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의 가슴 철렁 내려앉는 듯한 표정을 본 차설아는 인간적으로 너무 웃겼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 멋지고 도도한 성도윤에게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이 있다니, 어찌 놓칠 수야 있었을까?차설아는 애써 미간을 찌푸린 채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래. 불행은 언제나 갑자기 오는 거지. 도윤 씨, 운명을 받아 들어야지!”성도윤은 눈을 꾹 감고는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의기소침해서 말했다.“나가, 나 혼자 있고 싶어.”“그건 안 되지. 나 때문에 다친 건데. 역경은 같이 이겨내야지. 내가 간호해줄게.”차설아의 의리는 성도윤의 무자비한 거절을 맞았다.“필요 없어!”“정말 필요 없을까?”“나가!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성도윤의 차디찬 태도는 마치 얼음 호수에 빠진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러던 와중에 성도윤의 전화가 울려 왔다. 전화는 성도윤이 받지 않으면 끊기지 않을 기세로 강직하게 울려댔다. “그, 도윤 씨... 나가있을 게. 통화 편하게 해!”차설아는 “속 깊은” 모양새로 눈썹을 찡긋하며 말하고 뒤돌아섰다. 전화는 계속 울렸고 잘생긴 성도윤의 얼굴은 한참 어두워지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핸드폰 줘!”“성 대표님, 뭐라고요? 잘 안 들리네.”차설아는 귀에 손을 다 갖다 대며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거... 핸드폰 갖다 줘!”성도윤은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설아가 일부러 안 들리는 척하며 본인을 골탕 먹이는 걸 알면서도 당해낼 수밖에, 부탁하는 사람이 누그러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그래. 그래야지. 도움이 필요할 땐 부탁을 해야지. 그렇게 생떼 부리면 본인만 손해란걸 모르시나.”차설아는 웃어 보이며 혼내면서 성도윤의 양복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 그의 귀에 갖다 대주었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성도윤의 수행비서 진무열이었고 그는 전화 받자마자 구시렁대며 말했다.“보스. 어디예요? 미가연에서 나간 뒤로 이렇게 연락 안 되면 어떡합니까! 어머님께
“조금 전에 역경을 나랑 같이한다고 맹세하던 사람은 어데 갔어? 뭐 갑자기 하라니까 마음이 쫄려?”절망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는 표정의 성도윤은 냉소를 지어 보였다.“됐어. 뭐. 가려면 가. 나 혼자 죽든 말든 상관 말고 가. 이런 꼴로 살아서 뭐 해.”차설아는 전형적인 강강약약 스타일이라 성도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모른척하고 가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거기까지. 간호한다 해. 돈까지 준다는데 못 할 게 뭐야!”차설아는 시원스럽게 말했다.성도윤이 이렇게 된 게 결국 그녀를 구하기 위함이었기에, 또 인정을 빚지고는 못 사는 차설아라, 내버려 두면 본인 마음이 더 불편했을 것이다. 어차피 겨우 서너 날 정도면 될 일이라, 그녀만 참고 눈 딱 감으면 지나갈 일이었다!“선택은 당신이 한 거야. 강요하지 않았어, 난.”대표 성도윤은 새침하고 도도하게 얘기했다.“네, 네. 미천한 제가 배불러 터져서 기꺼이 도련님을 간호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네요. 그죠?”차설아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맘속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입만 살아서, 츤츤거리기는!’성도윤은 자본주의 각성이 몸에 밴 사람인지라, 곧바로 비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했다.“나 목마른데 물 좀. 참고로 난 36도의 미지근한 물만 마셔. 물의 온도는 더도 덜도 안 돼.”“아...”그 말에 차설아는 주먹이 울었다.차설아가 투덜거리며 그가 마실 물을 받아주려고 몸을 돌리자, 성도윤의 한쪽 입고리가 귀에 걸릴 만큼 올라가 있었고 그윽한 눈빛에는 여우 같은 교활함이 묻어있었다.그사이 의사와 간호사가 진찰하러 들어왔고 의사가 조심스럽게 성도윤에게 물었다.“환자분, 몸 어떠세요?”“그걸 의사인 당신들이 더 잘 아는 거 아닌가요? 굳이 입 아프게 그걸 나한테 물어요?”성도윤은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입을 꾹 닫아버렸다.의사는 난처한지 손을 비벼 대는 모습을 취했다.“정말 죄송합니다. 환자분, 저희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느끼는 현상은 독사에 중독되면 나타나는 정상적인 현상이긴 한데 조금 불
“지... 지금 하라고?”차설아는 병상 위에 옴짝달싹하지 않는 남자를 보다가, 직업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의사와 간호사를 보더니, 자승자박, 제 발등을 제가 찍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몰려왔다.“그러면 독이 심장이고 머리고 다 퍼진 다음에 하려고? 내가 죽기를 기다렸다가?”성도윤의 싸늘한 한마디에 차설아는 목이 메어 말을 못 했다.“남녀 칠 세 부동석인 법, 내가... 내가 하기엔 불편하지 않겠어?”차설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직 도윤의 손도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데, 온몸에 약을 바르라고 하니,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반면 의사는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사모님, 무슨 말씀을? 아내분께서 그러시면 안 불편한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아! 제 말은, 제가 간호사가 아니라서 전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죠.”“그럼 더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요. 약으로 몸을 닦아낼 때 최대한 곳곳을 세심히 다 바르셔야 합니다. 마사지해 주듯이 잘 문지르고 해야 약물 흡수가 잘됩니다.”의사는 할 말만 끝내고 간호사한테 방금 달인 약과 흰 거즈를 차설아에게 건네라고 눈치 줬고 병실을 나갔다.“사모님, 얼른 서두르세요. 약이 식으면 효과도 크게 떨어집니다.”‘이래 놓고 갔다고?!’차설아는 은은하게 붉어진 두 볼을 하고 성도윤을 등지고 약을 바르지도, 안 바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성도윤의 눈빛은 재미난 볼거리를 보듯 했다. 그녀의 뒷모습은 청아하고 얌전하고 고왔다.“그렇게 쭈뼛쭈뼛하는 건, 당신이 날 좋아하니까 민망해서 그러는 건가?”“아니거든!”차설아는 돌아서서 주먹을 쥐어 보였다.“당장 이혼할 마당에 무슨. 미쳤다고 내가 당신을 좋아하겠어?”성도윤은 눈썹을 올리더니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을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그래?”“그럼!”성도윤은 그녀가 왠지 백 번 더 자존심 부리는 것 같았고, 차설아는 부끄러운 얼굴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둘 다 자존심만 쎄서
“어, 미안, 미안!”차설아는 얼른 움츨어 들었다.“말해두는 데 고의가 아니야, 절대로!”차설아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고, 도윤은 오히려 매우 담담하고 미적지근하게 말했다.“상관없어. 지금 난 당신의 손아귀에 있는 몸이니.”“뭐라는 거야.”망신 망신 평생 이런 망신살은 처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차설아는 빨리 쥐구멍을 찾아서 숨고 싶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차가운 표정을 한 성도윤의 입꼬리가 은근슬쩍 올라간 모습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그 뒤로 차설아는 오히려 오픈 마인드를 보였다. 하긴 처음이 힘들지 한 번 하고 나면 익숙해지는 게 사람인지라, 처음 민망한 심경이 있은 뒤로, 도윤의 몸을 닦아주는 일은 그야말로 익숙한 일처럼 식은 죽 먹기였고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제멋대로였다.그녀는 어차피 도윤의 몸은 감각이 없어 어디를 어떻게 닦아도 무념무상일 텐데 뭘 예의차리고 뭐 민망할 게 있겠냐는 생각을 했다. 물론 만질 데 다 만지고 꼬집을 데 다 꼬집으며 약을 발라줬다.매일 이렇게 완벽한 근육질의 인물이 코앞에 있는데 끌리지 않는다는 건 별다른 취향이 아니고서야 정상적인 사람은 성인군자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한바, 세상에 공짜란 없었고 그녀가 성도윤의 멋진 몸을 마음대로 대하는 동안 그 역시도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심심하면 그녀한테 물 떠오라, 차 끓여라, 커피 타오라, 그것도 드립으로 시키고 과일은 또 똑같은 크기로 자르라고 하지를 않나, 매일 정시 정각에 해내외 경제 기사를 읽으라 했다. 기사는 또 캐스터 수준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디테일하게 요구를 해댔다.“에잇, 못 해 먹겠네, 정말!”차설아는 커피 원두를 반쯤 갈더니 마침내 터져버렸다. 대마왕을 모시는 일은 암만 좋은 미색으로 보상받는다 해도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에 참다못해 그만하려는 생각이 꽂혔다. 차설아는 생각해 보니 일주일이 지났던 터라 지금쯤 성도윤이 회복이 좀 되었을 것 같아 이불을 들춰 그의 허벅지를 꼬집고는 물었다.“좀 어때? 이제는
고요해진 병실에 애매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렀다. 성도윤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병실 문이 ‘펑’하고 세게 열렸고 소영금이 부리나케 들어왔다.“여기가 해외야? 이게 휴가 중인 거야? 둘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할아버지마저 속이고!”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그 뒤에서 임채원이 함께 걸어 들어왔다. 한동안 못 본 사이 그녀는 배가 더 커져 있었고 차설아를 한방에 현실 세계로 소환시켰다. ‘허허. 내가 정말 미쳤지. 성도윤이 그런 사람이었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있는 걸 질문이라고, 어리석게도 그의 마음을 떠보려고 했으니. 이마당에 구해준 걸 후회 했는지가 뭐가 중요하다고.’“다들 왔으니 전 이만 해방이네요.”차설아는 고결한 자태로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눈으로 책상 위의 약을 가리키며 임채원한테 말을 했다.“매일 세 번, 구석구석 약 발라줘야 해. 이젠 자격 있는 채원 씨한테 맡기는 거로.”임채원은 여리고 연약한 여자의 모습을 하고는 정실의 어투로 말했다.“설아 씨한테 도윤이가 며칠을 폐를 많이 끼쳤네, 그동안 고마워. 여긴 걱정말고. 내가 잘 보살필 테니까.”그 말이 너무도 아이러니해서 듣고 있던 차설아는 참 우스웠다. 그러나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성도윤을 한번 돌아보고는 병실을 나서려고 했다.“나를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말지.”차설아의 뒷모습을 본 성도윤이 목소리를 깔고 아무도 뭐라 못할 만큼의 확고한 의지로말했다.“내가 말했지. 날 케어하는 일에 당신보다 더 제격인 사람 없다고.”그 말은 당연히 임채원을 내모는 말이었고 그녀의 표정 또한 보기 안 좋았다. 그녀는 한편으로 주먹을 꽉 쥐고 한편으로 억울한 모습을 보였고, 차설아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또 억누를 수 없는 원망이 차 있었다.소영금은 속의 울분을 토해냈다.“도윤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집 대를 이을 아이가 채원이 배 속에 있다고, 출산이 코앞인데, 너는! 둘은 곧 이혼할 거고 도윤이 너는 채원이랑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지. 채
“나는...”임채원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 했고, 표정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성도윤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완벽하고 의기 넘치는 모습의 성도윤이었다. 반신불수의 성도윤이었다면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시집은 더 말할 것도 없이.임채원의 반응은 차설아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이 애지중지 해온 보물이 다른 사람한테 가서 가격 흥정 받는 느낌이랄까? 그녀는 곧장 내 새끼 감싸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냉소를 지었다.“채원 씨, 본인 입으로 도윤 씨 진짜 사랑이니 뭐니 그래 놓고 아프다고 하니 머뭇거리는 건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닌가? 나한테 도윤 씨를 내놓으라고 할 때랑 너무 다르네. 설사 도윤 씨가 불구라고 해도 이 사람 잘난 건 사라지지 않아. 인물이며, 몸매며, 기품이며 뺄 것 하나 없이 일등 신랑감 아닌가? 채원 씨 아니라도 줄 섰는데. 명망 높은 성도윤을 당신이 고르고 자시고 할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임채원은 회의감이 들 정도로 차설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치여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난,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다만...”성도윤이 오히려 담담하고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상관없어. 이해해.”그런 도윤의 모습을 본 차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고, 동정 어린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편하게 생각해. 어차피 현실적인 게 사람이라.”‘이 사람, 괘씸할 땐 괘씸해도 참, 안쓰러워. 바라만 보던 첫사랑은 의형제랑 떠나가지 않나, 세속의 손가락질을 받아 가며 옆에 둔 내연녀는 병시중 앞에서 뒷걸음치지 않나, 애정의 길은 늘 그렇듯 쉽지 않지. 불쌍한 도윤 씨, 이 세상 반은 여자인데, 정작 동고동락할 사람은 나 차설아 말고 진짜 몇이나 될까?’물론 “차설아”는 예전의 차설아고 지금의 그녀는 정신이 바짝 들어 깨달은 바가 있기에 다신 되돌아가지 않겠지만.“재수 없게. 그 입 못 다물어!”화가 좀 가라앉은 소영금은 이성을 잃은 듯 미친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차설아를 향해달려갔다.“이게 다 재수 없
“날 속인 거야, 그동안!”차설아는 쌀쌀맞게 성도윤을 쳐다보았고 실제 마음이 상했다.그동안 그가 정말 후유증이라도 남을까 봐, 최선을 다해 돌봤고,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놀아난 것 같아 화가 났고 돌이켜봐도 자신이 바보 같았다.“날 부려 먹으니까 좋아? 좋았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도윤을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뛰쳐나가다 싶이 병실을 나섰다.“난 빠질 테니 알아서 해. 놀든가 말든가.”물론 도망쳤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도윤에게 “평생 불구”의 선고를 내렸던 터라 그녀도 제 발 저린 구석이 있었다. 성도윤은 악마같이 사소한 것까지도 빈틈없이 따지고 복수는 반드시 하는 성격이라 잡혀 있으면 그녀가 죽을지도 모르기에!성도윤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임채원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걱정하는 척했다“도윤아, 그만해. 몸도 불편한 사람이 마구 움직이면 쓰나. 누워서 차분히 몸 회복하는 게 좋지 않겠어?”성도윤은 깊은 눈을 내리깔고 자기 팔을 잡은 임채원의 손을 차갑게 바라보았고 태생적으로 음산하고 시린 눈빛은 임채원마저 겁에 질려 손을 놓았다.“도윤아, 화내지 말고. 설아 씨 잡는 걸 막으려는 게 아니라, 난 진짜 네가 걱정되어서. 게다가...”임채원은 입술을 깨물더니 여우 같은 행태를 보이며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설아 씨에 대해 얘기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성도윤은 쌀쌀맞게 무표정으로 대응했다.“모르겠으면 말하지 마.”방금 자신이 불구라는 거에 대한 그녀의 반응 포함,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도윤도 임채원이라는 사람한테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넌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매정하게 하니!”소영금이 화를 내며 대신 말했다.“잊지 마. 채원이는 우리 집안의 귀한 손주를 품은 사람이야. 채원이한테나 잘해 줘. 엄마가 기분이 좋아야 애도 건강하게 잘 크지...”소영금 역시도 임채원의 속셈을 보지 못 한 건 아니었다. 차설아가
“임신이 아니라고?”소영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씨 가문의 체면은 보존한 셈이었다.“근데 임신이 아니면 산부인과는 왜 갔대?”“그게... 제가 말 하가기 좀 그런데... 도윤 씨가 마음 상할까 봐요.”임채원은 겉치레를 떨며 성도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성도윤의 조각 같은 얼굴은 순간 어두워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말해 봐.” “그게, 사실은 ...”임채원은 성도윤의 반응에 지체없이 얘기했다.“사진을 보고 나서 혹시 오해를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을 못 했어. 병원에 찾아가서 주치의를 만나 확인해 봤어. 의사 말로는 설아 씨가 임신한 게 아니라, 경수 씨와 임신 준비로 찾아왔고 엽산을 챙겨 갔다고 했어. 그리고 설아 씨가 임신하기가 어려운 체질이라 시험관 임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당연히 임채원이 만들어 낸 말이었다.병원에 주치의를 찾아갔었지만, 의사가 아니라고 딱 자르는 바람에 아무런 소식도 캐내지 못했다. 포기를 모르는 임채원은 차설아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려고 없는 얘기에 살 붙여서 주치의까지 돈으로 매수해 버렸다. 성도윤이 사람을 보내 뒷조사하더라도 문제가 안 되게 말이다.“하, 그럴 줄 알았어. 애를 못 낳는 게 설아 저 계집애 문제 맞네, 맞아. 도윤이가 정신을 차리고 이혼을 서둘렀으니 망정이지...”소영금은 성씨 집안에서 요행히 화를 피한 것 같았고 남의 불행에 즐거워했다.“잘코사니 이번엔 배씨 집안에서 화를 면하지 못하겠네. 배성준 그 사람, 자기 아들이 애도 못 낳는 여자를 만나는 걸 알면 기가 차서 어떡해.”성도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서는 듣더니 표정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걸 본 소영금은 기분이 언짢았다.“도윤아, 넌 그게 무슨 표정이니? 우리가 기뻐해야 마땅한 일 아니야? 왜 달갑지 않은 기색이지? 그리고 설아 걔가 한 말이 네가 독사에게 물린 게 걔 살리려고 그랬다며? 너 진짜 설아한테 아직 미련이 남았니? 어리버리하게 굴지 마.”성도윤은 주먹을 꽉 쥔 채, 표정 하나 변함없이 매정
사도현의 말에 병실 안이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사실 요즘 늘 이런 분위기가 반복되고 있었다.진찬영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사도현이 뭐라 비꼬는 것의 반복이었다배경윤은 마치 인형처럼 두 남자 사이에서 양쪽으로 잡아당겨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피곤했다.신중히 고민한 끝에 그녀는 결국 화가 치밀어 올라서 핸드폰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두 사람 다 내일부터 오지 마.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배경윤은 이렇게 적어서 각각 사도현과 진찬영, 두 사람에게 각각 보여주었다.그러자 진찬영이 바로 사과했다.“미안해요, 경윤 씨. 제 잘못이에요. 제가 강요하지 말아야 했어요.”그는 깨끗하고 맑은 얼굴에 마치 대학교 남학생 같은 순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든 그의 순진한 표정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사도현 같은 사람에게 놓고 말해서 진찬영처럼 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고 진찬영을 노려보며 이를 갈며 말했다.“여우 같은 놈.”하지만 진찬영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눈을 살짝 내리깔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도현 씨, 미안해요. 사실 저도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경윤 씨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나 봐요. 소유욕 때문에 말이 거칠어졌어요. 제가 떠날게요. 경윤 씨만 행복할 수 있다면 저는 상관없어요.”“진찬영 씨,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제가 못 알아볼 줄 아세요?”사도현이 버럭 소리쳤지만 진찬영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경윤 씨, 전 경윤 씨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에요. 만약 제 존재가 부담스럽다면 더 이상 여기 있지 않을게요. 잘 지내요.”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배경윤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배경윤은 핸드폰을 들어 차분한 표
병실 밖에서 우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사도현은 코웃음을 쳤다.그러곤 갓 사 온 레드벨벳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사과 같은 거 먹어서 뭐 해? 차갑기만 하고 이가 시려서 고생한다고... 케이크 사 왔으니까 이거 먹어. 이거 사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 사이에 떡하니 자리 잡더니 작고 정교한 케이크를 배경윤에게 건넸다.배경윤은 평소 사도현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이 레드벨벳 케이크만큼은 예전부터 너무나도 먹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로 받아 들었다.이 케이크 가게의 사장은 굉장히 까다로운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하루에 딱 세 개만 만들었고 돈이 많다고 해서 아무나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 사장이 진심이 느껴지는 손님에게만 케이크를 파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배경윤도 몇 번이나 줄을 서서 사장에게 간절히 부탁했지만 끝내 사지 못했었다.그런 케이크를 사도현이 어떻게든 구해 왔으니 사느라 엄청 고생했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그런데 바로 그때, 진찬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배경윤에게 손을 내밀었다.“사과에는 비타민이 풍부하지만 케이크에는 당분이 너무 많아요. 지금은 회복하는 중이라서 단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돼요.”“경윤 씨, 자제해야죠? 빨리 회복해야 일찍 퇴원하고 목도 나을 수 있잖아요.”배경윤은 케이크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갑자기 먹기가 두려워졌던 것이다.“그깟 조각 케이크 하나가 무슨 대수라고 그래요. 의사도 안 된다고 안 했잖아요. 게다가 케이크가 주는 행복은 그쪽이 하는 아재 개그보다 훨씬 크다고요.”사도현 역시 싸늘하게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만약 정말 경윤 씨를 위한다면 건강부터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은 행복보다 회복이 더 중요해요.”진찬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끝까지 반대할 작정이었다.“경윤이 인생이니까 제가 책임져요. 우리는 연인 사이예요. 앞으로도 결혼할 사이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쪽이 참
한편, 뱀에게 물린 배경윤은 일시적인 쇼크 상태에 빠졌다가 구조된 뒤로 줄곧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다.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 프로그램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와 사도현, 진찬영 사이에서 벌어진 삼각관계로 인해 그녀를 둘러싼 논란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네티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는데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머지는 중립적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또 사도현을 좋아하는 사람, 진찬영을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배경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그들 사이의 논쟁은 끊이질 않았고 결국 이 세 사람은 인기가 많아져서 배경윤 같은 일반인조차 연예인처럼 주목받게 되었다.배경윤은 목숨을 건졌지만 부작용으로 목소리를 잃게 되었다.병원에 있는 동안, 사도현과 진찬영이 번갈아 가며 그녀를 돌봤다. 그 덕분에 병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격한 신경전이 벌어지게 되었다.그날도 사도현은 회사 일을 마치자마자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진찬영이 더 먼저 도착해 있었다.늘 조용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과일을 깎으면서도 배경윤을 웃겨주려고 그녀에게 장난을 쳤다. 그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배경윤은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경윤 씨, 사과 먹으면 하나 더 들려줄게요.”진찬영은 깎은 사과를 한입 크기로 잘라서 그녀에게 건넸고 배경윤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활발하고 털털한 성격을 가졌기에 평소와 달리 아무 말 없이 웃는 모습은 뜻밖의 차분함과 부드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저 예전에 도사를 만난 적 있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매주 일요일 밤 12시 이후가 귀신들한테 제일 위험한 시간이라고 말이에요. 왜 그런지 알아요?”진찬영은 일부러 신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배경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핸드폰으로 타자를 했다.[왜요? 왜요? 빨리 말해봐요!]그녀는 평소 점을 치는 거나 미신 같은 걸 꽤 좋아했다. 그래
하지만 차설아는 현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오후가 되자 김정민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이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서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했어?”검은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말씀하신 대로 다 했어요. 제발 엄마를 놓아주세요.”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계속해. 열흘 뒤에야 풀어줄 거야.”여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현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헛짓거리할 생각은 마. 날 속이거나, 하루라도 늦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네 엄마는 죽는 거야. 알아?”“네, 알겠어요.”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제야 그 여자는 현이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그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뭔데?”“그냥 궁금해서요. 설아 씨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설아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시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현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녀는 이 여자에게 조종당해 차설아를 해치는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그녀는 언젠가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러자 그 모자를 쓴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착하다고?”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자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뱀과도 같았다.“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자가 누굴 해쳤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그럴
“현이 씨?”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현이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현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차설아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현이 씨 아니죠?”“설아 씨, 저 맞아요.”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차고 상냥한 말투와 달랐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설아 씨,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옷장 맨 왼쪽에 있는 니트 한 벌이면 돼요.”차설아가 또렷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가 그녀가 원하는 옷을 꺼냈다. 니트를 받아 든 차설아는 능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립심이 강했기에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오히려 현이 입장에서는 여느 고용인들보다 차설아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차설아를 좋아했다.하지만...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이는 평소처럼 우유 한 잔에 통밀 토스트, 그리고 과일 몇 조각을 준비했다.차설아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토스트를 씹으며 현이에게 말했다.“혹시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아, 아니에요.”현이는 입술을 꼭 깨물며 망설였다.“그냥... 가족끼리 또 싸웠을 뿐이에요. 사실 맨날 싸워서 이제 익숙하지만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뭘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요? 앞을 못 보고 나서 지금까지 현이 씨가 절 도와주고 있잖아요. 오히려 제가 현이 씨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차
성도윤은 남자로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로 하여금 닭살 돋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눈물도 흘리게 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알면 됐어요. 제가 얼마나 좋은 아내인데요! 그러니까 평생 저만 사랑해 주세요.”차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도윤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술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주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줬으니 말이다.사실 차설아는 오래전부터 성도윤과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한꺼번에 채울 생각이었다.“너, 너... 취한 거 아냐?”성도윤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차설아를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 그녀가 이러는 건 꿈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으니 말이다.그는 어찌할 바 몰랐다. 괜히 진하게 키스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취했든 안 취했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그냥 키스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두 손으로 성도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술을 포갰다. 차설아가 워낙 격렬하게 덤벼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갈까?”성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살짝 쉬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은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위층으로 가면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게 아닐 텐데 괜찮아요?”“상관없어. 오늘 밤, 난 주인님의 말씀만 잘 따를 테니까.”그렇게 말한 성도윤은 차설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고 단숨에 침실까지 도착했다.아이들이 캠프를 떠난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