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가자.”박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성유리가 재빨리 그의 어깨를 눌렀다.“방 안에 화장실 있는데 왜 따라와요?”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박한빈은 멈칫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성유리는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유리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박한빈은 이미 다시 잠들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끝없이 검고 깊은 바다만 보일 뿐이었다.그녀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갑판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자.’박한빈이 한 번만 데려가 줬던 길이었지만 성유리는 금방 기억해 냈다.그런데 성유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갑판에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에릭이었다.그는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입술 사이로 연기를 내뱉었지만 형체를 이루기도 전에 거센 바닷바람에 흩어졌다.그리고 그 연기는 성유리 쪽으로 흘러왔다.강하고 매캐한 냄새에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그 순간, 에릭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온몸이 긴장해 있었고 눈빛에는 날카로움과 경계심이 드러나 있었다.하지만 성유리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 차가운 표정이 빠르게 사라졌다.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마치 그녀를 본 적도 없는 것처럼.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에릭의 옆으로 다가갔다.넓은 갑판에 빈 공간이 많았지만 굳이 에릭의 곁에 서서 먼저 말을 걸었다.“당신은 박한빈 씨가 지금 행복해 보이나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에릭이 흠칫했다.그리고 곧 비웃듯 대답했다.“그런 행복 따위, 싸구려일 뿐이죠.”그는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 후,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 결국 몸에서 나오는 도파민일 뿐입니다. 두 사람 정말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죠?”“천진난만하긴... 시간이 지나 서로에게서 더 이상 그런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면 당신들은 결국 서로를 하찮게 여기게 될 겁니다.”“마지막엔 결국 싸우고 서로를 헐뜯겠죠. 그때쯤이면 제가
“별다른 이상행동은 없지만 말을 너무 안 하세요. 그리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려 하고요. 매일 저 자리에 가만히 앉아 멍만 때리고 계세요.”의료진은 성유리를 안내하는 길에 환자의 증상을 설명했다.이곳은 최고급 정신병원이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사실 똑같은 분위기였다.길을 걸으며 성유리는 점점 더 강한 억압감을 느꼈다.복도 양옆으로는 굳게 닫힌 병실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하지만 그 문들은 평범한 병실 문이 아니라 쇠창살이 덧대어진 감옥과도 같은 구조였다.여기는 병원이 아니라 감옥에 가깝다는 느낌에 성유리는 점점 더 미간을 찌푸렸다.류수미는 이 긴 복도의 가장 깊숙한 방에 있었다.그녀는 문을 등지고 앉아 위쪽의 작은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류수미 씨?”방 앞에 도착한 의료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류수미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그러자 의료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민혁 씨.”이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류수미의 흐릿한 눈빛이 갑자기 또렷해졌다.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가 몸을 홱 돌렸다.성유리는 류수미를 맞이할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시선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비록 류수미는 이전에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그녀의 지위와 체면이 있는 이상 언제나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려 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헝클어진 머리카락, 탁해진 눈동자, 이미 하얗게 센 귀밑머리, 거칠고 갈라진 입술.류수미의 눈빛, 그리고 하는 모든 행동들은 마치 죽음을 앞둔 노파 같았다.성유리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그 순간, 류수미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성유리가 멍해졌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류수미는 다시 입
성유리는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그녀는 이 집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귀국한 후 한 번도 이곳을 찾은 적이 없었으니까.하지만 몸에 새겨진 기억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지금 차 안에 앉아 있었지만 마치 과거의 자신이 이곳을 드나들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그때는 사씨 저택 안에도 사람들의 웃음이 가득했겠지?현재, 그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던 저택이 이렇게 쓸쓸하게 변해버렸다.황량한 정원, 법원의 봉인 딱지가 붙은 대문.그 모습이 주는 충격은 예상보다도 컸다.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몰랐다.그러다 박한빈의 전화가 걸려 왔다.“지금 어디야?”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많이 초조해보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사씨 저택이요.”그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박한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뭐라고?”“사씨 저택이라고요.”성유리는 다시 한번 말했다.“하지만 집은 법원에서 봉인해서 들어갈 수 없어요.”이번에는 확실하게 들었는지 박한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는 짧은 침묵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전화를 끊지 않은 것만으로도 박한빈의 말을 따르겠다는 의미였다.전화를 끊은 후, 성유리는 다시 대문을 바라보았다.이번에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이곳은 더 이상 사람이 찾는 곳이 아니었기에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성유리는 박한빈이 도착했음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박한빈은 금세 차를 세우고 성유리의 차 문 앞까지 걸어와 창문을 두드렸다.성유리는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문 잠금을 풀었다.그러자 그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랐다.박한빈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그리고 그는 성유리가 계속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박한빈도 처음부터 사민혁의 목숨을 노린 건 아니었다.심지어 의사들도 말했듯이 그의 사망 원인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본인이 이미 살고 싶은 욕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의사들이 아무리 살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하지만 사민혁의 죽음이 박한빈과 전혀 관련이 없는 건 아니었다.연정우가 그들의 곁에 있던 것 자체가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박한빈이 손을 대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그들의 자산이 연정우에게 다 넘어갔을 것이다.그러나 사실은 박한빈이 지금 그 속도를 더 빨리 만든 장본인임이 분명했다.그는 자신이 사씨 가문이 모든 것을 잃게 된 속도를 가속시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긴 시간이 지나도 박한빈이 대답하지 않자 성유리는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지금 나를 탓하는 거야?”박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성유리의 손을 꽉 잡았다.“내가... 상황을 더 빠르게 진행되게 했다는 건 인정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이 평화롭게 늙어가던 상황이었다면 그건 거짓말이야.”“연정우가 사씨 가문의 자산을 몰래 빼내기 시작한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어. 그 사람은 사씨 가문에 붙어 모든 걸 빨아먹고 있던 흡혈귀야. 나는 연정우 씨가 빼앗아 간 걸 다시 돌려놓았을 뿐이고.”박한빈은 행여나 말을 잘 못 뱉을까 봐 단어 하나하나를 고민하고 골랐다.물론, 이 과정이 박한빈이 말한 것처럼 간단하고 깔끔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인과 관계는 결국 그렇게 맞아떨어졌다.박한빈은 사실 사씨 가문을 용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는 사씨 가문이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그들을 도와줄 생각이 있었고 연정우의 본성을 깨닫게 해주면서 재산을 지킬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박한빈이 말했던 대로 사씨 가문이 하늘이를 양손녀로 삼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원한다면 박한빈은 그들이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박한빈은 사실 어떤
“그래서 전 연정우 씨가 지금 다른 재단들과 협력하고 있을 것 같다는 말이에요.”성유리는 자신이 맞게 추측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필경 이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뿐이었으니까,연정우는 국내에서 명예가 실추되었지만 그가 빼앗은 자산은 적지 않았다.그 자산으로 해외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따라서 연정우가 이렇게 잠잠해질 가능성도 있지만 성유리는 그가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연정우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그런 그가 평범한 삶에 만족할 리 없었다.복수의 기회를 엿보며 박한빈이 모든 것을 잃도록 만드는 것이 연정우의 선택일 것이다.성유리가 말을 마친 후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침묵에 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제 말이 틀린 건가요?”박한빈은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 난... 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어.”성유리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쳐다봤다.“그러니까... 넌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건가?”그때,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뭘 원망해야 하는데요?”박한빈은 말을 잇지 않았다.그러나 그들이 지금 있는 장소와 방금 나눈 대화는 성유리에게 이미 충분한 답을 주었다.성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말을 꺼냈다.“방금 말했잖아요.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었다고 해도 연정우 씨는 사씨 가문을 무조건 집어삼켰을 거라고.”“그렇다면 문제의 근원은 연정우 씨지, 당신이 아니에요.”성유리는 진지하게 말하며 박한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순간, 성유리가 말하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사실 그동안 박한빈은 마음속으로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특히 그날, 크루즈에서 일어난 일 이후로는 자신이 버려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그렇기에 지금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그러나 성유리가 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박한빈은 감동해
성유리는 차를 멈추자마자 눈앞에 있는 아파트 단지 이름부터 확인했다.새누리 아파트.이 아파트는 금성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지만 교통이 편리하고 주변에 슈퍼마켓과 병원이 있어 생활이 편리한 곳이었다.성유리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몇 명의 노인들이 운동하거나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꽤 활기찬 분위기였지만 성유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은 그들 중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박한빈이 미리 아파트 단지의 배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유리는 금세 찾던 사람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그 집의 큰 문은 꽉 닫혀 있었고 입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발도 가지런히 놓여 있고 우산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성유리는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주저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물건은 문 앞에 두고 가면 됩니다.”그러자 안에서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집안에서 누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문을 열어줬는데 성유리를 보고 나서는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그녀는 무심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성유리가 빠르게 손으로 문을 막았다.“금미라 씨? 왜 이렇게 급해하세요?”금미라는 손으로 문을 계속 누르다가 실패하고 두 손을 허리에 올리며 말했다.“뭐 하려는 거야? 내가 여기 사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성유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당신이 여기 살고 있다는 게... 그렇게 알아내기 어려운 일인가요?”그 말에 금미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그래서? 도대체 뭘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말해두는데 나 돈 없어. 그리고 모든 일은 연정우 혼자 한 거니까 찾으려면 걔를 찾아가.”그러자 성유리는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맞아요. 원래는 연정우를 찾으려고 했어요.”“근데 지금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알려주실 수 있나요?”성유리의 물음에 금미라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내가 뭘 안다고 그래? 그리고 방금
“박한빈 씨 성격이 어떤지 금미라 씨도 잘 아시잖아요. 사씨 가문이 저희에게 베푼 은혜도 있고... 이젠 죽을 사람은 죽고 미쳐버린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그 사람이 더더욱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도 사실 오늘 이 대화에서 큰 성과를 얻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그래서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등을 돌리자 금미라가 갑자기 소리쳤다.“잠깐!”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미라는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 보였고 깊이 주름진 이마는 금미라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성유리는 서두르지 않았고 조용히 서서 금미라가 내뱉을 말을 기다렸다.잠시 후, 금미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너한테 말해 준다면... 정말 날 가만히 놔둘 거니?”성유리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으실 거예요.”“하지만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딱 하나. 지금 이 평온한 삶을 더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이틀 뒤, 성유리와 박한빈은 함께 모풍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사실 박한빈은 혼자 가려고 했었지만 성유리는 단호했고 예상보다 강한 그녀의 태도에 박한빈은 의아함을 느꼈다.그래서 비행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에게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너 혹시 뭐가 떠오른 거야?”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묻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박한빈 또한 가만히 성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성유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뭐가요?”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은 확신이 들었으나 이내 초조해졌다.“그러니까... 네가 기억해 낸 게 뭐야?”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떠오른 건 없지만... 어젯밤 꿈을 꿨어요.”“꿈
라온시, 밤.이곳은 모풍국,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다.여기선 자본만 쥐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하던지 다 옳은 일이 되기도 한다.누구도 막을 수 없고 어떤 제약도 없었기에 이곳은 자유의 도시라는 별명도 소유하고 있다.귀청을 때리는 음악 속, 에이미는 비키니 차림으로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가느다란 허리는 손끝만 대도 부러질 듯했고 몸을 비틀 때마다 곁에 앉은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그는 단출하게 흰색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목과 소매의 단추를 몇 개 풀어 헤친 채,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사냥감을 고르는 포식자 같았다.하지만 에이미는 그런 시선에 익숙했으니 불쾌함 따위 느낄 이유도 없었다.왜냐하면 그녀가 여기 온 목적 자체가 바로 ‘사냥감’이 되는 것이었으니까.이곳은 넥스트 펀드의 고위 파트너들이 주최한 파티였다. 그래서 이 자리에 발을 들이기 위해선 엄청난 조건이 필요했다.그리고 선택받는 건 오직 최고급의 존재들뿐.에이미는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그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에릭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오늘 밤, 그녀가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는 바로 이 남자에게 달려 있었다.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에이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몸을 한 바퀴 휙 돌리더니 자연스럽게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다.애초에 입은 옷이 거의 없었기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남자는 곧바로 에이미의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한 번 쓱 훑어보더니 태연하게 손을 뺐다.“춤 배운 적 있나?”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에이미를 보던 남자가 물었다.그러자 에이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잠깐 배웠던 적 있어요.”“좋군.”그 말을 남기며 남자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에이미는 이미 그 시계를 눈여겨보고 있었다.최소 수천만 원은 족히 될 법한 시계였다.그리고 망설임 없이 남자는 차고 있던 시계를 앞으로 보이는 수영장에 던졌다.“너한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