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인데?”차설아는 성도윤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여자의 육감이라는 게 있으니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종핸들을 가리키며 긴장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조종 안 해도 돼?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비행기는 지금 지면에서 400비트 떨어진 상공에 있고 이제 착륙할 때까지 줄곧 무인 비행이 가능하고... 즉 난 지금부터 자유의 몸이란 뜻이야.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지...”“이 정도라고?”차설아는 비록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매우 놀랐다.하지만 그녀도 전에 뉴스로 접했었던 적이 있었다. 현재 비행기의 무인 비행 기술이 아주 발전했는데 기장의 조종 없이도 비행할 수 있기에 일부 기장은 비행 도중 너무 심심한 나머지 스튜어디스와 그렇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설마 성도윤이 말한 일이 그 일은 아니겠지?잠깐!차설아는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음란 마귀를 떨쳐버리려 했다. ‘설아야, 이런 생각 좀 그만하자...’성도윤은 천천히 그녀한테로 다가가 그녀를 자리에 가뒀다.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볼을 보면서 성도윤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뭐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얼굴이 이렇게 달아올랐어?”“그래? 아니야.”차설아는 냉정한 척 대답하고는 손등을 볼에 갖다 댔는데 역시 아주 뜨거웠다.“진짜 빨개. 체리처럼... 되게 탐스럽게...”“성도윤, 너... 윽!”차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성도윤은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아까 차에서 제대로 못 했으니까 이제 계속하지 뭐.”성도윤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울렸고 이와 동시에 그의 손은 천천히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성도윤, 미쳤어? 우리 지금 하늘 위에 있어, 비행기 조종은 안 하고 지금 뭐 하는 거야?”차설아는 긴장되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겨우 이성의 끈을 붙잡고 가녀린 손으로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만지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그녀는 무서웠다. 조금
그녀는 부끄러워 자리에서 일어나 조종실을 나왔다.“엄마, 나랑 오빠가 한 레고 봐요. 예쁘죠?”달이는 자신과 원이가 몇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성과를 가리키며 자랑스레 물었다.“와~ 너무 멋진 성인데? 이렇게나 빨리 만들다니, 정말 대단해~”차설아는 1m가 족히 되는 캐슬을 보며 감탄을 자아냈다.‘이 정도의 모형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만들어 내다니, 달이랑 원이는 정말 천잰가 봐.’“엄마, 내가 다 생각해 놨어. 1층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민이 이모가 살고 2층에는 엄마랑 아빠, 그리고 Q 아빠가 살고 3층에는 나랑 오빠가 살게. 그리고 캐슬 앞에는 해바라기들을 심을 거야. 우리 모두 여기서 살면 엄청 행복하겠다, 그렇지?”달이는 고개를 들어 차설아를 바라보며 신이 나서 그녀한테 설명했다.“응, 우리... 우리는 분명 행복할 거야.”차설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최근 그녀와 성도윤이 다시 화해하고 예전으로 돌아간 게 불과 1개월인데 그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미스터 Q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만약 달이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그 남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을 거다.차설아, 너 정말 생각하는 남자도 많다.‘엄마, 왜 요즘은 Q 아빠랑 연락 안 해요? 나 Q 아빠 보고 싶은데.”원이의 말투에도 조금은 슬픈 기색이 어려있었다.“원이야, 미안. 엄마도 연락이 안 돼...”“혹시 엄마랑 아빠가 화해한 거 알고 화나서 엄마 연락 안 받는 거 아니에요?”“엄마도 몰라, 갑자기 사라져서...”차설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원이를 보며 물었다.“원이는 Q 아빠가 더 좋아? 아니면... 엄마가 Q 아빠 버리고 딴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같아서 싫어?”“그건 아녜요.”원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차설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가 누굴 더 좋아하면 나랑 원이도 더 좋아해요. 그냥 원이는 나쁜 아빠가 Q 아빠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할 뿐이죠, 엄마한테 또 상처 줄까 봐.”“걱정 마, 앞으론 엄마
차설아는 립스틱을 옷 주머니에 넣고 아이들 소리를 따라 창가로 발길을 옮겼다.“여기는...”창밖의 풍경을 본 그녀는 너무 놀라 눈이 커졌고 저도 모르게 손으로 떡 벌어진 입을 가렸다.“엄마, 특별하다는 곳이 해바라기 섬이었어요! 우리한테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녜요? 앞으로는 나쁜 아빠라고 하지 말아야겠어요.”달이는 비행기가 지나고 있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는데 성도윤에 대한 호감도가 직속 상승했다.원이도 간만에 성도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러게, 이번에는 진짜 신경 좀 썼는데요? 우리가 제일 그리워하는 곳인 것도 알고... 그런데 이곳은 어떻게 안거예요?”“그러게? 여기는 어떻게 안 거지?”차설아는 그녀와 아이들이 4년 동안 생활했던 곳을 보며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그녀는 주머니에 넣어둔 립스틱을 만지며 가슴 한쪽이 먹먹해 옴을 느꼈다.그녀는 정말 알고 싶었다. 성도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을 데리고 이 비행기를 탔고 또 누구를 데리고 해바라기 섬에 왔었는지? 얼마나 많은 여인과 그런 경험을 했는지...그녀의 이런저런 의문들 속에 비행기는 안전히 착륙했고 해바라기 섬에서 유일하게 대외로 개방된 비행장에 정착했다.“와, 도착했다. 우리가 해바라기 섬에 다시 돌아왔어요! 달이는 여기 엄청 그리웠다고요!”달이는 퐁당퐁당 뛰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는데 그 모습조차 너무 귀여웠다.“달이야, 얼른 내려가자. 나도 실험실이 너무 가고 싶었어.”원이도 달이 손을 꼭 잡고 얼른 출구 방향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해바라기 섬은 두 아이에게 특별한 의미가 담긴 곳이다.이곳은 그들이 태어나 자란 곳이고 너무나도 많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기에 두 아이가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곳이었다.한편 이와 동시에 성도윤도 조종실에서 걸어 나왔다.“얘들아, 어때? 맘에 들어?”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자상한 미소가 번졌고 눈빛에는 기대가 가득했다.“아빠, 완전요! 앞으로는 아빠가 달이한테는 최고의 아빠예요!”
얼굴을 안 본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차설아가 보고 싶었다.그는 차설아도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뜨거운 불이 활활 타오를 줄 알았다.하지만 웬걸, 차설아의 태도는 그토록 냉담했고 성도윤한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우리 먼저 내려가자.”차설아의 반응에 성도윤은 오리무중에 빠졌다.왜 갑자기 이렇게 냉랭하게 변한 거지?방금 있었던 그 부끄러운 장면이 아직도 그의 눈앞에 생생한데 벌써 태도를 바꾸다니?당장이라도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필경 아이들이 있으니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은 문을 열었고 그들은 차례대로 비행기에서 내렸다.“와~ 너무 예쁘다, 우리가 드디어 다시 돌아왔네!”달이는 크게 공기를 들이쉬며 말했는데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해바라기 섬은 해양성 기후로 일 년 사계절 기온이 20도 좌우를 유지하며 광풍 폭우는 볼 수 없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천연으로 생긴 백색의 해변, 울창하게 펼쳐진 야자나무 숲, 차설아와 아이들이 직접 가꾼 해바라기밭, 그리고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에메랄드빛 바다까지...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싶었다.“오빠, 우리 가서 조개 잡자! 우리가 여기를 떠난 지도 오래됐으니까 바닷가에 조개가 엄청 많을 거야. 어쩌면 진주도 있을지도 몰라!”“그러자, 그리고 엄마한테 목걸이를 만들어 드리자...”두 꼬마는 예전으로 돌아가 손에 손을 잡고 폭신폭신한 바닷가에서 자유롭게 뛰놀았다.개인 섬으로서 그들은 이 섬에서 절대적인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었다.성도윤과 차설아는 천천히 아이들의 뒤를 따랐고 크고 작은 발자국이 백색의 바닷가에 남겨졌다.“그...”몇 번이고 성도윤은 말을 꺼내려고 머뭇거렸다.왜냐하면 그는 차설아의 기분이 변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태도가 달라졌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기분이 안 좋아?”드디어 성도윤은 입을 열었다.“나 기분 안 나빠. 왜 그렇게 물어봐?”차설아는 본인이 4 년 동안이나 생
성도윤의 그윽한 눈빛은 마치 밤하늘에서 흩어지는 불꽃처럼 찬란함 끝에 무한한 어둠과 적막만이 흘렀다.“나도 알아, 평소에 냉담하고 낭만도 모르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일밖에 없는 거... 말도 예쁘게 못 해서 당신한테 많이 상처 준 거... 그래서, 나한테 싫증 나서 나한테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 아니야?”그는 고개를 숙였고 가여운 강아지처럼 눈빛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또 그러네, 내가 언제 짜증 난대?”차설아는 마치 사람 마음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나쁜 여인처럼 조금은 짜증이 섞긴 말투로 말했다.“우리 좋았잖아, 이런 생각 좀 그만하면 안 돼?”“내가 생각이 많은 게 아니라, 난 그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뿐이야. 기분이 되게 안 좋아 보여서...”성도윤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단호하게 말했다.“난 더는 우리 사이에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어. 만약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 내가 고칠게.”“잘못한 거 없어. 지금 엄청 잘하고 있는데?”차설아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짜증이 섞긴 말투로 대답하고 있었다.“그리고 낭만적이기도 해. 비행기를 타고 몇만m의 고공에서 짜릿한 기분이라... 딱 봐도 숙련됐네. 아주 능구렁이가 다름없어?”사실 그녀는 자신 이외에 누구를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으며 또 누구와 짜릿한 기분을 누렸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 의문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그가 자신을 질투심 많은 여자로 생각할까 봐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정말 그녀가 원하지 않던 대답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속으로 앓아야만 했다. “능구렁이까지는 아니고, 난 그저 널 즐겁게 해주고 싶을 뿐이야.”성도윤은 그녀의 말투에 섞인 짜증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고 순진하게도 그녀가 자신한테 엄청 만족한 줄로 알고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그는 차설아의 어깨를 감쌌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오 닥터의 의견도 듣고 체계적으
하지만 알고 보니 고작 이런 일로?“뭐는 무슨 뭐야? 얼른 대답해봐.”차설아는 성도윤의 반응으로부터 아마 적지 않은 여자들을 데리고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그녀는 질투의 마음이 다시 한번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그래, 그럴 줄 알았어. 너 같은 부잣집 도련님들이 순정남인 게 몇이나 되겠어? 이 비행기를 탄 여자들이 적어도 10명은 넘지?”“아니야, 난...”“됐어, 변명하지마. 누구도 탓하지 않아. 내가 애초에 널 선택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결과야.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들이댄 내 잘못이지.”“아니야, 여보. 내 말 좀 들어봐.”“됐어, 나도 다 이해해. 남자들이야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당신은 그냥 겉보기에 그런 면에 관심이 없었던 거고 뭐 진짜 관심이 없었겠어? 다 알아. 그냥 오늘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랑 잤어?”“잠깐!”성도윤은 더는 차설아의 말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아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나한테도 말할 기회를 주면 안 돼?”“윽...”차설아의 크고 맑은 두 눈은 어느새 붉어졌는데 그렇게 가련한 눈빛으로 성도윤을 바라보는 것이 굳세기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됐어, 됐어. 울지 말고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그는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사실 난 처음부터 여자는 당신 한 명밖에 없었어.”“응?”차설아의 큰 눈망울은 순간 더 커졌다.“대부분 남자한테 이런 일은 자랑거리가 안 되지만 난 이게 내 행운이라고 생각해. 난 네가 내 첫 번째자 마지막 여자였으면 좋겠어...”성도윤은 그윽한 눈길로 말을 마친 후 차설아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며 물었다.“그럼, 더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솔직히 만약 차설아가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 사실을 평생 그녀한테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차설아가 자신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딴 사람을 찾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나... 나는...”차설아는 무안
“그건...”차설아는 순간 멈칫했지만 금세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그럴 리가? 당신처럼 순결한 남자는 내가 아껴줘도 모자란 데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어?”“진짜야?”성도윤은 엄숙한 태도로 그녀에게 물으며 확실한 대답을 얻으려 했다.그의 표정에서 그가 정말로 이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혹은 차설아의 기분을 아주 중요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그의 엄숙함에 차설아도 더는 장난으로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고 차분함을 되찾은 후 그녀는 고양이를 어루만지듯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아주 완벽히 잘하고 있어. 경험은 비록 적지만 이론은 빠삭하잖아? 그리고 매번 진심이잖아. 바람기 많은 다른 남자들하고는 비교도 안 돼. 나 정말 안 싫어.”쯧쯧, 순정남은 역시 좋네. 깨끗하고 혼자 반성까지 척척하니.문제가 있으면 남을 탓하는 게 아니라 우선 본인이 잘못한 게 아닌가 반성한다는 자체가 이미 많은 평범한 남자들보다 나았다.차설아는 순간 ‘게 탔네?’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걱정 마, 이런 일은 여러 번 하다 보면 자연스레 느는 거지. 자신감을 가져! 이미 다른 남자들보다 많이 나은걸?”그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성도윤을 타일렀다.“다른 남자들?”하지만 성도윤의 목소리는 순간 차갑기 그지없게 변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여운 강아지 같은 꼴이던 그는 금세 어둠 속의 악마처럼 주변을 삼켜버릴 것 같은 아우라를 풍겼다.그는 손가락으로 차설아의 턱을 받쳐 올리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당신 뜻은 아주 많은 남자를 거쳤다는 말이야?”차설아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 그녀도 성도윤의 화를 돋우는 것을 개의치 않고 정색하여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먼저 세어볼게. 하나, 둘, 셋...”“...”성도윤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어두운 빛이 어렸다.차설아는 한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자 다시 태연하게 다른 손가락을 펼쳤다.“여섯, 일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정한 사랑일 거다!“왜 웃어?”성도윤은 울적해하다 차설아가 웃는 것을 보고 정신이 들었는데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조금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날 갖고 놀아? 혼 좀 나야 정신을 차리지?”성도윤의 어깨는 근육으로 딴딴하고 넓었는데 가볍게 그녀를 어깨에 올리고는 큰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한번 치더니 냉정하게 물었다.“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었어?”차설아는 순간 중심을 잃었고 다급하게 남자의 옷을 잡으며 계속 정색하여 헛소리했다.“말했잖아, 한 아흔 명? 아무튼 엄청 많다고.”“계속 헛소리할래?”성도윤은 다시 한번 같은 자리를 때리며 그녀를 위협했다.“계속 헛소리하면 할 때마다 때릴 거니까 각오해.”“성도윤, 이 변태야!”차설아는 작은 주먹으로 성도윤의 어깨를 마구 치며 다리를 푸드덕거리면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좋은 말로 할 때 내려놔, 아니면 소리 지를 거야.”“원이야, 달이야! 살려줘! 아빠가 엄마 때린대~”그녀는 목 놓아 아이들이 달리고 있는 쪽으로 크게 소리쳤다.하지만 이미 해변에서 뛰어노는데 정신이 팔린 아이들이 그녀의 외침을 들을 리가 없었다.“소리쳐봐,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을걸?”성도윤은 또 같은 자리를 세 번 정도 때리고는 무표정으로 말했다.“이런 일로 장난을 칠 때 이미 이런 결과가 있을 거라는 걸 예상 했었어야지?”때리는 강도가 남녀 사이의 그런 무드가 아닌 진정한 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흑흑.”차설아는 억울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고 더는 발버둥 치지도 않고 울음 섞긴 목소리로 말했다.“성도윤, 이 나쁜 놈! 이렇게 사람 갖고 노는 게 어디 있어?”성도윤은 처음에는 차설아가 우는 시늉을 하는 줄로만 알고 별로 신경 쓰지 않다가 손등에 뜨거운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서야 일이 크게 번졌다는 것을 깨달았다.“진짜 우는 거야?”그는 황급히 차설아를 내려놓고는 그녀의 주먹만 한 얼굴을 받쳐 들고 보니 이미 얼굴이 눈물범벅이고 진주 같은 눈물이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