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은 심지어 박한빈이 진짜로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기 시작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되려 에릭에게 되물었다.“너는 예전부터 나한테 이런 삶 살라고 하지 않았어?”“근데 왜 이제 와서 막상 내가 즐기니까 갑자기 미쳤다고 하는 거지?”에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박한빈은 그를 한 번 쓱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으며 에릭에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앞쪽에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저 여자 봐봐, 어때?”...성유리는 호텔에서 혼자 3일이라는 시간을 보냈다.그동안 박한빈은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그녀는 혼자 밥을 먹었고 혼자 호텔 로비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그리고 결국 귀국을 앞당기기로 결심했다.휴대폰으로 항공권을 검색하며 예약하려던 순간, 누군가 성유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간.호텔 로비는 여전히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그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부드러운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성유리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하지만 남자가 앉는 순간, 마치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다 이내 서서히 주먹을 꽉 쥐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짧은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맞은편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 씨 맞으십니까?”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남자는 어두운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콧날 위에는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었다.무겁게 얹힌 한국어 발음에서는 외국 특유의 억양이 묻어났다.그리고 이내 성유리는 남자가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실망한 표정이 살짝 드러났다.남자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저희 보스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누구요? 박한빈 씨인가요?”성유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무언가 기대하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눈앞의 남자는 잠시 멍해졌다.그러더니 천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그리고 그 눈빛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확실한 확신.연정우는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았다.그래서 천천히 손을 들어 코끝까지 내려와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그제야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얼굴.수염이 조금 자랐고 눈가에는 그늘이 더 깊어졌다.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인상이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었다.그러나 연정우가 성유리를 바라볼 때만큼은 따뜻한 온기가 묻어났다.“유리 너... 날 기억하는구나?”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연정우는 그들의 마지막 만남을 잊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녀가 정말로 모든 걸 기억해 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알아본 것뿐인지.그런 연정우의 마음이 묘하게 불안하게 흔들리는 순간,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왜 연정우 씨가 여기 계시는 거죠?”연정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일하러 왔지.”“금성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었으니까.”그는 말하는 내내 계속해서 성유리의 반응을 살폈다.연정우의 대답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그리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민혁 씨...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연정우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자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성유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이내 주먹을 꽉 쥐었는데 어찌나 강한지 손가락 마디마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그럼 류수미 씨는...”연정우가 어렵게 말을 꺼내자 성유리가 담담히 대답했다.“미쳐버렸어요.”“지금은 정신병원에 계시고요.”“뭐?”연정우는 많이 놀란 듯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숙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리고 아주 잠깐 숨을 헐떡이다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 내 잘못이야.”“내가... 더 강했어야
“넌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야?”연정우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아, 아니요.”성유리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전 그냥 제가 당신을 끌어들인 것 같아서 그래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제가 연정우 씨랑 결혼할 뻔했던 그 일 때문에 박한빈 씨가 당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거잖아요.”“그 일만 아니었으면 연정우 씨는 아직도 국내에서 순조롭게 살고 있었을 테고 사씨 가문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그래서... 너무 미안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이미 잠식된 듯이 메말라 있었다.연정우는 한동안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것도 굉장히 즐겁다는 듯한 웃음.마치 무언가 정말 웃긴 걸 발견한 것처럼.“그래서?”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이제야 박한빈 씨의 본모습을 알았다는 거야?”“내가 전부터 말했잖아.”“그 사람은 애초부터 널 아껴주지 않았어.”“그게 아니었으면 네가 하늘이를 데리고 그렇게까지 급히 도망칠 필요가 있었겠어?”연정우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그리고 그때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너도 강제로 박한빈 씨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성유리. 너 기억나? 네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건... 바로 나였어.”“봐. 지금 박한빈 씨는 너한테 질려버렸잖아? 그 사진으로 충분히 설명이 안 돼?”“그러니까 유리야,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야.”연정우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그리고 그를 보는 성유리의 시선은 한없이 투명했다.연정우는 확신했다.이제야 그녀가 믿기 시작했다는걸.그때, 연정우가 다시 말했다.“나랑 같이 가자.”연정우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성유리는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안 돼요.”“왜 안 돼?”“하늘이가 아직 국내에 있어요. 그 애는 저희 아인데 만약...”“내가 데려오면 되잖아.”연정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넌 아이의 엄마야.”“하늘이가 얼마나 예민
에이미가 그 남자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첫 번째 만남에서도 남자는 여러 명 중에서 콕 집어 자신을 선택했다.그리고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더 중요한 건, 에이미가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액세서리다.그 남자가 직접 사준 것인데 몇백만 원에 달하는 고가의 장신구였다.남자는 그것을 사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그 순간, 에이미는 확신했다.이번에도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여러 명의 ‘사냥감’ 중에서 그 남자의 눈에 들게 된 것이라고 착각하며 몰래 기뻐했다.그렇지만 에이미는 남자의 관심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라온시의 상류층.에이미와 그녀의 동료들은 이미 사람들의 ‘등급’을 매겨둔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그 남자는 리스트에 없었다.하지만 암묵적으로 남자가 최상위급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그 사실은 남자를 대하는 에릭과 다른 남자들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그래서 에이미는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기회를 붙잡았다.그 선택은 결국 틀리지 않았다.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질투, 그리고 선망.독특한 디자인의 슈퍼카가 고속도로 위를 질주했다.엔진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고 에이미의 기분도 한층 더 들떴다.그러면서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에이미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손을 잡았지만 남자는 즉시 손을 뿌리쳤다.그의 움직임은 매우 빠르고 단호했다.마치 에이미의 손이 오염이라도 된 것처럼.순간, 에이미의 몸이 굳었다.그리고 문득 남자는 신체 접촉을 극도로 꺼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지난번 호텔에서도 마찬가지였다.에이미를 방으로 데려가 놓고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떠나지도 못하게 만들었기에 그녀는 결국 그날 밤 소파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그리고 지금, 남자는 에이미의 손조차 잡으려 하지 않았다.에이미는 생각했다.혹시 남자에게 무언가 숨겨진 사정이 있는 걸까?그래서 남자는 항상 파티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여자들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었는지,
에이미는 아마 자신이 하고 있던 추측이 남자에게 들킨 거라고 짐작했다.필경 이 남자가 속한 세계에서는 사람 하나 사라지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터였다.‘그럼 지금 이 사람이 나를 없애려는 건가?’에이미는 알았다.그들에게 자신 같은 존재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걸.그래서 만약 상대의 기분이 나쁘다면 자신 같은 사람 하나쯤 없애버리는 것도 아무렇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이 바짝 말라 본능적으로 혀로 입술을 훑었다.뭔가 변명을 해야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차에서 내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름한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뭐지?’에이미는 순간 멍해졌으나 이내 이런 고민이 생겼다.‘따라가야 할까?’‘그런데 만약 저 사람이 진짜로 나를 해치려 한다면 어떡하지?’에이미 같은 사람은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만약 그런 뜻이 아니라면? 이렇게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쳐버리면 어떡하지?’‘내가 얼마나 힘들게 이 남자를 잡았는데!’에이미가 고민하는 시간 동안 남자는 이미 여관 안으로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그래서 에이미는 더는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무조건 따라가야 한다는 확신이 서자 그녀는 즉시 가방을 움켜쥐고 그의 뒤를 쫓아 여관으로 들어섰다.남자는 이곳이 익숙한 듯했다.프런트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쪽으로 걸어갔다.그러자 에이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이미 예약된 방이 있다는 거네?’그렇다면 왜 이런 곳을 선택한 거지?자신이 생각하는 남자의 신분이라면 굳이 이런 허름한 곳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에이미에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었다.중요한 건 바로 지금 자신이 이 남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설령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남자의 곁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남자가 자신을 죽일 게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 가치가 있을 테니까.에이미가 결심하는 순간, 남자가 방문을
방금 보낸 문자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보낸 것으로 그녀가 예약한 여관 주소와 방 번호가 적혀 있었다.이 며칠 동안 그들은 실제로 만나지 않았고 전화도 하지 않았다. 성유리는 연정우가 그녀의 주변에 사람을 배치해 지켜보고 있을까 봐 걱정했다.그래서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으면 계획이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믿어버릴 정도로 연기를 하기로 했다.성유리는 연정우가 자기 자신을 고귀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자부심은 어렸을 때부터 받은 가족의 교육과 외부에 보여주는 이미지에서 나왔다.박한빈과는 달리 연정우는 외부 사람들의 평가를 매우 신경 쓴다. 비록 그가 내면은 차갑고 이기적이라 해도 겉으로는 온화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박한빈은 외부에서 하는 평가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아무리 공공장소라고 해도 누군가를 극도로 싫어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연기를 하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다.사람들 앞에서 싫어하는 사람에게 망신을 주지 않는다면 정말 신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냉철한 인간이었다.성유리는 연정우가 만약 ‘영웅’이 될 기회를 얻으면 주저 없이 그 기회를 잡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그래서 그녀는 그 기회를 주기로 했다.지금 그녀는 ‘영웅’이 구해줘야 할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역할은 성유리만이 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녀는 연정우가 갈망했던 사람이었고 연정우가 여러 번 실패한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성유리 때문에 연정우와 박한빈은 적이 되었고 박한빈의 손에 의해 계획한 모든 일이 여러 번 실패로 돌아간 적도 있다.그래서 성유리는 연정우에게 기회를 주면 반드시 그것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결국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고 연정우도 성유리에게서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박한빈은 처음부터 성유리가 연정우를 끌어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이러는 걸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의 안전을 암암리에 지키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 100% 안전을 보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건 저도 알아요.”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뭔가 대답하려는 찰나,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정말 그렇게 간단했다면 애초에 박한빈 씨도 제가 이런 방법으로 연정우 씨를 끌어내는 걸 허락하지도 않았겠죠.”“여긴 금성이 아니에요. 더 중요한 건... 지금 한빈 씨 곁에 있는 사람들 다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한테 한빈 씨와 함께 연정우 씨를 찾아서 완전히 무너뜨리게끔 도와달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요.”“그 사람이 먼저 당신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죠.”“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연정우 씨도 분명 극도로 신중해질 거예요. 어쩌면 몇 년, 아니... 십 년이 넘도록 모습을 감출 수도 있어요.”성유리가 진지하게 말하는 동안, 박한빈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네 생각엔 내가 기다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한빈 씨는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사씨 가문의 일... 박한빈 씨는 늘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 속으로 엄청 신경 쓰고 있다는 거 다 알아요.”“만약 제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분명 다른 방법을 찾았겠죠? 그리고 한빈 씨가 생각한 방법들은 제 방식보다 훨씬 더 위험할 거고요.”“그러니까 결국 제가 선택한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거예요.”“그런 길을 네가 직접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박한빈이 물으며 자신의 허리에 감긴 성유리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세게 붙잡으며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봤다.“박한빈 씨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도 뭔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제가 말했잖아요. 전 더 이상 비겁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저희 부부잖아요. 무슨 일이든 함께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네가 말하는 감당이란 게 연정우 곁으로 가는 거야? 그
“저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예상치 못한 물음에 순간 멍해졌다가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저도 제 자신을 잘 지킬 수 있다는 걸 믿지 않는 거예요? 아니면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지를 의심하는 거예요? 둘 다 아니면... 그냥 제가 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당연히 그런 건 아니야.”박한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히 부정했지만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도대체 왜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는 거지? 내가 만약 널 짐으로 생각했다면 왜 여기까지 데려왔겠어?”“아니라면 도대체 왜...”“너한테 그 어떤 위험도 닥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린 충분히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잖아. 안 그래?”“하지만 지금 이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잖아요. 아니에요?”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성유리는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봐요. 박한빈 씨도 그걸 인정하시잖아요. 게다가 한빈 씨한테 주어진 시간도 별로 없어요. 그러니 이 상황에서 저희가 가장 효율적인 길을 선택하는 게 맞는 거 아니에요?”“아니, 틀려.”박한빈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하지만 정확히 뭐가 틀린 건지, 정작 그도 설명하지 못했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과 눈을 맞춘 채 잠시 조용히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이번엔 박한빈도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성유리가 내민 이 작은 타협의 손길을 지금 거절하면 정말로 그녀는 자신을 붙잡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그러면 결국 박한빈이 다시 스스로 성유리를 찾아가 어르고 달래야 할 것이다.아까처럼.그는 확신했다.만약 자신이 지금 나가버린다면 성유리는 절대 자신을 붙잡지 않을 거라고.“그럼 넌 완전히 마음을 굳힌 거야?”박한빈이 물었다.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만으로도 모든 걸 알 수 있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래. 잘 알겠어.”“제가 잘할게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