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말해봐.”성도윤은 가볍게 웃으며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었고 차설아를 쳐다보는 그 눈빛은 여우처럼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매력이 있는 듯했다.“내가 키스하는 게 기분 나빴다면 내가 맹세할게. 앞으로 다시는 안 하겠다고.”차설아는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는데 난처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원이는 차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였다.“엄마, 너무 겁내지마. 있는 대로 말하면 돼. 절대 누구 때문에 눈치 보거나 할 필요 없어.”“엄마, 걱정하지 말고 그냥 얘기해. 달이랑 오빠가 엄마 지켜줄게요.”달이도 차설아의 손을 꼭 잡았는데 마치 차설아한테 용기를 주려 하는 것 같았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차설아가 가정폭력이라도 당한 줄로 알 판이다.“자기야,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죄인이 될 거 같은데?”성도윤은 양팔을 벌려 아무 잘못 없다는 무고한 표정을 지었다.“아, 알았어, 알았어. 대답하면 되잖아...”차설아는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을 이었다.“엄마는 괴롭힘당하지 않았어. 아빠가 키스하는 거... 좋아, 엄마는...”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설아는 너무 부끄러워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하느님, 부처님! 그녀는 더는 성도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두 아이도 마찬가지로 볼 용기가 없었다.“바보, 진작 그렇게 말하지.”성도윤의 입꼬리는 서서히 올라갔고 그는 긴 팔을 벌려 차설아를 끌어 품에 안으며 말했다.“부끄러우면 내 품에 숨던가?”차설아의 교태와 성실함은 그가 한 명의 남자로서 크나큰 만족감이 들게 하는데 충분했고 이는 그가 사업에서의 성공을 이룬 것보다 더욱 성취감 있는 일이었다.“아, 짜증 나. 쪽팔려 죽겠어.”차설아는 얼굴을 남자의 가슴에 묻고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녀는 난생처음 한 남자 앞에서 여린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는데 반전 매력이 흘렀고 귀여웠다.원이와 달이는 눈앞의 광경에 조금은 놀란 듯했는데 서로 쳐다보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오빠, 엄마
“이제 진짜 출발이야.”성도윤은 말을 하고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이에 차설아와 아이들도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차설아는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아서야 그들이 바다 위에 홀연 떠 있는 헬기장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주위에는 끝없이 펼쳐진 망망한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비행장?”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경계심을 높였다.“우리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고?”“한 바퀴 돌고 오자.”성도윤은 그녀에게 눈짓하고는 소형 제트기로 발길을 옮겼다.“성 대표님, 비행기 안전 검사를 마쳤습니다. 각종 기능 모두 정상이고 항로 신청도 이미 통과했습니다. 사모님 모시고 출발하시는 데 문제없습니다.”비행기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성도윤이 다가오자 공손하게 보고했다.“응.”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설아와 아이들을 이끌고 비행기로 올랐다.비행기는 너무 크지 않았고 7개의 좌석밖에 없었지만, 충분히 사치스러웠다. 각종 음식과 주류, 없는 게 없었고 아이들 전용 놀이지역까지 겸비했다.두 아이는 단번에 놀이 구에 정신이 팔렸고 성도윤은 곧장 비행기 앞부분에 있는 조종실의 운전석으로 향했다.“뭐야? 비행기 운전도 할 줄 알아?”차설아도 그를 따라 조종실로 왔는데 그가 조종석에 앉는 걸 보고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껌이지. 차 운전보다 쉬워.”성도윤은 한편으로는 능숙하게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배우고 싶으면 내가 가르쳐줄게.”“당연히 배우고 싶지.”차설아는 게임기처럼 생긴 비행기 조종핸들을 보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엄청 전부터 비행기 조종하는 거 배우고 싶었어, 계속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엄청 멋있는 일이잖아.”시간이 없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돈이 없다는 게 제일 큰 원인이었다.보통 기형은 적어도 600억 정도 하고 이 비행기 같은 기형은 7000억 정도 될 거다.성도윤이 돈이 많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무슨 일인데?”차설아는 성도윤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여자의 육감이라는 게 있으니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종핸들을 가리키며 긴장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조종 안 해도 돼?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비행기는 지금 지면에서 400비트 떨어진 상공에 있고 이제 착륙할 때까지 줄곧 무인 비행이 가능하고... 즉 난 지금부터 자유의 몸이란 뜻이야.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지...”“이 정도라고?”차설아는 비록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매우 놀랐다.하지만 그녀도 전에 뉴스로 접했었던 적이 있었다. 현재 비행기의 무인 비행 기술이 아주 발전했는데 기장의 조종 없이도 비행할 수 있기에 일부 기장은 비행 도중 너무 심심한 나머지 스튜어디스와 그렇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설마 성도윤이 말한 일이 그 일은 아니겠지?잠깐!차설아는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음란 마귀를 떨쳐버리려 했다. ‘설아야, 이런 생각 좀 그만하자...’성도윤은 천천히 그녀한테로 다가가 그녀를 자리에 가뒀다.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볼을 보면서 성도윤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뭐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얼굴이 이렇게 달아올랐어?”“그래? 아니야.”차설아는 냉정한 척 대답하고는 손등을 볼에 갖다 댔는데 역시 아주 뜨거웠다.“진짜 빨개. 체리처럼... 되게 탐스럽게...”“성도윤, 너... 윽!”차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성도윤은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아까 차에서 제대로 못 했으니까 이제 계속하지 뭐.”성도윤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울렸고 이와 동시에 그의 손은 천천히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성도윤, 미쳤어? 우리 지금 하늘 위에 있어, 비행기 조종은 안 하고 지금 뭐 하는 거야?”차설아는 긴장되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겨우 이성의 끈을 붙잡고 가녀린 손으로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만지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그녀는 무서웠다. 조금
그녀는 부끄러워 자리에서 일어나 조종실을 나왔다.“엄마, 나랑 오빠가 한 레고 봐요. 예쁘죠?”달이는 자신과 원이가 몇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성과를 가리키며 자랑스레 물었다.“와~ 너무 멋진 성인데? 이렇게나 빨리 만들다니, 정말 대단해~”차설아는 1m가 족히 되는 캐슬을 보며 감탄을 자아냈다.‘이 정도의 모형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만들어 내다니, 달이랑 원이는 정말 천잰가 봐.’“엄마, 내가 다 생각해 놨어. 1층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민이 이모가 살고 2층에는 엄마랑 아빠, 그리고 Q 아빠가 살고 3층에는 나랑 오빠가 살게. 그리고 캐슬 앞에는 해바라기들을 심을 거야. 우리 모두 여기서 살면 엄청 행복하겠다, 그렇지?”달이는 고개를 들어 차설아를 바라보며 신이 나서 그녀한테 설명했다.“응, 우리... 우리는 분명 행복할 거야.”차설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최근 그녀와 성도윤이 다시 화해하고 예전으로 돌아간 게 불과 1개월인데 그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미스터 Q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만약 달이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그 남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을 거다.차설아, 너 정말 생각하는 남자도 많다.‘엄마, 왜 요즘은 Q 아빠랑 연락 안 해요? 나 Q 아빠 보고 싶은데.”원이의 말투에도 조금은 슬픈 기색이 어려있었다.“원이야, 미안. 엄마도 연락이 안 돼...”“혹시 엄마랑 아빠가 화해한 거 알고 화나서 엄마 연락 안 받는 거 아니에요?”“엄마도 몰라, 갑자기 사라져서...”차설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원이를 보며 물었다.“원이는 Q 아빠가 더 좋아? 아니면... 엄마가 Q 아빠 버리고 딴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같아서 싫어?”“그건 아녜요.”원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차설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가 누굴 더 좋아하면 나랑 원이도 더 좋아해요. 그냥 원이는 나쁜 아빠가 Q 아빠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할 뿐이죠, 엄마한테 또 상처 줄까 봐.”“걱정 마, 앞으론 엄마
차설아는 립스틱을 옷 주머니에 넣고 아이들 소리를 따라 창가로 발길을 옮겼다.“여기는...”창밖의 풍경을 본 그녀는 너무 놀라 눈이 커졌고 저도 모르게 손으로 떡 벌어진 입을 가렸다.“엄마, 특별하다는 곳이 해바라기 섬이었어요! 우리한테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녜요? 앞으로는 나쁜 아빠라고 하지 말아야겠어요.”달이는 비행기가 지나고 있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는데 성도윤에 대한 호감도가 직속 상승했다.원이도 간만에 성도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러게, 이번에는 진짜 신경 좀 썼는데요? 우리가 제일 그리워하는 곳인 것도 알고... 그런데 이곳은 어떻게 안거예요?”“그러게? 여기는 어떻게 안 거지?”차설아는 그녀와 아이들이 4년 동안 생활했던 곳을 보며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그녀는 주머니에 넣어둔 립스틱을 만지며 가슴 한쪽이 먹먹해 옴을 느꼈다.그녀는 정말 알고 싶었다. 성도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을 데리고 이 비행기를 탔고 또 누구를 데리고 해바라기 섬에 왔었는지? 얼마나 많은 여인과 그런 경험을 했는지...그녀의 이런저런 의문들 속에 비행기는 안전히 착륙했고 해바라기 섬에서 유일하게 대외로 개방된 비행장에 정착했다.“와, 도착했다. 우리가 해바라기 섬에 다시 돌아왔어요! 달이는 여기 엄청 그리웠다고요!”달이는 퐁당퐁당 뛰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는데 그 모습조차 너무 귀여웠다.“달이야, 얼른 내려가자. 나도 실험실이 너무 가고 싶었어.”원이도 달이 손을 꼭 잡고 얼른 출구 방향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해바라기 섬은 두 아이에게 특별한 의미가 담긴 곳이다.이곳은 그들이 태어나 자란 곳이고 너무나도 많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기에 두 아이가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곳이었다.한편 이와 동시에 성도윤도 조종실에서 걸어 나왔다.“얘들아, 어때? 맘에 들어?”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자상한 미소가 번졌고 눈빛에는 기대가 가득했다.“아빠, 완전요! 앞으로는 아빠가 달이한테는 최고의 아빠예요!”
얼굴을 안 본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차설아가 보고 싶었다.그는 차설아도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뜨거운 불이 활활 타오를 줄 알았다.하지만 웬걸, 차설아의 태도는 그토록 냉담했고 성도윤한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우리 먼저 내려가자.”차설아의 반응에 성도윤은 오리무중에 빠졌다.왜 갑자기 이렇게 냉랭하게 변한 거지?방금 있었던 그 부끄러운 장면이 아직도 그의 눈앞에 생생한데 벌써 태도를 바꾸다니?당장이라도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필경 아이들이 있으니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은 문을 열었고 그들은 차례대로 비행기에서 내렸다.“와~ 너무 예쁘다, 우리가 드디어 다시 돌아왔네!”달이는 크게 공기를 들이쉬며 말했는데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해바라기 섬은 해양성 기후로 일 년 사계절 기온이 20도 좌우를 유지하며 광풍 폭우는 볼 수 없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천연으로 생긴 백색의 해변, 울창하게 펼쳐진 야자나무 숲, 차설아와 아이들이 직접 가꾼 해바라기밭, 그리고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에메랄드빛 바다까지...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싶었다.“오빠, 우리 가서 조개 잡자! 우리가 여기를 떠난 지도 오래됐으니까 바닷가에 조개가 엄청 많을 거야. 어쩌면 진주도 있을지도 몰라!”“그러자, 그리고 엄마한테 목걸이를 만들어 드리자...”두 꼬마는 예전으로 돌아가 손에 손을 잡고 폭신폭신한 바닷가에서 자유롭게 뛰놀았다.개인 섬으로서 그들은 이 섬에서 절대적인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었다.성도윤과 차설아는 천천히 아이들의 뒤를 따랐고 크고 작은 발자국이 백색의 바닷가에 남겨졌다.“그...”몇 번이고 성도윤은 말을 꺼내려고 머뭇거렸다.왜냐하면 그는 차설아의 기분이 변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태도가 달라졌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기분이 안 좋아?”드디어 성도윤은 입을 열었다.“나 기분 안 나빠. 왜 그렇게 물어봐?”차설아는 본인이 4 년 동안이나 생
성도윤의 그윽한 눈빛은 마치 밤하늘에서 흩어지는 불꽃처럼 찬란함 끝에 무한한 어둠과 적막만이 흘렀다.“나도 알아, 평소에 냉담하고 낭만도 모르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일밖에 없는 거... 말도 예쁘게 못 해서 당신한테 많이 상처 준 거... 그래서, 나한테 싫증 나서 나한테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 아니야?”그는 고개를 숙였고 가여운 강아지처럼 눈빛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또 그러네, 내가 언제 짜증 난대?”차설아는 마치 사람 마음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나쁜 여인처럼 조금은 짜증이 섞긴 말투로 말했다.“우리 좋았잖아, 이런 생각 좀 그만하면 안 돼?”“내가 생각이 많은 게 아니라, 난 그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뿐이야. 기분이 되게 안 좋아 보여서...”성도윤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단호하게 말했다.“난 더는 우리 사이에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어. 만약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 내가 고칠게.”“잘못한 거 없어. 지금 엄청 잘하고 있는데?”차설아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짜증이 섞긴 말투로 대답하고 있었다.“그리고 낭만적이기도 해. 비행기를 타고 몇만m의 고공에서 짜릿한 기분이라... 딱 봐도 숙련됐네. 아주 능구렁이가 다름없어?”사실 그녀는 자신 이외에 누구를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으며 또 누구와 짜릿한 기분을 누렸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 의문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그가 자신을 질투심 많은 여자로 생각할까 봐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정말 그녀가 원하지 않던 대답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속으로 앓아야만 했다. “능구렁이까지는 아니고, 난 그저 널 즐겁게 해주고 싶을 뿐이야.”성도윤은 그녀의 말투에 섞인 짜증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고 순진하게도 그녀가 자신한테 엄청 만족한 줄로 알고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그는 차설아의 어깨를 감쌌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오 닥터의 의견도 듣고 체계적으
하지만 알고 보니 고작 이런 일로?“뭐는 무슨 뭐야? 얼른 대답해봐.”차설아는 성도윤의 반응으로부터 아마 적지 않은 여자들을 데리고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그녀는 질투의 마음이 다시 한번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그래, 그럴 줄 알았어. 너 같은 부잣집 도련님들이 순정남인 게 몇이나 되겠어? 이 비행기를 탄 여자들이 적어도 10명은 넘지?”“아니야, 난...”“됐어, 변명하지마. 누구도 탓하지 않아. 내가 애초에 널 선택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결과야.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들이댄 내 잘못이지.”“아니야, 여보. 내 말 좀 들어봐.”“됐어, 나도 다 이해해. 남자들이야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당신은 그냥 겉보기에 그런 면에 관심이 없었던 거고 뭐 진짜 관심이 없었겠어? 다 알아. 그냥 오늘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랑 잤어?”“잠깐!”성도윤은 더는 차설아의 말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아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나한테도 말할 기회를 주면 안 돼?”“윽...”차설아의 크고 맑은 두 눈은 어느새 붉어졌는데 그렇게 가련한 눈빛으로 성도윤을 바라보는 것이 굳세기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됐어, 됐어. 울지 말고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그는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사실 난 처음부터 여자는 당신 한 명밖에 없었어.”“응?”차설아의 큰 눈망울은 순간 더 커졌다.“대부분 남자한테 이런 일은 자랑거리가 안 되지만 난 이게 내 행운이라고 생각해. 난 네가 내 첫 번째자 마지막 여자였으면 좋겠어...”성도윤은 그윽한 눈길로 말을 마친 후 차설아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며 물었다.“그럼, 더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솔직히 만약 차설아가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 사실을 평생 그녀한테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차설아가 자신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딴 사람을 찾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나... 나는...”차설아는 무안
하지만 차설아는 현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오후가 되자 김정민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이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서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했어?”검은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말씀하신 대로 다 했어요. 제발 엄마를 놓아주세요.”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계속해. 열흘 뒤에야 풀어줄 거야.”여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현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헛짓거리할 생각은 마. 날 속이거나, 하루라도 늦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네 엄마는 죽는 거야. 알아?”“네, 알겠어요.”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제야 그 여자는 현이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그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뭔데?”“그냥 궁금해서요. 설아 씨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설아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시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현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녀는 이 여자에게 조종당해 차설아를 해치는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그녀는 언젠가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러자 그 모자를 쓴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착하다고?”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자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뱀과도 같았다.“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자가 누굴 해쳤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그럴
“현이 씨?”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현이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현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차설아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현이 씨 아니죠?”“설아 씨, 저 맞아요.”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차고 상냥한 말투와 달랐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설아 씨,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옷장 맨 왼쪽에 있는 니트 한 벌이면 돼요.”차설아가 또렷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가 그녀가 원하는 옷을 꺼냈다. 니트를 받아 든 차설아는 능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립심이 강했기에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오히려 현이 입장에서는 여느 고용인들보다 차설아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차설아를 좋아했다.하지만...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이는 평소처럼 우유 한 잔에 통밀 토스트, 그리고 과일 몇 조각을 준비했다.차설아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토스트를 씹으며 현이에게 말했다.“혹시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아, 아니에요.”현이는 입술을 꼭 깨물며 망설였다.“그냥... 가족끼리 또 싸웠을 뿐이에요. 사실 맨날 싸워서 이제 익숙하지만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뭘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요? 앞을 못 보고 나서 지금까지 현이 씨가 절 도와주고 있잖아요. 오히려 제가 현이 씨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차
성도윤은 남자로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로 하여금 닭살 돋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눈물도 흘리게 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알면 됐어요. 제가 얼마나 좋은 아내인데요! 그러니까 평생 저만 사랑해 주세요.”차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도윤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술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주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줬으니 말이다.사실 차설아는 오래전부터 성도윤과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한꺼번에 채울 생각이었다.“너, 너... 취한 거 아냐?”성도윤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차설아를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 그녀가 이러는 건 꿈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으니 말이다.그는 어찌할 바 몰랐다. 괜히 진하게 키스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취했든 안 취했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그냥 키스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두 손으로 성도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술을 포갰다. 차설아가 워낙 격렬하게 덤벼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갈까?”성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살짝 쉬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은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위층으로 가면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게 아닐 텐데 괜찮아요?”“상관없어. 오늘 밤, 난 주인님의 말씀만 잘 따를 테니까.”그렇게 말한 성도윤은 차설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고 단숨에 침실까지 도착했다.아이들이 캠프를 떠난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성진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분명 이 싸움에서 이긴 건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철저하게 패배한 기분이었다.성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상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설아야, 오늘 어땠어?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퇴근하고 가서 만들어 줄게.”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달달한 그 분위기는 옆에서 듣는 사람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성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성도윤이 사무실을 떠나려 하자 성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 설아랑 다시 잘 지낸다며? 다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근데 이렇게 빨리 화해했다고? 설마 또 한 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거야?”성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끝난 사이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완전히 남남이 되어 다시는 엮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한두 달 만에 원래 사이로 돌아간 데다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눈동자까지 희생해 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에 성진은 절망스러웠다. 성도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그 모든 걸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성도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내가 설아랑 어떻게 지내는지 너한테 보고해야 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부러우면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찾아서 결혼하면 되잖아. 따뜻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을 누리면 되잖아. 다만...”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회의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지금 너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을까?”성도윤의 말투는 누가
성진의 말에 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성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에게 놓고 말하면 성진이 생명의 은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그렇다면 일단 부대표님 뜻대로 진행하죠. 일단 한 분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시도해 보세요. 지켜보겠습니다.”성도윤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고 이는 곧 성대 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역시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나서 성대 그룹의 이익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어떡할 건데?”“넌 내가 어떤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성도윤을 지지하는 세력과 성진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말이다.그때, 오준현이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은 항상 회사를 위해서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부대표님께서 정말 그룹에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성 대표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그러자 박지훈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오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오준현 씨, 회사의 대표 자리는 인간성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사에 수천 명의 직원이 있어도 성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인간성이요? 그게 수익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주인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이익뿐이라고요.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가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두 파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대립해서 싸우기 시작했다.보다 못한 성도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
“제 비서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지금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확장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성도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성 대표님,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너무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이 작은 규모만 지키려다가 무너지고 싶으세요?”장기준이 가감 없이 성도윤에게 의문을 제기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형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지난 반년 동안 큰 충격을 겪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죠. 그로 인해서 성격까지 바뀐 겁니다. 좀 더 신중해진 거죠.”“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 형은 뇌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거든요.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세요? 석현아, 주주님들께 보여 드려.”“네, 부대표님.”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성도윤의 건강 검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그러자 진무열이 분노하며 성진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성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는 개인 정보예요! 함부로 유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진 비서님, 진정하세요. 형을 생각해서라면 건강 검진 결과는 당연히 비밀로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형은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에요. 형의 건강 상태도 곧 성대 그룹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들 성대 그룹의 수익이 감소한 원인을 찾고 있지 않나요? 전 이 검진 결과가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해요.”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주주들은 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이럴 수가! 성 대표님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을 줄은...”“뇌를 다친 데다가 기억 상실증까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경영 방식이 전과 너무 다르더라니... 그 원인이 여기 있었군요.”“성대 그룹이 갑자기 변한 건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