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방 안에서 백경윤은 귀신이라도 본 듯 사도현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그녀는 밖에서 윤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불가사의한 표정을 지었다.“사도현 이 쓰레기 같은 놈아, 그냥 내버려 둘 거야? 네가 소문으로는 해안 제일인 바보라더니.해안 제일의 순정 마초가 왜 갑자기 이렇게 냉혈 하게 변한 거야?”사도현은 긴 다리를 포개고 문짝에 무심코 기대어 예쁜 턱을 살짝 치켜들고 건들건들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방금 분명히 말했잖아, 너야말로 나의 진실한 사랑이라고. 가치 없는 옛사랑을 위해 진실한 사랑을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으악!!!”백경윤은 참지 못하고 토하는 표정을 지으며 두말없이 사도현을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고는 경고했다.“적당히 해라, 토나오게 하지 말라고!”웃겨 죽겠다. 사도현의 진정한 사랑이 그녀라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도 충분히 말이 되겠다.두 사람은 같은 해안 8대 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비록 교제가 많지는 않지만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물고 뜯는 관계였다.백경윤은 사도현의 바람둥이 기질이 눈에 거슬렸고, 사도현은 백경윤이 사랑을 믿지 않는 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만약 성도윤과 차설아까지 끌어들이면...세계 대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역시 너는 그대로야, 낭만 과민!”남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리고는 긴 다리로 침대 머리맡으로 걸어가서는 무전기를 누르고 부하 도민준에게 말했다.“윤설 잘 보살펴. 어떤 수단을 쓰든 오늘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건 막아야 해.”“알겠습니다, 도련님. 이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압니다.”도민준은 침착한 목소리로 공손히 말했다.이윽고 문밖은 조용해졌고 윤설도 더는 울부짖지 않았고 떠들썩한 구경꾼도 사라졌는데 모든 것이 평온하게 돌아왔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아무래도 많이 신경 쓰시는 것 같아요? 해안 제일 순정남은 역시 너 아니면 안 되네.”백경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도현을 때리려다가
백경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보건대 윤설은 너한테 진심인 거 같던데? 대스타로서 이미지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밖에서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 너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 저렇게까지 하는데 뭘 더 원해?”“...”사도현은 침묵했고 눈빛에는 여전히 짙은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니까 진심이 쓸모없는 게 아니라 너란 사람한테 진심은 아예 없는 거야. 너는 얻지 못했을 때의 그 애간장 타는 기분을 즐기는 거라니까. 지금은 얻었으니까 대수롭지 않은 거지...”“네가 뭘 알아!”평온하던 사도현은 갑자기 눈매가 싸늘해지며 백경윤을 뒤편 큰 침대에 눕히고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애 백치야, 아무 경험도 없으면서 네가 사랑이 뭔지 알아? 경험도 못 해봤으면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말라고.”"누가, 누가 내가 안 겪어봤대? 나도 경험이 많거든?”백경윤은 사도현의 지나치게 예쁜 눈을 보며 괜히 가슴이 뛰고 말을 더듬었다.경험은 그녀는 확실히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 유일한 한 번 또한 속은 경험이었으니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너 연애해?”사도현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훤칠한 손가락이 여인의 뺨을 살짝 스쳤다.“결혼하지 않으면 안전하다고 남자를 찾는 것보다 드라마 보는 게 더 낫다고 하지 않았어? 난 네가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조용히 연애했다니, 정말...”남자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말을 멈췄는데 눈빛이 더욱 복잡해졌다.“정말 뭐?”백경윤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사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볍게 웃었다.“그냥, 아까워서. 이 세상에 순결한 여자가 또 한 명 사라졌네.”“그게 무슨 뜻이야?”백경윤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금세 분노하여 말했다.“사도현, 너 정말 쓰레기구나! 너는 바람둥이면서 여자가 순수하지 못한 건 용납할 수 없어? 나이가 몇인데 생각이 아직도 그래? 어쩐지 해안 제일 순정남이 왜 갑자기 야멸차게 구냐 했더니, 세간에 떠도는
분위기는 한없이 애매해졌고 두 사람은 입맞춤이 임박했다.백경윤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다리를 번쩍 들어 사도현을 침대에서 걷어차 버렸고 벌떡 일어나 몸을 똑바로 세웠다.“남자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어.더구나 너는 찌질남 성도윤의 친구니까 끼리끼리 논다더니 너는 그보다 더 찌질할뿐이야!”사도현은 이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고 카펫 위에 반쯤 앉아 두 팔로 몸을 받치고 건들건들한 웃음을 보였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아주 좋아. 기억해, 앞으로도 사랑은 하지 마. 마음속에 사랑이 없어야 편할 수 있어.”...둘은 그렇게 헤어지고 각자 비행기를 타고 해바라기 섬으로 향했다.두 사람은 목적지가 일치하는 줄도 모르고 모두 여객기를 타고 먼저 섬 변두리에 도착한 뒤 사설 요트를 타고 섬으로 올랐다.해바라기 섬으로 향하는 요트는 아침저녁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다 도착해야 출발할 수 있었다.백경윤은 선착장에 먼저 도착해 간이 청량음료 매장에 앉아 기다리다 지쳐버렸다."선장님, 바로 출발하면 안 될까요?”그녀는 여전히 데님 선캡을 쓰고 있었고 선글라스로 반 이상 가려진 또렷한 이목구비와 신비롭고 묘한 문양이 수놓아진 민소매 티셔츠는 푸른 바다와 열대림의 아름다움을 더한다.선장은 일 년 내내 배를 몰기에 피부가 까맣게 그을렸었다. 그는 한눈에 이 개성이 넘치는 동양 여자아이에게 매료되었는데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벌리며 해명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저도 배를 운전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 고객님이 너무 많이 주셔서 그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제가 그가 주는 것보다 두 배는 더 드릴게요!”백경윤은 백가가 가장 총애하는 작은 공주였기에 어려서부터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손을 크게 흔들며 말했다.“이렇게 하죠. 내가 배를 통으로 빌릴 테니 세 배로 그 사람에게 돈을 돌려주고 우리는 바로 출발하는 건 어때요?”“아...”선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일단 전화해서 물어볼게요.”잠시 후, 선장은 미안한 표
"당신은 똑똑해요, 돈은 확실히 많은 논란을 해결할 수 있죠...”꽃무늬 셔츠와 비치 팬츠를 입고 조리개를 밟고 있는 사도현은 분명히 매우 친근한 분장을 하고 있었지만 타고난 자태와 함께 어우러져 시원 털털하기도 고귀해 보이기도 했는데 한눈에 봐도 돈 모자람이 없이 자란 부잣집 도련님 같았다.그는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배경윤을 보자마자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아름다운 곡선이 떠올랐다."또 만났네? 이 정도 우연이면 인연이라고 해도 되지 않아?”배경윤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며 화가 난 어투로 말했다."사도현, 심심했지? 윤설은 달래지 않고 왜 나를 미행하는 거야?”"나는 널 미행하지 않았는데.”"됐어, 네가 날 미행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부두를 알 수 있었겠어? 이 요트를 예약했을 리도 없잖아...”배경윤은 한숨을 쉬었다."오늘 내가 농담이 좀 심해서 너와 윤설 사이 관계가 어색해진 건 알고 있어. 내가 시간이 나면 잘 설명할게. 오늘은 너그럽게 봐주길 바라. 시간이 급해서 그러는데 이 요트를 일단 나에게 양보해 줄 수 있어?”다른 사람이라면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상대는 사도현이었으니 배경윤은 순간 김빠진 고무공처럼 축 늘어졌다.왜냐하면 사가는 순자산이 백가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사도현 본인은 사씨 가문의 모든 재부를 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유동자산이 그녀 같은 단순한 아가씨보다 많을 것이 분명했다.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찌질하게 매달릴 수밖에!"우선 나는 정말 널 미행한 적 없고 나도 시간이 급해서 이 요트를 타야 해.”사도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해명에 나섰다."내가 아무리 너를 좋아해도 이런 사람을 미행하는 변태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더군다나 너를 좋아하지도 않는걸.”남자의 그 말에 배경윤은 좀 난처해졌다.그녀는 사도현이 그녀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단지 그가 아침 일 때문에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하지만 사도현이 싫다고 분명하게
말도 안 돼!배경윤은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가는 곳은 설아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야. 쉽게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성도윤 같은 자식이 어떻게 거기를 알아? 일부러 나 떠보는 거 아니야?”사도현은 담담한 표정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 도윤이가 설아한테 남이 아닐 수도 있지?““남이 아니면 원수겠지. 설아는 자신의 마지막 정토를 자신의 원수에게 알릴 수 없어! 그러니 그중에는 반드시 알지 못한 사연이 있을 거야.”“사연이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잖아?”사도현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호의로 귀띔했다.배경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지금 당장 설아에게 전화를 걸어 네 음모를 폭로할 거야!”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그래 그럼.”곧 차설아는 전화를 받았고 배경윤이 공교롭게도 지금 사도현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하마터면 전화기 너머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세상에, 전 세계에 총 197개의 나라가 있는데 이렇게 서로를 만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묘한 인연이야? 빨리 사겨, 이건 하나님의 뜻이야!”배경윤 : “???”차설아:“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섬으로 와. 나와 아이들, 그리고 아이 아빠가 벌써 두 사람을 위한 환영 연회를 준비했으니까. 올 때까지 기다릴게!”배경윤:“애 아빠? 설마...”차설아:“됐어, 이쪽 신호가 좋지 않네. 암튼 두 사람 빨리 와, 먼저 끊을게.”배경윤:“잠깐만, 야, 야...”전화기 너머로 한바탕 바쁜 소리가 들려왔다.사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잠시 쉬고 있었다.“잘 확인했지? 사정 같은 건 있고?”흥!배경윤은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것을 알고는 상대하기 귀찮아 몸을 일으켜 팔짱을 낀 채 요트 꽁무니에 앉았다.사도현도 보트에 올라 배경윤 맞은편에 앉은 뒤 선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출발하죠!”‘쾅'하는 소리와 함께 요트는 거센 파도를 감싸며 바다의 가장 넓은 곳을 향해 달
이 녀석, 전생에 개였나? 그렇지 않았다면 왜 이렇게 멍청하고 싱글벙글할 수 있겠어?명색에 부잣집 도련님인데 셀카를 찍는 것만 좋아하면 몰라도 셀카를 찍을 때 포즈가 가위손이라니... 정말 온몸에서 바보티가 났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가졌다.“찰칵! 찰칵! 찰칵!”사도현은 배경윤은 시종한 표정이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나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은 뒤 만족스럽게 고르고 수정해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SNS에 올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 친구들이 내가 죽은 줄 알 거야.”남자는 배경윤이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라서 거의 보정을 하지 않은 채 SNS에 올렸다.[무뚝뚝한 친구랑 섬여행.]물론 이런 내용을 배경윤은 볼 수 없었다.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조금은 이상한 것이 아직도 서로 연락처가 없었다.배경윤은 30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결국 더 이상 담을 수 없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네 친구 말이야, 그러니까 성도윤이랑 우리 설아 설마...”“설마 뭐?”사도현은 배경윤이 물어볼 것을 예상하고 가볍게 요트 난간에 기대어 대답할 준비를 마친 듯했다.“뭘 모르는 척해? 우리 설아가 또 성도윤이랑 다시 옛날처럼 그러는 건 아니겠지?”“옛날처럼 그러는 건 아닌 거 같고, 그냥 사이가 더 좋아졌던데...”이에 사도현은 착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사람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건 우리 다 예상하던 일이잖아.”“예상하긴 개뿔!”배경윤은 다급해서 그 자리에서 욕설을 퍼부었고 똘똘한 눈망울을 끊임없이 굴렸다.“분명 성도윤 그 자식이 무슨 음모를 써서 설아한테 허락을 강요한 것이 틀림없어. 성도윤이 해바라기 섬에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만약 있다면 난...”“넌 뭐?”“나는 손을 써서 그를 고자로 만들고 다시 우리 설아 앞에 무릎을 꿇게 해서는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설아한테 준 상처를 되새기게 할 거야!”“와, 멋진데? 기대할게!”사도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손뼉을 쳤고 눈
“...”배경윤은 여전히 말없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사도현은 성도윤에게 다가가 눈앞의 금실이 좋은 두 사람을 보며 감개무량했다.“역시 너야, 내가 휴가를 보내는 틈에 두 사람 벌써 화해했다니, 역시나...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너 같은 천부적인 선수를 이길 수 없나 봐.”깊은 사랑에 빠진 성도윤은 예전의 차갑던 모습과는 달리 사랑과 평화의 빛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다.“그만 놀려, 이번에 네 형수가 마음을 돌린 것은 모두 내가 충분히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야, 잘 기억해 둬, 사랑에서 진정성은 필살기라고!”남자는 말을 마친 후 한 쪽 팔로 사도현을 껴안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배경윤은 괜찮아, 너의 윤설보다 훨씬 믿을 만하다고. 기회 잘 잡아? 내가 우리 와이프 앞에서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무슨 말투야? 마음에 안 들어?”성도윤은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화를 내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내 와이프 친구가 어디 별로일까 봐? 싫다고 말하진 마?”“싫어까지는 아니지만... 네가 와이프 바보가 되니 나 같은 해안 제일 순정남도 어쩔 수 없네.”사도현은 눈앞의 ‘마누라만 존대하는' 친구의 모습에 미칠 지경이었다.그는 차설아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내며 우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매력이 정말 대단한데요. 이 세상에 어떤 남자도 설아 씨를 거부할 수 없을 것 같네요...”“고맙습니다, 하지만 너무 저를 치켜세우지 마세요. 그때 저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멋도 모르고 당신 친구의 함정에 빠진 거죠. 이제 아이도 두 명이나 있으니 그럭저럭 살아야죠!”차설아는 손을 내저으며 달갑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눈꼬리의 웃음과 부드러움은 숨길 수 없었다.“그럭저럭 살 거면 저는 왜 안 돼요?”사도현은 입가에 시니컬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여우 눈으로 그윽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말투는 애매했
“왜 긴장은 해?”사도현은 평소의 방자한 태도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나를 초대했으니 이 정도는 감당할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두 남자가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에 빠져들자 주변에 어느새 은은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두 사람 좀 평소대로 하면 안 돼?”차설아는 옆에서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조언했다.그 말에 사도현은 곧 다시 빙그레 웃으며 성도윤의 어깨를 툭툭 쳤다.“하하, 나는 농담이었는데 우리 도윤이는 아내가 도망갈까 봐 겁을 먹었나 봐...”“이젠 놀리지 않을게. 섬이 이렇게 예쁜데 구경 좀 할게!”그는 긴 다리로 씩씩하게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와 성도윤과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 “그 뭐냐, 경윤이가 너한테 중요하게 할 말이 있대, 준비를 잘해야 할걸? 특히 허리띠를 잘 조여야 할 거야.”“허리띠를 졸라매라고?!”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뭐야, 사도현 너 똑바로 말해...”그러나 사도현은 이미 뛰쳐나간 뒤였다.배경윤은 계속 입술을 깨물고 부두에서 멀찌감치 서 있었는데 그녀는 한 발짝도 나아가기 싫고 심지어 고개를 돌려 떠나고 싶었다.“왜 안 오지?”성도윤이 물었다.그는 배경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저 처음에는 그와 차설아의 사이를 엄청 응원하다가 두 사람이 이혼한 후로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생각해 보니 이 또한 사도현이 알려준 것 같았다.사도현은 아시아 연예계를 주름잡고 언론, 파파라치 등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배경윤의 폭로 내용을 찾아내 그녀가 탈덕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했다.그러니 배경윤이 그를 싫어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 거일 수도 있다?“괜찮아, 당분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야. 내가 가서 설명할게, 먼저 사도현이랑 놀고 있어.”차설아는 자기 절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그래, 수고해. 두 사람 꼭 잘 돼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불안할 거야.”성도윤은 차설아와 포옹을 하고서야
하지만 차설아는 현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오후가 되자 김정민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이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서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했어?”검은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말씀하신 대로 다 했어요. 제발 엄마를 놓아주세요.”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계속해. 열흘 뒤에야 풀어줄 거야.”여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현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헛짓거리할 생각은 마. 날 속이거나, 하루라도 늦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네 엄마는 죽는 거야. 알아?”“네, 알겠어요.”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제야 그 여자는 현이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그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뭔데?”“그냥 궁금해서요. 설아 씨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설아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시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현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녀는 이 여자에게 조종당해 차설아를 해치는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그녀는 언젠가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러자 그 모자를 쓴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착하다고?”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자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뱀과도 같았다.“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자가 누굴 해쳤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그럴
“현이 씨?”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현이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현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차설아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현이 씨 아니죠?”“설아 씨, 저 맞아요.”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차고 상냥한 말투와 달랐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설아 씨,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옷장 맨 왼쪽에 있는 니트 한 벌이면 돼요.”차설아가 또렷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가 그녀가 원하는 옷을 꺼냈다. 니트를 받아 든 차설아는 능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립심이 강했기에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오히려 현이 입장에서는 여느 고용인들보다 차설아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차설아를 좋아했다.하지만...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이는 평소처럼 우유 한 잔에 통밀 토스트, 그리고 과일 몇 조각을 준비했다.차설아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토스트를 씹으며 현이에게 말했다.“혹시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아, 아니에요.”현이는 입술을 꼭 깨물며 망설였다.“그냥... 가족끼리 또 싸웠을 뿐이에요. 사실 맨날 싸워서 이제 익숙하지만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뭘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요? 앞을 못 보고 나서 지금까지 현이 씨가 절 도와주고 있잖아요. 오히려 제가 현이 씨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차
성도윤은 남자로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로 하여금 닭살 돋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눈물도 흘리게 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알면 됐어요. 제가 얼마나 좋은 아내인데요! 그러니까 평생 저만 사랑해 주세요.”차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도윤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술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주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줬으니 말이다.사실 차설아는 오래전부터 성도윤과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한꺼번에 채울 생각이었다.“너, 너... 취한 거 아냐?”성도윤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차설아를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 그녀가 이러는 건 꿈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으니 말이다.그는 어찌할 바 몰랐다. 괜히 진하게 키스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취했든 안 취했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그냥 키스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두 손으로 성도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술을 포갰다. 차설아가 워낙 격렬하게 덤벼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갈까?”성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살짝 쉬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은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위층으로 가면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게 아닐 텐데 괜찮아요?”“상관없어. 오늘 밤, 난 주인님의 말씀만 잘 따를 테니까.”그렇게 말한 성도윤은 차설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고 단숨에 침실까지 도착했다.아이들이 캠프를 떠난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성진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분명 이 싸움에서 이긴 건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철저하게 패배한 기분이었다.성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상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설아야, 오늘 어땠어?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퇴근하고 가서 만들어 줄게.”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달달한 그 분위기는 옆에서 듣는 사람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성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성도윤이 사무실을 떠나려 하자 성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 설아랑 다시 잘 지낸다며? 다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근데 이렇게 빨리 화해했다고? 설마 또 한 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거야?”성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끝난 사이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완전히 남남이 되어 다시는 엮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한두 달 만에 원래 사이로 돌아간 데다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눈동자까지 희생해 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에 성진은 절망스러웠다. 성도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그 모든 걸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성도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내가 설아랑 어떻게 지내는지 너한테 보고해야 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부러우면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찾아서 결혼하면 되잖아. 따뜻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을 누리면 되잖아. 다만...”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회의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지금 너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을까?”성도윤의 말투는 누가
성진의 말에 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성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에게 놓고 말하면 성진이 생명의 은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그렇다면 일단 부대표님 뜻대로 진행하죠. 일단 한 분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시도해 보세요. 지켜보겠습니다.”성도윤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고 이는 곧 성대 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역시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나서 성대 그룹의 이익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어떡할 건데?”“넌 내가 어떤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성도윤을 지지하는 세력과 성진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말이다.그때, 오준현이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은 항상 회사를 위해서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부대표님께서 정말 그룹에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성 대표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그러자 박지훈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오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오준현 씨, 회사의 대표 자리는 인간성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사에 수천 명의 직원이 있어도 성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인간성이요? 그게 수익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주인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이익뿐이라고요.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가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두 파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대립해서 싸우기 시작했다.보다 못한 성도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
“제 비서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지금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확장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성도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성 대표님,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너무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이 작은 규모만 지키려다가 무너지고 싶으세요?”장기준이 가감 없이 성도윤에게 의문을 제기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형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지난 반년 동안 큰 충격을 겪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죠. 그로 인해서 성격까지 바뀐 겁니다. 좀 더 신중해진 거죠.”“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 형은 뇌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거든요.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세요? 석현아, 주주님들께 보여 드려.”“네, 부대표님.”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성도윤의 건강 검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그러자 진무열이 분노하며 성진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성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는 개인 정보예요! 함부로 유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진 비서님, 진정하세요. 형을 생각해서라면 건강 검진 결과는 당연히 비밀로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형은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에요. 형의 건강 상태도 곧 성대 그룹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들 성대 그룹의 수익이 감소한 원인을 찾고 있지 않나요? 전 이 검진 결과가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해요.”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주주들은 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이럴 수가! 성 대표님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을 줄은...”“뇌를 다친 데다가 기억 상실증까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경영 방식이 전과 너무 다르더라니... 그 원인이 여기 있었군요.”“성대 그룹이 갑자기 변한 건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