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정한 사랑일 거다!“왜 웃어?”성도윤은 울적해하다 차설아가 웃는 것을 보고 정신이 들었는데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조금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날 갖고 놀아? 혼 좀 나야 정신을 차리지?”성도윤의 어깨는 근육으로 딴딴하고 넓었는데 가볍게 그녀를 어깨에 올리고는 큰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한번 치더니 냉정하게 물었다.“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었어?”차설아는 순간 중심을 잃었고 다급하게 남자의 옷을 잡으며 계속 정색하여 헛소리했다.“말했잖아, 한 아흔 명? 아무튼 엄청 많다고.”“계속 헛소리할래?”성도윤은 다시 한번 같은 자리를 때리며 그녀를 위협했다.“계속 헛소리하면 할 때마다 때릴 거니까 각오해.”“성도윤, 이 변태야!”차설아는 작은 주먹으로 성도윤의 어깨를 마구 치며 다리를 푸드덕거리면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좋은 말로 할 때 내려놔, 아니면 소리 지를 거야.”“원이야, 달이야! 살려줘! 아빠가 엄마 때린대~”그녀는 목 놓아 아이들이 달리고 있는 쪽으로 크게 소리쳤다.하지만 이미 해변에서 뛰어노는데 정신이 팔린 아이들이 그녀의 외침을 들을 리가 없었다.“소리쳐봐,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을걸?”성도윤은 또 같은 자리를 세 번 정도 때리고는 무표정으로 말했다.“이런 일로 장난을 칠 때 이미 이런 결과가 있을 거라는 걸 예상 했었어야지?”때리는 강도가 남녀 사이의 그런 무드가 아닌 진정한 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흑흑.”차설아는 억울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고 더는 발버둥 치지도 않고 울음 섞긴 목소리로 말했다.“성도윤, 이 나쁜 놈! 이렇게 사람 갖고 노는 게 어디 있어?”성도윤은 처음에는 차설아가 우는 시늉을 하는 줄로만 알고 별로 신경 쓰지 않다가 손등에 뜨거운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서야 일이 크게 번졌다는 것을 깨달았다.“진짜 우는 거야?”그는 황급히 차설아를 내려놓고는 그녀의 주먹만 한 얼굴을 받쳐 들고 보니 이미 얼굴이 눈물범벅이고 진주 같은 눈물이
“이게 뭔데?”차설아는 팔짱을 끼더니 뒤돌아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거짓말하지마. 비행기에서 주운 거야. 처음 보는 거라는 둥 그런 소리 할 생각하지마?”“나 진짜 처음 보는 거야.”하지만 성도윤의 반응을 보니 연기를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나 기억났어...”성도윤은 조금은 불쾌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분명 도현이 그 자식이 아무나 데리고 와서는 정리를 깨끗하게 못 한걸 거야.”“사도현?”차설아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얼마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누명을 씌우는 건 좀 아니지 않아?”“여자친구랑 헤어졌지. 그런데 걔한테는 해방이라고 할 수 있어. 아니면 나도 걔한테 비행기를 빌려주면서 축하해주진 않았을 거야.”성도윤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 자식 내 말 듣고 조금이라도 일찍 헤어졌으면 그 꼴은 안 당했지? 걔랑 걔 여자친구는 정말 악연이야.”여기까지 들은 차설아는 궁금증이 증폭했는데 계속 따져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계속 말해봐.”성도윤은 그녀의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얼굴을 받쳐 들고는 안쓰러운 눈길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해? 우리 일은 다 해결했어?”“아니, 뭐... 우리 일은 중요하지 않아. 도현 씨는 내 생명의 은인인데 당연히 걱정해야지. 그래서? 왜 악연인데?”“그 여자친구가 걔를 갖고 놀았지 뭐.”성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도현이 이 자식, 남녀 사이에서는 자신 있다더니 하필이면 그 여자친구한테 걸려서... 당신이 떠난 4년 동안 여자친구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어. 그래도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지.”“헤어졌다는 데 다행이래?”하지만 차설아도 되짚어보니 저번에 사도현을 만났을 때 확실히 4년 전보다 기운이 죽은 것 같았다. 그때도 예전의 자유분방하고 걱정 없던 도련님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었다.역시 사랑이란 한번 선택을 잘못하면 몸과 마음에 모두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슬픈 건 사랑이
성도윤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듯싶었는데 모든 풍경과 그녀의 몸에 쏟아져 내리는 햇살, 그 모든 게 너무도 적절하여 마치 차설아를 위해 그 자리에 있는 듯싶었다.“그래서 아까 화난 이유가 질투 때문이야?”그는 차설아의 뒤에서 잠자코 걷고 있다가 갑자기 손목을 잡았는데 마치 승리자인 것처럼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흥, 알면서 뭘 물어?”차설아는 남자의 손을 쳐내며 말을 이었다.“좀 이따 도현 씨가 오면 다 밝혀질 테니까 그때 가서 용서나 빌지 말라고.”말을 마치고 그녀는 마치 한 마리의 파랑새처럼 쪼르르 달려나갔다.“...”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도윤의 눈에서는 꿀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더는 내 곁에서 멀어져가지 말았으면...---M 국, 퀸즈호텔.사도현은 성도윤과의 통화를 마치고 5성급 호텔의 폭신한 침대에 누워서는 쿨쿨 자고 있었다.최근 그는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낮에는 호텔에서 잠만 자고 저녁에는 파티를 열며 놀면서 가문의 일에는 아예 신경을 끄고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똑똑.”“꺼져.”사도현은 귀를 베개로 막았는데 이불밖에 드러난 두 팔은 보기만 해도 탄탄했고 등 근육도 탄탄하니 태평양 어깨가 따로 없었다.“똑똑!”노크 소리가 전보다 더 다급했다.이와 동시에 무전기에서 사도현의 부하인 도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윤설씨가...”도민준의 말은 윤설에 의해 끊겼다.“오빠, 일단 문 좀 열어. 얘기 좀 해야지 않겠어?”무전기의 저편에서 여인의 연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잘못은 내가 했으니까 나한테 얼마든지 못되게 굴어도 돼. 그런데 오빠 몸은 망치지 마, 제발. 요즘 매일 술만 마신다며? 그룹 일은 더더욱 신경도 안 쓰고... 이러다간 오빠 몸 다 상해. 그분이 알게 되시면...”“그 사람 얘기 꺼내지 마!”사도현은 마치 심기가 불편한 맹수처럼 눈빛에는 음산한 기운이 뿜어나왔다.“내가 아직 네 목숨은 남겨준 걸 감사하게 여기고 당장
“뛰어내리고 싶으면 뛰라고 해, 나랑 무슨 상관인데?”사도현은 표정 한번 안 변하고 냉담하게 말을 내뱉고는 이불을 잡아당겨 몸을 이불로 꽁꽁 싸맸다.“그렇지만... 윤설 씨는 수영을 못 하시잖아요, 저도 수영할 줄 몰라요!”도민준은 문밖에서 혼자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큰일이에요! 윤설 씨 상황이 지금 엄청 안 좋아요. 저기요!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구조대원 거기 없어요?”퀸즈 호텔은 독채 별장으로 되어있었는데 방음효과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윤설이 뛰어내리는 소리에 호텔 관리자와 손님들이 하나 둘 씩 밖으로 나와 상황을 확인하는 바람에 금세 북적대기 시작했다.“성가시네, 진짜!”사도현은 더는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소음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윤설이 그를 찾아낸 그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해졌을지도 모르겠다.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옆에 놓여있던 반바지를 집어 주섬주섬 입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큰 키를 가진 그는 마치 모델 같았는데 그한테서는 타고난 매력 같은 것이 풍겼다. 그리고 조금은 흐트러진 머리가 그한테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그는 성도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걸작이라고 할 만큼 태어날 때부터 탁월한 아우라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었다.그러니 사도현이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밖에 모여 수군대던 사람들은 하나둘 입을 다물었고 자연스레 그한테 길을 내어주었다.도민준은 사도현이 나온 것을 보고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도련님, 드디어 나오셨네요. 얼른 윤설 씨 좀 구해주세요. 구조 요원들이 접근하는 걸 거절해서 지금 도련님만이 윤설 씨를 구할 수 있어요.”“진짜 성가시네.”사도현은 한편으로는 짜증 난다는 듯 말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준비운동을 했다. 그리고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목제 다리를 따라 윤설이 뛰어내린 곳으로 걸어가 두말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윤설은 물속에서 푸드덕대는 바람에 온몸이 다 젖었었는데 구조대원의 접근을 거절하다가 자신한테로 헤엄쳐오는 사람이 사도현인 것을 보고서야
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며 사도현의 늘씬한 허벅지를 덥석 끌어안고 울먹였다“알아, 내가 이번에 지은 잘못은 용서받기 어렵다는 거... 그래도 내 얘기 한 번만 들어주면 안 돼?”"그럴 필요 없어."사도현은 여자를 등지고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너와 나 사이에는 더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그동안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잖아? 나는 너한테 미안한 일 한 적 없어.”"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물론 잘 알고 있어. 오빠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잘해주는 사람이었어. 어떠한 보답도 바라지 않고 나만 바라보는 그런 사람... 그래서 내 마음이 더 아픈 거야. 내가 오빠한테 준 상처를 만회하고 싶을 뿐이야...”"만약 정말로 그것을 만회하고 싶다면 내 세계에서 사라져. 나는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아!”사도현은 얼굴을 굳히고 끝까지 냉담하게 굴려고 애썼다.그는 윤설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윤설은 한사코 그의 다리를 껴안고 놓으려 하지 않았는데 급기야 그의 다리에 얼굴을 대고 울기 시작했다."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이제야 알았어,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한테 상처를 줬는지. 나에게 다시 기회를 줘. 난 오빠가 아직도 날 사랑한다는 걸 알아, 그렇지 않으면 날 구하지 않았을 거잖아......”소란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고 너도나도 휴대전화를 들고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사도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만해, 너 지금 연예인이야.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앞으로 연예계에서 어떻게 자리 잡으려고 그래?”“싫어, 몇 달 동안 전 세계의 모든 섬을 다 뒤져서 오빠를 찾았는데 그냥 보내줄 수는 없어. 네 연기 인생을 망치더라도 놓지 않을 거라고!”윤설은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이에 사도현은 제자리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찍지 마!”그는 관광객들이 윤설의 초라한 모습을 찍는 것을 제지하며 말했다.“누가 감히 함부로 찍고 인터넷에 올리면
“???”사도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기대어 있는 아름다운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무슨 관계라고?!그의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난번에 이 계집애와 만났을 때는 한 명문 연회였는데 두 사람은 성도윤과 차설아가 재결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싸울 뻔했다. 그가 그날 그녀한테 긁힌 팔에 이제 막 딱지가 앉기 시작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이것도 '사이'라고 한다면 확실히 보통 사이가 아니네!"멍해서 뭐해? 자기야 말 좀 해봐. 자기가 그러면 내가 내연녀 같잖아?”백경윤은 불 난 집에 부채질한다는 한껏 과장된 말투와 행동을 했는데 은근슬쩍 남자의 팔을 꼬집기도 했다.오올~ 이 녀석 몸 좋은데?이 광경에 윤설의 눈시울은 더욱 붉어졌고 그 안에는 맑은 눈물이 가득 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참고 있었다.“그래, 도현 오빠, 말 좀 해봐. 두 사람이 어떤 사이든 난 받아들일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내연녀가 된 것처럼 그러지는 마.”"진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설의 이 말은 마치 사도현의 가슴을 찌르는 작은 바늘 같았다.지난 4년 동안, 그는 모든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윤설을 보호하고 매일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관계는 친구보다는 더한, 연인은 아닌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도현 오빠라고 불렀고 그의 손을 잡았고 그의 어깨에 기대기도 했으며 분위기에 취했을 때는 키스까지 했지만 그와 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싫어했다.4년 동안 그는 이미 지칠 만큼 지쳤고 이제는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보시다시피 나랑 경이는 연인 사이야, 이변이 없다면 우리는 연말에 결혼하게 될 거고... 청첩장 보낼게, 와서 축하해줘.”사도현이 껄렁껄렁 말했다.“...”백경윤은 멍해져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남자를 쳐다보았다.‘이 녀석 무슨 뜻이야? 어떻게 나보다 더 필사적으로 할 수 있어?!’그녀의 본뜻은 단지 그를 혼
윤설의 하얀 눈은 토끼처럼 연약해 보여 사랑스럽지만 또 이에 반면 여성의 미가 묻어나는 몸매는 섹시함이 극에 달했다.특히 그녀의 얼굴에는 차설아의 모습이 보였는데 이는 이미 그가 첫눈에 반하기 충분한 이유였다.이런 이유로 그는 기꺼이 4년 동안 그녀한테 농락을 당했다.하지만 이에 반면 백경윤은 여우처럼 날렵하고 섹시한 눈빛을 지녔고 윤설처럼 피부가 하얗지 않고 건강한 밀 빛을 띠고 있으며 온몸에는 종잡을 수 없는 야성을 풍기고 있어 마치 바람 같아 도통 잡을 수 없게 했다.백경윤의 성격은 차설아와 매우 비슷했다.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하고 활달하며 자기만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다른 여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설렘으로 말하면 윤설이 그를 더 설레게 했을 것이다.하지만 그에게 양자택일의 기회를 준다면 그는 백경윤과 편하게 지내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우리 경이가 왜 상처를 받아?”사도현의 긴 팔은 말과 함께 갑자기 백경윤의 허리를 껴안으며 다정한 자세를 취했는데 방자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경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고 나도 경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야.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이미 너무 행복해."백경윤:“...”그녀는 사도현의 말에 두피가 저려와 저도 모르게 남자와 거리를 두고 싶어졌다.남자는 그녀를 꼭 안았는데 두 사람의 모습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같았다.“안 믿어! 못 믿어!”윤설은 정말 당황했다. 그녀는 눈물이 마를 정도로 울었고 거의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오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거잖아? 나는 오빠 이러는 거 못 믿겠어.”“그래? 내가 널 사랑하는 거 아네? 난 네가 눈이 멀어서 내 진심을 못 보는 줄 알았잖아?”“나 알아, 다 안다고. 그냥... 다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오빠랑 함께할 수 없을 뿐이야. 나는...”“그럴 필요 없어. 내가 널 사랑해도 그건 이미 과거형이야. 내가 지금 사랑하는 건 오직 경이뿐이야. 이제는 서로 시간 낭비 하지 말자.”사도현은 말을 마친 뒤
한편 방 안에서 백경윤은 귀신이라도 본 듯 사도현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그녀는 밖에서 윤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불가사의한 표정을 지었다.“사도현 이 쓰레기 같은 놈아, 그냥 내버려 둘 거야? 네가 소문으로는 해안 제일인 바보라더니.해안 제일의 순정 마초가 왜 갑자기 이렇게 냉혈 하게 변한 거야?”사도현은 긴 다리를 포개고 문짝에 무심코 기대어 예쁜 턱을 살짝 치켜들고 건들건들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방금 분명히 말했잖아, 너야말로 나의 진실한 사랑이라고. 가치 없는 옛사랑을 위해 진실한 사랑을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으악!!!”백경윤은 참지 못하고 토하는 표정을 지으며 두말없이 사도현을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고는 경고했다.“적당히 해라, 토나오게 하지 말라고!”웃겨 죽겠다. 사도현의 진정한 사랑이 그녀라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도 충분히 말이 되겠다.두 사람은 같은 해안 8대 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비록 교제가 많지는 않지만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물고 뜯는 관계였다.백경윤은 사도현의 바람둥이 기질이 눈에 거슬렸고, 사도현은 백경윤이 사랑을 믿지 않는 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만약 성도윤과 차설아까지 끌어들이면...세계 대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역시 너는 그대로야, 낭만 과민!”남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리고는 긴 다리로 침대 머리맡으로 걸어가서는 무전기를 누르고 부하 도민준에게 말했다.“윤설 잘 보살펴. 어떤 수단을 쓰든 오늘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건 막아야 해.”“알겠습니다, 도련님. 이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압니다.”도민준은 침착한 목소리로 공손히 말했다.이윽고 문밖은 조용해졌고 윤설도 더는 울부짖지 않았고 떠들썩한 구경꾼도 사라졌는데 모든 것이 평온하게 돌아왔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아무래도 많이 신경 쓰시는 것 같아요? 해안 제일 순정남은 역시 너 아니면 안 되네.”백경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도현을 때리려다가
그에 차설아가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성도윤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차설아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불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죽은 줄 알았잖아!”그에 핸드폰을 귀에서 뗀 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전화는 왜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친한 사이였어요?”“하하, 아니지.”그녀의 말에 성도윤은 웃으며 비꼬기 시작했다.“그냥 하룻밤 잔 사이니까 이런 연락은 불필요한 거긴 하지.”남사스러운 말에 얼굴이 빨개진 차설아는 차갑게 대꾸했다.“용건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으면 끊을게요.”“잠깐만!”끊는다는 말에 조급해진 성도윤이 소리치며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 누구랑 같이 있어? 거기 안전하긴 한 거야?”“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같이 있는지를 당신한테 보고할 이유는 없죠. 그래도 물어보니까 얘기는 하는데... 아주 안전해요. 그러니까 당신이랑 이딴 쓸데없는 통화도 하는 거겠죠?”차설아는 혹시나 성도윤이 의심할까 봐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진짜야?”하지만 성도윤은 조심성이 많고 예리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나는 못 믿겠는데, 네가 영상통화를 건다면 몰라도.”“영상통화라니, 드디어 미친 거예요? 우리는 친구도 못 되는 사이인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뭐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해요?”“굳이 그걸 알자는 게 아니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표정을 잔뜩 굳힌 성도윤은 진지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 지금 어디야, 혹시 내 도움 필요해?”“친구 집에 있어요. 친구랑 사이도 좋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본인이나 잘 챙겨요.”성도윤의 관심 따위 매정하게 넘기면 그만이었겠지만 얼마 전 원이가 한 말이 떠오른 차설아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덧붙였다.“그건 무슨 말이야? 뭘 알기라도 한 거야?”성도윤처럼 예민한 사람은 차설아가 흘리듯
“제가 그분이었으면 진작에 신분을 밝히고 감사 인사라도 받았겠죠. 뭐하러 성진 씨를 속이겠어요?”“그 사람은 나한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청아 씨가 더... 그 사람 같은 거예요.”“착각하신 거예요. 저는 그분이 아니에요. 제가 눈을 내어주는 건 돈을 위해서인데 그분은 뭘 위해서 당신에게 눈을 내어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은...”자신의 커리어가 있고 아이도 있고 성도윤과 한평생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그녀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 같은 병신을 구해줄 리가 없었기에 성진은 차설아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정말 헛된 꿈을 꾼 것만 같아 성진은 차설아의 손을 놓으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이만 돌아가 보세요. 이틀 뒤에 뵙죠. 수술만 잘 끝나면 얼마를 원하든지 다 드릴게요, 그쪽이랑 가족분들 노후까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든든하네요.”말을 마친 차설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남자와 가슴을 부딪치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그때 아래에서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박서영이 내려오는 그녀를 보더니 빠르게 달려가며 물었다.“어때요, 안 들켰어요?”“들킬뻔했어요.”“그래서 어떻게 했어요?”“잘 넘어갔죠.”정원 쪽을 보며 한숨을 쉬던 차설아가 말을 이었다.“저 정도로 순정파일 줄 몰랐는데, 이젠 눈을 줄 수밖에 없게 됐네요. 안 돌려주면 발 뻗고 못 잘 것 같아요.”“잘 부탁드려요.”“다른 볼일 없으면 난 이만 지하실로 돌아갈게요. 밖에 돌아다니다가 들키면 곤란하잖아요.”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하는 박서영을 보면서도‘움직이는 기관창고’답게 담담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죄송해요...”그녀의 태연함 앞에서 박서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전에는 차설아가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데려오려고 애썼는데... 제 도련님이 눈여겨 본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너그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
담담히 말하는 차설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눈을 팔겠다고 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잖아요. 굳이 여생을 망치면서까지 벌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건...”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돈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영혼이 갇히는 건 그저 심심할 뿐이지만 가난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더라고요.”“얼마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그 돈 줄게요, 눈 안 팔아도 줄 수 있어요.”“네?”그냥 장난삼아 한 말인데 가난에 찌든 소녀를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성진에 차설아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너무 의외예요?”성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비도 맞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우산을 쥐여준다고 하잖아요. 실명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굳이 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해서요.”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던 차설아가 코를 매만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듣던 거랑은 전혀 다른 분이셨었네요. 엄청 매정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본인은 지옥을 사시면서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어린 나이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잘못된 길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전 돈이 필요해서 눈을 파는 것뿐이에요.”“눈 안 팔아도 돈 준다니까요.”“그건 싫어요.”자꾸만 거절하는 성진에 차설아는 그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챈 건가 싶어 조급해하며 말했다.“가난하다고 해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돈만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요.”“빚지는 걸 싫어한 다라...”그 말을 들은 성진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내 친구도 청아 씨처럼 빚지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친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나한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한이 없다는 말까지 하는 차설아에 측은지심이 생겨난 박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차설아 씨 말고는 도련님이랑 맞는 눈이 없어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부담 갖지 마요. 이건 내가 진이한테 빚진 거니까 내가 갚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럼 내일 오전 두 분 만나게 해드릴게요.”그 말에 박서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고 심호흡을 하며 방을 나섰고 그날 밤을 차설아는 뜬 눈으로 새우게 되었다.하지만 잠을 설친 건 성도윤도 마찬가지였다.차설아와 연락이 안 된다는 사도현의 말에 자신도 연락을 해봤지만 차설아는 줄곧 묵묵부답이었다.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을 때 성도윤은 차설아가 올린 새 스토리를 확인하게 되었다.[내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오직 너뿐이야.]해바라기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을 저런 문구와 함께 올렸는데 꽃을 사본 사람이라면 해바라기의 꽃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진심이 가득한 그 스토리를 본 성도윤은 차설아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나 싶었다.아무 소식 없다가 갑자기 저런 자신을 올리는 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그는 순간 오만해졌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이유를 알고 싶어 처음으로 그녀의 스토리에 댓글을 달았다.“너 지금 어디야?”하지만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이미 끝난 사이이니 연락을 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성도윤은 새벽 두 시에 비서에게 연락했다.“진무열, 차설아 현재 위치 알아보고 나한테 보내.”보스의 전화에 잠에서 깬 탓에 정신이 흐리멍텅했던 진무열은 눈을 비비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보스, 저는 비서지 해커가 아닙니다.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한 장 보고 위치를 어떻게 알아냅니까?”“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아침 날 밝기 전까지 무조건 알아내.”말을 마친 성도윤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잠에 들었지만 새벽에 임무를 전달받은 진무열은 자신이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만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
“하느님도 도련님의 억울함을 느꼈나 보죠.”“기증자는 어떤 사람인데? 남자야? 여자야? 성씨 가문의 사람이야?”성진은 기쁘긴 했지만, 생각은 꽤 신중했다.세상에 공짜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그는 진실부터 파헤쳐 보기로 했다.“그게...”박서영은 성진이 기증자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손톱을 뜯으면서 아무렇지않게 말했다.“여대생인데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 모집 정보를 보고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만약 눈을 기증한 사람이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차설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수술을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몰랐다.“아, 가난한 여대생이라...”성진은 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몸을 팔고, 누군가는 신장을 팔고, 심지어 누군가는 목숨을 팔기도 했다. 한 쌍의 눈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시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정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면, 돈을 섭섭지 않게 챙겨드려. 가능하다면 그녀와 가족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성진이 매우 의리 있게 말했다.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진행될 거예요. 도련님, 수술을 받으실 거예요?”박서영은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기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해. 그리고 누가 괜히 시각장애인이 되고 싶겠어? 만약 정말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수해서 설아를 내 곁에 단단히 붙잡아 놓을 거야.”“도련님, 시력을 회복하면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설아 씨를 되찾는 거예요?”“그럼!”성진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그동안 난 설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
박서영은 이렇게 슬프고 비관적인 성진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도련님은 그 여자 때문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예전의 도련님은 이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어요...”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녀를 만나면서 더욱 나 자신으로 변해버린 거고.”성진은 깊고도 막연한 초점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아니잖아요!”박서영은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감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분명 그때 성도윤 씨는 도련님을 상대로 패배했잖아요. 도련님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금 성대 그룹은 도련님이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엔... 그 여자를 위해서 어떻게 성도윤 씨한테 골수와 눈을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저희는 구석에서 세월이나 한탄하면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잖아요. 너무 억울해요!”박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진은 손가락을 움찔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그렇다. 예전의 그는 사고가 명확하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배부른 나머지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의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 될 줄 몰랐다.“도련님,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박서영은 흔들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잘 모르겠어.”아주 진솔한 대답이었다.“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 나는 이미 그래봤으니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과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