, 내일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요?”그는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진정우를 따라갔다.나는 피식 웃었고 아침부터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지태와 영상 통화를 했다. 하지만 화면이 켜지자마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태야, 그만 통화해. 우리 다 기다리고 있잖아.”“지원이야.”신지태가 내 이름을 말하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뚝 끊겼고 신지태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네 얘기 들었어.”나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 괜찮아.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서도 잘 지냈고.”“정말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고생했구나.”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안함이 가득했다.“그렇게 말하면 내가 남이 되는 것
지난번 신지태의 경기를 진정우가 녹화해 보여주긴 했지만 현장에서 직접 본 적은 없었다.“좋아, 이번엔 제일 좋은 자리로 준비해 둘게.”신지태가 웃으며 말했다.“응원할게, 오빠. 힘내.”나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그를 응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너도 건강 잘 챙겨.”“알았어. 이제 바로 밥 먹고 푹 잘 거야.”나도 졸음이 밀려와 하품을 참으며 대답했다. 어젯밤 한숨도 제대로 못 잤던 터라 몸이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이제야 겨우 눈이 감기려는 찰나였다.“어서 쉬어. 그리고 진정우한테 맛있는 거 좀 해달라고 해.”신지태는 이렇게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옆으로 던지고 부엌 쪽을 슬쩍 바라봤더니 어둠 속에 고요함만이 감돌았다.솔직히 진정우가 음식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그가 다시 내게 돌아와야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언제까지 고집을 부리며 버틸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잡념에 빠진 채 잠에 들었고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잤다.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들었던 나는 눈 부신 햇살에 눈을 떴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이 여전히 피곤했고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자마자 온몸이 쑤시는 통증에 “아야!” 하고 외쳤다.“정우야, 나 아파. 좀 주물러 줘.”무심코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내 상황을 깨달은 나는 다시 그를 불렀다.“정우...”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멍해졌다. 진정우는 이미 내 곁에 없는데 그를 부르는 내가 참 우스웠다.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 예전에 강유형에게 익숙했던 내가 이제는 진정우에게 익숙해졌다. 그들이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시간이 지나, 이제는 그들이 없는 현실을 또다시 받아들여야 했다.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전화를 받으니 강진혁이었다.그의 문자에 답하지 않자 아예 전화를 건 것이었다. 안 받으면 직접 찾아올 것 같아서 나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
“윤 부장님! 오셨네요! 오늘은 안 올 줄 알았어요.”회사에 도착해 아침 식사가 혹시 쓰레기통에 버려졌는지 확인하려던 참에 허진호가 봉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여기요, 아침 식사!”그의 말에 모든 상황이 이해됐고 아침 식사가 내 책상에 없는 이유는 이제 분명했다.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허진호가 이유 없이 나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늘 새벽 다섯 시에 정우 씨가 불러서 회사에 와서 일했거든요. 너무 배가 고파서 윤 부장님 책상 위에 있던 아침을 먹었어요. 그래서 이건 대신 사 온 거예요.”그의 거짓말은 너무 어설펐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 일로 힘을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먹었어요.”사실 그날 아침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요즘은 음식을 보면 식욕이 전혀 생기지 않고 억지로 먹으려고 하면 오히려 속이 메스꺼웠다.“에이, 그럴 리가요. 설마 제가 산 음식이 맛없어서 그런 건 아니겠죠? 이건 믿을 만해요. 직접 맞춤 제작한 거라니까요.”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요? 그럼 한번 볼게요. 입맛에 맞으면 조금 먹어볼게요.”나는 포장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야채와 새우가 든 계란찜, 홍삼이 들어간 대추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샐러드가 담겨 있었다.이 조합은 분명 누군가가 내 취향을 잘 알고 만든 것이었다.“어때요?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구성이라니까요.”허진호가 말을 이으며 식기를 꺼내려 하자, 나는 포장을 탁 닫으며 말했다.“별로네요. 보기만 해도 입맛이 없어지는걸요.”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이거 다 윤 부장님이 좋아하는 음식들 아닌가요? 왜 오늘은...”“허 대표님은 제가 이걸 좋아한다고 어떻게 아세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허진호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그게, 그, 전에 부장님이 말했잖아요..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