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으며 말했다. “진정우 씨, 저는 분명하게 얘기했어요. 우리의 목표가 다르다면 그만둬요.” “하지만 당신은 남자친구가 필요하잖아요?” 그가 물었다. “맞아요.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부담스럽네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내 말에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그가 나를 붙잡거나 타협할 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나를 과대평가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제가 무례했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를 몰고 떠나면서 마치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 진정우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 같아 차를 멈추고 숨을 고르며 어젯밤 술기운에 했던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했다. 아무나 부탁할걸. 하다못해 신지태를 남자친구 역할로 부탁하는 게 나았을 텐데 괜히 진정우를 끌어들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꽃집에 들러 꽃다발을 하나 사서 부모님 묘지로 갔다. 그동안 명절이나 부모님 기일 외에는 잘 오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어릴 적 꿈에서 자주 부모님을 만나다 보니 그리워서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묘비 앞에 이미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꽃이 시든 걸 보니 누군가가 최대한 보름 안에 다녀간 것 같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 외엔 강 씨 아버지와 강 씨 어머니뿐이었다. 혹시 그분들이 다녀가신 걸까? 그렇다면 왜 강 씨 어머니는 말하지 않으셨을까? 의아해하면서도 내가 강유형과 갈등을 빚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강 씨 어머니가 잊어버렸거나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시든 꽃을 한쪽으로 치우고 내가 가져온 꽃을 놓았다. 묘비에 새겨진 부모님의 젊은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리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 저 보고 싶으신가요? 요즘 자주 꿈에 나타나세요.” “엄마, 아빠, 저 강유형과 헤어졌어요. 죄송해요. 엄마 아빠와 강유형 부모님의 소원대로 강유형과 결혼하지 못했어요
“며칠 후면 네 삼촌 생일이잖아. 올 거지?” 강 씨 어머니의 말에 순간 멍해졌다. 이제 곧 강 씨 아버지 생신이 다가온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잊지 않을 것이다. 강 씨 가문 가족들의 생일은 모두 알람에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강 씨 가문에서 지내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항상 미리 준비해왔다. 비록 의지해 사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조심스럽게 지냈다. 혹여 어디선가 부족하게 보이면 나에 대한 마음이 달라질까 봐 신경 썼다. 순간 멍하니 대답하지 않자 강 씨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지원아, 알다시피 우리는 늘 너를 딸처럼 여겨왔어. 매년 생일에 네가 보내준 선물과 축하를 받았는데 이번에 네가 안 오면 삼촌이 많이 서운해할 거야.” 사실 나는 가지 않으려 했지만 선물은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물으니 곤란했다. 특히 최근 강유형이 미친 사람처럼 구는 걸 생각하면 내가 강 씨 가문에 가면 그가 갑자기 날 데려가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안 간다고 말하면 강 씨 어머니가 또 설득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당연히 갈 거예요, 이모.” “그럼 다행이다. 네가 안 오면 삼촌이 생일을 제대로 보내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 강 씨 어머니의 말은 일종의 압박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강 씨 어머니는 다시 물었다. “강유형이 한 짓은 우리가 이미 혼내고 나무랐어. 더는 너에게 못된 짓을 하지 않았지?”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강유형이 최근 벌인 짓을 그들이 모른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이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그들이 나에게 정말 잘해주었기 때문에 악의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그러지 않았어요.” 사실 있었더라도 강 씨 어머니는 전화를 통해 나를 달래기 위해 강유형을 꾸짖고 벌을 주겠다고 약속할 뿐이었다. 그러나 강유형은 이미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누가 말려도 막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강 씨 어머니가 아
“그래? 그럼 누굴까? 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도 꽤 되었고 예전 친구들도 이미 부모님을 잊은 지 오래야. 그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러 올 리가 있겠니?” 강 씨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 사람이 떠나면 차가워진다는 말이 딱 맞았다. 예전에는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지만 강 씨 어머니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원아, 혹시 누군가가 실수로 잘못 놔둔 걸 수도 있잖니?” 강 씨 어머니는 그렇게 내게 덧붙였다. 나는 묘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사진도 있고 이름도 있는데 실수로 잘못 올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말 같았다. “아마도 그렇겠죠.” 나는 강 씨 어머니에게 맞장구쳤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해서 말할 것이 뻔했다. 이제 강 씨 어머니 가족이 보낸 것이 아니란 걸 확신했고 부모님 옛 친구들도 아니라면 이 꽃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는 방법을 찾아 알아봐야 했다. “지원아, 괜한 걱정 말고 내가 나중에 삼촌에게 물어볼게. 혹시 옛 친구 중 누군가가 갔는지.” 강 씨 어머니는 나를 달래주려 했다. 나는 대충 대답하고 강 씨 어머니는 다시 한번 강 씨 아버지 생일에 꼭 오라고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손에 든 꽃을 사진으로 찍고 SNS에 올리며 ‘이건 누구의 추억일까?'라고 적었다. 그러자 안리영이 내 게시물을 보고 전화했다. 요즘 그녀는 정말 한가한지 SNS를 볼 시간도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상황이야?” 안리영이 물었다. 나는 상황을 설명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누군지 궁금해.” “너 진짜 강 씨 가문에 갈 거야? 그건 말 그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거잖아.” 안리영은 내 얘기를 듣고 꽃보다는 그 사실에 더 주목했다. “안 가면 이상하고 가면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돼.” 나도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남자를 한 명 데리고 가야 해. 혹시 문제가 생겨도 너를 지켜줄 수 있고 강유형과 강 씨 가문 사람들의 미련도 끊어놓을 수 있을 거야.” 안리영은
저녁 무렵 카페에서 내가 두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쯤에서야 소개팅 상대가 도착했다. 그는 비대한 체형도 아니고 머리가 벗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청량한 물빛 셔츠를 깔끔하게 입고 있어 전혀 기름지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과도 잘 일치해서 다행히 속은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지각은 호감도를 크게 떨어뜨렸고 다행히도 진짜 연애를 할 생각이 아니라 단지 강유형을 피하기 위해 잠시 그를 빌리려는 거였기에 그러려니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사실 소개팅이 아니라 전 남자친구를 빌리고 싶어서 나왔거든요.” 나는 솔직하게 내 의도를 밝혔다. 남자는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친구를 빌린다고요?” “네, 진지하게 연애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현재 상황상 급히 남자친구가 필요해요.” 나는 상세히 설명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기분이 상한 건가 싶어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비용을 지불하겠습니다.” “아, 돈이 많으신가 보네요.” 남자는 미세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돈에 흥미를 느끼는 반응이 약간 불쾌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곧바로 제안을 꺼냈다. “비용은 일당으로 드릴 수도 있고 매달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얼마가 적당할지 말씀해 주세요.” “그럼 아가씨는 얼마나 지불할 생각이신가요? 그리고 이 렌털은 단순히 겉모습만 필요한 건가요 아니면 전부 포함인가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경험이 많고 이런 일을 여러 번 해봤다는걸. 또 내가 남자친구 렌털을 이용한 첫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냥 겉모습만입니다.” 그는 전부 포함하길 원하지만 내가 허락할 리 없었다. “만약 친밀한 접촉이나 신체 접촉이 필요하면 어떻게 하죠?” 남자는 프로처럼 물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쪽 분야에서 일해 본 분이신 것 같네요. 이전에는 어떤 조건으로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
“그런 일은 많지 않아요. 사실 소개팅은 여전히 뜻이 맞는 짝을 찾기 위한 게 주요한 목적이죠.” 그의 말을 들으니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뜻이 맞는 짝이라고? 아마 나와 같은 방식으로 돈을 벌며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은 것뿐일 텐데. 다들 요즘 취업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머리를 쓰면 무자본으로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정말 남자친구로 빌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한 번 만나보면서 교제할 생각은 없는 건지 궁금한데요?” 남자는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커피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일반적으로 영리한 여성들은 교제를 선택하죠. 그러면 비용을 지불할 필요 없이 맞지 않으면 그냥 헤어지면 되니까요. 모두 그렇게 하면 당신은 손해 아니에요?” 나는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나 기회를 주진 않죠. 상대의 조건도 보고 선택할 사람만 선택해요.” 그의 의도는 이해했다. 나를 꽤 괜찮은 상대로 보고 있으니 무비용으로 한 번 시험해 볼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아까 말한 서비스 요금에 VIP 할인 혜택 같은 건 없나요?” 솔직히 그가 부른 가격은 꽤 비쌌다. 손을 잡는 것만 해도 하루에 5만 7천 원이라니 강유형 앞에서 연기를 하려면 필수적일 텐데. “없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협상 불가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조건은 다 이해했어요. 생각 좀 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동안 다른 일 받으셔도 괜찮고요. 혹시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이건 거절하셔도 됩니다.” 이 말을 하면서 문득 이게 소개팅이 아니라 완전히 사업 상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진심으로 협력하고 싶습니다.” “조건이 제 기준에 맞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좀 만나보고 결정할게요. 우수한 지원자를 고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비즈니스 협상에서 숙련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좋은 소식
아무 대답도 없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때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도대체 누구야?” “저예요!” 세 글자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이어지는 발소리와 함께 설명이 들려왔다. “오늘 저녁 카페에서 당신이 만난 소개팅 상대예요.” 그 남자라니? 나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가 나를 따라왔다니 오히려 더 무서웠다. 복도에 불이 나가 어둑어둑했고 겨우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덕분에 바로 앞 몇 걸음 정도만 볼 수 있었다. 아직 그 남자가 계단을 다 오르지 않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에 꼭 쥔 열쇠를 더 세게 쥐고 방어 태세를 갖추며 물었다. “왜 날 따라왔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나쁜 의도는 없어요. 당신 같은 여자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잖아요.” 그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남자의 모습이 어렴풋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설명에 황당함이 치밀었다. 이렇게 나를 깜짝 놀라게 해서 내가 안전해진다고? 우리는 그저 한 번 본 사이였고 계약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나를 따라왔고 보호해 주겠다니...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미 내 집까지 따라왔으니 그를 자극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온화하게 그를 달래며 물러나게 하기로 했다. 나는 속으로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고맙네요. 신경 써줘서. 저는 이제 다 왔으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내가 말을 하는 사이 남자는 계단 모퉁이를 돌아 나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목이 좀 마른데 물 한 잔 주실래요?” 그의 유치한 핑계를 듣고 속이 들끓었다. 나는 손에 쥔 열쇠를 더욱 단단히 쥐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무 늦었어요. 불편하네요.” 그는 계단을 한 걸음 더 올라오며 말했다. “우리가 사귀려고 하는데 뭐가 그렇게 불편해요?”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내 마음속 불안이 극
그가 이번엔 집 앞까지 나를 찾아왔다니 이번엔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 “무슨 일이죠?” “승낙하죠.” 그의 짧은 대답은 순간 내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 그가 뭘 승낙했다는 거지? “당신 부탁을 받아들인다고요. 임시 남자친구 역할을 하겠다고요.” 진정우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가 내 제안을 거절했던 말을 떠올리니 이번 변화가 좀 의외였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는요?” “제가 안 바꾸면 당신은 또 이상한 남자랑 소개팅이라도 해서 오늘처럼 또다시 스토킹 당할 거예요?” 진정우의 말투는 처음에는 무심했지만 뒤로 갈수록 강한 분노가 섞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불만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억지로 맞춰주다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신만 불편한 거 아닌가요?” 진정우가 내 농담을 알아듣고는 내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뒤는 난간이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가 팔을 뻗어 내 뒤쪽을 받치며 나를 그의 품 안에 가두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접근에 나도 모르게 숨이 빨라졌다. “진정우 씨...” “이런 상대랑 소개팅을 간 거예요?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하다니, 윤지원 씨 참 바보 같네요.” 그의 목소리가 귀 옆에서 울렸다. 그의 말은 꾸짖는 듯하지만 왠지 따스한 다정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말이 가슴을 울리고 가슴 깊숙이 떨림이 전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진정우와 나는 다시 침묵 속에 빠졌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의 가슴에서 들려오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귀에 생생히 들렸다. 잠시 후 그는 팔을 풀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밤늦게 혼자 들어오는 거 금지예요. 알겠죠?” “네.” 이번에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 나를 구해줘서, 또 내 부탁을 들어줘서. 덕분에 나는 강 씨 가문 가족과 강유형을 더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다. 그는 아
나는 진정우를 바라봤고 진정우도 나를 바라봤다. 우리 둘만 있는 방 안에서 공기가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쩐지 이상했다. 전에 호텔 방에서 함께 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널찍한 방에서 우리는 숨 쉴 공간조차 좁게 느껴졌다. 진정우는 나와 몇 초 동안 눈을 맞추고 나서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소파에서 자는 게 맞겠어요.” “그래요...” “윤지원 씨의 방은 진짜 남자친구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겠죠. 저는 소파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진정우의 말에 어쩐지 그를 홀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일부러 나에게 부담을 주려는 것도 느껴졌다. 그 역시 정말 남자친구가 되고 싶은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교묘한가 싶다.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나는 그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로 하고 짧게 대답한 후 빠르게 부모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전 복도에서 있었던 일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만약 진정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 혼자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정말 제대로 막아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다행이었다. 진정우가 마침 나를 찾아온 것이. 진정우를 떠올리며 문 쪽을 바라봤지만 문은 닫혀 있어 바깥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소파에서 자고 있을까? 문밖에서 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세면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아직 깨어 있는 건 분명했다. 그의 발소리를 들으니 어린 시절 부모님이 외출할 때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익숙한 소리였지만 지금은 이 소리가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진정우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밖을 나가 보려고 기다리다가 결국 졸음이 몰려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잠에서 깼다. 문을 열면서 내가 부모님 방에서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우가 이 집에 있다는 걸 떠올리며 소파를 힐끗 바라보았다. 진정우는 정말로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
교통사고는 정말 내게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그 악몽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이 절망감은 얼마나 깊은지...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순간에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 어쩌면 더 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한 상처를 입은 끝에 돌아가셨으니까.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진정우는 그런 나를 잡아주려고 애썼다.“지원아, 괜찮아. 곧 사람들이 너희를 구하러 갈 거야. 나도 금방 갈게.”그는 내게 계속 말을 걸며 진정시키려 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아파...”강유형의 힘없는 신음이 내 옆에서 들려왔다.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말조차 하지 못했다.“지원아, 왜 대답 안 해? 괜찮아?”진정우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괜찮아...”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차에서 불이 나거나 휘발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 봐.”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나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차 앞쪽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차가 또다시 흔들리더니 곧이어 세상이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으악!”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으려 했지만 다시 차가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다시 멈췄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탈진한 상태였다.“지원아! 지원아!”멀리서 진정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 있었고 내 핸드폰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까 차가 뒤집힐 때 핸드폰은 어디론가 던져졌고 나는 간절히 외쳤다.“진정우! 차가 또 뒤집혔어!”“진정우, 제발 사람들 빨리 보내줘. 제발!”커가는 공포감에 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나는 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을 볼 용기가 없었다. 만약 불이 나
차가 크게 충돌하며 뒤집히고 마침내 모든 게 멈췄다. 온 세상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 마치 내 생명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보려고 하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유형?”“나... 여기 있어.”그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렸지만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좀 비켜봐.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그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몸을 빼내려 했다.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서 겨우 빼낼 수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운전기사가 보였다.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강유형! 강유형!”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를 돌아보니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큰일이야. 둘 다 다쳤어. 어떡하면 좋아.’나는 내가 다쳤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강유형의 아래에 깔려 있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찌그러진 차체에 더 깊이 눌려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 더 큰 위험에 처할 게 분명했다.“강유형,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웅크려 봐.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어.”내 말에 그는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웅크렸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내가 나올 수 있게 하느라 그는 막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나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먼저... 경찰에 신고해.”“아니... 진정우한테 전화해.”나는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Q 클럽과 연루
감금실을 나올 때까지도 신지태의 절박한 외침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강유형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지태의 감정 상태는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가 금세 우울해질 정도로 정말 불안정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말이 기억났다.“지원아,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나 좀 꺼내줘!”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강유형이 빠르게 다가왔다.그는 내 안색이 나빠진 걸 보자 재빨리 날 부축하며 말했다.“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신지태가 무슨 얘기라도 했어?”신지태가 나한테 부탁한 걸 떠올리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신지태는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바랐다. 아마도 Q 클럽의 감시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는 나마저 위험에 빠질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강유형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진정 좀 해.”하지만 나는 물을 받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지태 오빠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어.”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지태 오빠 말로는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고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차 앞쪽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젠장!”강유형은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신지태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어떡해?”나는 공포가 밀려와 본능적으로 강유형의 팔을 붙잡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운전사에게 지시했다.“앞뒤 좌우로 네 대가 따라붙었어. 네가 알아서 어떻게든 따돌려.”운전기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대표님, 뒷좌석 안전벨트 꼭 하세요.”강유형은 재빠르게 내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주었다.차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휘청거리자 강유형은
진정우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드디어 신지태를 만났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있었고 멋있던 헤어스타일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삭발된 상태였다.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신지태는 강유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지태 오빠.”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늘 그랬듯이 그는 내 앞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의 세상은 언제나 맑은 햇살로 가득한 듯했다.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침묵하게 했다.“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아니면 너무 못생겨져서 날 못 알아보겠어?”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전부 연기였을 것이다. 나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아니야. 오빠는 언제나 멋져.”나는 그의 말을 받아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위로하지 않아도 돼.”“우리는 오빠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다 알아. 강유형과 진정우도 오빠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분명 잘 해결될 거야.”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며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유도했고 신지태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의 말이 의외였던 것 같았다.“누가 오빠를 찾아왔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디크랑 왜 다투게 됐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혹시 다른 중요한 일도 있었다면 모두 얘기해줘.”내가 간절히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내 일은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체념이 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