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정우를 바라봤고 진정우도 나를 바라봤다. 우리 둘만 있는 방 안에서 공기가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쩐지 이상했다. 전에 호텔 방에서 함께 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널찍한 방에서 우리는 숨 쉴 공간조차 좁게 느껴졌다. 진정우는 나와 몇 초 동안 눈을 맞추고 나서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소파에서 자는 게 맞겠어요.” “그래요...” “윤지원 씨의 방은 진짜 남자친구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겠죠. 저는 소파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진정우의 말에 어쩐지 그를 홀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일부러 나에게 부담을 주려는 것도 느껴졌다. 그 역시 정말 남자친구가 되고 싶은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교묘한가 싶다.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나는 그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로 하고 짧게 대답한 후 빠르게 부모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전 복도에서 있었던 일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만약 진정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 혼자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정말 제대로 막아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다행이었다. 진정우가 마침 나를 찾아온 것이. 진정우를 떠올리며 문 쪽을 바라봤지만 문은 닫혀 있어 바깥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소파에서 자고 있을까? 문밖에서 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세면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아직 깨어 있는 건 분명했다. 그의 발소리를 들으니 어린 시절 부모님이 외출할 때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익숙한 소리였지만 지금은 이 소리가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진정우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밖을 나가 보려고 기다리다가 결국 졸음이 몰려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잠에서 깼다. 문을 열면서 내가 부모님 방에서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우가 이 집에 있다는 걸 떠올리며 소파를 힐끗 바라보았다. 진정우는 정말로
나는 왜 우는지 몰랐지만, 그냥 마음이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엄마 아빠가 없는 집에서 나를 관심해 주는 이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이 나타나서일 수도 있고, 놀이동산을 그만둬서도 정신이 그쪽에 가 있다는 것을 진정우가 알아줘서일 수도 있었다.쪽지를 반복적으로 쳐다보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 보온 도시락과 그릇에 담겨있는 계란후라이를 발견했다.이순간 나는 쪽지를 가슴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나에게 아침을 준비해 준 진정우에게 나는 감사의 인사로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고마워요.]아주 간단한 감사의 인사였지만 응당하다는 식으로 그의 성의를 받을 순 없었다.문자를 보내고 어제 야시장에서 구매한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이순간 나는 무엇이라도 기대하고 있듯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하지만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고 비서님.”“으흠.”고준석은 목을 가다듬었다.“윤 팀장님, 새로운 일자리 찾으셨나요?”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무슨 일인데요?”고준석은 또 목을 가다듬더니 대답하는 대신 질문했다.“입사하셨나요?”나는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아, 아니에요. 그냥 관심 차 여쭤보는 거예요.”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고 비서님께서 저한테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그냥 여쭤보세요.”고준석은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고민하고있는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굳이 재촉하지 않고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꿔놓고 계속해서 물건을 정리했다.“대표님께서 윤 팀장님이 입사하신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고준석은 한참동안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하나도 놀랍지 않았지만, 고준석이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이 정도로 간단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그만 행동을 멈췄다.“왜요. 또 저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요?”“역시 대표님이랑 오래 함께하셔서 바로 아시네요.”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내가 성공적
나는 강유형과의 관계를 깔끔하게 해결하고 싶었는데 진정우가 중간에서 큰 역할을 해줬으면 했다.고준석과의 통화를 마친 나는 계속해서 집 안을 정리했다. 어제저녁 진정우가 덮었던 핑크색 이불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나는 갑자기 진정우가 이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어 피식 웃고 말았다.생활은 매일 같이 어려움이 닥쳐오지만 이렇게 생각지 못한 웃음 포인트가 나타나기 마련이었다.고준석이 한 말로 마음이 복잡해져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고 담담하게 회사 해고통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집 안 구석구석을 다 정리하고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물까지 주었지만, 핸드폰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차를 끓여놓고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아래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궁금한 마음에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더니 가구센터 직원들이었다.그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얼마 안 지나 집주인 아줌마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아, 새로 이사 오신 분한테 새로운 가구를 준비해 주셨나 보네.’갑자기 어제저녁 나를 미행한 소개팅남이 생각나 이웃집에 집주인 아줌마가 말한 그 남자가 입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위험이 닥쳤을 때 문 두드려서 도움을 요청하면 모르는 체하지는 않을 것이다.다시 의자에 앉아 책 보면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자, 집주인 아줌마가 웃으면서 인사했다.“지원 씨, 미안해요.”집주인 아줌마가 임대 이야기가 잘 끝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길래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이때 나는 활짝 열린 이웃집 문을 통해 발견한 준비된 가구들을 보면서 물었다.“언제쯤 입주하시는 거예요?”“아마도 오늘일 거예요.”집주인 아줌마는 말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급하지 않다고 하더니 오늘 아침부터 전화 와서 입주하고 싶다지 뭐예요. 그러면서 가구 같은 걸 미리 준비해달라고 하더라고요.”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그렇게 급하대요?”
안리영과 한창 이야기 나누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주인 아줌마가 오늘 입주할 수도 있다더니, 지금 왔나 보네.’“리영아, 새로 오신 이웃분한테 인사해야 하나? 어제 같은 일이 벌어지면 도움을 청하기도 좋잖아.”내가 안리영한테 물었다.“이웃이 남자라면서. 이제 막 입주했는데 바로 문 두드리러 가면 변태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안리영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그런가?”안리영이 대답했다.“당연하지.”‘그래. 그러면 우연한 만남을 기대해 보지, 뭐. 이웃과 만날 확률은 그래도 많으니까.’하지만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앞으로 며칠동안 만나보지 못했고, 진정우 역시 다시는 오지 않았다.‘소개팅남이 다시 찾아와서 복수할까 봐 걱정되지도 않나?’나는 갑자기 진정우에 대한 호감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주말 저녁까지 해고통지 전화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도 내일은 정상적으로 입사하기로 했다.출근룩을 정리하고 있을 때, 이소희한테서 연락이 왔다.“언니, 왜 놀이동산 일을 하나도 관심하지 않는 거예요?”“신경 쓰지 않으려고요.”사실 신경 쓰지 않을수가 없었는데 진정우가 건넨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쪽지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나는 그제야 진정우를 많이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때 이소희가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언니, 진 기사님 이제는 저희 야간근무 못하게 해요.”“네?”나는 의문이 가득했다.‘조명 테스트를 하려면 낮에 1차 테스트를 진행하고 저녁에 2차 테스트를 해야 하는데 야간근무를 안 하고 어떻게 한다는 거지?’“진 기사님께서 마지막에 한 번에 테스트하자고 하더라고요.”이소희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이러면 어떡해.’‘마지막 테스트 때 문제가 생겨서야 수습하다 보면 다른 테스트가 통과된 부분에도 영향이 미칠 텐데. 테스트하면서 진행하자고 했던 거, 나랑 같이 상의한 뒤에 결정 내린 일이었잖아. 왜 갑자기 바꾸는 거지?’나는 말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소희와
이어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이 아직 열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이때 문이 열리고, 회색 잠옷을 입고있는 진정우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새로 온 이웃이 정우 씨였다니. 요 며칠 날 보러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맞은편에 이사 온 거였네. 야간 근무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왜 이사 온 사실을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지? 수도관을 수리해 줄 때부터 맞은편에 이사 오기로 마음먹었던 거야.’나는 진정우를 보는 순간 깨닫는 것이 많았다.“들어오세요.”나한테 들켜버린 진정우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이웃집에 이사 온 것은 잘못한 일도 아니지만 나는 평온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그래서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진 기사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시죠?”“들어오시면 말씀드릴게요.”진정우가 안으로 들어오라면서 몸을 비켜주자, 나는 이를 꽉 깨문 채 안으로 들어갔다.나를 위해 이곳에 이사 온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가지고 논 듯한 느낌이 들어 화가 났다. 전에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안의 모습에 나는 들어가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원래 있었던 물건들은 온데간데없이 전체 거실에는 소파 하나만 놓여있었다.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마치 도둑맞은 집처럼 텅 비어있었다.“방 안에 있던 물건은요?”내가 본능적으로 묻자 진정우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언제 와보셨어요?”늘 내 물음에 똑바로 대답하지 않는 진정우의 모습에 나는 또 놀아났다는 생각에 힘껏 그를 째려보았다.진정우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방을 가리키더니 말했다.“다 저 방에 넣어뒀어요.”‘그런데 이 큰 거실에 필요한 물건이 소파뿐이라고? 사람 사는 곳이라면 TV랑 테이블 정도는 있어 줘야 하지 않나? 물컵도 놓을 수 있고 핸드폰도 올려놓을 수 있잖아. 너저분한 것이 싫은 사람이었다면 청평에 있는 우리 부모님 집에서는 왜 방을 정리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저희 둘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친구 사이도 될수 없을 것 같네요. 저는 다른 사람을 찾아볼게요.”우두커니 서 있던 진정우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면서 말했다.“어떤 사람을 찾고 싶은데요?”나는 본능적으로 후퇴했지만 내가 뒤로 물러날수록 진정우는 나한테 더욱 가까이했다.“다시 소개팅할 거예요? 아니면 아는 오빠나 친구를 찾을 거예요?”질투심이 가득한 말투였다.“정우 씨!”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으로 막았다.“저 지원 씨한테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인데 지원 씨가 거절한 이상 치근덕거리지 않을 거예요.”‘응?’나는 당황하고 말았다.진정우는 차가운 표정과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저는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이웃이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셔도 돼요.”나는 할 말을 잃었다.‘내 생각이 불순하다는 건가?’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진정우가 먼저 말했다.“아까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뻘쭘해하고 있던 나는 마침 할 말이 생겼다.“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퇴근하신 거예요? 놀이동산 쪽에 있는 일은 이미 다 끝냈어요?”“아니요.”진정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나는 장난스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진 기사님, 일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퇴근한 걸 보면 이 프로젝트를 사전에 끝낼 수 있는 거 맞아요?”“저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에요.”진정우의 확고한 말투에 내 입도 따라서 움찔거렸다.“그런데 이제 와서 테스트방식을 바꿨다가 마지막 테스트 때 문제가 생기면 시간 낭비하는 거잖아요.”“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제가 전적으로 책임질 거예요.”진정우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나는 그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몰랐지만 메인 테스터로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2초간 망설이다 한마디 했다.“정우 씨, 비록 제가 퇴사해서 이제는
새벽 5시.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새로운 일자리에 임하려고 아침부터 일어나 요가까지 했다.6시. 샤워를 마치고 아침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진정우한테서 온 문자였다.[아침밥 준비해 뒀어요. 키는 지원 씨 집 문손잡이에 있어요.]나는 이 문자를 보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문을 열어보니 정말 키가 걸려 있었고, 진정우의 집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아침밥이 준비되어 있었다.어제저녁, 나는 음식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결국 그를 도와 먹어주기로 했다.‘그런데 오늘 이 아침밥은 어떻게 된 일이지? 무료로 도우미 아줌마라도 하겠다는 건가?’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침밥을 준비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그래도 문자로 물어보기로 했다.[무슨 뜻이에요? 알바라도 하고 싶어요?][네. 지원 씨가 알아서 팁 같은 거 주면 좋죠.]‘말을 잘 받아치는데?’이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있는 나는 잠깐 고민했다.[정우 씨, 너무 선 넘는 거 아니에요? 저희는 가짜 연애를 하고 있다고요.][연애는 가짜라고 해도 연기 기간에 지원 씨 건강은 제가 책임져야죠. 아니면 또 시간 내서 지원 씨를 보살펴야 하잖아요.]그의 보살핌 따위 필요 없는 나는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괜히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연기만 하면 되니까 제가 죽든 살든 정우 씨랑 상관없어요. 다음부터 저를 위해 요리를 안 하셔도 돼요. 해도 어차피 안 먹을 거예요.]내가 너무 냉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보살핌에 익숙해지지 말아야 했고, 또 가능성 없는 일에 목매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아침밥은 나름대로 맛이 좋았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어서 그런지 출근길에 힘이 났다.회사로 가는 길에 아직 해고통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만나서 직접 말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생각 때문에 기분이 확 나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회사에 가보기로 했다.“윤 부장님, 환영해요.”제일 먼저 허진호가 눈에 들어왔고, 그가 반갑게
하지만 나는 실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KS 그룹에서도 안방마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면서 가만히 놀고먹지는 않았다.일주일 동안 나는 모든 고객의 자료와 회사자료를 한번 다 훑어보았고, 또 각 마케팅 부서 직원들의 2년간 업무 상황과 반년 동안의 KPI도 알아보았다.나는 다시 업무를 분배했고, 보너스와 벌칙 제도까지 내놓았다.다들 처음에는 의욕이 활활 타오르다 마지막에는 의욕을 잃는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 목적은 열심히 하는 만큼 얻는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회사에 헌신하는 것도 강유형의 압력도 무시하고 나를 채용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었다.내가 한창 자신감 넘쳐있을 때, 직원을 통해 현재 담담하고 있는 고객들이 전부 계약해지를 제출했다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이미 얘기가 끝난 고객들도 갖은 이유를 대면서까지 계약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순간 나는 강유형의 짓이라고 생각했다.회사에 압력을 주지 못해 고객을 뺏는 비겁한 방식으로 회사에서 나를 포기하기를 바라는 거였다.이번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허진호한테 보고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신경 쓰지 마세요. 그분이 뺏어갈 수 있는 고객이라면 애초에 저희 고객이 아닌 거예요. 또다시 찾으면 되죠.”나는 80%의 고객이 강유형 쪽으로 유실되었다는 보고서까지 보여주었다.“괜찮아요. 윤 부장님만 빼앗아 가지 않으면 잃어버린 고객만큼 윤 부장님께서 또다시 확보할 수 있다고 봐요.”허진호는 유난히 나한테 믿음이 강했다.사실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부대표님, 대표님께 보고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설명을 늘려놓기 시작했다.“다른 뜻은 없지만, 고객을 이렇게 많이 유실했는데 보고드리지 않았다가 대표님께서 갑자기 이 일을 따지기 시작하면 부대표님께서 난처해하실까 봐요.”피식 웃기만 하는 그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내 말에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똑똑한 여자네. 다음 생에선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를...”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섰고 나는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며 그가 신발을 신고 있는 곳으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용진표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막았고 대신 나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이제 사실을 다 알았으니 뭘 더 하고 싶어? 내가 널 풀어줄까?”나는 그가 날 풀어주길 원했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대표님이 말한 내용이 믿기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대표님이랑 저랑 삼촌과 셋이서 마주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삼촌에게 전화라도 해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세요”이 말은 진심이었고 또한 나는 사실 시간을 끌고 싶었다. 시간을 끌어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누가 나를 구하러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용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끌려 나갔다.용진표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혔고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그동안 삼촌과 아줌마한테 받은 친절이 정말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 그들이 나를 잘 대해준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강유형을 살릴 수 있는 피가 있어서?’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줬고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그러니 아마 용진표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왜 나를 속여야 하는 걸까? 내가 삼촌과 아줌마를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하지만 용진표는 지금 날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가 그들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렇게 나는 앉아서 고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밖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를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것 같았다.‘용진표가 나를 굶겨 죽일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내 얼굴을 응시하던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그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마치 그가 나한테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그가 웃음을 멈추고 나서 말했다.“그러면 너한테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고 죽일게. 왜냐하면 네 부모님이 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으니까.”그 말에 나는 바로 그와 계약하려던 그 계약서를 떠올렸다.“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다고요? 그게 왜 제 부모님과 상관이 있나요?”나는 다시 의문을 제기했고 용진표는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잊었어?”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그도 다른 사람한테서 돈을 받았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이 누구죠?”나는 급히 물었지만 용진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에는 누구일 것 같아?”내 부모님의 죽음은 결국 그 계약 때문이었고 그 계약은 결국 삼촌에게 넘어갔으니...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전에도 한 번 의심은 했었지만 용진표는 그 의심을 지워버렸고 심지어 삼촌이 그 계약으로 번 돈을 나에게 따로 저금해 두었다고까지 했다.지금 그가 이렇게 암시하자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용 대표님, 나이가 드셔서 기억이 잘 안 나세요? 예전에 대표님은 저에게...“내 말투는 점점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그는 줄곧 웃고 있었다. 용진표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대신 일을 처리해 준다고 했으니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일 수는 없었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싫었지만 용진표가 계속해서 그런 걸 암시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남의 돈 받고 일을 하시는 거 맞죠?”내가 다시 묻자 용진표는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이 맞았어. 네가 이렇게 똑똑한데...”그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워졌고 몸을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믿을 수 없어요. 대표님이 저를 속이고 있는 거겠죠.”“내가 너를 부모님에게 보내 주려고 하는데 왜 굳이 널 속이겠어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함소은이 말했다. “용진표의 아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 용진표가 지원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죠.”“뭐라고요?”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갑자기 나는 함소은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귀에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 자고 있어요.”나는 왜 자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눈은 뜨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어디론가 데려가졌고 그곳에서 물을 먹은 후 나는 눈을 떴다.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큰 남자였고 그가 바로 용진표의 경호원이었다.의식이 흐릿해지기 전에 함소은이 말한 내용을 떠올렸고 나는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그에게 물었다.“용진표는 어디 있어?”그 사람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나는 손과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곳은 폐차장이었고 주변에 낡은 타이어들이 쌓여 있었다.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용진표가 나를 잡아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그는 아마 내가 그가 한 일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내 몸까지 묶었으니 나한테 별로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막심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밖에는 용진표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내가 물을 마시고 깨어났으니 이제 아마 용진표가 올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고 경호원이 형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갇혀 있는 문이 열리자 용진표가 들어왔다. 그는 오늘 마치 무술 도복 같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아가씨, 또 만났네.”용진표가 웃으며 말하자 나는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날 자꾸 자극한 거야?”그가 내 앞에 서자 경호원은 의자
“진정우 씨.” 나는 평범한 동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순간 내 얼굴에 있는 미소가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회사 차를 몰고 함소은이 말한 곳으로 갔다.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함소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열었고 그때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스크롤을 위로 올려보니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는 거의 다 자책과 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우를 변호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답을 보냈고 그 후에는 다시 답하지 않았다.[언니, 보면 답장해 줘. 오빠가 나를 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해요.]진소영의 메시지를 보고 한참 생각한 후에야 나는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소영아, 나는 괜찮고 이젠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있어. 그리고 나랑 네 오빠 사이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그러자 그녀는 바로 답을 보냈다. [언니, 오빠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맹세해요.]나는 답하지 않았고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오빠가 언니에게 죽을 끓여줄 때 정신이 없어서 팔까지 데었어요.]그 메시지를 보자 나는 그가 버린 죽을 떠올리며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오빠가 언니한테 죽을 가져가고 돌아와서 잠도 자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담배도 피웠고요.] [언니, 나는 언니와 오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언니, 오빠한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돼요?][언니와 오빠가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난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으니 그냥 언니 오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웃음을 지었고 동시에 진소영이 소지훈에 대한 짝사랑을 떠올렸다.나는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소지훈이 너한테 연락했어?][아니요!]진소영은 눈물 나는 이모티콘을 덧붙
나는 숨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대범하게 대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 마치 헤어진 게 딱 내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더니... 정우 씨, 방금 윤 부장님과 정우 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허진호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갔지만 진정우는 그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네.”“정우 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허진호는 정말 끝내주는 재치로 우리를 괴롭혔다. 진정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허진호는 코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정우 씨가 살이 빠졌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던가...”허진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윤 부장님, 정우 씨에게 알려주지 말자고요.”“하하.”나는 속으로 찐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고 진정우가 딱 그 순간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그가 나를 원하지 않았기에 나도 진정우 없이 잘 살 수 있는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다.점심때, 나는 항상 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했던 함소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가 용진표랑 함께 있어서 불편할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오늘은 잘 피했어요.”함소은이 가볍게 말했다.그녀가 어떻게 피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 여자는 용진표의 곁에서 몇 년이나 보내면서도 여전히 복수를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라면 그만큼 능수능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그녀가 단지 외모를 과시하는 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그럼 다른 이유로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지원 씨가 찾으라고 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직접 만나보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나는 예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랐고 이내 흥분해서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직접 만나고 싶어요
“쫓아갈 거야?”나는 쫓아가서 꼭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도시락을 보니 더 이상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가 버린 것은 도시락도 음식도 아닌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쫓아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굴욕을 찾는 일이었다.나는 마음을 되돌리고 도시락을 다시 내려놓고 내 병상으로 돌아갔으나 이제는 젓가락을 다시 들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도시락을 주운 사람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다시 내 앞에 놓았다.“가져가세요.”“아, 아니에요...”그 사람은 손을 움켜잡으며 물러섰다.“당신이 주운 거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게다가 시름 놓고 드시면 돼요. 맛은 있을 거예요.”나는 한숨을 쉬며 음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강유형은 옆에서 음식을 먹으려는 내 손을 살짝 눌렀다.“내 음식한테 화내지 마.”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아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보고 떠난 거 같아.”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다. 방금 강유형이 내 입술 옆을 닦아준 걸 생각하니 마음이아팠다.‘아, 이거 정말... 오해는 점점 더 깊어만 지는구나.’내가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강유형은 내가 먹던 음식을 쥐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치웠다. 그리고 도시락을 손에 쥐고 나가려 했다.그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원아, 유형이 너한테 음식을 가져왔을 때 별문제 없었지?”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아,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유형의 입가에 상처가 있더라고. 싸운 거 같아서...”아줌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강유형이 나가서 진정우랑 싸운 거 아니야?’하지만 난 결국에 이 말을 내뱉지 않았고 아줌마는 또 몇 마디 했고 마지막으로 만두랑 음식이 맛이 어떤지 물었다.전화가 끊기자 나는 병원을 떠났다.다음 날 나는 회사에 갔고 마침 약속이
“잠깐만.”내 말을 들은 강유형은 재빠르게 일어섰다.지금의 그는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언제든지 응해주고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렸다.만약 예전에도 이렇게 했다면 아마 난 강유형과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만일이라는 건 없었고 나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봤다. 화면이 멈춰 있었는데 그 영상 속에는 아마 3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나는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왜 그런 영상을 찍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휴대폰을 빼앗아 보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그 순간 강유형이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그는 내가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잠드는 동안 예전 사진과 영상을 좀 봤는데 지금 넌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더라.”나는 물을 마시며 그가 한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그러면 예전엔 내가 안 예뻤다는 거네? 그래서 네가...”“그만해.”그가 내 말을 끊었다.“그 사람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물 몇 모금 마시자 나는 목이 좀 편해졌다.“조나연 그 일은 이제 다 정리한 거야?”나는 젓가락으로 목이버섯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 물었고 그 상큼하고 새콤한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강유형은 휴대폰을 다시 들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나도 그저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좀 더 먹으려던 찰나 강유형이 입을 열었다.“완전히 깨끗하게 끝냈어.”그 말에 나는 조금 더 생각했다. 그때 그 여자가 남긴 독한 말들을 떠올리며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강유형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먹을 준비를 했다.“알겠어.”“잠시만.”그때 강유형이 나를 막아 나서면서 손으로 내 입술 옆에 묻은 기름을 닦아 주었다.“기름이 묻어서.”나는 입술
강유형은 결국 강진혁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그건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에게도 마음이 없어.”그러자 강유형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너무 자주 말하지 않아도 돼.”“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나는 말을 마친 후 기침을 두 번 했고 그러자 강유형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진정우는 네가 사고를 당한 걸 몰랐어?”강진혁의 말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컵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의 온기가 몸의 차가움을 녹여주었지만 마음속의 차가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왔었어. 그리고 다시 갔어.”강유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는 물컵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나 좀 자고 싶어.”내가 눕자 강유형은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열이 나서 눈꺼풀이 무겁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다.“나와 헤어질 때는 네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뭐라고 하는 거야?’사실 맞는 말이었다. 강유형과 헤어질 때 지금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없었다.“아마 너는 천천히 칼날로 내 마음을 줄곧 찔렀기 때문에 난 아픔에 익숙해졌겠지.”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뒤로 돌아누웠고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나는 밥 냄새에 잠이 깼다. 눈을 떴을 때 강유형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에 몰입한 듯 내가 깬 줄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침대 옆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며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의 상처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냉큼 숨을 쉬었다.강유형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깨어났어? 나한테 말하지.”“배가 고파.”나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네가 배고플 줄 알았어. 예전처럼 감기나 열이 나면 깨자마자 먹는 게 첫 번째잖아.”듣고 보니 난 확실히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입맛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옆에 있던 강진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방금 그가 내가 머리를 만져준다고 했을 때 난 바로 피했고 강유형이 나를 만졌을 땐 나는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그 상황이면 서운했을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강진혁은 별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넌 아직도 강유형의 친밀한 행동에 익숙한 거 같아.”“......”“그건 당연한 소리지. 지원이는 거의 내 아내가 될 뻔했으니까.”“......”“맞아. 거의였지.”강유형은 강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아무래도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아.”강유형은 말을 끝내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체온계 좀 줘봐요.”“괜찮아. 아마도...”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끊었다.“괜찮은 건지는 그건 네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강유형의 말에 간호사는 바로 체온계를 가져와 내 이마에 대었다.“37.7도입니다.”그러자 강유형은 간호사에게 말했다.“의사에게 상황을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감염인지 아니면 그냥 물에 젖어서 감기가 온 건지 확인해 주세요.”강유형은 정말 전문가처럼 말을 이어갔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사인 줄 알겠네.’간호사는 대답하고는 떠났고 강진혁은 나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줬다.“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아마 그냥 몸이 얼어서 그런 거 같아.”두 형제가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나는 그들이 그만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강유형은 이미 먼저 말했다.“형, 아니면 먼저 돌아가. 내일 선보러 간다고 했잖아?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피부에 안 좋아.”“오빠, 선보는 거예요? 방금 왜 말을 안 했어요?”나는 조금 놀랐고 강진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할 새도 없이 강유형이 와서 방해했으니까.”이 말의 의미는 강유형이 우리 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