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이 전화를 끊고 돌아갔을 때, 박한빈은 이미 방문을 활짝 열고 있는 상태였다.그리고는 선장에게 작은 보트를 준비하라고 연락하고 있었다.“어디 가려고?”에릭이 물었다.“집에.”박한빈은 빠르게 대답했다.“이건 축하 파티잖아. 다들 와 있는데 네가 먼저 간다고?”박한빈은 유람선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쳐다봤다. 그들은 술을 많이 마신 상태기에 딱 봐도 이성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이런 장면은 박한빈에게 낯설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박한빈은 이곳에 남아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여기엔 너 혼자 있으면 충분해.”박한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게 무슨 말이야?”에릭은 떠나려는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다들 이렇게 모였는데? 너 때문에 이곳에서 파티를 열게 됐잖아. 그럼 이제 뭐가 더 필요해?”“내가 모든 비용 다 지급할게.”박한빈은 자신을 막아서는 에릭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그것도 안 돼, 내가 뭐 돈이 부족한 사람인 줄 알아?”이내 에릭은 한 일 초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선장에게 작은 보트를 먼저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솔직히 말 지금 집에 돌아가도 네 아내를 볼 수는 없을 거야.”박한빈은 이미 에릭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말에 발걸음이 뚝 멈췄다.그러더니 뒤돌아서 에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에릭은 박한빈과 꽤 오랜 시간을 지내왔지만 그들 사이에는 묘한 연대감이 있었다. 에릭은 때때로 박한빈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다만 박한빈은 세속적인 틀에서 벗어났고 이제는 무엇을 하든 자신을 즐기기 위해서만 행동했다.반면 에릭은 여전히 그 틀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박한빈을 ‘구출’하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것은 에릭의 일방적인 바람이었던 것 같았다.특히 성유리와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수록 박한빈은 점점 더 낯설게 느껴졌다. 에릭에게
다른 때라면 에릭은 박한빈이 단순히 반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고 회피하려는 시도도 없었다.에릭은 잠시 박한빈을 응시한 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너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성유리 씨는 단지 연약한 여자일 뿐인데?”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단호하게 대답했다.“유리가 연약하냐 안 하냐는 상관없어. 나는 유리가 반드시 올 거라는 걸 아니까.”“그럼 만약 성유리 씨가 오지 않으면?”에릭이 다시 물었다.“내 명의의 모든 주식은 네가 가져.”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입을 뻥끗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잠시 후, 겨우 정신을 다잡은 에릭이 입을 열었다.“진심이야?”“당연하지.”박한빈은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에릭은 침묵하다 갑자기 웃으며 물었다.“설마 이 틈을 타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그러자 박한빈이 되물었다.“아까 내기 하자고 했잖아. 만약 내가 이기면 넌 뭐 해줄 건데?”에릭은 그가 이렇게 물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처럼 보였다.그는 박한빈이 성유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남자라면 누구나 온화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다.에릭도 성유리가 정말 예쁘다고 인정했다. 그녀의 연약해 보이는 모습은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성유리가 어떻게 홀로 배 위로 온다는 것인지, 에릭은 전혀 믿기지 않았다.게다가 이게 바로 유람선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성유리가 신고하면 근처에 의심스러운 배가 나타나면 바로 알 수 있다.그래서 에릭은 성유리가 절대 혼자 올 리가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한 것이다.“네가 원하는 게 뭐야?”에릭은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직접 박한빈에게 물었다.“내가 원하는 거는 간단해. 넥스트펀드 5% 주식만 있으면 돼.”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다소 놀랐다. 비록 그 주식이 적지 않지만 박한빈이 에릭에게 건 내기는
때는 이미 한 겨울이었다. 몰아치는 바닷바람에 성유리의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그녀의 여윈 몸매는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고독하게 보였다.성유리는 추위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맞은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이 드러나 있었다.에릭은 원래 성유리를 속일 연기를 할 사람을 찾으려 했다. 박한빈에게 말했던 것처럼 성유리를 ‘시험’하려 했던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나는 유리가 나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는 걸 알아. 근데 나는 유리가 그렇게 하는 걸 원하지 않아. 더군다나 나중에 이게 단지 소란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안 좋을 거야.”“우리는 그런 걸로 서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박한빈은 그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에 에릭은 억지로라도 싸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는 박한빈이 말한 진짜 이유는 자랑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가 말한 핵심은 사실 처음 박한빈이 한 말에서 나온 것이었다.[나는 성유리가 나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는 걸 알아.]그 말에 에릭은 도대체 박한빈이 어디서 그런 자신감과 근거가 나오는지 궁금했다.그리고 지금, 성유리의 모습을 보고서야 에릭은 깨달았다. 박한빈이 이런 자신감을 갖는 것이 자만 때문이 아니었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해역 위치만 알려주었을 뿐, 어떻게 부두를 지나올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힌트를 주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성유리는 낡은 어선에 타고 왔는데 그 배에는 이끼와 청소되지 않은 작은 물고기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배가 정착할 때, 프로펠러는 큰 소음을 내며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언제라도 그녀를 뒤집어버릴 듯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이런 배는 성유리의 기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녀의 신분에도 맞지 않았다. 사실 성유리가 박한빈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면 즉시 요트를 준비해 에릭이 말한 곳으로 올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성유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리를 박차고 부두로 달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서야 확신했다.“저 사람이 박한빈 씨 친구예요?”“아니.”박한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빠르게 부정했다.“나한테 저렇게 멍청한 친구가 있을 리 없잖아.”말하는 동안 그는 이미 선원들에게 도구를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성유리가 계단을 밟고 배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그와 동시에 안전요원들이 내려가 에릭을 끌어올렸는데 그는 이미 온몸이 흠뻑 젖어버린 상태였다.원래는 입에 담지도 못할 거친 욕설을 내뱉고 있었지만 차가운 날씨에 재채기가 멈추질 않자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박한빈은 신경 쓰지도 않고 어부에게 돈을 던지듯 건넨 뒤, 성유리의 손을 잡고 안으로 향했다.“그럼 두 분은 아는 사인가요?”성유리가 다시 물었다.“알긴 알아.”박한빈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곧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근데 네게 전화한 건 몰랐어. 나는 그때 방에 갇혀 있었거든. 진짜야.”“근데 왜 박한빈 씨를 가둔 거죠?”“널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쟤가 반대했어.”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갑자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방금 전 그 남자와 박한빈 사이는 뭔가 이상했다.근데 딱히 뭐가 이상한 건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을 신경 쓰지 않은 채, 1층 파티장을 피해 뒷계단으로 향했다.그런데도 성유리는 귀를 울리는 음악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여기서... 파티를 벌이고 있는 건가요?”“응. 맞아.”“그럼 박한빈 씨도 오늘 이 파티에 온 거겠네요?”“응.”“그럼 제가 왔는데 파티에 데려가지도 않으실 거예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망설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파티도 끝나가고 저 사람들 술 취해서 난동을 부리고 있을 텐데... 볼 것도 없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박한빈을 가만히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사실 성유리는 아까부터 박한빈의 말과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자신이 집에 가는 걸 막았다느니, 방에 가뒀다느니 같은 말에 너무 의심이 들었었다.박한빈이 어린애도 아니고 에릭이라는 사람은 그의 보호자도 아닌데 무슨 권리로 막았다는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럴 이유가 있다면 단 하나, 그들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결국 방 안에 있었던 사람은 박한빈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자 성유리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졌다.그녀는 자연스럽게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성유리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손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을 주어 성유리를 그대로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정면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이 사람은 내 아내야.”상대방은 이미 술이 많이 취해 있었는지 박한빈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는 관심도 없었다.그저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뿐이었다.그러다 박한빈이 그녀를 끌어안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투덜댔다.“로얀, 너 또 너만 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우리 다 같이 나눠야 하는 거 아니었어?”“닥쳐!”박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그냥 돌아가자.”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굳이 파티에 가겠다고 고집부리지도 않았다.어차피 파티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제는 굳이 가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니까.원래 박한빈은 작은 보트를 이용해 성유리를 바로 육지로 데려가려 했다.그러나 이미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날씨까지 고려해야 했기에 결국 성유리를 객실로 데려가기로 했다.방으로 돌아가는 길, 파티장 쪽에서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게 오늘 밤의 하이라이트였다.펑!폭발음이 들리자 귀를 찢을 듯한 음악과 함께 여자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소리만 들어도 그곳이 얼마나 난잡한 분위기일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원래도 이런 분위기를
“그럼 왜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어요?”마침내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방에 들어온 이후 그녀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박한빈은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이 대답에 따라 성유리가 방금 본 것과 들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이다.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도.그는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었다.박한빈은 에릭, 그리고 밖에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성유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점점 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끝으로 박한빈은 한 번 더 강조했다.“사실 난 이제 거의 그들과 어울리지 않아. 예전엔 솔직히 말하면 국내에서의 생활이 너무 재미없었어. 아무런 도전도, 자극도 없어서.”“하지만 이제 난 더 중요한 목표가 생겼으니 그런 건 이제 더 이상 손대지 않아.”그러면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사실 너도 예전엔 이걸 다 알고 있었어.”“제가 다 알고 있었다고요?”“그래. 너도 에릭을 알잖아.”“그러니까 제가 박한빈 씨가 파티에서 에릭이라는 친구랑 함께 방탕하게 논다는 것도 알았다는 거예요?”“아니야. 난 방탕하게 논 적 없어.”박한빈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런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 난 그어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아. 그리고...”그는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했다.“나도 그런 건 더럽다고 생각해.”성유리는 잠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그러자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정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그러고는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고 그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손을 뺐다.“장난 좀 그만 치세요. 아직 전 당신 말 믿지도 않았다고요.”그런데도 박한빈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지금 믿게 해주려는 거잖아?”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를 악물며 겨우 참았다.박한빈이 다시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성유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박한빈.”그녀의
“마침 잘 왔네. 네가 직접 내 아내에게 설명해 줘.”박한빈이 에릭 앞에 서서 말했다.그러자 에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뭐라고?”자신은 따지러 온 거지, 이들 부부의 화해를 돕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이 모든 일은 네가 시작한 거잖아. 정말 가만히 두고만 볼 거야? 아니면... 내가 엉망이 되는 걸 즐기는 건가?”솔직히 말하면, 에릭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애초에 그는 언제나 혼자였고 그런 게 익숙했다.그뿐만 아니라 애초에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배우자 같은 존재를 가질 필요도, 가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파트너는 있을 수 있다.연애도 할 수 있다.하지만 그 이상으로 감정을 소모하는 관계는 불필요했다.그들에게 중요한 건 거래와 이익이었다.그들의 세계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굳이 이해받을 필요도 없었다.그런데 지금 박한빈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애초에 불필요한 감정에 얽매여 있는 것도 모자라 이제 와서 자기에게 설명까지 요구하고 있다.이건 굴욕이었다.에릭이 계속 가만히 있자 박한빈이 다시 말했다.“네가 가지고 있는 5% 지분, 아직 필요해?”에릭은 코웃음을 쳤다.“웃기지 마. 내가 그깟 지분에 관심이나 있을 것 같아?”“그건 나도 알아.”박한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그래도 너는... 나를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잖아?”그 말에 에릭의 표정이 급변했다.그는 박한빈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그는 미동도 없었고 표정 변화도 없었다.박한빈이 내뱉는 말이 전부 진심이라는 게 명백해지자 에릭이 헛웃음을 터트렸다.“로얀, 너 진짜 미쳤구나.”“고작 저 여자 하나 때문에? 네 형제들을 내팽개칠 수 있다고?”“도대체 저 여자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 그래?”“필요하다면 똑같은 여자 수십 명이라도 당장 구해줄 수 있어!”“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와 어울리지도 않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살지도 않더니... 이제는 나랑 맞설 셈이야?”에릭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따지듯 물었다.그러나 박한
“같이 가자.”박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성유리가 재빨리 그의 어깨를 눌렀다.“방 안에 화장실 있는데 왜 따라와요?”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박한빈은 멈칫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성유리는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유리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박한빈은 이미 다시 잠들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끝없이 검고 깊은 바다만 보일 뿐이었다.그녀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갑판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자.’박한빈이 한 번만 데려가 줬던 길이었지만 성유리는 금방 기억해 냈다.그런데 성유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갑판에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에릭이었다.그는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입술 사이로 연기를 내뱉었지만 형체를 이루기도 전에 거센 바닷바람에 흩어졌다.그리고 그 연기는 성유리 쪽으로 흘러왔다.강하고 매캐한 냄새에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그 순간, 에릭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온몸이 긴장해 있었고 눈빛에는 날카로움과 경계심이 드러나 있었다.하지만 성유리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 차가운 표정이 빠르게 사라졌다.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마치 그녀를 본 적도 없는 것처럼.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에릭의 옆으로 다가갔다.넓은 갑판에 빈 공간이 많았지만 굳이 에릭의 곁에 서서 먼저 말을 걸었다.“당신은 박한빈 씨가 지금 행복해 보이나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에릭이 흠칫했다.그리고 곧 비웃듯 대답했다.“그런 행복 따위, 싸구려일 뿐이죠.”그는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 후,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 결국 몸에서 나오는 도파민일 뿐입니다. 두 사람 정말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죠?”“천진난만하긴... 시간이 지나 서로에게서 더 이상 그런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면 당신들은 결국 서로를 하찮게 여기게 될 겁니다.”“마지막엔 결국 싸우고 서로를 헐뜯겠죠. 그때쯤이면 제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