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시연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한마디로 거절했다.유건의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 유건의 가슴은 바늘로 찌르는 듯했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날 싫어해?” 시연이는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리고, 조용히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도 알잖아요. 나랑 장소미, 절대 안 맞아요.” 이어서 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당신을 위해서라도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시연은 이 말을 뱉으며 자신의 속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이 유건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그리고 더 이상, 유건에게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시연은 한 번 더 못 박았다. “앞으로도... 웬만하면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또 덧붙였다.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치면... 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하자고요.” 그러고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진짜 가볼게요.” “그래.” 유건은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뻔했다. 시연은 돌아섰고, 유건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가 멀어지는 걸. 점점 멀어지는 걸. 모두 다 유건이 예상했던 결말이었지만, 시연이 이렇게 빨리, 이렇게 단호하게 떠날 줄은 몰랐다. 한순간, 그는 발을 떼고 싶었고, 시연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유건의 발은 바닥에 단단히 박힌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가서 뭐 하게?’ ‘나는 이미 저 사람을 놓아줬잖아.’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저 사람을 다시 붙잡겠어?’ ‘그리고 저 사람은 자유를 원했고, 이제야 결국 자유를 얻었어.’ ‘그러니까... 저 사람이 분명히 아주 기뻐할 거야.’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방해하지 말자.’ ‘이젠, 정말 다 끝났으니까.’...강울대학교병원, VIP 병동 밖. 시연은 가방을 메고, 작은 짐을 들고,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시연은 빠르게 걸어갔지만, 지동성과의 거리를 확실히 두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동성은 멋쩍게 웃으며, 손에 든 쇼핑백을 내밀었다. “우리 딸이 좋아하는 거 아빠가 사 왔어. 받아.” 시연은 받고 싶지 않았지만, 지동성은 억지로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그녀는 괜히 관심 끌기 싫었다. ‘그냥 받아 두자. 그저 음식일 뿐이니까.’ ‘대단한 값어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녀가 쇼핑백을 받자, 지동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슬쩍 시연을 바라봤다. “많이 말랐네.” 그는 애써 다정한 말투를 유지하려 했다. “밥 좀 잘 챙겨 먹어.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됐어요.” 시연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냉소적인 미소를 띠며 말을 끊었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데요?”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이제 와서 나한테 관심 있는 척할 자격이나 있어요?” 표정이 굳은 지동성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시연아, 그래도 난 네 아버지야.” “그래서요?” 시연이는 비웃듯이 쳐다봤다. “이제 와서 ‘아버지’ 타이틀 꺼내 들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요?” “그게... 아니다.” 지동성은 계속 말하려고 했는데, 시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13년 동안 내 인생에 없었던 아버지가, 이제 와서 ‘부성애’를 보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딸의 말이 지동성을 세게 후려쳤고, 지동성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시연도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더 할 말 없죠?” 그녀는 차갑게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그냥, 날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어차피 나한테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시연은 돌아섰다.
늦은 밤, 진아의 집.시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없어.”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원래 예상했던 대로 됐어. 그 사람은 장소미랑 함께 가기로 했고.” 그리고 간략하게 유건과 나눴던 대화를 진아에게 설명했다. “그게 전부야.” “뭐?!” 진아는 바로 폭발했다. “야, 말이 돼? 지가 원할 땐 갖고, 이제 필요 없으니까 버려?” 그녀는 격분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인간, 진짜 이렇게까지 쓰레기일 줄은 몰랐네!”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뭘 어쩌려고?” 시연이 팔을 붙잡았다. “찾아가서 따질 거야!” 진아는 당연한 듯 말했다. “돈 많으면 사람 가지고 장난쳐도 되는 거야?” “됐어.” “야, 뭐가 ‘됐어’야?” “진아야.” 시연은 한숨을 쉬며 웃었다. “너도 인정했잖아. 그 사람은 그냥 쓰레기야.” “그래서?” “쓰레기 때문에 우리가 피곤할 필요 있어?” 진아는 입을 꾹 다문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열이 올랐다. “그래도,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안 보면 돼.” “앞으로 우린, 그 인간들을 싹 다 피해 다니는 거야.” “찬성.” 진아는 단번에 동의한 후, 곧바로 현실적인 문제를 물었다. “근데, 기숙사는 어떻게 할 거야?” “안 들어갈 거야.” 시연은 단호했다. 그녀가 더 이상 기숙사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배가 점점 불러올 테니까. 법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괜한 시선 끌고 싶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럼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 “응.” 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당분간 신세 좀 질게.” 하지만, 이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을 터였다. 진아의 집은 너무 작았으니 말이다.무엇보다, 시연이 아이를 낳으면 더욱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비록 유건이 말했던 SKY전원주택단지
아마 한바탕 울고 나서인지, 가장 힘든 순간은 이미 지나간 듯했다. 실시간 검색어를 보며 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어떻게 터진 거지?’ 유건은 원래부터 조용한 성격이라 그동안 언론에 노출된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성과 엮인 스캔들은 전무했다. G시에서 고유건 대표는 청렴한 이미지로, 재벌가 남성들의 모범이라 불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이런 기사가 터졌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었다.즉, 이미 유건의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는 것.아니면 누가 감히 고유건의 이름을 함부로 기사화할 수 있겠는가? 이건 유건이 직접 허락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유건은 G시에 대놓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라고. “하...” 시연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꽤 낭만적이네.” 진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시연아, 너 괜찮아?” “응? 뭐가?” 시연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유건을 차단했다. 하지만 진아는 오히려 더욱더 친구를 걱정했다.‘시연이 정말 괜찮은 거 맞을까?’ ...한편, 주지한은 병실로 들어섰다. “형님.” 그는 핸드폰을 유건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젯밤에도 잠을 설친 탓에 유건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유건은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자신과 장소미가 함께 찍힌 사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으니 말이다. 그 사진은 소미가 입덧으로 힘들어하던 날, 유건이 촬영장에 방문했던 그날 찍힌 것이었다. 지한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 일부러 언론을 매수해 이슈를 키운 것 같습니다.” ‘누가 감히 이런 짓을?’ 유건은 얇은 입술을 떼며 단숨에 답을 내렸다. “장소미.” 유건을 아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이런 기사를 내지 못했을 터. 이걸
“그 여자가 시연이보다 예쁘기라도 해? 아니면 더 다정하고 속이 깊어?” 유건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은 복잡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했다. “아이고!” 고상훈은 답답한 마음에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야! 당장 실시간 검색어를 내리고, 해명문부터 올려! 너랑 그 딴따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그러다 문득 떠올랐는지 덧붙였다. “잠깐, 시연이는 알고 있냐? 그 아이는 인터넷 서핑을 안 해서 아마 이걸 모를 거야. 만약 알게 됐다면, 네가 잘 달래야 할 거야.” 그러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너, 제대로 할 수 있겠냐? 필요하면 내가 직접 나설까?” 유건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다. 손자의 반응 없는 태도에, 고상훈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시연이는? 왜 안 보이냐?” “너 아프다고 계속 곁에 있던 애 아니었냐? 같이 있어야 정상인데.” “할아버지.” 유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상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시연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뭐?” “그 애 이미 다 알았나 봐. 화가 많이 났겠구나.” 고상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고,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 아이, 지금 어디 있냐? 같이 가자. 할아버지가 너 대신 나서서 데리고 오마.” 그러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유건이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안 가셔도 됩니다.” “뭐라고?” 고상훈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손자를 바라봤다. “네가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이건 네 잘못이야. 잘못했으면 무조건 가서 빌어야지!” 그러나 유건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짧게 뱉었다. “저랑 시연이는 끝났어요.” 찰나의 정적. 고상훈은 얼어붙은 듯 유건을 바라보았고,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듯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마치 천둥 같은 고함
병원은 24시간 환하게 빛났지만, 유건의 세상은 어둠뿐이었다. ‘시연이가... 나를 차단했어.’ 순간, 그는 시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친구도 될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설령 마주쳐도, 우린 그냥 남남이라고. 유건의 가슴 한쪽이 휑하게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허전함. 시연은 진짜 자신이 말한 대로 했다. 완벽하게,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유건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지한아.” “네, 형님.” “시연이한테 전화해서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고 전해.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신다고.” “알겠습니다.” 지한은 형님이 직접 전화를 걸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몇 초 후,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지한 씨?]그 순간, 유건의 숨이 턱 막혔다. ‘시연이가... 전화를 받았네.’ 지한은 형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형수님, 어르신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형수님을 보고 싶어 하시고요.” [할아버지께서요?]순간, 시연이 들고 있던 펜이 툭 떨어졌고, 시연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요? 갑자기요? 많이 안 좋으세요?] “화를 너무 많이 내시는 바람에... 지금 수술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도 아직 정확한 상태는 잘 모릅니다.” [그렇군요.]“형수님.” 지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형님의 지시를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르신을 뵈러 오실 거죠?” 그쪽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형수님?” 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쉬었다. [미안해요, 지한 씨. 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네?” [유건 씨가 할아버지를 잘 돌봐 드릴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저는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형수님,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할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렸어요.” 소미는 자책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발표라도 해서 해명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 유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야. 그대로 두자.” “그대로 두자고요?” 소미는 순간 얼떨떨했다. 확신이 서지 않는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유건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답했다. “시연이는 이미 우리 집안을 떠났어. 난 소미 씨와 아이에게 책임질 거고.” 소미는 온몸이 떨렸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놀람과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드디어!’ “진짜예요?” “응.” 유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훈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는 더 길게 말할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당장 받아들이지 못하실 거야.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천천히 설득해야 해.” “네!” 소미는 눈물을 머금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 유건은 몸을 돌려 정민환을 불렀다. “네, 형님.” “소미 씨를 데려다줘.” 그렇게 지시한 뒤, 유건은 다시 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난 할아버지를 지켜야 해서 같이 가지 못해.” “괜찮아요.” 소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를 잘 돌봐 드리세요. 유건 씨 몸도 신경 쓰고요.” “그럼 갈게요.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그래.” 뒤돌아선 순간, 소미는 벅찬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드디어, 고유건이 내 곁으로 돌아왔어!’ ‘내 것은 결국 내 것이야. 지시연이 아무리 뺏으려고 했어도... 아쉽지만, 능력이 부족했던 거라고!’ ...다음 날. 임진아가 돌아오자마자, 시연은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 “어때? 내과 건물에 있는 친구한테 물어봤어?” “응, 걱정하지 마.” 진아가 손가락으로
밤 8시가 다 되어갈 무렵, 정민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연은 살짝 놀랐다. “여보세요?” [형수님.] 전화기 너머, 민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 SKY 전원주택단지로 가는 중입니다. 집에 계신가요?]시연은 의아했다. “거긴 왜요?” [형님이 시키신 겁니다. 본가에 있던 형수님 짐을 다 정리해서 보내라고 해서요.]‘아, 그렇구나...’시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어떡하지? 나는 지금 SKY 전원주택단지에 없는데...’“잠깐만요, 지금 집에 없어요.” [괜찮습니다.] 민환은 담담하게 말했다. [기다릴 수 있으니 천천히 오세요. 얼마나 늦든 기다리겠습니다.]‘이렇게 나오면 안 갈 수도 없는데.’시연은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지금 갈게요. 그럼 먼저 도착한 사람이 기다리는 걸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후, 시연은 급히 가방을 챙겨 SKY 전원주택단지로 향했다.하지만 택시를 부르진 않았는데, 주말이라 도로가 많이 막힐 것 같아서 지하철을 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먼저 도착했다. SKY 전원주택단지는 원래 시연이와 유건의 신혼집이었다. 하지만, 오늘이 처음 오는 날이었다. 출입 카드, 비밀번호, 키, 모두 시연에게 있었다. 시연이 무사히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민환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집은 꽤 컸다. 2층 반짜리 단독주택,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 ‘괜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건 실례겠지?’그녀는 조심스레 거실 소파에 앉아 민환을 기다렸다. 그 사이, 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임진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따가 나 좀 데리러 와줘.]짐이 많을 것 같아 혼자 옮기기는 어려울지도 몰랐다. 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어? 저게 뭐지?’시연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난간 쪽으로 다가갔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
차가 시연 앞에 멈췄다.창문이 내려가더니, 지한이 고개를 내밀고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타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시연은 유건을 흘낏 보았다.‘이상하네, 왜 조수석에 앉아 있지?’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또 유건의 차를 타면 점점 엮이게 될 것 같았다.“형수님, 얼른 타세요.” 지한은 차를 움직일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내려서 직접 문 열어드려야 합니까?”“아니에요...”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뭐야, 버스 정류장에 세우면 안 되는 거 몰라?”“그러니까! 버스가 못 지나가잖아.”“빨리 가라고!”“벤틀리네, 저런 차를 태워준다는데 안 탄다고?”“재수 없어.”점점 더 듣기 거북한 말들이 오갔다.어쩔 수 없이, 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탔다.“형수님, 어디로 가면 됩니까?”차에 타자마자, 지한이 물었다.시연은 대답 대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건을 바라보았다.‘이거 완전 악연 아니야? 왜 자꾸 마주치는 거지?’“형수님.” 지한이 웃으며 유건을 가리켰다. “마침 형님이 차에 계시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어차피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요.” 시연은 당황했다. ‘이 둘 뭐 하는 거야?’“이제 목적지 말해주실래요?”지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형수님, 실은 우리도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그저 한 번 모시고 가는 걸로 부담 갖는 건 아니시죠?”지한의 말에 시연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산신당으로 갈 거예요.”지한은 잠시 멈칫하더니, 본능적으로 조수석의 유건을 바라보았다.“거기서 볼일 있으세요?”“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살 게 있어서요.”‘거기서 뭘 사려는 거지?’산신당은 G시보다 더 오래된 곳일지도 모른다. 사찰뿐만 아니라 재래시장도 있어, 평범한 서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으니 말이다.분명 번잡하고 활기차지만, 고급스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한테 단 한 번도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지동성은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다시 한번 말하마. 우주를 ‘웰스’로 보내는 돈은 이 아빠가 다 낼게.” 시연은 멍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데, 이해할 수 없었다.“왜요?”지동성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듯 말했다.“아버지가 자식한테 돈을 주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니?”‘이유가 필요하냐고? 그럼 그때 우주의 치료비를 끊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건 누구였더라?’‘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그 중심에 있던 거 아니었나?’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 곧이어, 지동성이 말을 이었다.“시연아, 곧 다가올 아빠의 생일에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구나.”시연은 또다시 얼어붙었다.‘오늘따라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무심결에 튀어나왔다.“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흠.”지동성이 가볍게 기침했다.“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앞으로 몇 번이나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단다. 가족끼리 모여서 밥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 ‘뭐 이런 헛소리가 다 있어?’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흘렸다.“아내도 있고 딸도 있잖아요. 가족이랑 매일매일 함께하잖아요?”“시연아.”지동성이 딸의 말을 끊고,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너와 우주도 아빠의 자식이야.”그는 모델 조립에 열중하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아빠의 생일에 와준다면, 네가 나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그때가 되면 우주의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 내가 책임지마.” ‘우주를 빌미로 협박하는 거야?’시연은 본능적으로 떠올렸다.‘로얄호텔에서의 그때도...’그녀는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딸의 반응을 본 지동성도 깨달은 듯했다. 잠시 스치는 후회의 눈빛.“아빠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냥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뿐
주말, 시연은 여느 때처럼 태산 요양병원에 우주를 보러 갔다.“시연 씨.”간호사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늘은 꽤 이른데요?”“실습이 끝났거든요.”“그분, 시연 씨보다 더 일찍 왔어요.”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누가요?”“지난번에도 왔던 분이요. 시연 씨랑 우주의 아버지라고 하시던데요?”순간, 시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지동성이야?’‘요즘 대체 왜 저러는 거야?’“그리고...”간호사가 시연을 조용히 불러 세우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분이 우주가 ‘웰스’ 검사받은 거에 관해 물어보셨어요.”그 말을 듣자, 시연의 이마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알겠어요. 고마워요.”“별말씀을요.”간호사와 작별한 뒤, 시연은 우주의 병실로 들어갔다.방 안, 우주는 바르게 앉아 있었고, 지동성은 그의 맞은편에서 상자를 열고 있었다.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우주야, 그거 마음에 드니?”멀리서 본 그것은, 비행기 모델이었다.우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남자아이들이 이런 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누나.”우주는 고개를 들어 시연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최근 이 아저씨가 자주 찾아오긴 했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나가 싫어한다면, 그 선물을 받을 순 없었다.우주가 실망하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시연은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우주가 마음에 들면 받아. 그리고 감사하다고 해야지.”“아, 감사합니다!”우주는 기쁜 듯 지동성을 향해 방긋 웃으며 상자를 안아 들었다.“우주야, 잘 가지고 놀아.”“네!”시연은 그제야 지동성을 마주 보았다.“오셨어요?”그녀는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건넸다.“지난번엔 오실 줄 몰라서 못 돌려줬는데, 이번엔 가져왔어요. 돌려드릴게요.”지난번, 지동성이 간식 봉투 안에 넣어둔 돈이었다.지동성은 찡그리며 받지 않았다.“받으세요.”시연은 재촉하며 덧붙였다.“그리고, 그 모델 얼마 주고 사셨어요? 같이 송금해 드릴게요.”“시
“그럼,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 “간호사님, 수액 놔주세요.” 유건은 한발 물러서며, 핸드폰을 꺼내 은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은범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네 번까지. 그는 결국 포기했고, 다시 수액실로 돌아왔다. 그 사이, 간호사는 이미 시연에게 주사를 놓고 있었다. 시연은 조용히 눈을 감고, 수액을 맞고 있었다. 유건이 들어서자, 시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가려는 거예요?” 유건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아직은 못 가.” 그는 핸드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너희 ‘은이’가 전화를 안 받더라고.” 시연은 순간 멍해져서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바쁘겠죠.” “응.” 유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액실은 냉방이 켜져 있었고, 침상에는 이불이 없었다. 유건은 입고 있던 정장 외투를 벗어, 시연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좀 불편해도 참아. 네 남자 친구한테 안전하게 넘기기 전까진, 절대 못 가.” 남자의 태도는 변함없이 고집스러웠다. ‘이 남자는 정말로 쉽게 물러나지 않는구나.’ 결국 시연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그냥 유건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기로 했다. 그 사이, 유건의 핸드폰이 몇 번 울렸다. 그는 멀리 가지 않고, 시연의 곁에서 전화를 받았다. 실은 유건에게 온 전화는 대부분 주지한이 걸어온 업무 관련 전화였다.“난 못 가니까 네가 알아서 처리해.” “그래, 그렇게 해.” 시연은 눈을 감은 채,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일이 있다면서, 왜 끝까지 여기에 남아 있는 거야?’ ‘나를 쉽게 놓을 수 없다는 건가?’ 시연은 손바닥이 따끔거릴 정도로 손을 꽉 쥐었다.첫 번째 수액이 끝날 무렵, 이번엔 은범의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유건이 전화를 받자마자, 목소리에서 불쾌감이 묻어났다. “노 사장님, 바쁘셨나 보네요.” 전화기 너머의 은범이 정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