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는 작은 토마토를 집어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그녀의 입 속에 밀어 넣었다.“그래, 넌 모르겠지. 적과 싸우려면 적에 대해 잘 알아야 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어떻게 적과 싸우냐?”차미주는 작은 토마토를 씹어 넘겼다. 그리로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흥, 넌 그냥 MCN 회사로 떼돈을 번다고 하니까 몰래 그 방법을 배워 한 몫 챙기려는 거잖아, 아니야?”한성우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오올, 네 머리는 오늘 드디어 잘 돌아가나 본데?”차미주는 그의 손을 '탁' 쳐냈다.“내가 아직도 널 몰라? 넌 돈만 보면 눈을 반짝이잖아.”한성우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그건 네 친구한테 더 어울리는 말이지 않나?”차미주는 그의 종아리를 차버렸다.“현진이가 아무리 돈을 좋아한다고 해도 친구까지 팔아먹지는 않거든. 어디 너처럼 강한서를 매번 팔아먹는 줄 알아?”한성우는 변명했다.“그건 걔도 동의한 거야. 그 대신 나한테서 다른 걸 배워갔으니 최소한의 수강료는 받아야지 않겠냐?”“너 같은 놈한테 뭐가 배울 게 있다고 그래?”한성우는 입꼬리를 올렸다.“나 같은 놈이라고 해도 배울 것만 있으면 된 거잖아, 안 그래?”그는 바로 먹기 편하게 썰어둔 스테이크를 차미주에게 건넸다.“넌 왜 네 친구 옆에서 경계 모드를 하지 않고 나 따라온 건데? 왜,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차미주는 멈칫하더니 바로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성우는 그녀의 마음을 맞힌 줄 알고 바로 기분 좋은 듯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한시라도 눈앞에 안 보이니까, 막 보고 싶고 그래?”차미주는 바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뭐래!”그녀는 다시 멈칫하더니 우물쭈물하며 말했다.“그냥, 현진이가 날 때릴까 봐...”“형수님이 널 왜 때려?”한성우는 이해가 되지 않아 자세히 묻게 되었고 그제야 차미주가 말실수로 사고 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주의한다고 하긴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라 강한서가 분명 지금 현진이한테 꼬치
차미주는 빨개진 얼굴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는 말을 더듬었다.“그... 그런 뜻이 어디 있어! 그냥 네 머릿속에 음란 마귀가 들어찬 거잖아! 난 그냥 네 인성이 그나마 좋은 것 같아서, 그냥 좋은 오빠 동생 같은 사이가 되고 싶었던 거라고!”한성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앞으로 밖에서 그런 말 하지 마. 넌 지금 내 여자친구니까.”차미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꺼내는 한성우의 기분이 다소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마치 화가 난 듯한 어투였다.그녀는 이상한 듯 물었다.“왜 그래?”한성우의 표정이 차가워졌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상처가 난 곳이 아프네.”차미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또 아파? 전에 본가로 갔을 때는 거의 다 나았다고 하지 않았어?”한성우는 그를 ‘좋은 사람'으로만 취급하는 차미주에 다소 화가 나 있었고, 그 탓에 차미주에게 화풀이하게 되었다.“그래, 원래 거의 다 나았어. 근데, 네 본가에 있던 복실이가 쫓아와서 나무로 올라가는 바람에 떨어졌잖아. 아직도 허리가 아파.”차미주는 역시나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그럼 왜 그때 말하지 않은 건데. 많이 아파? 심각해?”한성우는 허둥대는 그녀를 보니 순간 기분이 풀렸다.그는 갑자기 차미주를 끌어안더니 나직하게 말했다.“조금만 기대고 있을게. 오래 서 있었더니 아파.”차미주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들려오는 그의 말에 그대로 손을 거두게 되었다. 얌전히 우뚝 서 있던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여기가 아픈 거야?”한성우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샴푸 향을 느끼고 있었다.“응.”차미주는 그런 그의 행동에 다소 간지럼을 느끼게 되어 어깨를 살짝 움직이게 되었다. 한성우는 그녀가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다시 그녀를 꽈악 끌어안았다.차미주의 얼굴은 그의 가슴팍에 찰싹 붙어버렸다. 그녀는 한성우의 힘 있는 심장 소리를 듣게 되었다. 쿵쾅, 쿵쾅... 점차 빨라졌다.한성우는 그녀를 안고 있다가 갑자기 그녀를 놓아주며 보았다
전체 결혼식은 한주시에서 제일 유명한 웨딩컨설팅 업체에 맡겨 컨설팅한 것이었고 유현진은 결혼식장에 있는 꽃들이 전부 생화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답례품에 겸비된 꽃도 제일 비싼 드라이플라워였다.결혼식에 참석한 사람 중 진심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러 온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호화로운 결혼식에 저도 모르게 부러움을 느끼게 되었다.“정말 씀씀이가 대단하네요. 이 결혼식에만 몇억을 들였겠죠?”“어디 몇억뿐이겠어요? 백혜주가 손에 낀 반지만 몇억이라고 들었어요.”“재혼으로 사모님이 된 주제에 정말 창피한 줄도 모르네요.”“아휴, 지금 시대에 돈 없는 게 제일 창피한 거라잖아요. 자존심만 센 사람들만 요즘 시대엔 창피함을 느껴요. 뻔뻔한 사람이 창피함을 느낀 거 봤어요?”“그러게요. 하현주만 불쌍하네요. 그렇게 평생 고생을 했는데, 고생해서 얻은 결과를 전부 내연녀한테 빼앗기게 되었잖아요.”“하현주도 애초에 바람피운 거잖아요. 두 사람 다 도긴개긴이죠.”“그걸 믿어요? 하현주는 비록 고집이 세지만 유상수 내조를 엄청나게 잘했잖아요. 유상수가 창업을 한다고 했을 때, 하현주는 만삭이 된 몸으로 본가로 가서 유상수 사업을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힘들게 버텨온 사람이 불륜일 리가 없잖아요. 전 유상수가 본인의 불륜을 합리화하려고 일부러 그런 소문을 낸 거라고 봐요.”“저도 믿기지 않아요. 하현주가 유상수와 결혼할 때 그 흔한 겉치레도 없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의 유상수는 거지였지만 하현주네 집안이 돈이 좀 많았죠. 하지만 하현주 아버님은 유상수를 사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계속 결혼을 반대해서 두 사람은 결혼식도 하지 못했다고 했어요. 예전에 하현주 씨가 그랬어요. 유상수가 언젠가는 결혼식 하게 해준다고. 그런데, 그 결혼식을 다른 여자한테 해주고 있네요. 정말 힘 빠지게 말이죠.”“하지만 유현진은 유상수의 친딸이 아니라고 유전자 검사 결과로 나왔잖아요.”“유전자 검사 결과는 조작할 수 있잖아요.”“그 사람
유현진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누추한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고 보안 요원에게 제지당하고 있었다.그 남자는 더욱 소리를 높였다.“신부가 제 누나라고요! 이거 좀 놔요!”순간 소란스러워졌다.백혜주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동생 하나만 남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동생이라니?백혜주는 미간을 찌푸렸다.“전 모르는 사람이에요.”말을 마치자마자 초라한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누나, 나 현석이야. 내가 얼마나 누나를 오랫동안 찾고 있었는지 알아? 어릴 때 누나가 자주 나를 데리고 뒷산에 가서 산딸기 따다 줬잖아. 그리고 나 팔에 아직도 모반이 있어! 누나가 예전에 내가 엄마 뱃속에서 말썽 피우다가 생겼다면서 나를 놀렸잖아. 기억 안 나? 누나!”백혜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졌다.그리고 방금 그녀와 손을 잡고 등장한 ‘백현석'도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결국엔 대처 능력이 빨랐던 백혜주가 이를 갈며 말했다.“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른 거지가, 내가 누나라니요? 우리 현석이는 이미 예전에 집으로 돌아왔어요. 당신은 대체 누구길래 현석이 행세를 하는 거죠?”초라한 모습의 남자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흥분했다.“그 사람은 분명 가짜야. 내가 진짜 백현석이야, 누나! 누나가 예전에 전단지 돌리고 있었을 때, 난 나의 실수로 감방에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이제야 출소한 거야. 누나, 날 믿을 수 없다면 가서 유전자 검사해 봐도 돼! 그 사람이야말로 내 행세를 하는 거라고!”백혜주는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녀는 이내 주먹을 꽉 쥐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우리 현석이 돌아왔을 때 유전자 검사 안 해본 줄 알아요? 두 손, 두 발 멀쩡한 사람이 왜 여기 와서 우리 현석이 행세를 하는 건데요?”“누가, 나 정말로 현석이라고!”남자는 흥분하며 소매를 확 올렸다.“이거 봐! 모반이 아직 여기 있잖아!”백혜주는 전혀 보고 싶지 않았다. 표정은 평온한 듯했지만, 사실을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유현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돌아가서 반드시 iPad의 비번을 고쳐버리라 다짐했다.유현진은 다시 본론을 꺼냈다.“근데 네가 찾아온 백현석은 진짜 백현석이야?”강한서가 되려 물었다.“네가 보기엔?”유현진이 답했다.“가짜.”유괴된 지 30여 년이 지난 사람을 그렇게 쉽게 찾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유괴된 아이의 부모들도 20, 30년이 지나면 대부분 포기하기 마련이었다.경찰 측도 찾을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강한서는 신이 아니었기에 쉽게 찾을 리가 없었다.“그래서, 저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야?”강한서는 여유롭게 말했다.“돈만 있으면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거지.”유현진은 바로 엄지를 척 내세웠다.“역시 강 대표님.”유현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입단속은 잘 시켰지? 말실수하지는 않겠지?”강한서가 말했다.“민 실장이 백혜주 본가로 가서 자세하게 조사를 하고 왔어. 백현석에게 몸에 있는 모반이나, 왜 실종되었는지, 그리고 어릴 때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주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했어.”사실 백현석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해도 딱히 상관없었다. 백혜주는 이미 ‘진짜' 백현석의 등장에 불안한 모습을 보이었기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만약 백혜주가 정말로 유전자 검사를 하면 어떻게 해?”강한서가 되물었다.“백혜주가 정말 그럴 거로 생각해?”유현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백혜주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가짜인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진짜일 까봐 두려운 것이었다.강한서의 한 방은 너무나도 묵직했다. 그녀는 왜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그녀가 말을 하려던 순간, 옆에서 누군가가 망고 주스를 건넸다.유현진은 보지도 않고 그냥 받아버렸다.“고맙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입에 갖다 댔다.정명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요.”“...”유현진은 익숙한 목소리에 차마 마실 수도, 뱉을 수도 없었다.정명석은 강한서에게도 한잔 건넸다.“강 대표님, 드릴까요?”강한서의
유현진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러고는 망고 주스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정명석은 와인잔을 흔들며 말했다.“고등학교 동창회 날, 내가 늘 만나던 곳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왜 안 왔어?”늘 만나던 곳...와인잔을 들고 있던 강한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차가워진 눈길로 유현진을 보았다.“...”이것은 유현진에게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별거 아니야. 그냥 가기 싫었어. 난 이미 전에 명확하게 말했고 널 다시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어.”정명석은 시선을 떨구었다.“그날 밤, 난 내내 너만 기다렸어.”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한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건 그쪽이 현진이가 안 올 걸 먼저 예상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지금 와서 말을 꺼내는 거죠?”‘하!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강한서는 정명석이 애초에 좋은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 대표님, 이건 저와 현진이 사이 일입니다.”그의 뜻은 제삼자인 강한서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었다.그러나 강한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현진이가 말 안 했나 본데, 현진이는 우리 회사랑 계약한 연예인이죠. 알고는 있으려나? 난 현진이 일에 끼어들 권리가 있고, 쓰잘머리 없는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게 미리 처단할 권리도 있다는 소리죠.”정명석은 미간을 찌푸렸다.“현진이가 브랜드 뉴 엔터랑 계약한 거 아니었어요? 언제부터 브랜드 뉴 엔터가 강 대표님 회사가 된 거죠?”강한서는 태연하게 그를 흘겨보았다.“회사가 크면 좋은 게 바로 각 분야로 발을 넓힐 수 있다는 거예요. 정명석 씨는 본인 회사의 영화관도 제 한몫이 있다는 거 모르나 봐요?”강한서의 뜻은 그를 제외하곤 재산이 많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유현진은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강한서는 자신의 재산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자랑질은 그녀가 계속하던 것이었다.그는 출생부터 유서가 깊은 가문에서 다이아몬드 수저를 들고 태어나 식견도 넓었다.강한서는 그녀가 돈을 쓰던, 아니면 신미정이나
“???”“!!!”드디어 무덤덤하던 그녀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제야 기분이 나아진 정명석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말을 남기곤 홀연히 결혼식장을 빠져나갔다.“기다릴게.”정명석은 애초에 집안을 대표해서 온 것이었다. 얼굴을 보이고 인사를 했으니 그는 당연히 이곳에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말에 강한서는 마치 폭탄에 불이 붙은 듯한 모습이었다.정명석이 가버리자마자 강한서는 이를 갈며 물었다.“대체 저 새끼랑 무슨 약속을 한 건데?”“약속하긴 뭘 해! 저 자식 헛소리를 믿지 마!”유현진은 속으로 정명석을 개자식이라며 욕했다. 분명 예전에 그녀가 정명석을 찼다는 이유로 뒤끝 있게 강한서의 앞에서 이상한 말을 꺼내어 복수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학교 다닐 때도 정명석은 늘 이랬다.그때 학교 여신이 그를 좋아해 그에게 고백했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명석이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그 학교 여신을 울면서 도망치듯 나와버렸고 이튿날 학교 여신을 추종하던 남자들이 그를 찾아가 따져 물었다.그녀는 두 눈으로 직접 정명석이 그 양아치 같은 남자를 세뇌하는 모습을 보았었다.“걔가 네 여자친구냐?”“걔가 네 여자친구가 아니라면, 왜 너한테 찾아가 하소연을 한 건데?”“넌 지금 걔 남자친구 자격으로 나를 찾아와 놓곤, 현실은 진짜 남자친구가 아니잖아. 그럼 나랑 싸워서 네가 얻는 게 뭔데? 걔가 너랑 사귀어 주겠다고 하든?”“너랑 사귀어 줄 것도 아니면서 왜 나를 찾아와 싸우려고 한 건데? 나랑 싸워서 네가 이기면 넌 퇴학일 것이고, 지면 걔는 네가 쓸모없다고 생각하겠지.”“이러자. 넌 걔한테 가서 네가 내 다리를 부러뜨렸다고 해. 그리고 걔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봐. 만약 널 걱정한다면 걔 마음속에 네가 있다는 거고, 그때 네가 다시 날 찾아와서 나랑 싸워 퇴학 된다고 해도 손해 볼 것 없잖아.”멍청했던 상대는 바로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바로 학교 여신을 찾아가 정명석이 시킨 그대로 했다. 학교 여신
최연서였다.‘언제 온 거지?'유현진은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하지만 아무런 문자도 없었다.그녀는 몰래 구석진 곳으로 가 최연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바로 통했지만 받은 사람은 최연서가 아니었다.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유현진은 바로 무언가 눈치챈 듯 목소리 톤을 바꾸며 물었다.“혹시 최연서, 최 여사님이세요?”휴대폰 너머로 성별을 알 수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네.”“최 여사님, 안녕하세요. 여긴 하늘 은행입니다. 혹시 최근 대출이 필요하지 않으세요?”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뭐 좋은 혜택이라도 있나요?”‘염병!'유현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날렸다. 고개를 들자 강한서는 이미 네이버에 비슷한 내용을 검색해 그녀의 앞에 내밀고 있었다.유현진은 바로 그가 찾은 결과를 토대로 연기를 했다.“아, 당연히 있습니다. 저희 은행에서 주력으로 밀고 있는...”그녀는 강한서가 찾아준 대로 읽고는 상황에 맞게 연기를 이어갔다.“저희 은행은 정규적인 은행입니다. 아무런 수수료와 이자를 받지 않고 대출을 해드립니다. 대출 성공 문자가 가면 바로 원하시는 금액을 통장에 넣어드립니다. 안전성의 문제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안심되지 않으신다면 저희 은행에 직접 방문하시고 대출을 결정해도 괜찮답니다. 저희는 언제든 고객님을 환영하오니, 언제든 연락 가능할 수 있게 저희 은행 카톡 계정을 추가해 주시겠습니까? 카톡 계정이 저희 은행 정확한 위치를 보내드릴 겁니다.”휴대폰 너머의 사람은 한참 침묵하더니 그제야 담담하게 말했다.“이따 추가할게요.”유현진이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상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유현진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물었다.“나인 거 모르겠지?”강한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언제부터 네 연기에 자신감을 잃은 건데?”“너무 갑작스러웠잖아. 준비 하나도 못 하고 그냥 상황 발휘한 거잖아.”유현진은 말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난 그 목소리가 뭔가 백혜주를 닮은 것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말을 아끼던 윤명훈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회사에서는 쿨하게 한열을 보내줄 마음이 없거든요.”그가 한현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현진도 알 수 있었다. 윤명훈은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열이 아직 취해 있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윤명훈은 한현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제가 잠시 후 해명글을 올릴게요. 명훈 씨는 신하리 씨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쓸데없는 기사들 처리해 달라고 연락하세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해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해명하기 어려워질 거예요.”한열의 바람 스캔들을 터트린 건 그저 페이크에 불과했다. 성추문으로 한열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만약 한현진이 한열의 회사 대표였다면, 자신의 두 손으로 탑급의 자리까지 올린 아이를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계약을 해지 한다고 해도 한열의 빛을 어느 정도는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한열은 신하리라는 충무로 연기파 배우의 인맥까지 갖고 있으니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볼 이유는 없었다. 연예계에게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그러니 이번 일은 오히려 누군가 한열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 같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세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 했다. 다만 송민준의 눈은 모자이크 처리했다.[저희 오빠와 사촌 동생이 그렇게까지 닮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하리]사진 속에서 한현진은 가운데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엔 송민준이, 그리고 오른쪽엔 한열이었다. 막내 동생인 한승은 아예 잘라버린 후 사진을 업로드 했다.비록 송민준의 눈을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지만 하관만 보아도 한열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