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할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렸어요.” 소미는 자책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발표라도 해서 해명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 유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야. 그대로 두자.” “그대로 두자고요?” 소미는 순간 얼떨떨했다. 확신이 서지 않는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유건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답했다. “시연이는 이미 우리 집안을 떠났어. 난 소미 씨와 아이에게 책임질 거고.” 소미는 온몸이 떨렸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놀람과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드디어!’ “진짜예요?” “응.” 유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훈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는 더 길게 말할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당장 받아들이지 못하실 거야.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천천히 설득해야 해.” “네!” 소미는 눈물을 머금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 유건은 몸을 돌려 정민환을 불렀다. “네, 형님.” “소미 씨를 데려다줘.” 그렇게 지시한 뒤, 유건은 다시 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난 할아버지를 지켜야 해서 같이 가지 못해.” “괜찮아요.” 소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를 잘 돌봐 드리세요. 유건 씨 몸도 신경 쓰고요.” “그럼 갈게요.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그래.” 뒤돌아선 순간, 소미는 벅찬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드디어, 고유건이 내 곁으로 돌아왔어!’ ‘내 것은 결국 내 것이야. 지시연이 아무리 뺏으려고 했어도... 아쉽지만, 능력이 부족했던 거라고!’ ...다음 날. 임진아가 돌아오자마자, 시연은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 “어때? 내과 건물에 있는 친구한테 물어봤어?” “응, 걱정하지 마.” 진아가 손가락으로
밤 8시가 다 되어갈 무렵, 정민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연은 살짝 놀랐다. “여보세요?” [형수님.] 전화기 너머, 민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 SKY 전원주택단지로 가는 중입니다. 집에 계신가요?]시연은 의아했다. “거긴 왜요?” [형님이 시키신 겁니다. 본가에 있던 형수님 짐을 다 정리해서 보내라고 해서요.]‘아, 그렇구나...’시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어떡하지? 나는 지금 SKY 전원주택단지에 없는데...’“잠깐만요, 지금 집에 없어요.” [괜찮습니다.] 민환은 담담하게 말했다. [기다릴 수 있으니 천천히 오세요. 얼마나 늦든 기다리겠습니다.]‘이렇게 나오면 안 갈 수도 없는데.’시연은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지금 갈게요. 그럼 먼저 도착한 사람이 기다리는 걸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후, 시연은 급히 가방을 챙겨 SKY 전원주택단지로 향했다.하지만 택시를 부르진 않았는데, 주말이라 도로가 많이 막힐 것 같아서 지하철을 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먼저 도착했다. SKY 전원주택단지는 원래 시연이와 유건의 신혼집이었다. 하지만, 오늘이 처음 오는 날이었다. 출입 카드, 비밀번호, 키, 모두 시연에게 있었다. 시연이 무사히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민환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집은 꽤 컸다. 2층 반짜리 단독주택,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 ‘괜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건 실례겠지?’그녀는 조심스레 거실 소파에 앉아 민환을 기다렸다. 그 사이, 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임진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따가 나 좀 데리러 와줘.]짐이 많을 것 같아 혼자 옮기기는 어려울지도 몰랐다. 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어? 저게 뭐지?’시연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난간 쪽으로 다가갔
민환은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님 곁을 오래 비울 수 없어서요.” “그래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민환을 배웅한 후, 시연은 문을 닫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안에서 물 마시겠다고 안 해서...’‘만약 들어왔다면, 내가 이 집에 살지 않는다는 걸 들킬 뻔했어.’ 그녀는 하나씩 캐리어를 열었다. 예상대로였다. 유건이 그녀에게 사줬던 옷, 가방이 모두 들어 있었다. 시연은 별다른 표정 없이 원래 자신의 것만 골라 따로 챙겼다. ‘이게 유난 떠는 건 아니겠지...’ ‘그 사람이 사준 것들은 죄다 비싼 브랜드야.’ ‘하지만 우리는 이미 끝났고, 더 이상 이런 옷을 입고 갈 자리도 없어...’‘이제 다시 예전처럼 검소한 생활로 돌아가야 할 때야.’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진아야.” 시연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다 왔어?” [야, 빨리 문 열어!] 문을 열자, 임진아뿐만 아니라, 진성빈까지 따라왔다. 시연은 성빈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그렇게 봐?” 성빈은 못마땅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그 조그만 비밀, 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숨길 생각이었냐?” 그러면서 시연의 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맞지?” “응...” 시연은 살짝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건과의 일을 성빈에게 바로 알리지 않은 건, 성빈과 노은범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흥.” 성빈은 시연을 쏘아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너 그걸 숨긴다고 숨겨질 줄 알았냐? 은범이 그 자식, 널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고.”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어, 너희 일은 신경 안 써. 아니, 신경 써봤자 어차피 내가 어찌할 수도 없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그는 묵묵히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진아와 시연은 눈이 마주치더니 동시에 웃었다. “성빈 오빠 최고야!” “오늘은 말
시연의 등이 순간 굳었다. ‘지동성?!’ ‘왜 여기 있는 거지?’ ‘이제 와서, 우주를 귀찮게 하려는 건가?’ 아무 반응도 없는 우주를 보며, 지동성은 초조해했다. 그는 가져온 간식 봉지에서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우주야, 이거 봐봐. 네가 좋아하는 사탕이야.” 하지만, 우주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우주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시연은 두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비웃듯 말했다. “우주는 낯선 사람이 주는 걸 절대 먹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낯선 사람입니까? 난 우주의...” 말하던 지동성이 멈칫했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흥.” 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단호하게 못 박았다. “우주가 여기서 몇 년을 살았는지 아세요? 그동안 당신은 몇 번이나 찾아왔는데요? 우주한테 당신은 그냥 낯선 사람이에요.” 지동성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이며, 애써 변명했다. “그래... 다 아빠가 잘못했다.” ‘뭐?’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동성이 사과를? 뭔가 수상해.’ 그녀는 돌려 말할 생각 없이, 바로 물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예요?” “뭐...?” 지동성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 시연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요즘 당신, 너무 이상하잖아요. 나한테 신경 쓰고, 돈도 주고, 이제 와서 우주까지 찾아오고... 목적이 뭡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아버지와 딸이 팽팽히 대치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지동성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정말 아무 의도 없이 이러는 거라면... 믿을 거니?” “안 믿어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거면, 나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시는 나나 우주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우리,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그녀는 손을 들어 문 쪽을 가리켰다. “나가세요.” “시연아...”
‘은범이가 나한테 거짓말했어. 일부러 비용 이야기를 숨긴 거라고.’ ‘아마도, 나 모르게 대신 내주려고 했겠지.’‘그렇다면, 전에 ‘웰스’에서 우주의 심사와 검사를 진행했을 때도 비용이 들었을 거야.’“참나...” 시연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나한테 얼마나 더 많은 빚을 지게 할 생각인 거지?’ ‘어떻게든 정확한 금액을 알아내야 해.’ ‘그 돈은 반드시 은범이에게 갚아 줘야 하니까.’하지만, 그녀는 직접 은범에게 묻기가 망설여져, 우회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래서 바로 진성빈에게 전화했다.“성빈아, 나 부탁 하나만 할게.” 그녀는 은범이 대신 돈을 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얼마를 쓴 건지 좀 알아봐 줄래?” [하아... 너희 둘 진짜 답 없다.] 성빈은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받아들였다. [알았어. 내가 물어볼게.]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당연히 성빈일 거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하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노은범’이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은범아.” 그 시각, 은범은 회사에서 아직 퇴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담배는 그저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연아, ‘웰스’에서 온 편지 받았구나?] 남자의 목소리가 낮고 차분했다.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하고 직접 연락한 거야?]그렇지 않았다면, 시연이 비용 문제를 알 리가 없었다. [이건 전화로 할 얘기가 아니야. 만나서 얘기하자.]시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만나자고?’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단순한 만남이 아닐 수도 있어.’ “은범아.” 그녀는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만나지 않기로 했잖아.”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었지.] 은범도 부정하지 않았다. [근데, 그땐 내가 피해야 할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남자의
유건의 얼굴을 몰래 살피던 주지한, 정민환과 정기환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혀가고 있었다. 그 순간, 유건이 갑자기 팔을 뻗었다. “윽.” 남자의 손이 문에 끼이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형님!” 지한과 민환이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 “뭐든 저희한테 시키세요!” 유건은 끼였던 팔을 가볍게 흔들며, 싸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괜찮아.” 조금 전, 그건 단순한 충동이었다. 그저 시연이 여기 온 이유를 알고 싶었다. ‘밥을 먹으러 온 거겠지? 근데 누구랑?’유건의 가슴 한구석이, 속을 긁어대는 듯한 답답함으로 가득 찼다. ...‘가을’ 프라이빗 룸에서 시연은 은범과 마주 앉았다. 은범은 시연에게 물을 따라주었다. “꿀 레몬차로 바꿔줄까? 아니면 우유?” “아니, 이거면 돼.” 시연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천천히 마셨다. “음식은 미리 시켜놨는데, 메뉴라도 볼래?” 은범은 그녀보다 먼저 도착해, 시연이 좋아하는 것들로 주문을 마친 상태였다. “뭐든 잘 먹으니까, 괜찮아.” 잔을 내려놓으며, 시연은 본론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은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웰스’에서 온 편지 가져왔어? 줘 봐.” 그 편지에는 입소 관련 서류가 담겨 있었다. 시연은 입술을 살짝 적시며, 편지를 내밀지 않았다. “은범아, 나는 심사 비용 때문에 널 만나러 온 거야. 도대체 얼마나 나왔어?” 그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손을 거둬들였다. “그걸 안 주겠다는 건, 우주를 ‘웰스’에 보내지 않겠다는 건가?”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들어 은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맑고 단단한 여자의 눈빛. “나는 네 돈으로 우주를 보내고 싶지 않아.” ‘그럴 줄 알았어.’ 노은범은 피식 웃었다. “언제 내가 무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어?”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시연아.” 그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주지한이 차 문을 열었다. 유건이 몸을 숙여 차에 올랐고, 차는 이내 출발했다.전체 과정은 고작 몇 분 남짓.은범은 그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분명 고유건이었는데, 왜 그렇게 가버린 거지?’놀란 그는 시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희...” ‘이혼할 예정이라고 해도 최소한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은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러나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이렇게 지내는 게 나한테는 오히려 좋은 일이니까.’“차 왔다.”은범은 미소를 지으며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타, 집에 데려다줄게.”...벤틀리 안.유건은 주재호의 전화를 받았다.[고 대표님, 이혼합의서 초안을 준비했습니다. 부속서류인 위자료 합의서도 포함한 것이죠. 지시하신 대로 작성했으니, 전자문서로 보내드릴게요. 확인하시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오랜 알고 지낸 사이였기에 유건은 재호를 믿었다. 그래서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안 봐도 돼. 네가 하는 일이면 믿을 수 있으니까.”G시 최고의 변호사를 이혼 서류 작업에 쓰는 것도 어찌 보면 사치였다.[그럼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재호도 군말 없이 응했다.[그럼 지시연 씨께 연락해서 서명 일정을 잡겠습니다.]이번엔 유건이 한참을 침묵했다.단정하면서도 냉정한 얼굴 속에, 미세한 갈등이 숨어 있었다.[고 대표님?]“응.”유건은 정신을 가다듬고 무심하게 말했다.“알아서 해.”전화를 끊고 그는 시트를 뒤로 젖혔다.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유건의 머릿속엔 시연과 은범이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둘이... 그렇게 친밀한가?’‘사귀기라도 하는 거야?’‘내가 본 게 저 정도라면, 안 보이는 곳에서는 더한 일도 있었을 건데...’‘혹시... 키스했을까? 같이 잤을까?’사실, 성인 남녀가 키스하든, 함께 밤을 보내든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더군다나 은범은 시연의 첫사랑이었으니 말이다.‘생각해 보니, 노은범
재호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시연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변호사님?] “지시연 씨.”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합의서 한 장에만 서명하셨더라고요. 위자료 합의서에는 서명이 없어요.” [네?] 시연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그랬나요? 제가 깜빡했나 보네요. 다 한 줄 알았는데요.] ‘이걸 까먹었다고?’ 재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통 이혼하는 여성들은 위자료 문제를 가장 신경 쓰는 법이다. 더군다나 유건이 제시한 금액은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럼 언제 한 번 다시 오실 수 있을까요?” [급할 필요 없잖아요.]시연은 미리 답을 준비해 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가정법원 갈 때 같이 하면 되죠.]“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재호는 설명을 덧붙였다. “몇 가지 명의 이전 문제 때문에 여러 기관을 다녀야 하는데, 아마 서류 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때 오셔서 서명하시면 돼요.” [그럼, 다 마무리될 때까지 많이 기다려야 하나요?]“보통은 그렇죠.” 여성 입장에선 위자료를 받고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정법원엔 최대한 빨리 갈 수 없을까요?] “그건...” 재호는 난감했다.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고 대표님께 확인해 봐야 해요.” [그럼, 고 대표님께 한 번 이야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전화를 끊은 후, 재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위자료도 안 받고 이혼을 서두른다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여자네...’ ...월요일 오전 내내, 시연은 후배들의 실험 수업을 지도했다. 수업이 끝나고, 어느새 12시가 가까워졌다. 그녀는 가운을 벗고 실험실을 나섰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건넸는데, 실험 수업을 듣던 후배들이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
차가 시연 앞에 멈췄다.창문이 내려가더니, 지한이 고개를 내밀고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타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시연은 유건을 흘낏 보았다.‘이상하네, 왜 조수석에 앉아 있지?’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또 유건의 차를 타면 점점 엮이게 될 것 같았다.“형수님, 얼른 타세요.” 지한은 차를 움직일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내려서 직접 문 열어드려야 합니까?”“아니에요...”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뭐야, 버스 정류장에 세우면 안 되는 거 몰라?”“그러니까! 버스가 못 지나가잖아.”“빨리 가라고!”“벤틀리네, 저런 차를 태워준다는데 안 탄다고?”“재수 없어.”점점 더 듣기 거북한 말들이 오갔다.어쩔 수 없이, 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탔다.“형수님, 어디로 가면 됩니까?”차에 타자마자, 지한이 물었다.시연은 대답 대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건을 바라보았다.‘이거 완전 악연 아니야? 왜 자꾸 마주치는 거지?’“형수님.” 지한이 웃으며 유건을 가리켰다. “마침 형님이 차에 계시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어차피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요.” 시연은 당황했다. ‘이 둘 뭐 하는 거야?’“이제 목적지 말해주실래요?”지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형수님, 실은 우리도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그저 한 번 모시고 가는 걸로 부담 갖는 건 아니시죠?”지한의 말에 시연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산신당으로 갈 거예요.”지한은 잠시 멈칫하더니, 본능적으로 조수석의 유건을 바라보았다.“거기서 볼일 있으세요?”“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살 게 있어서요.”‘거기서 뭘 사려는 거지?’산신당은 G시보다 더 오래된 곳일지도 모른다. 사찰뿐만 아니라 재래시장도 있어, 평범한 서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으니 말이다.분명 번잡하고 활기차지만, 고급스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한테 단 한 번도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지동성은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다시 한번 말하마. 우주를 ‘웰스’로 보내는 돈은 이 아빠가 다 낼게.” 시연은 멍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데, 이해할 수 없었다.“왜요?”지동성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듯 말했다.“아버지가 자식한테 돈을 주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니?”‘이유가 필요하냐고? 그럼 그때 우주의 치료비를 끊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건 누구였더라?’‘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그 중심에 있던 거 아니었나?’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 곧이어, 지동성이 말을 이었다.“시연아, 곧 다가올 아빠의 생일에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구나.”시연은 또다시 얼어붙었다.‘오늘따라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무심결에 튀어나왔다.“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흠.”지동성이 가볍게 기침했다.“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앞으로 몇 번이나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단다. 가족끼리 모여서 밥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 ‘뭐 이런 헛소리가 다 있어?’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흘렸다.“아내도 있고 딸도 있잖아요. 가족이랑 매일매일 함께하잖아요?”“시연아.”지동성이 딸의 말을 끊고,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너와 우주도 아빠의 자식이야.”그는 모델 조립에 열중하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아빠의 생일에 와준다면, 네가 나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그때가 되면 우주의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 내가 책임지마.” ‘우주를 빌미로 협박하는 거야?’시연은 본능적으로 떠올렸다.‘로얄호텔에서의 그때도...’그녀는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딸의 반응을 본 지동성도 깨달은 듯했다. 잠시 스치는 후회의 눈빛.“아빠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냥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