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리는 병동 입구를 등진 채 고함치고 있었다. 뒤에서 지동성이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유건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마치 면죄부라도 받은 듯 기세등등한 얼굴로 시연을 몰아붙였다. “들었지? 고 대표님도 돌려주라고 하시잖아?”“네 남편도 네 편을 안 들잖아! 창피한 줄 알아야지!” 말끝을 높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러분, 다 알고 계시죠? 우리 소미랑 고 대표님, G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커플이었다고요!” “근데, 이 지시연이란 여자가 끼어들어서 둘을 갈라놨어요! 남의 사랑 뺏고, 이제 와선 우리 재산까지...” 장미리는 소리를 지르다 시연을 향해 돌았고, 눈을 부릅떴다.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망가뜨려?” ‘세상을 거꾸로 산다고 해도, 이 정도로 뻔뻔할 수 있을까?’ 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손바닥엔 이미 손톱자국이 파였다. 심지어 숨이 턱턱 막혔다. “여보?” 유건이 시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물었다. “괜찮아? 숨 가빠 보여.” “아니요...” 시연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유건의 저음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지 사장님.” 그리고 시선이 지동성에게로 향했다. “사람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하십니까?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하아...” 지동성은 숨을 내쉬며 다가와 장미리의 팔을 붙잡았다. “이만 가자.” “어머? 당신 여기 왜 있어요?” 장미리는 인제야 남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지동성은 비웃듯 말했다. “내가 안 왔으면, 당신 병원 하나 날려 먹을 뻔했잖아.” “안 가요! 난 오늘 끝까지 말할 거예요!” 장미리는 버티며 외쳤다. “뭐가 창피해서 그래요? 창피한 건 저 여자죠! 남의 남자를 뺏고, 집을 뺏고, 돈까지 가져갔으니까요...!!” 병동 복도엔 다시 수군거림이 피어올랐다. “헐... 진짜야?” “지 선생님이 지 사장님이랑 그런 사이였나 봐...” “이런
막 돌아서려던 그 순간, 지동성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시연아!” 간절하고, 죄책감 어린, 오래 묻어둔 무게가 얹힌 외침.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전부 다 아빠 잘못이야.” ‘아빠...?’ 그 한마디에 시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몸이 굳어버린 듯 얼어붙었고,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그 단어를... 지금 당신이 꺼낼 자격이나 있어?’눈물이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지동성!!” 장미리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남편을 붙잡았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얼른 나가자니까!!” “놔.” 지동성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웃었다. “그러게 내가 아까 가자고 할 때 내 말 듣지 그랬어? 지금 와서 수습하는 건 너무 늦었어, 장미리.’ 그는 돌아서서 유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고 대표님.” 그러고는 또렷하고 무겁게 말했다. “지시연은 제 딸입니다. 제 아내, 그러니까 제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제 친딸입니다.” 정적-그 순간, 복도 전체가 숨을 죽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잠시 후, 속삭이는 듯하지만 멈추지 않는 가십이 퍼지기 시작했다. “딸이라고?”“그럼... 불륜이 아니고...”“진짜 가족이었어?”“헐... 그럼 저 여자, 지 선생님의 새어머니였던 거야?” “그럼 딸한테 재산 준 게 뭐가 어때서 그래?” “새어머니가 와서 따질 일은 아니잖아.” “아니, 진짜 드라마야? 세상에...” 순식간에 여론은 반전되었다. 그제야 장미리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당신... 우리 약속했잖아요. 고 대표님한테는 말 안 하기로...” “지금... 왜...? 왜 고 대표님 앞에서...?”‘이제... 우리 소미는... 어떡하지?!’장미리는 유건을 힐끔거리며 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지동성의 눈은 더 이상 장미리를 보지 않았다. 유건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눈빛이 흔
“엄마!” 화상 외과 병동의 한 병실 안, 소미는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엄마, 내가 뭐라고 했어요?”“제발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지시연한테 가서 그런 식으로 굴었어요?” 장미리는 어쩔 줄 몰라 시선을 떨궜다. “고유건이 거기 있는 줄은 몰랐지... 네 아빠도... 그렇게 나올 줄은...”“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떡하냐 이제... 어떡하냐고?” 소미는 아찔한 기분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나는 지금도 충분히 무너졌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일이 터지다니...’‘전신에 화상도 입었는데, 이젠 유건 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그녀는 유건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설마, 나도 우리 엄마랑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시연을 괴롭히는 데 나도 한몫한 거라고... 그렇게 보겠지...’ ‘기왕 피할 수는 없다면... 차라리 먼저 움직이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한편, 산부인과 교수는 양석현의 요청으로 직접 병실에 들렀다. 시연의 산소포화도 수치를 확인한 뒤, 유건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감정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과호흡 증상까지 왔네요.” 그러고는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임신 중기 여성이 이런 상태가 되도록 두다니, 남편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뭐 한 겁니까?” 유건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없어. 모든 게, 내 책임이니까.’ “산소마스크 착용하고, 황체호르몬 주사 맞히세요. 조금만 안정되면 괜찮아질 겁니다. 단,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아이도 위험해요.” “네... 죄송합니다.” 유건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산부인과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고, 간호사가 들어와 조심스레 주사를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산소를 마시며, 창백했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 그 곁엔 유건이 조용히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눈 떴네. 어때, 좀
“이만 가볼게.” 연락처를 교환한 뒤, 유건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 고 대표님, 조심히 가세요.” 하은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손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또 한 번 빠르게 뛰었다. ‘단지 연락처 하나인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히지.’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순간, 문이 열리고 간호사의 부축을 받은 장소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유건의 이마가 즉시 찌푸려졌다. “소미 씨, 여긴 왜 왔어?” 목소리는 낮지만, 그 안에 깔린 분노는 감출 수 없었다. 직접 소미에게 화를 내는 대신, 그는 곁에 있던 간호사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이게 간호사가 할 짓입니까? 환자가 이런 상태인데, 왜 막지 않았죠?” “유건 씨!” 소미가 급히 간호사의 팔을 놓고 유건의 팔을 붙잡았다. “간호사님은 잘못이 없어요. 제가... 제가 무리해서 오겠다고 했어요.”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 여사... 또 뭔가 했겠지.’ 남자가 굳이 묻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었던 소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우리 집안일, 제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딸 된 입장에서 부모님의 잘못을 논하는 것도... 참 어렵고요.” 유건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소미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 “시연이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 애 마음속엔, 우리가 엄마와 동생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어요. 그래서... 늘 미워했죠.”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고, 눈물도 고였다. “하지만... 시연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정말 우리의 잘못이 아니에요.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렇죠?” 말만 들으면 그럴싸했다. 그런데 유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시연이랑 우주는 아주 어릴 때부터 힘든 시절을 겪었어. 그것만큼은 사실이지.” 소미는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우리가 주려던 걸
“무슨 얘긴데?” 유건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마음속 어딘가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소미는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유건 씨, 시연이... 사실은, 유건 씨를 안 좋아해요.” 그 한마디에 유건의 눈빛이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올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소미는 유건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유건이 분명히... 상처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 모습이, 예상보다 더 뼈아팠다. “유건 씨.” 소미는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삼키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시연이... 진짜 사랑해요?” 유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답은 안 해도 돼요. 하지만 저, 더는 못 참겠어요. 이젠 말해야겠어요.” 소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시연이가 유건 씨한테 간 건, 사랑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복수하고 싶어서였다고요.” 그 말은 마치, 정통으로 가슴을 때리는 주먹과 같았다. 소미는 떨리는 눈동자로 유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건 제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에요. 시연이가 직접... 제 앞에서 말한 거예요.”“제가 ‘유건 씨랑 내 사이를 알고도 왜 유건 씨랑 결혼했냐’고 물으니까, 시연이가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소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유건을 바라봤다.“유건 씨가 누구를 좋아하든, 누구랑 함께하든 신경 안 쓸 거라고 했어요. 그저 나만 불행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다고요.” “유건 씨...” 소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미안해요.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괜히 우리 집안일에 휘말리게 된 것 같아서...” “그게 너무 미안해서... 더는 못 참겠어요.” 유건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얼굴엔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진짜... 날 그런 식으로
유건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어린 시연이, 대체 어떤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는지.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지동성이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오해를 했던가. 정작 진짜 잘못된 건, 지동성이란 남자가 ‘아버지’라는 이름조차 감당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소미의 말에 일부 과장이 섞여 있을지 몰라도... 지동성이 시연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준 적이 있었을까?아니, 지동성은 자기 자식들에게조차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한 적이 없었다. 딸이 아버지를 그렇게까지 미워하고,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할 정도라면, 그게 어떤 아버지란 말인가?그리고... 유건의 가슴을 더 서늘하게 만든 건...혹시, 시연이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가 정말 소미가 말한 것처럼 ‘복수’였다면?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마음 한편이 쓰디쓴 한약에 담가진 것처럼 저릿하게 아려왔다. ‘그때... 우리가 처음 계약 결혼을 했을 때, 시연이가 이혼을 고집했던 것도... 그 이유였던 걸까?’그땐 단지 무심한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숨기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 숨겨진 이유가, 그토록 잔인한 것이라면......한편, 병실에서는...잠시 눈을 붙이고 난 뒤, 시연은 이제 괜찮다는 듯 스스로 산소호흡기를 뗐다.“시연아!” 하은이 놀라 달려왔다.“왜 벌써 일어났어? 아직 컨디션 안 좋을 텐데, 좀 더 쉬지.”“괜찮아.”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는 잠시 숨이 가빴을 뿐이야. 지금은 정말 멀쩡해.”하은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억지로 버티는 얼굴은 아니었다.“알겠어. 근데 무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말해야 해.”“응, 알았어.” 시연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그녀가 다른 데 시선을 두고 있을 틈을 타, 하은은 몰래 핸드폰을 꺼내 시연의 모습을 ‘찰칵’ 사진에 담았다.그리고 곧장 유건에게 전송했다.한편, 유건은 메시지 알림을 보고 화면을 터치했다. 사진 속 시연은
“시연이 왔구나. 소개할게.” 양석현 교수는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이쪽은 변이준. 네 선배야. 이준아, 여기는 시연이. 너보다 한참 어린 네 후배지.”“시연 씨, 반가워.” 변이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시연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선배님, 안녕하세요!” 시연은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변이준... 그 이름, 나 들어본 적 있어!’ 양석현의 자랑이자, ‘의대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 이름. 학부 시절에 이미 심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강울대뿐만 아니라, 전 의학계에서 손꼽히는 인재.‘진짜 실물을 보게 되다니...!’ 시연이 실습을 시작했을 때, 이준은 이미 해외 연수 중이었다.그런데 그가 1년 만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가슴이 벌렁댔다. 이 순간,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왜 그렇게 쳐다봐?” 변이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아, 아뇨... 그냥... 너무 신기해서요. 선배님, 정말 대단하시잖아요!”“오?” 변이준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올렸다. “시연 씨도 꽤 괜찮던데? 교수님이 그러시던데, 이번 의대생 중에 단독 진료도 보고, 응급 환자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시연 씨 하나뿐이라던데?”“에이... 선배님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그만, 그만!” 양석현 교수가 웃으며 두 사람을 제지했다. “둘 다 내 자랑스러운 제자야. 서로 띄워주기는 그만하라고.”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말했다. “네, 교수님.”“네, 교수님.”“앞으로 잘 지내봐. 이준이는 선배니까 시연이 좀 잘 챙겨주고, 시연은 후배니까 선배한테 많이 배워야 해.”“네, 교수님.” “네, 교수님.” 또다시 이구동성으로 대답이 돌아왔다.“가자, 자리 예약해놨어. 이준이가 점심 사준다니까 시연이도 같이 가자꾸나.” 양석현은 시계를 보고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교수님!”...훌륭한 선배
임신 중기로 접어들면서, 시연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왔다. 방광이 눌려서 그런지, 밤에 두세 번은 꼭 깨게 되었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잠에서 깨자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고유건... 아직도 안 왔어?’ 핸드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 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유건의 술자리가 잦은 편이긴 해도, 결혼 후 이렇게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온 적은 거의 없었다. ‘전화해 볼까...?’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대신 조심스레 방을 나서, 복도를 따라 서재로 향했다. 서재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문틈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 공간은 이 집에서 오직 유건만 드나드는 곳.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일 터였다. ‘이 시간까지 뭐 하는 거야... 자지도 않고.’ 시연은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사각거리는 조명 아래, 유건은 소파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엔 반쯤 비운 와인병과 와인잔. 몸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진짜 술꾼 같아...’ 취한 사람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 시연은 슬쩍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손목이 잡혔다.“여보.” 유건은 눈을 떴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날 보러 왔네? 걱정됐어? 보고 싶었어?” 그 웃음 속엔 왠지 모를 슬픔이 섞여 있었다. ‘왜... 저런 눈빛이지?’ “이렇게까지 마셨는데, 속은 좀 괜찮아요?” 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물었다. “장소미 일 때문에 그래요? 불안해서...?”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소미의 일이, 유건을 흔들어 놓았을 가능성. “하...” 유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었다. “분위기 한번 잘 망치네.” 여긴 본가고, 둘은 부부였다. 유건이 붙잡은 손도 아내의 손. 그런데 이 타이밍에 시연이 굳이 다른 여자 이야기를 꺼내다니.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연도 더
“느낌이 안 좋네요...!”이호민은 다급히 벽 쪽 스위치를 눌렀다.불이 켜지는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 안은 마치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책상과 의자는 비뚤게 기울어져 있었고, 바닥엔 깨진 유리 조각과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다.공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극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이 냄새는 또 뭐예요...?” 왕성애는 인상을 구기며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창문부터 열어야겠어요!못 견디겠어요!”“전 유건 도련님부터 볼게요.” 이호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구겨진 채 누워 있는 유건이 보였다. 셔츠도 그대로, 신발도 그대로. 온몸이 술과 담배에 절여져 있었다.“도련님.” 이호민이 조심스럽게 부르며 다가갔다.“유건 도련님, 일어나보세요.”숨소리는 있었지만,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이 정도로 취했다고?’조심스레 어깨를 두드리려던 찰나, 갑자기 유건이 벌떡 일어나 그대로 욕실로 달려갔다.“윽...!”‘진짜 토하네...’이호민은 욕실로 다가가 보니, 유건은 변기에 몸을 웅크리고 술을 게워 내고 있었다.곧 물을 틀어 입을 헹구고, 세수하며 거울 앞에 섰다.“유건 도련님...”이호민이 수건을 건넸다.“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아무리 젊어도, 이렇게 몸 상하면 어르신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할아버지한텐 말하지 마세요.”유건은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고, 그대로 빨래통에 던졌다. 이어서 욕실을 나서며 배 쪽을 살짝 짚었다.“배... 괜찮으세요?”이호민이 걱정스레 다가오며 말했다.“이럴 때일수록... 사모님을 불러보면 어떨까요? 전 두 분 사이에 큰 오해가 있다고 봐요. 얘기만 잘하면...”“지시연 얘기는 하지 마세요.”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게 가라앉았다.“앞으로 그 여자 이름을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끝을 세게 눌렀다.“진정한 고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이럴
‘말도 안 돼!!’강수희는 숨을 들이켰다. 놀라움, 당혹, 불신...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떠올랐다.“시연아, 넌 우리 은범이를 그렇게 아꼈잖아. 은범이 곁을 밤새워 지키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아무 감정이 없다고?”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제가 은범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이었어요.”“그렇게 말하지 마.” 강수희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아냐... 날 원망해서 그러는 거지? 내가 너희 사이 갈라놓았던 거, 다 인정할게.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절대 방해 안 할게. 아니다... 아예 안 보이게 사라질게. 너만 은범이 옆에 있어 준다면...”“사모님.”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막아섰다. “그만 말씀하세요. 저는 은범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젠, 정말로... 아니에요.”강수희는 마치 뺨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너희 둘, 그렇게 사랑했는데...”“그건 과거일 뿐이에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요.”그 말에, 강수희는 말문이 막혀 굳어버렸다. 시연은 한 박자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사모님의 부탁으로 잠시 은범이 곁에 있어 줄 순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단지 일시적인 거예요. 제가 다시 떠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때 또 무너지면, 은범이는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은범이는 스스로 일어나야 해요. 온 세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떠나도 견딜 수 있어야... 그게 진짜 회복이에요.”시연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가방을 메고, 마지막으로 강수희를 바라봤다.“사모님, 전 오늘 은범이 병실에 들어가지 않을게요. 제 존재가 지금 은범이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니까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지하철에서 내리자, 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할아버지의 전화
“그 말...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시연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교수님한테...” 강수희는 급히 덧붙였다. “너도 알잖아, 우주 진료 보던 그 정신과 교수님. 그분이 직접 말했어, 네가 은범이한테 도움이 된다고.”“맞아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조용히, 천천히 손을 빼냈다.“하지만 교수님은 제가 원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신 거지, 제가 원치 않음에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은 안 하셨을 거예요.”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아이... 너무 똑똑하네.’맞는 말이었다. 심재규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시연이 원할 경우에만’이라고.하지만 아들이 스스로 생을 끊으려 했던 그날 밤은 겪은 순간부터, 강수희의 모든 이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앞으로 치료받는 동안 은범이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이번엔 가까스로 살릴 수 있었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까?또 그다음엔? 그땐 정말,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강수희는 더 이상 아들의 생명을 ‘확률’에 걸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결국 시연이 곁에 있는 것이었다.“시연아... 너랑 은범이, 한때 사랑했던 사이잖니. 정말... 정말 이렇게 외면할 수 있어?”그 한마디로, 시연을 ‘사람 생명을 외면한 냉혈한’으로 몰아붙였다.‘나를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이 감정에, 죄책감에, 죄의식에.’하지만 시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끝을 조용히 쥐며 입을 열었다.“제가 은범이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은범이의 상태가 좋아지고, 나아지게 된다면... 좋죠. 하지만... 그다음은요?” “다음...?”“네, 제가 언젠가 자리를 뜨게 되면요?”급격히 표정이 굳은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엔, 안타까움도, 체념도 섞여 있었다.“사모님, 전 결혼했어요. 그리고 은범이와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요.”“그... 그건...”강수희가 다급히 말을 덧붙이려
지하는 여자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걸음을 천천히 맞추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기까지 했다.진아는 입을 벌렸다.‘세상에...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저 양반.’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좋았어, 이거 한 장만 박제해 두자. 다음에 또 장난치면 바로 보여줘야지.”그녀는 그 장면을 확대하여 정확히 프레임에 넣었다.찰칵- 사진을 찍고는 핸드폰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여자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나, 저 여자 어디서 봤지?’...그 시각, 시연의 집.시연은 느지막이 일어나, 진아가 남겨두고 간 국을 데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걸려 온 전화.[시연아! 은범이가 깨어났어!]“정말요?”시연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정말 다행이에요. 어때요? 상태는?”[훨씬 나아졌대. 교수님도 그러시더라, 기적 같다고.]‘진짜로... 다행이다.’그 순간, 시연의 가슴 깊이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무거웠던 짐 하나가 내려간 듯했다.[시연아, 시간 괜찮으면 병원에 들러줄래? 은범이가 널 보면 정말 기뻐할 거야.]잠시 망설였지만, 시연은 진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확인할 건 해야지.’“네, 오늘 쉬는 날이라 금방 갈게요.”[정말? 정말 고맙다!]강수희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우리 기다리고 있을게.]“네.”...병원.병실 앞. 강수희는 병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시연이 오기를 기다린 듯한 얼굴이었다.“시연아!”그리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친근하게 웃으며, 팔짱까지 끼는 모습. 이전과는 딴판이었다.“어제 일은 잘 해결됐지? 고 대표님이랑도... 잘 풀었어?”너무도 티 나는, 의도된 질문. 시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문제없어요.”“그렇구나...” 강수희의 눈빛에 실망이 그대로 비쳤다. ‘생각보다... 잘 안됐구나’하는 반응이었다“그럼 들어가자. 은범이는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