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속인 거야, 그동안!”차설아는 쌀쌀맞게 성도윤을 쳐다보았고 실제 마음이 상했다.그동안 그가 정말 후유증이라도 남을까 봐, 최선을 다해 돌봤고,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놀아난 것 같아 화가 났고 돌이켜봐도 자신이 바보 같았다.“날 부려 먹으니까 좋아? 좋았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도윤을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뛰쳐나가다 싶이 병실을 나섰다.“난 빠질 테니 알아서 해. 놀든가 말든가.”물론 도망쳤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도윤에게 “평생 불구”의 선고를 내렸던 터라 그녀도 제 발 저린 구석이 있었다. 성도윤은 악마같이 사소한 것까지도 빈틈없이 따지고 복수는 반드시 하는 성격이라 잡혀 있으면 그녀가 죽을지도 모르기에!성도윤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임채원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걱정하는 척했다“도윤아, 그만해. 몸도 불편한 사람이 마구 움직이면 쓰나. 누워서 차분히 몸 회복하는 게 좋지 않겠어?”성도윤은 깊은 눈을 내리깔고 자기 팔을 잡은 임채원의 손을 차갑게 바라보았고 태생적으로 음산하고 시린 눈빛은 임채원마저 겁에 질려 손을 놓았다.“도윤아, 화내지 말고. 설아 씨 잡는 걸 막으려는 게 아니라, 난 진짜 네가 걱정되어서. 게다가...”임채원은 입술을 깨물더니 여우 같은 행태를 보이며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설아 씨에 대해 얘기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성도윤은 쌀쌀맞게 무표정으로 대응했다.“모르겠으면 말하지 마.”방금 자신이 불구라는 거에 대한 그녀의 반응 포함,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도윤도 임채원이라는 사람한테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넌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매정하게 하니!”소영금이 화를 내며 대신 말했다.“잊지 마. 채원이는 우리 집안의 귀한 손주를 품은 사람이야. 채원이한테나 잘해 줘. 엄마가 기분이 좋아야 애도 건강하게 잘 크지...”소영금 역시도 임채원의 속셈을 보지 못 한 건 아니었다. 차설아가
“임신이 아니라고?”소영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씨 가문의 체면은 보존한 셈이었다.“근데 임신이 아니면 산부인과는 왜 갔대?”“그게... 제가 말 하가기 좀 그런데... 도윤 씨가 마음 상할까 봐요.”임채원은 겉치레를 떨며 성도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성도윤의 조각 같은 얼굴은 순간 어두워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말해 봐.” “그게, 사실은 ...”임채원은 성도윤의 반응에 지체없이 얘기했다.“사진을 보고 나서 혹시 오해를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을 못 했어. 병원에 찾아가서 주치의를 만나 확인해 봤어. 의사 말로는 설아 씨가 임신한 게 아니라, 경수 씨와 임신 준비로 찾아왔고 엽산을 챙겨 갔다고 했어. 그리고 설아 씨가 임신하기가 어려운 체질이라 시험관 임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당연히 임채원이 만들어 낸 말이었다.병원에 주치의를 찾아갔었지만, 의사가 아니라고 딱 자르는 바람에 아무런 소식도 캐내지 못했다. 포기를 모르는 임채원은 차설아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려고 없는 얘기에 살 붙여서 주치의까지 돈으로 매수해 버렸다. 성도윤이 사람을 보내 뒷조사하더라도 문제가 안 되게 말이다.“하, 그럴 줄 알았어. 애를 못 낳는 게 설아 저 계집애 문제 맞네, 맞아. 도윤이가 정신을 차리고 이혼을 서둘렀으니 망정이지...”소영금은 성씨 집안에서 요행히 화를 피한 것 같았고 남의 불행에 즐거워했다.“잘코사니 이번엔 배씨 집안에서 화를 면하지 못하겠네. 배성준 그 사람, 자기 아들이 애도 못 낳는 여자를 만나는 걸 알면 기가 차서 어떡해.”성도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서는 듣더니 표정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걸 본 소영금은 기분이 언짢았다.“도윤아, 넌 그게 무슨 표정이니? 우리가 기뻐해야 마땅한 일 아니야? 왜 달갑지 않은 기색이지? 그리고 설아 걔가 한 말이 네가 독사에게 물린 게 걔 살리려고 그랬다며? 너 진짜 설아한테 아직 미련이 남았니? 어리버리하게 굴지 마.”성도윤은 주먹을 꽉 쥔 채, 표정 하나 변함없이 매정
며칠 안 보니, 남자는 그대로 품위 있고 멋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완벽하다는 말로도부족할 길쭉한 두 다리를 보아하니 후유증 없이 잘 회복된 것 같았다. 차설아는 큰 시름을 놓았고 부담이 그전처럼 크지 않았다.만에 하나 이 사람이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혼을 못 할거라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차설아는 머리를 정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마지막 좋은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그녀는 성도윤을 향해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장착했다.“하이...”입을 꾹 다물고 차디찬 표정을 한 성도윤이 긴 다리로 그녀를 무시한 채 스쳐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차설아는 그 미소 그대로 굳어선 채 난감하고 화도 나는 이 상황을 홀로 견디어 냈다.‘헐, 이 사람 뭐지? 암만 이혼한다고 해도 그렇지. 며칠을 약도 발라준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쌀쌀맞게 굴 일인가?’차설아는 발걸음을 다그쳐 남자의 뒤를 따라 구청 2층으로 걸어갔다. 들어가 보니 커플 여럿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딱 봐도 이혼신고 커플이 대다수였고 혼인신고 커플은 네, 댓 정도밖에 없었다.차설아는 과연 요즘 사람들이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걸”다 같이 통달해 버린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성도윤의 남다른 신분으로 구청에서 신속 접수 처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이혼신고 접수창의 주무관은 친절하게 두 사람에게 마실 것도 건네주면서 그들이 제출한 합의 이혼 서류를 받았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옆으로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있었고 분위기는 꽤 불편하고 이상했다. 차설아는 두 손으로 컵을 들고 물을 마시면서도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그녀는 곧 이 자리에서 성도윤과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게 되고, 이젠 남남이 된다. 그들이 서로 뜻이 맞는다면 이번 생에는 다신 만나지 않을 것이고, 지난 삼일과 똑같이 상대방의 세계에서 철저히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미 마음에서 내려놨는데도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
뻔한 답을 물었으니, 스스로 굴욕을 자초한 꼴이라 그녀는 묻자마자 후회했다. 그래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우격다짐을 펼쳤다.“나도 한마디 할게. 임채원도 당신의 좋은 배필이 못 돼. 인품도 인품이지만, 당신이 평생 반신불수 된다는 말에 싫은 티 팍팍 내는 것만 봐도 그녀는 당신과 동락은 해도 동고 못 할 사람이야. 그녀가 사랑하는 건 진짜 당신이 아니라 완벽함으로 수식된 당신의 배경이니까.”파란도 일지 않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성도윤이었다.“채원이가 나를 사랑하든 아니든 상관없어. 아이만 건강하고 평안하면 되니까.”“하! 도윤 씨 정말 대단해. 당신의 진짜 사랑을 이제 알았어.”마음이 모질게 치인 차설아는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낭패를 봤다.‘허허. 그렇게도 임채원을 사랑한다는 거지? 그녀가 사랑하든 안 하든 상관없을 만큼. 둘의 아이만 행복하면 된다고?’그녀는 쌍둥이를 얘기하려 했던 자신이 한심했고, 그 사실을 꺼내 보이지 않은 거에 대하여 다행스러웠다. 말했다면 쪽팔린 건 본인의 몫이었기에. 보통 사랑의 열매를 결실이라고 하면 욕망의 열매는 부담일 것이다. 부담을 안고 싶어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구청 주무관은 두 사람에게 수리된 서류에 사인하게 하고 도장을 찍었다.“성도윤 님, 차설아 님, 접수된 이혼 신고는 이로써 수리되었습니다. 이시간 부로 두 분 이혼신고 효력이 발생함을 알려드립니다. 여기 서류 받으시고요. 혼인관계증명서를 발급 받아서 보시면 됩니다.”차설아는 수리된 이혼서류를 받아 들고 눈을 내리 드리우면서 찬찬히 훑어보았다.숙려기간 후 법원에서 확인받은 합의 이혼 확인서를 구청에 신고하는 절차였다. 그 외이혼 신고는 혼인 신고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혼인 신고는 두 사람이 한 가족이 되기 위한 시작이었고 이혼 신고는 그 두 사람이 다시 남남이 되기 위한 마침표였다. 혼인과 이혼이 한 곳에서 신고되는 구청 이곳에서 그녀는 문득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미련 없이’라는 글귀가 적힌 책의 문구가 떠올랐다. 이젠 미련을 깡그
말하는 사이에 성주혁이 붓을 내려놓고는 책상 서랍에서 자단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차설아에게 건넸다.“설아야, 이걸 열어보거라.”차설아는 건네받은 나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봤다. 그 안에는 훈장이 하나 들어있었다. 훈장 위에는 평화의 비둘기와 날카로운 검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녀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성주혁을 보며 물었다.“할아버지, 이건 ...”“얘야, 이건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남긴 소중한 물건이란다. 이 훈장은 네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사람인지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지. 이제 이 훈장을 너한테 넘겨주도록 하마.”성주혁은 의형제를 맺었던 차무진의 비범했던 일생을 떠올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널 많이 걱정하셨어. 너와 도윤이가 결혼한 지 4년이 지난 후에 이 훈장을 너에게 주라고 나에게 거듭 당부했었다...”“이제 너와 도윤이가 결혼한 지 4년이 되었으니 네 할아버지의 축복이 담긴 이 훈장을 너에게 주도록 하겠다. 두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고 백년해로하길 바란다.”차설아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훈장을 손에 꽉 쥐었다.마치 생사를 넘나든 것처럼 거칠지만 따뜻한 할아버지의 큰 손이 느껴지는 것 같아 눈시울을 붉혔다.“할아버지는 살아계실 때도 저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었는데, 세상을 떠나시고도 영혼으로 저를 지켜주시려고 하네요. 할아버지의 손녀로서 정말 면목이 없네요, 할아버지께 폐만 끼치고요...”할아버지가 임종하기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거듭 당부했던 장면은 여전히 잊을 수 없었다. 차무진은 그녀에게 복수하지 말고, 다시는 그 험난하고 복잡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유능할 필요도 없고, 차씨 가문의 재기를 위해 힘쓸 필요도 없으니 평생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여자, 그리고 성씨 가문의 사모님의 역할만 잘해내길 바랐다. 아니면 세상을 뜨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내가 정말 못났네, 못났어. 할아버지의 소원도 들어주지 못하다니.’이 세상에서 사람
두 사람은 구청에서 이별한 후 한 사람은 왼쪽으로, 다른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향했다.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한 두 사람은 남은 평생 다시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기세였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하지만 진짜 이혼을 경험하게 되니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성주혁은 두 사람을 엇갈아 보더니 주름이 가득 잡힌 눈으로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두 사람이 같이 휴가 다녀왔다더니, 하루 종일 붙어만 있어도 못할망정 왜 따로따로 나를 찾아온 것이냐? 너희 둘, 싸운 것이냐?”“저희...”차설아는 어금니를 깨물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솔직하게 사실을 고백해야 할지, 아니면 계속 성주혁을 속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이혼을 하기 전에는 성주혁을 속여도 그녀는 양심에 찔리지 않았었다. 진정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그녀와 성도윤은 결국 이혼 증명서까지 떼게 되었으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더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우리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데 왜 싸우겠어요?”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하고는 긴 팔로 차설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치 평소에도 이러듯이 자연스럽게 말이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두 사람을 정말 서로 끔찍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착각할 것이다.차설아의 얼굴은 살짝 빨개졌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성도윤을 맞춰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가 왜 싸우겠어요.”‘이혼을 했으면 했지!’차설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그럼 다행이네.”성주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도윤을 향해 물었다.“도윤아, 네가 말해봐 봐. 이번 휴가 즐거웠어? 어떤 곳으로 간 거야?”곧 거짓말이 들통날 것 같아 차설아는 먼저 대답하려고 했는데 성주혁은 엄숙한 얼굴로 그녀를 제지했다.“설아야, 도윤이에게 물었다. 넌 아무 말도 하지 마.”성도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특산물을 힐끔 보더니 유독 커피 원두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거짓
“암시요?”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성주혁에게 흑진주를 선물한 건 그저 할아버지가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기를 바란 것뿐이었다.‘내가 뭘 암시했다는 거지? 오해하신 건 아닐까?’“진주를 보자마자 나는 아이를 생각해냈어...”성주혁의 얼굴이 한껏 어두워지더니 더 엄숙한 목소리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성도윤에게 따져 물었다.“네 이놈, 솔직히 말해봐. 밖에 돌아다닌 소문이 사실이야? 네가 설아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게 사실이냐고?”성도윤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허리를 곧게 펴고는 차갑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께서 다 아셨다면 저도 더는 숨길 것 없네요. 그 아이는 제 아이가 맞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품위 있는 신분과 책임감이 있는 아버지가 필요하지요.”“너!”성주혁은 가슴을 움켜쥐더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는 지팡이를 세게 성도윤의 등에 내던지며 말했다.“너 제정신이야!”“그 아이에게 품위 있는 신분과 책임감이 있는 아버지가 필요하다면, 설아는 어떻게 해? 너 설아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봤어? 설아야말로 네 아내라고. 지금까지 설아는 너나 나를 포함한 성씨 가문의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어.”“너는 설아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야. 아껴주고 예뻐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짓이나 하며 설아 가슴에 못을 박아?”성주혁은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 단호하게 말했다.“난 절대 허락 못해. 당장 그 염치없는 여자를 병원으로 보내서 그 더러운 아이를 지워버려!”“너랑 설아의 아이만이 성씨 집안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어. 다른 그 어떤 아이도 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성도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이 말은 성주혁의 노여움을 샀다.“그래, 너 다 컸다 이거지? 얼토당토않은 여자에 홀리더니 이젠 내 말도 우습게 들려? 그럼 오늘 제대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겠구나!”말을 마친
시간이 멈춰버린 듯이 장내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그들은 모두 바닥에 떨어진 흰 종이를 바라봤다.‘맙소사!’차설아는 재빠르게 몸을 웅크려 앉아 종이를 주우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종이에 ‘이혼 증명서’라는 글이 크게 적혀 있었다.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이혼 증명서는 마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성도윤과 차설아가 이혼하는 것을 알리는 것 같았다.“너희... 너희 둘...”성주혁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할아버지!”성도윤과 차설아는 동시에 성주혁을 향해 달려갔다.하지만 성주혁은 성도윤의 손을 세게 뿌려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날 할아버지로 부르지 말거라, 난 네놈의 할아버지가 아니다. 이제 다 컸다고 내 말은 전혀 듣질 않고,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설아랑 이혼을 해? 내가 화병이 나서 죽길 바란 모양이로구나!”“그럼, 네 뜻대로 내가...”이때 성주혁은 갑자기 서랍을 열더니 총알이 담긴 권총을 꺼내고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이 총은 설아 할아버지께서 나한테 선물하신 거다. 설아 할아버지는 옛날에 내 목숨도 구해주셨는데 네가 이러면 내가 무슨 낯짝으로 계속 살아간단 말이냐! 이참에 얼른 설아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사죄를 할란다.”말을 마친 성주혁은 곧바로 총을 자기 이마에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할아버지, 안 돼요!”이를 본 차설아와 집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할아버지, 장난은 그만하세요. 제가 잘못했으니 어떻게 벌하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본인 몸으로 장난치지 마시라고요. 할머니에게나 먹힌 방법이었지, 할아버지도 참... 유치하시네요.”성도윤은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과 유난히 애틋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또 두 사람의 성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게 장난 같더냐?”성주혁은 엄숙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너한테 사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