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진정우가 서 있었다. 한 손으로 문을 열고 다른 손에는 채소가 든 봉지를 들고 있었다. 내가 갑작스레 문을 열었는지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가 살짝 놀란 눈빛을 지었다.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왜 그러세요?”“아니에요.”나는 고개를 저었다.“어디 아픈 거예요?”진정우가 봉지를 내려놓고 내 앞에 다가왔다. 아직 반쯤 잠에 취한 듯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아 다시 고개를 저었다.이마에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은 것이다. 그는 살짝 당황한 듯 물었다.“열이 나는 것 같은데요?”아직 멍한 상태라 그 말이 내 얘긴 줄도 몰랐다. 진정우는 내 상태를 눈치챈 듯 다음 순간 방으로 들어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원래도 몸이 가볍게 느껴졌는데 그가 들어 올리자 더욱 무중력 상태가 된 듯했다. 본능적으로 그의 옷을 잡아 의지했다.그는 나를 소파에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슬리퍼는요? 맨발로 돌아다닌 거예요?”그가 말하기 전까지 나도 몰랐다. 맨발로 문을 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나의 멍한 상태에 살짝 한숨을 쉬며 방에 들어가 내 슬리퍼를 가져와 내 발에 신겨 주었다.“체온계 있어요?”그가 다시 물었다.“물 좀 마시고 싶어요.”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부엌으로 가서 물을 따라주려 했지만 물 주전자가 비어 있었다.물을 데우기보다는 그가 다시 다가와 나를 들어 올려 집 밖으로 데려갔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고 그가 어디든 데려가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그는 나를 자신의 집 소파에 내려놓고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체온계를 가져와 내 손에 쥐여주며 물었다.“체온 잴 줄 아시죠? 제가 도와드리긴 좀 그렇네요. 겨드랑이에 넣으시면 돼요.”그는 체온계를 내가 떨어뜨릴까 봐 내 손을 살짝 잡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떼며 말했다.“물 곧 데워 드릴게요. 조금 후에 약도 먹어야 해요. 열이 안 떨어지면 병원
부모님이 떠난 이후로 나는 약이 아무리 써도 싫다는 말 한 번 안 하고 참아냈다. 아무도 더는 내게 사탕을 주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도 그 달콤함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이거 정말 달아요.”진정우는 손에 든 설탕 조각을 다시 한번 들어 보이며 나의 입술에 살짝 닿도록 내밀었다. 마치 유혹하듯 말이다.나는 마침내 입을 벌렸고 설탕이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왜 울어요?”진정우는 내 얼굴에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 주며 물었다.차라리 아무 말도 안 했으면 덜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말에 오히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더 멈추지 않았다.결국 그는 내 손에 들린 컵을 가져가더니 내 손을 가볍게 쥐며 말했다.“약이 너무 쓰면 그냥 먹지 않아도 돼요.”그가 자리를 뜨고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참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나니 속이 한결 편해졌다. 그때 내 겨드랑이에 끼워둔 체온계에서 알림이 울렸다.체온계를 꺼내 보니 38.2도였다. 진짜로 열이 났다.잠시 후 진정우가 수건과 얼음이 든 작은 천을 들고나왔다.“얼음으로 조금 식혀 볼게요. 물을 많이 마시면 열이 내려갈 거예요. 괜찮아지면 약은 안 먹어도 돼요.”그는 말하며 내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려 소파에 눕혔다.그는 얼음이 든 수건을 내 이마에 올리고 조용히 말했다. “눈 감고 좀 쉬어요.”나는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이내 성냥 긋는 소리와 함께 공기 중에 퍼지는 알코올 냄새가 느껴졌다.곧 손바닥에 따스한 열기가 전해졌다. 그가 내 손을 알코올로 마사지하고 있었다. 손을 본능적으로 움찔하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열을 내리게 해 줄게요.”나는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왼손과 오른손 차례로 내 손을 마사지했고 그다음에는 발까지 만졌다. 그가 내 발을 잡자 이번엔 발을 빼며 말했다.“그곳은 괜찮아요.”“그러면서 어제는 제 옷 벗길 생각까지 했으면서 지금은 발 만지는 것도 안 돼요?”진정우의 말에 당
내가 방금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숨이 턱 막혔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소파 옆에 반쯤 무릎 꿇고 있던 진정우는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이 다 됐으니 일어나서 조금 먹어요.”그가 일어나며 손을 빼려는 순간 내가 얼마나 세게 그의 손을 잡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방금 꿈속에서 잡았던 손이 사실은 아빠나 엄마가 아닌 진정우의 손이었고 심지어 내가 그를 쫓아내려고까지 했다.그의 손등에 선명한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보고 너무 미안해서 손을 풀었다. 진정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섰고 나도 소파에서 일어났는데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덕분에 열이 다 내린 모양이었다.그는 담요를 가져와 내게 건네면서 말했다.“이거 덮고 다시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요.” 손을 내밀었지만 아직 손에 힘이 덜 돌아와서 담요를 놓쳐버렸다. 결국 진정우가 직접 내 어깨에 덮어주고 따뜻한 물수건까지 가져와 손을 닦으라며 내밀었다.그 순간 다시금 어린 시절 부모님께 간호를 받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아이가 된 것처럼 진정우는 따뜻하게 나를 돌봐주었다.“혼자 먹을 수 있겠어요?”그가 내 앞에 뜨끈한 영양죽을 놓으며 물었다.‘만약 내가 아니라고 하면 직접 먹여주기라도 하겠다는 걸까?’그가 정말 내 남자 친구라면 사양 없이 부탁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어제 술기운에 그에게 해버린 말도 미안했고 그래서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네.”나는 숟가락을 들어보려 했지만 손이 여전히 힘없이 떨렸다. 그러자 진정우가 내 손을 가볍게 눌렀다.“조금만 기다려요.”“물 먼저 마시고 싶어요.”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몸이 몹시 탈진해 있었다. 그는 이미 준비해 둔 따뜻한 물을 건넸다. 물은 미지근하고 꿀맛이 약간 섞여 있어서 마시기 딱 좋았다.그는 정말 단순히 고맙다는 말로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배려해 줬다.진정우가 차려준 저녁은 내 취향에 딱 맞는 깔끔하고 건강한 메뉴였다. 애호박 새우볶음, 마늘 향이 나는 우엉,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나는 어제 물어보고 싶었던 게 생각나서 물었다. “어제 그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진 않았어요?”말을 꺼내면서 무심코 그의 손과 얼굴을 훑어봤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아니요.” 진정우가 내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설령 온다고 해도 저한테 상대가 되겠어요?”그의 당당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입의 죽을 마시고 나서 다시 물었다.“혹시 아버님 사고 건은 진전이 좀 있었어요? 대체 어떤 사람들을 건드렸길래 당신을 협박하는 거예요?”진정우는 눈빛이 깊어지며 말했다. “그들이 겁내는 건, 제 아버지의 사장님이 돌아가신 이유를 제가 파헤치려는 거예요.”진정우는 이야기를 절반쯤만 하며 말끝을 흐렸고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사장님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분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줄 만큼?”“그분은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젠 직접적인 이익에 관련된 건 아닌데...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그 사장님의 아이가 언젠가 자신들을 원망하게 될까 봐 그래요.” 진정우의 말이 끝나자 나는 묘하게 목이 메어 왔다.“그 사장님에게 자식이 있었군요. 혹시 그 사람을 본 적 있어요? 그 사람도 당신이 조사하는 걸 알기나 하나요?” 나도 모르게 세 가지 질문을 쏟아냈다.진정우는 잠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몰라요.”내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계속 조사할 거예요?”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근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제 그 사람들 보니까, 배후에 꽤 큰 세력이 있는 것 같던데.” 진정우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치는 게 걱정돼요?”그의 말이 살짝 애매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정우 씨, 당신 아버님도 그 사장님도 이미 돌아가셨잖아요. 지금 무언가를 밝혀낸다고 해서 그분들이 돌아올 순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 위험해지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요.”진정우의 눈빛이 깊어
말이 먼저 나가고 생각이 따라오는 이 버릇, 정말 큰 일이다. 내가 무심코 말해버린 걸 스스로 인지하는 순간, 진정우가 뜻밖에도 대답을 했다.“그래요.”진짜 동의한 거야?! 보통은 자존심 세우면서 거절할 법도 한데... 돈을 빌리는 건 둘째 치고라도 내 제안을 진짜로 받아들이는 줄은 몰랐다. 그가 그렇게 간절히 필요한 돈이라면, 정말로 여동생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거겠지. 그 생각에 괜스레 짠해졌다.순간, 내 속이 들킨 듯 어색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여동생이 병원에서 진찰받은 적 있죠? 혹시 진찰 기록이 남아 있다면 저한테 주세요.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볼게요.”“그래요.” 그가 또다시 흔쾌히 대답했다.더 이상 할 말이 없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 가볼게요.”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상태 안 좋으면 꼭 연락해요.”“그래요.” 나는 미소로 답하고 뒤돌아 나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따뜻한 배려도 어느새 나에게는 부담처럼 느껴진다.집에 돌아와 문에 기대어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강유형에게서 온 전화였다. 왜 이 시간에 나를 찾는 걸까 싶어서 그냥 두었는데 통화 목록을 보니 그동안 20통이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거의 다 강유형이었고 몇 통은 고준석에게서도 와 있었다. 고준석도 역시 강유형의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전화를 하는 걸 보면, 아마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지원아, 지금 어디야? 나 좀 만나자.” 그의 목소리가 힘겹게 떨렸고 살짝 술에 취한 듯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이제 나한테 마음이 없지.”내가 여전히 침묵하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지원아, 정말 날 떠나는 거야? 우리... 10년 동안 함께였잖아. 넌 항상 나를 좋아했잖아...”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샤워를 마친 후, 진정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 앞에 준비해 둔 아침 식사를 챙겨가라는 내용이었다. 왜 그동안 그의 아침을 먹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지만 여전히 챙겨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의 정성을 저버리지 않으려 아침을 챙겨 먹고 회사로 출근했다.출근이 일렀던 탓에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의 일정을 정리하고 팀원들의 업무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나니 아직 근무 시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모처럼 친구들의 소식을 보기 위해 SNS를 확인했다. 비록 대화는 자주 하지 않지만 이곳을 통해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신지태는 당구 챌린지에 나가겠다고 올렸고 안리영은 오늘 맞이한 아기 천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출산을 돕는 일마다 하나씩 기록하는데 오늘로 5,566번째 아기를 맞이한 셈이다. 그녀 자신도 이 숫자에 감탄한 듯했다.안리영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엄지를 치켜드는 이모티콘을 남겼다. 다음으로 넘기다가 강유형이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앞으로 남은 삶, 너희를 지키면서 살 거야.”라는 문구와 함께 어머니와 아이가 등장하는 그림이었다.순간 가슴이 꽉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조나연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분명했다. 강유형이 밤중에 올린 게시글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요’와 축하 댓글을 달았고 심지어 나와 강유형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둘을 엮어 축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댓글을 남겼다. “축하해. 행복하길.” 그러고는 곧바로 SNS를 닫았다. 핸드폰을 옆에 두고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주 아프다기보다는 그저 무겁고 답답할 뿐이었다. 이 감정을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허진호였다. 그의 사무실을 봤더니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부대표님.”“지원 씨, 당분간 회사에 안 나와도 돼요.
신지태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내자 그의 전화가 바로 걸려 왔다.“왜? 그 사람이 너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신지태의 직설적인 물음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오히려 내가 그 사람한테 이상한 짓 하고 싶은데, 문제는 그 사람 얼굴도 못 봤다는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겠어?”“얼굴도 못 봤다고? 그러면 단순히 궁금해서 알아보라는 거야?” 신지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너, 내가 한가한 줄 알아?”며칠 전에 당구 대회 준비한다고 바쁜 신지태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좀 성급했나 싶은 생각에 약간 미안해지며 대답했다.“바쁘면 됐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꼭 확인해야 하는 건 아니고.”“네 그 말이 오빠를 속상하게 만드는 거 알지?” 신지태가 장난스레 투덜거렸다.나도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진짜야, 오빠. 시간 되면 알아봐 주고, 아니면 말고.”“그래, 알았어. 다른 사람 일은 몰라도 네 부탁은 들어줘야지. 어떻게든 알아볼게.” 신지태는 흔쾌히 응답했다.하지만 통화를 끊지 않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신지태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려다 말고는 “됐어. 그냥 네가 힘든 일 생기면 언제든 말해.”하고 말을 맺었다.그가 별말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어제 있었던 일, 특히 강유형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면 서로 난감했을 테니까.“고마워. 대회 때 응원하러 갈게. 티켓 구해줘!” 내가 활기차게 말하자 신지태도 웃으며 대답했다.“좋아! 준비해 줄게!”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집으로 향했다. 어제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친 탓에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집 앞에 도착해 보니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나는 차를 주차하고 다가가 보니 공고문이 눈에 들어왔다.재개발!이 세 글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가 언젠가 재개발될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당황스러웠다.다른 사람들에게 재개발은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다. 하룻밤 사이에 부
나는 앞으로 어디에서 부모님과의 추억을 찾아야 할까?“다윤아.”현관 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바로 맞은편 집에 사는 집주인 아주머니였다.재개발 소식을 듣고 온 것이 분명했다.“여기가 곧 철거된다니, 아쉽네.”아주머니는 흔치 않게 탄식을 내뱉었다.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그러자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나도 얼마 전에 돈 들여 집을 조금 손봤는데 겨우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이사를 해야 한다니, 억울하네.”나는 말없이 웃음만 지었다.“방을 빌린 청년한테 전화했는데 연락이 안 되네. 혹시 그 친구 보게 되면 이 소식 좀 전해주고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줘. 곧 철거될 거라 미리 준비하라고 말이야. 짐도 챙기게.”아주머니가 나에게 부탁했다.“네, 그렇게 할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아주머니가 감사 인사를 전하더니 갑자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청년 만나봤지? 괜찮은 사람이지?”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나쁘지 않아요.”“그 정도가 뭐야? 그 청년 같은 인물 드물어. 딸이 없어서 아쉽지, 있었으면 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괜찮은 청년이던데.”아주머니도 진정우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아줌마도 낳으세요.” 나는 농담처럼 받아쳤다.평소 같으면 불쾌하게 들렸을 수도 있지만 요즘에 60대 노인의 출산 뉴스가 화제가 되면서 분위기가 가벼워졌다.“나는 그럴 체력도 없지. 그만 놀려.”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나도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슬슬 너도 이사 준비해야겠다. 쓸모없는 건 버리고 팔 수 있는 건 팔아라. 내가 아는 고물상 전화번호가 있는데 사람도 괜찮고 가격도 잘 쳐줘. 필요하면 번호 줄게.”그 따뜻한 배려에 거절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아주머니는 고물상 전화번호를 건네고 가셨고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열자 온 집안 가득히 묻어 있는 추억이 나를 맞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
“콜록!”전화기 너머에서 배성재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내 갑작스러운 애교 섞인 목소리가 꽤 당황스러웠나 보다.그는 곧바로 물었다.“무슨 부탁이죠?”나는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드래곤킹에는 남자 모델뿐만 아니라 여자 모델도 있죠? 혹시 그쪽이랑 친하세요?”이제 내가 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 확신한 이상, 굳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도 없었다.생각해 보면 참 우습다. 그동안 그렇게 떠보고 시험해 보려고 온갖 수를 썼지만 결국 미트볼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갑자기 왜 그런 걸 묻죠?”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 조심스럽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팔짱을 끼고 일부러 더 장난스러운 톤으로 말했다.“저도 한 번 여자 모델이 되어 보고 싶어서요.”“뭐라고요?”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높아졌다.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했다.“드래곤킹에서 여자 모델로 일해 보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성재 씨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그건 안 됩니다.”이번엔 단칼에 잘라 말했다. 거절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왜요? 제가 못생겨서? 아니면 몸매가 별로라서?”“그런 문제가 아닙니다.”그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곧이어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그곳은 당신이 갈 만한 곳이 아닙니다.”‘좋아, 바로 이 반응. 이제야 진짜 진정우다운 모습이 나오는군.’“왜요? 성재 씨도 거기서 일하셨잖아요?”내가 일부러 짓궂게 되묻자, 그는 순간 말을 잃었다.그리고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낮게 말했다.“나는 당신이 그곳에 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도 없어요.”나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그래, 바로 이거야. 이 반응이야.’분명 그는 자신이 진정우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를 통제하려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그럼 내 방법대로 알아서 갈게요.”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가 날 불러 세웠다.“잠깐. 진짜 이유
내 아버지를 언급하자 강진혁은 순간 굳어졌다.표정이 단단하게 굳은 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연한 반응이었다.내 부모님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가 직접 만든 비극이었으니까.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배성재가 만든 완자를 바라보았다.나는 차분한 척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제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그 맛은 다시 없을 거야.”하지만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었고 나는 이미 확신했다.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그런데도 그가 계속 자신을 배성재라고 주장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괜히 흔들리지 말고 그의 계획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었다.강진혁은 한숨을 내쉬듯 낮게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 일은 정말 미안해.”하지만 그 말은 더럽게도 위선적으로 들렸다.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애써 눌러가며 나는 덤덤하게 받아쳤다.“그 일은 오빠랑 상관없잖아요.”강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넌 참 착한 애야.”‘착해? 아니, 바보였겠지.’한때는 용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내가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단 1%도 없다는 걸 말이다.나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조용히 단호박 수프를 떠먹었다.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솔직히 말해 배성재의 요리 실력은 꽤 수준급이었다.심지어 예전 진정우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그동안 숨어서 요리 연습이라도 했나? 나중에 진짜 정체를 밝히면 꼭 물어봐야겠네.’“이거 맛있네요. 잘 만들었어요.”내가 무심하게 던진 칭찬에 강진혁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저녁 약속 있어?”그는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없어요. 그냥 한 말이에요.”나는 무심히 단호박 수프를 한 모금 마셨고 그 순간 강진혁의 시선은 더욱 깊어졌다.그러더니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그럼 오늘 저녁에는 나랑 같
배성재는 정말 겁도 없었다.강진혁이 나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도전장을 내밀다니...나는 그의 이런 태도가 예상 밖이었지만 지금 내게 더 중요한 건 이소희였다.그녀가 정말 드래곤킹에 있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나는 고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요.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요.”배성재는 별다른 아쉬운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섰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료들을 마주쳤는지 다시 한 번 진 팀장님이라 불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던 강진혁이 문득 내게 물었다.“저 사람... 진정우랑 정말 많이 닮지 않았어?”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만약 이 자리에서 안 닮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그래서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답했다.“모르겠어요. 그래서 더 시험해 봐야죠.”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항상 나한테 맛있는 걸 챙겨줬어요. 그래서 저도 한 번 성재 씨의 요리를 경험해 보려고요.”이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강진혁에게 보내는 신호였다.내가 배성재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는 신호였다.나는 아직 강진혁이 배성재를 위험 요소로 인식하지 않길 바랐다.적어도 지금은 배성재가 그의 타겟이 되어서는 안 된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그럼 결과는 나왔어?”우리는 이미 사무실로 들어와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락을 열었다.그 안에는 예상했던 두 가지 요리 외에도 만두와 호박죽까지 곁들여져 있었다.솔직히 말해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당길 정도였다.강진혁도 한마디 덧붙였다.“보아하니 요리 실력이 제법인데. 드래곤킹에서 남자 모델로 있기엔 아까운 재능이네. 그냥 식당을 차리는 게 낫겠어.”나는 의미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았을 뿐이에요.”나는 강진혁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그런 태도조차 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관심과 걱정이라기보다 그저 나를 붙잡기 위한 수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사랑이 식으면 그의 모든 행동이 불편하게만 보인다더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그래도 물이라도 좀 마셔.”강진혁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권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그렇게 화장실을 나와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그리고 곧, 회사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어? 진 팀장님!”“오랜만이에요! 드디어 복귀하신 거예요?”“우린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요!”여러 직원이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반가워하는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 배성재라는 것이었다.배성재는 아무런 반응 없이 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그렇게 조용히 걸어오더니 나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그 순간, 내 옆에 있던 강진혁의 기운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나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나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그가 진정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계속 착각하도록 놔두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괜한 오해가 쌓이면 나중에 정리하기가 더 골치 아파진다.배성재는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하게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상자를 내게 건넸다.“점심 가져왔어요.”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사실 나는 아침도 못 먹고 나와서 속이 비어 있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책임감이 꽤 강하네요?”그러면서 슬쩍 강진혁을 향해 돌아보며 덧붙였다.“오빠, 성재 씨 요리 실력 한 번도 안 맛봤죠? 진 팀장님보다는 아주 약간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꽤 괜찮아요.”내 말이 끝나기가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강진혁은 집요하게 내 반응을 살폈다.나는 짧게 웃으며 허진호에게 집중하듯 말했다.“전 허 대표님이 빨리 회복해서 출근하셨으면 좋겠어요. 출근 도장 찍는 모습 못 보니 너무 심심하네요.”그렇게 나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전화를 끊었다.강진혁은 이미 내 자리까지 들어와 있었고 가져온 꽃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오랜만에 그렇게 밝게 웃는 거 본 것 같은데.” 나는 자연스럽게 이유를 만들어냈다.“허 대표님이 여자 친구한테 얼굴 할퀴었다고 투덜대는데 그게 너무 웃겨서요.”강진혁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혹시 유흥업소 간 거 때문에 그런 거야?”그 말에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강진혁이 허진호를 봤고 허진호가 본 사람이 정말 이소희라면 강진혁도 그녀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리고 이소희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이 바로 강진혁이었다는 내 의심이 맞다면...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역시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네요. 그런 곳은 꼭 가봐야 속이 시원해요?”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난 일 때문에 갔어.”“허 팀장님도 똑같이 말하던데요. 근데 여자 친구가 안 믿고 난리를 쳤대요.”나는 꽃을 들어 올려 코끝에 가져가 향을 맡으며 시선을 피했다.향은 좋았지만 지금 내 기분과는 정반대였다.그러다 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어제 드래곤킹에서 좀 난처한 일 겪었다며?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그 말을 듣자마자 등골이 싸늘해졌다.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묻는 걸까?그가 배후에 숨어져 있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면 정말 그의 걱정 어린 태도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주범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가 연기를 한다면 나도 맞춰줘야 했다.아직은 그를 자극할 때가 아니니까.그래서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직접 해결했어요. 굳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나는
나는 준비실에서 차를 따르다가 무심코 동료들에게 물었다.“허 대표님은 오늘 안 나오셨나요?”내 말에 몇몇이 입을 꾹 다물고 킥킥거리며 웃었다.나는 그 반응이 이상해서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뭐예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그러자 한 명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얼굴이 엉망이 됐다네요!”“아무래도 여자 친구한테 할퀸 모양이에요.”“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허 대표님 여자 친구가 그렇게 사나운 줄은...”“근데 솔직히 허 대표님이 유흥업소라도 갔다면 나 같아도 가만 안 뒀을걸요.”순식간에 사무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고 다들 각자 한마디씩 보태며 떠들어댔다.그제야 나는 허진호가 오늘 회사에 안 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얼굴이 엉망이 돼서 창피해서 못 나온 거겠지.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때리는 건 그렇다 쳐도 얼굴은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솔직히 나는 그냥 궁금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허진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지원 씨,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다 헛소문입니다. 그런 일 없었어요.”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고 나는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되물었다.“네? 무슨 일인데요? 제가 뭘 들었다는 거죠?”허진호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회사 갔다면서요? 아무도 얘기 안 해줬어요?”나는 일부러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아침부터 바빠서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그제야 허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아, 됐습니다.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그리고 내가 들은 내용은 사무실 사람들이 떠들던 소문과 거의 똑같았다.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제가 지금 제일 후회하는 건 도대체 왜 여자한테 빠졌냐는 겁니다.”나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의 한탄이 어이없기도 했고 뭔가 귀엽기도 했다.그래서 나는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남자를 좋아해 보시려고요?”그러자 허진호도 장단을
나는 놀란 채로 그를 바라봤다.“강유형, 너...”그는 천천히 입가를 닦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나는 순간 따라가야 하나 망설였지만 끝내 발을 떼지 않았다.그냥... 이대로 두는 게 맞을 것 같았다.그래야 그도 이제 완전히 포기할 테니까.“저를 원망하진 않겠죠?”강유형이 떠난 후 뒤에서 배성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천천히 돌아봤다.배성재는 문가에 서 있었고 그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강유형이 토한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얼룩져 있었다.“저 사람이 계속 지원 씨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었어요.”나는 짧게 대꾸하며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옷 갈아입고 이제 가세요.”배성재는 말없이 옷을 받았다.그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손에 작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그 안에는 그가 입었던 더러워진 옷이 담겨 있었다.그는 그대로 나가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더니 현관 앞 바닥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마침내 문이 닫히고 그가 떠났고 나는 그제야 소파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았다.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결국 지쳐서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고 나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그런데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봤다.강유형이 내 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그 붉은 피가 마치 내 가슴 한복판에 떨어지는 듯한 느낌.그 꿈에 시달리며 나는 밤새 뒤척였다.그리고 다음 날 내가 눈을 뜨자마자 창문으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향했다.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그리고 옷 위에 묻어 있는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나는 조용히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하나하나 천천히 핏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마치 그것이 내 삶에서 강유형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내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용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들었어. 어제 우리 쪽에서 사고 났다며?”내가 찾기도 전에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강유형, 네가 어떻게 내가 사고 난 걸 알았지?”그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문기둥에 기대섰다.“당연히 알지. 왜냐하면...”그는 말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내가 사람을 붙여서 널 지켜주게 했거든.”지켜준다고? 이건 지켜주는 게 아니라 감시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의 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자 나는 이유 모를 불쾌감이 몰려왔다.그래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네가 붙인 사람이 그렇게 실력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는 어디 있었던 거야?”“그 부분은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놈은 잘랐어.”강유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는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덧붙였다.“그리고 지금 누가 널 해치려 했는지 조사 중이야.”“잘됐네.”나는 짧게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그럼 네가 그걸 알아내면 나한테도 알려줘.”강유형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피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하지만 나는 그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더군다나 지금 내 집 안에는 또 다른 손님이 있었으니까 말이다.“강유형, 늦었어. 인제 그만 돌아가.”나는 단호하게 말했으나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집에 가고 싶지 않아.”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네가 떠난 이후로... 난 집에 들어가는 게 너무 싫어졌어.”그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은 가슴 한구석을 묘하게 찌르는 기분이었다.“네가 있을 때는 몰랐어. 네가 없는 집이 이렇게 공허한 곳일 줄은... 집에 들어가면 온통 적막하고 부모님도 서로 말이 없고 예전처럼 따뜻한 느낌이 하나도 안 남았어.”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렇게 만든 게 누구 때문인데?“사실, 예전엔 이런 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몰랐어.”그는 허탈하게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뜨거워졌다.조금 전까지 내가 그를 떠보려 했는데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그는 겉으로 보기엔 진지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은근슬쩍 던지는 말은 전혀 초보자가 아니었다.이 남자,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데?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하지 마세요.”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TV가 켜진 거실로 향했다.그는 여유롭게 식탁을 정리한 뒤 내가 뿜어낸 죽이 튄 옷을 간단히 닦고 설거지를 시작했다.그러고 부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걸어왔다.“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무심하게 손짓했다.“맘대로 쓰세요.”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샤워도 좀 해야겠네요.”나는 즉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마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보았다.아직도 죽이 튀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그제야 나는 생각을 바꿨다.‘아... 샤우할만 하네.’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갈아입을 옷 있나요?”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순간적으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내 결정을 흔들어 놓았다.“헌 옷이라도 괜찮아요.”그는 진정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내 집에 남자의 옷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진정우의 것일 테니까.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이건 완벽한 연기였다.그러니까 내가 괜한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억지로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찾아볼게요.”나는 옷장을 열어 진정우의 옷을 손에 들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