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시간이 늦었네요...”유건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를 살짝 올렸다.“그래, 씻어야지. 네가 먼저 씻을래, 아니면 내가 먼저 씻을까? 그것도 아니면... 같이?”“나...”시연은 순간 말을 더듬었다. “내가 먼저 할게요.”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가 옷을 꺼내고, 욕실로 들어갔다.‘일단 씻고 생각하자.’샤워기를 틀어 물줄기가 흐르자, 시연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잠시 후, 샤워 부스의 문이 열렸다.“유건 씨?”“같이 씻자.”남자는 듬직한 풍채를 뽐내며 좁은 공간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한순간 허리에 감긴 팔에 의해 시연은 유건의 품에 안겼다.“일... 일부러 이러는 거죠?”유건이 낮게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아니?”시연은 얼굴이 달아오르며 황급히 변명했다.“그래, 좋아. 내가 일부러 그런 걸로 치자.”남자는 낮게 속삭이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음...”“겁내지 마.”유건은 부드럽게 시연을 달랬다.“내가 조심할게.”그날 밤, 유건은 정말 약속대로 시연을 조심스럽게 대해 주었다.시연은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서 경험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로얄호텔’에서의 그날 밤, 그녀는 너무나도 당황했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남자는 너무 거칠었고, 시연의 느낌을 고려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시연에게는 그저 수치심과 혼란, 그리고 아픔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유건과 함께할 때는 달랐다. 시연도 서서히 이런 일이 꼭 두렵거나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마지막으로 흐릿한 시야로 유건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건은 시연을 품에 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자, 좋은 꿈 꿔.”...아침이 밝았다.샤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시연은 핸드폰을 확인했다.‘벌써 아침이네...’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오자, 유건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다가와 아무
시연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몸을 돌려 도망치듯 뛰어나갔다.유건은 그녀를 붙잡지 않고 그저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를 올렸다.‘입맞춤도 제대로 못 하면서 도망은 또 빠르네.’여자의 수줍은 반응이 묘하게 유건의 마음을 간질였다....오전 10시, 시연은 임진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시연아, 성빈이가 풀려났어! 이제 괜찮아!]그 말을 듣자 시연은 긴 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고유건이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긴 했지만, 약속은 확실히 지켰어.’그날 하루는 조용히 집에서 보냈다.저녁 7시, 고상훈의 저녁 식사를 돕던 중, 유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뭐 하고 있어?]“할아버지 식사를 준비 중이에요.”[그래, 내가 보고 싶진 않았고?]갑작스러운 질문에 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침묵이 길어지자, 유건은 불만스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쯧, 묻잖아. 대답은?]‘이 남자, 가끔 아이처럼 고집스럽다니까.’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작게 대답했다.“네...”[오?]유건이 낮게 웃더니 말했다.[그럼 그 보답으로 오늘 저녁에 데이트하자. 10분 뒤에 현관에서 만나는 거야.]그리고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설마 이미 돌아온 건가? 지금 현관 앞인 것 같은데?’‘그런데 들어오지도 않고 나를 부른다니?’여자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사모님.” 왕성애가 시연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식사할 준비는 다 되셨어요? 이제 올려도 될까요?”“아, 네.”시연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이모님,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할아버지를 부탁드려요.”“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시연은 황급히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망설이다가 가볍게 화장했다. 그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벤틀리가 현관 앞에 멈춰 서 있었다.시연이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고 올라타자, 유건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늦었네. 10분이 아니라 20분이 걸렸어.’“미안해요.”시연은 살짝 미안한 듯 대답했지만, 유건은 별로
유건은 아주 화냈다는데, 좋은 분위기의 데이트가 시작부터 꼬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직원을 꾸짖고 싶었지만, 시연이 손을 살짝 올려 그를 막았다.“됐어요. 별일도 아닌데요.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주문해요.”‘이 여자, 진짜 화 안 난 걸까?’유건은 믿을 수 없었다.‘질투는 여자의 본능일 텐데.’“여기, 장소미랑 같이 온 적이 있어.”이미 말이 나온 김에,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때는 우리가...”말을 흐리는 유건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굳이 설명 안 해도 돼요.”시연이 유건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다 알고 있어요.”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진짜 화난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알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시연이 아무렇지 않게 메뉴를 고르자, 유건은 더욱 답답했다.메뉴가 나오고, 시연은 잘 익은 양갈비 한 조각을 잘라 유건의 입 앞에 내밀었다.“한 번 먹어봐요. 아...”여자의 행동에 기분이 풀린 유건은 입을 열었다.‘정말 대범한 건가... 아니면, 신경을 안 쓰는 건가.’유건은 한숨을 삼키고, 소매를 걷어 올려 직접 새우껍질을 벗기더니 소스를 묻혀 시연의 접시에 올렸다.“밥 먹고 나서, 하고 싶은 거 있어?”“네?”시연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뭘 하려고요?”그녀는 밥만 먹고 돌아갈 줄 알았기에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유건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정하지 않으면, 내가 정할 건데? 영화 보러 갈래?”‘식사 후 영화라니, 연인들의 평범한 데이트 코스인데?’‘고유건은 확실히 좋은 남자야. 이 남자가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시연은 속으로 답답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어차피 이혼이 무산된 이상, 우리 같이 살아야 해.’‘나도 최대한으로 노력해 봐야지.’유건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보고 싶은 영화 있어?”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요즘 어떤 영화가 개봉했는지도 잘 몰라요.”“그럼 네가
잠시 후, 하늘에서 천둥이 울렸고, 곧이어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시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빨리 가요. 비가 더 심해지면 사람을 찾기 더 어려워질 거예요.”‘이 여자, 화나지 않았구나. 오히려 나를 걱정하고 있어.’그 순간, 유건은 기뻐해야 할지, 서운해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으면 소화 안 돼.”“알겠어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리고 기환이 널 데려다 줄 거야.”유건의 곁에는 항상 그를 보호하는 부하가 있었고, 시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비록 유건이 직접 운전할 때도, 그가 믿는 부하들은 항상 그림자처럼 뒤따랐다.시연은 양갈비를 입에 물고 있었기에 대답 대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았어요.”“집에 도착하면 전화해.”“네.”시연은 웃으며 말했다.“인제 그만 가봐요. 난 애가 아니잖아요.”“간다.”필요한 말을 다 한 유건은 몸을 돌려 걸어 나가려 했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뒤돌아보았다.시연은 남자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조용히 국을 마시고 있었다.알 수 없는 기분이 든 유건이 갑자기 물었다.“여보, 나한테 가라고 한 거, 진심이야?”“네?”시연은 유건이가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나?’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야죠. 사람이 없어졌다면서요...”여자의 태도는 너무도 담담했다.갑자기 유건은 짜증이 밀려왔고, 묘하게 속이 뒤틀렸다.“알겠어.”그는 짧게 말하고 이번엔 진짜로 떠났다.문이 닫히는 순간, 시연은 제자리에 멍하니 선 채, 손을 가슴에 얹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시연은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고, 먹어도 목구멍이 막힌 듯했다.사실, 유건이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시연은 입맛이 사라졌었다.그녀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숨을 돌렸고, 입을 닦고서야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연은 머리를 닦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이었는데, 전부 다 유건에게서 온 것이었다. 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내가 다시 전화해 줘야 할까? ‘아니야, 그냥 두자.’ ‘어차피 장소미 찾느라 바쁠 거야. 정말 급한 일이면 다시 걸겠지.’시연은 잠시 기다리는 듯했으나, 유건이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머리를 말린 뒤 침대에 누웠다. 임신한 탓일까? 시연은 요즘 깊이 잠드는 편이었다. 시연은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핸드폰 벨소리에 깨어났다. 잠결에 짜증이 난 시연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예보세요?” [형수님! 저예요, 지한이요.] ‘...지한 씨?’ 그 순간, 시연은 잠이 확 깼다. 주지한이 이렇게 한밤중에 전화를 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그녀가 묻기도 전에, 지한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형님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이미 병원으로 옮겨졌다고요!] “뭐라고요...?” 순간 여자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연은 입술이 덜덜 떨리며 겨우 말을 뗐다. “많이 다쳤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저는 의사가 아니잖아요... 근데, 형님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눈으로 본 그대로를 전하는 지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형수님, 제가 민환을 보냈으니까 준비하고 계세요. 곧 도착할 거예요!] “...알았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시연은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다리가 휘청거리고 머릿속이 잠시 새하얘졌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손이 계속 떨렸다. ...새벽 3시. 시연은 아무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대문으로 향했다. “형수님.” 이미 도착해 있던 정민환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고,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유건은 막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다행이네요.” 시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유건 씨의 교통사고도... 나름 값어치는 한 셈이니까요.” 뭔가 이상한 말이었기에, 지한이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형수님,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하죠?” 여자의 눈은 한없이 담담하고 깨끗했다. “내가 한 말이, 틀리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단 한마디였지만, 지한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형님은 절대 형수님이 이렇게 생각하길 바라지 않으실 텐데...’그럼에도 지한은 유건을 어떻게 변호해야 할지 몰랐고, 괜히 말실수라도 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형수님.” 지한이 화제를 돌렸다. “배 안 고프세요? 뭐라도 사 올까요?”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아침은 기환이 사 왔는데, 다들 유건 걱정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연만은 예외였다. 시연이 하얀 쌀죽에 작은 만두를 곁들여 조용히 식사하자, 기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수님... 유건 형님이 걱정도 안 되세요?” “쉿!” 지한이 그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헛소리 좀 하지 마! 형수님은 임신 중이시잖아. 아기를 생각해서 그러시는 거라고.” “아, 그래?” 기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럴까?’ 오전 7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수술은 끝이 났다.유건은 VIP 병실로 옮겨졌는데, 지한이 모든 절차를 맡았기에 시연은 나설 필요가 없었다. 절차가 마무리된 후, 지한은 병실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시연을 발견했다. 여자의 얼굴은 아주 지쳐 보였다. “형수님, 피곤하시죠?” “네.” 시연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한밤중에 불려 나와 지금까지 기다렸으니, 당연히 피곤할 만했다.지한이 바로 말했다. “형님 상태는 괜찮으니까, 민환이랑 댁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댁에 가서 좀 쉬세요.” “그래요.” 시연은
발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잠결에 얼굴을 스치는 가느다란 실루엣. 유건은 무겁게 뜬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남자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시연이 아닌 장소미였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뭔가 찝찝해.’ 남자의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늘하게 스쳤다. “유건 씨!” 유건의 깨어난 모습을 본 소미가 반가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좀 들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요?” “난 괜찮아. 그런데 너...” 소미의 얼굴엔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오른쪽 팔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지어 붕대 사이로 핏자국이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 유건의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상처, 많이 심한 거야?” “아니에요. 괜찮아요.” 소미는 가볍게 웃으며 관자놀이 쪽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냥 가벼운 찰과상이에요.” 유건은 이내 그녀가 실종됐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는 당연히 묻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조애린 말로는, 네가 갑자기 사라졌다던데. 무슨 일이야?” “아...” 소미가 순간 머뭇거리며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애린 언니가 좀 깊이 생각한 거예요.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촬영 끝나고 혼자 좀 걷고 싶었는데, 너무 외진 곳이라 길을 잃었어요. 핸드폰도 안 들고 나갔고...” 묘하게 표정이 굳은 유건은 소미가 왜 기분이 나빴는지 묻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괜히 걱정 끼쳐서...” 소미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꼬아 쥐었다. “아냐.” 유건은 피곤한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는 어딜 가든 핸드폰을 꼭 챙겨.” “네, 다시는 이러지 그럴게요...”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유건아! 정신이 들었다며?” 시끄러운 목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부지하, 주정빈, 유강석. 유건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남자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가 곧바로 그 빛이 사라졌다. 부지하 일행도 병실 안에 소미
소미의 말에 유건은 다시금 떠올렸다. ‘맞네. 그 여자... 지금 임신 중이잖아.’ ‘이런 무리한 밤샘을 견뎌낼 몸 상태가 아니잖아.’ 순간, 남자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지한은 재빨리 맞장구쳤다. “형수님은 어젯밤 소식 듣자마자 달려오셨어요. 걱정도 정말 많이 하셨죠. 형님 상태 보고 안심하긴 했지만, 제가 일부러 쉬라고 돌려보냈어요. 아마 곧 올 거예요.” “맞아요.” 소미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맞장구쳤다. “응.” 유건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몇 시지?” 지한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곧 6시요.” 시연이 떠난 지 벌써 하루가 다 되어 간다. 지한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형님, 형수님께 전화라도 한 통 넣을까요?” 그는 이미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있었지만, 유건이 단호하게 막았다. “아니야.” “재촉하지 마.” 유건은 자기가 시연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하는 것과, 시연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언제쯤 오는지 한 번 보자고.’ 똑똑-마침, 병실 문이 두드려졌고, 유건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병실 안의 모든 사람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문 쪽을 바라봤다. 문이 열리고, 시연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여행용 캐리어, 다른 손에는 작은 쇼핑백. 시연은 고개를 들자마자 병실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았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지한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좀 들어주실래요?” “네, 형수님.” 지한이 서둘러 다가가 쇼핑백을 받은 후, 바로 물었다. “캐리어는 어떻게 할까요?” “우선 옷장 쪽에 놔주세요. 제가 정리할게요.” “네.” 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놓고 옷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시연은 병실을 둘러보며 유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분들, 당신 친구들이에요?” “응.” 유건은 입을 삐죽
“느낌이 안 좋네요...!”이호민은 다급히 벽 쪽 스위치를 눌렀다.불이 켜지는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 안은 마치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책상과 의자는 비뚤게 기울어져 있었고, 바닥엔 깨진 유리 조각과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다.공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극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이 냄새는 또 뭐예요...?” 왕성애는 인상을 구기며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창문부터 열어야겠어요!못 견디겠어요!”“전 유건 도련님부터 볼게요.” 이호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구겨진 채 누워 있는 유건이 보였다. 셔츠도 그대로, 신발도 그대로. 온몸이 술과 담배에 절여져 있었다.“도련님.” 이호민이 조심스럽게 부르며 다가갔다.“유건 도련님, 일어나보세요.”숨소리는 있었지만,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이 정도로 취했다고?’조심스레 어깨를 두드리려던 찰나, 갑자기 유건이 벌떡 일어나 그대로 욕실로 달려갔다.“윽...!”‘진짜 토하네...’이호민은 욕실로 다가가 보니, 유건은 변기에 몸을 웅크리고 술을 게워 내고 있었다.곧 물을 틀어 입을 헹구고, 세수하며 거울 앞에 섰다.“유건 도련님...”이호민이 수건을 건넸다.“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아무리 젊어도, 이렇게 몸 상하면 어르신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할아버지한텐 말하지 마세요.”유건은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고, 그대로 빨래통에 던졌다. 이어서 욕실을 나서며 배 쪽을 살짝 짚었다.“배... 괜찮으세요?”이호민이 걱정스레 다가오며 말했다.“이럴 때일수록... 사모님을 불러보면 어떨까요? 전 두 분 사이에 큰 오해가 있다고 봐요. 얘기만 잘하면...”“지시연 얘기는 하지 마세요.”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게 가라앉았다.“앞으로 그 여자 이름을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끝을 세게 눌렀다.“진정한 고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이럴
‘말도 안 돼!!’강수희는 숨을 들이켰다. 놀라움, 당혹, 불신...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떠올랐다.“시연아, 넌 우리 은범이를 그렇게 아꼈잖아. 은범이 곁을 밤새워 지키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아무 감정이 없다고?”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제가 은범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이었어요.”“그렇게 말하지 마.” 강수희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아냐... 날 원망해서 그러는 거지? 내가 너희 사이 갈라놓았던 거, 다 인정할게.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절대 방해 안 할게. 아니다... 아예 안 보이게 사라질게. 너만 은범이 옆에 있어 준다면...”“사모님.”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막아섰다. “그만 말씀하세요. 저는 은범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젠, 정말로... 아니에요.”강수희는 마치 뺨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너희 둘, 그렇게 사랑했는데...”“그건 과거일 뿐이에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요.”그 말에, 강수희는 말문이 막혀 굳어버렸다. 시연은 한 박자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사모님의 부탁으로 잠시 은범이 곁에 있어 줄 순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단지 일시적인 거예요. 제가 다시 떠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때 또 무너지면, 은범이는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은범이는 스스로 일어나야 해요. 온 세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떠나도 견딜 수 있어야... 그게 진짜 회복이에요.”시연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가방을 메고, 마지막으로 강수희를 바라봤다.“사모님, 전 오늘 은범이 병실에 들어가지 않을게요. 제 존재가 지금 은범이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니까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지하철에서 내리자, 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할아버지의 전화
“그 말...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시연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교수님한테...” 강수희는 급히 덧붙였다. “너도 알잖아, 우주 진료 보던 그 정신과 교수님. 그분이 직접 말했어, 네가 은범이한테 도움이 된다고.”“맞아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조용히, 천천히 손을 빼냈다.“하지만 교수님은 제가 원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신 거지, 제가 원치 않음에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은 안 하셨을 거예요.”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아이... 너무 똑똑하네.’맞는 말이었다. 심재규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시연이 원할 경우에만’이라고.하지만 아들이 스스로 생을 끊으려 했던 그날 밤은 겪은 순간부터, 강수희의 모든 이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앞으로 치료받는 동안 은범이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이번엔 가까스로 살릴 수 있었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까?또 그다음엔? 그땐 정말,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강수희는 더 이상 아들의 생명을 ‘확률’에 걸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결국 시연이 곁에 있는 것이었다.“시연아... 너랑 은범이, 한때 사랑했던 사이잖니. 정말... 정말 이렇게 외면할 수 있어?”그 한마디로, 시연을 ‘사람 생명을 외면한 냉혈한’으로 몰아붙였다.‘나를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이 감정에, 죄책감에, 죄의식에.’하지만 시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끝을 조용히 쥐며 입을 열었다.“제가 은범이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은범이의 상태가 좋아지고, 나아지게 된다면... 좋죠. 하지만... 그다음은요?” “다음...?”“네, 제가 언젠가 자리를 뜨게 되면요?”급격히 표정이 굳은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엔, 안타까움도, 체념도 섞여 있었다.“사모님, 전 결혼했어요. 그리고 은범이와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요.”“그... 그건...”강수희가 다급히 말을 덧붙이려
지하는 여자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걸음을 천천히 맞추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기까지 했다.진아는 입을 벌렸다.‘세상에...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저 양반.’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좋았어, 이거 한 장만 박제해 두자. 다음에 또 장난치면 바로 보여줘야지.”그녀는 그 장면을 확대하여 정확히 프레임에 넣었다.찰칵- 사진을 찍고는 핸드폰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여자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나, 저 여자 어디서 봤지?’...그 시각, 시연의 집.시연은 느지막이 일어나, 진아가 남겨두고 간 국을 데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걸려 온 전화.[시연아! 은범이가 깨어났어!]“정말요?”시연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정말 다행이에요. 어때요? 상태는?”[훨씬 나아졌대. 교수님도 그러시더라, 기적 같다고.]‘진짜로... 다행이다.’그 순간, 시연의 가슴 깊이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무거웠던 짐 하나가 내려간 듯했다.[시연아, 시간 괜찮으면 병원에 들러줄래? 은범이가 널 보면 정말 기뻐할 거야.]잠시 망설였지만, 시연은 진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확인할 건 해야지.’“네, 오늘 쉬는 날이라 금방 갈게요.”[정말? 정말 고맙다!]강수희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우리 기다리고 있을게.]“네.”...병원.병실 앞. 강수희는 병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시연이 오기를 기다린 듯한 얼굴이었다.“시연아!”그리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친근하게 웃으며, 팔짱까지 끼는 모습. 이전과는 딴판이었다.“어제 일은 잘 해결됐지? 고 대표님이랑도... 잘 풀었어?”너무도 티 나는, 의도된 질문. 시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문제없어요.”“그렇구나...” 강수희의 눈빛에 실망이 그대로 비쳤다. ‘생각보다... 잘 안됐구나’하는 반응이었다“그럼 들어가자. 은범이는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