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한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요.”차설아는 막무가내로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차설아가 아는 성도윤은 침묵하거나 대답을 회피할 때도 있었지만 절대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었다.성도윤은 심호흡하고는 밖을 내다보았다.“설아야, 오늘 날씨도 좋은데 근처에 있는 시장에 가서 장이나 볼까? 내가 맛있는 걸 해줄 테니 기대해.”“당신이 요리한다고요?”차설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우리 집 주방을 태워버리려는 건 아니죠? 갑자기 소름이 돋았어요.”“날 믿어줘.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요리만 연구했어. 계속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요리 실력이 늘더라.”성도윤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회사 일은 뒤로 하고 차설아와 만난 다음에 무엇을 해줄지 생각했다.성도윤은 차설아와 햇살을 맞으면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차설아에게 전 세계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을 전부 해주고 싶었다.성도윤은 자신의 요리 실력으로 차설아를 놀라게 하고 싶었다. 진무열이 여러 가지 레시피 책을 구해오자 성도윤은 하루 종일 레시피를 연구하고 시도했다.차설아가 좋아할 만한 음식의 레시피를 죄다 외웠다.“당신은 너무 약해. 평소에 밥도 제대로 안 먹지? 내가 있는 동안에는 삼시세끼 챙겨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당신을 위해 몇백 가지 요리를 연구했어. 한 끼도 겹치지 않게 식단표를 짜볼게.”성도윤은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말했다.“당신은 할 일이 고작 그런 것밖에 없어요?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냐고요!”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에 흔들렸지만 일부러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목청을 높였다.“이제는 좀 느긋하게 살아가려고...”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하면서 말을 이었다.“예전에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어.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면 다른 기획안을 검토했고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알지 못했어. 잃어버린 나의 인생을 다시 찾으려고 해.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면 몸도 저절로 낫겠지.”“당신
두 사람은 백화점 옆에 있는 식자재 마트로 향했다. 성도윤은 스쿠터를 세운 뒤, 차설아를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시장 안으로 걸어갔다.성도윤과 차설아는 맨투맨을 입고 모자를 눌러썼다. 얼핏 보면 퇴근하고 나서 장을 보러 온 신혼부부 같았다. 두 사람은 선남선녀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차설아는 성도윤의 팔을 감싸안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당신은 뭘 좋아해?”성도윤은 고개를 숙이고는 차설아의 귓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원이는 물고기를 좋아하고 달이는 소고기를 좋아해요. 나는 가리는 게 없어서 다 잘 먹어요.”차설아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성도윤이 장 보러 가자고 할 때 거절하지 않은 것은 두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어느 날에 사고로 차설아가 죽게 되어도 두 아이는 성도윤의 보살핌 하에 무럭무럭 잘 자랄 것이다.“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이미 샀으니 당신이 좋아하는 걸 말해봐. 내가 맛있게 해줄게.”성도윤은 차설아가 좋아하는 것을 사려고 고집을 피웠다.“당신이 좋아하는 거라면 다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알려줘. 나는 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그럼... 갈비찜은 할 줄 알아요?”차설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제일 좋아하는 갈비찜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예전에 차설아의 아버지가 해준 갈비찜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었다.아버지가 돌아간 후, 차설아는 갈비찜을 먹기 싫어했고 아버지가 해준 그 맛이 아닌 갈비찜은 절대 먹지 않았다.“갈비찜이라면 자신 있어. 오늘 제대로 된 갈비찜이 어떤 건지 보여줄게.”성도윤은 반짝이는 두 눈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성도윤은 차설아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부려 먹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좋았다.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은 삶의 동력이자 사랑의 증표였다.차설아와 성도윤은 많은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같이 마트에 장 보러 왔다는 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두 사람은 일반인처럼 생활하면서 평범한 하루
“알겠어요. 그럼 얼른 사고 돌아와요.”차설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의자에 앉았다. 고기 특유의 냄새와 피비린내를 싫어했기에 의자에 앉아 성도윤을 기다리기로 했다.차설아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런 상황이 있을 때마다 성도윤한테 의지하면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만약 성도윤이 갑자기 떠나가 버리면 성도윤에게 기대는 것이 습관된 차설아는 공허함 때문에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다.성도윤이 고기를 사러 간 후, 차설아는 혼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후각과 청각은 아주 예민했다. 고작 몇 분이 흘렀지만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차설아를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수군거렸다.이때 차설아의 손에 말캉한 무언가가 닿았다.“누구야!”깜짝 놀란 차설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그 물건을 내쳐버렸다. 그러자 한 남자아이가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이 누나가 나를 밀쳤어요. 빨리 혼내줘요. 나를 밀면서 욕했다고요!”그 남자아이는 차설아가 진짜 보이지 않는지 궁금해서 일부러 손을 만진 것이었다.차설아는 놀란 마음에 밀쳤고 남자아이는 바닥에 넘어졌다. 남자아이의 엄마는 세일 상품을 고르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재빨리 달려왔다.“아들, 도대체 왜 넘어진 거야? 누가 너를 괴롭혔어? 엄마한테 당장 말해. 내가 가서 그년을 죽여버릴게.”험상궂게 생긴 뚱뚱한 여자는 얼핏 보아도 성격이 괴팍해 보였다.“이 누나가 나를 밀었어요. 가만히 있길래 마네킹인 줄 알고 손을 만졌을 뿐인데 나를 힘껏 밀쳐서 넘어졌어요. 엄마, 너무 아파요! 흑...”남자아이는 차설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울먹였다. 조금 전부터 차설아의 앞에 서서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껴도 감출 수 없는 미모 때문인지 남자아이는 다가가서 손을 만져보고 싶었다.그런데 차설아가 벌떡 일어나면서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자아이는 화가 나서 엄마한테 일러바쳤고 차설아를 혼내라고 했다.뚱뚱한 여자는 차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몸매가
차설아는 처음에 압도적인 기세로 사람들을 눌렀지만 선글라스가 바닥에 떨어진 뒤로 적잖이 당황했다. 제일 아픈 상처를 들킨 순간, 무척 괴롭고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차설아는 고개를 깊게 숙였고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나약한 모습을 낯선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차설아는 쭈그려 앉아 선글라스를 찾고 있었다.“저기요. 저의 선글라스를 좀 찾아주세요.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셔도 돼요. 누구 없어요? 저를 도와주세요.”차설아는 손으로 더러운 바닥을 마구 휘저었다. 온몸을 덜덜 떨었고 울컥해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모여있던 사람들은 차설아의 나약한 모습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차면서 수군거렸다.“이제야 굽신거리네. 조금 전과는 너무 다른 거 아니야? 너 같은 년은 꼭 혼내야 정신을 차리더라.”“맹인이면 성격이 괴팍해도 우리가 받아줘야 해? 사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건 용납 못 하겠어. 그리고 어쩌다가 눈이 멀었는지 알 게 뭐야? 이런 사람은 불쌍하지도 않아.”모여 있던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줍지 않고 발로 더 멀리 차버렸다. 뚱뚱한 여자는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여기고는 차설아를 내려다보면서 씩 웃었다.뚱뚱한 여자는 차설아의 머리채를 잡고 말했다.“눈은 멀었어도 귀는 들리잖아. 당장 사과하지 못해? 내 아들을 밀쳤으면 당장 사과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네 귀를 뜯어버릴 거야.”소란스러운 현장에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었다. 한편, 성도윤은 마트에서 제일 비싼 소갈비를 샀다. 차설아가 좋아하는 갈비찜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원이가 좋아하는 물고기를 사러 가려고 하는데 뒤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차설아가 앉아 있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본 성도윤은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설아야!”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재빨리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차설아가 모여든 사람들한테 공격당하는 모습을 본 순간, 성도윤은 화가 솟구쳐 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품에 안겨서 어깨를 꽉 잡고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잃어버린 차설아는 성도윤의 품이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성도윤을 안고 있어야만 안전하다고 여겼다.성도윤은 선글라스를 한참 동안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여자아이가 다가오더니 선글라스를 들이밀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빠, 선글라스가 저 멀리에 떨어져 있었어요. 얼른 언니한테 씌워주세요.”“아가야, 고마워.”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선글라스를 건네받고는 차설아한테 끼워주었다.선글라스를 낀 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겨우 진정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리에 놀란 차설아는 아직도 손을 덜덜 떨고 있었고 성도윤한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강철 멘탈을 지닌 차설아는 실명한 뒤에 여러 일들을 겪을 수 있다고 예상하면서 심리 준비를 했다.예상했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차설아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나약하고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사악하고 나빴다.조금 전에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고 발가벗은 것처럼 수치스러웠던 순간은 차설아한테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설아야, 이제는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해. 무서우면 더 꽉 안아도 돼.”성도윤은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성도윤이 기억하는 차설아는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차설아는 거만한 여왕처럼 당당했고 절대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성도윤은 차설아가 진짜 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한 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차설아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누군가가 지켜주길 바랐다. 성도윤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점점 들끓었다.‘차설아는 내가 평생 책임져야 할 여자야.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여자야!’“다, 당신 뭐야? 이 술은 당신 때문에 깨진 거야.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으니 너희들이 물어내!”뚱뚱한 여자는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면서 성도윤과 차설아를 가리켰다.“술값을 배상하는 건 상관없어. 그
말이 끝나자 뚱뚱한 여자는 성도윤과 차설아의 앞에 털썩 무릎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제가 잘못했어요. 당신들에게 화를 내지 말아야 했어요. 죽을죄를 지었어요, 용서해 주세요.”성도윤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기가 눌린 뚱뚱한 여자는 그들의 배경이 만만치 않음을 알아채고 바로 무릎을 꿇고 꼬리를 내렸다. 더욱 엄중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우리 이제는 가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옷깃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는 그냥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저를 데리고 떠나주세요.”조금 전 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차설아는 사람들이 싫어졌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저 뚱뚱한 여자는...”분노에 찬 성도윤은 그의 아내를 괴롭힌 뚱뚱한 여자를 혼내주려고 했다.“뚱뚱한 여자는 관심 없어요.”선글라스 속 차설아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어디 한 명뿐이겠어요, 뚱뚱한 여자도 그중 한 명일 뿐이에요. 죽인다고 한들 뭔 소용 있겠어요.”괴물처럼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며 평가의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던 차설아는 단지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그래, 우리 가자.”더 이상 뚱뚱한 여자에게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던 성도윤은 구매한 식재료를 들고 차유라와 함께 마트를 떠났다.차에 탄 후 운전하던 성도윤은 우울하게 차창에 기대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차설아의 모습을 보았다.방금 그녀가 겪은 일은 과거의 고난과 역경에 비하면 에피소드에 불과할 뿐이었다.그러나 그녀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그 순간 차설아는 자신이 어린이마저 괴롭힐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신호를 기다리던 성도윤은 고개를 돌려 차설아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차를 운전하는 내내 차설아가 걱정된 성도윤은 그녀를 위로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말이 그녀에게 압력을 가할까 봐 계속 고민하며 망설였다.그러나 참을 수 없었던 성도윤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직 잘 몰라서 그래. 꽃병은 선천적으로 예뻐서 진열만 해놓아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사람들은 그것을 보물로 여겨 대가를 치르지... 박물관에 진열된 보물들을 보면 진정으로 쓸모가 있는 것이 있어? 하지만 그들의 가치는 부정할 수 없어. 당신은 우리의 보물이기에 우리가 지켜줄 거야. 그러기에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진심으로 차설아를 위로한 성도윤은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사실 성도윤은 애초에 차설아를 지켜주려고 했지만 남자 못지않게 성격이 강하고 완벽을 추구했던 그녀는 오히려 그를 지켜주려고 했다.그러나 오늘날 차설아가 무너지자 성도윤은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존재감과 자아 가치를 되찾게 되었다.“저는 싫어요...”차설아는 슬프게 한숨을 내쉬었다.“누구나 꽃병처럼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누구도 평생 한 사람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약속하지 못해요. 이 세상에 태어나면 사람마다 자신의 사명이 있는데, 일편단심으로 상대방을 위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요?”“지금 나의 진심을 의심하고 있는 거야?”성도윤은 슬픔이 묻은 차설아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그는 그녀의 슬픔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있었다.“당신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에요. 도윤 씨도 사명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어요. 단지 모든 일은 진심만 있다고 해서 다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차설아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당신이 저를 선택하면 서씨 가문과의 관계도 끊어질 거예요. 지금 성대그룹이 위기에 놓여서 스스로 돌볼 여유도 없는데 저를 돌볼 여유가 있겠어요?”차설아는 성도윤에게 정신 차릴 것을 알려 주었고 자신도 이 보호 속에 갇혀 있지 말 것을 각인시켜 주었다.아름다운 것은 항상 쉽게 사라지기 마련이기에 잃을 때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처음부터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모두 신경 쓸
“꿈을 꾸었다고요?”달이는 천진난만하게 동그란 큰 눈을 깜빡이며 성도윤에게 물었다.“아빠, 꿈속에 무서웠어요? 그 꿈은 사람들이 아빠를 괴롭히는 무서운 악몽이었나요?”“그건...”진짜 꿈인 줄로만 생각하는 순진무구한 달이가 너무도 귀여웠던 성도윤은 웃고 말았다.“악몽인지 아빠도 잘 모르겠어. 꿈에서 아빠는 산송장처럼 비몽사몽 살면서 중요한것을 잃어버렸어. 그런데 지금 꿈에서 깨어나 보니 너희들을 잃어버렸던 거야.”“흠, 그렇다면 달이는 아빠를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아빠가 제일 힘든 시기에 옆에 함께 있어 주지 못했기에 달이는 오히려 속상해요. 아빠는 저희한테 화나셨나요?”달이는 작은 손으로 완벽한 윤곽을 가진 성도윤의 볼을 잡고 찰진 목소리로 진지하게 물었다.달이가 예전에 악몽을 꾸었을 때 엄마와 오빠는 그녀를 품에 안고 곁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부드럽게 위로해 주었기에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달이는 아빠가 홀로 끔찍한 일을 마주하고 있을 때 그의 곁에서 함께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비난하기까지 했기에 매우 미안하게 느끼고 있었다.“하하, 바보야, 아빠가 왜 화나겠어? 아빠는 너희들을 아주 많이 사랑해.”달이에 의해 마음이 녹아버린 성도윤은 아이에게 뽀뽀해 주었다.얼떨떨하게 오랜 시간을 살았어도 여전히 성도윤을 사랑하는 하느님은 그에게 아이들과 차설아의 곁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었다.원이의 총명함과 지혜로움, 달이의 부드러움과 선량함은 성도윤의 갑옷이자 약점이었다. 두 아이는 성도윤이 막막한 인생을 이겨낼 수 있게 힘이 되어주었고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달이야, 너 내려와. 도윤이가 수술 직후라 너무 무리하면 안 돼...”차설아의 손을 잡은 원이는 성도윤의 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장난치는 달이의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성도윤의 품에서 순순히 뛰어내린 달이는 그의 손을 잡고 차설아와 원이의 앞으로 갔다.“오빠, 예의 없게 아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돼. 아빠는 악몽 때문에 우리를 잊어버린 거라고 말했어.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설아는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성철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다급히 끊었다.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차설아는 차성철과 덤덤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몇 초 후, 차성철이 전화를 받았다.“설아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답지 않게 먼저 연락해서 놀랐어. 별일 없지?”차성철은 남부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아서 보물과 함께 가라앉은 배를 찾으려고 했었다. 배에 있던 보물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차성철은 점점 지쳐갔다.차성철은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혼자 지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차설아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다. 차성철은 먼저 연락한 차설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이상, 먼저 차성철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오빠, 그렇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 없어. 기쁜 일이 생겨서 오빠한테 알려주려고 용기 내서 전화한 거야.”차설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무엇이 우리 설아를 기쁘게 했는지 들어나 볼까?”차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음... 우리 집에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용인이 한 명 들어왔어. 월급을 적게 주는데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일해. 오빠, 이런 사용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차설아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수줍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기에 성도윤을 사용인이라고 둘러댔다.“그래? 네가 편하면 돼.”“너무 편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런 사용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사용인을 쉽게 믿지 말고 계속 지켜봐. 집에서 너를 보살피는 사람인데 만약 겉모습에 속아서 경계하지
차설아는 깨어난 척하면서 기지개를 켜고는 성도윤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말했다.“도, 도윤 씨? 도윤 씨가 어떻게 저의 방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변태 같아요.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한 건 뭐죠? 도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성도윤은 차설아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당신 말대로 나는 뻔뻔스러운 변태 같은 남자야.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여자의 방에 가만히 들어가서 장난감 역할을 자처하곤 했어. 주인님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음식을 대접해야지.”“음... 그래요.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요. 당신의 상황극에 맞춰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혀 줘요.”차설아는 긴 팔을 뻗고는 성도윤이 옷을 갈아입혀 주기를 기다렸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불을 켰고 편안한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혀 주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섰고 애틋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설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옷을 입은 뒤, 성도윤은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감싸면서 귓가에 속삭였다.“나를 유혹해 놓고 혼자 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모르는 척한다는 걸 다 알아. 나중에 우리 둘 다 몸이 회복하면 오늘 진 빚을 제대로 갚아야 할 거야. 알겠어?”“흥! 변태 같은 당신을 다시는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성도윤의 팔을 툭 쳤다. 어릴 적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차설아는 여린 면을 내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성도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서 연약한 모습이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도현이 차설아를 보면 ‘사랑스러운 여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차설아는 성도윤만 보면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모습 대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두
원이와 달이는 식탁 앞에 앉아 성도윤과 차설아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이는 인쌍을 찌푸리고는 원이를 향해 말했다.“오빠, 아빠랑 엄마는 뭐 하고 있기에 아직도 내려오지 않는 거야? 음식이 식으면 맛없단 말이야. 아직 뜨거울 때 같이 먹었으면 좋겠어.”어른들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원이는 턱을 괴고 생각해 보았다.“나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안 나오는 거지? 아빠가 엄마를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야?”“흥! 아빠를 용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엄마를 괴롭히는 거지? 우리가 가서 아빠를 혼내주자.”두 아이는 주먹을 꽉 쥐고는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때 민이 이모가 맛있게 끓인 국을 들고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흥분한 달이와 원이를 말렸다.“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 먼저 식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윤 도련님과 설아 아가씨는 피곤해서 쉬고 있을 거예요. 간만에 휴식하는 거라 방해하면 안 돼요.”“쉬고 있을 거라고요?”원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을 이었다.“엄마는 오후 내내 쉬고 있었잖아요. 저녁도 안 드시고 또 잔다는 뜻인가요? 그러다가 배가 고파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죠?”“그, 그건... 예전에 설아 아가씨는 실면해서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곁에 도윤 도련님이 계시니까 마음이 편해서 푹 주무실 수 있는 거고요.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아요.”민이 이모는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서 식은땀을 흘렸다.“자,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조금 더 기다리면 두 분이 식사하러 내려올 수도 있잖아요.”민이 이모는 위층에 있는 차설아의 방을 힐끗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도련님은 식사 시간이 끝나기 전에 설아 아가씨를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 어쩌면 좋지?’민이 이모의 예상과는 달리 성도윤과 차설아는 이불만 덮고 자고 있었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복근이 손에 닿자 깜짝 놀랐다.‘이건 꿈이 아니야! 이런 복근을 나의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다니, 꿈에 절대 나올 리 없는 초콜릿 복근이
성도윤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마치 청심환이라도 먹은 듯 마음이 안정되었다.생각이 많았던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눈앞의 행복을 놓쳤다.어쩌면 득보다 실이 많았었다.현재의 삶을 잘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보기로 결심했다.성도윤은 차설아를 위로하고 밥하러 주방으로 갔다.오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관문이었다. 처음으로 주방에 선 성도윤은 모든 요리 실력을 발휘하여 세 명의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켜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했다.화원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은은하게 전해지는 음식 향이 더해져 삶이 더없이 행복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다.오늘 불쾌한 일을 겪은 차설아는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졸음기가 없었던 그녀였지만 방금 겪은 일로 힘들었던 그녀는 잠이 들었다.“설아야,설아야.”비몽사몽인 그녀의 귓가에는 낮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입으로 중얼거리며 이불을 감싼 그녀는 계속 쿨쿨 잤다.“아직도 잠에서 덜 깬 거야? 밥이 다 되었는데 가져다줘?”성도윤은 희미한 조명 아래에 서서 차설아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저녁 내내 바쁘게 움직여 한 상 가득 음식 준비를 마친 성도윤은 마치 선생님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차설아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방에 들어온 성도윤은 깊게 잠든 차설아를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혼잣말을 했다.“당신이에요?”꿈꾸듯 비몽사몽인 차설아는 애교를 부리며 손을 내밀어 성도윤의 목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뽀뽀.”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뽀뽀라고... 진심이야?”성도윤의 기억 속에서 차설아가 이렇게 열정적이고 부드러운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갑작스러운 차설아의 적극적인 사랑에 놀란 성도윤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당신의 입술... 어디에 있어? 왜 닿지 않는 거야? 뽀뽀하게 얼른 가까이 들이대 봐.”자신이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차설아는 혀를 꼬며 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