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씨 사모님이 겸손하게 말했다.“세 명 다 돈을 땄어, 그중에 내가 운이 제일 좋았을 뿐이야.”“세 명이 돈을 땄으면 누가 돈을 잃었죠?”강한서가 물었다.사모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현진한테로 향했다.“얼마를 잃은 거야?”강한서의 물음에 유현진이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9천만 원...”강한서는 액수를 듣고 흠칫 놀랐다.“눈 감고 논 거야?”유현진은 고개를 들고 그를 째려봤다. 그녀의 돈을 잃은 것을 무슨 자격으로 질책한단 말인가?이에 백씨 사모님이 말했다.“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강한서는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고 비웃듯이 말했다.“경험이랑 상관없어요. 보드게임도 잘 못 하더라고요.”그는 유현진이 둔하다는 걸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그는 틈만 나면 유현진을 조롱하기 바빴다.강한서는 주전자를 들어 잔에 차를 가득 부은 후 담담하게 말했다.“오랜만에 손님들이 오셔서 제가 근처 맛집에 저녁을 부탁했어요. 저녁 시간이 되면 집까지 배달해줄 겁니다.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더 놀지 않으시겠어요?”진씨 사모님은 망설여졌다. 지금까지 딴 6천만 원을 다시 잃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섰다.그러나 백씨 사모님은 전혀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좋아, 오늘 운발도 따라주는데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아.”백씨 사모님이 이렇게 나오자 진씨 사모님도 자리를 뜨기가 난처했다.신미정은 두 눈 커다랗게 뜨며 강한서를 봤다.“너 화투 싫어하잖아.”“제가 놀겠다는 게 아니에요. 네 분이서 노세요, 전 그냥 옆에서 지켜볼게요.”‘내가 어떻게 돈을 잃게 된 건지 확인하고 싶다는 뜻인가? 역시 사람이 못됐어!’유현진이 속으로 몰래 그를 욕했다.강한서는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 옆에 앉은 후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사모님들이 마음껏 놀 수 있게 해줘. 돈을 따면 네 것이고 잃으면 내가 대신 내줄게.”유현진은 그의 말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곧 새로운 판이 시작되
유현진은 그의 말 대로 패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점수가 높은 패였다. 강한서가 아무 말이 없다는 건 정확한 선택을 했다는 뜻이었다.진씨 사모님은 화투패를 살피다가 패 한 장을 던졌다. 유현진은 자기 차례가 다가오자마자 또다시 비를 던지려 했다.“그 송학은 뒀다 뭐 할 거야?”강한서의 말에 유현진은 그를 힐끔 째려보고 그의 말 대로 송학으로 점수를 땄다. 그의 말을 하찮게 생각하던 유현진은 패 하나를 집어 들고 깜짝 놀랐다. 또다시 점수 딸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현진아, 네 차례야.”진씨 사모님이 다그쳤다.유현진은 망설이다가 낮은 소리로 답했다.“네.”그러나 진씨 사모님은 그녀가 던지는 패를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뭐야? 너한테 왜 그게 있어?”이에 다른 사모님들의 눈길이 일제히 유현진이 던진 패로 향했다.“어쩐지 안 잡힌다 했어, 다 너한테 있었네.”진씨 사모님이 비꼬듯이 말했다. 그녀는 오늘 기운이 좋다는 생각으로 계속 돈을 딸 생각이었지만 모든 점수가 유현진한테 쌓였다.유현진은 단번에 네 판에 딸 돈을 따게 되었다. 출발이 순조로우니 다음 판도 패가 척척 잘 붙었다. 돈을 따기 시작하니 그녀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강한서는 그녀의 뒤에서 이따금씩 한 단어로 제시하며 그녀를 도와줬다.판이 이루어질수록 진씨와 백씨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특히 진씨 사모님은 방금 딴 돈을 도로 내놓게 되었다. 게다가 유현진은 파죽지세로 계속 이겨나갔다.“오늘은 여기까지 해.”신미정이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너무 오래 앉아있으니까 다리가 다 저리네. 이제 거실에 가서 차나 마시며 수다나 떠는 게 어때?”진씨 사모님은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강한서가 그녀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마지막까지 계산을 끝내야죠.”진씨 사모님은 난처했다. 그녀는 떼먹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강한서가 입 밖으로 꺼내니 창피함이 몰려왔다.신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조금 있다가 해. 일단 차나 마시며 쉬어.”그러나
신미정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다 같이 즐겁게 놀려고 모인 자리에 왜 찬물을 끼얹은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들었다.“엄마, 진씨 사모님 남편이 승진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이렇게 큰 금액이 다른 사람한테 발견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신미정은 말문이 막혔다.“그래도 이렇게 대할 필요는 없었잖아.”“다음부턴 주의할게요.”신미정은 어이가 없어 며느리를 힐끔 쳐다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강한서도 몸을 일으키고 나가려고 했다. 유현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여기서 저녁 먹을 거야?”당연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유현진은 자기 물건을 챙기고 그의 뒤를 따랐다. 민경하는 계속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이 차에 타자마자 바로 시동을 걸었다.남의 신세를 지면 맘 편히 지낼 수 없다고 방금 강한서가 뒤에서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유현진은 더 많은 돈을 잃었을 것이다.한창 이혼 소송을 준비하는 중이라 돈이 부족했고 그 9천만 원을 잃었다면 며칠 동안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돈을 다시 돌려받자 마음이 편안해졌고 강한서도 밉지 않았다.다른 건 몰라도 강한서는 원칙 있고 주위 사람을 보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말이다. 아무리 이혼할 사이라도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었다. 게다가 강씨 가문은 한주시에서 세력이 꽤나 큰 집안이니 앞으로 오고 가다 얼굴을 볼 수도 있기 마련이다. 돈과 권세를 가진 친구를 두면 언젠간 도움이 될 수 있다.유현진은 오늘 화투로 번 돈을 세고 정확히 절반으로 나눠 강한서한테 줬다.이윽고 강한서의 핸드폰이 울렸고 계좌에 1600만 원이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있는 여자를 봤다.그의 눈길에 유현진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감사하다는 뜻이야. 난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거든.”“됐어, 안 받아.”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돈 다시 돌려줄 테니까 내일 나랑 어디 좀 가자.”유현진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그냥 받아.”이혼할 마당
유현진은 ‘칫’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구두쇠 주제에 그녀가 돈에 눈이 멀었다고 했단 말인가?이때,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 차미주한테서 온 전화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 흐느껴 우는 차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진아, 어디 있어? 나 좀 도와줘. 나 지금 경찰서에 있어. 이 사람들이 날 절도 혐의로 여기에 끌고 왔어...”유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어느 경찰서야? 내가 지금 당장 갈게!”전화를 끊은 유현진은 염치 불구하고 강한서한테 부탁했다.“저기 나 좀 한암동 경찰서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친구가 지금 경찰서에 있대.”강한서는 아무 말도 없이 비서한테 경찰서로 향하라고 손짓했다.유현진은 차미주가 범죄에 연루되었을까 봐 가는 길 내내 조마조마했다.차가 경찰서 앞에 멈추자마자 그녀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경찰서에 들어가 개인정보를 제출하고 나서야 취조실에 있는 차미주와 만나게 되었다.차미주는 방금까지도 울었는지 눈이 팅팅 부어 있었다. 평소 패기가 넘치는 아이였지만 친구가 별로 없었고 경찰서는 처음 와봐 잔뜩 겁을 먹었다.유현진도 잔뜩 겁을 먹었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고 경찰한테 물었다.“제 친구가 뭘 잘못했나요?”경찰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봤다.“이분이랑 무슨 사이죠?”“제 친구입니다.”유현진이 신분증을 내밀며 말했다.경찰은 그녀의 정보를 기록한 후 말했다.“절도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그리고 이분 집에서 신고자의 물건을 발견했고요.”유현진은 바로 반박했다.“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지금 얘랑 같이 살고 있는데 단 한 번도 남의 물건을 본 적이 없어요. 오해가 있는 거 아니에요?”“같이 사는 분이세요? 얼마나 오랫동안 같이 살았죠?”“일주일 넘었어요.”이에 경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신고자의 물건도 분실된 지 일주일이 됐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거주하고 있다면 당신도 절도 혐의가 있는 겁니다. 공범일 수도 있죠.”경찰은 물증도 없이 추측만으로 그녀를 공범으로 몰고 갔다.유현진은 화를 꾹 참고 침착하
“경찰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신 신고자가 성은 강이고 이름은 한서죠!”경찰은 기이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끔 보았다.“아는 사람인가 보네요?”유현진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제 남편이에요!”“증거 있어요?”이런 것도 증거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녀의 남편을 그녀의 남편이라고 증명해야 된단 말인가?유현진은 처음으로 경찰과의 소통에서 장애를 느낀다고 생각하였고 더는 쓸데없는 얘기를 하지 않고 곧바로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가 통하자마자 쓰레기 같은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쓰레기 같은 것이 모른 척한다!유현진은 화를 참고 차갑게 말했다.“들어와서 경찰에게 상황 설명을 해.”강한서는 마치 그녀의 이 한마디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으며 유현진은 강한서가 일부러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확신했다.사실 유현진은 차미주에게 사고가 생긴 것을 듣고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으며 조금만 진정하고 생각해 봤다면 곧바로 단번에 알아차렸을 수 있을 것이다. 경찰서의 직책은 제한이 있다. 몇억이나 되는 절도 사건을 어떻게 마음대로 경찰서에서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강한서가 들어오자 유현진이 바로 그를 잡아당겼다.“경찰 선생님, 신고자는 이 사람이에요. 제 남편이에요.”강한서는 부정하지 않았고 경찰이 강한서를 힐끔 보더니 다시 유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분이 당신의 남편인데 왜 당신과 같이 안 살죠?”유현진은 말문이 막혔으며 강한서는 구경꾼 같았다.이내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당신에게 묻잖아.”유현진은 그를 노려보더니 한참 동안 머뭇거리고서야 말문을 열었다.“최근 조금 다퉈서 집에서 나와 친구와 살고 있어요. 반지는 제가 갖고 나온 것이고 제 친구는 도적이 아니에요.”경찰이 미간을 찌푸렸다.“두 사람이 다툰 건데 엉뚱한 사람을 신고한 거예요? 장난해요?”유현진은 머리를 숙인 채 꾸중을 들었고 마음속으로 강한서를 한바탕 욕했다. 경찰은 두 사람에게 깊은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유현진은 그보다 성격이 더 셌다.“그녀는 그냥 내가 당신에게 쫓겨났을 때 날 도왔을 뿐이잖아! 내가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우지 않아 당신의 심기를 건드린 거지?”“그렇게 생각해?”강한서는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 옆에 있던 서류봉투를 그녀에게 던졌다.“난 그 정도로 심심하지 않아!”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서류에 있던 내용을 살펴보자 순간 눈썹이 ‘ 팔’ 자로 되었다.몇십 장의 대화 내용과 인스타 캡처였고 매장마다 송민영에 관한 지라시였다.예를 들면 송민영이 추돌사고에서 연예인의 특권을 이용하여 구급차를 독점하였고 그 사고를 이용하여 스캔들을 조작하였으며 심지어 그녀가 유명해지기 전에 다른 사람의 정부 노릇을 하였고 그 사람의 결혼식에서 깽판을 쳤다는 내용이었다.이 일을 다루는 계정이 수십 개가 있었지만 IP는 전부 한 곳이었다.그리고 그곳은 유현진이 아주 익숙한 곳이며 차미주의 오피스텔이었다.그래서 그가 갖은 노력을 한 게 그의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손본 것이란 말인가?“이 계정들 눈에 익지?”강한서가 비아냥거렸다.“이런 유언비어를 올린 증거만으로 그녀를 몇년 동안 수감생활을 시킬 수 있어!”유현진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고 이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유언비어? 거짓을 유언비어라고 해. 여기에 있는 내용 중에 사실이 아닌 게 하나라도 있어? 그녀가 교통사고 때문에 고작 팔목을 조금 스쳤을 뿐인데 당신이 달려가 특급 병실에 입원시킨 게 거짓이야? 삼 년 전 당신이 나를 결혼식장에 버려두고 그녀에게 간 게 거짓이야?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얘기한 것만으로도 유언비어라고 하면 나는 감옥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 게 아니야?”강한서의 얼굴이 순간 차가워졌다.“당신이 나를 미행 안 했다고? 미행 안 했으면 어떻게 내가 그녀가 사고난 날 병원에 간걸 알고 있지?”유현진은 콧방귀를 뀌었다.“왜 당신을 미행하려고 병원에 간 거라고 생각해? 왜 치료를 받으러 간 거라고 생각 안해?”강한서
강한서가 비아냥거렸다.“그럼 당신이 유상수를 불러와. 그의 앞에서 이혼 얘기를 하지.”유현진은 순간 벙어리가 되었고 그를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강한서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우리가 이혼하기 전에는 조용히 아름드리에서 사는 게 좋을 거야. 그전에 이혼에 대한 얘기가 조금이라도 할머니의 귀에 들어가면 당신은 이번 생에 이혼은 꿈도 꾸지 마.”이것은 유현진의 명줄을 잡고 있는 것과 같다. 강한서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이 혼인에 잡혀살게 된다. 강 씨 가문은 지금 상속자를 다투는 시기이다. 만약 이 시기에 강한서의 이혼이 소문나면 할머니와 대주주들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얼마나 잔혹한 현실인가, 유현진은 순간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그녀는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침묵이 계속되자 분위기가 아주 삭막해졌으며 강한서가 겻눈질로 유현진을 힐끔 보았다.방금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대꾸를 하던 여자는 그 시각 영혼이 나간 것처럼 조용하다.그는 그녀의 조용한 모습이 적응이 안 되었고 조금 싫었다.“알았어, 당신을 도와 연기를 하지.”함참동안 침묵을 하던 유현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고 눈빛은 아주 강인하고 쌀쌀맞았다.“하지만 조건이 있어.”강한서는 턱을 치켜올리며 그녀에게 말하라고 했다.유현진이 말했다.“당신이 한성을 독차지한 뒤에 우리는 협의이혼을 해. 부동산과 차, 그리고 지분 모두 필요 없어. 나에게 2천억을 줘.”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조건을 걸라고 했지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라고는 안 했어.”유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강 대표님, 강성의 시가가 20조가 되는데 나한테 2천억을 달라는 게 과분하지 않잖아?”강한서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으며 마치 이 거래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 같았으며 고민을 하다 결국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알았어, 그 조건을 들어줄게.”유현진은 강한서가 이렇게 통쾌하게 대답할 줄 예상 못 했는지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차려 가방에서 볼
차는 빠르게 아름드리 펜션에 도착하였다.차를 세우자 유현진은 강한서에게 인사 한마디도 없이 곧바로 차에서 내려 문을 거세게 닫고 갔다.강한서는 창문으로 성격이 점점 세지는 여자를 힐끔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그것을 본 민경하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강 대표님, 분명 대표님이 송민영 씨의 고발장을 막았는데 왜 사모님에게 사실대로 얘기해 주지 않으셨어요?”강한서는 아주 화가 났다.“사실대로 얘기한다고? 그녀의 모습을 봐, 듣기나 하겠어?”민경하가 입을 다물고 마음속으로 대표님의 태도와 말투로 말하면 누가 화를 안 낼까라고 생각했다.예전에 여자는 겉과 속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순위로 따지자면 자신의 보스를 이길 사람이 없을 것이다.사모님이 자신의 아내를 불렀다는 얘기를 듣고는 겉으로는 그녀를 힘들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퇴근도 하기 전에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배즙까지 선물했다.길거리에서 파는 몇만 원짜리 물건인데 그럴싸한 핑곗거리도 찾을 줄 몰랐다.“그리고.”차에서 내리기 전 강한서가 갑자기 무엇인가 떠올랐다.“육교 추돌사고가 발생한 날 그녀가 병원에서 뭘 했는지 조사해 봐.”“알겠습니다.”강한서가 펜션으로 들어가자 가정부가 재빨리 옷을 받아들고 슬리퍼를 꺼냈다.“그녀는 어디 갔어요?”가정부가 말했다.“사모님은 도착하고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어요. 아무 말도 없었어요.”강한서는 위층을 힐끔 보고는 우아한 동작으로 넥타이를 풀며 담담하게 말했다.“먹을 것 좀 준비해줘요. 방을 정리하고 내려오라고 해요.”가정부가 흠칫했다.“오늘 사모님이 여기서 주무시는 거예요?”강한서가 그녀를 힐끔 보았다.“여긴 그녀의 집이기도 해요. 그녀가 여기서 자는 게 잘못된 일이에요?”가정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그 뜻이 아니라...”강한서가 손을 저었다.“빨리 방을 준비하고 음식을 여러 가지 해요.”한 시간 뒤.강한서는 한상 가득 차린 음식을 바라보며 위층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