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자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헤어져 성도윤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성도윤을 밀고 성씨 저택의 안방까지 찾아간 그녀는 분위기가 애매해진 것을 느꼈다.“저기, 오늘 피곤했을 텐데 일찍 쉬어. 나도 일찍 쉬러 갈게. 이따가 하인이 당신 씻기러 올 거야.”차설아는 긴 손가락으로 뺨 옆에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예의 바르게 말하고는 떠날 준비를 했다.성도윤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덥석 잡더니, 깊은 눈동자에는 마치 불이 난 듯 뜨거운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종일 사랑하는 부부인 척해놓고 지금 가는 게 말이 돼?”“이 모든 건 전부 연기라고 했잖아? 다들 주무시니까 인제 그만 해도 돼.”“하지만 난 연기가 아니라 리얼이고 싶어...”성도윤은 차설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잘생긴 얼굴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마치 오만한 표범이 먼저 도도한 자태를 내려놓고 만져달라는 것 같았다.“당신도 나랑 리얼이고 싶잖아, 아니야?”“난...”차설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남자의 뺨에 난 수염 때문에 그녀의 손바닥이 간지럽고 그녀의 가슴에도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가지 마. 나 당신이랑 자고 싶어... 진짜 부부처럼.”성도윤의 목소리는 특히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그 깊이가 극에 달했다.차설아는 불 속에 뛰어든 듯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쑥스럽게 중얼거렸다.“하지만 당신 허리가 이 지경인데 어떻게 자?”“하하!”성도윤은 여자의 수줍은 모습에 마음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긴 팔로 여자의 허리를 꽉 껴안고 머리를 그녀의 평평한 아랫배에 살며시 갖다 댔다.“급한 거 알지만 일단은 좀 참아. 허리는 며칠 안에 회복될 거야. 그때는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해서 아내의 기쁨을 느끼게 해 줄게. 다만 지금은... 난 정말 단순히 당신과 자고 싶어.”“변태!”차설아는 자신이 남자의 뜻을 오래 했다는 것을 알고 얼굴이 더욱 붉어졌고 이를 악물고 변명했다.“내가 언제 당신이랑 뭐 그러고 싶대? 당신이 말을 애매모호하게 해서 내가 삐뚤어진 생각을 한
일주일 후, 성도윤의 허리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심지어 전보다 훨씬 힘이 세졌다.두 사람의 관계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차설아는 더 이상 그와 어울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보통 부부처럼 말다툼도 하고, 심술도 부리고 달콤한 일상을 보냈다.성도윤은 지금의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차설아와 함께하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겼다.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건 하느님이 그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아주 평범한 아침, 따스한 햇볕이 창문을 비추고 새들이 지지배배 울고 잔잔한 바람이 베이지색 커튼에 스쳤다.차설아는 여느 때처럼 따듯한 남자의 품에 안겨 좀처럼 일어나기 싫어했다.“일어나, 이 게으름뱅이야...”성도윤은 여자를 긴 팔로 껴안고 그녀의 아름답고 오뚝한 코를 손가락으로 만지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오늘은 특별한 날이야. 당신과 아이들을 데리고 제대로 축하하고 싶어.”“윽, 시끄러워. 여긴 너무 따뜻하단 말이야. 나 계속 잘래.”차설아는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주꾸미처럼 성도윤에게 매달렸고, 머리는 남자의 넓고 따듯한 품에 안겨 고양이처럼 이리저리 비비대고 있었다.이것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인데, 마치 포대기 속의 아기처럼 생애 최초의 안정감을 찾은 느낌이었다.너무 오랜 외로움 때문인지 차설아는 매서운 겨울날 이렇게 안전하고 따뜻한 품에 안겨 있으면 떠나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푹 쉬어. 자고 싶을 때까지 잤다가 다시 일어나면 돼.”성도윤은 갓난아기를 달래듯 여자의 등을 토닥이고 잘생긴 눈매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어느새 점심이 되었다.위층의 침실은 조용했지만 아래층의 거실을 아주 시끌벅적했다.성주환은 성씨 가문의 모든 친지를 모아 특별히 풍성한 가족 연회를 마련하여 두 사람이 재혼했다는 소식을 전하려 했다.그래서 성씨 가문의 직계든 방계든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 이른 아침에 귀한 선물을 가지고 와서 축하했다.성주환, 성명원과 성씨 가문의 남자들이 한자리에 앉았고 소영금은 동서지간인 친척들과 자리를 함께해
“아니죠, 새언니. 며느리가 이렇게 버릇이 없는데 화도 안 나세요?”“화낼 게 뭐 있어요. 젊은이들이 자고 싶으면 자는 거죠. 부부가 금실이 좋아서 침대에서 더 뒹구는 게 정상이잖아요?”소영금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거리낌 없이 말했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부잣집 사모님으로서 행동거지를 걸맞게 해야죠.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왔어요. 우아하고 단정하고 기품 있는 건 부잣집 사모님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에요...”성도윤의 셋째 고모가 분개하여 말했다.“제 며느리는 그런 소양은 필요 없고 내 아들과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하면 돼요.”“아니죠, 새언니는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도윤이가 참을 수 있어요? 도윤이는 아주 규칙적이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애라 어릴 때부터 늦잠을 자지 않았어요. 아주 나쁜 물이 들었네요.”“그러면 어떡해요? 내 아들이 어렵게 마음을 돌린 며느리니 응석받이로 키워야죠. 며느리만 기쁘다면 늦잠은커녕 저녁까지 잔다고 해도 내버려 둘 거예요.”소영금은 손을 벌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도 지금에서야 성도윤이 애처가의 끝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가 뭐라고 하든, 아내가 하늘에 있는 달을 원한다고 하면 당장 우주선을 타고 사 올 기세였다.그러니 어머니로서 소영금도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두 손 들어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쯧쯧쯧, 도윤이 녀석이 이런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이렇게 자기 부인을 감싸고 돌다니. 이 집 며느리는 팔자도 좋아요!”분개하던 여자들은 하나둘씩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재벌가에서 태어났든, 재벌가로 시집왔든, 반드시 단정하고 매사에 자신을 구속하며 살아야 하는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차설아처럼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남편이 무조건 예뻐한다는 것은 정말 행운스러운 일이었다...여자들은 물론 옆에 있던 남자들도 듣고 기가 막혔다.“형님, 우리는 도윤이가 형님보다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애처가 유전자는 확실히
거실의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고 심지어 칼끝이 팽팽해지는 냄새까지 났다.지난번 성도윤이 가짜로 죽었을 때, 성진이 성대 그룹의 반대 세력과 결탁하여 권력을 잡으려 하면서부터 성씨 가문은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었다.하나는 성명원, 다른 하나는 성주원의 세력. 두 사촌 형제는 서로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을 기세였다.워낙 직설적인 성격인 성명원은 멀리 입구에 있는 성주원을 보자 바로 안색을 찡그렸다.“흥, 네가 아직도 여기 올 낯짝이 있어? 아버지는 너희 둘 내외를 초대하지 않았을 텐데?”“아이고! 형님 뭔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성주원은 변함없이 늙은 여우처럼 간사하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가 성명원의 어깨에 달라붙으면서 형제애가 깊은 척했다.“우리 가문에 이렇게 큰 경사가 났는데, 사촌 동생인 제가 어떻게 오지 않을 수 있겠어요? 사람이 많으면 북적북적하고 좋잖아요? 오늘은 제가 형님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성주원의 아내 단사란은 남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맞춤 제작 와인색 코트에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을 들고 문을 들어서자마자 아니꼽게 말했다.“어머! 형님, 아주버님, 역시 복이 많으세요. 며느리랑 손자 손녀를 동시에 보았으니 우리보다 팔자가 좋다니까요!”단사란은 집안 배경과 용모가 뛰어났지만 소영금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다.당시 성씨 가문에 시집오기 전부터 소영금을 라이벌로 여겼고, 성씨 가문에 온 후에도 언제나 소영금과 비교하기에 바빴다.안타깝게도 단사란 자신은 물론, 남편이나 아들을 비교해도 늘 소영금에게 패배하고 말았다.모처럼 며느리에서 아주 조금 이긴 것 같았지만 지금 보니... 성도윤은 아내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과 딸까지 얻었으니 소영금이 완벽히 이긴 셈이었다.이에 단사란은 속에 화가 굴뚝 했고, 꾹꾹 참으며 오늘 소영금과 결투를 벌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성주원과 단사란은 다른 사람의 차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성주혁에게 차를 권했다.“앉아!”성주혁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미적지근한 얼굴로
“그래 네 말이 맞아. 성씨 가문에서 우리 도윤이의 대타로 뛸 수 있는 사람은 성진밖에 없지...”성명원은 다소 오만방자한 말을 한 후 또 쐐기를 박았다.“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손자, 손녀가 생겼으니 내가 할아버지로서 두 아이를 잘 키워 장차 우리 도윤이의 뒤를 잇게 할 거니까 성진이가 나설 필요 없을 거야.”성주원 부부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성주혁의 앞에서 감히 경솔하게 행동하지 못했다.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렇게 호락호락 당할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 단사란은 자잘한 일까지 시시콜콜 따지는 여자였다.원래 속에 화가 가득했는데, 지금 온 집안 사람들 앞에서 성명원에게 모욕당했으니 반드시 이 복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형님, 아주버님. 오늘은 좋은 날이니 우리 기분 나쁜 일은 언급하지 말아요. 듣자 하니 도윤이의 색시가 전에 그 조카며느리라고 해서 특별히 제가 선물을 준비했어요.”단사란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만 한 선물상자를 꺼내 소영금의 손에 쥐여주었다.“이게 뭐죠?”소영금은 이 상자가 꽤 무겁다고 생각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 별로 귀한 것도 아니고 그저 순금 800g으로 만든 자물쇠예요.”“왜 뜬금없이 자물쇠를 선물하는 거죠?”“이건 보통 자물쇠가 아니라 정결을 의미하는 자물쇠예요.”단사란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도윤이의 색시가 예전에 그 여자라고 했잖아요. 두 사람이 이혼한 지도 꽤 됐는데 그동안 밖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와 만났는지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이 정결 자물쇠를 착용할 필요가 있다니까요. 이걸 착용하기만 하면 앞으로 무조건 성실하고 본분을 지키며 다시는 도망가지 못할 거예요.”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특히 여자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그녀들은 원래 차설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는 것은 부잣집 사모님으로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소영금의 앞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런데 지금 단사란이 첫 단추를 꿰니 또 이러쿵저러쿵
“왜 집에 친척분들이 오셨다고 얘기 안 했어? 저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냐고!”차설아는 붉게 상기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또 흐트러진 머리와 꾀죄죄한 차설아의 모습을 성씨 가문 친척들이 보기라도 하면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어 피 터지게 욕먹을 것이 뻔했다.“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뭐가 중요해? 당신만 편안하면 되지.”성도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껴안고 개의치 않는 듯 계단을 내려가 당당하게 인사했다.“다들 안녕하세요, 저랑 설아가 이제 깨어나서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성도윤은 성씨 가문에서 지위와 권력이 성주혁 다음으로 높았기 때문에 그가 입을 열자마자 천하를 다스리는 위엄에 거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다만, 성도윤은 고개를 숙이더니 봄날의 가랑비 같은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을 보며 말했다.“자, 부끄러워하지 말고 어른들께 인사드려.”차설아는 민망하지만 성도윤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인사했다.방금까지 불같이 투덜거리던 친척들은 성도윤을 무서워했기에 찍소리 한 번 하지 못했다.유독 단사란만이 굴하지 않고 계속 투덜거렸다.“어머, 우리 조카며느리 오랜만이야. 어디 보자... 벌써 안 본 지 4년이 되어 가네!”그녀는 웃음을 머금은 호랑이처럼 차설아의 손을 잡더니 말했다.“그때 도윤이가 너를 집에서 쫓아냈을 때 모두들 박수 치며 환호했지만, 나만 마음이 여려서 네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동서, 오늘 같이 좋은 날에 굳이 그런 얘기를 해야겠어요? 잠자코 앉아 있어요!”소영금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었고 하마터면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찢을 뻔했다.현장 분위기가 급 어색해졌다. 성도윤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재미난 구경을 하는 표정이었다.차설아는 오히려 개의치 않는 듯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제가 속에 담아두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이에 단사란은 더욱 흥분하더니 더
성도윤의 입은 정말이지 매를 부를 정도로 얄미웠다!단사란과 성주원은 화가 나서 펄쩍 뛰더니 바로 성주혁에게 일러바쳤다.“큰아버지, 들으셨죠? 도윤이가 이렇게 안하무인이랍니다. 사란이가 호의로 선물한 금 자물쇠를 받기는커녕 우리 진이가 자손이 끊긴다고 저주까지 했어요. 반드시 호되게 타일러 주세요.”단사란은 성주혁의 의자 팔걸이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었다.성주원은 하다못해 이미 세상을 뜬 자신의 아버지까지 앞세웠다.“제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저를 큰아버지께 맡기셨어요. 저는 조카일 뿐이지만, 늘 큰아버지를 제 아버지로 여겼어요. 그런데 큰아버지는 아들과 손자를 앞세워 저희를 이렇게 괴롭히는 건 아니죠. 만약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긴다면 제 아버지는 황천길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큰아버지를 찾아와 따질 겁니다.”“네 아버지가 너를 나에게 맡긴 것을 알고 있었구나...”성주혁은 세상을 뜬 자신의 친동생을 생각하면서, 성주원 일가의 도 넘는 행동에 늘 양보하고 참아왔다.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나라고 왜 너를 내 친아들로 여기지 않았겠니? 어릴 때부터 너희들을 똑같이 키웠고, 도윤이와 성진, 다른 손자들까지도 함께 키웠어. 누가 성씨 가문의 가업을 물려받는지는 항상 각자의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나눴지.”“도윤이가 성대 그룹을 맡고 진이를 외국 지사로 보낸 일로 너희들이 불만을 품고 계속 잔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눈 감아 줬지만 오늘은 달라...”“오늘 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내 마음대로 해서도 안 돼.”성주혁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는 집사에게 말했다.“피곤하니까 나 좀 부축해서 방으로 데려가게.”“그게, 무슨 말씀이죠?”단사란은 안절부절했다.‘전에는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항상 우리 편에 섰는데 오늘은 왜 손을 떼실까?’그녀는 서둘러 성주혁의 뒤를 쫓아 눈물 콧물을 짜냈다.“큰아주버님, 이 대로 가시면 어떡해요. 뭐라고 말씀 좀 해주셔야죠...”“사모님, 멈추시지요.”집사는 단사란의 발걸음을 막고 성주
성주원과 단사란은 모두 성도윤의 위협에 화들짝 놀랐다.성도윤의 오만방자한 성격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날뛰는 줄은 몰랐다. 보잘것없는 출신의 여자를 위해 집안 어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마저 지키지 않을 줄이야!이것은 규율이 삼엄한 성씨 가문에 있어서는 대역무도한 죄가 틀림없었다.현장에 있던 다른 어른들은 저마다 불평을 참지 못했다.“도윤아, 어떻게 웃어른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이것이 밖에 알려지면 성가의 체면이 어디 서겠어?”“아무리 두 사람이 잘못했다 해도 그래도 네 숙부, 숙모야. 차근차근 말하면 될 것을 그렇게 화낼 필요 있어?”“당장 두 사람에게 사과해, 도윤아!”성도윤은 그의 오만함으로 인해 단번에 가문의 도마 위에 올랐다.단사란은 더욱 흥이 나서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성명원과 소영금을 향해 비꼬아 말했다.“역시 형님과 아주버님의 교육이 선진적이시군요. 이렇게 제멋대로 날뛰는 아들을 두셨으니. 거북하게 말하자면... 교양이 없는 거죠. 계속 이렇게 내버려 두시면 내일 우리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 오줌이라도 싸겠네요!”“맞아요, 도윤이는 반드시 우리에게 사과해야 해요. 아니면 이 일은 절대 쉽게 끝나지 않을 거예요!”성주원이 끈질기게 말했다.“미안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일이니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사과할지는 알아서 해결하세요. 내 아들은 어른을 공경하기로 유명해요.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아랫사람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죠!”소영금은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찰지게 반격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아랫사람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단사란은 화가 나서 이미지도 버리고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앞으로 달려들어 소영금과 머리채라도 잡고 싸울 기세였다.이미 두 집안은 사이가 벌어졌으니 체면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유독 차설아만이 조금 난처했다.어쨌든 자신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일어났으니, 이 일로 인해 가족의 분열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단사란의 앞을 가로막고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숙모님,
하지만 차설아는 현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오후가 되자 김정민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이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서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했어?”검은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말씀하신 대로 다 했어요. 제발 엄마를 놓아주세요.”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계속해. 열흘 뒤에야 풀어줄 거야.”여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현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헛짓거리할 생각은 마. 날 속이거나, 하루라도 늦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네 엄마는 죽는 거야. 알아?”“네, 알겠어요.”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제야 그 여자는 현이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그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뭔데?”“그냥 궁금해서요. 설아 씨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설아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시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현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녀는 이 여자에게 조종당해 차설아를 해치는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그녀는 언젠가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러자 그 모자를 쓴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착하다고?”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자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뱀과도 같았다.“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자가 누굴 해쳤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그럴
“현이 씨?”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현이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현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차설아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현이 씨 아니죠?”“설아 씨, 저 맞아요.”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차고 상냥한 말투와 달랐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설아 씨,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옷장 맨 왼쪽에 있는 니트 한 벌이면 돼요.”차설아가 또렷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가 그녀가 원하는 옷을 꺼냈다. 니트를 받아 든 차설아는 능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립심이 강했기에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오히려 현이 입장에서는 여느 고용인들보다 차설아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차설아를 좋아했다.하지만...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이는 평소처럼 우유 한 잔에 통밀 토스트, 그리고 과일 몇 조각을 준비했다.차설아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토스트를 씹으며 현이에게 말했다.“혹시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아, 아니에요.”현이는 입술을 꼭 깨물며 망설였다.“그냥... 가족끼리 또 싸웠을 뿐이에요. 사실 맨날 싸워서 이제 익숙하지만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뭘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요? 앞을 못 보고 나서 지금까지 현이 씨가 절 도와주고 있잖아요. 오히려 제가 현이 씨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차
성도윤은 남자로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로 하여금 닭살 돋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눈물도 흘리게 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알면 됐어요. 제가 얼마나 좋은 아내인데요! 그러니까 평생 저만 사랑해 주세요.”차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도윤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술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주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줬으니 말이다.사실 차설아는 오래전부터 성도윤과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한꺼번에 채울 생각이었다.“너, 너... 취한 거 아냐?”성도윤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차설아를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 그녀가 이러는 건 꿈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으니 말이다.그는 어찌할 바 몰랐다. 괜히 진하게 키스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취했든 안 취했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그냥 키스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두 손으로 성도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술을 포갰다. 차설아가 워낙 격렬하게 덤벼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갈까?”성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살짝 쉬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은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위층으로 가면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게 아닐 텐데 괜찮아요?”“상관없어. 오늘 밤, 난 주인님의 말씀만 잘 따를 테니까.”그렇게 말한 성도윤은 차설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고 단숨에 침실까지 도착했다.아이들이 캠프를 떠난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성진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분명 이 싸움에서 이긴 건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철저하게 패배한 기분이었다.성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상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설아야, 오늘 어땠어?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퇴근하고 가서 만들어 줄게.”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달달한 그 분위기는 옆에서 듣는 사람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성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성도윤이 사무실을 떠나려 하자 성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 설아랑 다시 잘 지낸다며? 다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근데 이렇게 빨리 화해했다고? 설마 또 한 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거야?”성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끝난 사이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완전히 남남이 되어 다시는 엮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한두 달 만에 원래 사이로 돌아간 데다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눈동자까지 희생해 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에 성진은 절망스러웠다. 성도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그 모든 걸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성도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내가 설아랑 어떻게 지내는지 너한테 보고해야 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부러우면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찾아서 결혼하면 되잖아. 따뜻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을 누리면 되잖아. 다만...”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회의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지금 너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을까?”성도윤의 말투는 누가
성진의 말에 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성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에게 놓고 말하면 성진이 생명의 은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그렇다면 일단 부대표님 뜻대로 진행하죠. 일단 한 분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시도해 보세요. 지켜보겠습니다.”성도윤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고 이는 곧 성대 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역시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나서 성대 그룹의 이익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어떡할 건데?”“넌 내가 어떤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성도윤을 지지하는 세력과 성진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말이다.그때, 오준현이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은 항상 회사를 위해서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부대표님께서 정말 그룹에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성 대표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그러자 박지훈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오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오준현 씨, 회사의 대표 자리는 인간성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사에 수천 명의 직원이 있어도 성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인간성이요? 그게 수익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주인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이익뿐이라고요.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가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두 파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대립해서 싸우기 시작했다.보다 못한 성도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
“제 비서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지금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확장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성도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성 대표님,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너무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이 작은 규모만 지키려다가 무너지고 싶으세요?”장기준이 가감 없이 성도윤에게 의문을 제기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형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지난 반년 동안 큰 충격을 겪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죠. 그로 인해서 성격까지 바뀐 겁니다. 좀 더 신중해진 거죠.”“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 형은 뇌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거든요.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세요? 석현아, 주주님들께 보여 드려.”“네, 부대표님.”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성도윤의 건강 검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그러자 진무열이 분노하며 성진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성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는 개인 정보예요! 함부로 유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진 비서님, 진정하세요. 형을 생각해서라면 건강 검진 결과는 당연히 비밀로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형은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에요. 형의 건강 상태도 곧 성대 그룹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들 성대 그룹의 수익이 감소한 원인을 찾고 있지 않나요? 전 이 검진 결과가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해요.”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주주들은 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이럴 수가! 성 대표님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을 줄은...”“뇌를 다친 데다가 기억 상실증까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경영 방식이 전과 너무 다르더라니... 그 원인이 여기 있었군요.”“성대 그룹이 갑자기 변한 건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