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진정우의 뒷모습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수없이 봐왔던 그 뒷모습이 이제는 나와 완전히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눈물은 금세 마르고 슬픔 대신 분노가 차올랐다. 진정우가 단순한 오해로 나를 버렸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도 결국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자신이 성공한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을 하찮게 여긴다는 점에서 말이다.진정우가 나를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다면 나 역시 그에게 미련을 두고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강진혁과 강유형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내가 목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때였다. 둘 다 진정우와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메시지였지만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한들 위로와 자책의 말만 돌아올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나는 일부러 메시지를 보지 않은 척하며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리영의 메시지에는 답했다. 그녀는 요 며칠간 구 교수를 만나러 간다고 연락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처음 메시지를 보냈다.[드디어 구 교수님의 품에서 깨어난 거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기억은 하는 거지?] 나는 은근한 불만과 조롱을 담아 답장을 보냈고 곧바로 그녀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 그녀의 행복 가득한 얼굴이 나타났다.“내가 네 연애를 방해할까 봐 일부러 연락 안 한 거지.”“거짓말하지 마. 너 구 교수님이랑 달콤하게 지내느라 나를 까맣게 잊은 거겠지.” 나는 그녀를 놀리며 말했다. 안리영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하는 제스처를 했다.“너도 알잖아. 그런데 너 요 며칠 어떻게 지냈어? 정우 씨랑 달달하게 지내면서 벌써 아기라도 계획한 거야?”이 여자는 정말 의사답게 한마디로 핵심을 찌른다. 하지만 그녀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진정우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내가 말이 없자 안리영은 바로 눈치를 챘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나 진정우랑 헤어졌어.”“뭐?” 그녀의 표정이
진정우가 정말로 후회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의 단호했던 뒷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픔은 점점 커져서, 결국 그날 밤 나는 뒤척이며 한숨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강유형과 헤어졌을 때조차 이렇게 괴롭진 않았던 것 같았다. 밤새도록 마음을 다잡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준비를 마친 뒤, 나는 회사를 향했다. 회사에 가면 진정우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나와 달리 평온한 얼굴로 있을까 궁금했다.잠 못 잔 흔적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공들여 화장을 하고 회사로 갔다. 그리고 마침 로비에서 허진호와 마주쳤다. 그는 늘 그렇듯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오늘 아침도 빛나시네요!”그의 넘치는 열정이 내게 닿자, 마음 한구석에서 묵직한 피로가 밀려왔다. 꼭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도 된 듯 반갑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살짝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허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런데 혼자 오셨네요? 가족분은 안 보이는데요?”그가 툭 던진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찔렀다. 어젯밤부터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가족이요? 허 대표님이 새로 만들어 주시는 건가요?”내 말에 허진호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허허 웃으며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가리켰다.“저기 오시네요. 정우 씨 바로 오고 있잖아요.”진정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간단한 티셔츠와 작업복 차림이었다. 비록 그는 이제 진가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은 변함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 회사도 그의 소유였다.그를 바라보며 왜 나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는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를 믿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그의 부를 탐낼까 걱정돼서? 아니면 나를 그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생각이 꼬리를 물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허진호는 사람을 꾸짖거나 대놓고 나무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신 돌려서 넌지시 지적하면서 상대가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덜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그는 항상 느긋하고 농담을 섞어가며 회사를 운영했지만 직원들은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의 밑에서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일을 조금이라도 늦게 하면 허 대표님께 죄송한 기분이 들어서요.”나도 일부러 분위기를 맞추며 말했다. 그러자 허진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제가 언제 압박을 줬다고 그래요. 일은 매일 쌓이고 또 쌓이는 건데 굳이 서두를 필요 없잖아요.”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상사는 허진호가 처음이었다.그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나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앞으로는 조금 더 느긋하게 해볼게요.”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요즘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프세요?”솔직히 말하면 허진호와 나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를 대했고 나는 그와의 거리감을 유지하려 애썼다.“괜찮습니다. 몸 상태는 좋아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좋기는 무슨. 얼굴이 창백해서 뱀파이어한테 피 다 빨린 사람 같아요.”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옆 서랍을 열어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며칠 전에 고객이 준 건 영양제예요. 이거 드시고 몸 좀 챙기세요.”나는 상자를 받아서 들며 살펴봤다.“이거 여성 영양제 같은데요? 허 대표님한테 왜 이런 걸 준 거죠?”허진호는 난처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하하, 그러게요. 아마 제가 여자 친구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 같아요. 근데 알다시피 저는 외로운 솔로잖아요.”그의 너스레에 웃음이 났지만 그가 진심으로 챙겨주는 것이 고마워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감사합니다, 허 대표님. 나중에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허진호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약
정말 나쁜 남자! 나를 떠나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이런 행동이라니. 속마음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안리영의 말처럼 나도 한 번 그를 제대로 흔들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허 대표님,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내일 저녁 먹어요.”나는 일부러 허진호에게 내일 저녁 약속을 제안했다. 허진호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좋아요! 정우 씨도 같이하시죠?”하지만 진정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저는 바빠서 어렵습니다.”허진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찰나, 내가 먼저 끊었다.“허 대표님, 내일 제가 정말 특별한 곳으로 모실게요. 아마 허 대표님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일 거예요.”허진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정말요? 제가 못 가본 곳이라니. 그런데 정우 씨는 가보셨나요?”그가 굳이 진정우를 언급하는 이유는 뻔했다. 허진호는 이미 진정우가 진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자신이 불똥을 맞을까 두려운 눈치였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진정우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 발짝에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허진호는 진정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윤 부장님, 내일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요?”그는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진정우를 따라갔다.나는 피식 웃었고 아침부터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지태와 영상 통화를 했다. 하지만 화면이 켜지자마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태야, 그만 통화해. 우리 다 기다리고 있잖아.”“지원이야.”신지태가 내 이름을 말하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뚝 끊겼고 신지태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네 얘기 들었어.”나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 괜찮아.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서도 잘 지냈고.”“정말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고생했구나.”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안함이 가득했다.“그렇게 말하면 내가 남이 되는 것
지난번 신지태의 경기를 진정우가 녹화해 보여주긴 했지만 현장에서 직접 본 적은 없었다.“좋아, 이번엔 제일 좋은 자리로 준비해 둘게.”신지태가 웃으며 말했다.“응원할게, 오빠. 힘내.”나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그를 응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너도 건강 잘 챙겨.”“알았어. 이제 바로 밥 먹고 푹 잘 거야.”나도 졸음이 밀려와 하품을 참으며 대답했다. 어젯밤 한숨도 제대로 못 잤던 터라 몸이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이제야 겨우 눈이 감기려는 찰나였다.“어서 쉬어. 그리고 진정우한테 맛있는 거 좀 해달라고 해.”신지태는 이렇게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옆으로 던지고 부엌 쪽을 슬쩍 바라봤더니 어둠 속에 고요함만이 감돌았다.솔직히 진정우가 음식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그가 다시 내게 돌아와야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언제까지 고집을 부리며 버틸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잡념에 빠진 채 잠에 들었고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잤다.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들었던 나는 눈 부신 햇살에 눈을 떴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이 여전히 피곤했고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자마자 온몸이 쑤시는 통증에 “아야!” 하고 외쳤다.“정우야, 나 아파. 좀 주물러 줘.”무심코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내 상황을 깨달은 나는 다시 그를 불렀다.“정우...”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멍해졌다. 진정우는 이미 내 곁에 없는데 그를 부르는 내가 참 우스웠다.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 예전에 강유형에게 익숙했던 내가 이제는 진정우에게 익숙해졌다. 그들이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시간이 지나, 이제는 그들이 없는 현실을 또다시 받아들여야 했다.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전화를 받으니 강진혁이었다.그의 문자에 답하지 않자 아예 전화를 건 것이었다. 안 받으면 직접 찾아올 것 같아서 나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
“윤 부장님! 오셨네요! 오늘은 안 올 줄 알았어요.”회사에 도착해 아침 식사가 혹시 쓰레기통에 버려졌는지 확인하려던 참에 허진호가 봉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여기요, 아침 식사!”그의 말에 모든 상황이 이해됐고 아침 식사가 내 책상에 없는 이유는 이제 분명했다.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허진호가 이유 없이 나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늘 새벽 다섯 시에 정우 씨가 불러서 회사에 와서 일했거든요. 너무 배가 고파서 윤 부장님 책상 위에 있던 아침을 먹었어요. 그래서 이건 대신 사 온 거예요.”그의 거짓말은 너무 어설펐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 일로 힘을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먹었어요.”사실 그날 아침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요즘은 음식을 보면 식욕이 전혀 생기지 않고 억지로 먹으려고 하면 오히려 속이 메스꺼웠다.“에이, 그럴 리가요. 설마 제가 산 음식이 맛없어서 그런 건 아니겠죠? 이건 믿을 만해요. 직접 맞춤 제작한 거라니까요.”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요? 그럼 한번 볼게요. 입맛에 맞으면 조금 먹어볼게요.”나는 포장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야채와 새우가 든 계란찜, 홍삼이 들어간 대추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샐러드가 담겨 있었다.이 조합은 분명 누군가가 내 취향을 잘 알고 만든 것이었다.“어때요?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구성이라니까요.”허진호가 말을 이으며 식기를 꺼내려 하자, 나는 포장을 탁 닫으며 말했다.“별로네요. 보기만 해도 입맛이 없어지는걸요.”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이거 다 윤 부장님이 좋아하는 음식들 아닌가요? 왜 오늘은...”“허 대표님은 제가 이걸 좋아한다고 어떻게 아세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허진호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그게, 그, 전에 부장님이 말했잖아요..
방금 솔직히 정말 먹고 싶었지만 내가 그걸 먹는 순간, 진정우가 내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셈이 될 것이다. 나는 그를 그렇게 쉽게 만족시킬 순 없었다. 진정우는 나를 여전히 신경 쓰게 만들고 싶겠지만 나는 그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답답해지고 더 고민하도록 놔두고 싶었다.서랍에서 간식을 꺼내려는 순간, 사무실 전화가 울렸고 나는 한 손엔 간식을 들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네? 상황이 많이 심각한가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전화를 끊고 간식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걸려 온 전화는 팀원으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외부 미팅 중 상대 업체에서 트집을 잡고 폭행까지 있었다는 얘기였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내 팀원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건 곧 나를 겨냥한 일이기도 했기에 나는 곧바로 차를 몰고 현장으로 향했다.현장에 도착하니 팀원은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부장님, 정말 여자 탈의실에 들어간 적 없어요! 그 사람들이 일부러 저를 모함한 거예요.”그의 부은 얼굴을 보니 분명 폭행당한 흔적이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그 상처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누가 때렸어?”“상대 회사 보안 팀장입니다.”“여기 책임자가 누구죠?”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때 중년 남자가 급히 뛰어왔다.“윤 부장님, 오늘 일은 정말 오해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의 이름은 이신웅이었고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 “이 부장님, 오해라고 하셨죠? 그런데 제 직원은 이렇게 맞았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이신웅은 서둘러 대답했다.“의료비는 저희 쪽에서 전액 부담하겠습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비꼬았다.“그게 전부인가요?”그러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추가로 결근 보상금과 영양비도 제공하겠습니다.”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그전에 폭행을 저지른 사람부터 데려오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나는 휴대
“아야, 아야! 손 좀 살려주세요!”손이 짓밟힌 남자가 필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강진혁은 그의 손을 그대로 밟고 서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괜찮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저는 괜찮은데 핸드폰이 완전히 망가졌어요.”내 말을 들은 강진혁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핸드폰을 잠시 바라봤다. 그때 옆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대표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이신웅이 급히 다가와 손을 뻗었지만 강진혁에게 닿지도 못한 채 멈칫거렸다. 그의 눈빛엔 간절함과 당황함이 뒤섞여 있었다.“아빠! 손가락 다 부러질 것 같아요!”바닥에 엎드린 남자가 다른 손으로 이신웅을 붙잡으며 울부짖었다.그 한마디에 모든 상황이 명확해졌다. 이놈이 이렇게 거만하게 굴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뒤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신웅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고개를 숙이며 강진혁에게 애원했다.“강 대표님, 제발 아들을 좀 놔주십시오. 모든 잘못은 제 책임입니다.”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들은 더욱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강 대표님! 제발요! 손이 정말 못 쓰게 생겼단 말이에요!”이신웅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러나 강진혁은 그의 애원을 무시한 채 옆에 서 있던 비서 이소희를 향해 말했다.“최신 모델 핸드폰 하나 준비해.”이소희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최신 프로 모델로 보내드리겠습니다.”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오빠, 핸드폰은 필요 없어요. 제 핸드폰을 망가뜨린 사람이 물어내면 돼요.”이신웅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제가 배상하겠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세요!”그는 곧바로 옆 사람에게 눈짓을 보냈고 최신 모델의 핸드폰이 금세 준비됐다. 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준 물건은 믿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이상한 프로그램이나 도청 장치가 설치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나는 옆에 서 있던 내 직원을 가리키며 말했다.“우리 직원이 다친 건 어떻게 하실 건가요?”이신웅
“내가 아버지의 몫까지 너에게 다 보상해 줄게.”그 말에 내 마음이 마치 무엇에 찔린 것처럼 아팠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결국 그 결론을 인정한 거지? 네가 계속 조사한다고 했잖아. 결국 너는 네 아버지가 브레이크를 조작해서 내 부모님을 죽게 했다는 거야?”사실 우리는 이미 이런 추측을 했었다. 그가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가 결국 진실을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지금 진정우가 형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혼란스러웠다.그게 무슨 의미일까? 대충 넘어가려는 건지, 아니면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핑계로 내가 자기를 원망하며 멀리하게 하려는 의도인지?진정우는 내 눈을 보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가슴이 아파졌다.“너 이미 이 결과를 알고 있었지? 그래서 휴링턴 일이랑 엮어서 나랑 헤어진 거야?”“아니.”그는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의 일은 계속 조사할 거야. 진전이 있으면 너에게 알려줄게. 하지만 지금 이 보고서는 내용대로 보면 우리 아버지는 주요 용의자야.”그의 말을 듣고 나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그럼, 만약 휴링턴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결론을 보고 넌 어떻게 했을 거야? 나랑 헤어졌을까?”진정우가 나를 바라봤고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어두운 빛이 떠올랐다.“모르겠어, 아마 헤어졌을 거야...”“‘아마’ 헤어졌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네가 살인자의 아들과 함께 있는 걸 원하지 않아. 네가 마음속으로 부모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봐서 걱정이야.” 진정우가 목을 움켜잡듯 말했다. “지원아, 아마 우리는 처음부터 함께할 운명이 아니었나 봐.”운명이란 말이 너무 아프게 들렸다.“진정우, 네가 나랑 헤어지려고 하는 이유는 알겠어. 이제 나를 핑계로 이유를 대지 않아도 돼.” 나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진정우!”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내 눈과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아챈 듯싶었다. 내가 목이 너무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 할 때, 그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린 답을 알아야 해.”조금이라도 늦으면 내가 그를 막을까 봐 말을 마치자 그는 빠르고 단호하게 내 손을 밀어내고 봉투를 받아서 열었다.노란 종이 위에 몇 줄의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 나는 그 글을 보지 않았다.진정우는 한 줄씩 주의 깊게 읽었다. 글을 다 읽은 후, 그는 마치 뭔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신정훈을 바라보았다.“이 보고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서명하기 전 세 공장에 가서 검증을 받았고 그 결과도 이 봉투 안에 들어 있어요.” 신정훈의 말을 듣고 진정우는 다시 봉투를 열었다. 종이는 모두 누렇게 변색하였고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그러니 이 보고서는 근거가 있는 거였다. 진정우는 잠시 손을 내리고 그 후 나를 바라보며 손에 든 몇 장의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사실 나는 이미 대답을 알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건네받았고 그때 신정훈이 나에게 말했다.“지원 씨, 한번 확인해 보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도 돼요.”나는 사령관을 바라보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격려의 눈빛 속에서 나는 종이를 펼쳤다.[2013년 6월 10일, 해청로 교통사고.기술적인 감정 결과, 사고 원인은 브레이크 시스템 고장으로 확인되었으며 브레이크 시스템은 고의로 파손된 것으로 밝혀졌다.차량이 사고를 일으킨 경로를 조사한 결과, 차량은 운전자인 진성국만이 운전했으며 다른 사람은 개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진성국의 혐의가 가장 크나 고의로 브레이크 시스템을 파손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불완전하다.]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참 어이가 없었다.“그래서 그때는 이 내용을 사건 기록에 남기지 않았어. 고인은 이미 떠났으나 자식으로서
“고인은 이제 떠났으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깁시다.”신정훈의 말을 듣고 나는 더 불안해졌다. 부모님의 사고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죽은 사람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고 나를 타이르는 것 같았다.“형사님, 그건 저도 알죠. 그리고 이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나는 내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가 내 말을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결과를 알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노트북에서 계약서를 발견한 후로 수많은 추측과 고민을 했고 많은 일들을 이제는 이해하게 됐다.내가 신정훈을 만난 이후, 그는 주기적으로 나에게 정보를 주었지만 결코 답을 주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 것 같다.신정훈이 말을 마친 뒤, 또 다른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한 장의 봉투를 꺼냈다.하지만 그는 바로 그 봉투를 나에게 주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진정우라는 사람을 알고 있죠?”나는 진정우가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진정우도 형사님을 찾아왔었나요?”“네, 같은 일로요.”신정훈의 말에 나는 숨이 가빠졌다.“그럼... 진정우도 알게 된 건가요?”신정훈이 고개를 살짝 젓자 나는 더 불안해졌고 그가 들고 있던 봉투를 보며 물었다. “형사님, 진정우에게도 이걸 주실 생각인가요?”내 말이 끝나자마자,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우산을 든 진정우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 심장은 마치 거센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이 답답한 기분은 진정우와의 과거 때문이기도 하고 그와 함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그 죽음이 단순한 사고였을지, 아니면 더 복잡한 이유가 있을지…진정우는 결국 계단을 두 단계 올라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우산 너머로 내게 향했지만 곧 신정훈에게로 돌아갔다.“안녕하세요.”신정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우는 그 후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비 앞에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신정훈 형사였다. 우리는 전에 이미 약속했었고 지금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한 것 같다.한때는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알기 위해 신정훈을 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마음이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강유형은 눈치 빠르게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나도 조금 더 거리를 두고서야 전화를 받았다.“신정훈 형사님.”“지원 씨, 지금 시간 되세요?”점점 더 거세지는 비를 보며 이런 악천후에도 만나자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네, 주소 알려 주세요.”내가 아줌마가 만든 만두를 않자 아줌마는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다음에 시간 나면 또 와. 아줌마가 또 만두 만들어줄게.” 아줌마는 나갈 때 계속 그렇게 말했다.“네, 다음에 다시 올게요.”빗속을 뚫고 나는 차를 몰고 나왔다. 삼촌은 왜 이렇게 급하게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만 대답했다.신정훈이 약속한 장소는 부모님의 산소였다. 순간 예전 산소에 놓인 꽃들을 떠올리니, 대체 누가 보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그는 부모님의 묘비 앞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신정훈 쪽으로 걸어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나는 그의 옆에 다가갔지만 우산에 가져져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신정훈 형사님, 맞으시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의 우산이 살짝 흔들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그가 맞다는 걸 확신했다.“안녕하세요, 지원 씨.”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순간, 신정훈 형사가 부모님의 사망 신고를 접수했던 장면이 떠올랐고 왜 그때 내 연락처를 물어본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형사님, 여길 자주 찾아오셨죠?” 나는 부모님 산소 앞에 놓인 꽃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몇 번 왔었죠.” 그의 목소리는 매우 무겁고 차분했다.그는 아무리 봐도 친근하기보다는 조금은 다가가기
나는 강유형이 빗속에서 걷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그럼 진정우는?”강유형은 우산을 살짝 들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몰라, 아무도 몰라.”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내가 뭘 알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려고?”내 날카로운 시선에 강유형은 잠시 멈칫하고는 말했다.“너도 모르겠지.”그는 다시 앞을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진정우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거야. 그런데 내가 들은 얘기가 있어.”“무슨 얘기?”“Q 클럽에서 그들의 보스가 뭔가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돌아. 그런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아.”강유형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했고 나는 그 의도가 대충 짐작이 갔다.“진정우가 한 일이라 생각해?”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그럴 수도 있지만 또 아닐 수도 있어. Q 클럽은 휴링턴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진 조직이니까, 그들의 보스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야.”나는 강유형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았다. 아마 그가 Q 클럽의 보스를 만나려 했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진정우가 어떻게 신지태를 도왔는지는 나도 몰라. 사실... 그는 내게 그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며 빗방울 하나가 내 얼굴을 스쳤다. 그 차가운 느낌은 마치 진정우에게 밀려났을 때 흘렸던 눈물 같았다.“진정우는 네 설명도 듣지 않았어?”강유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들었지, 하지만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 그는 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목숨 바치는 행동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어.”나는 우산을 높이 들고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사실, 진정우는 오해한 거야. 나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수혈했을 거야. 단지 그 사람이 네가 되었고 과거 우리는 또 연인이었으니 진정우가 오해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해. 그건... 마치...”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마치 네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조나연과의 행동이 오해하
“비가 오는데 무슨 말을 꼭 밖에서 해?”아줌마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삼촌이 눈치를 줬다.“엄마, 아까 만두 빚어야 한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릴게요.”그동안 말없이 있던 강진혁이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이끌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유형을 따라 밖으로 나갔고 그는 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집 안에서도 충분히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데 굳이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따지지 않았다.“춥지 않아? 옷 가져올까?”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어진 후로 그는 예전보다 훨씬 다정해진 것 같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괜찮아.”나는 그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 들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는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말했다.“우리 마지막으로 이렇게 비 속에서 걸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1년 전이었다. 그때 며칠간 폭우가 계속 내려 도시 곳곳이 침수되고 차로 이동이 불가능했다.내가 걸어서 집에 가자고 내가 제안했을 때,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겠다고 했다.“너는 헬리콥터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직원들은? 회사 대표가 혼자만 빠져나간다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내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헬리콥터를 부르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처음에는 서로 바짓단을 젖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걷다가, 결국 물에 젖고 말았다.그때 나는 일부러 물웅덩이를 세게 밟아 그에게 물을 튀겼고 그도 화가 나서 나에게 물을 튀기며 맞받아쳤다.그렇게 물싸움을 하다 보니 화가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침수 지역을 벗어났을 때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지금 그가 그때 일을 다시 꺼내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지만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그저 지나간 추억일 뿐이었다.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그는 씁쓸한
“아까 누가 문 두드렸어?”안리영이 내 기분을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조나연. 지난번에 나한테 협력하자고 하더니 이번엔 얘기 좀 하자고 찾아왔어. 무시했지.”나는 커튼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그 애, 한 달 뒤면 아이가 퇴원할 거래. 아이 상태도 괜찮다고 하더라. 그런데 단 한 번도 병문안에 가지 않았다네.”안리영이 조나연의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한 번 본 적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여자는 돈밖에 몰라. 만약 강유형이 아이를 데려간다면 바로 따라붙을걸.”“근데 도대체 무슨 협력을 하자고 한 걸까?”안리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르겠어. 어차피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엮이면 안 돼. 문제만 생길 테니까.”나는 단호하게 말했다.“맞아. 그런 사람은 멀리하는 게 상책이지. 근데 그런 끈질긴 성격에 한두 번 거절했다고 포기할까?”안리영은 비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아침으로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아침 식사를 끝낸 뒤, 안리영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강씨 집안으로 향했다.강유형과 강진혁이 모두 있었고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니? 빈혈 때문이구나. 피를 너무 많이 써서 그래.”강유형 어머니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지원아, 우리 집에서 지내며 몸 좀 추스르자. 기운 차릴 때까지 같이 있자.”“그건 좀...”나는 애써 웃으며 거절했다. 이제 와서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삼촌은 나의 난처한 표정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계속 서 있으면 힘들잖니.”“제가 너무 걱정만 했네.”강유형 어머니는 나를 소파로 이끌며 앉히고는 부엌으로 가서 죽을 가져왔다.“요즘 왜 이렇게 말랐어? 몸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어?”삼촌은 내 상태를 금방 알아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몸 때문이라고 하면 그들이 미안해할 테고 진정우와의 문제라고 하면 더
나는 핸드폰을 쥔 채 잠시 망설였다. 강유형이 나를 왜 찾는 걸까?안리영은 턱짓으로 받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나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대답했다. 진정우와의 관계가 끝난 지금이라 해도 강유형과 다시 잘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나를 찾을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을 치게 되었다.“나 돌아왔어.”그는 무슨 큰일을 겪고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알아. 강진혁한테 들었어.”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덧붙였다.“우리 만날 수 있을까? 네가 나랑 단둘이 만나는 게 싫다면 우리 집에 와도 돼. 부모님이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셔.”순간, 공항에서 나를 맞이하던 강유형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고 그들이 나를 걱정했던 건 사실이었다.“할 말이 있어. 신지태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진정우와도 관련 있어.”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진정우와 나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와 관련된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나는 본능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알았어. 이따 갈게.”“좋아. 엄마한테 말해둘게. 너 오면 만두 해준다고 계속 기다리셨거든.”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전화를 끊자 안리영이 한마디 했다.“전 남친 참 열심이네.”나는 그녀의 농담에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진정우와 관련된 일이 있다고 했어.”“그건 그냥 미끼야. 지원아, 너랑 진정우는 이미 끝난 거잖아.”안리영은 날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았지만 애써 부정하며 말했다.“진정우 때문이 아니라 강유형 부모님 때문에 가는 거야. 만두도 먹으러 가는 거고.”안리영은 비웃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만두 한 끼가 아니라 강유형 집 재산의 3분의 1을 줘도 모자랄걸? 너 그 사람 목숨 살려줬잖아.”그 말에 나는 지난 일이 떠올랐다. 강유형의 부모님이 모든 걸 솔직히 설명했고 내가 그것에 의심을 품는 건 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일 뿐이었다.“너랑
안리영이 떠나버리면 정말로 나와 이야기할 친구 하나도 남지 않겠지.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결국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라지만 부모나 친구는 물론, 심지어 부부 사이라도 그렇다지만 안리영만은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했다.“아니야, 난 그냥 좀 더 쉴 생각이야.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그런 쉬운 사람이 아니거든.”안리영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오, 안 과장님 드디어 반항하시네? 이제 좀 단단히 한 방 먹이겠다는 거야?”“맞아. 안 그러면 다음번에 무슨 일이 터져도 제일 먼저 나를 버리려 할 거 아니야.”역시 안리영다웠다.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녀는 늘 현실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근데 너무 세게 나가다가 망하면 어떡해?”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안리영은 물컵을 따라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여기서 날 놓치면 날 데려가겠다는 병원이 줄을 설걸?”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자신 있게 말했다.“나 같은 사람이 갈 데가 없을 것 같아?”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고했다.안리영의 능력을 알기에 이 병원이 그녀를 놓친다면 그녀를 영입하려는 병원이 줄을 설 게 뻔했다. 실제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늘 거절했었다.“한 곳에서 날 외면하면 더 좋은 곳으로 가면 그만이지”라는 안리영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안리영은은 진지하게 진정우와 나 사이의 일을 물었다. 그러자 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그녀의 말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그 사람과는 길이 안 맞더라고. 그냥 나랑 맞는 사람을 찾아보려고. 나도 선택지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안리영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윤지원이지. 우리가 직장이든 남자든 거기에 기대지 않아도 돼. 그들은 단지 우리 삶에 즐거움을 더해줄 뿐이지,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빛나.”그녀의 말은 내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안리령은 내 퇴원 절차를 도왔고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