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건 저도 알아요.”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뭔가 대답하려는 찰나,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정말 그렇게 간단했다면 애초에 박한빈 씨도 제가 이런 방법으로 연정우 씨를 끌어내는 걸 허락하지도 않았겠죠.”“여긴 금성이 아니에요. 더 중요한 건... 지금 한빈 씨 곁에 있는 사람들 다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한테 한빈 씨와 함께 연정우 씨를 찾아서 완전히 무너뜨리게끔 도와달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요.”“그 사람이 먼저 당신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죠.”“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연정우 씨도 분명 극도로 신중해질 거예요. 어쩌면 몇 년, 아니... 십 년이 넘도록 모습을 감출 수도 있어요.”성유리가 진지하게 말하는 동안, 박한빈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네 생각엔 내가 기다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한빈 씨는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사씨 가문의 일... 박한빈 씨는 늘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 속으로 엄청 신경 쓰고 있다는 거 다 알아요.”“만약 제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분명 다른 방법을 찾았겠죠? 그리고 한빈 씨가 생각한 방법들은 제 방식보다 훨씬 더 위험할 거고요.”“그러니까 결국 제가 선택한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거예요.”“그런 길을 네가 직접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박한빈이 물으며 자신의 허리에 감긴 성유리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세게 붙잡으며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봤다.“박한빈 씨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도 뭔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제가 말했잖아요. 전 더 이상 비겁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저희 부부잖아요. 무슨 일이든 함께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네가 말하는 감당이란 게 연정우 곁으로 가는 거야? 그
“저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예상치 못한 물음에 순간 멍해졌다가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저도 제 자신을 잘 지킬 수 있다는 걸 믿지 않는 거예요? 아니면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지를 의심하는 거예요? 둘 다 아니면... 그냥 제가 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당연히 그런 건 아니야.”박한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히 부정했지만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도대체 왜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는 거지? 내가 만약 널 짐으로 생각했다면 왜 여기까지 데려왔겠어?”“아니라면 도대체 왜...”“너한테 그 어떤 위험도 닥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린 충분히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잖아. 안 그래?”“하지만 지금 이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잖아요. 아니에요?”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성유리는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봐요. 박한빈 씨도 그걸 인정하시잖아요. 게다가 한빈 씨한테 주어진 시간도 별로 없어요. 그러니 이 상황에서 저희가 가장 효율적인 길을 선택하는 게 맞는 거 아니에요?”“아니, 틀려.”박한빈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하지만 정확히 뭐가 틀린 건지, 정작 그도 설명하지 못했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과 눈을 맞춘 채 잠시 조용히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이번엔 박한빈도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성유리가 내민 이 작은 타협의 손길을 지금 거절하면 정말로 그녀는 자신을 붙잡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그러면 결국 박한빈이 다시 스스로 성유리를 찾아가 어르고 달래야 할 것이다.아까처럼.그는 확신했다.만약 자신이 지금 나가버린다면 성유리는 절대 자신을 붙잡지 않을 거라고.“그럼 넌 완전히 마음을 굳힌 거야?”박한빈이 물었다.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만으로도 모든 걸 알 수 있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래. 잘 알겠어.”“제가 잘할게요
오히려 냉철하다고 생각했던 박한빈은 성유리를 꽤 많이 신경 쓰는 것 같았다.그렇지 않았다면 아까 그렇게 급하게 여기까지 달려오지도 않았겠지.게다가 그가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에이미조차도 뜨겁다고 느낄 정도였다.파티장에서 보여줬던 냉정함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그러니까 그들이 보여줬던 냉담한 태도는 전부 연기였을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두 사람이 연기까지 해가며 감추려는 건 대체 뭘까?에이미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굉장한 비밀을 엿본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그리고 이 비밀은 어쩌면...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화들짝 놀란 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마주 서 있는 사람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봤다.박한빈이었다.그는 조용히 에이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저...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에이미는 반사적으로 외쳤다.그리고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마치 무고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단 한 번 휴대폰을 흘끗 보았을 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나오세요. 그리고... 저희 거래 좀 합시다.”...“이걸 누가 너한테 보낸 거야?”검은 피부를 소유한 남자가 서류를 훑어보며 물었다.그러자 연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내 친구 중 한 명.”“이건 넥스트 펀드 내부 문서야. 네 친구가 어떻게 그쪽과 관련이 있다는 거지?”남자의 눈빛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연정우는 그의 의도를 짐작하고 묵묵히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사진 속에는 박한빈과 성유리가 함께 있었다.“이 사람... 로얀 아니야?”남자는 즉시 눈썹을 찌푸렸다.“넥스트 펀드 소속이잖아. 듣자 하니 요즘 이쪽에서 꽤 움직임이 있다던데.”“맞아. 그리고 이 서류를 준 사람도 바로 사진 속 여자야.”연정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그러면서 사진 속의 성유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이 여자는 누군데?”“로얀의 아내.”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에이미는 요즘 말 그대로 인생 최고의 나날들을 보내는 중이었다.박한빈은 그녀에게 값비싼 보석과 명품 가방을 사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스포츠카까지 선물했다.눈에 띄는 강렬한 레드 컬러, 그리고 보닛 위에는 분노한 황소가 찍혀 있는 디자인이었다.그 차를 몰고 나간 날, 주변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와, 진짜 멋있다!”“대박! 저 차 봤어? 너무 부럽다.”겉으로는 부러움과 칭찬을 쏟아냈지만 속으로는 다들 이를 갈고 있는 게 뻔했다.에이미는 그 시선들을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솔직히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저 여자들이라면 첫날 박한빈이 소파에서 자라고 했을 때, 괜한 짜증이나 부렸을 것이다.그러면 결국 쫓겨나고 말았을 테지만 에이미는 아니었다.이 모든 것은 결국 그녀의 것이 될 운명이었다.그리고 그 증거로 박한빈은 에이미에게 무제한 한도가 걸린 블랙카드까지 주었다.이제 더 이상 쇼핑할 때 가격표를 뒤적일 필요도 없었다.그냥 VIP 라운지에 앉아 있으면 점원이 직접 명품들을 가져다주었다.그런 어느 날, 낯선 목소리가 에이미의 귀에 들렸다.“에이미 언니!”고개를 돌려보니 눈앞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에이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누구인지 떠올리려 했지만 그 여자는 이미 그녀에게 성큼 다가오며 밝게 웃고 있었다.“정말 오랜만이에요. 와, 언니 요즘 완전 대박이던데요?”에이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여자에게 물었다.“누구세요?”“어머, 언니! 저 잊어버린 거예요?”여자는 실망한 척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저 해리예요. 저희 전에 같이 일했었잖아요?”‘해리?’그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예전 직장 동료이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꿍꿍이로 다가오는 걸까?에이미가 말없이 바라보자 해리는 눈치도 없이 또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언니, 요즘 누구랑 사귀는 거예요? 완전 좋은 남자 친구 만났다면서요?”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이미
해리의 말에 에이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이내 저 멀리서 박한빈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비록 그들과의 관계는 단순한 ‘협력’일 뿐이었다.그리고 에이미도 잘 알고 있었다.‘손님’에게 감정을 품는 건 절대 금기라는 걸.하지만 설령 박한빈의 배경을 몰랐다 해도 그의 외모와 분위기만으로도 여자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엔 충분했다.게다가 남자 친구라는 타이틀까지 더해지니 에이미가 어디를 가든 우쭐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박한빈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에이미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그러나 해리가 먼저 움직였다.“안녕하세요! 에이미 언니 남자 친구 맞으시죠?”해리는 박한빈에게 싱긋 웃으며 다가갔다.그러자 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누구십니까?”“저는 에이미 언니 친구예요! 오늘 같이 쇼핑하자고 약속했거든요! 근데 이렇게 우연히 뵙게 될 줄이야.”해리는 밝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언니가 평소에 엄청 자랑했어요. 아마 그래서 저희한테 소개해 주기 싫었나 봐요. 이렇게 보니까 언니가 꽁꽁 숨겨두고 싶은 이유를 알겠네요.”그러면서 해리는 자연스럽게 박한빈의 팔짱을 끼려 했다.해리는 오늘 일부러 어깨가 드러난 얇은 끈나시를 입었다.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고 대부분의 남자는 이런 접근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해리의 손이 닿기도 전에 에이미가 씩씩거리며 걸어왔다.“여태껏 내가 많이 참아줬지?”짝!에이미는 분에 못 이겨 해리의 뺨을 내리쳤다.“누가 네 친구야? 당장 안 꺼져?”“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감히 저 때렸어요?”갑자기 뺨을 맞은 해리의 눈에 살기가 서렸고 에이미 또한 지지 않았다.그렇게 두 여자는 그 자리에서 격렬하게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쇼핑몰 한복판에서 말이다.그러나 박한빈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그저 무표정하게 싸우고 있는 두 여자를 바라볼 뿐.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그렇게 한참을 지켜보던 박한빈은 이내 흥미를
연정우는 여전히 성유리의 말을 믿지 않았고 건네준 그 기획서조차도 마찬가지로 불신했다.이건 박한빈과 성유리가 짜고 치는 연극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해리의 말이 그의 신념을 흔들었다..해리는 연정우의 사람이다.오늘 에이미에게 접근하게 한 것도 그의 지시였다.그렇다면 박한빈은 해리의 존재조차 모른다.만약 이 모든 게 연극이라면 그가 굳이 이런 디테일까지 연출할 필요가 있을까?더군다나 성유리가 넘긴 기획서는 빈틈이 없었다.그것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었다.넥스트 펀드가 젠 펀드를 어떻게 삼키고 그 과정을 어떤 식으로 실행할 것인지, 그리고 철저한 분석과 함께 단계별 계획까지 명시되어 있었다.연정우는 이 기획서를 죠지와 함께 검토했었다.만약 이것이 진짜라면 그들은 넥스트 펀드를 건드리기 전에 젠 펀드에 먼저 손을 뻗을 수도 있었다.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매각해 버린다면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다.설령 이 문서가 가짜라고 해도 박한빈이 여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어마어마할 터였으니 연정우는 확신했다.그는 불필요한 함정을 파지 않는다.더군다나 상대가 이 덫에 걸릴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그렇다면 박한빈이 정말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그가 최근 라온시에 머무르는 것도 그 증거 중 하나였다.하지만 연정우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이 문서가 진짜라 해도 타겟이 젠 펀드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그래서 연정우는 최근 며칠간 이와 관련된 다른 가능성을 조사했다.그리고 젠 펀드 외에도 조건이 들어맞는 펀드가 몇 개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그는 이미 부하들을 보내 감시하게 했다.그러나 지금 해리의 말을 들은 후, 연정우는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자기야.”그때, 해리가 다정한 목소리로 연정우를 불렀다.그제야 연정우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왜 그래?”“계속 멍때리고 있길래 내가 좀 챙겨주려고 그러지.”연정우는 해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있는 성유리를 보는 순간, 연정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앞으로 나아가려던 그때, 다른 누군가가 먼저 움직였다.박한빈이었다.그는 성유리 앞에 무릎을 꿇듯 앉으며 다급하게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연정우는 그 모습을 보곤 헛웃음이 나왔다.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박한빈이 성유리를 그렇게까지 사랑하던 모습을 보아 왔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겠는가?처음부터 이건 철저히 자신을 속이기 위한 연극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연정우는 더 이상 이 상황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그래서 바로 몸을 돌려 병실을 떠나려던 때,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거 놔요!”“성유리!”시끄러운 병원 안에서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연정우는 그 대화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그는 즉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박한빈이 성유리의 손을 붙잡고 있었는데 마치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성유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이미 다른 여자가 있으시면서 왜 저까지 신경 쓰시는 건데요?”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박한빈을 노려보며 따지듯 물었다.“박한빈 씨가 제게 줬던 것들, 전 전혀 필요 없어요. 그리고... 더 이상 박한빈 씨가 보고 싶지도 않다고요!”그녀는 거칠게 박한빈을 밀어냈다.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유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놔요! 당장 내려놓으시라고요.”성유리가 있는 힘껏 저항하자 연정우는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그는 빠르게 다가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박한빈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기에 연정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야말로 살기가 띠어 있었다.“비켜.”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연정우 역시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유리는 당신과 함께 가는 걸 거부하는 것 같은데요?”그의 말은 단호했다.“굳이 제가 다시 상기시켜 줘야겠습니까? 여긴 금성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경거망동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연정우의 경고에
연정우는 성유리를 데리고 병원을 떠났다.하지만 그녀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졌다.차가 도로를 달리는 동안, 성유리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결국 연정우는 그녀를 다른 병원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진료를 마친 후, 의사가 성유리의 상태를 설명했다.연정우는 별다른 반응 없이 듣고 있었지만 시선은 줄곧 병상 위의 성유리에게 머물렀다.그 시각,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새하얀 얼굴, 질끈 다물어진 입술,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은 마치 한 송이 재스민 꽃처럼 보였다.그러나 그것이 과연 순수한 꽃인지, 아니면 치명적인 양귀비꽃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결국 연정우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성유리의 곁에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그녀가 연정우를 발견한 순간, 아주 잠깐 미묘한 실명의 감정이 스쳤다.연정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마워요.”성유리가 힘겹게 입을 열었는데 연정우는 여전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제 휴대폰 좀 볼 수 있을까요?”연정우는 성유리의 말에 여전히 침묵했지만 망설이지 않고 바로 휴대폰을 건넸다.성유리는 곧장 화면을 확인했지만 아무 연락도, 아무 메시지도 없었다.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그녀는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연정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한빈 씨랑 싸웠어?”성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군.”연정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들이 왜 싸웠는지, 어떤 감정이 오갔는지 그것이 연정우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절 못 믿으시는 거죠?”그때,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예상치 못한 질문에 연정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제가 박한빈 씨랑 짜고 연극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연정우는 재빨리 대답했다.“아니.”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고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성유리는 그 반응이 전혀 놀랍지 않았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