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당신 대체 왜 이래요? 제가 아프든 말든, 약을 먹든 말든, 그쪽이랑 뭔 상관이죠? 왜 자꾸 나에게...”“아무래도 제가 먹여줘야 할 것 같네요?”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가서 차설아에게 ‘먹여’줄 포즈를 취했다.차설아는 순간 꼬리를 내리고 코를 쥐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한 모금 마셨다.‘젠장... 너무 써!’여자는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기회를 잡아 ‘반칙’을 하려 했지만 남자의 살인적인 눈빛을 보고는 계속 약을 마셔야 했다.‘하느님, 맙소사, 내 팔자는 왜 이 약처럼 쓴 거야? 내 집에서 다른 남자에게 약을 먹으라고 강요당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냐고!’차설아가 고통스럽게 약을 마시는 것을 본 남자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피아노 옆으로 가서 우아하게 앉았다.곧이어 그의 갸름한 손가락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흑백 피아노 건반에서 미끄러지더니 아름다운 선율이 천천히 방안을 휘감았다.차설아는 흠칫 놀랐다.‘자정 살인마라고 불리는 인간이 피아노도 칠 줄 안다고? 게다가 수준급이야!’음악은 마치 진정제처럼 그녀의 짜증 나는 마음을 한순간에 고요하게 만들었다.더 신기한 것은 그녀의 몸도 그렇게 아프지 않고, 온몸이 편안해졌다.손에 든 약도 별로 쓰지 않은 것 같았다.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젖히고는 약을 전부 마셨다.피아노를 치던 남자는 순식간에 몰입하더니, 심지어 눈까지 감은 채 음악에 흠뻑 취해 있었다.차설아는 약그릇을 침대 캐비닛 위에 올려놓고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어느새 그녀는 잠이 들었다...은은하고 부드러운 선율 속에서 그녀는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차설아는 오색영롱한 정원에 도착했다. 공기 중에는 꽃과 풀의 향기로 가득했고 하늘도 푸르러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았다.그녀는 정원에서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매우 즐겁게 웃으며 함께 하늘 끝까지 달려갔다.그 끝자락에는 몸집이 큰 남자가 등을 돌린 채로 그들을 오래 기다린 듯했다.민이 이모는 방으로
“휴, 뭐겠어요? 성씨 가문의 둘째 아들 성도윤 도련님밖에 더 있겠어요?”민이 이모는 이 이름을 언급하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아가씨가 전에 결혼한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죠? 그 결혼생활에 많은 정성을 쏟았고, 성씨 가문에도 많은 정을 쏟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죠...”“여자는 말이에요, 아주 강하지만 정이라는 것을 만나면 집착이 되죠. 우리 아가씨는 계속 그 실패한 결혼생활에 갇혀서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미스터 Q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가면 아래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온몸에 싸늘하고 우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이모님 말씀을 들어보니, 설아 씨는 오랜 세월 동안 계속 전남편을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건가요?”“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죠.”“전 남편에게 벗어날 수 없는 건 꼭 사랑 때문만이 아니라, 아쉬움일 수도 있어요.”“아쉬움이요?”“맞아요, 감정이라는 건 주식과도 같잖아요. 투자를 많이 할수록 점점 헤어나올 수 없죠. 한번 손해를 보면 손을 떼기는커녕 더 많은 원금을 걸고 도박을 하고는 결국 많은 것을 잃게 되죠... 마음속에 그렇게 큰 구멍이 뚫렸는데, 어떻게 쉽게 풀릴 수 있겠어요.”민이 이모의 말은 아주 철학적이라 미스터 Q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그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 차갑게 말했다.“이모님 말씀이 맞아요. 감정이라는 건 주식과도 같아 승패를 결정하기 어렵죠. 유일한 해결책은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하지 않는 거죠. 100%의 감정에 1%를 투자하면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고, 자연히 아쉬움도 없겠죠.”민이 이모는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우리 아가씨에게 어떤 감정이신가요? 만약 1%의 감정만 투자할 생각이라면 흔들지 마세요. 우리 아가씨는 한 번 빠지면 나오기 어려워해요. 이미 한번 사랑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절
차설아는 어색한 마음에 꼼짝 못 한 채 제자리에 굳어서고는 웃으며 말했다.“하하, 깼, 깼어요? 얼굴에 모기가 있어서 치워주려고 했죠.”“참으로 친절하시네요.”남자는 여전히 누운 자세였지만 카리스마가 넘쳤고 터프하게 긴 팔로 여자를 품에 끌어당기더니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제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차설아는 남자의 가슴팍에 반쯤 엎드리고 있었는데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했다. 발버둥 치면 오히려 더 어색한 자세로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는 일부러 덤덤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보답은 필요 없어요, 저도 그냥 은혜를 갚은 것뿐이에요. 온밤 동안 저를 돌봐주셨잖아요. 약 먹는 것도 도와주고 피아노도 쳐줬으니 모기 하나 잡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죠.”“하긴.”남자가 느긋하고 여유롭게 말했다.“아픈 사람 돌보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요? 특히 당신은 약을 먹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고요. 온밤 동안 고생을 하니 허리 시큰시큰하고 눈꺼풀도 무겁네요. 설마 모기 하나 잡는 것으로 퉁 칠 셈은 아니죠?”“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차설아가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이 녀석 완전 얍삽하네? 나한테 당한 거 바로 써먹어?’“뭐 별거 없어요. 어깨랑 다리 주물러주고 노래나 불러봐요.”차설아의 얼굴색은 한껏 어두워졌다.“그만하시죠? 이런 농담 좋아하지 않아요.”미스터 Q는 그제야 차설아를 놓아주고는 창밖의 쟁반 같은 밝은 달빛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저랑 얘기 좀 하고 달이나 구경하는 건 괜찮겠죠?”“네.”차설아가 손가락을 튕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간식과 과일을 챙겨왔다.“시작하죠.”그녀는 몸에 담요를 두르고 손에 빨간 사과를 쥐더니 느긋하게 말했다.남자가 허리를 곧게 펴고는 그녀를 위아래로 살펴봤다.“이제 열은 안 나는 거예요?”“네.”“감기 기운도 없어요.”“없어요.”차설아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으쓱해하며 말했다.“나 엄청 건강한 체질이에요. 감기에 걸려도 잠을 자면 바로 나아요.
미스터 Q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내가 누군지 많이 중요한가요? 혹시 저에게 무슨 특수한 감정이 생긴 건가요?”“아니거든요!”차설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곧바로 설명했다.“난 그냥 당신이랑 있으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편안한 느낌이 들어요. 당신이 소문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요.”“내 정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면 끝까지 캐물을 필요가 없죠.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바이어와 셀러의 관계일 뿐이에요. 당신은 나에게 이 섬을 팔고, 나는 그 돈을 지불하는 거죠. 아주 간단해요.”“하긴!”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어쩌면 그녀가 잠시 어리석게 행동한 것일지도 모른다.눈앞의 남자는 그저 약을 먹여주고 피아노를 연주했을 뿐인데 그녀는 바로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언제 뒤통수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경계심을 낮췄다.차설아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다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마치고는 미스터 Q에게 물었다.“이 섬이 어떤 것 같아요? 언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데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제 돈을 지불할 수 있어요?”배성준에게 약속한 돈을 더 미룰 수는 없었으니 먼저 돈을 받고 그 구멍을 때워야 했다.미스터 Q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이 여자, 왜 갑자기 태도가 급변한 거야? 방금까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든다더니 갑자기 나에게 돈을 내라며 재촉하는 거야?’“섬이 마음에 드네요. 돈은 언제든지 지불할 수 있어요. 하지만...”남자가 흠칫했다. 다른 조건이 있는 게 분명했다.차설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자정 살인마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것도 아닐 것이고. 성심 전당포를 제대로 이름을 날리게 했으니 분명 거래하기 까다로운 사람일 것이야.’“무슨 조건이 있는데요? 말해봐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그 말, 확실해요?”그는 차설아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차설아는 담요를 다시 몸에 꼭 두르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를 욕심
차설아는 정곡에 찔려 분노의 표정으로 말했다.“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기 아이들이 아버지 없이 자라길 바라겠어요? 아이들 아버지가 너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이 다른 상처를 받지 않도록 보호할 수밖에 없었어요.”“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요?”미스터 Q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믿을 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당신의 그 기준이 아이들의 생각보다 중요한가요? 오히려 아이들은 당신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요.”“당신이 뭘 알아요?”차설아가 반박했다.“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내가 키웠어요. 세상에서 나보다 아이들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요. 아이들이 어떤 아버지를 원하는지 내가 알아서 판단할 수 있으니 당신이 지적할 필요는 없어요.”“정말로 고집불통이네.”미스터 Q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럼 나는 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왜 꼭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데요?”‘당신이 아이들 아버지의 원수니까!’하지만 차설아는 차마 이 말을 내뱉지 못했다.“그럼 이렇게 하죠...”차설아가 난감한 얼굴을 보이자 남자가 말했다.“나한테 시간을 주는 건 어때요? 지금부터 당신이 다시 섬을 되찾아갈 때까지 내가 달이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때도 내가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나도 포기할게요. 어때요?”미스터 Q의 말은 너무나도 의외였다.자정 살인마라고 불리는 사람이 물러설 줄이야?그녀는 남자를 바라보더니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되기는 하지만 왜...”“이유는 없어요. 그냥 달이와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요. 어쩌면 내가 전생에 달이 아빠였을지도 모르죠.”남자가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결국 돈이 필요한 차설아는 일단 미스터 Q의 제의에 동의했다.계약서를 체결한 그녀는 순조롭게 돈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워낙 새로운 것을 좋아하던 달이 녀석은 더는 그녀에게 달라붙지 않고, 미스터
차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차설아와 미스터 Q는 가는 길이 달라 헤어지려고 했다.차설아는 이 순간을 진작 바랐지만 순수한 달이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남자에게 달라붙고는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아빠, 이제 헤어지는 거예요? 너무 아쉬워요. 같이 집으로 가서 엄마와 오빠랑 같이 살면 안 돼요?”“그게...”미스터 Q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설아가 굳은 얼굴로 거절했다.“안 돼!”“왜 안 돼요? 엄마랑 아빠랑 달이가 같은 집에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달이야, 엄마 말 들어봐. 이 사람 말이야,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 그냥 같이 놀면 모르겠는데 왜 집까지 들이려고 해? 이거 완전 나쁜 사람 집에 초대하는 격이야, 너무 위험해. 그래서 안 되는 거야.”“하지만 미스터 Q는 나쁜 사람이 아닌 좋은 사람 같아요. 우리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잘해주고 챙겨주고 있잖아요.”귀여운 달이는 이제 미스터 Q를 굳게 믿고 있었다.달이는 미스터 Q와 알고 지낸 지 이틀밖에 안 되었지만 미스터 Q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잘해주는 걸 느낄 수 있었다.엄마와 똑같이 오직 그녀를 위한 순수한 마음이 느껴졌고, 충분히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얘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차설아는 정말 화가 나 두 팔을 두르면서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미스터 Q를 따라가. 엄마를 왜 따라오는 거야?”그 말을 들은 달이는 얼른 미스터 Q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차설아의 허벅지를 끌어안으며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질투하지 마세요. 달이는 영원히 엄마를 제일 사랑해요. 달이에게 엄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다고요. 두 사람 중에 굳이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엄마를 선택하죠.”“됐어, 나랑 얘기하지 마.”차설아가 고개를 홱 돌리고는 씩씩거리며 말했다.‘흥, 내가 그렇게 쉽게 달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차설아는 오늘 오는 길에도 여러 번 질투를 느꼈다. 달이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차설아는 달이가 연애에 눈이 멀어 모든 걸 포기하는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얼마 후 택시는 곧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차설아는 아직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난리가 난 집 안의 상황을 예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배경윤은 울면서 난리를 부리고 있었고, 원이는 덤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원이야, 제발, 내가 부탁할게. 내 휴대폰에 있는 바이러스를 지워줘. 휴대폰에 엄청 중요한 파일이 있단 말이야, 절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돼.”“무슨 중요한 파일이 있겠어요? 한 번 봤는데 이모 셀카 사진밖에 없던데요?”“셀카 사진이 안 중요해? 이모 부탁을 들어줘. 다른 건 몰라도 휴대폰을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단 말이야. 경윤 이모가 패배를 인정할 테니까 제발 지워줘. 이렇게 부탁할게.”“패배를 인정하면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빨리 알려주세요. 엄마는 왜 인사도 안 하고 떠난 거예요? 엄마가 제 연락을 받지 않던데 설마 저를 버린 건 아니겠죠?”원이가 입을 삐죽 내밀더니 씩씩거리며 배경윤에게 물었다.배경윤은 죽고 싶은 마음이 다 생겼다.“그게, 나도... 나도 잘 몰라. 그냥 너를 잘 돌봐달라고 문자가 왔었어. 그리고 사라졌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너를 돌봐주러 온 게 아니라 완전 너에게 당하고 있잖아. 무슨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더 상대하기 더 까다로워? 내가...”“무슨 일이야?”차설아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는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원이는 듬직하게 앉아있더니 차설아의 목소리를 듣고는 쌩 달려갔다.“엄마, 돌아오셨어요? 원이는 엄마가 원이를 버리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녀석은 엄마 뒤에 있는 사랑스러운 동생과 존경하는 민이 이모까지 발견하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달이랑 민이 이모님도 온 거예요? 정말 잘됐어요!”“오빠, 드디어 달이랑 만나게 되었네. 안아줘!”두 녀석은 반가운 마음에 서로 껴안았다.“언니, 드디어 돌아왔어? 언... 언니 아들이 어떤 짓을 했는
차설아가 그 말을 듣더니 곧바로 흥분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그래, 아무나 아빠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엄청 중요한 사람이니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고. 아무 남자에게나 아빠라고 부르면 돼? 원이야, 달이가 평소 원이의 말을 잘 듣잖아. 이번에 달이를 제대로 교육해야 해.”그렇다, 차설아가 달이를 설득하기 위한 ‘최종 비밀 병기’는 바로 원이었다.그녀가 한 말이면 달이가 꼭 듣는 건 아니었지만 원이의 말은 무조건 믿으며 따랐다.아니나 다를까, 원이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면서 달이를 교육하기 시작했다.“달이야, 오빠가 말했었잖아. 이 세상은 아주 복잡한 거라고. 엄마랑 오빠, 민이 이모, 경수 아빠랑 경윤이 이모 빼고는 우리를 접근하는 사람 모두 나쁜 사람일 수 있어. 아무 사람을 아빠로 따랐다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어떻게 해? 우리를 해치려고, 심지어 엄마를 해치려고 하면 어떻게 해?”평소의 달이라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원이의 말을 새겨듣겠지만 이번에 달이는 보기 드물게 원이의 말을 듣지 않고 반박했다.볼이 빨개진 달이는 귀여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오빠의 말이 맞지 않은 것 같아.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많겠어?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은 다 엄청 좋은 사람들이었어. 아빠도 좋은 사람이야. 엄마가 편찮으실 때 챙겨주셨고, 나랑도 놀아주고 비행기도 태워줬어. 그리고 헬리콥터도 타 하늘을 나는 느낌을 받게 해주겠다며 약속했단 말이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어떻게 나쁜 사람일 수 있겠어?”차설아와 원이가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답답해 발을 동동 구르며 한숨을 쉬었다.“네 동생 좀 어떻게 해 봐. 이거 완전 사랑에 눈먼 여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얼른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설득해. 아니면 나중에 커서도 나쁜 남자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고생할 게 뻔해.”차설아가 원이에게 말했다.그녀는 모든 희망을 원이에게 걸었다.원이가 더 엄숙한 얼굴로 달이를 보며 말했다.“달이야,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