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녀석, 전생에 개였나? 그렇지 않았다면 왜 이렇게 멍청하고 싱글벙글할 수 있겠어?명색에 부잣집 도련님인데 셀카를 찍는 것만 좋아하면 몰라도 셀카를 찍을 때 포즈가 가위손이라니... 정말 온몸에서 바보티가 났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가졌다.“찰칵! 찰칵! 찰칵!”사도현은 배경윤은 시종한 표정이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나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은 뒤 만족스럽게 고르고 수정해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SNS에 올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 친구들이 내가 죽은 줄 알 거야.”남자는 배경윤이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라서 거의 보정을 하지 않은 채 SNS에 올렸다.[무뚝뚝한 친구랑 섬여행.]물론 이런 내용을 배경윤은 볼 수 없었다.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조금은 이상한 것이 아직도 서로 연락처가 없었다.배경윤은 30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결국 더 이상 담을 수 없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네 친구 말이야, 그러니까 성도윤이랑 우리 설아 설마...”“설마 뭐?”사도현은 배경윤이 물어볼 것을 예상하고 가볍게 요트 난간에 기대어 대답할 준비를 마친 듯했다.“뭘 모르는 척해? 우리 설아가 또 성도윤이랑 다시 옛날처럼 그러는 건 아니겠지?”“옛날처럼 그러는 건 아닌 거 같고, 그냥 사이가 더 좋아졌던데...”이에 사도현은 착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사람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건 우리 다 예상하던 일이잖아.”“예상하긴 개뿔!”배경윤은 다급해서 그 자리에서 욕설을 퍼부었고 똘똘한 눈망울을 끊임없이 굴렸다.“분명 성도윤 그 자식이 무슨 음모를 써서 설아한테 허락을 강요한 것이 틀림없어. 성도윤이 해바라기 섬에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만약 있다면 난...”“넌 뭐?”“나는 손을 써서 그를 고자로 만들고 다시 우리 설아 앞에 무릎을 꿇게 해서는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설아한테 준 상처를 되새기게 할 거야!”“와, 멋진데? 기대할게!”사도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손뼉을 쳤고 눈
“...”배경윤은 여전히 말없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사도현은 성도윤에게 다가가 눈앞의 금실이 좋은 두 사람을 보며 감개무량했다.“역시 너야, 내가 휴가를 보내는 틈에 두 사람 벌써 화해했다니, 역시나...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너 같은 천부적인 선수를 이길 수 없나 봐.”깊은 사랑에 빠진 성도윤은 예전의 차갑던 모습과는 달리 사랑과 평화의 빛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다.“그만 놀려, 이번에 네 형수가 마음을 돌린 것은 모두 내가 충분히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야, 잘 기억해 둬, 사랑에서 진정성은 필살기라고!”남자는 말을 마친 후 한 쪽 팔로 사도현을 껴안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배경윤은 괜찮아, 너의 윤설보다 훨씬 믿을 만하다고. 기회 잘 잡아? 내가 우리 와이프 앞에서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무슨 말투야? 마음에 안 들어?”성도윤은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화를 내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내 와이프 친구가 어디 별로일까 봐? 싫다고 말하진 마?”“싫어까지는 아니지만... 네가 와이프 바보가 되니 나 같은 해안 제일 순정남도 어쩔 수 없네.”사도현은 눈앞의 ‘마누라만 존대하는' 친구의 모습에 미칠 지경이었다.그는 차설아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내며 우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매력이 정말 대단한데요. 이 세상에 어떤 남자도 설아 씨를 거부할 수 없을 것 같네요...”“고맙습니다, 하지만 너무 저를 치켜세우지 마세요. 그때 저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멋도 모르고 당신 친구의 함정에 빠진 거죠. 이제 아이도 두 명이나 있으니 그럭저럭 살아야죠!”차설아는 손을 내저으며 달갑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눈꼬리의 웃음과 부드러움은 숨길 수 없었다.“그럭저럭 살 거면 저는 왜 안 돼요?”사도현은 입가에 시니컬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여우 눈으로 그윽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말투는 애매했
“왜 긴장은 해?”사도현은 평소의 방자한 태도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나를 초대했으니 이 정도는 감당할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두 남자가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에 빠져들자 주변에 어느새 은은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두 사람 좀 평소대로 하면 안 돼?”차설아는 옆에서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조언했다.그 말에 사도현은 곧 다시 빙그레 웃으며 성도윤의 어깨를 툭툭 쳤다.“하하, 나는 농담이었는데 우리 도윤이는 아내가 도망갈까 봐 겁을 먹었나 봐...”“이젠 놀리지 않을게. 섬이 이렇게 예쁜데 구경 좀 할게!”그는 긴 다리로 씩씩하게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와 성도윤과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 “그 뭐냐, 경윤이가 너한테 중요하게 할 말이 있대, 준비를 잘해야 할걸? 특히 허리띠를 잘 조여야 할 거야.”“허리띠를 졸라매라고?!”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뭐야, 사도현 너 똑바로 말해...”그러나 사도현은 이미 뛰쳐나간 뒤였다.배경윤은 계속 입술을 깨물고 부두에서 멀찌감치 서 있었는데 그녀는 한 발짝도 나아가기 싫고 심지어 고개를 돌려 떠나고 싶었다.“왜 안 오지?”성도윤이 물었다.그는 배경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저 처음에는 그와 차설아의 사이를 엄청 응원하다가 두 사람이 이혼한 후로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생각해 보니 이 또한 사도현이 알려준 것 같았다.사도현은 아시아 연예계를 주름잡고 언론, 파파라치 등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배경윤의 폭로 내용을 찾아내 그녀가 탈덕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했다.그러니 배경윤이 그를 싫어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 거일 수도 있다?“괜찮아, 당분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야. 내가 가서 설명할게, 먼저 사도현이랑 놀고 있어.”차설아는 자기 절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그래, 수고해. 두 사람 꼭 잘 돼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불안할 거야.”성도윤은 차설아와 포옹을 하고서야
“뭐랄까, 사실 나도 모르겠어, 왜 이렇게 됐는지...”차설아는 배경윤의 팔짱을 낀 채 길게 한숨을 내쉬며 사실대로 말했다.“나도 평생 저 사람이랑 엮이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일이 어디 마음처럼 되나... 처음에는 그냥 받아들이는 척만 하고 저 사람이 싫증 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내다 보니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나쁘지 않아?!”배경윤은 검지로 차설아의 이마를 찌르며 말했다.“벌써 그때 일을 잊었나 본데 4년 전에 그가 한 더러운 일을 다 잊었어? 너 4년 동안 혼자서 두 아이를 데리고 밤낮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 안 나?”“게다가 성격도 변덕스럽고 냉혹해서 죽을 지경이었잖아. 지금 너한테 고분고분하게 굴고 있지만 만약 또 마음에 안 내키면 다시 너한테 상처 주고 너한테서 달이랑 원이도 뺏을 거야, 생각해 본 적 있어?”“생각했었지...”차설아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약간 어두워졌지만 금세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사랑의 최고 경지는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 온 힘을 다해 사랑했고 그러면 된 거야. 사랑은 나한테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어, 화가 있으면 최고겠지만 없어도 괜찮아. 진짜 소중한 건 금이잖아.”배경윤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뒤집었다.어쨌든 그녀는 차설아를 가지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차설아는 IQ든 EQ든 모두 높았는데 매번 은연중에 배경윤을 억눌렀다.“그런데 너 이러면 우리 오빠는 뭐가 돼? 만약 그가 4년 동안 정성을 다해 지켜온 여신이 악마의 손아귀로 다시 돌아간 것을 안다면 미쳐버릴 수도 있어!”배경윤은 잠시 멈칫했는데 그녀는 사실 지금, 이 순간 배경수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이 재결합하면 배경수는 그들이 피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적어도 차설아는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역시 차설아의 기분은 롤러코스터처럼 가장 높이 치솟는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배경윤이 말하지 않더라도 배경수는 그녀 마음속에 있는 가시였는데 생각만 해도
아마 오빠는 차설아와 성도윤이 조만간 다시 사이가 좋아질 거라고 예상했겠지?쯧쯧, 오빠가 너무 안쓰러운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차설아는 어깨를 가볍게 떨며 잠시 말없이 흐느끼다가 고개를 들어 배경윤의 손을 꼭 잡았다.“경아, 네 오빠 어디 있는지 말해줘. 나는 그를 만나 할 말이 많아.”“오빠는 지금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데 어디로 갔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배경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나랑 오빠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것은 이미 보름 전이야. 우리는 함께 B 국에 갔고 나중에 오빠는 동쪽으로 향했어. 그곳에는 지구에서 처음 햇빛을 맞이할 수 있는 등대가 있다고 들었거든. 그리고 나는 M 국으로 왔지...”그러다가 사도현이라는 바람둥이를 만났다!그녀와 오빠 그리고 사도현은 약속이나 한 듯이 어떻게 공교롭게도 모두 같은 시간에 여행으로 이별의 상처를 치료할 생각을 했지?아마도 본질적으로 보면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소탈해 보이지만 사실은 단지 나약할 뿐이고 도피를 통해서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던 거다.이에 비해 차설아와 성도윤은 용감하고 당당했기에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거 아닐까.“내 선택이 옳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어. 만약 내가 해바라기 섬에 계속 있으며 해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차가의 복수를 포기하고 이곳에서 자유롭게 살았더라면 나는 이미 네 오빠와 결혼했을지도 몰라...”차설아는 또 자기 의심에 사로잡혀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지금의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네 오빠는 나를 도와 천신 그룹을 크게 만들기 위해 너희 가족들과 결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나는... 여전히 이런 작은 사랑에 연연하고... 나는 그를 볼 면목이 없어!”여자는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성도윤이 언제 돌아왔는지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 들었는지 그의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배경윤은 차설아한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
차설아는 뒤돌아서자마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빛에는 싸늘함이 되살아나 있었다.분명 따뜻한 섬이었는데도 남극 깊숙한 곳의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공기가 꽁꽁 얼어붙은 듯했다.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는데도 칼날의 그림자가 그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망했다.배경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고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이 기괴한 분위기는 공포 영화와 비슷해서 그녀는 둘 사이에 끼어 쪼그리고 앉아있기도 어렵고 아예 바다에 뛰어들까 싶었다."그 오해 안 했으면 좋겠어, 우리 두 사람 대화가 가끔 도를 넘을 때도 있는데 진심이 아니야. 게다가, 음 그리고...”배경윤은 거센 압력에 무릎을 꿇고 차설아를 위해 머리를 싸맸다.비록 그녀는 이 두 사람의 재결합에 찬성하지 않지만 두 사람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대화로 인해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누가 진심이 아니래, 내가 입 밖에 내면 다 진심이야.”차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도윤을 바라보며 그의 냉혹함에 조금도 긴장하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누구나 영원을 기약하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그저 호르몬의 장난 같은 거 아니야? 어차피 결국엔 무뎌질 텐데... 가식적인 약속을 할 바엔 그냥 법칙을 따르는 게...”"정말 이성적이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로봇이랑 사랑하는 줄 알겠어.”성도윤이 싸늘하게 웃자 그 웃음은 칼날처럼 섬뜩했다.그 또한 차분하고 이성적이며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통제 불능자가 되어버렸다.차설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때문에 통제 불능이 되고 심지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성적인 모습만 보여도 충분히 그를 통제 불능이 되게 할 수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그런 성도윤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고 계속 무표정하게 말했다. "날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마, 로봇은 항상 진실하고 한결같을 거지만 난 장담할 수 없어.”"지금 당신 말을 들어보니 당신은 이미 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단
"그럼 나랑 미래를 함께할 생각이 있다는 뜻이야?”"그럼!”차설아는 성도윤의 차디찬 얼굴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내가 당신과 오래 있고 싶지 않다면 내가 지금 무슨 시간 낭비를 있는 거야? 당신 표정 좀 펴, 웃어봐, 난 당신이 웃는 걸 보는 게 제일 좋아. 매번 당신이 웃을 때면 넋 놓고 보게 된다니까...”"나한테 장난치지 마, 내가 경고하는데 당신이 감히 나를 떠나면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성도윤은 여전히 쿨한 말투였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했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알겠어, 알겠어, 빨리 저녁 준비하러 가자, 우리 경윤이 배고파 죽겠다!”"좋아, 도현이가 지금 고기를 굽고 있으니 지금쯤이면 다 구웠을 거야. 빨리 가자.”남자는 여자에게 뽀뽀하고는 허둥지둥 저녁상을 준비하러 갔다.모든 것을 다 본 배경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오랫동안 충격에 빠져 있었다."이, 이게 끝이야?”그녀는 침을 삼키며 진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설아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성도윤을 고분고분 말 잘 듣게 정리할 수 있어. 난 화산폭발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저녁까지 차려주다니 정말 좋은 남편인데?”"나도 몰라...”차설아은 어깨를 으쓱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어쩌면 돌고 도는 거겠지? 저 사람이 이제는 옛날에 내가 했던 걸 하고 있는 거지.”저녁 장소는 해바라기 섬의 서쪽에 있는 해변으로 평평하고 탁 트인 모래가 부드럽고 지대가 높아 밀물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섬에서 가장 좋은 모임 장소였다.모래사장에는 모닥불과 바비큐 그릴이 놓여 있었고 거대한 양의 다리는 이미 구워져 기름지고 향기가 코를 찔렀다."해바라기 섬은 여전하네, 완전히 내 꿈속의 섬이야!”배경윤은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바람과 파도를 몸과 마음으로 만끽했다.원이와 달이는 원래 사도현과 놀다가 배경윤을 보자마자 사도현을 버리고 그녀에게 달려갔다."이모도 왔네? 잘됐다, 나랑 오빠는 이모가 너무 보고 싶었어.”달이는 싱글벙글 웃으
"뭐가...?”배경윤이 한참 양다리를 노려보며 침을 꿀꺽 삼키며 밥에 전념하려는데 사도현이 갑자기 얘기하니 여간 당황한 게 아니었다."네가 전에 요트 위에서 한 호언장담을 벌써 잊은 거야? 내가 별로 탄복하는 사람이 없거든, 특히 여자. 근데 네 그 말을 듣고 아주 탄복했어, 그러니까 날 실망하게 하지 마.”"무슨 호언장담? 내 호언장담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다 생생하게 기억하겠어?"배경윤은 일부러 어리둥절한 척하며 사도현의 눈을 피했다. "올, 양다리 정말 좋아 보인다...”"기억이 잘 안 나면 내가 알려줄게, 예를 들면 고자가 되고, 무릎 꿇고 사죄하고...”사도현은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는 듯 말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사람의 화를 제대로 돋웠다."그, 그래?”배경윤은 애써 모르는 척을 했는데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아났다.물론 그녀가 요트에 있을 때는 확실히 성도윤과 필사적으로 싸우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하지만 요트에서 내리자마자 성도윤의 도도하고 고귀한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는 녹초가 되어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두 사람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수상한데?”차설아는 양다리 구이를 자르면서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는데 마치 그런 것 같았다... 연애가 막 싹트기 시작할 때 썸 타는 냄새.오늘 이 환영 파티는 마침 이 두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가? 정말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여자는 얼른 성도윤에게 눈치를 줬다."당신 가만히 앉아있지만 말고 명색에 주인장인데 이 두 사람한테 한 잔 부어줘, 두 사람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 아니, 영원히 걱정 없이 행복하게!”"그래, 여보!”성도윤은 차설아가 무슨 말을 하든 다 고분고분 따랐고 재빨리 배경윤과 사도현에게 각각 샴페인을 한 잔씩 따라주며 보기 드문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나 자신과 내 아내를 대표하여 먼저 한 잔 올릴게.”사도현은 그런 성도윤의 모습에 장난스레 말했다."사업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하지 마. 술 마시는 일은 잘 못하니까 나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어릴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이곳 구조는 이미 몸에 익었어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걱정 마요.”자신이 정말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 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그럼 조심하세요.”“네, 이제 그만 가봐요.”현이를 향해 손을 저어주던 차설아는 그녀가 떠났음을 확인하고서야 난간을 더듬으며 현관문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전부터 감지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차설아는 현이에게 한 말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집안으로 정확히 걸어가 문을 열고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높이 외쳐봤다.“원아, 달아!”“엄마!”차설아의 부름에 2층에 있던 달이는 서둘러 1층으로 뛰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엄마! 왜 이제야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자신에게 애교를 부려오는 예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차설아는 웃으며 물었다.“엄마 없을 때 떼 안 쓰고 잘 있었어?”“당연하죠. 나 이제 은하수 어떻게 그리는지도 아는데, 얼른 가요! 내가 보여줄게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달이는 엄마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차설아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차설아는 몇 번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서도 달이를 놀래키지 않으려 힘겹게 아이의 방까지 걸어갔다.발 빠르게 며칠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꺼내온 달이는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엄마, 이거 내가 그린 은하수예요. 반고흐 할아버지 거랑 비슷하죠? 오빠는 내가 그린 게 더 예쁘다고도 했어요!”“예쁘지, 너무 예쁘다. 우리 달이는 진짜 그림 천잰가 봐.”아무것도 볼 수 없던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도, 아이들이 그린 거, 만든 거 그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저릿해졌다.“엄마는 저녁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색깔도 여러 개 섞어놨는데,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 않아요?”천진난만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
하지만 성진은 차분하고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두 눈이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나도 달라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너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뭐 하니? 귀까지 이식해줘야겠어?”“금방 깨어난 애한테 그만 좀 해요. 애가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거예요?”그때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단사란이 성진을 나무라는 성주원을 말리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갓 깨어난 아들과 몇 마디 나누던 그녀는 성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마침내 조용해진 주위에 박서영은 조심스레 성진에게로 다가가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눈은 안 아프세요? 힘드시면 얼른 누워서 쉬세요.”“거울 줘.”“네?”“거울 달라고.”한층 어두워진 표정에 무거운 말투까지 더해지자 박서영은 잔뜩 긴장한 채로 큰 거울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거울을 받아든 성진은 빠르게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이 눈...”자신이 출구도 찾지 못하고 빠져서 허우적대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눈이 제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오랜만에 본인 모습을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건 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한숨을 쉬던 성진은 박서영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나한테 눈 기증해줬다던 그 여대생 어딨어, 내가 지금 봐야겠어.”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두 눈이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성진은 제 생각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도련님, 그 여대생은 이미 해안시를 떠나서 지금 찾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뭐가 힘든데.”“지금 어딨는지만 알아내.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니까. 바로 차 준비하라고 이르고.”“그... 그게...”강압적인 성진의 태도에 박서영은 어찌할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