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이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말 잘했네. 난 건강하니까 정상적인 남자랑 잤다면 분명 임신했을 거야. 약을 먹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말하다가 약을 강한서에게 쥐여주며 이어서 말했다.“너나 마셔!”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강한서는 손에 들린 탕약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정부가 서재에서 나오자 강한서 역시 집을 나가고 없었다.테이블에 놓인 빈 그릇을 본 가정부는 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호텔에 도착했을 때에는 약속했던 시간보다 몇 분 늦었다.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차미주가 유현진을 보자마자 낮은 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정말 너무들 하는군.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했으니 우리가 제일 빠른 줄 알았는데 꼴찌라니! 탑이 아닌 배우들은 정말 힘들겠어. 배역 하나를 위해 이토록 애써야 하니까 말이야.”유현진은 복도를 둘러보았다. 밖에는 30명 남짓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매니저와 함께 자리했고 어떤 연예인들은 매니저가 없이 혼자 온 사람도 있었다.강한서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그녀는 예쁜 외모 하나로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사실상 예쁘게 생긴 사람은 널렸고 미모는 어느새 가장 보통의 요건이 되었다.전문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반드시 자신의 업무 능력이 뛰어나야 했고 얼굴은 그저 금상첨화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이 사실에 직면한 유현진은 바짝 긴장했다.차미주가 그녀의 심경의 변화를 눈치채고 낮은 소리로 위로했다.“긴장할 것 없어. 캠퍼스에 늘 있었던 과제라고 생각해. 정상적으로 발휘만 잘 하면 문제없어. 복잡하게 생각 말고 준비한 것만 잘 보여줘. 그럼 반은 성공한 거야.”유현진은 긴장이 조금 풀려서 답했다.“최선을 다할게.”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다부진 체격의 여자가 서류를 들고 안에서 나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이름 부르는 대로 들어오세요. 대사를 외우는 시간과 연기를 하는 시간이 8분을 초과해서는 안 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난 이력서에 있는 이름 모두 호명했어요. 호명되지 않았다는 건 이력서가 제출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죠.”여자는 답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분명 관계자를 통해 이력서를 넣었다고요. 혹시 누락된 건 아닐까요? 언니, 다시 한번만 체크해 주면 안 돼요?”여자는 인상을 구기며 대꾸했다.“왜 이렇게 성가시게 굴어요? 없다니까요. 이력서가 몇 개나 된다고 내가 그걸 누락해요?”차미주가 얼른 웃으며 수습했다.“언니,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에겐 정말 중요한 오디션이거든요. 제발 우리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우리한테 오디션 볼 기회 좀 주세요. 시간 많이 안 뺏을게요.”“나한테 그럴 권리가 없어요. 배우는 이미 정해진 마당에 다른 오디션을 찾아보는 게 더 빠르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이력서가 어떻게 사라질 수 있지?”차미주는 씩씩거리며 부탁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유현진은 그녀의 곁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은 너무도 명확했다. 그녀의 이력서를 누군가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다.차이현의 작품은 원래 배우들 캐스팅 경쟁이 어마어마했는데 차미주가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이력서를 넣을 수 있다는 건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이력서를 바꿔치기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소속사가 없는 신인인 그녀로서는 이력서가 바뀌어도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전화를 끊은 차미주는 온갖 욕을 내뱉었다.한참을 욕하던 차미주는 죄책감이 들었다. 애초에 유현진을 향해 그토록 호언장담을 했는데 결국에는 이런 결말을 맞이하니 마음이 괴로웠다.“현진아, 미안해.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다른 배역 알아볼게...”“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는 정해진 건 없는 거지?”유현진의 던지듯 내뱉은 말에 차미주가 멈칫하며 물었다.“뭘 하려고 그래?”유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말했다.“시도는 해 봐야지. 만약 내가 쫓겨나면 너는 날 모르는 사람 취급하면 돼.”차미
“감독님! 제발 기회라도 주세요. 7분, 아니 5분이면 됩니다. 차이현 감독님!”양쪽 모두 물러날 기세가 없던 순간. 객실 문이 열리고 차이현이 안에서 몸을 반쯤 빼고 찡그린 표정으로 물었다.“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직원들이 설명하려고 할 때 유현진이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며 말했다.“감독님, 저는 오디션 17번 배우 유현진입니다. 저한테 오디션을 볼 기회를 주세요.”차이현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당신 이력서는 못 받았는데요.”“저는 유현진이고 25세입니다. 한성 대학 연영과 19기입니다.”“포트폴리오 있어요?”그녀의 물음에 유현진이 주먹을 꽈악 쥐며 낮은 소리로 답했다.“없어요.”“없다고요?”차이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졸업하고 취직했어요?”“아뇨...”유현진은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졸업하고 개인적인 일로 인해 줄곧 무직 상태로 있었어요. 캠퍼스 연극을 해본 게 다예요.”“그럼 연기 경력이 아예 없다는 거네요.”유현진은 침묵으로 답했다.“졸업하고 3년 동안 연기에는 손도 안 대고 있다가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는 이유가 뭐죠?”차이현과 같은 경험이 풍부한 감독 앞에서 감성팔이는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유현진은 솔직하게 답했다.“돈이 필요해서요.”차이현이 조금 놀란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유현진이 말을 이었다.“또한 저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커요. 감독님, 제발 한 번만 오디션을 볼 기회를 주세요. 캐릭터에게도 다시 배우를 선택할 기회를 주시고요.”차이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이는 어린데 배짱은 두둑하네. 연기 경험도 없으면서 어디에서 난 자신감이에요?”유현진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저는 감독님께서 배우를 고르실 때 아주 신중하다는 걸 믿을 뿐이에요.”차이현이 말하기도 전에 방 안에서 소음이 들렸고 이어 차이현은 방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다시 나왔다.차이현이 문을 닫는 찰나의 순간 유현진은 방안에 정장을 입고 있는 기다란 다리를 보았다.“그래요. 당신에게 기
차이현은 굳어진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 깨물고 유현진의 연기를 계속하여 보았다.유현진의 감정선은 섬세했고 분량이 많은 대사였지만 단 2분 만에 완벽하게 암기했다. 또한 훌륭한 대사 전달력은 전혀 연기 경험이 전무한 사람 같지 않았다.그녀의 연기가 끝날 때까지 현장에 있는 누구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비록 유현진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너무도 짧은 시간에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고 다만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차이현은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대신 곁에 있던 사람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고개를 들어 유현진을 향해 말했다.”하나만 더 해봐요.”유현진은 눈빛을 반짝였다. 아마 희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첫 번째 시도에서 이미 쫓겨났을 테니 말이다.다른 대사가 그녀의 손에 쥐여졌고 이번에는 방금 연기했던 배역이 아닌 드라마의 여자 3번이었는데 귀비 역할이었다.방금 나인과는 또 다른 성격의 캐릭터로서 귀비라는 고귀한 신분과 경국지색의 미모에 안하무인의 성격으로 왕의 총애를 잔뜩 받으며 궁궐에서 제멋대로 사는 여인이었는데 중전마저 그녀를 당해낼 수 없다는 설정이었다.여주인공을 모질게 대하는 분명한 악역이지만 왕의 앞에서는 애교 가득한 요물로서 캐릭터에 이중성이 잔뜩 묻어있기 때문에 만약 배우가 소화를 잘 한다면 아주 인기가 많은 캐릭터가 될 것이다.여자 3번은 이미 정해졌는데 차이현이 왜 자신에게 테스트를 시키는지 의아했지만 유현진은 입 밖에 내지 않고 묵묵히 대사를 외우다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시작하시죠.”차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쳐든 유현진의 눈빛은 도도하고 오만한 분위기를 풍겼다.그녀의 얼굴은 경국지색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경이로웠다. 모든 후궁들을 미모로 승부를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혹적인 자태에 애교가 섞인 말투는 왕은 물론이고 그녀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녀에게 홀렸을 것이다.두 번째 테스트가 끝나자 현장은 또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두 번의
유현진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나가서 얘기해.”차에 탄 후 그녀는 안에서 발생한 일을 모두 말했다. 이에 차미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대박! 차이현이 너더러 귀비 캐릭터를 테스트하라고 했단 말이야? 정말 귀비 연기를 시키려고 그러나 봐.”유현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몰라 나도. 이렇게 중요한 캐릭터를 어떻게 나한테 주겠어? 게다가 누가 연기할지 이미 정해졌다던데?”차미주는 차 문을 닫으며 말했다.“사실 그거 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이야. 진짜 누구로 정했는지는 아무도 몰라. 게다가 차이현은 신인도 꺼리지 않아.”유현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오히려 차미주가 자신만만하게 되물었다.“네가 연기를 마친 후 차이현 씨 아무 말 없었어?”유현진은 고개를 내저었다.“전화번호만 남기라고 했어. 임시방편으로 날 한번 테스트해본 것 같아.”차미주는 웃으며 말했다.“귀비 연기하면 너무 좋겠다. 물론 조연도 좋고. 이따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제대로 축하파티 해줄게.”유현진은 웃으며 답했다.“아직 정해진 거 아무것도 없어. 너무 빨리 축하해주는 거 아니야?”“그럼 이제 곧 결혼의 무덤에서 벗어나는 걸 축하해줄게. 어차피 다 기쁜 일이잖아.”동인동에 새로 선 고깃집이 하나 있는데 요즘 장사가 아주 잘 되는 듯싶었다. 인스타그램에서도 고기가 맛있다고 해시태그를 하는 걸 자주 봐왔었다.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이 꽉 차 있었고 입구엔 주차할 공간도 없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맞은편 백화점의 지하주차장에 주차했다.차미주는 3개월 전에 운전면허를 땄는데 자진해서 나서며 후진 스킬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에 유현진은 차에서 내려 그녀를 도와 장애물이 있는지 체크했다.바로 이때 유현진은 유상수가 한 젊은 여인과 함께 맞은 편에 세워진 흰색 아우디에서 내리는 걸 발견했다.그 여인은 중 단발에 제법 영하게 옷을 차려입었는데 가격대도 꽤 높아 보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유상수
그야말로 허울 좋은 말이었다.남들이 음탕한 생활을 즐기려고 애인을 만들 때 그는 식물인간이 된 아내 때문에 자신의 생리적 욕구를 채우지 못하여 마지못해 애인을 만나다니!이유만 바꾸면 아주 당연한 일이 되는 듯싶었다.인간은 동물도 아닌데 생리적 욕구가 웬 말인가?남자들은 불륜을 저지르면 다 이렇게 뻔뻔스러워지는 걸까? 모든 책임을 배우자한테 뒤집어씌운단 말인가?“네 엄마가 잘살아만 있다면 나 절대 딴 여자 안 만났을 거야. 우리가 어떻게 동고동락하며 회사를 세웠는데, 그런 감정은 아무나 대체할 수 없다고.”하현주가 사고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상수는 서둘러 이혼하겠다고 다그쳤었다. 유현진이 만약 이 일을 몰랐다면 지금 그의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유현진과 강한서의 결혼이 유씨 집안에 큰 도움이 되었기에 유상수는 비로소 이혼 생각을 접고 하현주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딸아이를 견제했다.유현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그 여잔 이름이 뭐예요?”유상수는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걸 네가 알아서 뭐해? 네가 싫으면 앞으로 안 만나면 되잖아.”유상수는 이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아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전에 보내라고 한 물건은 다 보냈어?”유현진은 입술을 앙다물며 대답했다.“네.”“한서랑 함께 나온 거야?”“아니요, 친구랑 왔어요.”유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결혼한 여자가 종일 노는 것에만 정신 팔지 말고 어떻게 하면 한서 마음을 잘 사로잡을지나 연구하란 말이야. 결혼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애가 없어. 강씨 가문에서 퍽이나 널 예뻐하겠다.”그의 말을 들은 유현진은 헛구역질이 났다. 글자마다 그녀에게 이 결혼의 본질을 일깨워 주는데 그녀와 강한서는 애초에 평등한 사이가 아니었다. 남편의 비위를 잘 맞추어 유씨 가문을 지켜주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임무였다.이토록 의도성이 강한 결혼인데 강한서가 어찌 그녀를 존중해줄 수 있겠는가?유상수가 계속 말을 이어가려 할 때 휴대폰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전화를
“그럼 일단 밥부터 먹으면서 생각해.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흥신소를 찾아서 너희 엄마를 위해 복수하자!”유현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현주가 의식만 있었으면 아마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끝장을 봤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절대 용서치 않는 여자니까.한편 유현진은 일을 그 지경까지 크게 번지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그렇게 눈익은지 알아내고 싶을 뿐이었다.다음날 유현진이 꿈속에서 헤맬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비몽사몽 하여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현진아, 아직 안 일어났어?”낮고 침착한 여자의 목소리에 유현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지막이 말했다.“어머님, 무슨 일이세요?”신미정이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오늘 친구 몇 명이 집에 놀러 오기로 했는데 네가 와서 좀 반겨주렴.”유현진은 너무 가기 싫었다. 신미정의 친구들은 전부 재벌집 사모님들이라 그녀가 상대하기엔 너무 버거웠다.하여 그녀는 조심스럽게 거절 의사를 표했다.“아가씨 집에 있잖아요? 아가씨가 저보다 그 사모님들과 더 잘 소통해요.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분위기만 어색해질 것 같아요.”“민서는 친구들과 함께 놀러 나갔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널 부르겠니. 너 이후에 한서랑 함께 나가면 소통을 해야 할 장소가 꽤 많아질 거야. 그때마다 매번 피할 생각이니? 소문이라도 새어나가면 우리 한주 강씨 가문의 며느리가 얼마나 뒤처지는 줄 알겠어.”유현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정리 다 하거든 일찍 와.”말을 마친 신미정은 전화를 툭 끊었다.유현진은 마지못해 물건을 정리하고 신미정의 집으로 향했다.신미정은 젊을 때 한주시의 상류층 여인이었다. 한주 강씨 가문으로 시집온 후 가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녀도 사모님들 사이에서 지위가 점점 높아졌다. 한주 강씨 가문과 일적으로 왕래가 있는 사모님들을 자주 불러 모임을 갖곤 했는데 일상 소통을 한다기보단 서로 정
“이 사모님,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진 사모님이 그녀에게 눈치를 줬다. 유현진이 아무리 못나도 어쨌거나 신미정의 며느리이기에 평소 몇 마디 놀려대는 건 괜찮지만 지나치게 헐뜯는 건 다소 부적절했다.다만 이 사모님은 진 사모님이 믿지 못하는 줄로 착각했다.“함부로 한 말 아니에요. 내 조카가 그해 교통관리센터에서 일했는데 마침 그 사건을 조사하면서 얘기한 거예요. 차가 훼손이 워낙 심하여 두 사람 다 살아남지 못했을 텐데 구조할 때 보니 저 아이 엄마만 심하게 다치고 저 아이는 찰과상만 입었다니까요.”“애가 팔자가 너무 세요. 여자가 팔자가 세면 남편과 자식이 일찍 죽는다던데...”“이 사모님!”신미정의 표정이 언짢아지자 진 사모님이 탁자 밑에서 발로 그녀를 걷어찼다.이 사모님은 그제야 자신이 무심결에 신미정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알아챘다.신미정이 바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는데 그런 그녀 앞에서 남편과 아이가 빨리 죽는다는 둥 입을 나불거리고 있으니 누가 봐도 그녀를 겨냥한 말이었다.이 사모님은 당황해하며 횡설수설 변명했다.“강 사모님, 그러니까... 그 뜻이 아니라...”신미정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무슨 뜻인데요?”이 사모님은 손이 벌벌 떨리고 말까지 더듬었다.이때 백 사모님이 웃으며 말했다.“미정 씨 화내지 마세요. 이 사모님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예요. 이분이 어떤 사람인지 미정 씨도 잘 알잖아요.”신미정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이 나이가 되도록 계속 단순한 것도 이 회장님의 복인 것 같아요.”이 사모님은 야유에 찬 그녀의 말을 바로 알아채고는 표정이 굳어버렸지만 감히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신미정은 오늘 백 사모님만 초대했고 남은 두 명은 그저 들러리일 뿐인데 다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 사모님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신미정이 당장에서 버럭 화내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했다.유현진은 복도 모퉁이에 서서 사모님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한가하게 체리를 먹었다.
심원과 강한서 모두 매혹적인 봉황 눈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강한서의 눈은 일자로 뻗어나간 형태였고 심원의 눈은 위로 살짝 치켜올라간 모양이었다. 웃으면 살짝 올라가는 눈꼬리는 귀티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멈칫한 전연이 심원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가요.”전연을 태운 심원의 차가 이모네 국수를 향해 출발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린 탓인지 심원은 전연과 조잘조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심원은 자신과 비슷한 입맛과 취향을 가진 전연이 신기하기만 했다.그 탓인지 어떤 주제든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단순히 맞장구를 치기 위한 기계적인 리액션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야 전연을 만나게 되어 아쉽다는 생각이 든 심원이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다. “만약 우리가 더 일찍 만났다면 분명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예요.”전연이 미소 지었다. “저는 지금도 늦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그 말에 대답하려던 심원은 연신 하품을 하는 전연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잠깐 눈 좀 붙여요. 아직 조금 더 가야 해요. 도착하면 깨울게요.”“네.”대답한 전연이 졸음이 가득한 눈을 감았다. 이모네 국수 앞에 도착했지만 전연은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전연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심원은 전연을 깨우지 않았다. 차의 시동도 끄지 않고 에어컨도 그대로 틀어놓은 채 안전벨트를 푼 심원이 조용히 차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가 미리 주문을 했다. 심원이 차에서 내리자 전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맑게 빛나는 눈빛은 졸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연이 휴대폰을 꺼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순조롭게 진행 중.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것 같아.]곧 한성우가 답장했다. [이렇게 빨리?]전연: [상대하기 힘든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내 사진을 보고는 바로 발끈하던데?]한성우가 역시 대단하다는 의미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지금 어디야?]전연: [미래의 남편과 밥 먹으러 왔어. 우리도 서로 알아가야지.]한성우: [얼
전연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만약 제가 심원 씨가 좋아하시는 분과 사귈 수 있게 도와드린다면요?”심원은 그저 전연이 농담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연의 표정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녀는 심원을 도와줄 테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했다. 심원은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친화력이 좋은 전연은 사람의 이야기를 잘 끌어내는 매력이 있었다. 심원은 저도 모르는 사이 전연에게 송가람과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전연은 매일 같이 심원과 약속을 잡았다. 가끔은 공원에서 또 가끔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매번 송가람이었다. 신원은 자신과 송가람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전연에게 들려주었다. 전연은 심원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와 송가람을 이어줄 방법을 고민했다. 심원의 여자친구인 척 하게 된 것도 전연이 송가람을 자극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송가람은 전연이 예측했던 것처럼 먼저 심원에게 연락했다. 전연의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 제가 다시 연락을 해야 해요? 아니면 또 인스타그램에 우리 사진을 올려서 질투를 유발할까요?”전연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금 전 송가람 씨 연락은 안 받으면서 바로 우리 사진을 올려버리면 그분도 자기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올린 사진이구나, 하고 눈치 챌 텐데 그럼 오빠가 저랑 사귀고 있다는 것도 안 믿을 거예요.”“콜백도 안 되고 사진도 안 되면 전 뭘 어떡해요?”전연이 웃으며 말했다. “콜백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빨리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생각해봐요. 전에 오빠가 먼저 연락했을 땐 매번 시간이 잔뜩 지나서야 다시 연락이 왔잖아요. 그럼 오빠는 답장을 기다리느라 속이 바짝 탔었죠?”심원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당연히 알죠. 그건 우리 여...”큼, 헛기침한 전연이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우리 여자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내 말 듣고 있어?”대답이 없는 송가람을 본 서해금이 언성을 높였다. 송가람이 재빨리 대답했다. “듣고 있어. 알았어.”창백해진 얼굴의 서해금을 본 송가람은 순간 한 가지 추측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고민도 없이 툭 던지듯 물었다. “엄마, 한현진이 바뀐 거 우연한 사고 맞아?”멈칫한 서해금이 송가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 정말 그렇게 많은 우연이 있다고 생각해?”송가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얼굴로 서해금을 바라보던 송가람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서해금이 정리를 마친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송가람 앞으로 걸어간 서해금이 시선을 내려 송가람의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어떤 사람의 운명은 타고나는 거지만 또 어떤 사람은 본인이 직접 개척해 나가야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애를 쓴 건 넌 나처럼 피땀 흘리며 살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에 안주하면 안 돼. 내 말 알아들어?”송가람은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시선을 내린 그녀는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송가람은 줄곧 한현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동안 누린 관심과 행복은 전부 한현진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만약 한현진이 바뀌지 않았다면 서해금이 송병천과 결혼하고 송가람이 송병천의 딸로 살 기회가 있었을까?그 질문의 정답을 송가람은 마주할 자신도, 인정할 자신도 없었다. 한편, 전연이 전화를 끊자 더는 참을 수 없던 심원이 말했다. “휴대폰 이리 줘요. 가람이에게 전화해야겠어요.”전연이 심원의 손을 피하며 휴대폰을 뺏기려 하지 않았다. “안 돼요. 아직은 전화하면 안 돼요.”심원이 다급하게 얘기했다. “조금 이따 다시 전화하라면서요. 왜 지금은 또 안 된다는 거예요?”“콜백을 하긴 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금방 전화를 끊었는데 바로 다시 전화하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심원이 모르겠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생각하는데요?”전연이 말했
서해금은 첫 번째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한현진이라면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강한서의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에게 아이는 강한서를 잡는 패가 될 수는 있어도 자신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양시은 딸의 결혼식장에서 신미정의 계략으로 넘어진 한현진을 바짝 긴장한 채 안고 가는 강한서의 모습은 한현진의 임신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모두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유독 송가람과 서해금에게만 쉬쉬거렸다. 숨기는 이유가 어쩌면 한아람 죽음에 관한 의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해금은 불안해졌다. 당시 그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더는 증인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서해금의 불안을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한현진이 돌아온 그 순간부터 서해금은 단 하루도 깊은 잠에 빠질 수가 없었다. 창백한 얼굴의 송가람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한서 오빠가 기억 잃은 척 연기할 리가 없어. 한현진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해.”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한서가 정말 기억 상실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확신해?”“만약 기억을 잃은게 아니라면 오빠가 어떻게 날...”순간 멈칫한 송가람이 입술을 꾹 누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무튼 오빠는 기억을 잃은게 확실해.”이상함을 감지한 서해금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 강한서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아냐. 난 아무것도 안 했어.”송가람이 서해금의 눈빛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오빠 기억 회복을 도와주려고 제일 유명한 신경외과 교수님을 모셨었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 날 속일 수는 있어도 의사를 속일 수는 없을 거잖아.”한참동안 서해금은 송가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자신은 서해금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짙게 난 손톱자국의 통증을 용기 삼아 송가
서해금이 개의치 않다는 듯 말했다. “어쩌다 한 번, 행운이 따랐던 것뿐이야. 한현진은 아직 우리에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야. 너야말로 계속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말거 문채영 씨 옆에서 제대로 배워. 두 번 다신 실망시키지 마.”서해금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한 송가람의 머릿속은 여전히 심원의 일로 가득 했다. “그, 새로 오신 기사님은 어때?”서해금이 슬그머니 물었다. “마음에 잘 맞아?”잔소리가 많던 중년의 남자를 떠올린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그래. 말이 좀 많은 것 같아. 계속 이것저것 물어서 귀찮아 죽겠어. 하지만 운전 실력은 좋은 것 같아.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해. 강아지처럼 말을 잘 들어.”그 말에 멈칫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송가람,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말 기억해?”움찔한 송가람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기억해.”서해금이 서류를 정리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말해봐.”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신분이 낮을 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고 내가 높은 자리에 있을 땐 상대방을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서해금이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넌 그 말을 지키고 있어?”아랫입술을 깨문 송가람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잘못했어.”“다신 잘못했다는 말 듣게 하지마.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게 그 말이야. 잘못했다고 말만하면 뭐 해! 달라지질 않는데! 송가람. 엄마 이젠 젊지 않아. 평생 네 곁을 지킬 수 없어. 어떤 일은 너도 이젠 혼자 해내야지.”고개를 숙인 송가람은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불쌍한 송가람의 모습에 서해금은 안쓰러우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없어 안쓰러웠고 자신의 좋은 유전자 대신 멍청힌 아빠를 닮은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송가람은 심지어 그녀의 아빠만큼 성실하지도 않았다. 만약 송병천과 아들딸이라도 낳을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상황에 끌
전연은 비꼬는 송가람의 말투를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저와 원이 오빠가 사귀기로 한지 며칠밖에 되지 않아서요. 오빠가 쑥스러움이 많고 내향적이라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아직 얘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원이 오빠와 많이 친하신 것 같은데 오빠에게서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오빠 동창이세요?”송가람은 더 이상 웃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맞다는 대답도, 아니라는 대답도 할 수 없어 그녀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나랑 심원이 무슨 사이인지는 심원에게 직접 물어요!”전연이 말했다.“오빠랑 가까운 사이 같으신데 제가 언니 카톡 추가해도 될까요? 친한 사이면 원이 오빠 취향을 잘 아실 거잖아요. 곧 오빠 생일이라 선물을 준비하고 싶은데 제가 아는 오빠 친구가 없어서요. 오빠에게 직접 물어보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요.”“언니가 알려주실래요?”송가람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네까짓 게 뭔데.’하지만 자신이 고생해 길들은 강아지가 자신 몰래 여자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송가람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대답했다. “그래요. 연락처 저장해서 추가해요.”전연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언니.”해맑게 불린 언니라는 호칭에 송가람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전연이 곧 송가람에게 친구 추가를 신청했다. 전연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조금 전 심원의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사진이었다. 수락을 누른 송가람은 곧 전연의 인스타그램을 찾아냈다. 전연이 기본 그리드에 고정한 피드는 바로 심원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나도 드디어 달달한 연애 시작이다~]분노로 얼룩진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주현이 다시금 커피를 건네자 송가람은 탁, 커피를 쳐냈다. 뜨거운 커피가 주현의 몸에 흘러내렸고 그 고통에 주현이 비명을 질렀다. “팀장님?”송가람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물건을 쓸어버리며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꺼져! 당장 꺼지라고!”마침 송가람 사무실로 들어서며
멈칫한 한현진이 시선을 올려 은서하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 남았어요?”고개를 가로 저은 은서하가 서류철은 안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책상에 놓인 유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한현진이 주세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현이 문을 열고 송가람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서류가 여기저기로 널브러져 엉망진창인 모습이 주현의 눈에 들어왔다. 커피를 손에 든 주현은 뒤뚱거리며 서류를 피해 송가람 앞으로 다가갔다. 커피를 건넨 주현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여기 커피요.”송가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채팅방에서는 심원의 새로운 여자친구에 관해 얘기 중이었다. SNS는 하지도 않던 조용한 심원이 인스타그램에 여자친구와의 사진을 업로드 했다. 송가람의 친구들이 그 사진을 채팅방에 올리며 수다를 떨었다. [낯익은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도 아는 사람 맞아? 처음 보는 사람 같아.][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꽤 예쁘장하게 생겼는데?][우리가 알만 한 사람은 아닐 거야. 심 대표님께서 아드님에게 찾아준 맞선 대상이 명문가 딸은 아니라고 들었어. 심원 씨가 외동이라 괜히 재벌가와 사돈을 맺었다가 대가 끊기게 될까 봐 컨트롤이 가능한 평범한 가정의 딸을 소개했다고 하던데.][그러니까 우리가 몰랐던 거겠지.][심 대표님과는 안 그래도 인연이 없었으니 몰랐던 것도 당연한 거지, 뭐. 가람이가 심원 씨와 동창에다 사이도 좋았잖아. 어쩌면 가람이는 심원 씨 여자친구가 누군지 알지도 몰라.”송가람이 심원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했다. 심원과 그 여자의 사진이 버젓이 업로드 되어 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한 손에 밀크티를 쥐고 있었다. 셔츠를 입고 포니테일을 한 채 카메라를 향해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아래 부분에서 뻗어 나온 누군가의 손이 여자의 다른 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남자친구의 시야에서 손을 맞잡은 여자친구의 모습
이어질 다음 경기는 조별 리그였다. 조향 대회의 조별 리그는 팀워크가 중요했다. 자유롭게 팀을 구성할 수 있었고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채택할 수도 있었다. 송가람은 당연히 문채영과 팀을 하려 했다. 문채영의 실력을 등에 업는다면 송가람은 무난히 다음 라운드로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한현진이 걱정되는 건 주세은이었다. 회의 전 한현진은 주세은에게 누구와 팀을 짤 것이 물었었다. 주세은은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뽑은 사람과 하겠다고 대답했다.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선정한 팀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안 맞는 사람과 팀이 되었다간 협력은커녕 오히려 팀원이 주세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잘못하다간 바로 탈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참가자 명단을 훑어보던 한현진은 어쩌면 이시연과 주세인이 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시연은 회사 내의 다른 참가자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만약 이시연이 이미 파트너를 정했다면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서로가 난감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다른 참가자의 이름을 확인한 한현진은 비교적 침착한 성격의 참가자 두 명의 이름에 동그라미 표식을 해두었다. 조금 이따 물어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이시연이 자몽 두 개를 들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대표님, 바쁘세요?”한현진이 서류철을 덮으며 대답했다. “아뇨. 무슨 일이에요?”이시연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자몽을 한현진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저 대신 주세은 씨에게 저와 팀을 하면 어떨지 물어봐 주시겠어요?”한현진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시연 씨와 팀을 하겠다는 분이 없어요?”이시연이 난감함 표정을 지었다. “있긴 한데 제가 거절했어요. 전 주세은 씨와 팀을 하고 싶거든요. 전에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했을 때, 사실 저 깜짝 놀랐어요. 이번엔 예선에서도 바로 TOP 10에 들었잖아요.”“저와 성적이 비슷하니까 같이 힘을 합쳐서 포인
직원들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대회를 앞둔 시점에 갑자기 문채영을 스카우트해 송가람과 팀을 맺어준 목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참가자를 응원하기 위한 보너스라고 얘기했지만 상금의 80%는 우승자를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 20%의 상금도 TOP 10에 들어야만 일 인당 4000만 원씩 받을 수 있었다. 난이도가 극상에 가까운 미션에 성공해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국은 그저 겉모습만 화려한 보여주기식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한현진의 제안대로라면 20위 안에만 들어도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 송가람을 보너스 지급 대상에서도 제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참가자들이 보너스를 받을 기회는 자연히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6억의 우승 보너스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금이 높아지면 그만큼 도전하는 사람도 많아질 테고 송가람까지 제외된 상황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은 도전 의식을 불태워볼 만했다. 각자의 생각을 가진 참가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굳이 투표를 진행하지 않아도 서해금은 이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올려 한현진을 바라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투표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저도 한 대표 제안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럼 한 대표 제안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다들 원하는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애쓰길 바라요. 대회가 끝나면 제가 직접 파티를 열어 여러분께 보너스를 지급할 거예요.”서해금과 눈을 마주친 한현진이 그녀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럼 미리 여러분의 승리를 기원할게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회의실에 있던 참가자들도 하나둘 그녀를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에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분노로 들끓은 송가람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막 문을 열고 회의실을 나서던 송가람은 서류 심부름을 하러 온 비서와 부딪혔다. 서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