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랄까, 사실 나도 모르겠어, 왜 이렇게 됐는지...”차설아는 배경윤의 팔짱을 낀 채 길게 한숨을 내쉬며 사실대로 말했다.“나도 평생 저 사람이랑 엮이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일이 어디 마음처럼 되나... 처음에는 그냥 받아들이는 척만 하고 저 사람이 싫증 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내다 보니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나쁘지 않아?!”배경윤은 검지로 차설아의 이마를 찌르며 말했다.“벌써 그때 일을 잊었나 본데 4년 전에 그가 한 더러운 일을 다 잊었어? 너 4년 동안 혼자서 두 아이를 데리고 밤낮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 안 나?”“게다가 성격도 변덕스럽고 냉혹해서 죽을 지경이었잖아. 지금 너한테 고분고분하게 굴고 있지만 만약 또 마음에 안 내키면 다시 너한테 상처 주고 너한테서 달이랑 원이도 뺏을 거야, 생각해 본 적 있어?”“생각했었지...”차설아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약간 어두워졌지만 금세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사랑의 최고 경지는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 온 힘을 다해 사랑했고 그러면 된 거야. 사랑은 나한테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어, 화가 있으면 최고겠지만 없어도 괜찮아. 진짜 소중한 건 금이잖아.”배경윤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뒤집었다.어쨌든 그녀는 차설아를 가지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차설아는 IQ든 EQ든 모두 높았는데 매번 은연중에 배경윤을 억눌렀다.“그런데 너 이러면 우리 오빠는 뭐가 돼? 만약 그가 4년 동안 정성을 다해 지켜온 여신이 악마의 손아귀로 다시 돌아간 것을 안다면 미쳐버릴 수도 있어!”배경윤은 잠시 멈칫했는데 그녀는 사실 지금, 이 순간 배경수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이 재결합하면 배경수는 그들이 피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적어도 차설아는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역시 차설아의 기분은 롤러코스터처럼 가장 높이 치솟는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배경윤이 말하지 않더라도 배경수는 그녀 마음속에 있는 가시였는데 생각만 해도
아마 오빠는 차설아와 성도윤이 조만간 다시 사이가 좋아질 거라고 예상했겠지?쯧쯧, 오빠가 너무 안쓰러운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차설아는 어깨를 가볍게 떨며 잠시 말없이 흐느끼다가 고개를 들어 배경윤의 손을 꼭 잡았다.“경아, 네 오빠 어디 있는지 말해줘. 나는 그를 만나 할 말이 많아.”“오빠는 지금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데 어디로 갔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배경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나랑 오빠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것은 이미 보름 전이야. 우리는 함께 B 국에 갔고 나중에 오빠는 동쪽으로 향했어. 그곳에는 지구에서 처음 햇빛을 맞이할 수 있는 등대가 있다고 들었거든. 그리고 나는 M 국으로 왔지...”그러다가 사도현이라는 바람둥이를 만났다!그녀와 오빠 그리고 사도현은 약속이나 한 듯이 어떻게 공교롭게도 모두 같은 시간에 여행으로 이별의 상처를 치료할 생각을 했지?아마도 본질적으로 보면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소탈해 보이지만 사실은 단지 나약할 뿐이고 도피를 통해서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던 거다.이에 비해 차설아와 성도윤은 용감하고 당당했기에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거 아닐까.“내 선택이 옳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어. 만약 내가 해바라기 섬에 계속 있으며 해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차가의 복수를 포기하고 이곳에서 자유롭게 살았더라면 나는 이미 네 오빠와 결혼했을지도 몰라...”차설아는 또 자기 의심에 사로잡혀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지금의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네 오빠는 나를 도와 천신 그룹을 크게 만들기 위해 너희 가족들과 결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나는... 여전히 이런 작은 사랑에 연연하고... 나는 그를 볼 면목이 없어!”여자는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성도윤이 언제 돌아왔는지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 들었는지 그의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배경윤은 차설아한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
차설아는 뒤돌아서자마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빛에는 싸늘함이 되살아나 있었다.분명 따뜻한 섬이었는데도 남극 깊숙한 곳의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공기가 꽁꽁 얼어붙은 듯했다.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는데도 칼날의 그림자가 그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망했다.배경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고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이 기괴한 분위기는 공포 영화와 비슷해서 그녀는 둘 사이에 끼어 쪼그리고 앉아있기도 어렵고 아예 바다에 뛰어들까 싶었다."그 오해 안 했으면 좋겠어, 우리 두 사람 대화가 가끔 도를 넘을 때도 있는데 진심이 아니야. 게다가, 음 그리고...”배경윤은 거센 압력에 무릎을 꿇고 차설아를 위해 머리를 싸맸다.비록 그녀는 이 두 사람의 재결합에 찬성하지 않지만 두 사람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대화로 인해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누가 진심이 아니래, 내가 입 밖에 내면 다 진심이야.”차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도윤을 바라보며 그의 냉혹함에 조금도 긴장하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누구나 영원을 기약하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그저 호르몬의 장난 같은 거 아니야? 어차피 결국엔 무뎌질 텐데... 가식적인 약속을 할 바엔 그냥 법칙을 따르는 게...”"정말 이성적이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로봇이랑 사랑하는 줄 알겠어.”성도윤이 싸늘하게 웃자 그 웃음은 칼날처럼 섬뜩했다.그 또한 차분하고 이성적이며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통제 불능자가 되어버렸다.차설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때문에 통제 불능이 되고 심지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성적인 모습만 보여도 충분히 그를 통제 불능이 되게 할 수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그런 성도윤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고 계속 무표정하게 말했다. "날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마, 로봇은 항상 진실하고 한결같을 거지만 난 장담할 수 없어.”"지금 당신 말을 들어보니 당신은 이미 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단
"그럼 나랑 미래를 함께할 생각이 있다는 뜻이야?”"그럼!”차설아는 성도윤의 차디찬 얼굴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내가 당신과 오래 있고 싶지 않다면 내가 지금 무슨 시간 낭비를 있는 거야? 당신 표정 좀 펴, 웃어봐, 난 당신이 웃는 걸 보는 게 제일 좋아. 매번 당신이 웃을 때면 넋 놓고 보게 된다니까...”"나한테 장난치지 마, 내가 경고하는데 당신이 감히 나를 떠나면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성도윤은 여전히 쿨한 말투였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했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알겠어, 알겠어, 빨리 저녁 준비하러 가자, 우리 경윤이 배고파 죽겠다!”"좋아, 도현이가 지금 고기를 굽고 있으니 지금쯤이면 다 구웠을 거야. 빨리 가자.”남자는 여자에게 뽀뽀하고는 허둥지둥 저녁상을 준비하러 갔다.모든 것을 다 본 배경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오랫동안 충격에 빠져 있었다."이, 이게 끝이야?”그녀는 침을 삼키며 진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설아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성도윤을 고분고분 말 잘 듣게 정리할 수 있어. 난 화산폭발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저녁까지 차려주다니 정말 좋은 남편인데?”"나도 몰라...”차설아은 어깨를 으쓱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어쩌면 돌고 도는 거겠지? 저 사람이 이제는 옛날에 내가 했던 걸 하고 있는 거지.”저녁 장소는 해바라기 섬의 서쪽에 있는 해변으로 평평하고 탁 트인 모래가 부드럽고 지대가 높아 밀물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섬에서 가장 좋은 모임 장소였다.모래사장에는 모닥불과 바비큐 그릴이 놓여 있었고 거대한 양의 다리는 이미 구워져 기름지고 향기가 코를 찔렀다."해바라기 섬은 여전하네, 완전히 내 꿈속의 섬이야!”배경윤은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바람과 파도를 몸과 마음으로 만끽했다.원이와 달이는 원래 사도현과 놀다가 배경윤을 보자마자 사도현을 버리고 그녀에게 달려갔다."이모도 왔네? 잘됐다, 나랑 오빠는 이모가 너무 보고 싶었어.”달이는 싱글벙글 웃으
"뭐가...?”배경윤이 한참 양다리를 노려보며 침을 꿀꺽 삼키며 밥에 전념하려는데 사도현이 갑자기 얘기하니 여간 당황한 게 아니었다."네가 전에 요트 위에서 한 호언장담을 벌써 잊은 거야? 내가 별로 탄복하는 사람이 없거든, 특히 여자. 근데 네 그 말을 듣고 아주 탄복했어, 그러니까 날 실망하게 하지 마.”"무슨 호언장담? 내 호언장담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다 생생하게 기억하겠어?"배경윤은 일부러 어리둥절한 척하며 사도현의 눈을 피했다. "올, 양다리 정말 좋아 보인다...”"기억이 잘 안 나면 내가 알려줄게, 예를 들면 고자가 되고, 무릎 꿇고 사죄하고...”사도현은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는 듯 말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사람의 화를 제대로 돋웠다."그, 그래?”배경윤은 애써 모르는 척을 했는데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아났다.물론 그녀가 요트에 있을 때는 확실히 성도윤과 필사적으로 싸우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하지만 요트에서 내리자마자 성도윤의 도도하고 고귀한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는 녹초가 되어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두 사람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수상한데?”차설아는 양다리 구이를 자르면서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는데 마치 그런 것 같았다... 연애가 막 싹트기 시작할 때 썸 타는 냄새.오늘 이 환영 파티는 마침 이 두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가? 정말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여자는 얼른 성도윤에게 눈치를 줬다."당신 가만히 앉아있지만 말고 명색에 주인장인데 이 두 사람한테 한 잔 부어줘, 두 사람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 아니, 영원히 걱정 없이 행복하게!”"그래, 여보!”성도윤은 차설아가 무슨 말을 하든 다 고분고분 따랐고 재빨리 배경윤과 사도현에게 각각 샴페인을 한 잔씩 따라주며 보기 드문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나 자신과 내 아내를 대표하여 먼저 한 잔 올릴게.”사도현은 그런 성도윤의 모습에 장난스레 말했다."사업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하지 마. 술 마시는 일은 잘 못하니까 나
"술만 마시면 재미없잖아, 우리 ‘시장에 가면’이나 할까?”차설아는 긴 팔을 휘둘러 핏대를 세운 배경윤과 사도현 사이를 가로막으며 신이 나서 제안했다."재미없어, 애들이 노는 거잖아!”배경윤과 사도현은 의외로 의견이 일치했는데 둘 다 관심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우리 아내의 제안인데 왜 재미없었어?”성도윤은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놀아, 반드시 재밌게 놀아야지.”"그래, 그래, 그래. 놀자 놀아.”배경윤과 사도현은 다시 한번 성도윤의 태도의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배경윤은 사도현에게 소곤소곤 말했다."성도윤 완전 마누라 바보 아니야? 무섭네 무서워.”사도현은 이상하게도 담담하게 대답했다."침착해, 우리 도윤이 완전 사랑꾼이야. 예전에 도도한 척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좀 이해해줘.”차설아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자, 우리 지금부터 시작! 과일 상점에 가면 복숭아도 있고.”성도윤:"과일 상점에 가면 복숭아도 있고 수박도 있고.”배경윤:"과일 상점에 가면 복숭아도 있고 수박도 있고 딸기도 있고.”달이:"과일 상점에 가면 복숭아도 있고 수박도 있고 딸기도 있고 사과도 있고.”원이:"과일 상점에 가면 복숭아도 있고 수박도 있고 딸기도 있고 사과도 있고 망고도 있고.”사도현: "과일 상점에 가면 복숭아도 있고 수박도 있고 딸기도 있고 사과도 있고 망고도 있고 바나나도 있고.”한 바퀴 돌고 나서 결국 달이가 까먹는 바람에 첫 라운드는 끝났고 녀석이 벌칙으로 춤을 추었다.“자, 계속해!”차설아은 들떠서 채소 상점에도 가고 식물원에도 갔다. 모두가 한 번씩은 졌지만 성도윤만은 끝까지 잘 버티고 있었다."너무 어렵지 않은데? 난 아직 술 한 모금 안 마셨어!”성도윤은 퍽이나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마치 자신이 전에 술 게임을 하다가 호되게 당했던 일을 까먹은 듯싶었다."잘난 척은."사도현은 웃으며 말했다."이번엔 내가 문제 낼게.”“마음대로 해, 내 기억력은 너희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거든.”성도윤은 자신만만해서 말했다.
순간 긴장감이 감돌았고 모두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예전에는 두려울 게 없었는데 지금은 아내가 떠날까 두려워.”"이 사랑에 눈이 먼 자식, 좀 사내의 기개가 있으면 안 돼?”사도현은 손을 흔들며 그의 예상대로 나온 대답이 새롭지 않아 재미없다고 생각했다.배경윤도 장난스레 말했다."두 사람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애정행각 안 하면 안 돼? 옆에서 보기 정말 부담스럽네.”차설아는 담담한 것 같았지만 예쁜 얼굴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번졌고 온유한 표정인 것 같았지만 눈빛은 말할 수 없이 쓸쓸함이 묻어있었다.다리를 꼬고 담요를 뒤집어쓴 채 그녀는 성도윤을 향해 물었다.\"내가 질문 하나 해도 돼?”성도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물어봐.”"당신은 내가 언젠가 당신을 떠날 것을 두려워한다고 계속 강조했잖아, 그럼 그 뜻은 당신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감정에 큰 확신이 없다는 거야 아니면...우리 사이에 숨겨진 위험이 있는데 단지 내가 모를 뿐이야?”차설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따끔하게 물었다."그래."성도윤도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난 떳떳한 사람이 아니야. 나도 어두운 면도 많아. 언젠가 내 어두운 면이 너에게 들키면, 어쩌면 넌 날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라!”성도윤은 그렇게 말하며 허탈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운명은 그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조금도 통제할 수 없으니 말이다.어느 날, 차설아가 그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와 헤어지려 한다면 그도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을 것이다."어두운 면?"하지만 차설아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내가 정말 당신에 대해 아는 게 없나 보네.”원래 떠들썩했던 파티는 오랜 침묵에 빠졌고 성도윤과 차설아는 각자 생각을 하고 있었다.사도현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이건 환영 파티잖아, 그렇게 심각해서 뭐 해? 모두 일어나!”"그래, 그래, 그래, 어서 일어나!”배경윤도 일어나 분위기를 띄웠다.그녀
사도현은 벌떡 일어나 배경윤을 어깨에 메고 비틀거리며 별장으로 향했다.성도윤과 차설아는 충격에 휩싸인 채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차설아:"당신 친구 정말 미쳤구나.”성도윤:"당신 친구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차설아: "얘네 벌써...?”성도윤: "이변이 없는 한 그럴걸.”차설아: "우리가 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성도윤:"성년 남녀가 서로 원하는데 그냥 내버려 둬!”그렇게 19금, 야릇한 밤이 시작되었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돌보다가 아이들이 잠이 든 뒤 성도윤과 모래사장에 앉아 모닥불을 쬐며 술을 마셨다.파도가 출렁거리고 두 사람은 그렇게 오고 가는 술잔 사이에 저도 모르게 취했는데 성도윤처럼 한 잔이면 이미 인사불성이 되는 사람은 더욱이 알딸딸한 것 같았다."이제 너와 나 둘뿐인데 너의 어두운 면을 말해주면 안 돼?”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차설아는 한결 정신이 맑아진 듯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성도윤에게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싫어!"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어린아이처럼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내가 얘기해주면 당신이 화낼게 분명해, 그리고 또 내 곁을 떠날 거야. 만약 가능하다면 난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갈 거야.”"그럼 내가 알아 맞춰볼게...”차설아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잘못 짚은 게 아니라면 당신이 말한 어두운 면이 미스터 Q와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성도윤은 그 말에 눈빛이 약간 차갑게 변했다.“말해봐, 당신이 알고 있는 게 뭔지.”미스터 Q는 언제나 성도윤의 가슴에 박힌 가시로 그와 차설아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가시로 남아 있었다.그는 그녀에게 고백할 생각을 몇 번이나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오래 끌수록 용기가 나지 않으니 차라리 평생 입을 다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내가 오늘 줄곧 당신한테 어떻게 해바라기 섬을 알고 있는지 물었잖아, 그리고 또 어떻게 해바라기 섬에 착륙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이곳 지형에 대해 이
그에 차설아가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성도윤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차설아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불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죽은 줄 알았잖아!”그에 핸드폰을 귀에서 뗀 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전화는 왜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친한 사이였어요?”“하하, 아니지.”그녀의 말에 성도윤은 웃으며 비꼬기 시작했다.“그냥 하룻밤 잔 사이니까 이런 연락은 불필요한 거긴 하지.”남사스러운 말에 얼굴이 빨개진 차설아는 차갑게 대꾸했다.“용건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으면 끊을게요.”“잠깐만!”끊는다는 말에 조급해진 성도윤이 소리치며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 누구랑 같이 있어? 거기 안전하긴 한 거야?”“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같이 있는지를 당신한테 보고할 이유는 없죠. 그래도 물어보니까 얘기는 하는데... 아주 안전해요. 그러니까 당신이랑 이딴 쓸데없는 통화도 하는 거겠죠?”차설아는 혹시나 성도윤이 의심할까 봐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진짜야?”하지만 성도윤은 조심성이 많고 예리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나는 못 믿겠는데, 네가 영상통화를 건다면 몰라도.”“영상통화라니, 드디어 미친 거예요? 우리는 친구도 못 되는 사이인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뭐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해요?”“굳이 그걸 알자는 게 아니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표정을 잔뜩 굳힌 성도윤은 진지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 지금 어디야, 혹시 내 도움 필요해?”“친구 집에 있어요. 친구랑 사이도 좋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본인이나 잘 챙겨요.”성도윤의 관심 따위 매정하게 넘기면 그만이었겠지만 얼마 전 원이가 한 말이 떠오른 차설아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덧붙였다.“그건 무슨 말이야? 뭘 알기라도 한 거야?”성도윤처럼 예민한 사람은 차설아가 흘리듯
“제가 그분이었으면 진작에 신분을 밝히고 감사 인사라도 받았겠죠. 뭐하러 성진 씨를 속이겠어요?”“그 사람은 나한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청아 씨가 더... 그 사람 같은 거예요.”“착각하신 거예요. 저는 그분이 아니에요. 제가 눈을 내어주는 건 돈을 위해서인데 그분은 뭘 위해서 당신에게 눈을 내어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은...”자신의 커리어가 있고 아이도 있고 성도윤과 한평생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그녀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 같은 병신을 구해줄 리가 없었기에 성진은 차설아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정말 헛된 꿈을 꾼 것만 같아 성진은 차설아의 손을 놓으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이만 돌아가 보세요. 이틀 뒤에 뵙죠. 수술만 잘 끝나면 얼마를 원하든지 다 드릴게요, 그쪽이랑 가족분들 노후까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든든하네요.”말을 마친 차설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남자와 가슴을 부딪치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그때 아래에서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박서영이 내려오는 그녀를 보더니 빠르게 달려가며 물었다.“어때요, 안 들켰어요?”“들킬뻔했어요.”“그래서 어떻게 했어요?”“잘 넘어갔죠.”정원 쪽을 보며 한숨을 쉬던 차설아가 말을 이었다.“저 정도로 순정파일 줄 몰랐는데, 이젠 눈을 줄 수밖에 없게 됐네요. 안 돌려주면 발 뻗고 못 잘 것 같아요.”“잘 부탁드려요.”“다른 볼일 없으면 난 이만 지하실로 돌아갈게요. 밖에 돌아다니다가 들키면 곤란하잖아요.”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하는 박서영을 보면서도‘움직이는 기관창고’답게 담담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죄송해요...”그녀의 태연함 앞에서 박서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전에는 차설아가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데려오려고 애썼는데... 제 도련님이 눈여겨 본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너그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
담담히 말하는 차설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눈을 팔겠다고 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잖아요. 굳이 여생을 망치면서까지 벌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건...”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돈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영혼이 갇히는 건 그저 심심할 뿐이지만 가난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더라고요.”“얼마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그 돈 줄게요, 눈 안 팔아도 줄 수 있어요.”“네?”그냥 장난삼아 한 말인데 가난에 찌든 소녀를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성진에 차설아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너무 의외예요?”성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비도 맞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우산을 쥐여준다고 하잖아요. 실명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굳이 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해서요.”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던 차설아가 코를 매만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듣던 거랑은 전혀 다른 분이셨었네요. 엄청 매정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본인은 지옥을 사시면서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어린 나이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잘못된 길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전 돈이 필요해서 눈을 파는 것뿐이에요.”“눈 안 팔아도 돈 준다니까요.”“그건 싫어요.”자꾸만 거절하는 성진에 차설아는 그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챈 건가 싶어 조급해하며 말했다.“가난하다고 해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돈만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요.”“빚지는 걸 싫어한 다라...”그 말을 들은 성진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내 친구도 청아 씨처럼 빚지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친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나한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한이 없다는 말까지 하는 차설아에 측은지심이 생겨난 박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차설아 씨 말고는 도련님이랑 맞는 눈이 없어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부담 갖지 마요. 이건 내가 진이한테 빚진 거니까 내가 갚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럼 내일 오전 두 분 만나게 해드릴게요.”그 말에 박서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고 심호흡을 하며 방을 나섰고 그날 밤을 차설아는 뜬 눈으로 새우게 되었다.하지만 잠을 설친 건 성도윤도 마찬가지였다.차설아와 연락이 안 된다는 사도현의 말에 자신도 연락을 해봤지만 차설아는 줄곧 묵묵부답이었다.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을 때 성도윤은 차설아가 올린 새 스토리를 확인하게 되었다.[내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오직 너뿐이야.]해바라기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을 저런 문구와 함께 올렸는데 꽃을 사본 사람이라면 해바라기의 꽃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진심이 가득한 그 스토리를 본 성도윤은 차설아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나 싶었다.아무 소식 없다가 갑자기 저런 자신을 올리는 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그는 순간 오만해졌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이유를 알고 싶어 처음으로 그녀의 스토리에 댓글을 달았다.“너 지금 어디야?”하지만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이미 끝난 사이이니 연락을 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성도윤은 새벽 두 시에 비서에게 연락했다.“진무열, 차설아 현재 위치 알아보고 나한테 보내.”보스의 전화에 잠에서 깬 탓에 정신이 흐리멍텅했던 진무열은 눈을 비비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보스, 저는 비서지 해커가 아닙니다.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한 장 보고 위치를 어떻게 알아냅니까?”“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아침 날 밝기 전까지 무조건 알아내.”말을 마친 성도윤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잠에 들었지만 새벽에 임무를 전달받은 진무열은 자신이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만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
“하느님도 도련님의 억울함을 느꼈나 보죠.”“기증자는 어떤 사람인데? 남자야? 여자야? 성씨 가문의 사람이야?”성진은 기쁘긴 했지만, 생각은 꽤 신중했다.세상에 공짜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그는 진실부터 파헤쳐 보기로 했다.“그게...”박서영은 성진이 기증자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손톱을 뜯으면서 아무렇지않게 말했다.“여대생인데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 모집 정보를 보고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만약 눈을 기증한 사람이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차설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수술을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몰랐다.“아, 가난한 여대생이라...”성진은 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몸을 팔고, 누군가는 신장을 팔고, 심지어 누군가는 목숨을 팔기도 했다. 한 쌍의 눈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시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정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면, 돈을 섭섭지 않게 챙겨드려. 가능하다면 그녀와 가족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성진이 매우 의리 있게 말했다.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진행될 거예요. 도련님, 수술을 받으실 거예요?”박서영은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기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해. 그리고 누가 괜히 시각장애인이 되고 싶겠어? 만약 정말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수해서 설아를 내 곁에 단단히 붙잡아 놓을 거야.”“도련님, 시력을 회복하면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설아 씨를 되찾는 거예요?”“그럼!”성진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그동안 난 설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
박서영은 이렇게 슬프고 비관적인 성진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도련님은 그 여자 때문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예전의 도련님은 이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어요...”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녀를 만나면서 더욱 나 자신으로 변해버린 거고.”성진은 깊고도 막연한 초점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아니잖아요!”박서영은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감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분명 그때 성도윤 씨는 도련님을 상대로 패배했잖아요. 도련님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금 성대 그룹은 도련님이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엔... 그 여자를 위해서 어떻게 성도윤 씨한테 골수와 눈을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저희는 구석에서 세월이나 한탄하면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잖아요. 너무 억울해요!”박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진은 손가락을 움찔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그렇다. 예전의 그는 사고가 명확하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배부른 나머지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의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 될 줄 몰랐다.“도련님,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박서영은 흔들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잘 모르겠어.”아주 진솔한 대답이었다.“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 나는 이미 그래봤으니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과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