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의 품에 안긴 채, 시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굳힌 채, 남자를 안아주는 일 없이, 그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있었다. 그러다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유건 씨의 사과, 받아줄게요.” 그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 속엔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순간, 유건은 천천히 시연을 놓아주었다. 비록 계속 시연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유건은 그럴 자격이 이제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위자료 관련해서, SKY전원주택단지의 그 집의 명의는 네 앞으로 넘길 거야. 그리고 현금, 기타 부동산도 정리해서...” “하...” 시연이는 남자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미안해요.” 시연은 입술을 다물고, 조금 얌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내가 위자료를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안 줘도 돼요. 우리,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녀는 분명히 ‘계약 결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는 듯했다. “아니야.” 유건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받아야 할 몫이야. 그냥 받아 줘.” ‘그리고 우리 사이는 이미 거래 관계가 아니었잖아.’‘다 내가 잘못했어.’남자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시연은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넘겼다. “알았어요. 받을게요.”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시연이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어디 가?” 유건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떨쳐내고,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난 후 말했다. “여긴 유건 씨의 병실이
“아니요.” 시연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한마디로 거절했다.유건의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 유건의 가슴은 바늘로 찌르는 듯했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날 싫어해?” 시연이는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리고, 조용히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도 알잖아요. 나랑 장소미, 절대 안 맞아요.” 이어서 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당신을 위해서라도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시연은 이 말을 뱉으며 자신의 속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이 유건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그리고 더 이상, 유건에게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시연은 한 번 더 못 박았다. “앞으로도... 웬만하면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또 덧붙였다.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치면... 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하자고요.” 그러고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진짜 가볼게요.” “그래.” 유건은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뻔했다. 시연은 돌아섰고, 유건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가 멀어지는 걸. 점점 멀어지는 걸. 모두 다 유건이 예상했던 결말이었지만, 시연이 이렇게 빨리, 이렇게 단호하게 떠날 줄은 몰랐다. 한순간, 그는 발을 떼고 싶었고, 시연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유건의 발은 바닥에 단단히 박힌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가서 뭐 하게?’ ‘나는 이미 저 사람을 놓아줬잖아.’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저 사람을 다시 붙잡겠어?’ ‘그리고 저 사람은 자유를 원했고, 이제야 결국 자유를 얻었어.’ ‘그러니까... 저 사람이 분명히 아주 기뻐할 거야.’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방해하지 말자.’ ‘이젠, 정말 다 끝났으니까.’...강울대학교병원, VIP 병동 밖. 시연은 가방을 메고, 작은 짐을 들고,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시연은 빠르게 걸어갔지만, 지동성과의 거리를 확실히 두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동성은 멋쩍게 웃으며, 손에 든 쇼핑백을 내밀었다. “우리 딸이 좋아하는 거 아빠가 사 왔어. 받아.” 시연은 받고 싶지 않았지만, 지동성은 억지로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그녀는 괜히 관심 끌기 싫었다. ‘그냥 받아 두자. 그저 음식일 뿐이니까.’ ‘대단한 값어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녀가 쇼핑백을 받자, 지동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슬쩍 시연을 바라봤다. “많이 말랐네.” 그는 애써 다정한 말투를 유지하려 했다. “밥 좀 잘 챙겨 먹어.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됐어요.” 시연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냉소적인 미소를 띠며 말을 끊었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데요?”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이제 와서 나한테 관심 있는 척할 자격이나 있어요?” 표정이 굳은 지동성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시연아, 그래도 난 네 아버지야.” “그래서요?” 시연이는 비웃듯이 쳐다봤다. “이제 와서 ‘아버지’ 타이틀 꺼내 들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요?” “그게... 아니다.” 지동성은 계속 말하려고 했는데, 시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13년 동안 내 인생에 없었던 아버지가, 이제 와서 ‘부성애’를 보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딸의 말이 지동성을 세게 후려쳤고, 지동성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시연도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더 할 말 없죠?” 그녀는 차갑게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그냥, 날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어차피 나한테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시연은 돌아섰다.
늦은 밤, 진아의 집.시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없어.”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원래 예상했던 대로 됐어. 그 사람은 장소미랑 함께 가기로 했고.” 그리고 간략하게 유건과 나눴던 대화를 진아에게 설명했다. “그게 전부야.” “뭐?!” 진아는 바로 폭발했다. “야, 말이 돼? 지가 원할 땐 갖고, 이제 필요 없으니까 버려?” 그녀는 격분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인간, 진짜 이렇게까지 쓰레기일 줄은 몰랐네!”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뭘 어쩌려고?” 시연이 팔을 붙잡았다. “찾아가서 따질 거야!” 진아는 당연한 듯 말했다. “돈 많으면 사람 가지고 장난쳐도 되는 거야?” “됐어.” “야, 뭐가 ‘됐어’야?” “진아야.” 시연은 한숨을 쉬며 웃었다. “너도 인정했잖아. 그 사람은 그냥 쓰레기야.” “그래서?” “쓰레기 때문에 우리가 피곤할 필요 있어?” 진아는 입을 꾹 다문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열이 올랐다. “그래도,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안 보면 돼.” “앞으로 우린, 그 인간들을 싹 다 피해 다니는 거야.” “찬성.” 진아는 단번에 동의한 후, 곧바로 현실적인 문제를 물었다. “근데, 기숙사는 어떻게 할 거야?” “안 들어갈 거야.” 시연은 단호했다. 그녀가 더 이상 기숙사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배가 점점 불러올 테니까. 법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괜한 시선 끌고 싶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럼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 “응.” 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당분간 신세 좀 질게.” 하지만, 이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을 터였다. 진아의 집은 너무 작았으니 말이다.무엇보다, 시연이 아이를 낳으면 더욱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비록 유건이 말했던 SKY전원주택단지
아마 한바탕 울고 나서인지, 가장 힘든 순간은 이미 지나간 듯했다. 실시간 검색어를 보며 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어떻게 터진 거지?’ 유건은 원래부터 조용한 성격이라 그동안 언론에 노출된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성과 엮인 스캔들은 전무했다. G시에서 고유건 대표는 청렴한 이미지로, 재벌가 남성들의 모범이라 불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이런 기사가 터졌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었다.즉, 이미 유건의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는 것.아니면 누가 감히 고유건의 이름을 함부로 기사화할 수 있겠는가? 이건 유건이 직접 허락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유건은 G시에 대놓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라고. “하...” 시연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꽤 낭만적이네.” 진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시연아, 너 괜찮아?” “응? 뭐가?” 시연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유건을 차단했다. 하지만 진아는 오히려 더욱더 친구를 걱정했다.‘시연이 정말 괜찮은 거 맞을까?’ ...한편, 주지한은 병실로 들어섰다. “형님.” 그는 핸드폰을 유건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젯밤에도 잠을 설친 탓에 유건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유건은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자신과 장소미가 함께 찍힌 사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으니 말이다. 그 사진은 소미가 입덧으로 힘들어하던 날, 유건이 촬영장에 방문했던 그날 찍힌 것이었다. 지한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 일부러 언론을 매수해 이슈를 키운 것 같습니다.” ‘누가 감히 이런 짓을?’ 유건은 얇은 입술을 떼며 단숨에 답을 내렸다. “장소미.” 유건을 아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이런 기사를 내지 못했을 터. 이걸
“그 여자가 시연이보다 예쁘기라도 해? 아니면 더 다정하고 속이 깊어?” 유건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은 복잡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했다. “아이고!” 고상훈은 답답한 마음에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야! 당장 실시간 검색어를 내리고, 해명문부터 올려! 너랑 그 딴따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그러다 문득 떠올랐는지 덧붙였다. “잠깐, 시연이는 알고 있냐? 그 아이는 인터넷 서핑을 안 해서 아마 이걸 모를 거야. 만약 알게 됐다면, 네가 잘 달래야 할 거야.” 그러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너, 제대로 할 수 있겠냐? 필요하면 내가 직접 나설까?” 유건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다. 손자의 반응 없는 태도에, 고상훈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시연이는? 왜 안 보이냐?” “너 아프다고 계속 곁에 있던 애 아니었냐? 같이 있어야 정상인데.” “할아버지.” 유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상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시연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뭐?” “그 애 이미 다 알았나 봐. 화가 많이 났겠구나.” 고상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고,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 아이, 지금 어디 있냐? 같이 가자. 할아버지가 너 대신 나서서 데리고 오마.” 그러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유건이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안 가셔도 됩니다.” “뭐라고?” 고상훈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손자를 바라봤다. “네가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이건 네 잘못이야. 잘못했으면 무조건 가서 빌어야지!” 그러나 유건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짧게 뱉었다. “저랑 시연이는 끝났어요.” 찰나의 정적. 고상훈은 얼어붙은 듯 유건을 바라보았고,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듯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마치 천둥 같은 고함
병원은 24시간 환하게 빛났지만, 유건의 세상은 어둠뿐이었다. ‘시연이가... 나를 차단했어.’ 순간, 그는 시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친구도 될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설령 마주쳐도, 우린 그냥 남남이라고. 유건의 가슴 한쪽이 휑하게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허전함. 시연은 진짜 자신이 말한 대로 했다. 완벽하게,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유건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지한아.” “네, 형님.” “시연이한테 전화해서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고 전해.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신다고.” “알겠습니다.” 지한은 형님이 직접 전화를 걸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몇 초 후,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지한 씨?]그 순간, 유건의 숨이 턱 막혔다. ‘시연이가... 전화를 받았네.’ 지한은 형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형수님, 어르신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형수님을 보고 싶어 하시고요.” [할아버지께서요?]순간, 시연이 들고 있던 펜이 툭 떨어졌고, 시연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요? 갑자기요? 많이 안 좋으세요?] “화를 너무 많이 내시는 바람에... 지금 수술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도 아직 정확한 상태는 잘 모릅니다.” [그렇군요.]“형수님.” 지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형님의 지시를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르신을 뵈러 오실 거죠?” 그쪽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형수님?” 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쉬었다. [미안해요, 지한 씨. 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네?” [유건 씨가 할아버지를 잘 돌봐 드릴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저는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형수님,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할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렸어요.” 소미는 자책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발표라도 해서 해명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 유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야. 그대로 두자.” “그대로 두자고요?” 소미는 순간 얼떨떨했다. 확신이 서지 않는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유건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답했다. “시연이는 이미 우리 집안을 떠났어. 난 소미 씨와 아이에게 책임질 거고.” 소미는 온몸이 떨렸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놀람과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드디어!’ “진짜예요?” “응.” 유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훈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는 더 길게 말할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당장 받아들이지 못하실 거야.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천천히 설득해야 해.” “네!” 소미는 눈물을 머금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 유건은 몸을 돌려 정민환을 불렀다. “네, 형님.” “소미 씨를 데려다줘.” 그렇게 지시한 뒤, 유건은 다시 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난 할아버지를 지켜야 해서 같이 가지 못해.” “괜찮아요.” 소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를 잘 돌봐 드리세요. 유건 씨 몸도 신경 쓰고요.” “그럼 갈게요.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그래.” 뒤돌아선 순간, 소미는 벅찬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드디어, 고유건이 내 곁으로 돌아왔어!’ ‘내 것은 결국 내 것이야. 지시연이 아무리 뺏으려고 했어도... 아쉽지만, 능력이 부족했던 거라고!’ ...다음 날. 임진아가 돌아오자마자, 시연은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 “어때? 내과 건물에 있는 친구한테 물어봤어?” “응, 걱정하지 마.” 진아가 손가락으로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흐흑... 흐윽...]전화기 너머로 장미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빠 비서한테 전화 왔어... 회사에서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대! 지금 병원으로 이송됐고, 나도 지금 가는 중이야! 소미야, 네가 더 가까우니까 먼저 좀 가봐!]“알겠어요, 엄마!”소미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가엔 금세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유건 씨... 우리 아빠가 또 쓰러지셨어요...”사정을 들은 유건은 곧장 몸을 일으켜, 여자의 팔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같이 가자. 내가 함께할게.”“네... 유건 씨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 혼자였으면 무너졌을지도 몰라요.”...장미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지동성은 응급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이번엔 지난번보다도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지동성은 입원했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담당 교수도 장담할 수 없었다.“지금은 경과를 보셔야 합니다.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흑...”병상 옆 의자에 앉은 장미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걸 어쩌면 좋아... 네 아빠, 갈수록 심해지는데... 간이식도 아직 못 받았는데...”갑자기 장미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유건을 바라봤다.“고 대표님, 간 이식 소식은 아직도 없는 건가요?”이전에 유건은 간 이식 대기자를 대신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직은 연락이 없습니다.”그는 도와주기로 했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결국 ‘운’과 ‘순번’이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돈이 많다고 먼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흐흑... 흐으...”장미리는 더욱 흐느껴 울며, 소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소미야... 네 아빠, 의식도 없고... 이대로면... 정말 오래 못 버틸 수도 있어...”“그럴 리 없어요, 엄마. 아직 방법이 있을 거예요.”소미는
여자애는 두 손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진짜 살짝만, 살짝만 만져볼게요.”말처럼, 여자애의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와... 아기가 있는 배는 이런 느낌이구나! 선생님, 진짜 대단해요. 엄마 되는 거, 완전 힘든 일인데...”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누굴 찾는 건가요?”“저요?”여자애는 손을 거두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깨에 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혹시 변이준 있어요? 저 보고 오라 그랬거든요.”‘이준 선배님?’“수술 들어가셨어요.”“헉, 진짜요?”여자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아싸, 잘됐다!”그 말과 동시에,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멨다.“선생님, 나중에 변이준이 오면 전해주세요. 저 왔다 갔다고, 없어서 먼저 간다고요!”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벌써 휙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이었다.“어... 네...”시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여기가 무슨 호랑이굴이라도 되는 건가? 저렇게까지... 도망갈 일인가?” 그래도, 궁금했다. ‘저 친구... 선배님이랑 어떤 사이지?’‘여동생일까? 닮은 구석은 없었는데...’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눈에 띄게 수려했다는 정도?’오후 2시쯤, 변이준이 수술을 마치고 내려왔다.머리는 아직 축축했지만, 얼굴은 늘 그렇듯 환했다.시연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선배님, 의뢰하신 처방은 이미 내려놨어요. 환자도 약을 복용 중이고요.”“역시, 고마워!”이준은 환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훑었다. 그때, 시연은 문득 오전 일을 떠올렸다.“아, 맞다. 오늘 오전에 어떤 여자분이 선배님을 찾아왔었어요. 근데 안 계셔서 그냥 간다고 하시던데요?”“그냥... 갔다고?”그 말을 들은 이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하... 그 녀석, 말을 좀 듣고 살면 어디 덧나나...”이준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더 이상 머리를
단 한 마디. 그 말에 시연은 마치 얼음물에 던져진 듯 몸이 굳었다.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따갑지?’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따가운 말이 그녀를 후려쳤다.“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건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냉소가 담긴 웃음이었다.“내가 왜 양석현 교수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것 같아?” “내가 마음이 약해서? 돈이 남아돌아서? 밤에 잠이 안 와서?”순간,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건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아니, 다 아니야. 널 위해서였어. 널 아끼니까, 널 좋아하니까, 돈을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던 거야.”그 말을 끝내고, 유건은 웃었다. 이번엔 대놓고,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근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또 돈을 써야 하지? 지금의 네가, 그럴 가치가 있나? 차라리 그 돈으로 비둘기 밥이나 주는 게 더 낫겠는데?” 시연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건은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제 가고,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너랑 엮이는 거, 진심으로 지긋지긋해. 너랑 관련된 모든 일은 다 끝났어.”그는 돌아섰다. 단호하고 차가운 걸음이었다.“유...” 시연은 반사적으로 불러보려 했지만, 목에 걸린 그의 이름은 한 글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 해...’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심장도, 생각도, 감정도 전부 마비된 채로.그 순간, 유건이 다시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저 등을 보인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일부러 찾아왔고, 부부였던 정은 있으니까... 지원금은 지한이 통해서 처리하도록 할게. 하지만 이번뿐이야. 다음은 없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차로 향했고, 조용히 문을 열고 올라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그대로 떠나버렸다.그리고 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가을 오후의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지한이 보기엔, 시연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간 듯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하지만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막 나온 시연은 멀리서 유건과 지한이 정문을 지나 계단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기 있다...!’더는 생각할 틈이 없어서 시연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유건 씨!”문 앞에서 유건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놀란 듯 고개를 돌리자, 시연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여자의 걸음은 빨랐고, 숨이 찰 정도로 다급했다. 유건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저 여자... 아직도 안 갔던 거야?’“유건 씨! 잠깐만요!”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거의 뛰다시피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건은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배가 저렇게 불렀는데도... 뛰고 있어?’ 하지만 곧 속으로 비웃듯 생각했다.‘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유건 씨...” 시연은 겨우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잠깐이면 돼요. 몇 분이면 되는데... 시간 좀 줄 수 있어요?”맑은 눈망울이 간절히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유건은 잠시 목이 메는 듯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비웃듯 느릿하게 말했다.“신기하네. 네가 먼저 날 찾을 줄은 몰랐거든.”“그게 아니라, 나...”그러나 시연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유건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근데 난, 너한테 줄 시간이 없어. 단 1분도.”차가운 눈매, 건조한 말투. 남자의 입꼬리는 비쭉 올라갔지만, 표정엔 온기가 없었다.그러고는 단호히 돌아섰다. 그 차가운 뒷모습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닫혀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식으로, 날 밀어내던 사람...’유건의 본모습을,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시연의 몸속으로 한기 같은 게 퍼지며, 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멍하니 유건이 차에 올라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