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미안해...”사도현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어린아이처럼 조심스럽게 말했다.“직원들은 내가 욕해도 신경 안 썼어. 그리고 욕해도 잘못한 것을 바로 잡지지 않으니까 일단 욕부터 하는 게 습관 되었나 봐.”“신경 쓰지 않을 리가 있어? 네가 폭력적으로 구니까 반항하지 못하는 거지!”배경윤은 사도현을 노려보더니 이마에 난 상처를 만지면서 소리를 질렀다.“난 널 만나고 나서부터 왜 이렇게 재수 없는 일만 생기는지 몰라.”“이리 와봐.”사도현은 배경윤의 손을 떼어내고는 이마에 난 상처를 보면서 울상을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김을 불어주더니 상처 위에 입을 맞추었다.“잠깐만 기다려줘. 나한테 연고랑 밴드가 있거든. 내가 연고 발라줄게.”사도현은 배경윤을 소파에 앉힌 뒤, 재빨리 서랍에서 약상자를 꺼냈다. 사도현은 평소와 다르게 무척 다정했고 상처에 연고를 천천히 바른 후에 밴드를 붙여주었다. “그만해. 나는 누구처럼 연약한 여자도 아니잖아. 조금만 지나면 아물 상처인데 뭘 굳이 연고까지 바르고 그래...”배경윤은 사도현한테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까 봐 일부러 도도하게 말했다. 사실 사도현이 이마에 뽀뽀해 준 뒤부터 자꾸 사도현한테 눈길이 갔고 당장이라도 사도현을 끌어당겨 키스를 퍼붓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나쁜 놈, 우린 이미 헤어졌는데 왜 애틋하게 쳐다보는 거야! 넌 태어날 때부터 바람둥이였구나.’소파에 앉아 있던 배경윤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래서 사도현이 다가올 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단단한 머리로 사도현의 턱을 들이받았다.“아!”사도현은 밀려오는 통증을 못 이기고 곡소리를 내면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 턱 어디 갔어? 뾰족하고 멋진 내 턱! 너무 아파서 사라진 줄 알았잖아. 아직 붙어있어서 너무 다행이야.’“시끄러우니까 입 다물어. 지나가는 사람이 들었으면 내가 널 때린 줄 알 것 아니야. 조용히 하라고!”배경윤은 턱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는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은
“잔말 말고 이리 오지 못해? 안 아프게 해줄게!”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의 얼굴을 붙잡았다. 한 손으로 턱을 잡고 대학교 교양 수업 때 배웠던 턱관절 복원법을 회억하면서 힘을 주어 비틀었다.뚜두둑!“이제는 괜찮을 거야. 천천히 움직여봐.”배경윤은 손을 툭툭 털면서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사도현은 천천히 턱을 움직였고 통증이 사라진 것을 보아 제대로 복원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일부러 아픈 척했다.“아, 아파! 내 잘생긴 얼굴 이제는 어떡해? 경윤아, 네가 날 평생 책임질 거야?”“아직도 아플 리 없는데...”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다가가더니 사도현의 얼굴을 다시 한번 붙잡았다.“내가 다시 해줄까?”“아, 아니! 이제는 아프지 않아.”사도현은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한 번 더 배경윤의 손맛을 봤다가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는 게 아니라 목숨마저 잃을 수 있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이 거짓말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화를 냈다.“넌 좀 진지하게 굴면 안 돼? 나한테 장난치면 재밌어?”“재밌지!”사도현은 미소를 짓고는 씩씩거리는 배경윤한테 다가갔다.“넌 너랑 티키타카 하는 게 재밌어. 너 말고 다른 사람은 나한테 함부로 그러지 않거든. 너랑 헤어진 뒤에 날 약 올리는 사람도 없으니까 너무 지루하더라고...”“내가 네 웃음거리란 뜻이구나? 그리고 내가 없다고 해도 직원한테 화풀이하면 안 되지!”“그런 말이 아니잖아. 네가 날 화나게 했으니까 어쩌다 보니 직원한테 화풀이하게 된 거야. 사실 직원들이 이렇게 힘든 것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직원들을 힘들게 한 거라고! 직원들한테 사죄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사도현, 적당히 해.”배경윤은 사도현과 말싸움해서 이겨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아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헤어진 사이이기에 사도현이 무슨 짓을 하든 배경윤과 상관없는 일이었다.사도현은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배경윤의 상처를 매만지면서 물었다.“그런데 갑자기
“울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사도현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울먹이는 배경윤을 위로해 주었다.“네가 어떤 마음인지 잘 알아. 하지만 이 일은 네 생각처럼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아. 일단 윤설과 차성철은 만난 적도 없고 엮일 일도 없었어. 윤설은 목숨과 연예인으로서의 앞날을 잃을 각오까지 하면서 차성철을 해하려 들지 않았을 거야.”“하, 결국 너도 윤설 편이야?”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당장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사도현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배경윤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을 이었다.“그 의사가 수술 전에 윤설과 전화하면서 실수 없이 처리하겠다고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어! 그런데도 너는 윤설이 그럴 이유가 없다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하는 거야? 아니, 그 여자는 네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아! 넌 윤설을 그저 맑고 순진한 첫사랑으로 기억하고 싶은데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잖아.”“아니, 이번에는 네가 틀렸어.”사도현이 싸늘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난 윤설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아. 그래서 윤설을 내 곁에서 떼어놓은 거야. 난 네가 이성적으로 누가 진정한 범인인지 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사도현은 냉정하게 말했다. 이 상황에서 성형병원 의사한테 연락한 사람이 윤설이 아닌 다른 사람이더라도 사도현은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배경윤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윤설이 범인이든 아니든 이 사고에 연루된 건 사실이야. 그럼 윤설을 찾아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사도현은 턱을 매만지면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랑 같이 가자.”“왜? 내가 네 첫사랑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사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 윤설이 널 해코지할까 봐 그래. 너처럼 솔직하고 단순한 사람을 괴롭히기 좋아하거든.”“내가 단순하다고?”“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일 정도거든. 내가 네 옆에 있어서 안심이 될 것 같아.”사도현은 곧바로 관리팀한테 전화를 걸어 물었다.“윤설 스케줄을
사도현은 지프차를 준비했고 가기 전에 트렁크에 배경윤이 좋아하는 과일과 간식을 가득 사 넣었다. 배경윤은 대표가 되어서도 직접 움직이는 사도현을 보면서 설렜다.배경윤은 차에 기대서 사도현에게 티슈를 건넸다.“이미 헤어진 마당에 뭘 이렇게 잘해주고 그래. 난 네가 나한테 미련 남은 줄 알고 오해할 뻔했잖아!”배경윤은 장난하려다가 분위기가 싸해진 것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장난이니까 오해하지 마. 난 헤어진 후에 전 남자 친구와 잘 지내는 사람 아니야!”“나도 아니야.”사도현은 차갑게 말한 뒤, 배경윤이 제일 좋아하는 과자 한 상자를 트렁크에 던졌다.쾅!‘화나고 짜증 나는데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고 싶은 느낌이 들어. 이 짜릿함을 못 잊어서 사랑하는 거지.’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조수석에 앉은 배경윤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설아야, 몸은 어때? 성철 오빠는 괜찮아?”“신경과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가 오빠 수술을 맡았어. 곧 깨어날 것 같아.”“그래, 정말 다행이야.”배경윤은 마음에 걸린 돌멩이가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며칠 동안 연락 못 할 것 같으니까 밥도 잘 먹고 기운 차려야 해. 급해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 성철 오빠 곧 깨어날 거야.”“왜? 어디 멀리 가는 거야?”“응, 촬영장 구경하러 다녀올게.”배경윤은 차설아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했다.“너도 고생 많았는데 푹 쉬어.”“우리 모두 수고 많았어. 곧 다시 만나.”두 사람은 30분 동안 얘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듣던 사도현은 운전하면서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여자들은 어떻게 아무리 말해도 끝이 없을까?”“여자는 고급 동물이라 그래. 남자는 신체만 사람이고 사상은 여전히 동물처럼 본성에 따른다니까!”“아니, 왜 말이 갑자기 그쪽으로 튀어?”“내 말이 틀렸어?”배경윤이 말을 이었다.“너랑 성도윤은 둘 다 나쁜 놈이야. 품에 안은 여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를 뚫
진흙 길인 데다가 비가 내려서 사람이 걷기 어려울 정도로 질퍽거렸기에 차로 들어갈 수 없었다.“이럴 줄 알았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사도현은 진흙 길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찌푸렸고 차를 돌리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재벌가 아가씨 배경윤이 이런 험한 길로 걸어가려고 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가고 뭐 해?”배경윤은 고민도 없이 바지를 걷어 올리더니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사도현의 예상과 달리 배경윤은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이런 진흙 길에서 언제 또 걸어보겠어? 영화에서만 보던 길 위를 걸을 수 있는데 돌아가라니... 왔던 바에 진흙 길이 어떤지 직접 들어가 보겠어!”배경윤은 곧바로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진흙 길로 들어섰다.“아니, 너 정말 여자 맞아? 흙이 묻어서 더러울 텐데, 넌 괜찮은 거야?”사도현은 멀리까지 걸어간 배경윤의 뒷모습을 보면서 머뭇거렸다. 결벽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맨 발로 질퍽한 진흙을 딛고 가려고 하니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거기서 뭐 해? 남자라는 놈이 약해빠져서는... 빨리 와! 진흙이 묻으면 나중에 씻으면 되는데 뭘 망설이는 거야?”배경윤이 100미터 정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사도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머뭇거리는 사도현의 모습을 보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예전에는 왜 저놈이 이렇게 약해빠진 놈인 줄 몰랐었지?’성별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나약한 면이 있을 수 있지만 배경윤이 아는 사도현과 지금 눈앞의 사도현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사도현이 진흙 길을 맨 발로 걷지 못해서 쭈뼛거리자 배경윤은 콩깍지가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저런 놈을 뭐가 좋다고 따라다녔는지 몰라. 난 남자 보는 눈이 없다니까.’“거기 약해빠진 분, 셋 셀 때까지 안 오면 나 혼자 갈 거야. 하나!”배경윤은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미간을 찌푸렸다. “너 딱 기다려! 그 마을에 도착하면 아주 혼을 내줄 거야. 지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서 잠
“난 강아지가 제일 무섭단 말이야! 강아지가 벌써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사도현은 배경윤의 뒤에 숨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키가 190센티미터나 되는 성인 남자가 드라마 속 청순가련 여주인공보다도 연약했다.배경윤은 입술을 깨문 채 겨우 웃음을 참더니 말했다.“우리 도현이 무서웠어? 괜찮아. 이 누나가 있는 한, 강아지는 널 어쩌지 못할 거야. 누나 따라 빨리 와야 해. 또 소리 지르면 강아지들이 한 번에 몰려올 거야.”배경윤은 사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어린아이 달래듯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걷기 힘든 진흙 길을 걸었고 예능 >의 촬영 장소에 겨우 도착했다.“드디어 다 왔어! 드디어...”사도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지옥에서 도망친 것 같은 사도현의 모습에 배경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엄살 부리지 마.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면 도시처럼 잘 닦인 길이 없을 수도 있어. 이런 마을에서 강아지와 진흙 길은 아주 흔한 거라고! 그렇게 무서워할 거면 왜 나 따라온 거야?”“그걸 몰라서 물어?”사도현은 강가로 가서 발에 묻은 흙을 씻었고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내가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서 널 따라온 것 같아?”“그런 것 같은데?”배경윤의 말에 사도현은 어이가 없었다.“난 누가 또 칠칠치 못하게 물건을 잃어버리고 다닐까 봐 옆에서 보살펴 주려고 했어. 그런데 이 고생을 하고도 듣는 말이 죄다 잔소리라니... 잘해줘도 소용없나 봐. 나만 바보처럼 간이고 쓸개고 다 바쳤지!”“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가 널 보살폈어! 네가 소리 지르고 징징대지 않았으면 난 진작에 촬영 장소에 도착했을 거라고!”“그래.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너한테 민폐 끼쳤어. 정말 미안하다. 됐어?”사도현은 화가 솟구쳐 올랐다. 배경윤을 돕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직접 운전해서 마을까지 왔는데 배경윤한테서 고맙다는 말 대신 빈정 상하는 말만 듣게 되었다.
가수 진혁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저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데뷔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처음 봐요! 마을에서 마음 편하게 있으면서 힐링하는 촬영인데 윤설은 마을의 물도 마시지 않고 고급 브랜드 물만 마시겠다잖아요. 아니, 이 마을에 그런 물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일부러 저를 난처하게 하려고 그러는 걸까요?”진혁은 요리를 맡았고 고정 멤버들의 입맛을 고려해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했다. 모두의 인정을 받으면서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윤설이 투입되면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쌀이 덜 있었다거나 야채에 벌레가 있다면서 트집을 잡더니 고급 브랜드 물로 지은 밥이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겠다고 했다.“데뷔한 지 오래되었다고 기강 잡는 선배는 봤어도 이런 사람은 처음이에요. 지금은 사람들한테 잊혔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저도 인기가 많은 가수였다고요! 그런데 저런 여자 때문에 촬영 분위기가 흐려지고 저의 요리가 지적받는 건 말도 안 돼요. 윤설이 하차하지 않으면 제가 하차하겠어요!”진혁은 책상을 내리치면서 씩씩거렸다. 진혁이 윤설을 못마땅해하다가 결국 하차하겠다고 하자 사회자 하은진이 나서서 말렸다.“진혁 씨, 그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요. 윤설은 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밀어주는 연예인이라서 갑자기 투입된 거예요. 그런데 내쫓겠다고 해버리면 윈스 엔터테인먼트와 적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윈스 엔터테인먼트는 연예계를 주름잡는 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괜히 건드렸다가 소리 소문 없이 묻힐 바에는 가만히 있는 게 나아요.”“제가 듣기로는 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윤설을 버린 카드 취급 한대요. 이 예능에서 활약하지 못하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다던데요? 어차피 회사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니 내쫓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배우 강지훈도 윤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잠시만요. 진정하고 제 말부터 들어봐요.”하은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윈스 엔터테인먼트 대표와 주주들이 윤설 대
진혁이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사 대표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뵙게 되네요. 오늘 특별 게스트로 오신 거예요? 아니면 촬영 현장이 어떤지 보러오신 거예요? 제작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요.”촬영은 저녁쯤에 끝났기에 사도현이 특별 게스트로 온 것인지, 촬영 현장을 보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배경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윤설 씨를 찾으러 왔어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윤설 씨를요?”진혁은 윤설이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지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윤설 씨 별명이 백설 공주잖아요. 공주님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내겠어요.”“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윤설 씨는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이에요?”배경윤은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진흙 길을 한참 걸어서 촬영 장소에 왔는데 윤설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다.“지금은 다른 곳에 있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이곳에 나타날 거예요.”진혁이 차갑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그럼 지금 어디에 있어요?”배경윤이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호텔에 머물고 있어요. 이곳에 방이 많지만 공주님은 이런 누추한 곳을 싫어하거든요. 촬영이 끝나자마자 호텔로 달려갔어요. 아, 마을로 들어오는 길 중간부터 진흙 길이잖아요? 마을 사람에게 돈을 주고 업혀서 마을을 빠져나갔대요. 마을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좋아하더라고요.”“흠!”하은진이 진혁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눈짓했다. 진혁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가는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윤설 씨는 더위를 잘 타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에어컨도 없고 씻기도 불편하니까 좋은 곳에서 쉬고 싶어 할 수도 있죠. 배우로서 컨디션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하니까요.”“하, 꼴에 연예인이라고 잘난 척하는 거잖아요. 뭘 또 그렇게 포장해서 얘기해요?”배경윤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럼 윤설 씨를 만나려면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네요?”배경윤은 진혁과 하은진한테 물었다.“맞아요. 지금 시간이 늦었기도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