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미간을 구긴 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의사를 보며 말했다.“말씀하세요.”“뱀독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성 대표님의 중추신경을 교란시킬 수 있어요. 성 대표님에게는 사지가 마비되고 잘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반신불수가 되는 건 절대 아니니 사모님과 대표님께서 너무 당황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뱀독이 완전히 제거되면 곧 회복하실 겁니다.”“사지가 마비된다고요?”차설아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하지만 이때, 병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꺼져. 다 꺼지라고! 나 건드리지 마!”성도윤은 이미 깬 듯하다.그의 격앙된 목소리는 복도를 울렸다.차설아와 의사는 다급하게 병실로 향했는데 곧이어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병실 문 앞에 굳어 선 젊은 간호사들의 모습을 발견했다.“왜 여기들 서 있는 거야? 환자분이 깨셨으면 들어가서 살펴봐야지. 일 그만두고 싶어?”의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그들을 혼냈다.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성대 그룹의 대표인 성도윤이었다. 자칫하면 이 병원이 문 닫게 생겼는데 말이다.수간호사가 벌벌 떨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저희가 안 살펴보려는 게 아니고요, 성 대표님께서... 성 대표님께서 너무 화를 내셔서 차마 가까이 갈 수 없었어요. 자기를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셔서 저희... 저희도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어요!”“뭐?”의사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일찍이 성도윤이 쉽지 않은 상대인 걸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제가 가서 한 번 볼게요.”그녀는 살며시 문을 열었는데 바로 짜증이 가득 섞인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꺼지라고 했잖아, 내 말 안 들려?”“도윤 씨는 어쩜 입원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버럭버럭 화를 잘 내. 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다 깨울 셈이야?”차설아가 성도윤의 병상 옆으로 가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계속 반듯하게 누워있었기에 그제야 차설아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당신
도윤의 가슴 철렁 내려앉는 듯한 표정을 본 차설아는 인간적으로 너무 웃겼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 멋지고 도도한 성도윤에게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이 있다니, 어찌 놓칠 수야 있었을까?차설아는 애써 미간을 찌푸린 채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래. 불행은 언제나 갑자기 오는 거지. 도윤 씨, 운명을 받아 들어야지!”성도윤은 눈을 꾹 감고는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의기소침해서 말했다.“나가, 나 혼자 있고 싶어.”“그건 안 되지. 나 때문에 다친 건데. 역경은 같이 이겨내야지. 내가 간호해줄게.”차설아의 의리는 성도윤의 무자비한 거절을 맞았다.“필요 없어!”“정말 필요 없을까?”“나가!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성도윤의 차디찬 태도는 마치 얼음 호수에 빠진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러던 와중에 성도윤의 전화가 울려 왔다. 전화는 성도윤이 받지 않으면 끊기지 않을 기세로 강직하게 울려댔다. “그, 도윤 씨... 나가있을 게. 통화 편하게 해!”차설아는 “속 깊은” 모양새로 눈썹을 찡긋하며 말하고 뒤돌아섰다. 전화는 계속 울렸고 잘생긴 성도윤의 얼굴은 한참 어두워지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핸드폰 줘!”“성 대표님, 뭐라고요? 잘 안 들리네.”차설아는 귀에 손을 다 갖다 대며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거... 핸드폰 갖다 줘!”성도윤은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설아가 일부러 안 들리는 척하며 본인을 골탕 먹이는 걸 알면서도 당해낼 수밖에, 부탁하는 사람이 누그러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그래. 그래야지. 도움이 필요할 땐 부탁을 해야지. 그렇게 생떼 부리면 본인만 손해란걸 모르시나.”차설아는 웃어 보이며 혼내면서 성도윤의 양복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 그의 귀에 갖다 대주었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성도윤의 수행비서 진무열이었고 그는 전화 받자마자 구시렁대며 말했다.“보스. 어디예요? 미가연에서 나간 뒤로 이렇게 연락 안 되면 어떡합니까! 어머님께
“조금 전에 역경을 나랑 같이한다고 맹세하던 사람은 어데 갔어? 뭐 갑자기 하라니까 마음이 쫄려?”절망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는 표정의 성도윤은 냉소를 지어 보였다.“됐어. 뭐. 가려면 가. 나 혼자 죽든 말든 상관 말고 가. 이런 꼴로 살아서 뭐 해.”차설아는 전형적인 강강약약 스타일이라 성도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모른척하고 가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거기까지. 간호한다 해. 돈까지 준다는데 못 할 게 뭐야!”차설아는 시원스럽게 말했다.성도윤이 이렇게 된 게 결국 그녀를 구하기 위함이었기에, 또 인정을 빚지고는 못 사는 차설아라, 내버려 두면 본인 마음이 더 불편했을 것이다. 어차피 겨우 서너 날 정도면 될 일이라, 그녀만 참고 눈 딱 감으면 지나갈 일이었다!“선택은 당신이 한 거야. 강요하지 않았어, 난.”대표 성도윤은 새침하고 도도하게 얘기했다.“네, 네. 미천한 제가 배불러 터져서 기꺼이 도련님을 간호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네요. 그죠?”차설아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맘속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입만 살아서, 츤츤거리기는!’성도윤은 자본주의 각성이 몸에 밴 사람인지라, 곧바로 비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했다.“나 목마른데 물 좀. 참고로 난 36도의 미지근한 물만 마셔. 물의 온도는 더도 덜도 안 돼.”“아...”그 말에 차설아는 주먹이 울었다.차설아가 투덜거리며 그가 마실 물을 받아주려고 몸을 돌리자, 성도윤의 한쪽 입고리가 귀에 걸릴 만큼 올라가 있었고 그윽한 눈빛에는 여우 같은 교활함이 묻어있었다.그사이 의사와 간호사가 진찰하러 들어왔고 의사가 조심스럽게 성도윤에게 물었다.“환자분, 몸 어떠세요?”“그걸 의사인 당신들이 더 잘 아는 거 아닌가요? 굳이 입 아프게 그걸 나한테 물어요?”성도윤은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입을 꾹 닫아버렸다.의사는 난처한지 손을 비벼 대는 모습을 취했다.“정말 죄송합니다. 환자분, 저희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느끼는 현상은 독사에 중독되면 나타나는 정상적인 현상이긴 한데 조금 불
“지... 지금 하라고?”차설아는 병상 위에 옴짝달싹하지 않는 남자를 보다가, 직업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의사와 간호사를 보더니, 자승자박, 제 발등을 제가 찍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몰려왔다.“그러면 독이 심장이고 머리고 다 퍼진 다음에 하려고? 내가 죽기를 기다렸다가?”성도윤의 싸늘한 한마디에 차설아는 목이 메어 말을 못 했다.“남녀 칠 세 부동석인 법, 내가... 내가 하기엔 불편하지 않겠어?”차설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직 도윤의 손도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데, 온몸에 약을 바르라고 하니,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반면 의사는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사모님, 무슨 말씀을? 아내분께서 그러시면 안 불편한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아! 제 말은, 제가 간호사가 아니라서 전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죠.”“그럼 더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요. 약으로 몸을 닦아낼 때 최대한 곳곳을 세심히 다 바르셔야 합니다. 마사지해 주듯이 잘 문지르고 해야 약물 흡수가 잘됩니다.”의사는 할 말만 끝내고 간호사한테 방금 달인 약과 흰 거즈를 차설아에게 건네라고 눈치 줬고 병실을 나갔다.“사모님, 얼른 서두르세요. 약이 식으면 효과도 크게 떨어집니다.”‘이래 놓고 갔다고?!’차설아는 은은하게 붉어진 두 볼을 하고 성도윤을 등지고 약을 바르지도, 안 바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성도윤의 눈빛은 재미난 볼거리를 보듯 했다. 그녀의 뒷모습은 청아하고 얌전하고 고왔다.“그렇게 쭈뼛쭈뼛하는 건, 당신이 날 좋아하니까 민망해서 그러는 건가?”“아니거든!”차설아는 돌아서서 주먹을 쥐어 보였다.“당장 이혼할 마당에 무슨. 미쳤다고 내가 당신을 좋아하겠어?”성도윤은 눈썹을 올리더니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을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그래?”“그럼!”성도윤은 그녀가 왠지 백 번 더 자존심 부리는 것 같았고, 차설아는 부끄러운 얼굴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둘 다 자존심만 쎄서
“어, 미안, 미안!”차설아는 얼른 움츨어 들었다.“말해두는 데 고의가 아니야, 절대로!”차설아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고, 도윤은 오히려 매우 담담하고 미적지근하게 말했다.“상관없어. 지금 난 당신의 손아귀에 있는 몸이니.”“뭐라는 거야.”망신 망신 평생 이런 망신살은 처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차설아는 빨리 쥐구멍을 찾아서 숨고 싶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차가운 표정을 한 성도윤의 입꼬리가 은근슬쩍 올라간 모습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그 뒤로 차설아는 오히려 오픈 마인드를 보였다. 하긴 처음이 힘들지 한 번 하고 나면 익숙해지는 게 사람인지라, 처음 민망한 심경이 있은 뒤로, 도윤의 몸을 닦아주는 일은 그야말로 익숙한 일처럼 식은 죽 먹기였고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제멋대로였다.그녀는 어차피 도윤의 몸은 감각이 없어 어디를 어떻게 닦아도 무념무상일 텐데 뭘 예의차리고 뭐 민망할 게 있겠냐는 생각을 했다. 물론 만질 데 다 만지고 꼬집을 데 다 꼬집으며 약을 발라줬다.매일 이렇게 완벽한 근육질의 인물이 코앞에 있는데 끌리지 않는다는 건 별다른 취향이 아니고서야 정상적인 사람은 성인군자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한바, 세상에 공짜란 없었고 그녀가 성도윤의 멋진 몸을 마음대로 대하는 동안 그 역시도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심심하면 그녀한테 물 떠오라, 차 끓여라, 커피 타오라, 그것도 드립으로 시키고 과일은 또 똑같은 크기로 자르라고 하지를 않나, 매일 정시 정각에 해내외 경제 기사를 읽으라 했다. 기사는 또 캐스터 수준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디테일하게 요구를 해댔다.“에잇, 못 해 먹겠네, 정말!”차설아는 커피 원두를 반쯤 갈더니 마침내 터져버렸다. 대마왕을 모시는 일은 암만 좋은 미색으로 보상받는다 해도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에 참다못해 그만하려는 생각이 꽂혔다. 차설아는 생각해 보니 일주일이 지났던 터라 지금쯤 성도윤이 회복이 좀 되었을 것 같아 이불을 들춰 그의 허벅지를 꼬집고는 물었다.“좀 어때? 이제는
고요해진 병실에 애매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렀다. 성도윤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병실 문이 ‘펑’하고 세게 열렸고 소영금이 부리나케 들어왔다.“여기가 해외야? 이게 휴가 중인 거야? 둘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할아버지마저 속이고!”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그 뒤에서 임채원이 함께 걸어 들어왔다. 한동안 못 본 사이 그녀는 배가 더 커져 있었고 차설아를 한방에 현실 세계로 소환시켰다. ‘허허. 내가 정말 미쳤지. 성도윤이 그런 사람이었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있는 걸 질문이라고, 어리석게도 그의 마음을 떠보려고 했으니. 이마당에 구해준 걸 후회 했는지가 뭐가 중요하다고.’“다들 왔으니 전 이만 해방이네요.”차설아는 고결한 자태로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눈으로 책상 위의 약을 가리키며 임채원한테 말을 했다.“매일 세 번, 구석구석 약 발라줘야 해. 이젠 자격 있는 채원 씨한테 맡기는 거로.”임채원은 여리고 연약한 여자의 모습을 하고는 정실의 어투로 말했다.“설아 씨한테 도윤이가 며칠을 폐를 많이 끼쳤네, 그동안 고마워. 여긴 걱정말고. 내가 잘 보살필 테니까.”그 말이 너무도 아이러니해서 듣고 있던 차설아는 참 우스웠다. 그러나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성도윤을 한번 돌아보고는 병실을 나서려고 했다.“나를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말지.”차설아의 뒷모습을 본 성도윤이 목소리를 깔고 아무도 뭐라 못할 만큼의 확고한 의지로말했다.“내가 말했지. 날 케어하는 일에 당신보다 더 제격인 사람 없다고.”그 말은 당연히 임채원을 내모는 말이었고 그녀의 표정 또한 보기 안 좋았다. 그녀는 한편으로 주먹을 꽉 쥐고 한편으로 억울한 모습을 보였고, 차설아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또 억누를 수 없는 원망이 차 있었다.소영금은 속의 울분을 토해냈다.“도윤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집 대를 이을 아이가 채원이 배 속에 있다고, 출산이 코앞인데, 너는! 둘은 곧 이혼할 거고 도윤이 너는 채원이랑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지. 채
“나는...”임채원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 했고, 표정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성도윤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완벽하고 의기 넘치는 모습의 성도윤이었다. 반신불수의 성도윤이었다면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시집은 더 말할 것도 없이.임채원의 반응은 차설아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이 애지중지 해온 보물이 다른 사람한테 가서 가격 흥정 받는 느낌이랄까? 그녀는 곧장 내 새끼 감싸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냉소를 지었다.“채원 씨, 본인 입으로 도윤 씨 진짜 사랑이니 뭐니 그래 놓고 아프다고 하니 머뭇거리는 건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닌가? 나한테 도윤 씨를 내놓으라고 할 때랑 너무 다르네. 설사 도윤 씨가 불구라고 해도 이 사람 잘난 건 사라지지 않아. 인물이며, 몸매며, 기품이며 뺄 것 하나 없이 일등 신랑감 아닌가? 채원 씨 아니라도 줄 섰는데. 명망 높은 성도윤을 당신이 고르고 자시고 할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임채원은 회의감이 들 정도로 차설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치여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난,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다만...”성도윤이 오히려 담담하고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상관없어. 이해해.”그런 도윤의 모습을 본 차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고, 동정 어린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편하게 생각해. 어차피 현실적인 게 사람이라.”‘이 사람, 괘씸할 땐 괘씸해도 참, 안쓰러워. 바라만 보던 첫사랑은 의형제랑 떠나가지 않나, 세속의 손가락질을 받아 가며 옆에 둔 내연녀는 병시중 앞에서 뒷걸음치지 않나, 애정의 길은 늘 그렇듯 쉽지 않지. 불쌍한 도윤 씨, 이 세상 반은 여자인데, 정작 동고동락할 사람은 나 차설아 말고 진짜 몇이나 될까?’물론 “차설아”는 예전의 차설아고 지금의 그녀는 정신이 바짝 들어 깨달은 바가 있기에 다신 되돌아가지 않겠지만.“재수 없게. 그 입 못 다물어!”화가 좀 가라앉은 소영금은 이성을 잃은 듯 미친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차설아를 향해달려갔다.“이게 다 재수 없
“날 속인 거야, 그동안!”차설아는 쌀쌀맞게 성도윤을 쳐다보았고 실제 마음이 상했다.그동안 그가 정말 후유증이라도 남을까 봐, 최선을 다해 돌봤고,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놀아난 것 같아 화가 났고 돌이켜봐도 자신이 바보 같았다.“날 부려 먹으니까 좋아? 좋았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도윤을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뛰쳐나가다 싶이 병실을 나섰다.“난 빠질 테니 알아서 해. 놀든가 말든가.”물론 도망쳤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도윤에게 “평생 불구”의 선고를 내렸던 터라 그녀도 제 발 저린 구석이 있었다. 성도윤은 악마같이 사소한 것까지도 빈틈없이 따지고 복수는 반드시 하는 성격이라 잡혀 있으면 그녀가 죽을지도 모르기에!성도윤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임채원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걱정하는 척했다“도윤아, 그만해. 몸도 불편한 사람이 마구 움직이면 쓰나. 누워서 차분히 몸 회복하는 게 좋지 않겠어?”성도윤은 깊은 눈을 내리깔고 자기 팔을 잡은 임채원의 손을 차갑게 바라보았고 태생적으로 음산하고 시린 눈빛은 임채원마저 겁에 질려 손을 놓았다.“도윤아, 화내지 말고. 설아 씨 잡는 걸 막으려는 게 아니라, 난 진짜 네가 걱정되어서. 게다가...”임채원은 입술을 깨물더니 여우 같은 행태를 보이며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설아 씨에 대해 얘기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성도윤은 쌀쌀맞게 무표정으로 대응했다.“모르겠으면 말하지 마.”방금 자신이 불구라는 거에 대한 그녀의 반응 포함,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도윤도 임채원이라는 사람한테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넌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매정하게 하니!”소영금이 화를 내며 대신 말했다.“잊지 마. 채원이는 우리 집안의 귀한 손주를 품은 사람이야. 채원이한테나 잘해 줘. 엄마가 기분이 좋아야 애도 건강하게 잘 크지...”소영금 역시도 임채원의 속셈을 보지 못 한 건 아니었다. 차설아가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