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진정우가 서 있었다. 한 손으로 문을 열고 다른 손에는 채소가 든 봉지를 들고 있었다. 내가 갑작스레 문을 열었는지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가 살짝 놀란 눈빛을 지었다.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왜 그러세요?”“아니에요.”나는 고개를 저었다.“어디 아픈 거예요?”진정우가 봉지를 내려놓고 내 앞에 다가왔다. 아직 반쯤 잠에 취한 듯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아 다시 고개를 저었다.이마에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은 것이다. 그는 살짝 당황한 듯 물었다.“열이 나는 것 같은데요?”아직 멍한 상태라 그 말이 내 얘긴 줄도 몰랐다. 진정우는 내 상태를 눈치챈 듯 다음 순간 방으로 들어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원래도 몸이 가볍게 느껴졌는데 그가 들어 올리자 더욱 무중력 상태가 된 듯했다. 본능적으로 그의 옷을 잡아 의지했다.그는 나를 소파에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슬리퍼는요? 맨발로 돌아다닌 거예요?”그가 말하기 전까지 나도 몰랐다. 맨발로 문을 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나의 멍한 상태에 살짝 한숨을 쉬며 방에 들어가 내 슬리퍼를 가져와 내 발에 신겨 주었다.“체온계 있어요?”그가 다시 물었다.“물 좀 마시고 싶어요.”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부엌으로 가서 물을 따라주려 했지만 물 주전자가 비어 있었다.물을 데우기보다는 그가 다시 다가와 나를 들어 올려 집 밖으로 데려갔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고 그가 어디든 데려가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그는 나를 자신의 집 소파에 내려놓고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체온계를 가져와 내 손에 쥐여주며 물었다.“체온 잴 줄 아시죠? 제가 도와드리긴 좀 그렇네요. 겨드랑이에 넣으시면 돼요.”그는 체온계를 내가 떨어뜨릴까 봐 내 손을 살짝 잡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떼며 말했다.“물 곧 데워 드릴게요. 조금 후에 약도 먹어야 해요. 열이 안 떨어지면 병원
부모님이 떠난 이후로 나는 약이 아무리 써도 싫다는 말 한 번 안 하고 참아냈다. 아무도 더는 내게 사탕을 주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도 그 달콤함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이거 정말 달아요.”진정우는 손에 든 설탕 조각을 다시 한번 들어 보이며 나의 입술에 살짝 닿도록 내밀었다. 마치 유혹하듯 말이다.나는 마침내 입을 벌렸고 설탕이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왜 울어요?”진정우는 내 얼굴에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 주며 물었다.차라리 아무 말도 안 했으면 덜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말에 오히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더 멈추지 않았다.결국 그는 내 손에 들린 컵을 가져가더니 내 손을 가볍게 쥐며 말했다.“약이 너무 쓰면 그냥 먹지 않아도 돼요.”그가 자리를 뜨고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참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나니 속이 한결 편해졌다. 그때 내 겨드랑이에 끼워둔 체온계에서 알림이 울렸다.체온계를 꺼내 보니 38.2도였다. 진짜로 열이 났다.잠시 후 진정우가 수건과 얼음이 든 작은 천을 들고나왔다.“얼음으로 조금 식혀 볼게요. 물을 많이 마시면 열이 내려갈 거예요. 괜찮아지면 약은 안 먹어도 돼요.”그는 말하며 내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려 소파에 눕혔다.그는 얼음이 든 수건을 내 이마에 올리고 조용히 말했다. “눈 감고 좀 쉬어요.”나는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이내 성냥 긋는 소리와 함께 공기 중에 퍼지는 알코올 냄새가 느껴졌다.곧 손바닥에 따스한 열기가 전해졌다. 그가 내 손을 알코올로 마사지하고 있었다. 손을 본능적으로 움찔하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열을 내리게 해 줄게요.”나는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왼손과 오른손 차례로 내 손을 마사지했고 그다음에는 발까지 만졌다. 그가 내 발을 잡자 이번엔 발을 빼며 말했다.“그곳은 괜찮아요.”“그러면서 어제는 제 옷 벗길 생각까지 했으면서 지금은 발 만지는 것도 안 돼요?”진정우의 말에 당
내가 방금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숨이 턱 막혔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소파 옆에 반쯤 무릎 꿇고 있던 진정우는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이 다 됐으니 일어나서 조금 먹어요.”그가 일어나며 손을 빼려는 순간 내가 얼마나 세게 그의 손을 잡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방금 꿈속에서 잡았던 손이 사실은 아빠나 엄마가 아닌 진정우의 손이었고 심지어 내가 그를 쫓아내려고까지 했다.그의 손등에 선명한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보고 너무 미안해서 손을 풀었다. 진정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섰고 나도 소파에서 일어났는데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덕분에 열이 다 내린 모양이었다.그는 담요를 가져와 내게 건네면서 말했다.“이거 덮고 다시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요.” 손을 내밀었지만 아직 손에 힘이 덜 돌아와서 담요를 놓쳐버렸다. 결국 진정우가 직접 내 어깨에 덮어주고 따뜻한 물수건까지 가져와 손을 닦으라며 내밀었다.그 순간 다시금 어린 시절 부모님께 간호를 받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아이가 된 것처럼 진정우는 따뜻하게 나를 돌봐주었다.“혼자 먹을 수 있겠어요?”그가 내 앞에 뜨끈한 영양죽을 놓으며 물었다.‘만약 내가 아니라고 하면 직접 먹여주기라도 하겠다는 걸까?’그가 정말 내 남자 친구라면 사양 없이 부탁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어제 술기운에 그에게 해버린 말도 미안했고 그래서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네.”나는 숟가락을 들어보려 했지만 손이 여전히 힘없이 떨렸다. 그러자 진정우가 내 손을 가볍게 눌렀다.“조금만 기다려요.”“물 먼저 마시고 싶어요.”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몸이 몹시 탈진해 있었다. 그는 이미 준비해 둔 따뜻한 물을 건넸다. 물은 미지근하고 꿀맛이 약간 섞여 있어서 마시기 딱 좋았다.그는 정말 단순히 고맙다는 말로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배려해 줬다.진정우가 차려준 저녁은 내 취향에 딱 맞는 깔끔하고 건강한 메뉴였다. 애호박 새우볶음, 마늘 향이 나는 우엉,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나는 어제 물어보고 싶었던 게 생각나서 물었다. “어제 그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진 않았어요?”말을 꺼내면서 무심코 그의 손과 얼굴을 훑어봤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아니요.” 진정우가 내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설령 온다고 해도 저한테 상대가 되겠어요?”그의 당당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입의 죽을 마시고 나서 다시 물었다.“혹시 아버님 사고 건은 진전이 좀 있었어요? 대체 어떤 사람들을 건드렸길래 당신을 협박하는 거예요?”진정우는 눈빛이 깊어지며 말했다. “그들이 겁내는 건, 제 아버지의 사장님이 돌아가신 이유를 제가 파헤치려는 거예요.”진정우는 이야기를 절반쯤만 하며 말끝을 흐렸고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사장님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분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줄 만큼?”“그분은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젠 직접적인 이익에 관련된 건 아닌데...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그 사장님의 아이가 언젠가 자신들을 원망하게 될까 봐 그래요.” 진정우의 말이 끝나자 나는 묘하게 목이 메어 왔다.“그 사장님에게 자식이 있었군요. 혹시 그 사람을 본 적 있어요? 그 사람도 당신이 조사하는 걸 알기나 하나요?” 나도 모르게 세 가지 질문을 쏟아냈다.진정우는 잠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몰라요.”내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계속 조사할 거예요?”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근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제 그 사람들 보니까, 배후에 꽤 큰 세력이 있는 것 같던데.” 진정우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치는 게 걱정돼요?”그의 말이 살짝 애매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정우 씨, 당신 아버님도 그 사장님도 이미 돌아가셨잖아요. 지금 무언가를 밝혀낸다고 해서 그분들이 돌아올 순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 위험해지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요.”진정우의 눈빛이 깊어
말이 먼저 나가고 생각이 따라오는 이 버릇, 정말 큰 일이다. 내가 무심코 말해버린 걸 스스로 인지하는 순간, 진정우가 뜻밖에도 대답을 했다.“그래요.”진짜 동의한 거야?! 보통은 자존심 세우면서 거절할 법도 한데... 돈을 빌리는 건 둘째 치고라도 내 제안을 진짜로 받아들이는 줄은 몰랐다. 그가 그렇게 간절히 필요한 돈이라면, 정말로 여동생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거겠지. 그 생각에 괜스레 짠해졌다.순간, 내 속이 들킨 듯 어색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여동생이 병원에서 진찰받은 적 있죠? 혹시 진찰 기록이 남아 있다면 저한테 주세요.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볼게요.”“그래요.” 그가 또다시 흔쾌히 대답했다.더 이상 할 말이 없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 가볼게요.”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상태 안 좋으면 꼭 연락해요.”“그래요.” 나는 미소로 답하고 뒤돌아 나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따뜻한 배려도 어느새 나에게는 부담처럼 느껴진다.집에 돌아와 문에 기대어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강유형에게서 온 전화였다. 왜 이 시간에 나를 찾는 걸까 싶어서 그냥 두었는데 통화 목록을 보니 그동안 20통이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거의 다 강유형이었고 몇 통은 고준석에게서도 와 있었다. 고준석도 역시 강유형의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전화를 하는 걸 보면, 아마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지원아, 지금 어디야? 나 좀 만나자.” 그의 목소리가 힘겹게 떨렸고 살짝 술에 취한 듯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이제 나한테 마음이 없지.”내가 여전히 침묵하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지원아, 정말 날 떠나는 거야? 우리... 10년 동안 함께였잖아. 넌 항상 나를 좋아했잖아...”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샤워를 마친 후, 진정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 앞에 준비해 둔 아침 식사를 챙겨가라는 내용이었다. 왜 그동안 그의 아침을 먹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지만 여전히 챙겨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의 정성을 저버리지 않으려 아침을 챙겨 먹고 회사로 출근했다.출근이 일렀던 탓에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의 일정을 정리하고 팀원들의 업무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나니 아직 근무 시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모처럼 친구들의 소식을 보기 위해 SNS를 확인했다. 비록 대화는 자주 하지 않지만 이곳을 통해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신지태는 당구 챌린지에 나가겠다고 올렸고 안리영은 오늘 맞이한 아기 천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출산을 돕는 일마다 하나씩 기록하는데 오늘로 5,566번째 아기를 맞이한 셈이다. 그녀 자신도 이 숫자에 감탄한 듯했다.안리영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엄지를 치켜드는 이모티콘을 남겼다. 다음으로 넘기다가 강유형이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앞으로 남은 삶, 너희를 지키면서 살 거야.”라는 문구와 함께 어머니와 아이가 등장하는 그림이었다.순간 가슴이 꽉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조나연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분명했다. 강유형이 밤중에 올린 게시글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요’와 축하 댓글을 달았고 심지어 나와 강유형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둘을 엮어 축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댓글을 남겼다. “축하해. 행복하길.” 그러고는 곧바로 SNS를 닫았다. 핸드폰을 옆에 두고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주 아프다기보다는 그저 무겁고 답답할 뿐이었다. 이 감정을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허진호였다. 그의 사무실을 봤더니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부대표님.”“지원 씨, 당분간 회사에 안 나와도 돼요.
신지태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내자 그의 전화가 바로 걸려 왔다.“왜? 그 사람이 너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신지태의 직설적인 물음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오히려 내가 그 사람한테 이상한 짓 하고 싶은데, 문제는 그 사람 얼굴도 못 봤다는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겠어?”“얼굴도 못 봤다고? 그러면 단순히 궁금해서 알아보라는 거야?” 신지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너, 내가 한가한 줄 알아?”며칠 전에 당구 대회 준비한다고 바쁜 신지태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좀 성급했나 싶은 생각에 약간 미안해지며 대답했다.“바쁘면 됐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꼭 확인해야 하는 건 아니고.”“네 그 말이 오빠를 속상하게 만드는 거 알지?” 신지태가 장난스레 투덜거렸다.나도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진짜야, 오빠. 시간 되면 알아봐 주고, 아니면 말고.”“그래, 알았어. 다른 사람 일은 몰라도 네 부탁은 들어줘야지. 어떻게든 알아볼게.” 신지태는 흔쾌히 응답했다.하지만 통화를 끊지 않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신지태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려다 말고는 “됐어. 그냥 네가 힘든 일 생기면 언제든 말해.”하고 말을 맺었다.그가 별말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어제 있었던 일, 특히 강유형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면 서로 난감했을 테니까.“고마워. 대회 때 응원하러 갈게. 티켓 구해줘!” 내가 활기차게 말하자 신지태도 웃으며 대답했다.“좋아! 준비해 줄게!”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집으로 향했다. 어제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친 탓에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집 앞에 도착해 보니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나는 차를 주차하고 다가가 보니 공고문이 눈에 들어왔다.재개발!이 세 글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가 언젠가 재개발될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당황스러웠다.다른 사람들에게 재개발은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다. 하룻밤 사이에 부
나는 앞으로 어디에서 부모님과의 추억을 찾아야 할까?“다윤아.”현관 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바로 맞은편 집에 사는 집주인 아주머니였다.재개발 소식을 듣고 온 것이 분명했다.“여기가 곧 철거된다니, 아쉽네.”아주머니는 흔치 않게 탄식을 내뱉었다.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그러자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나도 얼마 전에 돈 들여 집을 조금 손봤는데 겨우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이사를 해야 한다니, 억울하네.”나는 말없이 웃음만 지었다.“방을 빌린 청년한테 전화했는데 연락이 안 되네. 혹시 그 친구 보게 되면 이 소식 좀 전해주고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줘. 곧 철거될 거라 미리 준비하라고 말이야. 짐도 챙기게.”아주머니가 나에게 부탁했다.“네, 그렇게 할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아주머니가 감사 인사를 전하더니 갑자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청년 만나봤지? 괜찮은 사람이지?”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나쁘지 않아요.”“그 정도가 뭐야? 그 청년 같은 인물 드물어. 딸이 없어서 아쉽지, 있었으면 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괜찮은 청년이던데.”아주머니도 진정우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아줌마도 낳으세요.” 나는 농담처럼 받아쳤다.평소 같으면 불쾌하게 들렸을 수도 있지만 요즘에 60대 노인의 출산 뉴스가 화제가 되면서 분위기가 가벼워졌다.“나는 그럴 체력도 없지. 그만 놀려.”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나도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슬슬 너도 이사 준비해야겠다. 쓸모없는 건 버리고 팔 수 있는 건 팔아라. 내가 아는 고물상 전화번호가 있는데 사람도 괜찮고 가격도 잘 쳐줘. 필요하면 번호 줄게.”그 따뜻한 배려에 거절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아주머니는 고물상 전화번호를 건네고 가셨고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열자 온 집안 가득히 묻어 있는 추억이 나를 맞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