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장선 사람은 바로 차설아가 온밤 동안 기다린 남해진이었다.“차설아 씨, 제 못난 딸이 경우가 없었죠. 이미 한 달 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벌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차설아 씨께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남해진이 진심으로 사과하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저야 운이 좋아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제 남편은 저를 구하기 위해...”차설아는 성도윤이 있는 병실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성도윤은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독소가 몸에 고여 나중에 후유증이 생길지도 모른다.그래서 차설아는 걱정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책감을 느끼기도 했다.만약 그녀가 남우 그룹과의 합작을 위해 고육지책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성도윤도 뱀에 물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녀는 이 기회를 빌려 남해진에게 비즈니스 합작 제안을 할 수 있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하지만 배경수는 차설아처럼 주저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사과해서 모든 일이 다 해결된다면 세상에 왜 경찰이라는 존재가 있겠어요? 사장님은 워낙 현명하신 분이시니 따님께서 친 사고를 사과 몇 마디만으로 넘기시려는 건 아니겠죠?”남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히 생각해 봤는데 만약 차설아 씨가 더는 이 일을 추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남우 그룹이 천신 그룹과 합작할지 아니면 성대 그룹과 합작할지에 대해서 차설아 씨가 결정하는 거로 하죠.”“역시 남 사장님은 다르네요, 참 시원시원한 분이시네요.”배경수는 이 모든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풀릴 줄은 몰랐다.차설아는 역시 차설아였다. 남해진 같은 늙은 여우를 하루 만에 해결하다니, 그는 차설아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잖아요. 혹시 사장님께서 시간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 계약하는 건 어떻습니까?”배경수는 혹시나 변고가 생기는 걸 대비해 이미 계약서를 준비해뒀다. 이제는 두 회사에서 계약할 일만 남았다.하지만 차설아가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너무 서두
차설아는 미간을 구긴 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의사를 보며 말했다.“말씀하세요.”“뱀독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성 대표님의 중추신경을 교란시킬 수 있어요. 성 대표님에게는 사지가 마비되고 잘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반신불수가 되는 건 절대 아니니 사모님과 대표님께서 너무 당황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뱀독이 완전히 제거되면 곧 회복하실 겁니다.”“사지가 마비된다고요?”차설아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하지만 이때, 병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꺼져. 다 꺼지라고! 나 건드리지 마!”성도윤은 이미 깬 듯하다.그의 격앙된 목소리는 복도를 울렸다.차설아와 의사는 다급하게 병실로 향했는데 곧이어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병실 문 앞에 굳어 선 젊은 간호사들의 모습을 발견했다.“왜 여기들 서 있는 거야? 환자분이 깨셨으면 들어가서 살펴봐야지. 일 그만두고 싶어?”의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그들을 혼냈다.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성대 그룹의 대표인 성도윤이었다. 자칫하면 이 병원이 문 닫게 생겼는데 말이다.수간호사가 벌벌 떨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저희가 안 살펴보려는 게 아니고요, 성 대표님께서... 성 대표님께서 너무 화를 내셔서 차마 가까이 갈 수 없었어요. 자기를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셔서 저희... 저희도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어요!”“뭐?”의사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일찍이 성도윤이 쉽지 않은 상대인 걸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제가 가서 한 번 볼게요.”그녀는 살며시 문을 열었는데 바로 짜증이 가득 섞인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꺼지라고 했잖아, 내 말 안 들려?”“도윤 씨는 어쩜 입원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버럭버럭 화를 잘 내. 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다 깨울 셈이야?”차설아가 성도윤의 병상 옆으로 가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계속 반듯하게 누워있었기에 그제야 차설아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당신
도윤의 가슴 철렁 내려앉는 듯한 표정을 본 차설아는 인간적으로 너무 웃겼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 멋지고 도도한 성도윤에게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이 있다니, 어찌 놓칠 수야 있었을까?차설아는 애써 미간을 찌푸린 채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래. 불행은 언제나 갑자기 오는 거지. 도윤 씨, 운명을 받아 들어야지!”성도윤은 눈을 꾹 감고는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의기소침해서 말했다.“나가, 나 혼자 있고 싶어.”“그건 안 되지. 나 때문에 다친 건데. 역경은 같이 이겨내야지. 내가 간호해줄게.”차설아의 의리는 성도윤의 무자비한 거절을 맞았다.“필요 없어!”“정말 필요 없을까?”“나가!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성도윤의 차디찬 태도는 마치 얼음 호수에 빠진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러던 와중에 성도윤의 전화가 울려 왔다. 전화는 성도윤이 받지 않으면 끊기지 않을 기세로 강직하게 울려댔다. “그, 도윤 씨... 나가있을 게. 통화 편하게 해!”차설아는 “속 깊은” 모양새로 눈썹을 찡긋하며 말하고 뒤돌아섰다. 전화는 계속 울렸고 잘생긴 성도윤의 얼굴은 한참 어두워지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핸드폰 줘!”“성 대표님, 뭐라고요? 잘 안 들리네.”차설아는 귀에 손을 다 갖다 대며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거... 핸드폰 갖다 줘!”성도윤은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설아가 일부러 안 들리는 척하며 본인을 골탕 먹이는 걸 알면서도 당해낼 수밖에, 부탁하는 사람이 누그러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그래. 그래야지. 도움이 필요할 땐 부탁을 해야지. 그렇게 생떼 부리면 본인만 손해란걸 모르시나.”차설아는 웃어 보이며 혼내면서 성도윤의 양복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 그의 귀에 갖다 대주었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성도윤의 수행비서 진무열이었고 그는 전화 받자마자 구시렁대며 말했다.“보스. 어디예요? 미가연에서 나간 뒤로 이렇게 연락 안 되면 어떡합니까! 어머님께
“조금 전에 역경을 나랑 같이한다고 맹세하던 사람은 어데 갔어? 뭐 갑자기 하라니까 마음이 쫄려?”절망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는 표정의 성도윤은 냉소를 지어 보였다.“됐어. 뭐. 가려면 가. 나 혼자 죽든 말든 상관 말고 가. 이런 꼴로 살아서 뭐 해.”차설아는 전형적인 강강약약 스타일이라 성도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모른척하고 가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거기까지. 간호한다 해. 돈까지 준다는데 못 할 게 뭐야!”차설아는 시원스럽게 말했다.성도윤이 이렇게 된 게 결국 그녀를 구하기 위함이었기에, 또 인정을 빚지고는 못 사는 차설아라, 내버려 두면 본인 마음이 더 불편했을 것이다. 어차피 겨우 서너 날 정도면 될 일이라, 그녀만 참고 눈 딱 감으면 지나갈 일이었다!“선택은 당신이 한 거야. 강요하지 않았어, 난.”대표 성도윤은 새침하고 도도하게 얘기했다.“네, 네. 미천한 제가 배불러 터져서 기꺼이 도련님을 간호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네요. 그죠?”차설아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맘속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입만 살아서, 츤츤거리기는!’성도윤은 자본주의 각성이 몸에 밴 사람인지라, 곧바로 비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했다.“나 목마른데 물 좀. 참고로 난 36도의 미지근한 물만 마셔. 물의 온도는 더도 덜도 안 돼.”“아...”그 말에 차설아는 주먹이 울었다.차설아가 투덜거리며 그가 마실 물을 받아주려고 몸을 돌리자, 성도윤의 한쪽 입고리가 귀에 걸릴 만큼 올라가 있었고 그윽한 눈빛에는 여우 같은 교활함이 묻어있었다.그사이 의사와 간호사가 진찰하러 들어왔고 의사가 조심스럽게 성도윤에게 물었다.“환자분, 몸 어떠세요?”“그걸 의사인 당신들이 더 잘 아는 거 아닌가요? 굳이 입 아프게 그걸 나한테 물어요?”성도윤은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입을 꾹 닫아버렸다.의사는 난처한지 손을 비벼 대는 모습을 취했다.“정말 죄송합니다. 환자분, 저희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느끼는 현상은 독사에 중독되면 나타나는 정상적인 현상이긴 한데 조금 불
“지... 지금 하라고?”차설아는 병상 위에 옴짝달싹하지 않는 남자를 보다가, 직업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의사와 간호사를 보더니, 자승자박, 제 발등을 제가 찍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몰려왔다.“그러면 독이 심장이고 머리고 다 퍼진 다음에 하려고? 내가 죽기를 기다렸다가?”성도윤의 싸늘한 한마디에 차설아는 목이 메어 말을 못 했다.“남녀 칠 세 부동석인 법, 내가... 내가 하기엔 불편하지 않겠어?”차설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직 도윤의 손도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데, 온몸에 약을 바르라고 하니,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반면 의사는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사모님, 무슨 말씀을? 아내분께서 그러시면 안 불편한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아! 제 말은, 제가 간호사가 아니라서 전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죠.”“그럼 더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요. 약으로 몸을 닦아낼 때 최대한 곳곳을 세심히 다 바르셔야 합니다. 마사지해 주듯이 잘 문지르고 해야 약물 흡수가 잘됩니다.”의사는 할 말만 끝내고 간호사한테 방금 달인 약과 흰 거즈를 차설아에게 건네라고 눈치 줬고 병실을 나갔다.“사모님, 얼른 서두르세요. 약이 식으면 효과도 크게 떨어집니다.”‘이래 놓고 갔다고?!’차설아는 은은하게 붉어진 두 볼을 하고 성도윤을 등지고 약을 바르지도, 안 바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성도윤의 눈빛은 재미난 볼거리를 보듯 했다. 그녀의 뒷모습은 청아하고 얌전하고 고왔다.“그렇게 쭈뼛쭈뼛하는 건, 당신이 날 좋아하니까 민망해서 그러는 건가?”“아니거든!”차설아는 돌아서서 주먹을 쥐어 보였다.“당장 이혼할 마당에 무슨. 미쳤다고 내가 당신을 좋아하겠어?”성도윤은 눈썹을 올리더니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을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그래?”“그럼!”성도윤은 그녀가 왠지 백 번 더 자존심 부리는 것 같았고, 차설아는 부끄러운 얼굴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둘 다 자존심만 쎄서
“어, 미안, 미안!”차설아는 얼른 움츨어 들었다.“말해두는 데 고의가 아니야, 절대로!”차설아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고, 도윤은 오히려 매우 담담하고 미적지근하게 말했다.“상관없어. 지금 난 당신의 손아귀에 있는 몸이니.”“뭐라는 거야.”망신 망신 평생 이런 망신살은 처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차설아는 빨리 쥐구멍을 찾아서 숨고 싶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차가운 표정을 한 성도윤의 입꼬리가 은근슬쩍 올라간 모습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그 뒤로 차설아는 오히려 오픈 마인드를 보였다. 하긴 처음이 힘들지 한 번 하고 나면 익숙해지는 게 사람인지라, 처음 민망한 심경이 있은 뒤로, 도윤의 몸을 닦아주는 일은 그야말로 익숙한 일처럼 식은 죽 먹기였고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제멋대로였다.그녀는 어차피 도윤의 몸은 감각이 없어 어디를 어떻게 닦아도 무념무상일 텐데 뭘 예의차리고 뭐 민망할 게 있겠냐는 생각을 했다. 물론 만질 데 다 만지고 꼬집을 데 다 꼬집으며 약을 발라줬다.매일 이렇게 완벽한 근육질의 인물이 코앞에 있는데 끌리지 않는다는 건 별다른 취향이 아니고서야 정상적인 사람은 성인군자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한바, 세상에 공짜란 없었고 그녀가 성도윤의 멋진 몸을 마음대로 대하는 동안 그 역시도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심심하면 그녀한테 물 떠오라, 차 끓여라, 커피 타오라, 그것도 드립으로 시키고 과일은 또 똑같은 크기로 자르라고 하지를 않나, 매일 정시 정각에 해내외 경제 기사를 읽으라 했다. 기사는 또 캐스터 수준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디테일하게 요구를 해댔다.“에잇, 못 해 먹겠네, 정말!”차설아는 커피 원두를 반쯤 갈더니 마침내 터져버렸다. 대마왕을 모시는 일은 암만 좋은 미색으로 보상받는다 해도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에 참다못해 그만하려는 생각이 꽂혔다. 차설아는 생각해 보니 일주일이 지났던 터라 지금쯤 성도윤이 회복이 좀 되었을 것 같아 이불을 들춰 그의 허벅지를 꼬집고는 물었다.“좀 어때? 이제는
고요해진 병실에 애매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렀다. 성도윤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병실 문이 ‘펑’하고 세게 열렸고 소영금이 부리나케 들어왔다.“여기가 해외야? 이게 휴가 중인 거야? 둘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할아버지마저 속이고!”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그 뒤에서 임채원이 함께 걸어 들어왔다. 한동안 못 본 사이 그녀는 배가 더 커져 있었고 차설아를 한방에 현실 세계로 소환시켰다. ‘허허. 내가 정말 미쳤지. 성도윤이 그런 사람이었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있는 걸 질문이라고, 어리석게도 그의 마음을 떠보려고 했으니. 이마당에 구해준 걸 후회 했는지가 뭐가 중요하다고.’“다들 왔으니 전 이만 해방이네요.”차설아는 고결한 자태로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눈으로 책상 위의 약을 가리키며 임채원한테 말을 했다.“매일 세 번, 구석구석 약 발라줘야 해. 이젠 자격 있는 채원 씨한테 맡기는 거로.”임채원은 여리고 연약한 여자의 모습을 하고는 정실의 어투로 말했다.“설아 씨한테 도윤이가 며칠을 폐를 많이 끼쳤네, 그동안 고마워. 여긴 걱정말고. 내가 잘 보살필 테니까.”그 말이 너무도 아이러니해서 듣고 있던 차설아는 참 우스웠다. 그러나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성도윤을 한번 돌아보고는 병실을 나서려고 했다.“나를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말지.”차설아의 뒷모습을 본 성도윤이 목소리를 깔고 아무도 뭐라 못할 만큼의 확고한 의지로말했다.“내가 말했지. 날 케어하는 일에 당신보다 더 제격인 사람 없다고.”그 말은 당연히 임채원을 내모는 말이었고 그녀의 표정 또한 보기 안 좋았다. 그녀는 한편으로 주먹을 꽉 쥐고 한편으로 억울한 모습을 보였고, 차설아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또 억누를 수 없는 원망이 차 있었다.소영금은 속의 울분을 토해냈다.“도윤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집 대를 이을 아이가 채원이 배 속에 있다고, 출산이 코앞인데, 너는! 둘은 곧 이혼할 거고 도윤이 너는 채원이랑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지. 채
“나는...”임채원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 했고, 표정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성도윤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완벽하고 의기 넘치는 모습의 성도윤이었다. 반신불수의 성도윤이었다면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시집은 더 말할 것도 없이.임채원의 반응은 차설아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이 애지중지 해온 보물이 다른 사람한테 가서 가격 흥정 받는 느낌이랄까? 그녀는 곧장 내 새끼 감싸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냉소를 지었다.“채원 씨, 본인 입으로 도윤 씨 진짜 사랑이니 뭐니 그래 놓고 아프다고 하니 머뭇거리는 건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닌가? 나한테 도윤 씨를 내놓으라고 할 때랑 너무 다르네. 설사 도윤 씨가 불구라고 해도 이 사람 잘난 건 사라지지 않아. 인물이며, 몸매며, 기품이며 뺄 것 하나 없이 일등 신랑감 아닌가? 채원 씨 아니라도 줄 섰는데. 명망 높은 성도윤을 당신이 고르고 자시고 할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임채원은 회의감이 들 정도로 차설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치여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난,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다만...”성도윤이 오히려 담담하고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상관없어. 이해해.”그런 도윤의 모습을 본 차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고, 동정 어린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편하게 생각해. 어차피 현실적인 게 사람이라.”‘이 사람, 괘씸할 땐 괘씸해도 참, 안쓰러워. 바라만 보던 첫사랑은 의형제랑 떠나가지 않나, 세속의 손가락질을 받아 가며 옆에 둔 내연녀는 병시중 앞에서 뒷걸음치지 않나, 애정의 길은 늘 그렇듯 쉽지 않지. 불쌍한 도윤 씨, 이 세상 반은 여자인데, 정작 동고동락할 사람은 나 차설아 말고 진짜 몇이나 될까?’물론 “차설아”는 예전의 차설아고 지금의 그녀는 정신이 바짝 들어 깨달은 바가 있기에 다신 되돌아가지 않겠지만.“재수 없게. 그 입 못 다물어!”화가 좀 가라앉은 소영금은 이성을 잃은 듯 미친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차설아를 향해달려갔다.“이게 다 재수 없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
[재벌가 도련님과 암컷 돼지의 은밀한 관계!][사도현의 정신 상태 우려스러워...]사도현의 부드러운 노랫소리 덕분에 암컷 돼지는 첫 번째 새끼 돼지를 순리롭게 낳았다.“드디어 아기를 낳았어! 돼지야, 너는 정말 멋진 엄마야. 다른 아기도 힘내서 낳자!”사도현은 새끼 돼지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고는 낡은 옷에 감싸안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마음이 뭉클했다.예전부터 사도현은 딩크족이었다. 아이는 그저 악마 같은 존재일 뿐, 절대 가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갓 태어난 새끼 돼지를 보면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경윤이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거야. 경윤이를 닮은 아이면 얼마나 예쁠까?’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출산이 마무리되었다. 다섯 마리의 암컷 돼지는 순리롭게 몇십 마리의 새끼 돼지를 낳았고 장은학은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사도현이 빨리 달리고 용기를 낸 덕분에 다른 게스트를 제치고 먼저 1000점을 획득했다. 장은학은 마을 이장과 함께 꽃다발을 건넸고 ‘돼지 출산 전문가’라는 글이 적힌 상장도 주었다.사도현의 하얀 셔츠가 더럽혀졌지만 꽃다발과 상장을 안고 있으니 무척 행복했다.사도현은 배경윤 쪽으로 다가가서 환하게 웃더니 상장을 보여주면서 말했다.“경윤아, 내가 결국 해냈어. 네가 후회할 날이 올 거라고 내가 말했었지? 이제는 그렇게 여유롭지 못할 거야. 기대해도 좋아.”배경윤은 싱글벙글 웃는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고 슬며시 엄지를 내밀었다.“네가 진짜 해낼 줄은 몰랐어. 진짜 대단해.”날이 어두워지자 사도현은 게스트들을 불러 해산물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게스트들은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도현은 사람을 시켜 진찬영이 파티에 참가하지 못하고 업무 전화만 받게 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지내는 숙소로 걸어갔다.배경윤은 해산물 바비큐 파티에 참가하지 않고 혼자 별장의 베란다에 기대 넓은 바다를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날이 어두워
암컷 돼지들은 괴로워하면서 소리를 질렀고 허공에 대고 발길질했다. 그러면서 몸에 붙어있던 배설물이 사방으로 튀어서 접근하기 어려웠다.사도현은 토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고 천천히 다가갔다.“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 봐! 난산이어서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장은학은 급한 마음에 목청을 높여 말했다.“확실히 할 줄 아는 사람 맞아? 할 줄 모르면 당장 나와. 자네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잠시만요. 제가 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사도현은 코를 막고 겨우 말했다.‘이 세상에 내가 해내지 못하는 일은 없어. 고작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는 걸로 겁먹지 말자. 나는 할 수 있어.’고민하던 사도현은 휴대폰을 꺼내 암컷 돼지의 출산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첫째, 산후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깨끗한 출산 공간을 만들어주고 괴망간산칼륨으로 암컷 돼지의 온몸을 한 번 닦는다.][둘째, 가위를 소독하고 새끼 돼지의 탯줄을 자른다.][셋째, 낡은 수건이거나 옷으로 새끼 돼지의 몸을 닦아주고 감싸안는다.][그리고 출산 과정에서 암컷 돼지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투로 다독이거나 노래를 불러서 암컷 돼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암컷 돼지의 출산 절차를 보고 난 사도현은 당장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연예계에서 알아주는 재벌가 도련님, 유명한 회사의 대표가 이제는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황당한 일이 연속 벌어지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사도현 씨, 할 수 있는 거 맞아요? 못 하겠으면 빨리 나오세요. 대학교 때 배웠던 적이 있어서 제가 더 잘할 것 같거든요.”하늘은 돼지우리 밖에서 목을 빼 들고 말했다. 하늘은 사도현 다음으로 제일 초라한 별장을 선택한 사람이었기에 별장을 바꾸고 싶었다.“할 수 있으니 들어오지 마세요. 이건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사도현은 심호흡하고는 가만히 누워있는 암컷 돼지를 괴망간산칼륨으로 닦아주었다.암컷 돼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서 버둥거렸
암컷 돼지가 새끼 돼지를 낳는 것을 도와주면 1000점을 얻을 수 있었다. 사도현이 그 점수를 얻게 되면 다른 참가자의 별장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것이다.그때가 되면 사도현은 배경윤이 선택한 바다 별장을 빼앗을 것이고 배경윤이 어떤 반응일지 몹시 궁금했다.사도현은 제일 빠른 속도로 달려 마을 안쪽에 있는 장은학의 집에 도착했다. 장은학은 국가의 정책에 따라 도움을 받을 정도로 아주 가난했다.집에서 암컷 돼지를 다섯 마리 기르면서 돈을 벌려고 했다. 장은학이 정성스럽게 보살핀 덕분에 암컷 돼지들은 출산을 앞두게 되었다. 하지만 장은학이 까막눈이라서 어떻게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야 할지 몰랐다. 그때 > 제작진이 이 섬에 오게 되었고 장윤태는 장은학을 만나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장윤태는 무르팍을 치면서 무척 좋아했다.“그럼 게스트들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면 되겠어. 새끼 돼지가 태어난다는 건 새 생명을 맞이한다는 거잖아.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가 같이 출산을 도와주면 기묘한 분위기가 이루어질 거야.”이때 제작진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장 감독님, 출산을 도와주는데 어떻게 기묘한 분위기가 생긴단 말이에요?”제작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윤태는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는 일에 높은 점수를 걸었다. 이 에피소드는 시청률을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암컷 돼지의 출산 장면이 나가기도 전에 이미 시청률은 정상을 찍고 있었다.사도현과 배경윤의 키스 장면 덕분이었다. 장윤태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말했다.“괜찮아. 암컷 돼지의 출산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두 번째 하이라이트가 될 거야.”장은학은 돼지우리 앞에 서서 미간을 찌푸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사도현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다가가서 말했다.“자네가 바로 출산을 도와주러 온 사람인가?”“저, 저는...”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비록 제일 일찍 도착했지만 암컷 돼지의 출산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웃기지 마!”배경윤은 사도현을 밀어내고는 목청을 높였다.“너는 어쩌면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거야? 내가 선택한 바다 별장에 너 같은 사람은 절대 들어올 수 없어. 미안하지만 나가줄래? 앞으로 내 집에 들어오지 말아줘.”배경윤은 사도현이 어떤 남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미쳐 돌아서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 수위 높은 행각을 벌이려고 든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지금으로서 제일 좋은 방법은 사도현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현의 음험한 계획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조각 같은 사도현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경윤아, 지금 네가 한 말 후회하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나한테 울면서 빌어도 소용없어.”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게스트들이 일부러 두 사람을 놀려댔다.“유명한 회사 대표가 경윤 씨만 바라보고 직진하는데 왜 자꾸 내빼는 거예요? 솔직히 마음 있잖아요.”“프로그램의 이름을 >이 아니라 >이라고 바꾸는 게 낫겠어요.”“사도현 씨, 경윤 씨가 지내는 별장에 들어오세요. 어차피 곧 가족이 될 사람들인데 초가집에 살든, 별장에 살든 상관없잖아요.”배경윤은 미간을 매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여러분,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하세요. 사도현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예요. 요트에서 저를 제압하고 그런 짓을 했으니 여성 참가자를 쉽게 보고 함부로 대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저랑 같은 편에 서서 사도현과 맞서 싸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그런 사람이라서 더 무섭다는 말이에요.”소수민은 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사도현을 힐끔 쳐다보았다.“저는 차라리 사도현 님처럼 완벽한 남자가 다가와 주길 바랐어요. 그런데 이미 마음은 정해진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죠. 유빈 씨, 이나 씨. 제 말이 맞죠?”장유빈과 양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사도현 씨처럼 멋진 남자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으세요.”명문대 학생 장유빈은 사도현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갑기
소수민이 숙소를 선착순으로 정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올림픽 금메달 선수 하늘과 더 얘기하지 않고 재빨리 달려갔을 것이다.“장 감독님이라면 그럴 줄 알았거든요. 장 감독님이 촬영한 예능을 보면서 어떤 스타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혹시나 해서 먼저 뛰었더니 진짜 선착순이더라고요.”“아까 경윤 씨가 사도현 씨랑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알아요? 게다가 바다가 보이는 별장까지 선택했으니 정말 모든 걸 다 가졌네요.”소수민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수민 씨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저랑 사도현을 보고 있었나요?”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배경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실시간 방송이라 진작에 소문이 났는걸요. 두 사람이 키스하는 장면을 네티즌이 편집해서 올린 모양인데 그게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어요.”“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어! 망신당했으니 어쩌면 좋아.”배경윤은 바다를 쳐다보면서 소리를 질렀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영상이 퍼졌다는 건, 진찬영도 그 영상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사도현,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나랑 찬영 오빠를 갈라놓으려는 수작이잖아.’배경윤은 저 멀리서 진찬영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찬영의 두 눈은 오로지 배경윤을 향해 있었다.“찬, 찬영 오빠...”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모습은 바람이 난 아내가 남편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경윤 씨는 운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그전에 나한테 얘기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별장이네요. 바다를 마주 보고 있고 날씨가 따뜻하잖아요.”진찬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네. 정말 좋아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찬영 오빠는 어디에서 지내요?”“아주 운 좋게도 경윤 씨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경윤 씨만 괜찮다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식사해요. 이래 보여도 요리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저야 너
배경윤은 제일 빨리 달려갔고 여섯 채의 별장 중에서 가장 근사한 별장을 선택했다.반대로 사도현은 느긋하게 걸어서 마지막으로 남은 별장을 선택했다. 별장이라 하기에는 한없이 누추한 초가집이었고 지붕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낸단 말이에요? 다른 집으로 안내해 주세요.”사도현은 재벌가 도련님으로서 어릴 적부터 큰집에서 자랐다. 그런데 갑자기 초가집에서 지내라니 기가 찼다.“사도현 씨, 정말 죄송하지만 이곳의 규칙을 준수해야 해요. 숙소는 선착순으로 결정되지만 합산 점수가 가장 높은 참가자에게는 숙소를 바꿀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요. 며칠 동안 힘내서 점수를 얻으세요.”사회자 최빈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도현은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지만 연애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면 규칙을 잘 준수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시청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숙소를 바꿀 수 있다고요?”사도현은 턱을 매만지더니 씩 웃으면서 물었다.“어떻게 하면 점수를 얻을 수 있어요?”“밭일을 하거나 가축에게 먹이를 주면 돼요. 바닥에 널린 소똥과 개똥을 치워도 되고요. 아무튼 이곳은 할 일이 아주 많으니 일을 찾아서 하면 점수를 드려요.”그러자 사도현의 표정이 삽시에 굳었다.“연애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을 부려 먹는 프로그램 아니에요? 자꾸 힘든 일만 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아요.”최빈은 어색하게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시다시피 장윤태 감독님이 >을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사랑을 찾으러 온 이곳에서 직접 일하면서 성취감도 느끼고 호감을 느끼는 상대의 마음을 얻으라는 취지라고 했어요.“하! 소똥이나 주우면서 매력을 발산하라는 말이네요? 궂은일만 하는데 어떻게 로맨틱한 분위기가 이루어지겠어요. 감독님도 참 대단해요.”사도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그러고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합산 점수가 제일 높으면 된다는 뜻이죠? 내가 이런 승부욕은 또 있거든요. 다른 남성 참가자한테 뒤처지지 않을 거예요.”사도현은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