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예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결혼한 뒤에는 우리 돈은 부부 공동재산이 되는 거야. 네가 내 돈을 쓰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와이프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당연한 거야. 그러니 다른 이가 너를 깔보게 될까 봐 걱정할 것 없어. 와이프를 맞이하는데 이 정도도 아까워한다면 결혼하지 말아야지. 와이프는 아이를 낳아주고 함께 여생도 걸어주는데, 내 돈을 쓰는 것을 꺼린다면 그냥 혼자 살아야 하는 거야.”진예은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와 닿는 말이었지만 가슴이 더욱 아팠다.“난...”“이 말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너무 더러워서 먼저 씻어야겠어.”반재신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더 이상은 못 참겠어.”멈칫하던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샤워실이 있어, 내가 데려다 줄게.”진예은은 반재신과 샤워실로 향했다. 돌아서려는 그녀를 반재신이 뒤에서 안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너도 냄새나니까 같이 씻어.”얼굴을 붉힌 진예은은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미쳤어? 여기는 요양원이야.”“나도 알고 있어.”반재신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아무 짓도 하지 않을게.”반재신의 품에 안겨 샤워실 밖으로 나온 진예은은 얼굴이 발그레해서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다시는 반재신의 헛소리를 믿지 않겠다고 진예은은 다짐했다.그들은 그러다 복도에서 이아영과 나더를 딱 마주치고 말았다.이아영이 물었다.“어디 가는 거예요?”진예은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바디로션 향기를 맡은 나더는 헛기침을 하며 이아영의 어깨를 건드렸다.“너무 많은 것을 궁금해하면 안 돼.”말을 마친 나더는 반재신에 시선을 돌렸다.“수녀님이 우리더러 식사하라고 하던데 갈 거예요?”반재신은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갈 거야?”그의 품에서 벗어난 진예은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가야지. 수녀님의 호의는 거절할 수 없잖아?”그녀가 앞장섰다.입꼬리를 살짝 올린 반재신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멀어지는 그들 부부를 보던 이
“저 남자애가 남동생이죠?”그들을 바라보는 진예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미아는 남자애를 테이블 앞에 앉히고 뭐라고 말한 뒤 음식을 뜨러 갔고 남자애는 자리에서 기다렸다.남자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진예은이 말했다.“설마 맹인인 건 아니겠죠?”나더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이아영이 낮은 소리로 나더를 향해 외쳤다.“뭐 하는 거예요!”나더는 남자애를 마주 보고 앉았다. 남자애도 그의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누나로 착각했던 것 같다.“오늘 저녁은 메뉴가 뭐야?”나더가 손을 휘저어보았지만, 남자애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진짜 안 보이는 거야?”남자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누구...”“내 동생한테서 떨어져요!”나더를 본 미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식기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외쳤다.“복수하려면 나한테 해요.”진예은과 반재신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팔짱을 낀 나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단지 인사만 하려는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겁에 질렸어? 내가 동생한테 네가 사실은 도... 읍!”이아영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누나 친구들이야?”남자아이는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아니야.”얼굴이 구겨진 미아는 나더가 방금 한 말에 충격받은 것 같았다.“모르는 사람들이야.”미아는 동생에게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챈 진예은은 남자애에게 다가가 몸을 내렸다.“네가 미아 동생이야?”미아는 즉시 경계했다.남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누나가 또 뭘 잘못했나요?”입술을 깨물고 있던 미아가 설명하려고 입을 연 순간 진예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 누나는 우리가 너를 해칠까 봐 경계하고 있는 거야. 아주 든든한 누나를 둬서 너무 부러운데?”그러자 남자애는 밝게 웃었다.“누나는 진짜 착한 사람이에요. 가끔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나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런 누나가 가끔 화가 나요.”시선을 떨군 미
진예은이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도둑질은 안 좋은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해. 비록 부자들만 노렸고 그들이 너의 책임을 묻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모두 너에게 너그럽지는 않을 거야.”“그동안 그럭저럭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해. 제대로 걸렸다면 무사했을 것 같아? 경찰서에 신고해 며칠 감금당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을 거야. 그들이 너희들 같은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는지 알기나 해? 단순히 한두 대 때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게 하고 노예로 부리거나 팔아넘기기도 해. 네가 없는 너의 동생은 생각해 봤어?”미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동생의 수술 날짜가 언제야?”“1월 28일이요.”진예은은 가방을 뒤져 필을 꺼내 그녀의 손바닥에 별장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이틀후 연락해. 그러면 알려주는 주소로 와.”미아는 잠깐 얼어붙었다. 손바닥에 적힌 전화번호를 내려다보는 그녀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자리를 뜨던 진예은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될수록 오후에 찾아와. 그 시간을 놓치면 진짜 기회를 놓치는 거야.”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아는 무조건 잡아야 하는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늦지 않을게요!”이아영은 진예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진짜 도우려는 거야?”진예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겨우 10살이고 학교에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는데, 요양원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게 너무 안타까워.”나더는 반재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부부가 자선 재단 같은 걸 설립하는 게 어때요?”반재신은 그를 힐끔 보았다.“편해요?”나더는 냉큼 손을 치웠다.“쪼잔하네요.”“자선 재단?”턱을 괴고 사색에 잠기던 진예은이 몸을 돌려 나더를 보았다.“나쁘지 않은데요?”나더는 멈칫했다.“진짜 그럴 생각이 있는 거야?”그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거였다.“미아가 말했던 것처럼 이 요양원은 어르신들의 숙박비와 식비를 받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진예은이 말을 이었다.“수녀님이 주민을 불러 지갑을 찾는 것을 보면 주민이 그녀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요. 괴팍한 미아도 수녀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잖아요. 수녀님은 마을에서 위망이 있으신 분이고 그 원인은 아마 그녀가 독거노인들을 돌보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어서일 것 같아요.”나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 보니 수녀님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네.”어둠이 드리우고 마을은 고요했다.진예은은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수림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에는 밝고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반재신이 다가와 그녀를 안으며 물었다.“무슨 생각해?”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재단에 대해 생각 중이야.”그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네가 원한다면 어떤 결정을 해도 응원할 거야.”고개를 돌린 그녀가 반재신을 바라보았다.“정말?”“그건 외할아버지가 너에게 주신 건데 내가 동의하지 않을 이유 없잖아?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 나쁜 일도 아니잖아. 평생 부를 휘두르며 살아온 사람들은 그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 모르고 있는데 하룻밤 사이에 부자가 된 우리 와이프는 그것의 일부로 재단을 설립할 생각을 하니 나는 응당 기뻐해야 맞는 거지.”몸을 돌린 진예은이 그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앞으로 평안하고 건강하게 자랄 우리 딸을 위한 선행이라고 생각할게.”반재신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뜻대로 되길 바라.”다음 날 아침, 진예은은 사무실에서 수녀님을 기다렸다. 수녀님은 의아해했다.“저를 찾으셨나요?”마주 앉은 진예은이 입을 열었다.“수녀님이 설립한 요양원은 독거노인에게 무료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다고 미아에게 들었어요. 요양원은 재정적 수입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견지하셨는지 궁금해요.”살짝 흠칫하던 수녀님은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뗐다.“제가 어리석다고 생각하시죠?”진예은은 급히 부정했다.“그런 게 아니고...”“사실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들은 저를 어리
수녀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애써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다.“진짜요?”그녀도 재단에 찾아가 투자를 부탁한 적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노인들의 그 어떠한 비용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거절했다.그 이유는 자선하는 것이지 무료 공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이후로 다시는 재단을 찾지 않았다.그래서 이런 조건을 내미는 진예은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진예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제안하는 거라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감동한 수녀님은 눈물을 흘렸다.진예은은 급히 몸을 일으켜 종이를 건넸다.“보답할 필요는 없어요. 수녀님이 견지하신다면 저는 있는 힘껏 도울 거예요.”...점심을 먹은 후 네 사람은 마을을 떠났다.시 중심에서 이아영과 나더와도 작별 인사를 했다.별장에 도착하니 진예은 아버지, 진철환은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들이 걱정되어 애가 탄 상태였다.“어디에 있었던 거야?”진예은이 대답했다.“일이 생겨서 어느 한 마을에서 하루 묵었어요. 이렇게 무사하니 걱정하지 마세요.”진철환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무사하면 됐어. 연락이 되지 않아 신고하려 했어.”“아마 마을이어서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성인이고 재신이도 있으니 무슨 일이 있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반재신을 힐끔 보았다.반재신은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잘 해결할 거여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입꼬리를 올린 진예은은 진철환의 팔짱을 끼며 소파로 향했다.“아빠한테 상의할 것이 있어요.”진철환은 의아했다.“무슨 얘기?”진예은은 마을의 요양원에 대한 일을 진철환에 얘기했고 듣고 있던 그는 사색에 잠겼다.침묵을 지키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가 결정한 일을 아빠한테 상의할 필요 없어.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아빠는 너를 응원해.”아버지도 자신을 지지하는 모습
강유이는 알겠다고 했다.뽀로통해하는 그녀에게 한태군이 입맞춤했다.“착하지.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함께 놀아줄게.”강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래층으로 내려간 한태군이 유 집사를 불렀다.“이따가 와이프가 외출하고 싶다고 하면 함께 가주세요.”유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한태군이 별장을 떠나고 유 집사는 주방으로 갔다. 주방에서 한창 강유이를 위한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도우미가 인사했다.“유 집사님.”유 집사는 고개를 까딱였다.“다 됐죠? 내가 올릴게요.”도우미는 준비된 식사를 그녀에게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유 집사는 식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강유이의 허락 후 유 집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강유이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창으로 한 줄 햇살이 그녀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왕비는 동방미인이 맞았다. 그러니 한태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임신도 했으니 자신의 왕비 자리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다.유 집사는 식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사모님, 식사할 시간이에요.”강유이는 요즘 입맛이 없었다. 그래서 수프만 홀짝이고 내려놓았다.“오늘 외출하고 싶은데 함께 가시죠?”유 집사는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네.”두 대의 차가 강유이가 탄 도우미의 차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것도 한태군의 뜻이었고 보디가드는 반드시 그녀의 곁을 조금도 비워선 안 된다고 했다.차는 국립무비 대학에 도착했다. 진예은은 강유이의 전화를 받고 내려왔다.“유이야.”강유이는 몸을 돌리며 진예은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그녀의 곁으로 다가간 진예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진예은 뒤에 서 있는 보디가드와 집사를 힐끔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참으로 못 말리는 오빠야.”강유이가 낮게 속삭였다.“너무 지루해서 별장에서 죽을 것 같아. 임신한 것뿐인데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미칠 것 같아.”
행정부,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예쁜 여자가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즉시 문자를 삭제했다. 유 집사는 그녀가 강유이의 주위에 심어 놓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소문으로만 듣던 왕비?실물을 영접하고 싶던 그녀였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유이 앞을 막아선 한 여자가 물었다.“당신이 왕비죠?”고개를 든 강유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눈앞의 이 여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누구?”여자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저는 전하의 비서 세시아라고 해요. 저의 할아버지는 존함은 백작이고 아버지는 지금 내무부 장관이시죠.”강유이도 예의상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려는데 상대는 손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너무 많은 말을 해서 죄송해요. 전하는 지금 회의 중이시고 회사는 너무 바빠서 제대로 접대해 드리지 못할 것 같네요.”강유이는 허공에 멈춘 손을 거두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그럼,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녀는 강유이를 건드리기 시작했다.“왕비가 이렇게 질척거리는 여자일 줄 몰랐네요.”“뭐라고요?”강유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회사 때문에 힘들어하는 전하를 와이프란 사람이 이해해야 하지 않나요?”세시아는 팔짱을 끼더니 큰 키를 뽐내며 건방을 떨었다.“와이프로서 남편의 고통을 분담해야잖아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으면서 왜 더 힘들게 하는 거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은 강유이의 마음을 난도질했다.주먹을 쥔 강유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시아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회사 내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하여 한태군도 그녀가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웠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렸다.세시아는 냉소를 지었다. 이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앞으로 다가올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 더더욱 궁금했다.하지만 강유이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갑자기 멈추더니 세시아를 돌아보며 말했다.“이봐요, 한가지 말해주고 싶은 게 있는데 잘 들어요.”세시아는 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강유이는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아
한태군은 코끝을 만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 전 궁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그를 찾았고 내각회의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 후 세시아는 회사에 왔고 그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태라 가문의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황실에 수많은 공헌을 바탕으로 충성하는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종하려는 것이었다.그의 외할아버지가 생전이었을 때 그들은 재무부 장관으로 책봉된 여준우에 불만을 품고 수작을 부린 적이 있었다.외할아버지는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태라 가문의 대신을 파면했고 그 일을 통해 그들은 한동안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왕위를 계승한 지금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그들은 세시아를 한태군 옆에 붙여놓았을 뿐만 아니라 뒤에서 여론을 조작해 강유이가 왕비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그가 아직 ‘전하’가 되기 전에는 전혀 이런 태도가 아니었다.그의 표정에서 살기를 느낀 주혁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형, 갈수록 날뛰고 있는데 가만있을 거야?”한태군이 눈을 가늘게 떴다.“귀족을 뿌리째 뽑는 것이 말처럼 쉬운 줄 알아? 평범한 귀족도 아니잖아.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에도 아무 증거도 못 찾을 걸 봐선 태라 대신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어.”턱을 만지던 주혁이 중얼거렸다.“귀족들 사이의 황권 쟁탈은 너무 어려운 것 같아.”한태군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됐고, 넌 계속 감시해. 나에게 방법이 있어.”저녁, 한태군은 회사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때 세시아가 람보르기니에서 내리며 선글라스를 벗었다.“전하.”그는 걸음을 멈추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무슨 일 있어?”세시아가 다가오면 날카로우면서도 자심감 있는 미소를 날렸다.“혹시 시간 있으시면 저랑 저녁 함께하실래요?”한태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미안한데 시간이 없네?”돌아서려는 그를 세시아가 잡았다.“아버지께서 우리가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세요. 아버지 체면은 좀 세워 주시죠?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