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은 그 말에 가늘게 눈을 뜨고 박한빈을 쓱 바라보았다.“들어오라고 해.”잠시 고민하던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대답했다.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걸 에릭이 놓칠 리 없었다.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그는 사람들을 모아 간단한 내기를 열었다.내기의 주제는 바로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였다.에릭은 박한빈을 오래 봐온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장담했다.박한빈은 절대 버티지 못할 거라고.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에이, 박한빈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걸로 무너지겠어?”“난 2000원 건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그럼 난 4000원.”내기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참여하기 시작했다.에릭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사람들이 진짜 박한빈을 모른다고 몰래 혀를 끌끌 찼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그를 비웃었다.“야, 박한빈이 그렇게 감정적일 거라고 생각해?”“너야말로 걔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냐?”그렇게 말들이 오가는 사이 드디어 웨이터가 성유리를 데리고 파티 장소로 들어왔다.성유리는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곳에 있던 여자들이 몸매를 과시하는 비키니를 걸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그렇기에 오히려 그 단아한 차림새가 이곳에서 더욱 눈에 띄었다.성유리는 조용히 걸어와 박한빈 앞에 멈춰 섰다.사실, 박한빈이 에릭보다 먼저 그녀를 봤어야 맞다.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술만 마시고 있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마주 선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같이 가요.”그녀의 태도는 한없이 공손했다.그 모습에 에릭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이미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남자 앞에서 자존심을 버리는 모습을 봐왔다.그리고 한때는 박한빈에게도 말했었다.“여자를 너무 애지중지하지 마라.”하지만 막상 이렇게 성유리가 박한빈 앞에서 몸을 낮추는 걸 직접 보니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그런데도 정작 박한빈은 여전히 술만 마실 뿐, 단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성유리
성유리는 멀리 가지 않았다.에릭이 내려왔을 때, 그녀는 호텔 정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여기는 라온시.이곳은 그녀가 사는 금성이 아니었다.아무리 도심의 조명이 밝다고 해도 한밤중에 동양인 여성 혼자 거리를 배회하는 것은 위험했다.더군다나 성유리는 작고,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처럼 보였다.그런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무언가로 인식되기 쉬웠다.박한빈도 그걸 알았다.그래서 예전에 그녀를 라온시에 데려왔을 때는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도 되는 듯 늘 가까이에서 성유리를 지켜보며 보호했다.그런데 오늘 박한빈은 그녀를 혼자 남겨두었다.에릭은 이 상황이 꽤 복잡하게 느껴졌다.솔직히 말해 그가 일하면서 수백 개의 금융 데이터를 한꺼번에 분석하는 것보다도 이 상황이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에릭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그저 ‘호스트’로서 자연스럽게 성유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제가 사람 불러서 호텔까지 바래다주라고 할게요.”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에릭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고마워요.”성유리는 나직이 말했다.그런데 그녀의 눈가가 방금 전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솔직히 에릭 정도 되는 사람이 몇 방울의 눈물에 흔들릴 리 없었다.얼마 전, 그가 어느 채무자의 집에 돈을 받으러 갔을 때 그 집의 10대 소녀가 에릭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피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울부짖었다.그러나 그때조차 에릭은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성유리의 눈가에 맺힌 그 몇 방울의 눈물은 왠지 모르게 에릭을 짜증 나게 했다.에릭은 자기도 모르게 귀찮은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대체 두 사람... 무슨 일로 싸운 겁니까?”성유리는 고개를 뚝 떨구고 자신의 발끝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류수미 씨가 미쳐버렸어요. 알고 계세요?”“알고 있습니다.”에릭은 별 감흥 없이 답했다.미쳤다 한들 어쩌겠는가?그들의 세계에서
에릭은 심지어 박한빈이 진짜로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기 시작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되려 에릭에게 되물었다.“너는 예전부터 나한테 이런 삶 살라고 하지 않았어?”“근데 왜 이제 와서 막상 내가 즐기니까 갑자기 미쳤다고 하는 거지?”에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박한빈은 그를 한 번 쓱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으며 에릭에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앞쪽에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저 여자 봐봐, 어때?”...성유리는 호텔에서 혼자 3일이라는 시간을 보냈다.그동안 박한빈은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그녀는 혼자 밥을 먹었고 혼자 호텔 로비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그리고 결국 귀국을 앞당기기로 결심했다.휴대폰으로 항공권을 검색하며 예약하려던 순간, 누군가 성유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간.호텔 로비는 여전히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그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부드러운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성유리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하지만 남자가 앉는 순간, 마치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다 이내 서서히 주먹을 꽉 쥐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짧은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맞은편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 씨 맞으십니까?”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남자는 어두운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콧날 위에는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었다.무겁게 얹힌 한국어 발음에서는 외국 특유의 억양이 묻어났다.그리고 이내 성유리는 남자가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실망한 표정이 살짝 드러났다.남자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저희 보스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누구요? 박한빈 씨인가요?”성유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무언가 기대하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눈앞의 남자는 잠시 멍해졌다.그러더니 천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그리고 그 눈빛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확실한 확신.연정우는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았다.그래서 천천히 손을 들어 코끝까지 내려와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그제야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얼굴.수염이 조금 자랐고 눈가에는 그늘이 더 깊어졌다.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인상이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었다.그러나 연정우가 성유리를 바라볼 때만큼은 따뜻한 온기가 묻어났다.“유리 너... 날 기억하는구나?”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연정우는 그들의 마지막 만남을 잊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녀가 정말로 모든 걸 기억해 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알아본 것뿐인지.그런 연정우의 마음이 묘하게 불안하게 흔들리는 순간,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왜 연정우 씨가 여기 계시는 거죠?”연정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일하러 왔지.”“금성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었으니까.”그는 말하는 내내 계속해서 성유리의 반응을 살폈다.연정우의 대답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그리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민혁 씨...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연정우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자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성유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이내 주먹을 꽉 쥐었는데 어찌나 강한지 손가락 마디마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그럼 류수미 씨는...”연정우가 어렵게 말을 꺼내자 성유리가 담담히 대답했다.“미쳐버렸어요.”“지금은 정신병원에 계시고요.”“뭐?”연정우는 많이 놀란 듯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숙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리고 아주 잠깐 숨을 헐떡이다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 내 잘못이야.”“내가... 더 강했어야
“넌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야?”연정우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아, 아니요.”성유리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전 그냥 제가 당신을 끌어들인 것 같아서 그래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제가 연정우 씨랑 결혼할 뻔했던 그 일 때문에 박한빈 씨가 당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거잖아요.”“그 일만 아니었으면 연정우 씨는 아직도 국내에서 순조롭게 살고 있었을 테고 사씨 가문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그래서... 너무 미안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이미 잠식된 듯이 메말라 있었다.연정우는 한동안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것도 굉장히 즐겁다는 듯한 웃음.마치 무언가 정말 웃긴 걸 발견한 것처럼.“그래서?”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이제야 박한빈 씨의 본모습을 알았다는 거야?”“내가 전부터 말했잖아.”“그 사람은 애초부터 널 아껴주지 않았어.”“그게 아니었으면 네가 하늘이를 데리고 그렇게까지 급히 도망칠 필요가 있었겠어?”연정우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그리고 그때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너도 강제로 박한빈 씨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성유리. 너 기억나? 네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건... 바로 나였어.”“봐. 지금 박한빈 씨는 너한테 질려버렸잖아? 그 사진으로 충분히 설명이 안 돼?”“그러니까 유리야,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야.”연정우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그리고 그를 보는 성유리의 시선은 한없이 투명했다.연정우는 확신했다.이제야 그녀가 믿기 시작했다는걸.그때, 연정우가 다시 말했다.“나랑 같이 가자.”연정우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성유리는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안 돼요.”“왜 안 돼?”“하늘이가 아직 국내에 있어요. 그 애는 저희 아인데 만약...”“내가 데려오면 되잖아.”연정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넌 아이의 엄마야.”“하늘이가 얼마나 예민
에이미가 그 남자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첫 번째 만남에서도 남자는 여러 명 중에서 콕 집어 자신을 선택했다.그리고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더 중요한 건, 에이미가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액세서리다.그 남자가 직접 사준 것인데 몇백만 원에 달하는 고가의 장신구였다.남자는 그것을 사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그 순간, 에이미는 확신했다.이번에도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여러 명의 ‘사냥감’ 중에서 그 남자의 눈에 들게 된 것이라고 착각하며 몰래 기뻐했다.그렇지만 에이미는 남자의 관심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라온시의 상류층.에이미와 그녀의 동료들은 이미 사람들의 ‘등급’을 매겨둔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그 남자는 리스트에 없었다.하지만 암묵적으로 남자가 최상위급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그 사실은 남자를 대하는 에릭과 다른 남자들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그래서 에이미는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기회를 붙잡았다.그 선택은 결국 틀리지 않았다.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질투, 그리고 선망.독특한 디자인의 슈퍼카가 고속도로 위를 질주했다.엔진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고 에이미의 기분도 한층 더 들떴다.그러면서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에이미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손을 잡았지만 남자는 즉시 손을 뿌리쳤다.그의 움직임은 매우 빠르고 단호했다.마치 에이미의 손이 오염이라도 된 것처럼.순간, 에이미의 몸이 굳었다.그리고 문득 남자는 신체 접촉을 극도로 꺼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지난번 호텔에서도 마찬가지였다.에이미를 방으로 데려가 놓고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떠나지도 못하게 만들었기에 그녀는 결국 그날 밤 소파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그리고 지금, 남자는 에이미의 손조차 잡으려 하지 않았다.에이미는 생각했다.혹시 남자에게 무언가 숨겨진 사정이 있는 걸까?그래서 남자는 항상 파티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여자들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었는지,
에이미는 아마 자신이 하고 있던 추측이 남자에게 들킨 거라고 짐작했다.필경 이 남자가 속한 세계에서는 사람 하나 사라지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터였다.‘그럼 지금 이 사람이 나를 없애려는 건가?’에이미는 알았다.그들에게 자신 같은 존재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걸.그래서 만약 상대의 기분이 나쁘다면 자신 같은 사람 하나쯤 없애버리는 것도 아무렇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이 바짝 말라 본능적으로 혀로 입술을 훑었다.뭔가 변명을 해야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차에서 내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름한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뭐지?’에이미는 순간 멍해졌으나 이내 이런 고민이 생겼다.‘따라가야 할까?’‘그런데 만약 저 사람이 진짜로 나를 해치려 한다면 어떡하지?’에이미 같은 사람은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만약 그런 뜻이 아니라면? 이렇게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쳐버리면 어떡하지?’‘내가 얼마나 힘들게 이 남자를 잡았는데!’에이미가 고민하는 시간 동안 남자는 이미 여관 안으로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그래서 에이미는 더는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무조건 따라가야 한다는 확신이 서자 그녀는 즉시 가방을 움켜쥐고 그의 뒤를 쫓아 여관으로 들어섰다.남자는 이곳이 익숙한 듯했다.프런트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쪽으로 걸어갔다.그러자 에이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이미 예약된 방이 있다는 거네?’그렇다면 왜 이런 곳을 선택한 거지?자신이 생각하는 남자의 신분이라면 굳이 이런 허름한 곳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에이미에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었다.중요한 건 바로 지금 자신이 이 남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설령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남자의 곁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남자가 자신을 죽일 게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 가치가 있을 테니까.에이미가 결심하는 순간, 남자가 방문을
방금 보낸 문자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보낸 것으로 그녀가 예약한 여관 주소와 방 번호가 적혀 있었다.이 며칠 동안 그들은 실제로 만나지 않았고 전화도 하지 않았다. 성유리는 연정우가 그녀의 주변에 사람을 배치해 지켜보고 있을까 봐 걱정했다.그래서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으면 계획이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믿어버릴 정도로 연기를 하기로 했다.성유리는 연정우가 자기 자신을 고귀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자부심은 어렸을 때부터 받은 가족의 교육과 외부에 보여주는 이미지에서 나왔다.박한빈과는 달리 연정우는 외부 사람들의 평가를 매우 신경 쓴다. 비록 그가 내면은 차갑고 이기적이라 해도 겉으로는 온화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박한빈은 외부에서 하는 평가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아무리 공공장소라고 해도 누군가를 극도로 싫어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연기를 하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다.사람들 앞에서 싫어하는 사람에게 망신을 주지 않는다면 정말 신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냉철한 인간이었다.성유리는 연정우가 만약 ‘영웅’이 될 기회를 얻으면 주저 없이 그 기회를 잡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그래서 그녀는 그 기회를 주기로 했다.지금 그녀는 ‘영웅’이 구해줘야 할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역할은 성유리만이 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녀는 연정우가 갈망했던 사람이었고 연정우가 여러 번 실패한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성유리 때문에 연정우와 박한빈은 적이 되었고 박한빈의 손에 의해 계획한 모든 일이 여러 번 실패로 돌아간 적도 있다.그래서 성유리는 연정우에게 기회를 주면 반드시 그것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결국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고 연정우도 성유리에게서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박한빈은 처음부터 성유리가 연정우를 끌어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이러는 걸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의 안전을 암암리에 지키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 100% 안전을 보
아라는 원래 그저 하나의 거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릭의 태도는 그녀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아라는 당연히 에릭과 계속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일부러 에릭에게 바람을 피울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일부러 현장에서 들키는 상황까지 연출했다.아라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에릭은 결국 그녀에게 질려버렸고 먼저 이별을 통보했었다.그녀는 약간의 소란을 피운 뒤, 에릭이 건넨 이별 위로금을 받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듯 끄 까지 연기하며 퇴장했다.이걸로 모든 이야기가 완벽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에릭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그리고 에릭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눈치챈 것 같기도 했다.에릭이 얼마나 냉혹한 남자인지 아라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짜요? 정말 다행이네요.”말을 하며 아라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을 껴안았다.“제가 요즘 에릭 씨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르시죠?”에릭은 아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아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세요. 이제부터 철없이 굴지 않을게요. 에릭 씨 일에는 절대 참견하지도 말썽도 부리지 않을 거예요. 그저 에릭 씨 곁에 남아있을 수만 있다면...”“그래. 걱정 안 할게. 이제부터 다른 사람은 없을 거니까.”에릭이 아라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며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네?”아라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질문에 아라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자. 지금 당장 혼인 신고하러.”“아니... 잠깐만요.”그제야 아라는 정신을 차리고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에릭은 곧장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싫어?”에릭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고 눈빛도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눈치 보던 아라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라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박한빈은 오
아라는 요 며칠 계속해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잠시 불안감이 스쳤지만 이내 스스로를 달랬다.‘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누가 날 쫓아오겠어?’아라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돈도 많지 않고 외모도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그러니 누군가 아라를 미행할 이유 따위 없었다.애써 잡생각을 정리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신경을 끄기로 했다.요즘 아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주성운이었다.요즘 그는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기에 아라가 돈을 모아 주문한 의족도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의족이 도착하면 주성운은 다시 두 발로 설 수 있고 그들의 삶도 한층 더 나아질 터였다.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함께 작은 가게를 열어 조용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그것이 아라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였다.공공버스에서 내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아라야.”익숙한 이름,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아라의 발걸음이 즉시 멈췄다.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딱 떨어지는 고급 정장을 입은 채로 눈에 띄는 금발과 짙은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남자가 입을 열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아라에게 쏠리자 아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에릭이 아라를 찾아온 것이다.순간 아라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몇 초 후, 그녀는 억지로 평정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다가섰다.“에... 에릭 씨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에릭은 아라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지나가는 길인가요?”아라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려 했다.“진짜 우연이네요. 근데...”“아니. 특별히 널 찾으러 왔어.”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멈칫했다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저... 저를 왜 찾아오셨어요? 무슨
“모르지. 방금 에릭이 나한테도 말 안 해줬잖아?”성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근데 에릭 씨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 단순히 재산 문제로 화낼 리는 없고... 그렇다면 그냥 가지고 놀았다는 건가요?”성유리가 이 일에 대해 그렇게 분석하자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럴걸?”에릭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그 녀석이 예전에 나보고 미쳤다고 난리 치더니 이제야 본인이 제대로 당했네. 아주 좋아.”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릭은 뭔가 떠오른 듯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라의 신원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그리고는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번 연극... 아주 볼만하겠어.”...에릭이 도착한 건 새벽이었지만 박한빈은 당연히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미리 주소를 알아두었기 때문에 에릭은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쳐들어왔다.현관 벨이 울릴 때, 성유리와 박한빈은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그 바람에 그녀의 손톱이 박한빈의 등을 스치며 얇은 상처를 남겼다.그래서 박한빈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사람 있어요.”성유리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그렇지만 벨 소리는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성유리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고 결국 그를 밀어내려 했다.살짝 화가 난 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아예 성유리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러버렸다.한편, 에릭은 문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금성은 아직 그렇게 추운 계절이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이처럼 문 앞에서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는 경험은 그야말로 치욕이었다.그렇게 이를 악물고 서 있다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내려왔는데 그의 표정은 에릭 못지않게 어두웠다.“대체 뭐 하러 온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에릭은
성유리가 아라와 다시 마주친 건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병원 로비,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낯선 남성과 아라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남자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아라에게 무언가를 조용히 이야기했고 아라는 몸을 숙여 그의 말을 경청했다.그러다 말이 끝나자 대놓고 눈알을 굴리며 남자를 향해 장난이 섞인 짜증도 부렸다.아라의 표정은 투덜대는 듯했지만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그 모습은 성유리가 에릭 곁에서 보았던 아라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그래서 성유리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다.그런데 아라는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한 듯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하지만 그 찰나의 경직은 오래가지 않았다.아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선을 피하고 다시 남자를 밀며 걸어갔다.그 모습을 보고도 성유리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어차피 아라는 에릭의 여자 친구였을 뿐이고 지금은 헤어진 듯하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그런데 아라의 발걸음이 왠지 급해 보였다.마치 무언가를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들킬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처럼.이상한 아라의 행동에 성유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때 마침, 박한빈이 성유리의 건강검진 결과를 들고 다가왔다.“유리야.”그녀는 멍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기에 박한빈의 부름에도 반응하지 못했다.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가 반응이 없자 결국 박한빈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성유리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 얼이 빠져있는 사람처럼.”성유리는 한동안 박한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방금 아라 씨를 봤어요.”“아라?”“네. 에릭 씨의 새 여자 친구였던 사람.”그제야 박한빈도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아라 씨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그래요?”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네. 저도 금성 대학 출신이에요. 다만 제가 입학했을 땐 선배님은 이미 졸업하고 결혼하셨더라고요. 나중에 선배님의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소개해 주셨었어요.”아라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이야기 소재 자체가 성유리에게는 다소 민망한 주제였지만 덕분에 박한빈과 에릭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그런 이유로 성유리는 굳이 더 신경 쓰지 않았다.어쨌든 저녁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이미 밤이 깊었기 때문에 에릭은 두 사람에게 하룻밤 묵고 가라고 권했지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에릭은 여전히 냉랭한 박한빈의 태도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정 그렇다면 나도 더 붙잡지는 않을게. 집사님, 손님들을 배웅하십시오.”말을 마친 그는 아라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박한빈 또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성유리를 데리고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그 뒷모습을 보며 성유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이 둘은 한때 명실상부한 파트너였고 지금도 각자의 분야에서 손꼽히는 인물인데 지금 하는 행동은 꼭 유치한 초등학생 같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아직도 에릭에게 앙금을 가지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에 성유리는 굳이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저 가만히 그의 손을 잡을 뿐.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넣고 장난스럽게 주물렀다.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좀만 기다려 봐.”“뭘요?”성유리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저 바보 곧 크게 당할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제가 연정우한테 끌려갔던 건 사실 에릭 씨 탓만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박한빈 씨랑 에릭 씨는 오랜 시간 알고 지냈는데 굳이 이 일로 계속 싸울 필요는 없지 않아요?”성유리가 말하는 동안 박한빈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더니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
사실 에릭에게 여자 친구가 끊긴 적은 없었다.자주 마주칠 일도 없는 성유리조차 그가 여러 명의 여자 친구를 두는 모습을 봐왔을 정도였다.박한빈도 전에 말했었다. 에릭에게 여자 친구란 그저 소모품 같은 존재라고.한동안은 그녀들에게 온갖 애정과 특권을 쏟아붓지만 ‘유효기간’이 지나면 가차 없이 버려버린다고 했다.그 과정에서 단 한 치의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오히려 에릭은 여자들이 잃어버린 것에 절망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즐기는 인간쓰레기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라에게만큼은 에릭이 다르게 대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가장 직관적인 증거는 박한빈이 말하기를 이 저택은 에릭의 개인적인 공간이었으며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그럼 아라는?그녀의 태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 같았다.물론 이건 그저 성유리의 생각일 뿐이었으니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박한빈과 에릭 사이에는 어딘가 묘한 거리감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저녁 식사 분위기도 화기애애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아라는 에릭 곁에서 마치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에릭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에릭은 그런 아라의 ‘배려심’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아라를 보면서 왠지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성유리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아라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은 뒤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그때, 갑자기 에릭이 입을 열었다.“돌아가면 이제 2세 가질 계획을 세우는 건가?”성유리는 난데없는 대화 주제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니, 그보다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이 에릭이라는 점이 더 황당했다.잠시 에릭이 정말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을 에릭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그리고 성유리뿐만 아니라 박한빈 역시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렇지만 그는 성유리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미쳤냐?”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또 다음 있다고?”성유리는 웃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다음은 없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박한빈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바로 그때 운전기사의 안내 소리가 들려왔다.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궁금증을 잠시 접어두고 성유리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잠깐만요. 저 립스틱 좀 다시 바르고.”성유리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뜻대로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그럴 필요 없어. 그 사람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그렇게 격식을 차려야 해?”박한빈에게는 자신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에릭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그런데 굳이 멋을 낼 필요가 있나?성유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박한빈이 이끄는 대로 차에서 내렸다.“로얀.”그곳에 있던 집사는 박한빈과 매우 친숙한 듯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 후,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저택의 구조를 살폈다.박한빈이 전에 말했던 것처럼 에릭은 단순히 넥스트의 창립자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고 했다.이 저택 역시 그 시절부터 내려온 유산이었다.새하얀 벽과 아치형 창문은 성유리가 동화책에서 본 성과 거의 똑같았다. 천장이 높은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는 웅장한 샹들리에도 그녀가 떠올린 전형적인 귀족 저택의 이미지와 부합했다.하지만 한 가지, 성유리가 어딘가 위화감을 느낀 것이 있었다.거실에서 차를 따르고 있는 여인.그녀는 푸른빛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가지런히 틀어 올렸는데 우아한 몸매에 단아한 얼굴, 그리고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낯선 인물의 등장에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올렸고 박한빈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박한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돌아봤다.
성유리와 박한빈이 라온시를 떠나기 전에, 에릭이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그런데 그 식사는 호텔이나 다른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릭의 개인 별장에서 진행되었는데 마치 성인 사자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갖듯 에릭의 별장도 그의 사적인 영역이었다.에릭이 박한빈 혼자 초대한 적이 있지만 성유리와 함께 초대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는 그가 성유리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박한빈은 사실 에릭의 인정 따위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가 성유리의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뜻깊게 생각했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끌려갔던 일을 아직 에릭에게 따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지만 그는 성유리에게 직접 연락을 해 초대를 했다.어쩔 수 없이 성유리는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초대에 기꺼이 응하며 박한빈과 함께 가기로 했다.그리고 성유리 또한 에릭의 별장에 흥미를 보이기에 박한빈도 순순히 그녀의 결정을 따랐다.별장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경비원들이 순찰을 도는 모습을 봤다.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고 비록 에릭이 사전에 연락을 했지만 어떤 경비 지점에선 차량을 멈추고 확인을 거친 후에야 통과를 허락했다.“자기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누군가 자신을 암살하려 할까 봐 두려워서 저러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설명을 듣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그래도 그냥 안전을 위한 거겠죠. 여긴 위험한 곳이니까.”하지만 박한빈의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보안이 그렇게 철저하면 뭐 해? 보디가드들이 엉망이니까 너를 연정우가 납치해 갔잖아.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 같으니라고.”성유리가 그를 달래듯 조용히 말했다.“그때 연정우가 초대장을 구해서 들어온 거였어요.”박한빈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있었다.성유리는 그가 여전히 그때 일을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이틀 동안, 박한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러나 박한빈이 유서를 작성했다는
“네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어머니한테 말했어. 설령 어머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박한빈 씨가 결국 널 찾아낼 거라고.”“박한빈 씨 수단이 어떤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어. 그때가 되면 네 어머니가 원하는 평온한 삶도 불가능해질 거라고.”“하지만 만약 어머니가 내게 네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적어도 지금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연정우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문득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내 행방을 알려준 거란 말이지?”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연정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방금 전의 웃음과는 달랐다.이번에는 한층 더 담담한, 어쩌면 체념이 섞인 듯한 웃음이었다.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갔고 손도 덜덜 떨렸다.성유리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연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런 말 해주려고 오늘 일부러 찾아온 건가?”그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발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연정우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는 다시 말했다.“성유리, 너는 나를 냉혹하다고 해도 좋아. “나를 배은망덕한 놈이라 불러도 좋아. 하지만 내가 평생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어도 너한테만큼은 아니야!”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했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다 널 믿었기 때문이야!”“하지만 넌? 나한테서 그토록 많은 걸 가져가고도 아직도 부족해?!”“이제는 날 이렇게까지 짓밟아야 속이 시원해?”“감옥에서조차 편히 지낼 수 없게 하려는 거냐고!”“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어?”잔인하다는 그 단어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연정우 스스로도 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