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때라면 에릭은 박한빈이 단순히 반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고 회피하려는 시도도 없었다.에릭은 잠시 박한빈을 응시한 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너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성유리 씨는 단지 연약한 여자일 뿐인데?”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단호하게 대답했다.“유리가 연약하냐 안 하냐는 상관없어. 나는 유리가 반드시 올 거라는 걸 아니까.”“그럼 만약 성유리 씨가 오지 않으면?”에릭이 다시 물었다.“내 명의의 모든 주식은 네가 가져.”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입을 뻥끗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잠시 후, 겨우 정신을 다잡은 에릭이 입을 열었다.“진심이야?”“당연하지.”박한빈은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에릭은 침묵하다 갑자기 웃으며 물었다.“설마 이 틈을 타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그러자 박한빈이 되물었다.“아까 내기 하자고 했잖아. 만약 내가 이기면 넌 뭐 해줄 건데?”에릭은 그가 이렇게 물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처럼 보였다.그는 박한빈이 성유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남자라면 누구나 온화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다.에릭도 성유리가 정말 예쁘다고 인정했다. 그녀의 연약해 보이는 모습은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성유리가 어떻게 홀로 배 위로 온다는 것인지, 에릭은 전혀 믿기지 않았다.게다가 이게 바로 유람선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성유리가 신고하면 근처에 의심스러운 배가 나타나면 바로 알 수 있다.그래서 에릭은 성유리가 절대 혼자 올 리가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한 것이다.“네가 원하는 게 뭐야?”에릭은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직접 박한빈에게 물었다.“내가 원하는 거는 간단해. 넥스트펀드 5% 주식만 있으면 돼.”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다소 놀랐다. 비록 그 주식이 적지 않지만 박한빈이 에릭에게 건 내기는
때는 이미 한 겨울이었다. 몰아치는 바닷바람에 성유리의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그녀의 여윈 몸매는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고독하게 보였다.성유리는 추위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맞은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이 드러나 있었다.에릭은 원래 성유리를 속일 연기를 할 사람을 찾으려 했다. 박한빈에게 말했던 것처럼 성유리를 ‘시험’하려 했던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나는 유리가 나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는 걸 알아. 근데 나는 유리가 그렇게 하는 걸 원하지 않아. 더군다나 나중에 이게 단지 소란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안 좋을 거야.”“우리는 그런 걸로 서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박한빈은 그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에 에릭은 억지로라도 싸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는 박한빈이 말한 진짜 이유는 자랑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가 말한 핵심은 사실 처음 박한빈이 한 말에서 나온 것이었다.[나는 성유리가 나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는 걸 알아.]그 말에 에릭은 도대체 박한빈이 어디서 그런 자신감과 근거가 나오는지 궁금했다.그리고 지금, 성유리의 모습을 보고서야 에릭은 깨달았다. 박한빈이 이런 자신감을 갖는 것이 자만 때문이 아니었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해역 위치만 알려주었을 뿐, 어떻게 부두를 지나올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힌트를 주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성유리는 낡은 어선에 타고 왔는데 그 배에는 이끼와 청소되지 않은 작은 물고기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배가 정착할 때, 프로펠러는 큰 소음을 내며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언제라도 그녀를 뒤집어버릴 듯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이런 배는 성유리의 기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녀의 신분에도 맞지 않았다. 사실 성유리가 박한빈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면 즉시 요트를 준비해 에릭이 말한 곳으로 올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성유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리를 박차고 부두로 달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서야 확신했다.“저 사람이 박한빈 씨 친구예요?”“아니.”박한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빠르게 부정했다.“나한테 저렇게 멍청한 친구가 있을 리 없잖아.”말하는 동안 그는 이미 선원들에게 도구를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성유리가 계단을 밟고 배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그와 동시에 안전요원들이 내려가 에릭을 끌어올렸는데 그는 이미 온몸이 흠뻑 젖어버린 상태였다.원래는 입에 담지도 못할 거친 욕설을 내뱉고 있었지만 차가운 날씨에 재채기가 멈추질 않자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박한빈은 신경 쓰지도 않고 어부에게 돈을 던지듯 건넨 뒤, 성유리의 손을 잡고 안으로 향했다.“그럼 두 분은 아는 사인가요?”성유리가 다시 물었다.“알긴 알아.”박한빈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곧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근데 네게 전화한 건 몰랐어. 나는 그때 방에 갇혀 있었거든. 진짜야.”“근데 왜 박한빈 씨를 가둔 거죠?”“널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쟤가 반대했어.”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갑자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방금 전 그 남자와 박한빈 사이는 뭔가 이상했다.근데 딱히 뭐가 이상한 건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을 신경 쓰지 않은 채, 1층 파티장을 피해 뒷계단으로 향했다.그런데도 성유리는 귀를 울리는 음악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여기서... 파티를 벌이고 있는 건가요?”“응. 맞아.”“그럼 박한빈 씨도 오늘 이 파티에 온 거겠네요?”“응.”“그럼 제가 왔는데 파티에 데려가지도 않으실 거예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망설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파티도 끝나가고 저 사람들 술 취해서 난동을 부리고 있을 텐데... 볼 것도 없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박한빈을 가만히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사실 성유리는 아까부터 박한빈의 말과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자신이 집에 가는 걸 막았다느니, 방에 가뒀다느니 같은 말에 너무 의심이 들었었다.박한빈이 어린애도 아니고 에릭이라는 사람은 그의 보호자도 아닌데 무슨 권리로 막았다는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럴 이유가 있다면 단 하나, 그들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결국 방 안에 있었던 사람은 박한빈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자 성유리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졌다.그녀는 자연스럽게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성유리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손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을 주어 성유리를 그대로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정면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이 사람은 내 아내야.”상대방은 이미 술이 많이 취해 있었는지 박한빈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는 관심도 없었다.그저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뿐이었다.그러다 박한빈이 그녀를 끌어안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투덜댔다.“로얀, 너 또 너만 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우리 다 같이 나눠야 하는 거 아니었어?”“닥쳐!”박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그냥 돌아가자.”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굳이 파티에 가겠다고 고집부리지도 않았다.어차피 파티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제는 굳이 가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니까.원래 박한빈은 작은 보트를 이용해 성유리를 바로 육지로 데려가려 했다.그러나 이미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날씨까지 고려해야 했기에 결국 성유리를 객실로 데려가기로 했다.방으로 돌아가는 길, 파티장 쪽에서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게 오늘 밤의 하이라이트였다.펑!폭발음이 들리자 귀를 찢을 듯한 음악과 함께 여자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소리만 들어도 그곳이 얼마나 난잡한 분위기일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원래도 이런 분위기를
“그럼 왜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어요?”마침내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방에 들어온 이후 그녀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박한빈은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이 대답에 따라 성유리가 방금 본 것과 들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이다.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도.그는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었다.박한빈은 에릭, 그리고 밖에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성유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점점 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끝으로 박한빈은 한 번 더 강조했다.“사실 난 이제 거의 그들과 어울리지 않아. 예전엔 솔직히 말하면 국내에서의 생활이 너무 재미없었어. 아무런 도전도, 자극도 없어서.”“하지만 이제 난 더 중요한 목표가 생겼으니 그런 건 이제 더 이상 손대지 않아.”그러면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사실 너도 예전엔 이걸 다 알고 있었어.”“제가 다 알고 있었다고요?”“그래. 너도 에릭을 알잖아.”“그러니까 제가 박한빈 씨가 파티에서 에릭이라는 친구랑 함께 방탕하게 논다는 것도 알았다는 거예요?”“아니야. 난 방탕하게 논 적 없어.”박한빈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런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 난 그어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아. 그리고...”그는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했다.“나도 그런 건 더럽다고 생각해.”성유리는 잠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그러자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정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그러고는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고 그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손을 뺐다.“장난 좀 그만 치세요. 아직 전 당신 말 믿지도 않았다고요.”그런데도 박한빈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지금 믿게 해주려는 거잖아?”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를 악물며 겨우 참았다.박한빈이 다시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성유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박한빈.”그녀의
“마침 잘 왔네. 네가 직접 내 아내에게 설명해 줘.”박한빈이 에릭 앞에 서서 말했다.그러자 에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뭐라고?”자신은 따지러 온 거지, 이들 부부의 화해를 돕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이 모든 일은 네가 시작한 거잖아. 정말 가만히 두고만 볼 거야? 아니면... 내가 엉망이 되는 걸 즐기는 건가?”솔직히 말하면, 에릭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애초에 그는 언제나 혼자였고 그런 게 익숙했다.그뿐만 아니라 애초에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배우자 같은 존재를 가질 필요도, 가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파트너는 있을 수 있다.연애도 할 수 있다.하지만 그 이상으로 감정을 소모하는 관계는 불필요했다.그들에게 중요한 건 거래와 이익이었다.그들의 세계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굳이 이해받을 필요도 없었다.그런데 지금 박한빈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애초에 불필요한 감정에 얽매여 있는 것도 모자라 이제 와서 자기에게 설명까지 요구하고 있다.이건 굴욕이었다.에릭이 계속 가만히 있자 박한빈이 다시 말했다.“네가 가지고 있는 5% 지분, 아직 필요해?”에릭은 코웃음을 쳤다.“웃기지 마. 내가 그깟 지분에 관심이나 있을 것 같아?”“그건 나도 알아.”박한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그래도 너는... 나를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잖아?”그 말에 에릭의 표정이 급변했다.그는 박한빈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그는 미동도 없었고 표정 변화도 없었다.박한빈이 내뱉는 말이 전부 진심이라는 게 명백해지자 에릭이 헛웃음을 터트렸다.“로얀, 너 진짜 미쳤구나.”“고작 저 여자 하나 때문에? 네 형제들을 내팽개칠 수 있다고?”“도대체 저 여자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 그래?”“필요하다면 똑같은 여자 수십 명이라도 당장 구해줄 수 있어!”“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와 어울리지도 않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살지도 않더니... 이제는 나랑 맞설 셈이야?”에릭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따지듯 물었다.그러나 박한
“같이 가자.”박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성유리가 재빨리 그의 어깨를 눌렀다.“방 안에 화장실 있는데 왜 따라와요?”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박한빈은 멈칫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성유리는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유리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박한빈은 이미 다시 잠들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끝없이 검고 깊은 바다만 보일 뿐이었다.그녀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갑판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자.’박한빈이 한 번만 데려가 줬던 길이었지만 성유리는 금방 기억해 냈다.그런데 성유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갑판에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에릭이었다.그는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입술 사이로 연기를 내뱉었지만 형체를 이루기도 전에 거센 바닷바람에 흩어졌다.그리고 그 연기는 성유리 쪽으로 흘러왔다.강하고 매캐한 냄새에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그 순간, 에릭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온몸이 긴장해 있었고 눈빛에는 날카로움과 경계심이 드러나 있었다.하지만 성유리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 차가운 표정이 빠르게 사라졌다.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마치 그녀를 본 적도 없는 것처럼.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에릭의 옆으로 다가갔다.넓은 갑판에 빈 공간이 많았지만 굳이 에릭의 곁에 서서 먼저 말을 걸었다.“당신은 박한빈 씨가 지금 행복해 보이나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에릭이 흠칫했다.그리고 곧 비웃듯 대답했다.“그런 행복 따위, 싸구려일 뿐이죠.”그는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 후,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 결국 몸에서 나오는 도파민일 뿐입니다. 두 사람 정말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죠?”“천진난만하긴... 시간이 지나 서로에게서 더 이상 그런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면 당신들은 결국 서로를 하찮게 여기게 될 겁니다.”“마지막엔 결국 싸우고 서로를 헐뜯겠죠. 그때쯤이면 제가
“별다른 이상행동은 없지만 말을 너무 안 하세요. 그리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려 하고요. 매일 저 자리에 가만히 앉아 멍만 때리고 계세요.”의료진은 성유리를 안내하는 길에 환자의 증상을 설명했다.이곳은 최고급 정신병원이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사실 똑같은 분위기였다.길을 걸으며 성유리는 점점 더 강한 억압감을 느꼈다.복도 양옆으로는 굳게 닫힌 병실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하지만 그 문들은 평범한 병실 문이 아니라 쇠창살이 덧대어진 감옥과도 같은 구조였다.여기는 병원이 아니라 감옥에 가깝다는 느낌에 성유리는 점점 더 미간을 찌푸렸다.류수미는 이 긴 복도의 가장 깊숙한 방에 있었다.그녀는 문을 등지고 앉아 위쪽의 작은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류수미 씨?”방 앞에 도착한 의료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류수미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그러자 의료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민혁 씨.”이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류수미의 흐릿한 눈빛이 갑자기 또렷해졌다.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가 몸을 홱 돌렸다.성유리는 류수미를 맞이할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시선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비록 류수미는 이전에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그녀의 지위와 체면이 있는 이상 언제나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려 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헝클어진 머리카락, 탁해진 눈동자, 이미 하얗게 센 귀밑머리, 거칠고 갈라진 입술.류수미의 눈빛, 그리고 하는 모든 행동들은 마치 죽음을 앞둔 노파 같았다.성유리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그 순간, 류수미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성유리가 멍해졌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류수미는 다시 입
아라는 원래 그저 하나의 거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릭의 태도는 그녀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아라는 당연히 에릭과 계속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일부러 에릭에게 바람을 피울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일부러 현장에서 들키는 상황까지 연출했다.아라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에릭은 결국 그녀에게 질려버렸고 먼저 이별을 통보했었다.그녀는 약간의 소란을 피운 뒤, 에릭이 건넨 이별 위로금을 받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듯 끄 까지 연기하며 퇴장했다.이걸로 모든 이야기가 완벽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에릭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그리고 에릭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눈치챈 것 같기도 했다.에릭이 얼마나 냉혹한 남자인지 아라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짜요? 정말 다행이네요.”말을 하며 아라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을 껴안았다.“제가 요즘 에릭 씨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르시죠?”에릭은 아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아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세요. 이제부터 철없이 굴지 않을게요. 에릭 씨 일에는 절대 참견하지도 말썽도 부리지 않을 거예요. 그저 에릭 씨 곁에 남아있을 수만 있다면...”“그래. 걱정 안 할게. 이제부터 다른 사람은 없을 거니까.”에릭이 아라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며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네?”아라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질문에 아라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자. 지금 당장 혼인 신고하러.”“아니... 잠깐만요.”그제야 아라는 정신을 차리고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에릭은 곧장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싫어?”에릭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고 눈빛도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눈치 보던 아라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라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박한빈은 오
아라는 요 며칠 계속해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잠시 불안감이 스쳤지만 이내 스스로를 달랬다.‘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누가 날 쫓아오겠어?’아라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돈도 많지 않고 외모도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그러니 누군가 아라를 미행할 이유 따위 없었다.애써 잡생각을 정리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신경을 끄기로 했다.요즘 아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주성운이었다.요즘 그는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기에 아라가 돈을 모아 주문한 의족도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의족이 도착하면 주성운은 다시 두 발로 설 수 있고 그들의 삶도 한층 더 나아질 터였다.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함께 작은 가게를 열어 조용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그것이 아라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였다.공공버스에서 내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아라야.”익숙한 이름,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아라의 발걸음이 즉시 멈췄다.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딱 떨어지는 고급 정장을 입은 채로 눈에 띄는 금발과 짙은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남자가 입을 열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아라에게 쏠리자 아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에릭이 아라를 찾아온 것이다.순간 아라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몇 초 후, 그녀는 억지로 평정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다가섰다.“에... 에릭 씨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에릭은 아라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지나가는 길인가요?”아라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려 했다.“진짜 우연이네요. 근데...”“아니. 특별히 널 찾으러 왔어.”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멈칫했다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저... 저를 왜 찾아오셨어요? 무슨
“모르지. 방금 에릭이 나한테도 말 안 해줬잖아?”성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근데 에릭 씨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 단순히 재산 문제로 화낼 리는 없고... 그렇다면 그냥 가지고 놀았다는 건가요?”성유리가 이 일에 대해 그렇게 분석하자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럴걸?”에릭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그 녀석이 예전에 나보고 미쳤다고 난리 치더니 이제야 본인이 제대로 당했네. 아주 좋아.”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릭은 뭔가 떠오른 듯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라의 신원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그리고는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번 연극... 아주 볼만하겠어.”...에릭이 도착한 건 새벽이었지만 박한빈은 당연히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미리 주소를 알아두었기 때문에 에릭은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쳐들어왔다.현관 벨이 울릴 때, 성유리와 박한빈은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그 바람에 그녀의 손톱이 박한빈의 등을 스치며 얇은 상처를 남겼다.그래서 박한빈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사람 있어요.”성유리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그렇지만 벨 소리는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성유리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고 결국 그를 밀어내려 했다.살짝 화가 난 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아예 성유리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러버렸다.한편, 에릭은 문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금성은 아직 그렇게 추운 계절이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이처럼 문 앞에서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는 경험은 그야말로 치욕이었다.그렇게 이를 악물고 서 있다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내려왔는데 그의 표정은 에릭 못지않게 어두웠다.“대체 뭐 하러 온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에릭은
성유리가 아라와 다시 마주친 건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병원 로비,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낯선 남성과 아라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남자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아라에게 무언가를 조용히 이야기했고 아라는 몸을 숙여 그의 말을 경청했다.그러다 말이 끝나자 대놓고 눈알을 굴리며 남자를 향해 장난이 섞인 짜증도 부렸다.아라의 표정은 투덜대는 듯했지만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그 모습은 성유리가 에릭 곁에서 보았던 아라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그래서 성유리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다.그런데 아라는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한 듯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하지만 그 찰나의 경직은 오래가지 않았다.아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선을 피하고 다시 남자를 밀며 걸어갔다.그 모습을 보고도 성유리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어차피 아라는 에릭의 여자 친구였을 뿐이고 지금은 헤어진 듯하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그런데 아라의 발걸음이 왠지 급해 보였다.마치 무언가를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들킬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처럼.이상한 아라의 행동에 성유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때 마침, 박한빈이 성유리의 건강검진 결과를 들고 다가왔다.“유리야.”그녀는 멍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기에 박한빈의 부름에도 반응하지 못했다.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가 반응이 없자 결국 박한빈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성유리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 얼이 빠져있는 사람처럼.”성유리는 한동안 박한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방금 아라 씨를 봤어요.”“아라?”“네. 에릭 씨의 새 여자 친구였던 사람.”그제야 박한빈도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아라 씨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그래요?”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네. 저도 금성 대학 출신이에요. 다만 제가 입학했을 땐 선배님은 이미 졸업하고 결혼하셨더라고요. 나중에 선배님의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소개해 주셨었어요.”아라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이야기 소재 자체가 성유리에게는 다소 민망한 주제였지만 덕분에 박한빈과 에릭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그런 이유로 성유리는 굳이 더 신경 쓰지 않았다.어쨌든 저녁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이미 밤이 깊었기 때문에 에릭은 두 사람에게 하룻밤 묵고 가라고 권했지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에릭은 여전히 냉랭한 박한빈의 태도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정 그렇다면 나도 더 붙잡지는 않을게. 집사님, 손님들을 배웅하십시오.”말을 마친 그는 아라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박한빈 또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성유리를 데리고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그 뒷모습을 보며 성유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이 둘은 한때 명실상부한 파트너였고 지금도 각자의 분야에서 손꼽히는 인물인데 지금 하는 행동은 꼭 유치한 초등학생 같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아직도 에릭에게 앙금을 가지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에 성유리는 굳이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저 가만히 그의 손을 잡을 뿐.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넣고 장난스럽게 주물렀다.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좀만 기다려 봐.”“뭘요?”성유리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저 바보 곧 크게 당할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제가 연정우한테 끌려갔던 건 사실 에릭 씨 탓만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박한빈 씨랑 에릭 씨는 오랜 시간 알고 지냈는데 굳이 이 일로 계속 싸울 필요는 없지 않아요?”성유리가 말하는 동안 박한빈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더니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
사실 에릭에게 여자 친구가 끊긴 적은 없었다.자주 마주칠 일도 없는 성유리조차 그가 여러 명의 여자 친구를 두는 모습을 봐왔을 정도였다.박한빈도 전에 말했었다. 에릭에게 여자 친구란 그저 소모품 같은 존재라고.한동안은 그녀들에게 온갖 애정과 특권을 쏟아붓지만 ‘유효기간’이 지나면 가차 없이 버려버린다고 했다.그 과정에서 단 한 치의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오히려 에릭은 여자들이 잃어버린 것에 절망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즐기는 인간쓰레기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라에게만큼은 에릭이 다르게 대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가장 직관적인 증거는 박한빈이 말하기를 이 저택은 에릭의 개인적인 공간이었으며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그럼 아라는?그녀의 태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 같았다.물론 이건 그저 성유리의 생각일 뿐이었으니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박한빈과 에릭 사이에는 어딘가 묘한 거리감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저녁 식사 분위기도 화기애애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아라는 에릭 곁에서 마치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에릭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에릭은 그런 아라의 ‘배려심’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아라를 보면서 왠지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성유리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아라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은 뒤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그때, 갑자기 에릭이 입을 열었다.“돌아가면 이제 2세 가질 계획을 세우는 건가?”성유리는 난데없는 대화 주제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니, 그보다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이 에릭이라는 점이 더 황당했다.잠시 에릭이 정말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을 에릭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그리고 성유리뿐만 아니라 박한빈 역시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렇지만 그는 성유리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미쳤냐?”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또 다음 있다고?”성유리는 웃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다음은 없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박한빈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바로 그때 운전기사의 안내 소리가 들려왔다.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궁금증을 잠시 접어두고 성유리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잠깐만요. 저 립스틱 좀 다시 바르고.”성유리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뜻대로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그럴 필요 없어. 그 사람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그렇게 격식을 차려야 해?”박한빈에게는 자신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에릭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그런데 굳이 멋을 낼 필요가 있나?성유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박한빈이 이끄는 대로 차에서 내렸다.“로얀.”그곳에 있던 집사는 박한빈과 매우 친숙한 듯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 후,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저택의 구조를 살폈다.박한빈이 전에 말했던 것처럼 에릭은 단순히 넥스트의 창립자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고 했다.이 저택 역시 그 시절부터 내려온 유산이었다.새하얀 벽과 아치형 창문은 성유리가 동화책에서 본 성과 거의 똑같았다. 천장이 높은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는 웅장한 샹들리에도 그녀가 떠올린 전형적인 귀족 저택의 이미지와 부합했다.하지만 한 가지, 성유리가 어딘가 위화감을 느낀 것이 있었다.거실에서 차를 따르고 있는 여인.그녀는 푸른빛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가지런히 틀어 올렸는데 우아한 몸매에 단아한 얼굴, 그리고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낯선 인물의 등장에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올렸고 박한빈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박한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돌아봤다.
성유리와 박한빈이 라온시를 떠나기 전에, 에릭이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그런데 그 식사는 호텔이나 다른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릭의 개인 별장에서 진행되었는데 마치 성인 사자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갖듯 에릭의 별장도 그의 사적인 영역이었다.에릭이 박한빈 혼자 초대한 적이 있지만 성유리와 함께 초대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는 그가 성유리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박한빈은 사실 에릭의 인정 따위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가 성유리의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뜻깊게 생각했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끌려갔던 일을 아직 에릭에게 따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지만 그는 성유리에게 직접 연락을 해 초대를 했다.어쩔 수 없이 성유리는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초대에 기꺼이 응하며 박한빈과 함께 가기로 했다.그리고 성유리 또한 에릭의 별장에 흥미를 보이기에 박한빈도 순순히 그녀의 결정을 따랐다.별장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경비원들이 순찰을 도는 모습을 봤다.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고 비록 에릭이 사전에 연락을 했지만 어떤 경비 지점에선 차량을 멈추고 확인을 거친 후에야 통과를 허락했다.“자기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누군가 자신을 암살하려 할까 봐 두려워서 저러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설명을 듣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그래도 그냥 안전을 위한 거겠죠. 여긴 위험한 곳이니까.”하지만 박한빈의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보안이 그렇게 철저하면 뭐 해? 보디가드들이 엉망이니까 너를 연정우가 납치해 갔잖아.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 같으니라고.”성유리가 그를 달래듯 조용히 말했다.“그때 연정우가 초대장을 구해서 들어온 거였어요.”박한빈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있었다.성유리는 그가 여전히 그때 일을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이틀 동안, 박한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러나 박한빈이 유서를 작성했다는
“네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어머니한테 말했어. 설령 어머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박한빈 씨가 결국 널 찾아낼 거라고.”“박한빈 씨 수단이 어떤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어. 그때가 되면 네 어머니가 원하는 평온한 삶도 불가능해질 거라고.”“하지만 만약 어머니가 내게 네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적어도 지금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연정우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문득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내 행방을 알려준 거란 말이지?”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연정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방금 전의 웃음과는 달랐다.이번에는 한층 더 담담한, 어쩌면 체념이 섞인 듯한 웃음이었다.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갔고 손도 덜덜 떨렸다.성유리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연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런 말 해주려고 오늘 일부러 찾아온 건가?”그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발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연정우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는 다시 말했다.“성유리, 너는 나를 냉혹하다고 해도 좋아. “나를 배은망덕한 놈이라 불러도 좋아. 하지만 내가 평생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어도 너한테만큼은 아니야!”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했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다 널 믿었기 때문이야!”“하지만 넌? 나한테서 그토록 많은 걸 가져가고도 아직도 부족해?!”“이제는 날 이렇게까지 짓밟아야 속이 시원해?”“감옥에서조차 편히 지낼 수 없게 하려는 거냐고!”“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어?”잔인하다는 그 단어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연정우 스스로도 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