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석의 질문에 언짢아진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러면 뭐? 이렇게 나에게 질척거리는 거, 강한서 대신이라도 되어주려고 이러는 거야?”정명석이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내가 미쳤어?”“미친 게 아닌데 왜 따라다녀?”“...”정명석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난... 난 그저 네 꼴 좀 보려고 그런다, 왜?”정명석은 그럴싸한 핑곗거리를 찾았다. “그때는 네가 날 차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널 차버렸으니 역시 인생은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 아니겠어?”한현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정명석은 그제야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발견하고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참, 네가 정 강한서가 보고 싶으면 나에게 사정 해봐. 내가 큰마음 먹고 강한서인 척해줄 테니까.”한현진이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됐어. 사정 안 해도 돼. 나에게 그때 날 차는 게 아니었다고 사과만 하면 돼.”앞에 보이는 길에 고인 물을 빤히 쳐다보던 한현진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여기 와 봐.”한현진이 굴복한 줄 안 정명석은 옷매무시를 정돈하고는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애초부터 태도가 좋았으면 내가 굳이 네 탓을 했— 젠장.”정명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현진은 그를 인행도로 아래로 밀어버렸다. 마침 차 한 대가 물웅덩이를 지나쳤고 뛰어오른 물방울은 그대로 정명석의 얼굴을 적셨다 그의 새햐안 옷은 흙탕물이 튀어 물에 젖은 걸레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정명석이 막 화를 내려는데 웃고 있는 한현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정명석은 멈칫하고 말았다. 불쾌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정명석도 한현진을 따라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몇 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이렇게 유치하네.”웃음을 거둔 한현진이 표정 관리를 했다. 정명석은 다시 한현진 앞에 다가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너 그때 왜 나와 헤어지려 했던 거야?”한현진이 정명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네 아버지께서 찾아오셨었어.”
정명석의 그 말은 헛소리 같았지만 한현진은 그 말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현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티가 나도록 변했다. 정명석은 뚫어버릴 듯 쳐다보는 한현진의 눈빛에 불편해졌다. 그는 자기 속셈을 들킨 줄 알고 감히 한현진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린 정명석이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생각해 봐. 내가... 그때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정명석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이 이미 택시에 탄 후였다. 상황 파악을 끝낸 정명석이 쫓아갔지만 한현진은 이미 차 문을 닫았고 택시는 쌩하니 가버렸다. 정명석의 입술이 분노로 씰룩였다. 그는 이를 갈며 욕을 지껄였다. “양심 없는 X.”한현진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9시였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송병천은 송민준과 함께 사람을 데리고 한현진을 찾으러 가려 했다. 집으로 돌아온 한현진에게서 술 냄새가 나자, 송병천과 송민준은 부자는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한현진은 태연했고 오히려 송병천에게 물었다. “아빠, 가람 언니 돌아왔어요?”“왔어. 밥 먹고 방에 들어갔어. 가람이에게 볼 일 있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 언니와 친구분 데리고 놀러 가기로 약속했거든요. 내일 언제 출발할지 물어보려고요.”송병천과 송민준이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지금 한현진의 상태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나쁘다고 하기엔 난리를 치지도 않았고 제때 잠을 자고 때맞춰 밥을 먹었다. 그러나 좋다고 하기엔 확실히 너무 빨리 괜찮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고작 얼마 전만 해도 실종되기도 했으니까. 이상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전보단 나아 보였다. 송병천과 송민준이 입을 열기 전에 송가람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9시에 나가요. 만약 너무 이른 것 같으면 10시도 괜찮아요. 애들에게 얘기하면 돼요.”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9시로 해요.”두 사람이 약속을 잡는 모습을 본 송병천이 말했다.
송가람이 한현진 남매에게 말했다. “오빠, 현진 씨. 여기서 호텔은 가까우니까 제가 데리고 걸어갈게요. 조금 쉬다가 호텔 근처 야시장 구경하면 돼요.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일찍 집에 들어가 쉬어요.”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래요. 저도 마침 친구와 헤어샵에 가기로 했거든요.”레스토랑에서 나온 한현진은 친구가 데리러 온다는 핑계로 송민준을 쫓아보냈다. 송민준이 떠나고 얼마 후 하얀색 아우디가 한현진 눈앞에 멈춰 섰다. 한현진이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바로 한현진의 절친인 차미주였다. 차미주는 검정색 티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고 심지어 마스크까지 검정색이었다. 그녀의 올블랙 착장에 놀란 한현진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왜 이렇게 입었어?”“무협 영화 안 봤어? 저녁에 뭔가 일을 꾸밀 때는 이렇게 입어줘야 한다고. 그래야 눈에 안 띄지.”한현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고대에는 불빛이 없으니까 이렇게 입으면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발견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어디를 가든 불빛이 있잖아. 이렇게 관종처럼 입으면 누가 못 봐?”“...”차미주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러네.”차미주는 말하며 뒷좌석에서 남자 외투를 걸쳤다. “이러면 좀 괜찮아?”“...”한현진이 뭔가를 얘기하려는데 차미주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손가락 나왔어.”한현진이 얼른 차미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송가람과 친구들은 함께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입구에서 잠시 대화를 나눈 후 그 사람들을 그곳을 떠났고 송가람은 잠시 기다리더니 택시에 올라탔다. 차미주가 이내 시동을 걸어 택시 뒤를 따랐다. 송가람을 태운 택시는 한참을 달려 한 요양원 근처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송가람이 요양원으로 곧장 들어갔다. 주차할 곳을 찾는 차미주는 기다릴 새도 없이, 한현진은 먼저 차에서 내려 송가람을 뒤쫓았다. 송가람은 익숙한 곳인 듯 들어오자마자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향했다. 한현진은 옆에 놓인 표
한현진은 옷을 꽉 움켜쥐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옷을 한참이나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하자 간병인이 한현진을 불렀다. 번쩍 정신이 든 한현진이 손을 놓으며 쉰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간병인은 한현진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얼른 세탁물을 가져다줘야 했기에 별 다른 생각 없이 옷을 안고 자리를 벗어났다. 가방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를 받은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12층이야. 올라와.”차미주가 곧 12층으로 올라왔다. 그러자 한현진은 차미주에게 방금 발견한 일을 말하자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대로 본 거 맞아?”한현진이 조금 흥분하며 말했다. “미주야, 그 옷은 강한서가 입던 옷과 사이즈가 같아. 똑같이 등 쪽 상처로 피가 스며있었고. 난 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아. 난 어쩐지 강한서가 이곳에 있는 것 같아. 느껴져.”차미주는 늘 한현진의 편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된다고 여겨지는 이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러면 우리 들어가서 손가락이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봐.”한현진은 진작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송가람이 나오면 그때 들어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강한서가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한현진은 단 일초도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차미주는 기세등등하게 한현진을 끌고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의 침대는 비어있었고 창가에 서 있던 송가람은 소리를 듣고 몸을 돌리더니 곧 멈칫 행동을 멈추었다. “현진 씨, 여긴 어떻게?”한혀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차미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강한서는요? 강한서 어디에 숨겼어요?”“내가 무슨 한서 오빠를 숨겨요?”송가람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모른 척 하지 말아요. 아픈 것도, 사고가 난 것도 아니면서 이 저녁에 병원엔 왜 왔어요? 그것도 몰래 사람 눈 피해 가면서요.”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전 병원에 제 선생님 병문안 온 거예요. 나
자리에 앉아있던 송가람의 선생님은 그 상황을 보더니 얼른 싸움을 말리려 했다. 그러다 어떻게 된 일인지 휠체어에서 미끄러졌고 마침 송가람의 종아리에 부딪혔다. 순간 중심을 잃은 송가람은 휘청이다 바닥에 넘어졌다. 그 휠체어도 위태위태 당장 넘어질 것 같았다. 문어구에 도착한 송민준은 바로 그 장면을 목격했다. 그와 함께 들어온 여자가 깜짝 놀라며 얼른 달려가 휠체어를 잡았다. 그 여자는 한현진을 향해 화를 쏟아냈다. “왜 사람을 밀고 그래요?”차미주가 얼른 말했다. “대체 어느 눈으로 현진이가 미는 걸 봤다는 거예요? 분명 저 할아버지가 본인이 미끄러져서 송가람 씨와 부딪힌 건데.”“당신들은 누구예요? 아무 이유 없이 제 할아버지 병실에 들이닥쳐서는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송민준이 얼른 앞으로 나와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긴 제 여동생인 한현진입니다. 아마 가람이에게 볼 일이 좀 있는 것 같아요.”그는 말하며 송가람을 부축하더니 한현진은 한쪽으로 끌어와 속삭였다. “나가서 얘기해.”그러나 한현진은 송민준의 손을 뿌리치며 나가기를 거부했다. 한현진이 말했다. “오빠, 강한서가 여기 있어요.”송민준이 움찔 행동을 굳혔다. “뭐?”“강한서가 여기 있다고요.”한현진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오빠. 강한서 아직 살아있어요. 강한서가 이 병원에 있다고요.”송민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아, 힘들지?”“오빠. 틀림없어요. 강한서 정말 여기 있어요. 저 강한서 필적을 봤다고요.”말하며 한현진은 송민준을 그 화이트보드 앞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오른쪽 하단을 가리켰다. “오빠. 이거 봐요. 이거— 글 어디 갔어?”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 화이트보드 오른쪽 하단에 있던 흐릿한 글씨체가 이젠 자취를 감추었다. 순간 흥분한 한현진이 눈을 붉히며 송가람에게 따졌다. “가람 씨가 지웠어요?”송가람은 두려움에 떠는 척 불쌍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전 모르는 일이에요.”한현진이 송민준의 팔을 잡아당겼다.
한현진의 문자에 차미주는 놀라고 말았다. 이미 한 번 찾아봤으니 차미주는 한현진이 이젠 포기할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차미주는 어쩐지 오늘 일어난 일들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참지 못하고 한성우에게 얘기했다. “현진이가 본 글씨와 피 묻은 옷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떠나서, 민준 오빠가 그렇게 마침 그 타이밍에 나타난 것도 조금 이상해. 안 그래?”“내 생각을 묻는 거야?”한성우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난 형수님이 한서를 송가람 씨가 숨기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발생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라 생각해. 만약 한서가 살아있으면 우리에게 연락 안 했겠어? 송가람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살아있는 사람을 무슨 수로 막아둬?”차미주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말도 맞아. 하지만 난 송가람이 좋은 사람 같지 않아. 친구와 놀러 간다고 했으면서 병원으로 간 건 대체 뭐야?”“갑자기 전화 받고 갔을 가능성은 없는 거야?”말문이 막힌 차미주가 불퉁하게 말했다. “넌 대체 왜 자꾸 손가락 편을 들어?”“편을 드는 게 아니라 난 그저 형수님이 너무 슬픔에 빠져서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 환상을 한 거라고 생각해. 넌 형수님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도와야지, 같이 미쳐 날뛰지 말고.”말하며 한성우는 사과를 차미주 입가에 가져갔다. “달아, 먹어 봐.”차미주가 인상을 쓰무 한성우가 건네는 사과를 밀어냈다. “같이 미쳐 날뛴다니? 난 무조건 내 절친을 지지하겠다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뿐이야. 정말 현진의 억측이라고 해도 현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함께 할 거야.”“난 의리밖에 모르는 여장부 같은 네 모습이 좋다니까.”한성우는 말하며 차미주 앞으로 다가갔다. “친구만 도와주지 말고 네 남자친구도 좀 도와줘.”차미주는 한성우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널 도울게 뭐가 있어?”“한서 사고로 우리 부모님께서 생각이 많으신가 봐. 요즘 또 맞선을 주선하시기 시작했어.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니까 집에
이해가 된 주강운은 이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배우고 싶으시면 당연히 가능하죠. 하지만 스카이다이빙 자격증은 그렇게 쉽게 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먼저 체험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한현진이 곧이어 물었다. “언제요?”주강운이 반문했다. “언제 체험해 보고 싶어요?”한현진이 말했다. “내일요.”“내일요?”“시간 안 돼요?”주강운은 옆에 놓은 서류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술을 짓이겼다. “돼요. 그러면 제가 내일 데리러 갈게요.”“그래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요.”“일찍 자요. 내일 제가 전화드릴게요.”주강운은 다정하게 한현진과 인사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곧장 몸을 일으켜 옷장을 열고 안에서 옷을 꺼냈다. 준비를 마치고 내려오자 주강운의 어머니가 마침 컵을 들고 올라가고 있었다. 늦은 저녁에 차려입고 집을 나서는 아들을 보더니 다급하게 주강운을 불러세웠다. “강운아, 이렇게 늦었는데 어디 가는 거니?”주강운이 신을 갈아신으며 대답했다. “회사에 물건을 놓고 와서요. 가지러 가요.”“무슨 물건이길래 꼭 이 밤에 가야 해?”“의뢰인 물건이라서요.”주강운이 외투를 걸치며 말을 이었다. “금방 돌아올게요.”곧이어 주강운의 어머니가 “기사님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라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주강운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주강운의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쩐지 주강운이 조금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집을 나선 주강운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돌아왔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또 집을 나섰다. 그는 8시에 송씨 본가 근처에 도착해 한현진에게 전화했다. 한현진은 금방 깬 듯 목소리가 조금 쉬어있는 것 같았다. 한현진이 말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요.”주강운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천천히 준비해요. 급해하지 않아도 돼요.”전화를 끊은 주강운은 어쩐지 조금 긴장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손을 뻗어 차광판을 내
주강운이 의아해했다. “사진이요?”“네.”한현진이 대답했다. “스카이다이빙은 처음이라 기념하고 싶어서요.”주강운이 말했다. “액션캠은 가져오지 못했어요.”“그냥 내리기 전에 몇 장 찍으면 돼요. 가능할까요?”주강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찍고 싶으면 찍어요. 전 그냥 액션캠이 없어서 사진이 현진 씨 생각처럼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한현진이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해요.”말하며 카메라를 켠 한현진은 셀카를 몇 장 찍더니 휴대폰을 한편으로 던져버리곤 심호흡하더니 눈을 감고 말했다. “이제 됐어요.”주강운이 피식 소리 내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단두대에 올라가는 장군 같네요.”한현진이 막 주강운의 말을 받아치려는데 주강운은 그녀를 데리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순간 얼굴을 때리듯 스쳤다. 그 느낌은 마치 바늘이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자유낙하로 인해 귀압이 변화하면서 한현진은 귀에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거대한 윙윙 소리를 제외하면 다른 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한한현진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주강운이 그녀의 손을 잡고 두 팔을 벌리고 다리를 구부리라고 눈짓해서야 한현진은 정신이 들었다. 낙하산이 펴진 후 낙하 속도는 줄어들었다. 귓가에 맴돌던 바람도 점차 평온해졌다. 목을 꽉 막고 있던 공포도 조금씩 사라졌다. 한현진은 보호 안경 너머의 넓게 펼쳐진 땅을 보고 있었다. 한현진은 바로 그 순간 인간이란 자연과 우주 가운데서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착륙하면서 작은 사고가 있었고 한현진은 바닥에 무릎을 부딪쳤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멍이 들었고 주강운은 굉장히 미안해했다. 같이 온 조종사가 주강우에게 뼈를 다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주강운의 미간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병원에 가 봐요.”주강운이 제안했다. “괜찮아요.”한현진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한 번 더 뛰어요.”주강운이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