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5성급 호텔 꼭대기 층, 육성민이 헬스장에서 돌아왔다. 금방 운동을 마친 상태라 온몸의 근육이 살아있었다.샤워를 마쳤는데도 몸에서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서가 한참 전부터 계속 기다렸다.평소 사람들에게 늘 친절하고 잘난 척하는 법이라곤 없는 사람이라 비서가 웃으면서 장난을 쳤다.“대표님, 여동생분이 부신 그룹 대표의 아내였다니. 왜 그동안 한 번도 말씀 안 하셨어요?”육성민의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어디서 들었어?”비서가 휴대폰을 그에게 보여주었다.“보세요. 여동생분이 또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요.”[#강민아 아들 학대#][#강민아 전남편 반하준#][#강민아 돼지 먹이#]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한 내용 모두 강민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었다.육성민이 기자가 반현민을 인터뷰한 녹음을 눌렀다. 그러다가 녹음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휴대폰을 부숴버릴 듯 꽉 쥐었다.그의 팔에 있는 핏줄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터무니없는 소리.”분노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비서는 깜짝 놀라 심장이 다 쿵쾅거렸다.강민아의 전남편이 서경시의 재벌인 부신 그룹 대표 반하준이라는 사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친아들이 강민아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 난 후 네티즌들은 분노를 터트렸다.[반씨 가문 도련님 말이 맞아요. 강민아가 반하준이랑 결혼한 7년 동안 반씨 가문에 아이 둘을 낳아준 것 외에 무슨 기여를 했나요? 어떻게 기자들 앞에서 전남편을 무시하는 발언을 할 수가 있죠? 염치도 없나 봐요.][재벌가 사모님이 됐으면 얌전히 있기나 할 것이지, 남편과 자식을 버리다니. 허. 가정주부가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는데도 자존심은 엄청 강하더라고요.][강민아는 아예 모를 거예요. 전남편이 밖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서경의 재벌 2세라서 아이를 낳아주겠다는 여자가 줄을 섰을 텐데.][제 친척이 서경시 상류층과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반하준은 사생활이 깨끗하고 스캔들 하나 없다고 하더라고요. 많은 여자들이 매달리는데도 눈길 하나
반하준은 일이 너무 많아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가끔은 심지어 반현민과 대화할 시간조차 없었다.반현민이 강민아에게 학대를 받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강민아가 돼지 먹이 같은 음식을 먹였다는 건 그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연진숙은 강민아가 만든 음식을 보면 창피해서 어디 내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또 그녀가 차린 밥상을 보는 것 자체가 수치였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강민아의 고향 음식이 서경시의 재벌들에게는 돼지 먹이나 다름없었다.엄규민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드디어 누명을 벗으셨네요. 지금 인터넷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대표님 편을 들고 있어요.”반하준은 인터넷 여론에 별 관심이 없었다.“앞으로 강민아와 관련된 일이나 인터넷 여론 같은 건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돼.”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고 강민아가 죽든 살든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어?”그런데 그때 엄규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강민아 씨한테 불리한 실검들이 전부 삭제됐어요.”반하준은 강민아가 돈을 써서 실시간 검색어를 내렸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근데 160억 원을 건드릴 수 없어서 실검을 내릴 돈이 없을 텐데.’그는 곧장 휴대폰으로 SNS를 열어보았다. 강민아와 관련된 부정적인 단어를 검색할 경우 관련 법규에 따라 검색할 수 없다는 문구만 떴다.그의 깊은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이건 엄청난 배경을 가진 누군가가 SNS 직원에게 연락하여 실시간 검색어를 내리도록 지시한 게 틀림없었다.그래야만 강민아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들이 인터넷에서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으니까.‘누군가 민아를 돕고 있어.’반하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대체 누구지? 설마 심은호?’...강민아는 콘도에서 물을 시원하게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정이와 막 식사를 끝냈고 정이는 의자 위에 올라가 식탁을 닦았다. 그때 식탁 위에 놓인 강민아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모르는 번호였다.“엄마.”정이가 강민아를 불렀지
휴대폰 화면 속 연진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잔뜩 일그러졌다.“강민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연진숙은 당장이라도 휴대폰 속으로 뛰어 들어가 강민아의 손을 잡아 뜯고 싶었다. 어찌나 노발대발하는지 눈알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무슨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내가 그런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강민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여사님,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일주일 안에 알게 되실 겁니다. 아, 그리고 제가 제출한 증거는 여사님이 받으셨던 화려한 표창상을 내려놓게 하는 정도예요. 만약 또 저를 못살게 군다면 그땐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강민아의 경고가 연진숙에게는 도발이나 다름없었다.“흥, 신고해봐, 그럼. 네 재주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 네까짓 게 날 끌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아?”‘무식한 시골 촌뜨기 같은 것. 내가 서경시의 상류층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연진숙이 대놓고 비웃었다. 휴대폰 속 그녀의 붉은 입술이 더욱 요염하게 보였다.“원래는 정이를 생각해서 너한테 조금이나마 정을 줬는데. 감히 나를 신고해? 지금부터 현민이 친엄마는 죽었어. 다신 현민이 만날 생각 하지도 마.”연진숙의 두 눈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마치 판사처럼 강민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아들을 완전히 빼앗고 면접 교섭권을 박탈하는 것 자체가 강민아에게는 사형이나 다름없었고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반현민이 두 살이 되던 해에 반씨 가문에서는 엘리트 교육을 시키기 위해 친모와 완전히 떼어놓겠다고 했다.이건 강민아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연진숙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연진숙은 강민아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강민아가 정이를 데려간 게 연진숙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했고 반하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두 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녀서 아들을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연진숙이 휴대폰 카메라를 보면서 말했다.“네 아들을 완전히 잃게 될 거야.”그러고는 강민아가 예
강나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지시했다.“나만 보기 게시글들 전부 공개해. 강민아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여줘야지.”“알겠어요. 바로 처리할게요.”해커는 강민아가 그동안 올렸던 모든 나만 보기 게시물들을 공개로 설정했고 강나현은 곧바로 몇몇 마케팅 회사에 연락했다.그 마케팅 회사들은 팔로워 백만 명 이상의 SNS 계정들을 통해 강민아의 계정 내용을 퍼 날랐다. 강민아가 과거에 올렸던 나만 보기 게시물들이 세상에 공개되었다.[이게 바로 강민아 씨가 아들을 학대한 증거입니다.]팔로워 백만 명의 유명 인플루언서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반현민의 사진을 리트윗했다.수천만 명의 네티즌들이 강민아의 SNS로 순식간에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타자 속도가 빠른 네티즌들은 벌써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그러자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강민아를 욕하는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녀요? 이 사진은 누가 봐도 아이가 알레르기 반응이 생긴 사진이잖아요.]또 다른 네티즌은 강민아의 2천 개가 넘는 게시글 중에서 남자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무릎에 반창고를 붙인 사진을 찾아냈다.[이건 강민아가 아들을 때린 증거입니다. 아들을 때리고 사진까지 찍어서 SNS에 올리다니. 완전 사이코패스 아니에요?]똑똑한 네티즌들이 바로 반박했다.[바로 위 게시글을 보면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진 사진인 것 같네요.]강민아의 SNS에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모든 기록이 남아 있었다.네티즌들은 강민아의 SNS에서 아이에게 돼지 먹이 같은 음식을 먹인 사진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강민아가 올린 음식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오히려 군침을 삼켰다.[강민아 씨가 이런 요리 솜씨로 돼지 먹이 같은 음식을 만들었다고요? 난 절대 못 믿어요.][강민아 씨가 만든 음식이 돼지 먹이면 내가 평소에 먹은 건 뭔가요? 음식물 쓰레기인가요?]한 네티즌이 강민아의 SNS에서 죽 사진을 찾아냈다.[새로 배운 죽이에요. 딸은 맛있다고 남김없이
차에 앉아 있는 반하준의 얼굴에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강나현이 이런 일을 벌인 건 반현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였겠지만 여론의 방향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대표님.”엄규민이 긴장한 얼굴로 차 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열리자마자 휴대폰을 차 안으로 들이밀었다.“인터넷에 강나현 씨에 관한 안 좋은 영상이 퍼지고 있어요.”반하준이 휴대폰을 받고 확인해보니 몰래 촬영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강나현이 한 남자의 허벅지에 앉아 있었는데 나시와 검은색 데님 반바지 차림으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술잔을 입에 물고 남자에게 술을 먹여주자 남자의 입이 술잔에 부딪히면서 술잔이 떨어졌다. 그 순간 강나현의 입술이 그 남자의 입술에 닿은 듯했다.“젠장.”강나현이 먼저 소리치면서 남자의 가슴팍을 마구 두드렸다.“야, 진찬규. 이것도 못 해?”그녀가 술을 먹여주던 남자는 가장 친한 남사친 중 하나인 진찬규였다. 진찬규는 가슴을 쫙 펴고 강나현의 가슴에 부딪혔다.“못하긴 뭘 못해. 한번 해볼래?”강나현이 욕설을 내뱉자 주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3년 전 진찬규는 평범한 여자를 짝사랑했었고 두 사람은 아주 뜨겁게 사랑했었다.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도 사랑하는 여자와 꼭 결혼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의 결혼식은 서경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많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그런데 이 영상이 퍼진다면 사랑꾼 도련님의 이미지는 무너질 것이고 그의 다리에 앉아 있던 강나현 또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영상이 끝나기도 전에 엄규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심은호라는 이름이 뜬 걸 본 순간 차 안에 앉아 있는데도 반하준에게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반하준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심은호의 나른하고 무심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엄규민 씨, 반 대표 좀 바꿔줘요.”반하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듣고 있어.”휴대폰 너머로 심은호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인터넷에 떠도는 영상 봤어?”
반하준이 차에 걸린 방울 소리를 처음 들은 날이 바로 반유하의 장례식 날이었다. 지금 방울 소리가 다시 울렸다.‘가장 친한 친구를 걱정하고 있나?’“오빠, 꼭 나현이를 잘 돌봐줘야 해.”반하준은 심호흡을 하고 엄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인터넷에 떠도는 나현이에 관한 안 좋은 영상과 댓글 전부 삭제해.”“전부 삭제하라고요?”엄규민이 다시 한번 확인하자 반하준이 짜증을 냈다.“내가 도와주는 사람이 나현이 말고 더 있겠어?”엄규민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이내 지웠다.“알겠어요.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강씨 저택.강나현이 헐렁한 후드티를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옷이 헐렁해서 몸매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내세울 게 없는 상체인 건 사실이었다.하의는 검은색 반바지를 입었는데 반바지 길이와 후드티 밑단이 거의 비슷해서 다리가 더욱 길어 보였다.그녀는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휴지로 꾹꾹 눌러 지우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입술 색을 만들려 했다. 메이크업을 연하게 했지만 강나현의 남사친들은 그녀가 메이크업한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강나현은 외출 준비를 마쳤다. 오늘 밤에도 남사친들과 술을 마시면서 밤새도록 놀기로 약속했다.그때 휴대폰이 울리자 전화를 받았다.“뭐? 오늘 밤에 안 온다고? 젠장. 흥 깨게.”강나현이 몇 마디 욕하려던 찰나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너도 안 온다고? 감히 날 바람맞혀? 죽고 싶냐?”“나현아, 요즘은 좀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전화 속의 남자는 우물쭈물하다가 그녀에게 충고했다.“인터넷에 너에 대한 불리한 여론은 전부 삭제됐지만 너랑 찬규 일 이미 이 바닥에 소문이 다 퍼졌어.”“나랑 찬규가 뭘 어쨌는데? 걔는 내 제일 착한 아들이란 말이야.”강나현은 인터넷에 자신을 검색해봤지만 부정적인 여론은 보이지 않았다.‘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호들갑 떨긴.’그녀는 술자리가 취소돼도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강민아의 SNS를 들
휴대폰이 또 울리자 강나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화면에 뜬 황 기자라는 이름을 보자 강나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추적 818의 황 기자가 이 시점에 전화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벨 소리는 마치 사형 선고처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강나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황 기자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이 형 때문에 완전히 망했어요. 나 기자증 취소당했다고요.”강나현이 바로 부인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네가 법을 위반한 짓을 한 거겠지.”황 기자가 억울함을 토로했다.“윗선에 여러 세력이 압력을 넣고 있대요. 추적 818 프로그램이라도 살리려고 회사에서 날 해고했어요.”그녀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심씨 가문의 태산 그룹에서 압력을 넣은 거야?”“태산 그룹뿐만이 아니에요.”기자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했다.“현이 형, 강민아가 그냥 평범한 가정주부라면서요? 근데 공권력까지 강민아를 감싸고 있다고요.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헛소리하지 마.”강나현이 욕설을 퍼부었다.“여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네 잘못이지.”그녀는 계속하여 기자를 탓했다.“됐어. 이젠 너한테 기대할 것도 없네. 강민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겠어.”...ALI 수학 경시대회 결승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날, 육성민은 강민아와 정이와 함께 등산을 갔다.아침 6시, 희미한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산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육성민은 땀 흡수가 잘 되는 흰색 기능성 티셔츠와 밀리터리 운동복 바지를 입고 맨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갔다.허벅지 근육이 탄탄해서 운동복 바지가 팽팽해졌고 티셔츠가 딱 붙어 가슴 근육이 뚜렷하게 보였다. 짧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 근육도 아름다운 라인을 자랑하고 있었다.강민아는 벗어놓은 운동복 상의를 허리에 묶고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나아갔다. 육성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운동 바지 위로 드러난 엉덩이 라인이 아주 환상적이라 고개를 들 수가 없
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어른 멧돼지는 크고 힘이 세서 정말 나타나면 바로 뒤돌아 달려야 해.”“전 엄마 업고 같이 달릴게요!”...육성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숨 한 번 헐떡이지 않고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시선을 들어 구불구불한 계단 위에 있는 훤칠한 모습이 보이자 그는 서서히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혔다.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때 심은호는 고개를 돌려 육성민을 보았다.“오호, 이런 우연이...”심은호는 땀을 흡수하는 헤어밴드를 착용해 앞머리가 위로 들려 소년미가 넘쳤다.촉촉한 물기가 어린 그의 무결점 피부는 백옥처럼 투명했다.“정광사에서 태우는 첫 향이 영험하다고 들었는데 육 소위님도 향 태우러 오셨나요?”심은호가 군인 시절 육성민의 호칭을 부르자 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 도련님이 그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육성민은 살짝 입술을 달싹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네.”하지만 그도 궁금했다. 심은호 같은 남자는 세상 모든 걸 손쉽게 얻을 수 있을 텐데.“심은호 씨는 정광사에서 뭘 기도하러 오셨죠?”이 세상에 심은호가 얻지 못하는 게 있을까.“결혼운이요.”심은호의 말이 떨어지자 육성민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심은호는 육성민이 한 번에 두 계단씩 오르며 속도를 내는 모습에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육성민을 따라잡으면서도 그와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여유는 있었다.“육 소위님은 뭘 기도하러 오셨어요?”육성민은 심은호를 향한 도발로 가득 찬 목소리로 비웃었다.“저도 결혼운이요.”그의 말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엔 불꽃이 튀었다.그렇게 둘은 서로 쫓고 쫓기며 돌계단 위를 거칠게 뛰어갔다.승려복을 입은 스님이 사원 문 앞에 앉아있다가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졸음도 달아났다.대문 안을 들여다보니 두 개의 민첩한 실루엣이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이봐요!”문을 지키던 스님은 너무 멀리 가서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외치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오늘 절에 다른 손님은 받지 않는데...”육성민과 심은호는 절에 들어서
강나현은 다급한 어조로 강민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이 모든 게 강민아가 우리를 해치려고 짠 계획이에요!”그런데 얼굴 전체가 돼지처럼 부어올라 말을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목소리가 어눌하게 들렸다.그런 그녀의 말에 강성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벨트를 반으로 접은 뒤 강나현의 콧대를 조준해 휘둘렀다.“민아랑 내 부녀 사이 이간질할 생각 마!”강나현은 당황했다. 강성진이 왜 갑자기 강민아 편을 드는 걸까.“아빠가 키운 자식은 저예요! 강민아랑 무슨 감정이 있다고 그래요? 애초에 데려올 생각도 없었잖아요!”“닥쳐!”강성진은 화가 났다. 그의 평판은 무너졌지만 강민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앞으로 그녀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강나현이 대놓고 헛소리하는 걸 그냥 둘 리가 없었다.강성진이 소리를 질렀다.“테이프 가져와!”작고 하얀 손이 검은 테이프를 건넸다.강기성은 강성진에게 테이프를 건네는 김예나를 보고 날카로운 눈썹을 들썩였다.강성진이 테이프를 찢자 강나현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아빠, 뭐 하는 거예요?”강성진이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네 망할 입을 막으려는 거지!”강성진은 본인과 강민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돌아온 지 9년이 지났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건 손에 꼽힐 정도였다.게다가 둘은 한때 팽팽하게 맞서 싸운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강성진은 강민아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아빠! 하지 마요!”강나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강성진의 행동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강성진이 곧장 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감자 김예나는 한쪽에 서서 진흙탕처럼 혼탁한 눈빛으로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비슷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한때 강나현은 그녀를 화장실에 가두고 테이프를 붕대 삼아 눈과 머리, 입, 코를 감아 숨도 못 쉬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힘조차 없게 만들었다.그렇게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잠식되어 갈 때 가위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강나현은 강성진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상황을 뒤집을 희망이라도 본 듯 서서히 안도했다.‘그래, 이제 강민아가 맞아서 이빨이 뽑힐 차례야!’강성진은 강나현의 휴대폰 앨범 속 강민아와 관련된 영상을 지우고 숨을 고르더니 손을 들어 또다시 강나현의 뺨을 때렸다.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강나현의 얼굴을 강타했다.강나현의 입에 머금었던 솜뭉치가 끈적끈적한 피와 섞여 바닥에 튀어나왔다.“강나현, 이 망할 것! 날 해친 것도 모자라 민아까지 해치려고 들어? 강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가 오늘 너 때려죽인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에요!”강나현이 피를 뱉자 혀끝에는 온통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설명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강성진은 왜 그녀를 믿지 않는 걸까.휴대폰을 강나현에게 던진 뒤 강성진은 벨트를 풀었다.강나현은 강성진이 벨트로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그 순간 강성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벨트로 강나현을 한 대 세게 내려친 뒤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여보세요.”강성진은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들어와요.”강승 테크의 주요 주주 몇 명이 들어왔고 맨 앞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성진, 지금 여론이 자네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옴 쪽에서는 입찰에서 빠지려고까지 해!”강성진은 그 말에 덩달아 조바심을 냈다.“네? 어떻게 멋대로 발을 뺀다는 거죠? 지금 당장 옴 테크 쪽 임원에게 연락해 봐야겠어요!”또 다른 주주가 강성진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지금 어디든 자네가 나서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다는 걸 몰라?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고 싶어?”“난...”주주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우린 고심 끝에 만장일치로 자네가 먼저 대표 사임 발표를 하길 바라네. 그래야 자네나 회사에 대한 불리한 여론이 잠잠해질 거야.”“어떻게 강승
그러자 강성진은 강나현에게 소리쳤다.“민아를 좀 봐! 우리 회사를 위해서 애쓰고 있잖아!”강민아가 덧붙였다.“그런데 오늘 파티에서 공개된 영상이 서경 상류층에 퍼졌어요.”그녀는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며 강나현에게 물었다.“나현아, 넌 상류층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니까 가서 확인해 봐. 다들 우리 집 얘기하고 있는지.”강나현은 심장이 철렁하고 소름이 돋았다.강민아가 지금 그녀를 골탕 먹이고 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강성진이 곧바로 강나현을 재촉했다.“휴대폰 내놔.”강나현은 두 볼이 부어올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강민아가 또다시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녀는 강성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곧바로 강성진이 그녀의 뺨을 또 때렸고,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뺨 사이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으며 살갗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강성진은 그녀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명령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강성진의 위협적인 압박에 강나현은 순순히 휴대전화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부은 얼굴로 휴대폰 잠금이 풀리지 않자 지문으로 해제한 뒤 카톡 채팅 기록을 살펴보았다.곧 여러 명이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고, 강나현을 삭제하지 않은 재벌 2세들이 파티에서 강나현이 당당하게 강성진이 바람피운 것을 공개한 영상 링크를 보냈다.[강나현, 너 멋있다!][나현, 이게 네가 말한 빅 뉴스야?][역시 너야. 나오자마자 아빠부터 건드리네. 강나현, 용감해! 너는 내가 인정한다!]강성진은 강나현을 칭찬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두 눈에 담긴 불길이 거세게 번졌다.한심한 재벌 2세들은 부모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강나현이 파티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들에게 ‘모범’ 역할을 했기에 강나현을 숭배하기 시작했다.강나현은 소파에 앉아 강성진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발바닥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온몸을 휩쓸고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래위 치아가 달달 떨리며 서로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아빠...”강성진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강나
강민아는 눈을 깜빡이며 물잔이 강나현의 가슴을 강타하고 뜨거운 물이 마침 강나현의 얼굴에 튀면서 그녀의 얼굴도 씻기는 것을 바라보았다.“아악! 젠장!”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강나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물이 그녀의 얼굴에 있던 핏자국과 뒤섞이며 연분홍색으로 바뀔 때쯤 그녀가 허둥지둥 소파에서 일어났다.“죄송해요...”김예나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어두운 동공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이런 망할!”강나현은 욕설을 내뱉으며 뒤에서 쿠션을 잡아 김예나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김예나는 피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강나현이 던지는 딱딱한 물건에 맞아 머리에 피가 난 적도 있는데 이까짓 쿠션쯤이야.강기성이 손을 뻗어 쉽게 쿠션을 낚아채더니 김예나를 등 뒤로 보내면서 쿠션을 옆으로 던졌다.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예나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그의 눈에 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미친개 같았다.강나현은 입에 솜을 물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당장이라도 김예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일부러 그런 거야! 왜 아직도 우리 집에 살게 놔두는 거야? 저번에 내 그릇도 깨고, 내 옷도 잘못 빨고, 내 방 창문도 열어놔서 엄청나게 큰 벌레가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왔어!”김예나는 벌벌 떨며 강기성 뒤로 숨었다.강나현의 말이 맞다. 일부러 그랬다.강기성의 손에 이끌려 강씨 가문에 살게 되면서 강나현은 일부러 그녀에게 집안일을 시켰다.김예나도 기꺼이 도우미를 자처했는데 청소도구를 들고 강나현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강씨 가문의 다른 도우미들이 너도나도 일을 도와주는 탓에 강나현의 방을 꼼꼼히 뒤져 불리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강나현에게 학창 시절 겪었던 괴롭힘을 하나하나 되갚아주는 것뿐이었다.2년 내내 강나현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강씨 가문에서 강나현에게 했던 복수는 그녀가 한 짓에 비하면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그녀가 강기성에게 약을 먹이고 나서야 그는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였다.강기성은 이 집안에서 강성진에게 맞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강나현은 어렸을 때부터 강성진에게 매를 맞으며 점차 폭력을 동경하게 되어 여성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자 무리에 어울리려 했다. 마치 자신도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되어야만 매 맞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처럼.“그 사람이 도민영을 아끼는 것처럼 보여도 예전에 때려서 도민영 얼굴이 부은 걸 봤어. 난 어렸을 때부터 도민영이 저 사람한테 맞아서 머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어젯밤에 왜 오빠를 때린 거야?”강기성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내가 사람을 시켜서 친부모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어.”강기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강씨 가문은 남자가 물려받아야 한다면서 내가 친부모에게 가면 강씨 가문 대가 끊길 거래.”말하며 강기성이 경멸하듯 비웃었다.“난 언젠가 저 사람 죽여버릴 거야.”그저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강성진의 피가 튀는 것조차 더러운데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앞길까지 망칠 필요는 없었다.강민아는 숟가락으로 강기성에게 포도당 물을 먹여주었다.“언젠가 우리가 크면 저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날이 올 거야.”도민영이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걸 강성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강기성은 그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하지만 고리타분한 마인드와 강나현의 출생 이후 강성진은 큰딸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접었다.“다들 이만 돌아가세요.”직원들에게 말하던 강민아는 자리에 있던 임원들과 주주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단상 위에 꿇고 앉은 그녀의 발치에는 아직 기절한 척 시늉하는 도민영이 있었다.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임원들도 마음을 진정시켰다.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강민아의 차분한 모습은 임원들에게 구원의 지푸라기와 같았다.강민아는 심은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나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강성진에게 설명했다.“아빠,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올린 영상이 아니라고요!”강성진은 이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과 어린 비서의 동영상이 폭로되었고, 게다가 폭로한 당사자는 그의 잘난 딸이었다.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행복한 얼굴로 단상 아래에 있는 임직원들에게 두 딸이 강승 테크에 입사해 온 가족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그의 열정적인 연설이 아직도 귓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효녀 강나현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강나현의 목을 비틀어 머리를 공처럼 차버리고 싶었다.“개자식,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강성진은 발을 들어 강나현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이대로 머리를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강나현은 겁에 질려 오줌까지 지리며 서둘러 기어서 도망쳤다.그때 강민아를 돌아보았다.‘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냥 내버려두진 않겠지?’그런데 강민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도민영의 어깨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엄마, 일어나봐요!”강민아가 손을 뻗어 도민영의 인중을 누르자 도민영은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뜨며 강민아를 노려보았다.“아파!”그리고 다시 기절했다.강민아는 연기라는 걸 알았다.지금 상황에서는 무고한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것만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도 엄마를 걱정하는 효녀인 척 강성진에게 맞는 강나현을 무시하고 있었다.강나현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퍼졌지만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강성진은 그들의 대표였고 말 한마디로 그들을 해고할 수 있으니까.임원들과 주주들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굳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강성진이 어린 비서와 놀아난 사실은 사내에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적나라한 영상이 공개되고 현장에 기자까지 있으니 일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강승 테크에 미칠 부정
강나현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들리고, 그는 포박당한 채 매서운 눈빛으로 TV 화면을 응시했다.강민아를 저격하는 말인 건 안다.대체 강민아의 무슨 약점을 잡은 걸까.강민아가 강씨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위험한 짓을 한 건 그를 이곳에 가둔 것뿐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이 그가 감금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반하준은 자신의 뇌 어딘가에서 신경이 거칠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안 돼!’절대 그가 이곳에 감금된 사실을 폭로해선 안 된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확장되며 스크린에는 적나라한 영상이 재생되었다.강성진의 얼굴이 단번에 퍼렇게 질렸다.“아아악!”도민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미처 입을 가리지 못한 채 비참한 비명을 내뱉었다.강씨 가문의 다른 친척이나 주주들도 일제히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강나현은 단상에 서서 모두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상 아래 손님들에게 말했다.“여러분, 다 보셨나요? 저런 사람이 강승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나요? 저렇게 사생활이 엉망인데 정말 강승 테크를 믿고 맡길 수 있나요?”강나현이 눈가에 악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차갑게 웃었다.무죄로 석방된 후 강민아에게 주는 큰 선물이었다.‘그러게 누가 감히 도발하래?’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꿨으니 이제 강민아가 심은호와 사귀면서 다른 남자와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인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강나현은 심은호를 바라보며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무대 맨 앞줄에 서 있던 심은호는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강나현 씨의 가족도 서슴없이 희생하는 용기는 대단하네요!”강나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심은호는 왜 저렇게 담담한 걸까.게다가 대놓고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강나현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역시 심은호는 강민아를 그저 데리고 놀 생각이었고, 어쩌면 진작 그녀가 방탕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강나현이 승리의
강나현은 강민아의 게시물을 클릭해서야 이미 올렸던 영상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고개를 든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쳐다보았다.영상을 삭제했다고 그녀를 도발했던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이미 강민아와 반하준의 영상을 저장해 놓았으니까!강민아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강나현은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올렸다고 더더욱 확신했다.강민아는 분명 반하준이 합의서에 사인하고 아직 민이가 병원에 있는 데도 강나현이 보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난 거다.그래서 다시 친구 추가를 한 뒤 일부러 그녀만 볼 수 있는 게시물을 올려 기선제압을 했다.강민아는 그녀가 반하준을 좋아해서 그의 체면 때문에 영상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겠지만, 강나현은 강민아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강나현은 영상을 저장한 뒤 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꾸었다.이제 강민아에게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련다.“강민아, 내가 이미 경고했지. 날 건드리지 말라고! 심은호와 만나고 하준 씨랑 얽혀 있다고 해서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마.”강나현의 경고가 끝나고 파티장 스피커가 울렸다.무의식적으로 단상 위를 돌아보니 강성진이 그쪽으로 다가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제가 이 자리에서 몇 마디 짧게 얘기하겠습니다...”강성진은 10분 넘게 열정적으로 연설한 뒤 도민영과 두 딸까지 무대 위로 데려갔다.그들은 저마다 다른 속셈을 품고 역겨움을 참아가며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가족인 척 연기를 했다.마침내 강성진의 연설이 끝나고 강나현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아빠의 딸로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강나현의 발언은 약속된 게 아니었기에 강성진은 당황한 듯 강나현을 바라봤고, 강민아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우리 중엔 직책에 걸맞지 않은 품행을 지닌 사람이 있어요. 비록 가족이지만 사생활이 난잡해 강승 테크의 임원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호흡을 가다듬은 강나현은 강민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구치소에서 나온 뒤 미용실에 가서 브라운으로 염색하고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이 걸을 때마다 흔들렸다.일부러 피부과에 가서 관리도 받았다. 그게 아니면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용기도 없었을 거다.남성 정장을 입고 검은 가죽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걸음은 당차 보였지만 나이 많은 임원이나 주주들 눈에는 무척 거슬리는 차림새였다.“언니, 축하해. 벌써 다른 사람 만나네.”강나현은 다가가 심은호를 돌아보며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빛을 감추었다.“심은호,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쩌다 우리 언니랑 만나게 됐어?”강나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심은호는 무심하게 그녀를 흘겨볼 뿐이었다.“대단하네.”강나현이 눈이 휘어지게 히죽 웃었다.“심은호, 내가 물어보고 있는데 뭘 칭찬하는 거야?”“사고를 내고도 벌을 받지 않았잖아. 반씨 가문 도련님이 그 정도 다쳤는데 한 달도 안 돼서 나왔어. 참 운도 좋네. 반하준이 아마 불길 속에서도 구해줄 거야.”강나현의 표정이 다채롭게 바뀌었다.안 그래도 심은호는 존재만으로 눈에 띄고 주위에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려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이제 그들이 전부 강나현을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게다가 그들을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었다.지난달 강나현이 강변대로에서 큰 사고를 쳤다는 건 서경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심은호는 고개를 돌려 강민아에게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산에 있는 불상 대신 반하준이 거기 앉아있으면 되겠네요.”강민아는 심은호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얘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따스하고도 솔직한 심은호의 눈빛이 강민아의 얼굴에 머물렀다.“걱정되는데요.”강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리듯 말했다.“얘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요?”두 사람은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강나현은 불쾌함에 입을 삐죽거렸다.“언니는 날 뭐로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