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속인 거야, 그동안!”차설아는 쌀쌀맞게 성도윤을 쳐다보았고 실제 마음이 상했다.그동안 그가 정말 후유증이라도 남을까 봐, 최선을 다해 돌봤고,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놀아난 것 같아 화가 났고 돌이켜봐도 자신이 바보 같았다.“날 부려 먹으니까 좋아? 좋았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도윤을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뛰쳐나가다 싶이 병실을 나섰다.“난 빠질 테니 알아서 해. 놀든가 말든가.”물론 도망쳤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도윤에게 “평생 불구”의 선고를 내렸던 터라 그녀도 제 발 저린 구석이 있었다. 성도윤은 악마같이 사소한 것까지도 빈틈없이 따지고 복수는 반드시 하는 성격이라 잡혀 있으면 그녀가 죽을지도 모르기에!성도윤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임채원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걱정하는 척했다“도윤아, 그만해. 몸도 불편한 사람이 마구 움직이면 쓰나. 누워서 차분히 몸 회복하는 게 좋지 않겠어?”성도윤은 깊은 눈을 내리깔고 자기 팔을 잡은 임채원의 손을 차갑게 바라보았고 태생적으로 음산하고 시린 눈빛은 임채원마저 겁에 질려 손을 놓았다.“도윤아, 화내지 말고. 설아 씨 잡는 걸 막으려는 게 아니라, 난 진짜 네가 걱정되어서. 게다가...”임채원은 입술을 깨물더니 여우 같은 행태를 보이며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설아 씨에 대해 얘기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성도윤은 쌀쌀맞게 무표정으로 대응했다.“모르겠으면 말하지 마.”방금 자신이 불구라는 거에 대한 그녀의 반응 포함,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도윤도 임채원이라는 사람한테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넌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매정하게 하니!”소영금이 화를 내며 대신 말했다.“잊지 마. 채원이는 우리 집안의 귀한 손주를 품은 사람이야. 채원이한테나 잘해 줘. 엄마가 기분이 좋아야 애도 건강하게 잘 크지...”소영금 역시도 임채원의 속셈을 보지 못 한 건 아니었다. 차설아가
“임신이 아니라고?”소영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씨 가문의 체면은 보존한 셈이었다.“근데 임신이 아니면 산부인과는 왜 갔대?”“그게... 제가 말 하가기 좀 그런데... 도윤 씨가 마음 상할까 봐요.”임채원은 겉치레를 떨며 성도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성도윤의 조각 같은 얼굴은 순간 어두워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말해 봐.” “그게, 사실은 ...”임채원은 성도윤의 반응에 지체없이 얘기했다.“사진을 보고 나서 혹시 오해를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을 못 했어. 병원에 찾아가서 주치의를 만나 확인해 봤어. 의사 말로는 설아 씨가 임신한 게 아니라, 경수 씨와 임신 준비로 찾아왔고 엽산을 챙겨 갔다고 했어. 그리고 설아 씨가 임신하기가 어려운 체질이라 시험관 임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당연히 임채원이 만들어 낸 말이었다.병원에 주치의를 찾아갔었지만, 의사가 아니라고 딱 자르는 바람에 아무런 소식도 캐내지 못했다. 포기를 모르는 임채원은 차설아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려고 없는 얘기에 살 붙여서 주치의까지 돈으로 매수해 버렸다. 성도윤이 사람을 보내 뒷조사하더라도 문제가 안 되게 말이다.“하, 그럴 줄 알았어. 애를 못 낳는 게 설아 저 계집애 문제 맞네, 맞아. 도윤이가 정신을 차리고 이혼을 서둘렀으니 망정이지...”소영금은 성씨 집안에서 요행히 화를 피한 것 같았고 남의 불행에 즐거워했다.“잘코사니 이번엔 배씨 집안에서 화를 면하지 못하겠네. 배성준 그 사람, 자기 아들이 애도 못 낳는 여자를 만나는 걸 알면 기가 차서 어떡해.”성도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서는 듣더니 표정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걸 본 소영금은 기분이 언짢았다.“도윤아, 넌 그게 무슨 표정이니? 우리가 기뻐해야 마땅한 일 아니야? 왜 달갑지 않은 기색이지? 그리고 설아 걔가 한 말이 네가 독사에게 물린 게 걔 살리려고 그랬다며? 너 진짜 설아한테 아직 미련이 남았니? 어리버리하게 굴지 마.”성도윤은 주먹을 꽉 쥔 채, 표정 하나 변함없이 매정
며칠 안 보니, 남자는 그대로 품위 있고 멋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완벽하다는 말로도부족할 길쭉한 두 다리를 보아하니 후유증 없이 잘 회복된 것 같았다. 차설아는 큰 시름을 놓았고 부담이 그전처럼 크지 않았다.만에 하나 이 사람이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혼을 못 할거라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차설아는 머리를 정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마지막 좋은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그녀는 성도윤을 향해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장착했다.“하이...”입을 꾹 다물고 차디찬 표정을 한 성도윤이 긴 다리로 그녀를 무시한 채 스쳐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차설아는 그 미소 그대로 굳어선 채 난감하고 화도 나는 이 상황을 홀로 견디어 냈다.‘헐, 이 사람 뭐지? 암만 이혼한다고 해도 그렇지. 며칠을 약도 발라준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쌀쌀맞게 굴 일인가?’차설아는 발걸음을 다그쳐 남자의 뒤를 따라 구청 2층으로 걸어갔다. 들어가 보니 커플 여럿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딱 봐도 이혼신고 커플이 대다수였고 혼인신고 커플은 네, 댓 정도밖에 없었다.차설아는 과연 요즘 사람들이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걸”다 같이 통달해 버린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성도윤의 남다른 신분으로 구청에서 신속 접수 처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이혼신고 접수창의 주무관은 친절하게 두 사람에게 마실 것도 건네주면서 그들이 제출한 합의 이혼 서류를 받았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옆으로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있었고 분위기는 꽤 불편하고 이상했다. 차설아는 두 손으로 컵을 들고 물을 마시면서도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그녀는 곧 이 자리에서 성도윤과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게 되고, 이젠 남남이 된다. 그들이 서로 뜻이 맞는다면 이번 생에는 다신 만나지 않을 것이고, 지난 삼일과 똑같이 상대방의 세계에서 철저히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미 마음에서 내려놨는데도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
뻔한 답을 물었으니, 스스로 굴욕을 자초한 꼴이라 그녀는 묻자마자 후회했다. 그래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우격다짐을 펼쳤다.“나도 한마디 할게. 임채원도 당신의 좋은 배필이 못 돼. 인품도 인품이지만, 당신이 평생 반신불수 된다는 말에 싫은 티 팍팍 내는 것만 봐도 그녀는 당신과 동락은 해도 동고 못 할 사람이야. 그녀가 사랑하는 건 진짜 당신이 아니라 완벽함으로 수식된 당신의 배경이니까.”파란도 일지 않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성도윤이었다.“채원이가 나를 사랑하든 아니든 상관없어. 아이만 건강하고 평안하면 되니까.”“하! 도윤 씨 정말 대단해. 당신의 진짜 사랑을 이제 알았어.”마음이 모질게 치인 차설아는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낭패를 봤다.‘허허. 그렇게도 임채원을 사랑한다는 거지? 그녀가 사랑하든 안 하든 상관없을 만큼. 둘의 아이만 행복하면 된다고?’그녀는 쌍둥이를 얘기하려 했던 자신이 한심했고, 그 사실을 꺼내 보이지 않은 거에 대하여 다행스러웠다. 말했다면 쪽팔린 건 본인의 몫이었기에. 보통 사랑의 열매를 결실이라고 하면 욕망의 열매는 부담일 것이다. 부담을 안고 싶어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구청 주무관은 두 사람에게 수리된 서류에 사인하게 하고 도장을 찍었다.“성도윤 님, 차설아 님, 접수된 이혼 신고는 이로써 수리되었습니다. 이시간 부로 두 분 이혼신고 효력이 발생함을 알려드립니다. 여기 서류 받으시고요. 혼인관계증명서를 발급 받아서 보시면 됩니다.”차설아는 수리된 이혼서류를 받아 들고 눈을 내리 드리우면서 찬찬히 훑어보았다.숙려기간 후 법원에서 확인받은 합의 이혼 확인서를 구청에 신고하는 절차였다. 그 외이혼 신고는 혼인 신고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혼인 신고는 두 사람이 한 가족이 되기 위한 시작이었고 이혼 신고는 그 두 사람이 다시 남남이 되기 위한 마침표였다. 혼인과 이혼이 한 곳에서 신고되는 구청 이곳에서 그녀는 문득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미련 없이’라는 글귀가 적힌 책의 문구가 떠올랐다. 이젠 미련을 깡그
말하는 사이에 성주혁이 붓을 내려놓고는 책상 서랍에서 자단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차설아에게 건넸다.“설아야, 이걸 열어보거라.”차설아는 건네받은 나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봤다. 그 안에는 훈장이 하나 들어있었다. 훈장 위에는 평화의 비둘기와 날카로운 검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녀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성주혁을 보며 물었다.“할아버지, 이건 ...”“얘야, 이건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남긴 소중한 물건이란다. 이 훈장은 네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사람인지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지. 이제 이 훈장을 너한테 넘겨주도록 하마.”성주혁은 의형제를 맺었던 차무진의 비범했던 일생을 떠올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널 많이 걱정하셨어. 너와 도윤이가 결혼한 지 4년이 지난 후에 이 훈장을 너에게 주라고 나에게 거듭 당부했었다...”“이제 너와 도윤이가 결혼한 지 4년이 되었으니 네 할아버지의 축복이 담긴 이 훈장을 너에게 주도록 하겠다. 두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고 백년해로하길 바란다.”차설아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훈장을 손에 꽉 쥐었다.마치 생사를 넘나든 것처럼 거칠지만 따뜻한 할아버지의 큰 손이 느껴지는 것 같아 눈시울을 붉혔다.“할아버지는 살아계실 때도 저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었는데, 세상을 떠나시고도 영혼으로 저를 지켜주시려고 하네요. 할아버지의 손녀로서 정말 면목이 없네요, 할아버지께 폐만 끼치고요...”할아버지가 임종하기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거듭 당부했던 장면은 여전히 잊을 수 없었다. 차무진은 그녀에게 복수하지 말고, 다시는 그 험난하고 복잡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유능할 필요도 없고, 차씨 가문의 재기를 위해 힘쓸 필요도 없으니 평생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여자, 그리고 성씨 가문의 사모님의 역할만 잘해내길 바랐다. 아니면 세상을 뜨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내가 정말 못났네, 못났어. 할아버지의 소원도 들어주지 못하다니.’이 세상에서 사람
두 사람은 구청에서 이별한 후 한 사람은 왼쪽으로, 다른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향했다.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한 두 사람은 남은 평생 다시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기세였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하지만 진짜 이혼을 경험하게 되니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성주혁은 두 사람을 엇갈아 보더니 주름이 가득 잡힌 눈으로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두 사람이 같이 휴가 다녀왔다더니, 하루 종일 붙어만 있어도 못할망정 왜 따로따로 나를 찾아온 것이냐? 너희 둘, 싸운 것이냐?”“저희...”차설아는 어금니를 깨물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솔직하게 사실을 고백해야 할지, 아니면 계속 성주혁을 속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이혼을 하기 전에는 성주혁을 속여도 그녀는 양심에 찔리지 않았었다. 진정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그녀와 성도윤은 결국 이혼 증명서까지 떼게 되었으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더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우리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데 왜 싸우겠어요?”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하고는 긴 팔로 차설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치 평소에도 이러듯이 자연스럽게 말이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두 사람을 정말 서로 끔찍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착각할 것이다.차설아의 얼굴은 살짝 빨개졌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성도윤을 맞춰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가 왜 싸우겠어요.”‘이혼을 했으면 했지!’차설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그럼 다행이네.”성주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도윤을 향해 물었다.“도윤아, 네가 말해봐 봐. 이번 휴가 즐거웠어? 어떤 곳으로 간 거야?”곧 거짓말이 들통날 것 같아 차설아는 먼저 대답하려고 했는데 성주혁은 엄숙한 얼굴로 그녀를 제지했다.“설아야, 도윤이에게 물었다. 넌 아무 말도 하지 마.”성도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특산물을 힐끔 보더니 유독 커피 원두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거짓
“암시요?”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성주혁에게 흑진주를 선물한 건 그저 할아버지가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기를 바란 것뿐이었다.‘내가 뭘 암시했다는 거지? 오해하신 건 아닐까?’“진주를 보자마자 나는 아이를 생각해냈어...”성주혁의 얼굴이 한껏 어두워지더니 더 엄숙한 목소리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성도윤에게 따져 물었다.“네 이놈, 솔직히 말해봐. 밖에 돌아다닌 소문이 사실이야? 네가 설아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게 사실이냐고?”성도윤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허리를 곧게 펴고는 차갑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께서 다 아셨다면 저도 더는 숨길 것 없네요. 그 아이는 제 아이가 맞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품위 있는 신분과 책임감이 있는 아버지가 필요하지요.”“너!”성주혁은 가슴을 움켜쥐더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는 지팡이를 세게 성도윤의 등에 내던지며 말했다.“너 제정신이야!”“그 아이에게 품위 있는 신분과 책임감이 있는 아버지가 필요하다면, 설아는 어떻게 해? 너 설아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봤어? 설아야말로 네 아내라고. 지금까지 설아는 너나 나를 포함한 성씨 가문의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어.”“너는 설아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야. 아껴주고 예뻐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짓이나 하며 설아 가슴에 못을 박아?”성주혁은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 단호하게 말했다.“난 절대 허락 못해. 당장 그 염치없는 여자를 병원으로 보내서 그 더러운 아이를 지워버려!”“너랑 설아의 아이만이 성씨 집안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어. 다른 그 어떤 아이도 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성도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이 말은 성주혁의 노여움을 샀다.“그래, 너 다 컸다 이거지? 얼토당토않은 여자에 홀리더니 이젠 내 말도 우습게 들려? 그럼 오늘 제대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겠구나!”말을 마친
시간이 멈춰버린 듯이 장내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그들은 모두 바닥에 떨어진 흰 종이를 바라봤다.‘맙소사!’차설아는 재빠르게 몸을 웅크려 앉아 종이를 주우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종이에 ‘이혼 증명서’라는 글이 크게 적혀 있었다.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이혼 증명서는 마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성도윤과 차설아가 이혼하는 것을 알리는 것 같았다.“너희... 너희 둘...”성주혁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할아버지!”성도윤과 차설아는 동시에 성주혁을 향해 달려갔다.하지만 성주혁은 성도윤의 손을 세게 뿌려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날 할아버지로 부르지 말거라, 난 네놈의 할아버지가 아니다. 이제 다 컸다고 내 말은 전혀 듣질 않고,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설아랑 이혼을 해? 내가 화병이 나서 죽길 바란 모양이로구나!”“그럼, 네 뜻대로 내가...”이때 성주혁은 갑자기 서랍을 열더니 총알이 담긴 권총을 꺼내고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이 총은 설아 할아버지께서 나한테 선물하신 거다. 설아 할아버지는 옛날에 내 목숨도 구해주셨는데 네가 이러면 내가 무슨 낯짝으로 계속 살아간단 말이냐! 이참에 얼른 설아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사죄를 할란다.”말을 마친 성주혁은 곧바로 총을 자기 이마에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할아버지, 안 돼요!”이를 본 차설아와 집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할아버지, 장난은 그만하세요. 제가 잘못했으니 어떻게 벌하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본인 몸으로 장난치지 마시라고요. 할머니에게나 먹힌 방법이었지, 할아버지도 참... 유치하시네요.”성도윤은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과 유난히 애틋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또 두 사람의 성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게 장난 같더냐?”성주혁은 엄숙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너한테 사흘의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