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임채원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 했고, 표정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성도윤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완벽하고 의기 넘치는 모습의 성도윤이었다. 반신불수의 성도윤이었다면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시집은 더 말할 것도 없이.임채원의 반응은 차설아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이 애지중지 해온 보물이 다른 사람한테 가서 가격 흥정 받는 느낌이랄까? 그녀는 곧장 내 새끼 감싸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냉소를 지었다.“채원 씨, 본인 입으로 도윤 씨 진짜 사랑이니 뭐니 그래 놓고 아프다고 하니 머뭇거리는 건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닌가? 나한테 도윤 씨를 내놓으라고 할 때랑 너무 다르네. 설사 도윤 씨가 불구라고 해도 이 사람 잘난 건 사라지지 않아. 인물이며, 몸매며, 기품이며 뺄 것 하나 없이 일등 신랑감 아닌가? 채원 씨 아니라도 줄 섰는데. 명망 높은 성도윤을 당신이 고르고 자시고 할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임채원은 회의감이 들 정도로 차설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치여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난,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다만...”성도윤이 오히려 담담하고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상관없어. 이해해.”그런 도윤의 모습을 본 차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고, 동정 어린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편하게 생각해. 어차피 현실적인 게 사람이라.”‘이 사람, 괘씸할 땐 괘씸해도 참, 안쓰러워. 바라만 보던 첫사랑은 의형제랑 떠나가지 않나, 세속의 손가락질을 받아 가며 옆에 둔 내연녀는 병시중 앞에서 뒷걸음치지 않나, 애정의 길은 늘 그렇듯 쉽지 않지. 불쌍한 도윤 씨, 이 세상 반은 여자인데, 정작 동고동락할 사람은 나 차설아 말고 진짜 몇이나 될까?’물론 “차설아”는 예전의 차설아고 지금의 그녀는 정신이 바짝 들어 깨달은 바가 있기에 다신 되돌아가지 않겠지만.“재수 없게. 그 입 못 다물어!”화가 좀 가라앉은 소영금은 이성을 잃은 듯 미친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차설아를 향해달려갔다.“이게 다 재수 없
“날 속인 거야, 그동안!”차설아는 쌀쌀맞게 성도윤을 쳐다보았고 실제 마음이 상했다.그동안 그가 정말 후유증이라도 남을까 봐, 최선을 다해 돌봤고,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놀아난 것 같아 화가 났고 돌이켜봐도 자신이 바보 같았다.“날 부려 먹으니까 좋아? 좋았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도윤을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뛰쳐나가다 싶이 병실을 나섰다.“난 빠질 테니 알아서 해. 놀든가 말든가.”물론 도망쳤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도윤에게 “평생 불구”의 선고를 내렸던 터라 그녀도 제 발 저린 구석이 있었다. 성도윤은 악마같이 사소한 것까지도 빈틈없이 따지고 복수는 반드시 하는 성격이라 잡혀 있으면 그녀가 죽을지도 모르기에!성도윤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임채원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걱정하는 척했다“도윤아, 그만해. 몸도 불편한 사람이 마구 움직이면 쓰나. 누워서 차분히 몸 회복하는 게 좋지 않겠어?”성도윤은 깊은 눈을 내리깔고 자기 팔을 잡은 임채원의 손을 차갑게 바라보았고 태생적으로 음산하고 시린 눈빛은 임채원마저 겁에 질려 손을 놓았다.“도윤아, 화내지 말고. 설아 씨 잡는 걸 막으려는 게 아니라, 난 진짜 네가 걱정되어서. 게다가...”임채원은 입술을 깨물더니 여우 같은 행태를 보이며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설아 씨에 대해 얘기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성도윤은 쌀쌀맞게 무표정으로 대응했다.“모르겠으면 말하지 마.”방금 자신이 불구라는 거에 대한 그녀의 반응 포함,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도윤도 임채원이라는 사람한테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넌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매정하게 하니!”소영금이 화를 내며 대신 말했다.“잊지 마. 채원이는 우리 집안의 귀한 손주를 품은 사람이야. 채원이한테나 잘해 줘. 엄마가 기분이 좋아야 애도 건강하게 잘 크지...”소영금 역시도 임채원의 속셈을 보지 못 한 건 아니었다. 차설아가
“임신이 아니라고?”소영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씨 가문의 체면은 보존한 셈이었다.“근데 임신이 아니면 산부인과는 왜 갔대?”“그게... 제가 말 하가기 좀 그런데... 도윤 씨가 마음 상할까 봐요.”임채원은 겉치레를 떨며 성도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성도윤의 조각 같은 얼굴은 순간 어두워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말해 봐.” “그게, 사실은 ...”임채원은 성도윤의 반응에 지체없이 얘기했다.“사진을 보고 나서 혹시 오해를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을 못 했어. 병원에 찾아가서 주치의를 만나 확인해 봤어. 의사 말로는 설아 씨가 임신한 게 아니라, 경수 씨와 임신 준비로 찾아왔고 엽산을 챙겨 갔다고 했어. 그리고 설아 씨가 임신하기가 어려운 체질이라 시험관 임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당연히 임채원이 만들어 낸 말이었다.병원에 주치의를 찾아갔었지만, 의사가 아니라고 딱 자르는 바람에 아무런 소식도 캐내지 못했다. 포기를 모르는 임채원은 차설아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려고 없는 얘기에 살 붙여서 주치의까지 돈으로 매수해 버렸다. 성도윤이 사람을 보내 뒷조사하더라도 문제가 안 되게 말이다.“하, 그럴 줄 알았어. 애를 못 낳는 게 설아 저 계집애 문제 맞네, 맞아. 도윤이가 정신을 차리고 이혼을 서둘렀으니 망정이지...”소영금은 성씨 집안에서 요행히 화를 피한 것 같았고 남의 불행에 즐거워했다.“잘코사니 이번엔 배씨 집안에서 화를 면하지 못하겠네. 배성준 그 사람, 자기 아들이 애도 못 낳는 여자를 만나는 걸 알면 기가 차서 어떡해.”성도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서는 듣더니 표정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걸 본 소영금은 기분이 언짢았다.“도윤아, 넌 그게 무슨 표정이니? 우리가 기뻐해야 마땅한 일 아니야? 왜 달갑지 않은 기색이지? 그리고 설아 걔가 한 말이 네가 독사에게 물린 게 걔 살리려고 그랬다며? 너 진짜 설아한테 아직 미련이 남았니? 어리버리하게 굴지 마.”성도윤은 주먹을 꽉 쥔 채, 표정 하나 변함없이 매정
며칠 안 보니, 남자는 그대로 품위 있고 멋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완벽하다는 말로도부족할 길쭉한 두 다리를 보아하니 후유증 없이 잘 회복된 것 같았다. 차설아는 큰 시름을 놓았고 부담이 그전처럼 크지 않았다.만에 하나 이 사람이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혼을 못 할거라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차설아는 머리를 정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마지막 좋은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그녀는 성도윤을 향해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장착했다.“하이...”입을 꾹 다물고 차디찬 표정을 한 성도윤이 긴 다리로 그녀를 무시한 채 스쳐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차설아는 그 미소 그대로 굳어선 채 난감하고 화도 나는 이 상황을 홀로 견디어 냈다.‘헐, 이 사람 뭐지? 암만 이혼한다고 해도 그렇지. 며칠을 약도 발라준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쌀쌀맞게 굴 일인가?’차설아는 발걸음을 다그쳐 남자의 뒤를 따라 구청 2층으로 걸어갔다. 들어가 보니 커플 여럿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딱 봐도 이혼신고 커플이 대다수였고 혼인신고 커플은 네, 댓 정도밖에 없었다.차설아는 과연 요즘 사람들이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걸”다 같이 통달해 버린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성도윤의 남다른 신분으로 구청에서 신속 접수 처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이혼신고 접수창의 주무관은 친절하게 두 사람에게 마실 것도 건네주면서 그들이 제출한 합의 이혼 서류를 받았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옆으로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있었고 분위기는 꽤 불편하고 이상했다. 차설아는 두 손으로 컵을 들고 물을 마시면서도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그녀는 곧 이 자리에서 성도윤과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게 되고, 이젠 남남이 된다. 그들이 서로 뜻이 맞는다면 이번 생에는 다신 만나지 않을 것이고, 지난 삼일과 똑같이 상대방의 세계에서 철저히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미 마음에서 내려놨는데도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
뻔한 답을 물었으니, 스스로 굴욕을 자초한 꼴이라 그녀는 묻자마자 후회했다. 그래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우격다짐을 펼쳤다.“나도 한마디 할게. 임채원도 당신의 좋은 배필이 못 돼. 인품도 인품이지만, 당신이 평생 반신불수 된다는 말에 싫은 티 팍팍 내는 것만 봐도 그녀는 당신과 동락은 해도 동고 못 할 사람이야. 그녀가 사랑하는 건 진짜 당신이 아니라 완벽함으로 수식된 당신의 배경이니까.”파란도 일지 않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성도윤이었다.“채원이가 나를 사랑하든 아니든 상관없어. 아이만 건강하고 평안하면 되니까.”“하! 도윤 씨 정말 대단해. 당신의 진짜 사랑을 이제 알았어.”마음이 모질게 치인 차설아는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낭패를 봤다.‘허허. 그렇게도 임채원을 사랑한다는 거지? 그녀가 사랑하든 안 하든 상관없을 만큼. 둘의 아이만 행복하면 된다고?’그녀는 쌍둥이를 얘기하려 했던 자신이 한심했고, 그 사실을 꺼내 보이지 않은 거에 대하여 다행스러웠다. 말했다면 쪽팔린 건 본인의 몫이었기에. 보통 사랑의 열매를 결실이라고 하면 욕망의 열매는 부담일 것이다. 부담을 안고 싶어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구청 주무관은 두 사람에게 수리된 서류에 사인하게 하고 도장을 찍었다.“성도윤 님, 차설아 님, 접수된 이혼 신고는 이로써 수리되었습니다. 이시간 부로 두 분 이혼신고 효력이 발생함을 알려드립니다. 여기 서류 받으시고요. 혼인관계증명서를 발급 받아서 보시면 됩니다.”차설아는 수리된 이혼서류를 받아 들고 눈을 내리 드리우면서 찬찬히 훑어보았다.숙려기간 후 법원에서 확인받은 합의 이혼 확인서를 구청에 신고하는 절차였다. 그 외이혼 신고는 혼인 신고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혼인 신고는 두 사람이 한 가족이 되기 위한 시작이었고 이혼 신고는 그 두 사람이 다시 남남이 되기 위한 마침표였다. 혼인과 이혼이 한 곳에서 신고되는 구청 이곳에서 그녀는 문득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미련 없이’라는 글귀가 적힌 책의 문구가 떠올랐다. 이젠 미련을 깡그
말하는 사이에 성주혁이 붓을 내려놓고는 책상 서랍에서 자단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차설아에게 건넸다.“설아야, 이걸 열어보거라.”차설아는 건네받은 나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봤다. 그 안에는 훈장이 하나 들어있었다. 훈장 위에는 평화의 비둘기와 날카로운 검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녀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성주혁을 보며 물었다.“할아버지, 이건 ...”“얘야, 이건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남긴 소중한 물건이란다. 이 훈장은 네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사람인지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지. 이제 이 훈장을 너한테 넘겨주도록 하마.”성주혁은 의형제를 맺었던 차무진의 비범했던 일생을 떠올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널 많이 걱정하셨어. 너와 도윤이가 결혼한 지 4년이 지난 후에 이 훈장을 너에게 주라고 나에게 거듭 당부했었다...”“이제 너와 도윤이가 결혼한 지 4년이 되었으니 네 할아버지의 축복이 담긴 이 훈장을 너에게 주도록 하겠다. 두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고 백년해로하길 바란다.”차설아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훈장을 손에 꽉 쥐었다.마치 생사를 넘나든 것처럼 거칠지만 따뜻한 할아버지의 큰 손이 느껴지는 것 같아 눈시울을 붉혔다.“할아버지는 살아계실 때도 저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었는데, 세상을 떠나시고도 영혼으로 저를 지켜주시려고 하네요. 할아버지의 손녀로서 정말 면목이 없네요, 할아버지께 폐만 끼치고요...”할아버지가 임종하기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거듭 당부했던 장면은 여전히 잊을 수 없었다. 차무진은 그녀에게 복수하지 말고, 다시는 그 험난하고 복잡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유능할 필요도 없고, 차씨 가문의 재기를 위해 힘쓸 필요도 없으니 평생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여자, 그리고 성씨 가문의 사모님의 역할만 잘해내길 바랐다. 아니면 세상을 뜨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내가 정말 못났네, 못났어. 할아버지의 소원도 들어주지 못하다니.’이 세상에서 사람
두 사람은 구청에서 이별한 후 한 사람은 왼쪽으로, 다른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향했다.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한 두 사람은 남은 평생 다시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기세였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하지만 진짜 이혼을 경험하게 되니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성주혁은 두 사람을 엇갈아 보더니 주름이 가득 잡힌 눈으로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두 사람이 같이 휴가 다녀왔다더니, 하루 종일 붙어만 있어도 못할망정 왜 따로따로 나를 찾아온 것이냐? 너희 둘, 싸운 것이냐?”“저희...”차설아는 어금니를 깨물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솔직하게 사실을 고백해야 할지, 아니면 계속 성주혁을 속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이혼을 하기 전에는 성주혁을 속여도 그녀는 양심에 찔리지 않았었다. 진정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그녀와 성도윤은 결국 이혼 증명서까지 떼게 되었으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더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우리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데 왜 싸우겠어요?”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하고는 긴 팔로 차설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치 평소에도 이러듯이 자연스럽게 말이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두 사람을 정말 서로 끔찍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착각할 것이다.차설아의 얼굴은 살짝 빨개졌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성도윤을 맞춰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가 왜 싸우겠어요.”‘이혼을 했으면 했지!’차설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그럼 다행이네.”성주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도윤을 향해 물었다.“도윤아, 네가 말해봐 봐. 이번 휴가 즐거웠어? 어떤 곳으로 간 거야?”곧 거짓말이 들통날 것 같아 차설아는 먼저 대답하려고 했는데 성주혁은 엄숙한 얼굴로 그녀를 제지했다.“설아야, 도윤이에게 물었다. 넌 아무 말도 하지 마.”성도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특산물을 힐끔 보더니 유독 커피 원두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거짓
“암시요?”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성주혁에게 흑진주를 선물한 건 그저 할아버지가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기를 바란 것뿐이었다.‘내가 뭘 암시했다는 거지? 오해하신 건 아닐까?’“진주를 보자마자 나는 아이를 생각해냈어...”성주혁의 얼굴이 한껏 어두워지더니 더 엄숙한 목소리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성도윤에게 따져 물었다.“네 이놈, 솔직히 말해봐. 밖에 돌아다닌 소문이 사실이야? 네가 설아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게 사실이냐고?”성도윤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허리를 곧게 펴고는 차갑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께서 다 아셨다면 저도 더는 숨길 것 없네요. 그 아이는 제 아이가 맞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품위 있는 신분과 책임감이 있는 아버지가 필요하지요.”“너!”성주혁은 가슴을 움켜쥐더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는 지팡이를 세게 성도윤의 등에 내던지며 말했다.“너 제정신이야!”“그 아이에게 품위 있는 신분과 책임감이 있는 아버지가 필요하다면, 설아는 어떻게 해? 너 설아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봤어? 설아야말로 네 아내라고. 지금까지 설아는 너나 나를 포함한 성씨 가문의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어.”“너는 설아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야. 아껴주고 예뻐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짓이나 하며 설아 가슴에 못을 박아?”성주혁은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 단호하게 말했다.“난 절대 허락 못해. 당장 그 염치없는 여자를 병원으로 보내서 그 더러운 아이를 지워버려!”“너랑 설아의 아이만이 성씨 집안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어. 다른 그 어떤 아이도 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성도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이 말은 성주혁의 노여움을 샀다.“그래, 너 다 컸다 이거지? 얼토당토않은 여자에 홀리더니 이젠 내 말도 우습게 들려? 그럼 오늘 제대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겠구나!”말을 마친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