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가자.”박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성유리가 재빨리 그의 어깨를 눌렀다.“방 안에 화장실 있는데 왜 따라와요?”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박한빈은 멈칫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성유리는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유리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박한빈은 이미 다시 잠들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끝없이 검고 깊은 바다만 보일 뿐이었다.그녀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갑판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자.’박한빈이 한 번만 데려가 줬던 길이었지만 성유리는 금방 기억해 냈다.그런데 성유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갑판에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에릭이었다.그는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입술 사이로 연기를 내뱉었지만 형체를 이루기도 전에 거센 바닷바람에 흩어졌다.그리고 그 연기는 성유리 쪽으로 흘러왔다.강하고 매캐한 냄새에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그 순간, 에릭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온몸이 긴장해 있었고 눈빛에는 날카로움과 경계심이 드러나 있었다.하지만 성유리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 차가운 표정이 빠르게 사라졌다.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마치 그녀를 본 적도 없는 것처럼.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에릭의 옆으로 다가갔다.넓은 갑판에 빈 공간이 많았지만 굳이 에릭의 곁에 서서 먼저 말을 걸었다.“당신은 박한빈 씨가 지금 행복해 보이나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에릭이 흠칫했다.그리고 곧 비웃듯 대답했다.“그런 행복 따위, 싸구려일 뿐이죠.”그는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 후,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 결국 몸에서 나오는 도파민일 뿐입니다. 두 사람 정말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죠?”“천진난만하긴... 시간이 지나 서로에게서 더 이상 그런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면 당신들은 결국 서로를 하찮게 여기게 될 겁니다.”“마지막엔 결국 싸우고 서로를 헐뜯겠죠. 그때쯤이면 제가
“별다른 이상행동은 없지만 말을 너무 안 하세요. 그리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려 하고요. 매일 저 자리에 가만히 앉아 멍만 때리고 계세요.”의료진은 성유리를 안내하는 길에 환자의 증상을 설명했다.이곳은 최고급 정신병원이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사실 똑같은 분위기였다.길을 걸으며 성유리는 점점 더 강한 억압감을 느꼈다.복도 양옆으로는 굳게 닫힌 병실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하지만 그 문들은 평범한 병실 문이 아니라 쇠창살이 덧대어진 감옥과도 같은 구조였다.여기는 병원이 아니라 감옥에 가깝다는 느낌에 성유리는 점점 더 미간을 찌푸렸다.류수미는 이 긴 복도의 가장 깊숙한 방에 있었다.그녀는 문을 등지고 앉아 위쪽의 작은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류수미 씨?”방 앞에 도착한 의료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류수미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그러자 의료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민혁 씨.”이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류수미의 흐릿한 눈빛이 갑자기 또렷해졌다.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가 몸을 홱 돌렸다.성유리는 류수미를 맞이할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시선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비록 류수미는 이전에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그녀의 지위와 체면이 있는 이상 언제나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려 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헝클어진 머리카락, 탁해진 눈동자, 이미 하얗게 센 귀밑머리, 거칠고 갈라진 입술.류수미의 눈빛, 그리고 하는 모든 행동들은 마치 죽음을 앞둔 노파 같았다.성유리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그 순간, 류수미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성유리가 멍해졌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류수미는 다시 입
성유리는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그녀는 이 집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귀국한 후 한 번도 이곳을 찾은 적이 없었으니까.하지만 몸에 새겨진 기억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지금 차 안에 앉아 있었지만 마치 과거의 자신이 이곳을 드나들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그때는 사씨 저택 안에도 사람들의 웃음이 가득했겠지?현재, 그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던 저택이 이렇게 쓸쓸하게 변해버렸다.황량한 정원, 법원의 봉인 딱지가 붙은 대문.그 모습이 주는 충격은 예상보다도 컸다.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몰랐다.그러다 박한빈의 전화가 걸려 왔다.“지금 어디야?”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많이 초조해보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사씨 저택이요.”그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박한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뭐라고?”“사씨 저택이라고요.”성유리는 다시 한번 말했다.“하지만 집은 법원에서 봉인해서 들어갈 수 없어요.”이번에는 확실하게 들었는지 박한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는 짧은 침묵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전화를 끊지 않은 것만으로도 박한빈의 말을 따르겠다는 의미였다.전화를 끊은 후, 성유리는 다시 대문을 바라보았다.이번에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이곳은 더 이상 사람이 찾는 곳이 아니었기에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성유리는 박한빈이 도착했음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박한빈은 금세 차를 세우고 성유리의 차 문 앞까지 걸어와 창문을 두드렸다.성유리는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문 잠금을 풀었다.그러자 그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랐다.박한빈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그리고 그는 성유리가 계속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박한빈도 처음부터 사민혁의 목숨을 노린 건 아니었다.심지어 의사들도 말했듯이 그의 사망 원인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본인이 이미 살고 싶은 욕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의사들이 아무리 살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하지만 사민혁의 죽음이 박한빈과 전혀 관련이 없는 건 아니었다.연정우가 그들의 곁에 있던 것 자체가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박한빈이 손을 대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그들의 자산이 연정우에게 다 넘어갔을 것이다.그러나 사실은 박한빈이 지금 그 속도를 더 빨리 만든 장본인임이 분명했다.그는 자신이 사씨 가문이 모든 것을 잃게 된 속도를 가속시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긴 시간이 지나도 박한빈이 대답하지 않자 성유리는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지금 나를 탓하는 거야?”박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성유리의 손을 꽉 잡았다.“내가... 상황을 더 빠르게 진행되게 했다는 건 인정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이 평화롭게 늙어가던 상황이었다면 그건 거짓말이야.”“연정우가 사씨 가문의 자산을 몰래 빼내기 시작한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어. 그 사람은 사씨 가문에 붙어 모든 걸 빨아먹고 있던 흡혈귀야. 나는 연정우 씨가 빼앗아 간 걸 다시 돌려놓았을 뿐이고.”박한빈은 행여나 말을 잘 못 뱉을까 봐 단어 하나하나를 고민하고 골랐다.물론, 이 과정이 박한빈이 말한 것처럼 간단하고 깔끔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인과 관계는 결국 그렇게 맞아떨어졌다.박한빈은 사실 사씨 가문을 용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는 사씨 가문이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그들을 도와줄 생각이 있었고 연정우의 본성을 깨닫게 해주면서 재산을 지킬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박한빈이 말했던 대로 사씨 가문이 하늘이를 양손녀로 삼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원한다면 박한빈은 그들이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박한빈은 사실 어떤
“그래서 전 연정우 씨가 지금 다른 재단들과 협력하고 있을 것 같다는 말이에요.”성유리는 자신이 맞게 추측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필경 이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뿐이었으니까,연정우는 국내에서 명예가 실추되었지만 그가 빼앗은 자산은 적지 않았다.그 자산으로 해외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따라서 연정우가 이렇게 잠잠해질 가능성도 있지만 성유리는 그가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연정우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그런 그가 평범한 삶에 만족할 리 없었다.복수의 기회를 엿보며 박한빈이 모든 것을 잃도록 만드는 것이 연정우의 선택일 것이다.성유리가 말을 마친 후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침묵에 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제 말이 틀린 건가요?”박한빈은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 난... 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어.”성유리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쳐다봤다.“그러니까... 넌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건가?”그때,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뭘 원망해야 하는데요?”박한빈은 말을 잇지 않았다.그러나 그들이 지금 있는 장소와 방금 나눈 대화는 성유리에게 이미 충분한 답을 주었다.성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말을 꺼냈다.“방금 말했잖아요.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었다고 해도 연정우 씨는 사씨 가문을 무조건 집어삼켰을 거라고.”“그렇다면 문제의 근원은 연정우 씨지, 당신이 아니에요.”성유리는 진지하게 말하며 박한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순간, 성유리가 말하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사실 그동안 박한빈은 마음속으로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특히 그날, 크루즈에서 일어난 일 이후로는 자신이 버려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그렇기에 지금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그러나 성유리가 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박한빈은 감동해
성유리는 차를 멈추자마자 눈앞에 있는 아파트 단지 이름부터 확인했다.새누리 아파트.이 아파트는 금성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지만 교통이 편리하고 주변에 슈퍼마켓과 병원이 있어 생활이 편리한 곳이었다.성유리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몇 명의 노인들이 운동하거나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꽤 활기찬 분위기였지만 성유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은 그들 중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박한빈이 미리 아파트 단지의 배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유리는 금세 찾던 사람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그 집의 큰 문은 꽉 닫혀 있었고 입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발도 가지런히 놓여 있고 우산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성유리는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주저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물건은 문 앞에 두고 가면 됩니다.”그러자 안에서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집안에서 누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문을 열어줬는데 성유리를 보고 나서는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그녀는 무심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성유리가 빠르게 손으로 문을 막았다.“금미라 씨? 왜 이렇게 급해하세요?”금미라는 손으로 문을 계속 누르다가 실패하고 두 손을 허리에 올리며 말했다.“뭐 하려는 거야? 내가 여기 사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성유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당신이 여기 살고 있다는 게... 그렇게 알아내기 어려운 일인가요?”그 말에 금미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그래서? 도대체 뭘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말해두는데 나 돈 없어. 그리고 모든 일은 연정우 혼자 한 거니까 찾으려면 걔를 찾아가.”그러자 성유리는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맞아요. 원래는 연정우를 찾으려고 했어요.”“근데 지금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알려주실 수 있나요?”성유리의 물음에 금미라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내가 뭘 안다고 그래? 그리고 방금
“박한빈 씨 성격이 어떤지 금미라 씨도 잘 아시잖아요. 사씨 가문이 저희에게 베푼 은혜도 있고... 이젠 죽을 사람은 죽고 미쳐버린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그 사람이 더더욱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도 사실 오늘 이 대화에서 큰 성과를 얻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그래서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등을 돌리자 금미라가 갑자기 소리쳤다.“잠깐!”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미라는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 보였고 깊이 주름진 이마는 금미라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성유리는 서두르지 않았고 조용히 서서 금미라가 내뱉을 말을 기다렸다.잠시 후, 금미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너한테 말해 준다면... 정말 날 가만히 놔둘 거니?”성유리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으실 거예요.”“하지만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딱 하나. 지금 이 평온한 삶을 더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이틀 뒤, 성유리와 박한빈은 함께 모풍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사실 박한빈은 혼자 가려고 했었지만 성유리는 단호했고 예상보다 강한 그녀의 태도에 박한빈은 의아함을 느꼈다.그래서 비행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에게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너 혹시 뭐가 떠오른 거야?”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묻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박한빈 또한 가만히 성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성유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뭐가요?”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은 확신이 들었으나 이내 초조해졌다.“그러니까... 네가 기억해 낸 게 뭐야?”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떠오른 건 없지만... 어젯밤 꿈을 꿨어요.”“꿈
라온시, 밤.이곳은 모풍국,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다.여기선 자본만 쥐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하던지 다 옳은 일이 되기도 한다.누구도 막을 수 없고 어떤 제약도 없었기에 이곳은 자유의 도시라는 별명도 소유하고 있다.귀청을 때리는 음악 속, 에이미는 비키니 차림으로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가느다란 허리는 손끝만 대도 부러질 듯했고 몸을 비틀 때마다 곁에 앉은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그는 단출하게 흰색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목과 소매의 단추를 몇 개 풀어 헤친 채,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사냥감을 고르는 포식자 같았다.하지만 에이미는 그런 시선에 익숙했으니 불쾌함 따위 느낄 이유도 없었다.왜냐하면 그녀가 여기 온 목적 자체가 바로 ‘사냥감’이 되는 것이었으니까.이곳은 넥스트 펀드의 고위 파트너들이 주최한 파티였다. 그래서 이 자리에 발을 들이기 위해선 엄청난 조건이 필요했다.그리고 선택받는 건 오직 최고급의 존재들뿐.에이미는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그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에릭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오늘 밤, 그녀가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는 바로 이 남자에게 달려 있었다.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에이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몸을 한 바퀴 휙 돌리더니 자연스럽게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다.애초에 입은 옷이 거의 없었기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남자는 곧바로 에이미의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한 번 쓱 훑어보더니 태연하게 손을 뺐다.“춤 배운 적 있나?”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에이미를 보던 남자가 물었다.그러자 에이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잠깐 배웠던 적 있어요.”“좋군.”그 말을 남기며 남자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에이미는 이미 그 시계를 눈여겨보고 있었다.최소 수천만 원은 족히 될 법한 시계였다.그리고 망설임 없이 남자는 차고 있던 시계를 앞으로 보이는 수영장에 던졌다.“너한테
아라는 원래 그저 하나의 거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릭의 태도는 그녀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아라는 당연히 에릭과 계속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일부러 에릭에게 바람을 피울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일부러 현장에서 들키는 상황까지 연출했다.아라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에릭은 결국 그녀에게 질려버렸고 먼저 이별을 통보했었다.그녀는 약간의 소란을 피운 뒤, 에릭이 건넨 이별 위로금을 받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듯 끄 까지 연기하며 퇴장했다.이걸로 모든 이야기가 완벽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에릭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그리고 에릭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눈치챈 것 같기도 했다.에릭이 얼마나 냉혹한 남자인지 아라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짜요? 정말 다행이네요.”말을 하며 아라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을 껴안았다.“제가 요즘 에릭 씨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르시죠?”에릭은 아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아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세요. 이제부터 철없이 굴지 않을게요. 에릭 씨 일에는 절대 참견하지도 말썽도 부리지 않을 거예요. 그저 에릭 씨 곁에 남아있을 수만 있다면...”“그래. 걱정 안 할게. 이제부터 다른 사람은 없을 거니까.”에릭이 아라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며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네?”아라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질문에 아라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자. 지금 당장 혼인 신고하러.”“아니... 잠깐만요.”그제야 아라는 정신을 차리고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에릭은 곧장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싫어?”에릭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고 눈빛도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눈치 보던 아라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라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박한빈은 오
아라는 요 며칠 계속해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잠시 불안감이 스쳤지만 이내 스스로를 달랬다.‘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누가 날 쫓아오겠어?’아라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돈도 많지 않고 외모도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그러니 누군가 아라를 미행할 이유 따위 없었다.애써 잡생각을 정리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신경을 끄기로 했다.요즘 아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주성운이었다.요즘 그는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기에 아라가 돈을 모아 주문한 의족도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의족이 도착하면 주성운은 다시 두 발로 설 수 있고 그들의 삶도 한층 더 나아질 터였다.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함께 작은 가게를 열어 조용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그것이 아라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였다.공공버스에서 내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아라야.”익숙한 이름,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아라의 발걸음이 즉시 멈췄다.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딱 떨어지는 고급 정장을 입은 채로 눈에 띄는 금발과 짙은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남자가 입을 열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아라에게 쏠리자 아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에릭이 아라를 찾아온 것이다.순간 아라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몇 초 후, 그녀는 억지로 평정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다가섰다.“에... 에릭 씨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에릭은 아라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지나가는 길인가요?”아라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려 했다.“진짜 우연이네요. 근데...”“아니. 특별히 널 찾으러 왔어.”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멈칫했다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저... 저를 왜 찾아오셨어요? 무슨
“모르지. 방금 에릭이 나한테도 말 안 해줬잖아?”성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근데 에릭 씨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 단순히 재산 문제로 화낼 리는 없고... 그렇다면 그냥 가지고 놀았다는 건가요?”성유리가 이 일에 대해 그렇게 분석하자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럴걸?”에릭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그 녀석이 예전에 나보고 미쳤다고 난리 치더니 이제야 본인이 제대로 당했네. 아주 좋아.”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릭은 뭔가 떠오른 듯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라의 신원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그리고는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번 연극... 아주 볼만하겠어.”...에릭이 도착한 건 새벽이었지만 박한빈은 당연히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미리 주소를 알아두었기 때문에 에릭은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쳐들어왔다.현관 벨이 울릴 때, 성유리와 박한빈은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그 바람에 그녀의 손톱이 박한빈의 등을 스치며 얇은 상처를 남겼다.그래서 박한빈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사람 있어요.”성유리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그렇지만 벨 소리는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성유리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고 결국 그를 밀어내려 했다.살짝 화가 난 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아예 성유리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러버렸다.한편, 에릭은 문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금성은 아직 그렇게 추운 계절이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이처럼 문 앞에서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는 경험은 그야말로 치욕이었다.그렇게 이를 악물고 서 있다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내려왔는데 그의 표정은 에릭 못지않게 어두웠다.“대체 뭐 하러 온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에릭은
성유리가 아라와 다시 마주친 건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병원 로비,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낯선 남성과 아라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남자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아라에게 무언가를 조용히 이야기했고 아라는 몸을 숙여 그의 말을 경청했다.그러다 말이 끝나자 대놓고 눈알을 굴리며 남자를 향해 장난이 섞인 짜증도 부렸다.아라의 표정은 투덜대는 듯했지만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그 모습은 성유리가 에릭 곁에서 보았던 아라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그래서 성유리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다.그런데 아라는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한 듯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하지만 그 찰나의 경직은 오래가지 않았다.아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선을 피하고 다시 남자를 밀며 걸어갔다.그 모습을 보고도 성유리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어차피 아라는 에릭의 여자 친구였을 뿐이고 지금은 헤어진 듯하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그런데 아라의 발걸음이 왠지 급해 보였다.마치 무언가를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들킬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처럼.이상한 아라의 행동에 성유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때 마침, 박한빈이 성유리의 건강검진 결과를 들고 다가왔다.“유리야.”그녀는 멍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기에 박한빈의 부름에도 반응하지 못했다.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가 반응이 없자 결국 박한빈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성유리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 얼이 빠져있는 사람처럼.”성유리는 한동안 박한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방금 아라 씨를 봤어요.”“아라?”“네. 에릭 씨의 새 여자 친구였던 사람.”그제야 박한빈도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아라 씨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그래요?”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네. 저도 금성 대학 출신이에요. 다만 제가 입학했을 땐 선배님은 이미 졸업하고 결혼하셨더라고요. 나중에 선배님의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소개해 주셨었어요.”아라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이야기 소재 자체가 성유리에게는 다소 민망한 주제였지만 덕분에 박한빈과 에릭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그런 이유로 성유리는 굳이 더 신경 쓰지 않았다.어쨌든 저녁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이미 밤이 깊었기 때문에 에릭은 두 사람에게 하룻밤 묵고 가라고 권했지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에릭은 여전히 냉랭한 박한빈의 태도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정 그렇다면 나도 더 붙잡지는 않을게. 집사님, 손님들을 배웅하십시오.”말을 마친 그는 아라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박한빈 또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성유리를 데리고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그 뒷모습을 보며 성유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이 둘은 한때 명실상부한 파트너였고 지금도 각자의 분야에서 손꼽히는 인물인데 지금 하는 행동은 꼭 유치한 초등학생 같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아직도 에릭에게 앙금을 가지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에 성유리는 굳이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저 가만히 그의 손을 잡을 뿐.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넣고 장난스럽게 주물렀다.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좀만 기다려 봐.”“뭘요?”성유리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저 바보 곧 크게 당할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제가 연정우한테 끌려갔던 건 사실 에릭 씨 탓만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박한빈 씨랑 에릭 씨는 오랜 시간 알고 지냈는데 굳이 이 일로 계속 싸울 필요는 없지 않아요?”성유리가 말하는 동안 박한빈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더니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
사실 에릭에게 여자 친구가 끊긴 적은 없었다.자주 마주칠 일도 없는 성유리조차 그가 여러 명의 여자 친구를 두는 모습을 봐왔을 정도였다.박한빈도 전에 말했었다. 에릭에게 여자 친구란 그저 소모품 같은 존재라고.한동안은 그녀들에게 온갖 애정과 특권을 쏟아붓지만 ‘유효기간’이 지나면 가차 없이 버려버린다고 했다.그 과정에서 단 한 치의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오히려 에릭은 여자들이 잃어버린 것에 절망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즐기는 인간쓰레기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라에게만큼은 에릭이 다르게 대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가장 직관적인 증거는 박한빈이 말하기를 이 저택은 에릭의 개인적인 공간이었으며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그럼 아라는?그녀의 태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 같았다.물론 이건 그저 성유리의 생각일 뿐이었으니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박한빈과 에릭 사이에는 어딘가 묘한 거리감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저녁 식사 분위기도 화기애애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아라는 에릭 곁에서 마치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에릭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에릭은 그런 아라의 ‘배려심’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아라를 보면서 왠지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성유리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아라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은 뒤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그때, 갑자기 에릭이 입을 열었다.“돌아가면 이제 2세 가질 계획을 세우는 건가?”성유리는 난데없는 대화 주제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니, 그보다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이 에릭이라는 점이 더 황당했다.잠시 에릭이 정말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을 에릭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그리고 성유리뿐만 아니라 박한빈 역시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렇지만 그는 성유리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미쳤냐?”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또 다음 있다고?”성유리는 웃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다음은 없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박한빈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바로 그때 운전기사의 안내 소리가 들려왔다.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궁금증을 잠시 접어두고 성유리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잠깐만요. 저 립스틱 좀 다시 바르고.”성유리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뜻대로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그럴 필요 없어. 그 사람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그렇게 격식을 차려야 해?”박한빈에게는 자신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에릭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그런데 굳이 멋을 낼 필요가 있나?성유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박한빈이 이끄는 대로 차에서 내렸다.“로얀.”그곳에 있던 집사는 박한빈과 매우 친숙한 듯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 후,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저택의 구조를 살폈다.박한빈이 전에 말했던 것처럼 에릭은 단순히 넥스트의 창립자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고 했다.이 저택 역시 그 시절부터 내려온 유산이었다.새하얀 벽과 아치형 창문은 성유리가 동화책에서 본 성과 거의 똑같았다. 천장이 높은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는 웅장한 샹들리에도 그녀가 떠올린 전형적인 귀족 저택의 이미지와 부합했다.하지만 한 가지, 성유리가 어딘가 위화감을 느낀 것이 있었다.거실에서 차를 따르고 있는 여인.그녀는 푸른빛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가지런히 틀어 올렸는데 우아한 몸매에 단아한 얼굴, 그리고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낯선 인물의 등장에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올렸고 박한빈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박한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돌아봤다.
성유리와 박한빈이 라온시를 떠나기 전에, 에릭이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그런데 그 식사는 호텔이나 다른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릭의 개인 별장에서 진행되었는데 마치 성인 사자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갖듯 에릭의 별장도 그의 사적인 영역이었다.에릭이 박한빈 혼자 초대한 적이 있지만 성유리와 함께 초대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는 그가 성유리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박한빈은 사실 에릭의 인정 따위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가 성유리의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뜻깊게 생각했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끌려갔던 일을 아직 에릭에게 따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지만 그는 성유리에게 직접 연락을 해 초대를 했다.어쩔 수 없이 성유리는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초대에 기꺼이 응하며 박한빈과 함께 가기로 했다.그리고 성유리 또한 에릭의 별장에 흥미를 보이기에 박한빈도 순순히 그녀의 결정을 따랐다.별장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경비원들이 순찰을 도는 모습을 봤다.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고 비록 에릭이 사전에 연락을 했지만 어떤 경비 지점에선 차량을 멈추고 확인을 거친 후에야 통과를 허락했다.“자기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누군가 자신을 암살하려 할까 봐 두려워서 저러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설명을 듣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그래도 그냥 안전을 위한 거겠죠. 여긴 위험한 곳이니까.”하지만 박한빈의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보안이 그렇게 철저하면 뭐 해? 보디가드들이 엉망이니까 너를 연정우가 납치해 갔잖아.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 같으니라고.”성유리가 그를 달래듯 조용히 말했다.“그때 연정우가 초대장을 구해서 들어온 거였어요.”박한빈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있었다.성유리는 그가 여전히 그때 일을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이틀 동안, 박한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러나 박한빈이 유서를 작성했다는
“네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어머니한테 말했어. 설령 어머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박한빈 씨가 결국 널 찾아낼 거라고.”“박한빈 씨 수단이 어떤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어. 그때가 되면 네 어머니가 원하는 평온한 삶도 불가능해질 거라고.”“하지만 만약 어머니가 내게 네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적어도 지금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연정우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문득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내 행방을 알려준 거란 말이지?”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연정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방금 전의 웃음과는 달랐다.이번에는 한층 더 담담한, 어쩌면 체념이 섞인 듯한 웃음이었다.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갔고 손도 덜덜 떨렸다.성유리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연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런 말 해주려고 오늘 일부러 찾아온 건가?”그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발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연정우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는 다시 말했다.“성유리, 너는 나를 냉혹하다고 해도 좋아. “나를 배은망덕한 놈이라 불러도 좋아. 하지만 내가 평생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어도 너한테만큼은 아니야!”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했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다 널 믿었기 때문이야!”“하지만 넌? 나한테서 그토록 많은 걸 가져가고도 아직도 부족해?!”“이제는 날 이렇게까지 짓밟아야 속이 시원해?”“감옥에서조차 편히 지낼 수 없게 하려는 거냐고!”“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어?”잔인하다는 그 단어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연정우 스스로도 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