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성은 간 이식을 기다리며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그리고 그 문제로 인해, 지동성은 이미 장미리와 소미에게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소미는 더 이상 어머니를 책망할 수 없었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됐어...’쾅!갑자기 철문이 거세게 두들겨졌다.“문 열어! 당신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문 열고, 우리 우주를 돌려줘!”장미리와 소미는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어떡하지?”“일단 우주를 일으켜요!”“그래.”모녀는 힘을 합쳐 우주를 부축했다.“그다음은?”“숨겨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춰야 해요!”소미가 단호히 말했다.“그리고, 엄마가 나가서 최대한 지시연을 붙잡아 둬요. 절대 안으로 들이지 말고요!”“알았어.”...문밖에서 시연은 한참을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녀는 정기환을 돌아보며 말했다.“문 따요!”“네!”그러나 기환이 움직이기도 전에, 문이 안에서 열렸다.나온 사람은 장미리였다.“어머나.”장미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게 누구신가 했더니, 너였구나?”시연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어어, 뭐 하는 거야?”장미리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시연은 차갑게 말했다.“우리 우주를 데려가야겠어요.”“하?”장미리는 코웃음을 쳤다.“그 애가 여기 있다고 누가 그래? 밥도 가려 먹는데, 말도 가려 해야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어?” “그래요?”시연의 표정은 변함없었다.“좋아요, 만약 오늘 내가 우주를 찾지 못하면, 내 잘못을 인정할게요. 고소하세요.”장미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이X이...”그러나 시연은 더 이상 장미리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기환 씨.”그녀는 지체 없이 명령했다.“문 부숴요.”“알겠습니다.”“잠깐!”장미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시연 혼자라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녀가
“우주야...!!!”무릎이 풀리며, 시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손을 살며시 뻗었지만, 혹여 우주가 아플까 봐 닿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고, 목소리조차 떨렸다.“우주야!! 제발 깨어나!! 누나한테 말 좀 해봐!!”그러나, 우주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시연의 이성은 그 순간 완전히 타버렸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장미리와 소미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날카롭게 갈라졌다.“너희들이었어.”추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아, 아니...”장미리는 겁에 질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시연의 눈빛은 너무나도 무서웠다.장미리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내 말 좀 들어봐... 내가 그런 게 아니야...”“허.”시연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말을 믿을 리가 없잖아!!’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단숨에 장미리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었다.“아악!”여자의 비명이 터졌다. 장미리는 고통스러워 몸부림쳤다.그러나 시연은 더욱 세게 머리를 틀어쥐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나이 들어서 기억력이 나빠졌어? 내가 경고했지, 우주는 건드리지 말라고.”시연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눈빛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너희가 우주한테 어떻게 했는지, 그대로 돌려줄게.”“아야야! 소미야!”“지시연!”소미도 당황하며 다급히 소리쳤다.“당장 놔! 내 말 안 들려?”시연은 단 한 번도 소미를 쳐다보지 않았다.그저 장미리의 머리를 움켜쥐고, 마치 병든 닭이라도 잡듯 머리를 탁자 위로 내리찍었다.쿵!“으아악!”장미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살려줘! 살려달라고! 으아아...”소미는 손을 떨며 기환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다급하게 명령했다.“뭐 해요?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예요? 유건 씨가 지시연을 보호하라고 했지, 우리 엄마를 이렇게 두라고 한 건 아닐 텐데요? 당장 막아요!”기환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소미는 당황했고, 하는 수 없이 직접 나섰다.“지시연! 그만해! 이렇게
“무슨 뜻이야? 제대로 설명해.”“그러니까...”소미는 긴장한 채 연신 침을 삼켰다.“오늘... 나 사실 유건 씨랑 점심 먹기로 했어. 네가 전화했을 때, 마침 같이 있었어...”그 순간.시연은 기억을 되짚었다. 그리고 깨달았다.‘그때, 장소미와 고유건이 같이 있었던 거야?’두 사람은 또 만난 거였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대체 몇 번을 만난 거야?’‘아니, 셀 수도 없겠지.’시연은 갑자기 온몸이 차갑게 식어갔다....그때, 문가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유건이 지한과 민환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유건은 단번에 시연을 발견했고, 곧바로 그녀가 짓누르고 있던 소미를 보았다.“소미 씨!”이 광경에 깜짝 놀란 그는 급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놔.”“유건 씨...”소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마치 억울함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흥!”시연은 가볍게 비웃었다.“고 대표님, 지금 영웅 구출 작전인가요?”이어서 힘을 풀며 손을 놓았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손도 못 댔으니까요. 고 대표님의 ‘나비 공주’는 잘 있어요.”유건은 당황했다.“여보?!”시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기환 씨, 아직도 내 지시를 들을 수 있어요?”“당연합니다.”“고마워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곧바로 기환에게 지시했다.“우리 우주 좀 안아줘요.”그녀는 우주를 안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아직 ‘고씨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명목이 있으니, 이를 이용할 수 있을 때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기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주에게 다가갔다.그제야 유건은 구석에 쓰러져 있는 우주를 보았다.소년의 머리는 피투성이였다.유건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기환, 움직이지 마.”유건이 단호하게 막았다.“예?!”시연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고 대표님, 약속을 깨겠다는 거예요? 방금 본인도 허락했잖아요.”“그런 게 아니야.”유건은 고개를 저었
시연의 손목이 단단히 잡혔다.유건이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앉아.”시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그는 애타고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한마디 했다고 그렇게까지 날 몰아붙여야 해? 내가 우주를 신경 안 쓴다고? 당신,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날 화나게 하려는 거야?”시연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유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우주 상태는 깨어나야 정확히 알 수 있어. 나도 함께할 거야. 당신 곁에서 우주를 지킬게, 응?”“당신...?”시연이 비웃듯 눈썹을 올렸다.“그럴 시간이나 있어요? 고 대표님은 아주 바쁘신 분이잖아요.”그런 냉소적인 태도에, 유건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이해하고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있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낼 거야.”그는 시연을 부드럽게 눌러 앉혔다.“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밥 좀 먹어. 응?”“싫어요!”유건은 미간을 좁혔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는 분명 잘못한 게 없었고, 도착했을 때 소미와 말을 섞지도 않았다.그런데도 시연은 마치 자신에게 큰 원한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대체 뭐가 문제지?’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먹을래?”“간단해요.”시연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내 앞에서 사라져 줘요. 당신 얼굴만 안 보면, 나도 식욕이 생길 거예요.”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눌렀다.두 손을 꼭 쥐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래, 갈 테니까 꼭 먹어.”그는 돌아서서 나갔다.그 순간, 시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식기를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유건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그러나 동시에 서운함이 밀려왔다.‘내가 그렇게까지 역겨운 존재야?’그는 잘못한 게 없었다.그리고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우주가 왜 지 사장 집에서 다친 채 발견된 거지?’이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시연의 눈빛을 떠올렸다.‘시연이의 그 눈빛... 단순한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그냥 내 말 들어.”유건은 단호했다.“민환이 데려다줄 거야. 이미 충분히 복잡해졌어. 더 걱정하게 만들지 마, 응?”“알겠어요.”소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를 보내고 나서도, 유건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소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장 여사가 혼자 있는 우주를 발견했다? 우주는 왜 혼자 있었던 거지?” ‘그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병실은 고요했다.우주는 약물로 인해 깊이 잠들어 있었고, 시연도 침대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잠들어 있었다.유건은 조용히 다가가 시연을 안아 올려 옆에 있는 보호자 침대에 눕혔다.“으음.”시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흐느적거렸다.순간, 유건은 긴장했다. 시연을 깨운 줄 알고 멈칫했지만, 다행히도 다시 조용해졌다.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그때, 시연이 희미하게 신음했다.“엄마...”유건의 손길이 멈췄다.그녀는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으흑...”끝내 억누른 듯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눈을 감은 채, 시연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우리 와이프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구나.’사람은 가장 약해지고, 슬프고, 무력할 때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찾는다.유건은 여자의 깨끗한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렸다.그는 결국 시연 곁에 누워,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그리고 한 손으로 시연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아주 부드럽고도 인내심 있는 손길이었다.점차 시연의 떨림이 잦아들었고, 마침내 조용히 눈을 떴다.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녀는 그 불편함에 손을 올려 닦으려 했다.“손으로 닦지 마.”유건이 시연의 손을 붙잡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내가 닦아줄게.”남자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시연은 훨씬 편안해졌다. 하지만 정신이 또렷해지자,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
기환은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오늘, 장소미 씨가 형수님한테 말하는 걸 들었어요. 형님이랑 오늘 만나서 점심 약속을 하셨다고...”유건은 순간 굳어졌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시연이 자신에게 차갑게 대했는지.그녀가 왜 그렇게 거리감을 두었는지.유건의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진작에 말했어야지!’“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기환은 억울한 얼굴로 변명했다.“기회가 없었어요...”‘형님은 형수님 곁을 지키거나, 장소미 씨와 대화하고 계셨으니...’‘내가 감히 앞에 끼어들 수가 없었던 거지...’유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이 사실을 기환이 말해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계속 아무것도 모른 채 헤맬 뻔했다....“아악!”병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곧이어 쏟아지는 물건 소리, 난장판이 된 소리가 들려왔다.“우주야!”이어지는 건 시연의 다급한 목소리와 억눌린 울음.“누나야! 우주야, 누나 좀 봐! 제발...!!”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그리고 마침 넘어지려는 시연을 붙잡았다.“괜찮아? 얼른 앉아!”“괜찮아요.”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그럼 어떻게 해야 안 괜찮은 건데?”병실 안에서는 간호사와 의사, 그리고 방금 도착한 정신과 교수가 우주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무도 소년을 막을 수 없었다.우주는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누나를 밀쳐낼 리 없을 테니까. 유건은 단호하게 말했다.“여보, 날 믿어. 우주는 내가 맡을게.”시연은 입술을 앙다물었다.그러나 결국, 유건이 우주를 맡겠다고 하자, 한 발짝 물러났다.“그래.”유건은 시연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그런 뒤, 곧장 우주에게 다가가 소년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아악...!!!”우주는 더욱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유건은 흔들리지 않았다.“우주야, 나
우주는 즉시 입을 떼지 않았다.유건도 재촉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시간이 조금씩 흐르며, 우주는 서서히 힘을 풀었다.그제야 소년의 이가 천천히 팔에서 떨어졌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히 다가왔고, 시연은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 우주를 안았다.“우주야, 괜찮아. 누나가 있어. 누나가 여기 있어.”우주는 아까보다 한층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적어도 더 이상 저항하지는 않았다.“사모님, 우주 군에게 진정제를 투여하고 상담 치료를 진행해야 합니다.”“네, 그렇게 해주세요.”시연은 우주를 천천히 놓아주며 의사와 간호사에게 맡겼다.그런데 돌아서자마자, 유건이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피가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이쪽으로 와요.”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건의 팔을 붙잡고 소파로 데려갔다.“기다려요.”다행히도 병원이었기에 필요한 물품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시연은 간호사에게 소독 키트를 받아왔다.그녀가 상처를 살펴보니, 우주가 제대로 힘을 준 게 확실했다.살갗이 깊게 파이고, 양쪽으로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조금만 더 오래 물었더라면, 살점이 뜯겨 나갔을지도 모른다.이것이 두 번째였다.우주 때문에 유건이 다친 것이.유건의 팔에는 아직 다 낫지 않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그녀는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소독솜을 들고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냈다.“좀 아플 거예요. 너무 아프면 말해요. 살살할게요.”“괜찮아, 안 아파.”유건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러나 이내 시연의 눈가가 붉어진 걸 보고,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이 여자... 지금 나 때문에 우는 거야?’“여보.”유건은 목이 메어 시연을 불렀다.그리고 다치지 않은 팔로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시연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왜 그래요?”“나 아파.”시연은 당황했다. “아까 안 아프다고...?”“아파, 엄청 아파.”“그 정도예요?”시연은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고요?”시연은 이를 꽉 물었다. 입을 떼자마자,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그럼 알 필요 없어요! 하지만 지 사장님께 딱 하나만 부탁할게요. 죽을 거면 빨리 죽으세요.” “지 사장님께서 저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지 사장님의 제사상은 차려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단번에 전화를 끊었다.시연은 바로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그리고 눈물이 차오르는 걸 억지로 억눌렀다. ‘우주 말고는, 지동성이든 고유건이든, 누구도 내 눈물을 볼 자격이 없어. 단 한 방울이라도!’...그렇게 이틀이 흘렀다.시연은 계속 병원에서 동생을 지켰다.다행히 우주의 머리 상처는 크지 않았고, 매일 약을 바르고 항생제만 맞으면 됐다.유건이 불러온 정신과 교수는 실력자이기 때문에, 우주의 상태는 예상보다 더 빠르게 나아지고 있었다.비록 아직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주의 심리적 치유는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고, 천천히, 꾸준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오전 10시.우주의 항생제 투여를 확인한 후, 시연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우주야, 누나는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오늘은 같이 있을 수 없어.”“누나가 어디 가는지 궁금하지 않아?”그녀는 혼잣말하듯 말했지만, 우주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엄마를 보러 가.”그 순간, 시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녀는 우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우주는 저항하지 않았다.이건 무의식적으로 누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엄마...’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우주야, 엄마 기억나?”우주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그렇구나. 기억이 안 나는구나.”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럴 만도 해. 엄마가 떠났을 때, 우주는 아직 돌도 안 지난 아기였으니까.”시연이 손을 거두려는 순간, 우주가 갑자기 누나의 손을 붙잡으며 누나를 바라봤다.소년의 눈빛은 간절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누나, 가지 말까?”시연은 깜짝 놀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그래서 그런가...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진다니까.’ 저녁 회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단순히 목이 간질간질했는데, 곧이어 재채기가 계속 나왔고, 콧물에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깜짝 놀랐다.‘뜨거워... 감기다. 몸살이 왔어.’ 그녀는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연은 따뜻한 물을 끓여 계속 마시면서, 이불에 몸을 꽁꽁 감쌌다.‘이러면... 땀 나면서 열 좀 빠지겠지.’ 하지만 아무리 이불을 덮고 있어도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깐만... 쉬자...’ 그렇게, 시연은 핸드폰 진동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같은 시각, G시. 유건은 회사를 나와 BLUE로 향하던 중, 차에 올라타자마자 첫눈을 마주했다. 창밖에서는 조용히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네...’ 그때, 별산장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말해.” [고 대표님, 우주 도련님께서 며칠 뒤에 건강검진 예약이 잡혀 있는데요. 이쪽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이전 병원 기록을 요청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나한테 물어보면 뭐 해? 사모님한텐 연락 안 했어?” [네, 사모님께 먼저 연락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바쁘신 것 같아서요.]유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해볼게.”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계속 진동음만 울릴 뿐, 받지는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회의는 끝났을 텐데.’ ‘잠든 건가?’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럴 리 없는데...’ ‘시연이... 요즘 몸도 약해졌는데...’ 유건은 핸드폰을 꾹 쥐고 곧바로 옆자리에 앉은 지한에게 말했다. “시연이가 L시에 있는 호텔 이름 확인해.
임신 후기가 되면서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 시연은 L시까지 가는 KTX를 예약했다. 출장 기간은 일주일. 짐도 그만큼 많았다. 다행히 양석현 교수가 챙겨줘서 특실로 표를 끊을 수 있었다. 기차에 올라 지정석을 찾아갔지만, 자리 앞에서 시연은 한참을 고민했다. ‘이거... 혼자 올릴 수 있을까?’ 배가 제법 불러온 상태. 짐이 무거워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시연아.” 그녀가 돌아보자, 은범이 웃으며 서 있었다. “은범이...?”시연은 깜짝 놀랐지만, 그의 얼굴이 반갑긴 했다. “이 캐리어 네 거야?” “응.” “내가 해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범은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들어 선반에 올려주었다. “고마워.” “뭘, 당연히 해야지.” 두 사람의 좌석은 우연히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정말 묘한 인연. 시연은 낮게 웃으며 물었다. “난 L시에서 학회 발표가 있어서 가는 거야, 너는 출장?” “응.” 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약 복용 중이라 장거리 운전은 피하라고 하길래, 그냥 기차 타기로 했어.” ‘약...’ ‘그럼, 역시...’ 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은범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그래서 굳이 놀라는 척도,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은범의 그 담담한 말투 안에서 시연은 뭔가 미묘한 걸 느꼈다. “내가 그거, 알고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구나?” “응.” 은범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날,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웠어.” ‘역시... 알았구나.’ 시연은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제야 그날 이후 유건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모두 들어맞는 듯했다. “너였구나.” “응, 내가 고 대표한테 말했어.” 은범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곧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했던 일, 정말 미안해. 그 일로 두 사람 사이가 더 꼬인 건 아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건은 미묘하게 시선을 낮추며 기다렸다. “오늘 온 거, 프로젝트 투자자로서 문 과장님이랑 양 교수님의 체면을 봐서 온 거예요? 아니면... 정말, 나 때문이에요?” ‘이 질문은... 피하지 말고 꼭 해야 해.’ 생각보다 직설적인 질문에 유건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너는,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진심으로, 그녀도 헷갈렸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전자예요.” 그 말에 유건은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비웃는 것인지, 자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럼 당연히, 전자지.” 남자의 눈매가 비죽 올라갔다. “설마, 지금... 내가 너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 거야?” 시연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건은, 그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걸 알아챘다. ‘아, 진짜 그렇게 믿은 거야?’ 그는 낮게 웃었다. 어딘가 허탈한 웃음. “너, 참 재밌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궁금하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한다고... 나한테 마음도 없는 여자 붙잡고 질질 끌 사람으로 보여?”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뿐이고, 내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 말에 시연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착각했구나.’ 무안함과 동시에, 어딘가 가볍게 안도감이 스쳤다. 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네요. 그냥... 우리가 예전에 했던 그 이상한 결혼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 시절,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감정의 거래였으니까.’ 유건의 심장이 순간에 세게 쪼여왔다. ‘이상한 결혼 생활?’ ‘그게, 너한텐 그렇게까지 나빴던 거구나.’ 가슴이 먹먹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담담했다. “나도 그래.” 그는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유건은 계속 이해가 안 됐다.‘그 정도로 화가 났다고? 내가 온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사실 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예상했다. 시연이 자신을 반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비록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유건도 묘하게 가슴이 쓰렸다. ‘그래...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그 순간, 유건의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갔다. 살짝 몸을 기울여 시연의 귀에 대고 작게 물었다. “아까 족발, 좀 아쉬웠던 거지?”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웬 족발?’ 하지만 놀란 얼굴로 유건을 바라보던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헉... 들켰나?’ 유건은 그 반응 하나로 모든 걸 알아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더 시켜줄게.”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애도 아니고... 고작 한 점 덜 먹었다고 삐지는 거야?” “네?!” 시연은 반사적으로 부르려다 멈췄다. ‘뭐야, 지금 이 사람 왜 이래?’ ‘어디서 갑자기 예전처럼 굴고 있는 건데...’ 시연은 헷갈렸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거야? 아니면 진짜... 뭔가 바뀌었나?’ 잠시 후, 더 주문한 족발이 나왔다. 유건은 그것을 직접 들어 시연 앞에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먹어. 너 한 사람 먹으라고 더 시킨 거야. 그리고 오늘 회식비, 내 카드로 결제했어.” “당신...” 시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걸 해?’ 하지만 주변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런 자리에서 굳이 따질 수는 없었다. ‘이따가 따로 물어보자.’ 그녀는 결국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고, 족발을 한 점 들어 입에 넣었다. 유건은 조용히 웃었다.며칠간의 출장 때문에 쌓인 피로가 단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시연도 두 점쯤 먹고 나자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래, 이렇게까지 했는데... 굳이 삐져 있을 필요는
‘아래층? 무슨 아래층?’ 시연은 헛기침이 나왔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던 그녀는, 곧 유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지금 1층인데, 데리러 와줄래?’‘진짜... 온 거야?’ 그리고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잠깐...” 말도 제대로 안 마친 채, 주변 눈치도 보지 않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1층 로비로 향했다. 그곳에, 유건이 있었다. 정말로. 큰 키, 넓은 어깨, 공항에서 막 돌아온 듯한 모습.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 그 익숙한 실루엣. “시연아.” 유건은 시연을 발견하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길고 고된 이동 끝에도 그 눈빛엔 피곤 대신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시연은 다가가며 말했다. 그 얼굴엔 놀람만 가득했고, 기쁨은 없었다. ‘기뻐해야 하나? 아니잖아.’ 유건은 살짝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초대한 거 아니었어? 지금 보니까... 아닌가 봐?”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표정은 최대한 부드럽게 유지한 채. ‘솔직히 말하면, 진짜로 온 게 아직도 실감 안 나.’ “네가 초대한 거 맞잖아. 나는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못 간다’라고는 안 했고.” 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입꼬리에 묘한 웃음까지 살짝 얹었다. 그 말에 시연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아, 또 저런 말장난이네.’ ‘바쁘면 안 와도 괜찮은데... 굳이 시간 내서 오면 나는 또 ‘잘 지내는 부부’처럼 보여야 하잖아...’‘할아버지 앞에서도 그랬고, 이젠 과장님, 교수님들 앞에서도?’ 시연은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 사람이 그걸 몰랐다고?’ ‘난 우리 둘 사이, 서로 암묵적으로 선 그은 줄 알았는데.’ “사실...” 시연이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문광수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선생!” 시연은 본
지한은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형님... 근데 이건 좀 너무 빡빡한 거 아닙니까?” 유건이 직접 수정한 일정표에는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식사 시간은커녕, 수면 시간도 애매했다. “괜찮아.” 유건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대로 해. 중간중간 짬 날 때 눈 좀 붙이면 돼. 빨리 마무리하면, 빨리 돌아갈 수 있잖아.” 지한은 눈을 좁히며 물었다. “형님, 급하게 복귀하시는 이유라도...?” 유건은 짧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아버지 혼자 병원에 계시는데, G시를 너무 오래 비우니까 좀 신경 쓰여서.” 지한이 속으로 그 대답을 믿지 않았다.‘거짓말인 티가 너무 난다...’ ‘어르신은 전담 간호사도 있고, 형님은 G시에 있어도 병실에 잘 안 가시잖아...’ 하지만 그런 말을 지한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형님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있는 거겠지.’ ...드디어, 심폐 프로젝트팀의 축하 파티 날. 의사, 간호사, 인턴, 심지어 병동 도우미까지, 진료과 전원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출발 전, 모두가 병동 회의실에 모여 대기 중이었고, 주하은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시연의 팔짱을 꼈다. “시연아, 나랑 같이 다니자. 낯선 자리에서 혼자 있으면 어색하잖아.” “좋지.”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뭘.” 하은은 슬쩍 웃으며 시연을 흘끗 바라봤다. 그러다 못 참고 툭 던지듯 물었다. “근데... 고 대표님이랑 너, 이제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응...?” 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나랑 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흥... 그 눈빛은 못 속이지.” 하은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지만, 그 순간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연의 눈이 커졌다. ‘고유건’이라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왜?’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양석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그건 너한테 부탁할게. 부부 사이잖아, 말하기 편할 테니까.” ‘부부 사이...’ 시연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유건이 직접 나서서 논문 사건을 해결해 줬으니, 양석현 입장에선 두 사람이 사이가 좋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이, 그런 거 아니에요, 교수님...’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시연은 결국 꾹 삼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유건 씨가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요즘 워낙 바빠서요...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괜찮아.” 양석현은 부담 주지 않으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고 대표가 바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우리 문 과장님이랑 나도 충분히 이해해.” “네.” ...병실 돌아다닐 때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도 시연의 머릿속은 온통 ‘전화’ 생각뿐이었다. ‘며칠 전에 도움받았는데... 이렇게 또 연락하면, 진짜 내가 고유건한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루 종일 핸드폰을 쥐었다 놨다 반복하며 망설이던 시연은, 결국 늦은 밤, 조용한 집 안 거실에서야 조심스레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시연은 이 기다림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마치 몇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여보세요.]낮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시연?]이름을 불러주는 그 한마디에 시연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왜 이렇게 긴장돼...’ 입술을 한 번 핥고 나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 대표님.” [응?]유건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또 무슨 호칭이야? 장난치지 마. ‘고 대표님’은 너한테 해당 안 되는 말이야.]“아, 그게...” 시연은 급히 말을 이어갔다. “이번 전화는 내 사적인 용무가 아니라서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래?] 이번엔 유건의 말투가 조금 진지해졌다
그 질문은 유건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지하가 던진 말에, 유건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 인정해. 난 나비 공주를... 잊은 적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장소미가 나비 공주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감정은 자연스레 장소미에게 옮겨갔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생각해 봐.” 지하는 유건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였다. “기억 속 첫사랑이랑 계속 살 건지, 지금 네 앞에 있는 결혼이라는 현실과 살아갈 건지... 이제는 정해야 할 때 아냐?” “치.” 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지하를 노려봤다. “내가 장소미랑 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지만...” “넌... 내가 시연이랑 백년해로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냥... 나 놀리는 거지?” 지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굴렸다. “왜, 네가 더 억울한 표정이냐?” 그는 가볍게 반문하며, 유건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나만 더 묻자. 넌, 시연 씨한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다가가 본 적 있냐?” 유건은 말문이 막혔고, 대답하지 못했다. 지하는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없지.” “그럼 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시연 씨가 널 좋아해 주길 바라는 건데?” ‘그냥 돈이 많아서? 능력 있어서? 그게 다야?’ 유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그렇게 한심했나?’ 그 순간, 멀리서 강석이 당구봉을 흔들며 소리쳤다. “야, 너희 둘! 왜 거기서 연애 상담만 하냐? 와서 당구나 쳐!” “갈게!” 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겉옷을 벗었다. 일어서기 전, 유건을 다시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누굴 얻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야. 그럼 세상의 ‘순정남’들은 어디서 숨 쉬고 살겠냐?” 그 말은 유건의 가슴에 조용히 박혔다. ‘나 지금,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날 밤, 유건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댔고, 다음 날엔 아무 말 없
말을 마친 유건은 웃음을 거두고, 날카롭게 내뱉었다. “빨리 꺼져.” 은주는 유건의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안에 담긴 서늘한 분노가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래요... 인정 안 할 거면 갈게요!” 울먹이며 뒤돌아선 은주는 그대로 뛰쳐나갔다. 은주가 사라지자, 남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분위기, 왜 이렇게 민망하지...’ “저기, 그게...” 유건은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말을 꺼냈다. “오해하지 마. 그날 클럽에는 지하랑 거래처 사람들이 있었고...”“굳이 설명 안 해도 돼요.” 시연은 황급히 손을 저었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설명까지 필요하진 않잖아요. 법적으로만 안 끝났지, 서로의 감정은 이미 끝났으니까.”‘당신 마음은... 장소미를 향하고 있잖아.’ ‘이제 와서 해명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 말을 들은 유건은 얼어붙은 듯 시연을 바라봤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끝났다고?’ 둘 사이에 감돌던 공기가 더 묘하게 얼어붙었다. 시연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장소미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다행이죠, 뭐. 장소미였으면, 아까 그 상황을 설명할 겨를도 없었을걸요?”그 말에 유건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하... 그 이름을... 왜 굳이 지금 꺼내는 건데.’ 시연도 순간 후회했다. ‘말... 잘못했나?’ ‘괜히 분위기 풀어보려다 더 망친 것 같아...’이렇게 생각한 시연이 헛기침하자, 유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그는 먼저 걸음을 옮겼고, 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따라갔다. 차 안. 출발한 뒤에도 유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운전만 할 뿐. 남자의 손은 단단히 핸들을 쥐고 있었다. 표정은 차분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