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정우를 바라봤고 진정우도 나를 바라봤다. 우리 둘만 있는 방 안에서 공기가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쩐지 이상했다. 전에 호텔 방에서 함께 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널찍한 방에서 우리는 숨 쉴 공간조차 좁게 느껴졌다. 진정우는 나와 몇 초 동안 눈을 맞추고 나서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소파에서 자는 게 맞겠어요.” “그래요...” “윤지원 씨의 방은 진짜 남자친구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겠죠. 저는 소파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진정우의 말에 어쩐지 그를 홀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일부러 나에게 부담을 주려는 것도 느껴졌다. 그 역시 정말 남자친구가 되고 싶은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교묘한가 싶다.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나는 그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로 하고 짧게 대답한 후 빠르게 부모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전 복도에서 있었던 일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만약 진정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 혼자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정말 제대로 막아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다행이었다. 진정우가 마침 나를 찾아온 것이. 진정우를 떠올리며 문 쪽을 바라봤지만 문은 닫혀 있어 바깥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소파에서 자고 있을까? 문밖에서 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세면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아직 깨어 있는 건 분명했다. 그의 발소리를 들으니 어린 시절 부모님이 외출할 때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익숙한 소리였지만 지금은 이 소리가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진정우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밖을 나가 보려고 기다리다가 결국 졸음이 몰려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잠에서 깼다. 문을 열면서 내가 부모님 방에서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우가 이 집에 있다는 걸 떠올리며 소파를 힐끗 바라보았다. 진정우는 정말로
나는 왜 우는지 몰랐지만, 그냥 마음이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엄마 아빠가 없는 집에서 나를 관심해 주는 이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이 나타나서일 수도 있고, 놀이동산을 그만둬서도 정신이 그쪽에 가 있다는 것을 진정우가 알아줘서일 수도 있었다.쪽지를 반복적으로 쳐다보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 보온 도시락과 그릇에 담겨있는 계란후라이를 발견했다.이순간 나는 쪽지를 가슴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나에게 아침을 준비해 준 진정우에게 나는 감사의 인사로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고마워요.]아주 간단한 감사의 인사였지만 응당하다는 식으로 그의 성의를 받을 순 없었다.문자를 보내고 어제 야시장에서 구매한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이순간 나는 무엇이라도 기대하고 있듯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하지만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고 비서님.”“으흠.”고준석은 목을 가다듬었다.“윤 팀장님, 새로운 일자리 찾으셨나요?”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무슨 일인데요?”고준석은 또 목을 가다듬더니 대답하는 대신 질문했다.“입사하셨나요?”나는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아, 아니에요. 그냥 관심 차 여쭤보는 거예요.”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고 비서님께서 저한테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그냥 여쭤보세요.”고준석은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고민하고있는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굳이 재촉하지 않고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꿔놓고 계속해서 물건을 정리했다.“대표님께서 윤 팀장님이 입사하신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고준석은 한참동안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하나도 놀랍지 않았지만, 고준석이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이 정도로 간단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그만 행동을 멈췄다.“왜요. 또 저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요?”“역시 대표님이랑 오래 함께하셔서 바로 아시네요.”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내가 성공적
나는 강유형과의 관계를 깔끔하게 해결하고 싶었는데 진정우가 중간에서 큰 역할을 해줬으면 했다.고준석과의 통화를 마친 나는 계속해서 집 안을 정리했다. 어제저녁 진정우가 덮었던 핑크색 이불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나는 갑자기 진정우가 이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어 피식 웃고 말았다.생활은 매일 같이 어려움이 닥쳐오지만 이렇게 생각지 못한 웃음 포인트가 나타나기 마련이었다.고준석이 한 말로 마음이 복잡해져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고 담담하게 회사 해고통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집 안 구석구석을 다 정리하고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물까지 주었지만, 핸드폰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차를 끓여놓고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아래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궁금한 마음에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더니 가구센터 직원들이었다.그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얼마 안 지나 집주인 아줌마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아, 새로 이사 오신 분한테 새로운 가구를 준비해 주셨나 보네.’갑자기 어제저녁 나를 미행한 소개팅남이 생각나 이웃집에 집주인 아줌마가 말한 그 남자가 입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위험이 닥쳤을 때 문 두드려서 도움을 요청하면 모르는 체하지는 않을 것이다.다시 의자에 앉아 책 보면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자, 집주인 아줌마가 웃으면서 인사했다.“지원 씨, 미안해요.”집주인 아줌마가 임대 이야기가 잘 끝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길래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이때 나는 활짝 열린 이웃집 문을 통해 발견한 준비된 가구들을 보면서 물었다.“언제쯤 입주하시는 거예요?”“아마도 오늘일 거예요.”집주인 아줌마는 말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급하지 않다고 하더니 오늘 아침부터 전화 와서 입주하고 싶다지 뭐예요. 그러면서 가구 같은 걸 미리 준비해달라고 하더라고요.”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그렇게 급하대요?”
안리영과 한창 이야기 나누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주인 아줌마가 오늘 입주할 수도 있다더니, 지금 왔나 보네.’“리영아, 새로 오신 이웃분한테 인사해야 하나? 어제 같은 일이 벌어지면 도움을 청하기도 좋잖아.”내가 안리영한테 물었다.“이웃이 남자라면서. 이제 막 입주했는데 바로 문 두드리러 가면 변태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안리영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그런가?”안리영이 대답했다.“당연하지.”‘그래. 그러면 우연한 만남을 기대해 보지, 뭐. 이웃과 만날 확률은 그래도 많으니까.’하지만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앞으로 며칠동안 만나보지 못했고, 진정우 역시 다시는 오지 않았다.‘소개팅남이 다시 찾아와서 복수할까 봐 걱정되지도 않나?’나는 갑자기 진정우에 대한 호감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주말 저녁까지 해고통지 전화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도 내일은 정상적으로 입사하기로 했다.출근룩을 정리하고 있을 때, 이소희한테서 연락이 왔다.“언니, 왜 놀이동산 일을 하나도 관심하지 않는 거예요?”“신경 쓰지 않으려고요.”사실 신경 쓰지 않을수가 없었는데 진정우가 건넨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쪽지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나는 그제야 진정우를 많이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때 이소희가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언니, 진 기사님 이제는 저희 야간근무 못하게 해요.”“네?”나는 의문이 가득했다.‘조명 테스트를 하려면 낮에 1차 테스트를 진행하고 저녁에 2차 테스트를 해야 하는데 야간근무를 안 하고 어떻게 한다는 거지?’“진 기사님께서 마지막에 한 번에 테스트하자고 하더라고요.”이소희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이러면 어떡해.’‘마지막 테스트 때 문제가 생겨서야 수습하다 보면 다른 테스트가 통과된 부분에도 영향이 미칠 텐데. 테스트하면서 진행하자고 했던 거, 나랑 같이 상의한 뒤에 결정 내린 일이었잖아. 왜 갑자기 바꾸는 거지?’나는 말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소희와
이어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이 아직 열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이때 문이 열리고, 회색 잠옷을 입고있는 진정우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새로 온 이웃이 정우 씨였다니. 요 며칠 날 보러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맞은편에 이사 온 거였네. 야간 근무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왜 이사 온 사실을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지? 수도관을 수리해 줄 때부터 맞은편에 이사 오기로 마음먹었던 거야.’나는 진정우를 보는 순간 깨닫는 것이 많았다.“들어오세요.”나한테 들켜버린 진정우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이웃집에 이사 온 것은 잘못한 일도 아니지만 나는 평온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그래서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진 기사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시죠?”“들어오시면 말씀드릴게요.”진정우가 안으로 들어오라면서 몸을 비켜주자, 나는 이를 꽉 깨문 채 안으로 들어갔다.나를 위해 이곳에 이사 온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가지고 논 듯한 느낌이 들어 화가 났다. 전에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안의 모습에 나는 들어가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원래 있었던 물건들은 온데간데없이 전체 거실에는 소파 하나만 놓여있었다.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마치 도둑맞은 집처럼 텅 비어있었다.“방 안에 있던 물건은요?”내가 본능적으로 묻자 진정우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언제 와보셨어요?”늘 내 물음에 똑바로 대답하지 않는 진정우의 모습에 나는 또 놀아났다는 생각에 힘껏 그를 째려보았다.진정우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방을 가리키더니 말했다.“다 저 방에 넣어뒀어요.”‘그런데 이 큰 거실에 필요한 물건이 소파뿐이라고? 사람 사는 곳이라면 TV랑 테이블 정도는 있어 줘야 하지 않나? 물컵도 놓을 수 있고 핸드폰도 올려놓을 수 있잖아. 너저분한 것이 싫은 사람이었다면 청평에 있는 우리 부모님 집에서는 왜 방을 정리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저희 둘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친구 사이도 될수 없을 것 같네요. 저는 다른 사람을 찾아볼게요.”우두커니 서 있던 진정우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면서 말했다.“어떤 사람을 찾고 싶은데요?”나는 본능적으로 후퇴했지만 내가 뒤로 물러날수록 진정우는 나한테 더욱 가까이했다.“다시 소개팅할 거예요? 아니면 아는 오빠나 친구를 찾을 거예요?”질투심이 가득한 말투였다.“정우 씨!”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으로 막았다.“저 지원 씨한테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인데 지원 씨가 거절한 이상 치근덕거리지 않을 거예요.”‘응?’나는 당황하고 말았다.진정우는 차가운 표정과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저는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이웃이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셔도 돼요.”나는 할 말을 잃었다.‘내 생각이 불순하다는 건가?’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진정우가 먼저 말했다.“아까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뻘쭘해하고 있던 나는 마침 할 말이 생겼다.“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퇴근하신 거예요? 놀이동산 쪽에 있는 일은 이미 다 끝냈어요?”“아니요.”진정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나는 장난스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진 기사님, 일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퇴근한 걸 보면 이 프로젝트를 사전에 끝낼 수 있는 거 맞아요?”“저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에요.”진정우의 확고한 말투에 내 입도 따라서 움찔거렸다.“그런데 이제 와서 테스트방식을 바꿨다가 마지막 테스트 때 문제가 생기면 시간 낭비하는 거잖아요.”“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제가 전적으로 책임질 거예요.”진정우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나는 그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몰랐지만 메인 테스터로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2초간 망설이다 한마디 했다.“정우 씨, 비록 제가 퇴사해서 이제는
새벽 5시.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새로운 일자리에 임하려고 아침부터 일어나 요가까지 했다.6시. 샤워를 마치고 아침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진정우한테서 온 문자였다.[아침밥 준비해 뒀어요. 키는 지원 씨 집 문손잡이에 있어요.]나는 이 문자를 보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문을 열어보니 정말 키가 걸려 있었고, 진정우의 집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아침밥이 준비되어 있었다.어제저녁, 나는 음식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결국 그를 도와 먹어주기로 했다.‘그런데 오늘 이 아침밥은 어떻게 된 일이지? 무료로 도우미 아줌마라도 하겠다는 건가?’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침밥을 준비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그래도 문자로 물어보기로 했다.[무슨 뜻이에요? 알바라도 하고 싶어요?][네. 지원 씨가 알아서 팁 같은 거 주면 좋죠.]‘말을 잘 받아치는데?’이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있는 나는 잠깐 고민했다.[정우 씨, 너무 선 넘는 거 아니에요? 저희는 가짜 연애를 하고 있다고요.][연애는 가짜라고 해도 연기 기간에 지원 씨 건강은 제가 책임져야죠. 아니면 또 시간 내서 지원 씨를 보살펴야 하잖아요.]그의 보살핌 따위 필요 없는 나는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괜히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연기만 하면 되니까 제가 죽든 살든 정우 씨랑 상관없어요. 다음부터 저를 위해 요리를 안 하셔도 돼요. 해도 어차피 안 먹을 거예요.]내가 너무 냉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보살핌에 익숙해지지 말아야 했고, 또 가능성 없는 일에 목매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아침밥은 나름대로 맛이 좋았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어서 그런지 출근길에 힘이 났다.회사로 가는 길에 아직 해고통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만나서 직접 말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생각 때문에 기분이 확 나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회사에 가보기로 했다.“윤 부장님, 환영해요.”제일 먼저 허진호가 눈에 들어왔고, 그가 반갑게
하지만 나는 실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KS 그룹에서도 안방마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면서 가만히 놀고먹지는 않았다.일주일 동안 나는 모든 고객의 자료와 회사자료를 한번 다 훑어보았고, 또 각 마케팅 부서 직원들의 2년간 업무 상황과 반년 동안의 KPI도 알아보았다.나는 다시 업무를 분배했고, 보너스와 벌칙 제도까지 내놓았다.다들 처음에는 의욕이 활활 타오르다 마지막에는 의욕을 잃는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 목적은 열심히 하는 만큼 얻는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회사에 헌신하는 것도 강유형의 압력도 무시하고 나를 채용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었다.내가 한창 자신감 넘쳐있을 때, 직원을 통해 현재 담담하고 있는 고객들이 전부 계약해지를 제출했다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이미 얘기가 끝난 고객들도 갖은 이유를 대면서까지 계약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순간 나는 강유형의 짓이라고 생각했다.회사에 압력을 주지 못해 고객을 뺏는 비겁한 방식으로 회사에서 나를 포기하기를 바라는 거였다.이번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허진호한테 보고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신경 쓰지 마세요. 그분이 뺏어갈 수 있는 고객이라면 애초에 저희 고객이 아닌 거예요. 또다시 찾으면 되죠.”나는 80%의 고객이 강유형 쪽으로 유실되었다는 보고서까지 보여주었다.“괜찮아요. 윤 부장님만 빼앗아 가지 않으면 잃어버린 고객만큼 윤 부장님께서 또다시 확보할 수 있다고 봐요.”허진호는 유난히 나한테 믿음이 강했다.사실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부대표님, 대표님께 보고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설명을 늘려놓기 시작했다.“다른 뜻은 없지만, 고객을 이렇게 많이 유실했는데 보고드리지 않았다가 대표님께서 갑자기 이 일을 따지기 시작하면 부대표님께서 난처해하실까 봐요.”피식 웃기만 하는 그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진정우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소영이 마당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날리며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진소영은 책에 몰입해 있었고 우리가 내린 것도 몰랐다. 이때 도성운이 크게 외쳤다.“소영아, 누가 왔는지 봐봐!”“성운 오빠, 엔진 소리가 어찌 크던지 단번에 오빠인 줄 알았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성운은 조금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었다.“나만 온 거 아닌데. 다른 사람도 있어.”진소영은 책을 계속 읽으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성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가볍게 그를 막으며 사뿐사뿐 진소영에게 다가갔다.“이 책 저번에 같이 읽었잖아?”지난번에 봤던 오래된 연애 소설 책이었다. 진소영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언니!”나는 환하게 웃었고 진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진정우를 보고 급히 책을 던져두고 그에게 달려갔다.“오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평소에도 진소영을 많이 챙겼다. 나는 그들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진소영이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링」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이 많이 갈라지고 색이 바래 있었기에 분명 여러 번 읽은 책일 거다.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넘기다 진소영이 다가와서 책을 빼앗으려 했다.“안 돼요. 보지 마세요.”그녀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왜? 이 책에 비밀이라도 있어?”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언니는 오빠랑 연애 중인데 이런 소설을 보면 안 되죠.”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아, 그럼 연애 초보인 너에게 딱 맞는 교과서겠네.”“언니!”진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쏘아봤다.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책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들어와 물 좀 마셔.”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우가 물을 꺼내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든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떨렸다.“이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나도 그래.” 그러자 진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제 별로 감동이 없었다.그런데 차에 앉아 그의 SNS를 보니 조금 전에 본 노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글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서.]한눈에 보면 사진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그 의미가 확 와닿았다. [이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진정우는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형, 이번에 결혼식 하려고 돌아온 거야?” 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진정우의 친구였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우리를 데리러 왔다.“아니. 이번은 아니야.” 진정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다음에 한다는 뜻인가?“형수님 미인이시네.” 그 남자가 나를 몇 번이나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그럼.”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형수님 나는 도성운이라고 해요“ 그 남자가 친근하게 자기를 소개했고 나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알아요. 알아요.” 도성운은 두어 번 반복하며 말했다. “소영이가 매일 말하더라고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알죠. 형수님 이름이 윤지원이란걸.”나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좀 떨쳐내고 있었는데 도성운은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아마 자기 소개할 일 없겠네요.”“그러묭. 이렇게 예쁜 분이 오면 다들 한 번에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되는 칭찬을 들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그런데 진정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보니까, 네가 먼저 분위기 잡은 것 같네.”도성운은 진정우를 많이 존경하고 따라 배우고 싶
그가 진지하게 내게 농담하는 건가?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그래서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었다.“안 믿으면 한번 해봐?”진정우의 뜨거운 시선에 내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나는 그를 한 번 꼬집으며, 일부러 화난 척했다.“너 계속 듣고 싶어? 안 듣고 싶으면 말 안 할 거야.”“듣을거야!”나는 창밖을 보며, 강진혁이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진정우에게 전했다.그는 내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 듯 물었다.“너 걱정되는 거야?”“응, 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야. 회사가 걱정이야.”내가 그렇게 바로잡자, 진정우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알아, 너는 이 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거라고 느끼는 거지?”진정우는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너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닐 거야. 혹시 강진혁이 돌아오는 것도 이미 다 계산된 일일 수도 있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럴 수도 있어?”내가 의심하고 있었던 부분을 진정우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강진혁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안다. 그는 늘 나와 강유형을 위해 양보하며,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강진혁은 4년 전에 회사를 떠나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 그렇게 회사를 걱정한다면 굳이 4년 전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진정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지원아, 사실 너는 남자들에 대해 잘 몰라.”나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그럼 남자의 입장에서 말해봐.”“강진혁이 너 좋아하지?”진정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나도 이제야 알았어. 예전엔 몰랐고 이번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거야.”나는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강유형이랑 비슷한 시기에 좋아했을 거고 그 감정은 강유형보다 더 강했을 수도 있어.”진정우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걸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누구나 속고 사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나는 그를 바라보며 민감하게 물었다.“혹시, 앞으로 나를 속이려고 하거나 이미 나한테 뭔가 숨긴 거 있어?”진정우는 잠시 침묵했다.“...아니.”그 두 마디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내 입장을 밝혔다.“너무 싫어.”그러자 그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다.“알겠어.”만약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명확하게 말하고 싶었다.그때 공항 대기실에 비행기 탑승 안내가 나왔고 해외행 비행기였다.나는 본능적으로 강유형을 떠올렸다. 그가 짐을 끌고 보안 검색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해외에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사업 얘기라도 하러? 아니면... “우리 이제 보안 검색대 쪽으로 가자.” 진정우가 내 생각을 끊으며 말했다.“어!” 나는 대답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강유형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진정우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우의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불안하고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가자.”우리는 보안검색을 무사히 통과하고 비행기도 무사히 탑승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 내 휴대폰에 한 통의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강유형이었다.[안전 비행.]그 문자를 보며, 예전에 그가 출장을 갈 때마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그때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보내곤 했다.어느 날, 강유형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런 말 너무 촌스럽잖아. 다음엔 다른 말로 보내봐. 새로 배운 거 있으면 알려줘.”그 이후로 나는 그 말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안전 비행.]그 문구는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는 가까운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늘 그 말을 떠올린다.다시 볼 수 있을지라는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유형은 내 마음을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